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빔툰/ 홍승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2005)
어느 때부터인가 한껏 엄숙하기만 했던 우리 사회의 중앙일간지들이 이제 시사만평뿐만 아니라 만화(코믹스)에도 조금씩 공간을 할애하기 시작했고, 이들 언론사들이 발간하는 다양한 매체에도 만화가 조금씩 터를 잡아나가기 시작했다. 환영할 만한 일이고, 도리어 때늦은 감마저 있지만 그 자체로 좋은 현상이다. 이것이 만화가 자신의 스타성 덕분이든 파워풀한 대중 매체의 영향력 덕분이든 간에 점차 만화가 자신이 스타로 떠오르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아직까지는 소수에 불과하고, 굳이 만화가가 스타가 되어야 할 이유 같은 것은 없지만 가끔 자신의 작품을 정기적으로 게재해주는 매체의 정치적 자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해, 본래 가지고 있던 미덕을 지키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는 작가들의 모습도 간혹 눈에 띄곤 한다.
홍승우의 경우, 외견상으로는 특별히 정치적 이슈를 다루는 만화가라기 보다는 일상의 여러 다양한 모습과 에피소드를 다룬 <비빔툰>을 선보여 대중의 호응을 얻어왔는데,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홍승우야말로 가장 정치적인 작가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가 다루는 일상의 세계야 말로 여성주의자들과 모든 진보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가장 치열한 정치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그는 때때로 가장 비정치적인 모습으로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적 분업을 일상화하고 있는 우리들 가정의 가장 깊은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정치현상들을 일상의 외부로 끄집어내고 있기도 하다. 그것도 매우 재미있게 말이다.
이 작품집이 우리 집에 들어온 것은 예전에 집 사람이 1권을 구입해서 들어오면서 시작되었지만 사실 그의 작품들은 이전부터 익숙해 있었다(현재 6권까지 나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여기에선 1권만 올렸지만 "야야툰"을 포함해 전권 모두 가지고 있다). 그가 우리 일상에 깊이 들어오게 된 것은 1998년 <한겨레리빙>에 "정보통사람들"을 연재하면서 부터인데, 그의 틈입이 워낙 자연스럽게 이루어졌기 때문인지 몰라도 나는 스스로 인식하기도 전에 어느새 그의 가족들(활미 씨와 다운이 등)과 한솥밥 식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후 <한겨레리빙>은 여러 가지 한계를 안고 언제 사라졌는지도 모르게 사라졌지만 홍승우와 그의 가족들은 아직도 우리 곁에 오래도록 머물고 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어느덧 그의 가족들과 함께 한 시간들도 상당한 세월이 되었다.
지금 내 나이쯤 된 사람들은 오래전 KBS에서 방영해주었던 <월튼네 사람들>과 MBC에서 방영되었던 <초원의 집>을 기억할지 모르겠다. 좋았던 시절의 미국을 회상하게 만드는 전형적인 홈드라마였던 이 시리즈들은 국내에서도 많은 인기를 누리며 채널을 고정시켰고, 나중에 등장한 MBC <전원일기>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월튼네 사람들>, <초원의 집>, <전원일기> 등의 홈드라마가 과거의 좋았던 대가족 시절을 회상하게 만드는 드라마와 내용이었다면, 홍승우의 <비빔툰>이 지니고 있는 매력 중 한 가지는 이 작품이 다루고 있는 가족 이야기가 지닌 현재성 때문이다.
홍승우의 <비빔툰>도 언젠가는 가족드라마처럼 과거의 일이 될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지금은 핵가족화된 우리들 삶의 구체적 현실을 가까이에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판 홈드라마라 할 수 있다. 만약 이 작품이 단순히 한 남녀가 서로 만나서 사랑하고, 부부가 되어 가정을 이루고, 장차 아이를 낳아 양육하고, 교육시키는 과정에서 드러난 여러가지 에피소드만을 다루고 있다면 <비빔툰>의 매력은 소소한 일상사를 기록한 일기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홍승우의 <비빔툰>이 지니고 있는 또 한 가지의 매력은 이 작품이 정치적으로 매우 건강한 고민들을 계몽이 아닌 자연스러운 묘사의 형태로 담아내고 있으며, 홍승우 부부와 그 가족이 함께 성장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홍승우의 <비빔툰>은 어른을 위한 성장만화이기도 하다.
