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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김사인 - 늦가을 늦가을 - 김사인 그 여자 고달픈 사랑이 아파 나는 우네 불혹을 넘어 손마디는 굵어지고 근심에 지쳐 얼굴도 무너졌네 사랑은 늦가을 스산한 어스름으로 밤나무 밑에 숨어기다리는 것 술 취한 무리에 섞여 언제나 사내는 비틀비틀 지나가는 것 젖어드는 오한 다잡아 안고 그 걸음 저만치 좇아 주춤주춤 흰고무신을 옮겨보는 것 적막천지 한밤중에 깨어 앉아 그 여자 머리를 감네 올 사람도 갈 사람도 없는 흐른 불 아래 제 손만 가만가만 만져보네 * 요즘 시인들은 왜 달에 대한 멋진 시 하나 토해내지 않는 건지. 제가 가장 마지막에 주목했던 소설가는 "마루야마 겐지"였습니다. 이 말은 최근엔 소설을 읽지 않는 제 현실의 문제이죠. 어쨌거나 그의 소설 는 참 특이한 소설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소설을 읽고 난 뒤 낡은 오.. 더보기
김수영 - 강가에서 강가에서 - 김수영 저이는 나보다 여유가 있다 저이는 나보다도 가난하게 보이는데 저이는 우리집을 찾아와서 산보를 청한다 강가에 가서 돌아갈 차비만 남겨놓고 술을 사준다 아니 돌아갈 차비까지 다 마셨나 보다 식구가 나보다도 일곱 식구나 더 많다는데 일요일이면 빼지 않고 강으로 투망을 하러 나온다고 한다 그리고 반드시 4킬로가량을 걷는다고 한다 죽은 고기처럼 혈색 없는 나를 보고 얼마전에는 애 업은 여자하고 오입을 했다고 한다 초저녁에 두 번 새벽에 한 번 그러니 아직도 늙지 않지 않았느냐고 한다 그래도 추탕을 먹으면서 나보다도 더 땀을 흘리더라만 신문지로 얼굴을 씻으면서 나보고도 산보를 하라고 자꾸 권한다 그는 나보다도 가난해 보이는데 남방셔츠 밑에는 바지에 혁대도 매지 않았는데 그는 나보다도 가난해 보이.. 더보기
마종기 - 證例6 證例6 : 앤 선더스 아가에게 - 마종기 내가 한 아가의 아빠가 되기 전까지는 환자는 늙으나 어리나 환자였고, 내가 아빠가 되기 전까지는 나는 기계처럼 치료하고 그 울음에 보이지 않는 신경질을 내고, 내가 하루하루 크는 귀여운 아가의 아빠가 되기 전까지는 내 같잖은 의사의 눈에서는 연민의 작은 꽃 한 번 몽우리지지 않았지. 가슴뼈 속에 대못 같은 바늘을 꽂아 비로소 오래 살지 못하는 병을 진단한 뒤에 나는 네 병실을 겉돌고, 열기 오른 뺨으로 네가 손짓할 때 나는 또다시 망연한 나그네가 되었지. 그리고 어느 날 엉뚱한 내 팔에 안겨 숨질 때, 나는 드디어 귀엽게 살아 있는 너를 보았다. 아, 이제 아프게 몽우리졌다. 네 아픔이 되어 낮에도 밤에도 속삭이는구나. 미워하지 마라 아가야. 이 땅의 한곳에서 죽.. 더보기
오세영 - 비행운 비행운(飛行雲) - 오세영 한낮 뇌우(雷雨)를 동반한 천둥번개로 하늘 한 모서리가 조금 찢어진 모양 대기 중 산소가 샐라 긴급 발진 제트기 한 대가 재빨리 날아오르더니 천을 덧 대 바늘로 정교히 박음질 한다. 노을에 비껴 하얀 실밥이 더 선명해 보이는 한줄기 긴 비행운(飛行雲) 출처 : 『황해문화』, 2009년 봄호(통권63호) * 42년생 시인에게 천진(天眞)하단 말은 어폐가 있는 말이지만, 갈수록 오세영 시인의 시가 천진해진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분명한 건 나이가 들면서 더욱 천진해지는 시인들이 있으며 그 모습이 아름답게 여겨진다는 것이다. 시인이기에 그럴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이번에 오세영 선생의 시(詩) 3편을 받았는데 모두 비슷한 느낌이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시인이었기에 당신의 시를 받.. 더보기
안현미 - 여자비 여자비 - 안현미 아마존 사람들은 하루 종일 내리는 비를 여자비라고 한다 여자들만이 그렇게 울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울지 마 울지 마 하면서 우는 아이보다 더 길게 울던 소리 오래 전 동냥젖을 빌어먹던 여자에게서 나던 소리 울지 마 울지 마 하면서 젖 먹는 아이보다 더 길게 우는 소리 오래 전 동냥젖을 빌어먹던 여자의 목메이는 소리 * 사는 게 비루하다고 여기다가도 어제보다는 오늘이 그래도 좀 낫다 싶어 한숨을 푹 내쉰다 살아야 할 날이 어제보다 하루 줄었으니 더보기