이처럼 <비빔툰>은 우리들 모두 익숙한 가족(물론 이것이 반드시 정상가족의 형태이냐 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의 성장사와 일상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소재를 그만의 독특한 만화체를 빌어 엿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아마도 그런 탓에 아침도 못 챙겨먹는 인간이 댓바람부터 만화책을 읽으며 한 인간이자 여성, 나의 아내와 이제 막 가족을 이룬 나의 생활들을 곰곰이 씹어보게 되었다. 울 마눌이 들으면 섭섭하겠지만 나는 가끔 내 집에 들어와 어쩌다보니 함께 살게 된 그녀를(반대로 그녀 역시 그러하리라 생각하지만) 관찰대상 목록 1호로 등재해놓고 있다. 물론 최근엔 2호로 새롭고 참신한 딸아이가 태어났기 때문에 2호로 밀려나긴 했다.
- <비빔툰>은 가족의 탄생과 성장 과정과 함께 자라고 있다. 만약 내게 아이가 없었다면 이 장면이 저처럼 가슴 절절하게 공감으로 다가오진 못했을 것 같다.
나는 홍승우의 작품들을 보면서 본의는 아니지만 가끔 김규항(선생)의 글들을 함께 떠올리게 되곤 하는데, 아마도 그 이유 중 하나는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인데, 극중 주인공의 모습이 김규항과 외모상 좀 닮아보인다고 느끼는 탓이 크다. 그리고 다른 한 측면에선 아마도 김규항의 글이 주는 감동의 원천이나 그가 주장하는 바의 삶이라면 어쩌면 이 만화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과 제법 흡사하지 않을까 하는 추측 때문이기도 하다. 실생활에서 이와 같이 사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라며 롤모델을 찾아본 나의 결론이 김규항이었던 것 같다. 주변에서 제법 괜찮아 보이는 남정네들을 보고 있노라면 과연 이 사람들은 집에서도 괜찮은 남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길 때가 있는데, 그럴 경우 한 번쯤 생각해보게 되는 인물이란 뜻이기도 하다.
"나는 정말 좋은 남편이 되고 싶다. 나는 정말 좋은 아비가 되고 싶다. 그것도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여성주의적으로도..."
만약 누군가 앞서 말한 바대로 실제의 삶에서도 살고 싶다면 이런 결심에 대한 최종심급은 누가 뭐래도 본인의 아내일 수밖에 없는데, 내가 알기로 자신의 아내에게 최고의 찬사를 받았던 분은 "역사 앞에서(창작과비평사)"를 저술하고 한국전쟁 기간 중 세상을 떠난 故 김성칠 교수의 사모님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가끔 인터넷이나 여러 매체들을 통해 여성주의자들과의 논쟁 혹은 일상의 가까운 현장들에서 일상다반사로 벌어지는 여러 소소하지만 중요한 이슈들을 논할 때, 남성 논객들은 일종의 알리바이처럼 자신이 얼마나 괜찮은 남자인지 먼저 언급해야 할 것 같은 죄책감 같은 것을 품게 되는데, 때때로 이런 부분이 조금 지나치거나 평소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주장을 펼칠 수밖에 없는 논개들 입장에서 주장과 실천의 일치문제는 상당히 까다로운 문제이기도 하다(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여성주의자라 생각하지 않으며 진보적이라면 나의 입장한 부도덕한 진보주의자이자 쾌락주의자라고 규정하곤 한다. 어쩌면 이것조차 방패막이일 뿐이지만).
그런 맥락에서 홍승우의 <비빔툰>을 보고 있노라면 한 사람의 남성으로, 남편으로, 아버지로서 그가 품었음 직한 고민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게 되는데, 때때로 그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은 남자가 아닌가하며 홍승우에 대한 연모(?)의 정을 품게 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가끔씩 나는 그의 만화를 보면서 피식피식 웃게 되는데 그 이유는 물론 그의 만화가 우선 재미있기 때문이지 부차적인 이유는 바로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과연 집에서도 괜찮은 남자일까 하는 의문 때문이기도 하다. 간혹 만나게 되는 여성주의적이고, 아내에 대한 사랑도 지극하신 분들의 글을 보면서 그 분들의 아내와 삼자 대면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것이다. 불량(온)하게 시리....
- 내 신혼 시절의 어느 휴일 아침 나는 아직 잠들어있는 아내를 깨우지 않기 위해 살금살금 일어나 갓 구운 토스트와 에그프라이(이럴 땐 달걀후라이가 아니라 꼭 '에그 프라이'라고 말해줘야 한다라고 했더니, 그건 얼마전 모 국회의원님이 '섹스 프리' 특구를 만들자고 했던 것처럼 잘못된 영어라고 지적해주신다. "프라이드 에그"란다. 에그그~) 그리고 커피 한 잔을 쟁반에 받쳐들고 아내가 잠들어 있는 침대로 갔다. 내 딴엔 호텔식 룸서비스를 한 것인데, 기껏 다 먹은 아내는 트림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기억 나지 않지만... '고맙다'는 말 대신 "이제 밥 먹으러 가자"고 한 마디를 한 뒤 다시 누웠었다. 결혼이 재미있는 건 기대했던 바와 항상 다른 반응이 돌아오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같은 남정네로서 내가 느끼는 소감 중 하나는 분명 그런 것이다. 과연(홍 선생의 아내인 만화 속 아내인지 진짜 아내의 본명이신지는 몰라도) 활미 씨도 당신의 만화에 모두 공감하고 있기는 한 게요? 혹시 활미 씨는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의 뒷통수에 대고 감자를 먹이고 있는 건 아닐까하는 의뭉스러운 웃음 말이다.
어쨌거나 같은 남정네로서 나 같은 남자들을 위해 농담반 진담반의 변명을 곁들이자면 비록 '결혼'과 '가정'이란 제도와 공간이 남성들에게 좀더 유리한 체계임에는 틀림없지만 때때로 속좁은 숫컷으로서 어쩌면 이건 암컷들이 숫컷의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해 구상해낸 고도의 매트릭스적 시스템 덕분에 우리 모두 공멸하는 길을 가고 있는 건 아니냔 생각도 가끔 든다는 것이다(그러니까 여자들이 힘들다고 말하는 건 어쩌면 이 체제를 잘 유지하기 위한 술수, 즉 엄살이란 뜻?). 또 한 가지는 밖에서는 여성주의적 인식을 가지고 있는 양 큰소리 치기는 쉬워도(이건 '날' 포함해서) 막상 가정에서 아내와 가사를 분담하고, 육아에도 신경쓰는 자상한 남편과 아버지로 살기에 남자들의 삶 역시 생각 이상으로 퍽퍽한 것이 현실이란 뜻이기도 하다.
시몬 보봐르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남성중심적인 세상에는 남성과 여성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여성이 존재할 뿐이며 여성이 인간적으로 살고 싶다고 말하는 건 남성이 되고 싶다는 뜻과 동의어로 받아들여지는 세상이지만 그 세상이 여성보다 조금 덜 심할 뿐이지 남성들에게도 인간으로서 견디기 가혹한 조건이란 점에선 매일반이다(물론 이것이 계급적 관점이란 것을 부인할 순 없다). 물론 여기엔 몇 가지 중요한 현실적 조건들이 빠져있기는 하지만(구태여 이런 말을 해야 하는 것도 남성으로서의 죄책감과 미안한 마음에 드는 알리바이를 의식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인식 자체가 특별히 못난 일부 남성들만의 인식은 아닐 것이라는 것이다. 결국 이와 같은 문제는 한 개인이나 가정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로 바라보고, 사회적으로 해결하지 않고서는 결코 풀리지 않을 문제이기도 하다.
물론 홍승우와 김규항을 대비시켜 보는 다른 이유 중 하나는 두 사람 모두, 한 사람은 글로, 다른 한 사람은 만화로 보여주는 매체적 힘의 근원이 이들의 솔직함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인데, 내가 파악하는 한 홍승우와 김규항의 공통된 장점은 솔직하다는 데 있다. 다만 나는 정직과 솔직이란 단어를 구분해서 사용하는 편인데, 정직이란 자신이 불이익을 당할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고백하는 것이고, 솔직이란 자신을 있는 대로 드러내지만 그 정도가 정직에 비해선 한 단계 낮은 것을 의미한다. 솔직하지만 정직하지 않을 수는 있어도 정직한 데 솔직하지 않을 수는 없다는 정도로 이해하면 될 듯 싶다.