신경림 - 갈구렁달 갈구렁달 - 신경림 지금쯤 물거리 한 짐 해놓고 냇가에 앉아 저녁놀을 바라볼 시간...... 시골에서 내몰리고 서울에서도 떠밀려 벌판에 버려진 사람들에겐 옛날밖에 없다 지금쯤 아이들 신작로에 몰려 갈갬질치며 고추잠자리 잡을 시간......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목소리로 외쳐대고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몸짓으로 발버둥치다 지친 다리 끄는 오르막에서 바라보면 너덜대는 지붕 위에 갈구렁달이 걸렸구나 시들고 찌든 우리들의 얼굴이 걸렸구나 * 갈구렁달 : 황해도, 충청도 바닷가에서 쪽박같이 쪼그라든 달을 말함. ** 어릴 적엔 세상 모든 걸 다 아는 것 같고, 마음에 들지 않는 풍경들을 죄다 뜯어 고치겠다는, 아니 고칠 수 있을 거란 희망을 품었었다. 그러다 언제인가부터 싫든 좋든 나도 그 세상 풍경의 일부란 사실.. 더보기
윤성학 - 내외 내외 - 윤성학 결혼 전 내 여자와 산에 오른 적이 있다 조붓한 산길을 오붓이 오르다가 그녀가 나를 보채기 시작했는데 산길에서 만난 요의(尿意)는 아무래도 남자보다는 여자에게 가혹한 모양이었다 결국 내가 이끄는 대로 산길을 벗어나 숲속으로 따라 들어왔다 어딘가 자신을 가릴 곳을 찾다가 적당한 바위틈을 찾아 몸을 숨겼다 나를 바위 뒤편에 세워둔 채 거기 있어 이리 오면 안돼 아니 너무 멀리 가지 말고 안돼 딱 거기 서서 누가 오나 봐봐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곳에 서서 그녀가 감추고 싶은 곳을 나는 들여다보고 싶고 그녀가 보여줄 수 없으면서도 아예 멀리 가는 것을 바라지는 않고 그 거리, 1cm도 멀어지거나 가까워지지 않는 그 간극 바위를 사이에 두고 세상의 안팎이 시원하게 內通하기 적당한 거리 .. 더보기
김중식 - 木瓜 木瓜 - 김중식 사랑이 고통일지라도 우리가 고통을 사랑하는 까닭은 고통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감내하는 까닭은 몸이 말라 비틀어지고 영혼이 꺼멓게 탈진할수록 꽃피우지 못하는 모과가 꽃보다 지속적인 냄새를 피우기 때문이다 꽃피우지 못하는 모과가 꽃보다 집요한 냄새를 피우기까지 우리의 사랑은 의지이다 태풍이 불어와도 떨어지지 않는 모과 가느다란 가지 끝이라도 끝까지 물고늘어지는 의지 는 사랑이다 오, 가난에 찌든 모과여 亡身의 사랑이여! * '사람의 발목을 잡는 것은 절망이 아니라 체념, 사람을 앞으로 가게 만드는 것은 희망이 아니라 의지' 사랑이 이성의 일이 아니란 것은 이제 누구나 다 아는 진리 같다. 잘난 척하기 좋아하는 이들은 사랑도 호르몬의 작용이라 길어야 3년이란다. 사랑이 이성의 일이 아니든, 호르.. 더보기
이재무 - 저 못된 것들 저 못된 것들 - 이재무 저 환장하게 빛나는 햇살 나를 꼬드기네 어깨에 둘러멘 가방 그만 내려놓고 오는 차 아무거나 잡아타라네 저 도화지처럼 푸르고 하얗고 높은 하늘 나를 충동질하네 멀쩡한 아내 버리고 젊은 새 여자 얻어 살림을 차려보라네 저 못된 것들 좀 보소 흐르는 냇물 시켜 가지 밖으로 얼굴 내민 연초록 시켜 지갑 속 명함을 버리라네 기어이 문제아가 되라 하네 * 내가 나이를 먹고 있다는 걸 느끼는 순간이 있다. 노래방에 갔을 때 더이상 내가 부르는 노래들이 신곡 코너가 아닌 '가나다'순 어딘가를 뒤져보아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그리고 가끔 어쩌다 알바생들이랑 일을 하게 되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이 친구들이 88올림픽을 본 적이 없는 세대란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다. 90년대에 태어난 아이들.. 더보기
천양희 - 그 사람의 손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 천양희 구두 닦는 사람의 손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구두 끝을 보면 검은 것에서도 빛이 난다 흰 것만이 빛나는 것은 아니다 창문 닦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창문 끝을 보면 비누거품 속에서도 빛이 난다 맑은 것만이 빛나는 것은 아니다 청소하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길 끝을 보면 쓰레기 속에서도 빛이 난다 깨끗한 것만이 빛나는 것은 아니다 마음 닦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마음 끝을 보면 보이지 않는 것에서도 빛이 난다 보이는 빛만이 빛은 아니다 닦는 것은 빛을 내는 일 성자가 된 청소부는 청소를 하면서도 성자이며 성자이면서도 청소를 한다 * 천양희 시인의 시를 읽다보면 '은은하다'는 표현이 절로 떠오른다. 스테인레스처럼 녹 하나 슬지 않는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