- 내가 개인적으로 손꼽는 비빔툰 최고의 걸작 중 하나. 아내에게 그렇다는 이야기를 하며 이 작품을 보여주니 섭섭해 했다(예전부터 아내는 다시 태어나면 절대로 나 같은 남자랑 살지 않겠다고 한 적이 있었던가?).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이후 인생에서 맞닥뜨리게 될 가장 진지한 질문 중 하나가 "다시 태어나도 나랑 결혼할 거야?"란 것이다.
때때로 김규항의 글들을 읽노라면 그가 늘 너무나 당연한(아마도 이것은 그가 생각하고 있는 상식의 정도와 내가 생각하는 상식이 부합하는 탓도 있지만) 이야기들을 하고 있고, 읽기에 따라서는 매우 원론적인 수준의 이야기들을 그가 일상에 접했다고 하는, 혹은 접했음 직한 이야기들과 잘 버무려 이야기하기 때문에 글의 힘이 발생한다고 할 텐데, 때때로 그 당연함조차 받아들이지 못하는 현실이 도리어 그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그 지극한 당연논리조차 당연하게 발언하고 옮길 수 있는 인간(상징자본가)들이 태부족한 상황이라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다만 한 가지 홍승우가 보이는 인간적인 솔직함과 김규항의 경우는 다소 차이가 있다.
내가 읽은 홍승우의 솔직함은 자신의 약한 면모를 자기 내부를 겨냥해 투사하는 방식의 말 걸기를 하고 있는 반면, 어찌보면 자학적인 개그를 구사함으로써 그것을 재미로 환치시키는데 반해 김규항의 경우에 드러나는 솔직함은 대체로 외부를 겨냥하고 있을 때가 많다. 아마도 그가 '계몽적'으로 비춰지는 이유는 거기에서 비롯되는 것일 게다. 물론 두 사람의 위치와 역할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의 전제로 삼아야 한다(홍승우의 작품 세계를 비쳐보는 한 방식으로 작품과 사실상 무관한 김규항을 끌어들이긴 했지만 혹시 결례를 범한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 홍승우의 <비빔툰>이 지닌 작품적인 한계는 결국 이것이 특정 부부와 가족의 생애사에 국한되고, 비슷한 평형대 아파트 주민들의 이야기를 넘어서기 어렵다는 것인데, 그는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때때로 가상의 인물을 등장시키거나 주변의 인물들을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연을 확장하기는 일정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을 듯 싶다.
어쨌든 남녀는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아니면 이해하면서도 이해하지 못한 척하기로 결심한 채 수십만년 동안 서로를 길들이기 위해 노력하면서 실패하고 있는 기이한 동물들의 관계에서 오늘도 홍승우 가족은 여느 집들이 대개는 그런 것처럼 아이들에게 치이고, 부부에게 서로 실망하고 아옹다옹하면서 우리들에게 가족사를 노출시키고 있다. 남녀가 만나서 함께 사는 것을 부부라 하지만 부부는 과거의 관념으로는 가족이 아니라 그저 부부일 뿐이라고 한다. 부부가 가족으로 탄생하기 위해서는 자녀가 생겨야 한다고 하는데, 과연 이것이 오늘날의 관점에도 합당한 가족의 개념인지는 여전히 궁리해봐야 할 대목이다.
사실 '가족'이란 형태만큼 인류의 역사를 두고 우리에게 수많은 이야깃거리를 던져주는 인간관계도 없을 터인데 우리는 가족의 내밀한 생애사를 더듬어 본 작품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특히 만화에서는 말이다. 홍승우의 만화 <비빔툰>이 지닌 가장 큰 매력 중 한 가지는 이처럼 남들에게 쉽사리 공개되지 않았고, 공개될 수 없었던 한 가족의 생애사와 그 안에서 벌어지는 부부, 육아, 교육 등 다양한 분야의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한 편으론 유쾌하지만 결코 간단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그의 작품 명대로 잘 비벼내고 있다는 것에 있다. 더불어 활미 씨 내외가 김광석의 어느 노부부의 그것처럼 백년해로하면서 우리들 앞에 한 가족의 생애사를 기록하는 훌륭한 작품으로 남게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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