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램덩크』 - 이노우에 다케히코(TAKEHIKO INOUE) | 대원씨아이
1994년의 어느 겨울, 나는 세 명의 친구와 함께 롯데월드로부터 올림픽공원까지 걸었다. 우리 세 사람은 같은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87년 이후 세 사람이 살아간 삶의 방향은 각기 달랐다. 그 무렵 TV에선 『마지막 승부』라는 드라마가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었고, 갓 발견된 "심은하"라는 앳된 얼굴의 탤런트는 장안의 뭇 남성들을 설레게 했다. 『마지막 승부』가 방영되던 시절. 나와 그 두 친구는 뭔가 쓸쓸했다. 이제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왔지만 무엇도 확실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 나이에 확실한 무엇이 있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확실치 않은 것 가운데는 오랫동안 신념으로 삼아왔던 무엇이 사라진 뒤에 오는 그런 공황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떤 것들은 반드시 그 나이 때에 통과해내지 않으면 평생 동안 느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10대의 첫사랑과 40대에 경험하는 첫사랑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듯 TV드라마 『마지막 승부』는 우리에겐 그런 부류에 속하는 것이었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한 10년쯤 전에) 케이블TV를 통해 재방송되는 드라마를 보면서 그때는 이 드라마를 왜 그리 열심히 보았는지 의아해지기까지 했다. 내가 『마지막 승부』에 열심이었던 시절, 내 동생들은 한참 어떤 만화에 빠져있었다. 『슬램덩크』,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대표작이자 사실상 장편만화 데뷔작이기도 했던 이 만화는 1990년 슈에이사(集英社)의 "소년점프"에 연재되면서 오늘날까지 1억 부 가까운 판매고를 올린 만화다. 물론 우리 집에도 한 질이 있는데 완전판은 아니다(완전판은 만화방에서 보았을 뿐이다).
완전판과 구판의 가장 큰 차이는 일단 판형과 좀 더 좋아진 지질이다. 그 덕분에 구판에선 확인할 수 없었던 작가의 섬세한 터치와 선들이 제법 잘 드러난다. 물론 이전의 구판에 비해 완전판이란 말이 정확히 어떻게 달라졌고, 무엇이 좋아졌다고 말하려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최소한 애장판이라고 부를 만한 수준은 된다.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슬램덩크』는 여러 면에서 한 세대 전에 히트했던 치바 데츠야의 『내일의 조』와 비교할 만하다. 두 작품 모두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는 점, 스포츠 만화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또 한 가지 특기할 점은 두 작품이 지닌 시간 차이다. 1968년의 『내일의 조』와 1990년의 『슬램덩크』는 그 시간차만큼이나 정확하게, 당대 사회의 변천, 젊은 세대의 의식 변화를 견주어가며 살펴볼 만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1970년대 초 일본항공(JAL) 요도호 납치사건은 일본 적군파의 최후를 알리는 사건이었다. 그 시대를 말하는 이들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는데, 당시 일본의 전공투 세대가 "우리는 <내일의 조>다"라고 스스로를 느끼고 표현했던 것만큼은 사실인 듯하다. 내가 읽은 당시 일본의 문화사, 청년운동에 대한 책자마다 한 쪽은 요도호 납치범이, 다른 한 쪽은 와세다 대학 강당을 점거한 전공투 학생들이 벽에 쓴 낙서에서 나온 말이라고도 한다. 어느 쪽이든 일본 내에서 궁지에 몰린 학생 운동 세력들이 스스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표현으로 치바 데츠야의 『내일의 조』를 택한 것이다. 제목엔 ‘내일’의 조였으나 만화 속 주인공에게도 일본의 전공투 세대들에게도 내일은 없었다. 그에 비해 1990년대의 대표작 『슬램덩크』는 탈이념 시대의 아우라를 잘 반영하고 있다.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청소년들은 설령 문제가 있더라도 그 문제를 사회 구조에 빗대어 고민하는 법이 없다. 작가 자신도 그런 문제를 작품 속에 표현하고 있지 않다.
『슬램덩크』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인물은 "정대만"이었다. 물론 가장 닮고 싶은 인물이 있다면 "윤대협"이었는데, 그래서 나중에 사내아이를 낳는다면 이름을 "대협"이라고 지을까 생각도 해보았는데, 마침 내 성(性)이 "전"가라 그리되면 자식 이름이 "전대협"이 될듯하여 고만 머리에서 지웠다. 윤대협과 정대만 뿐만 아니라 작품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캐릭터들을 비교해보는 것도 이 만화를 즐겁게 보는 재미 중 하나다. 『슬램덩크』와 『내일의 조』의 차이는 단순히 비장미, 비애감의 차이가 아니라 좀 더 다양다종해진 캐릭터의 차이에서도 비롯된다. 그런 점에서 『슬램덩크』는 천재적인 캐릭터에게도 다양한 개성을 부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윤대협이 순수한 의미에서의 천재라면, 정대만은 한 차례 실패를 경험한 뒤 천재성보다는 노력하는 인물로 탈바꿈한 수재형 인물이다.
물론 『슬램덩크』에도 일본만화 특유의 과장된 어법으로 등장하는 천재들이 있지만, 그 천재들조차 허점을 지닌, 다시 말해 인간적이란 데 그 매력이 있다. 만화의 주인공격인 자칭 '바스켓맨, 농구 천재' 강백호. 그에게는 무엇이든 빠르게 배우고 익히는 농구센스라는 재능이 숨겨져 있다. 하지만 그 반면에 작가 이노우에 다케히코는 재능만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목표와 어설픈 실수들을 반복해서 보여준다.
사실 아마추어 야구 못지않게 학원 스포츠로서 농구 역시 꽤 오랜 동안 인기를 누려왔다. 연세대, 고려대라는 전통적인(재벌에 비견할 학벌이란 점에서 더욱더) 양대 라이벌 사이에서 일종의 마이너리거였던 중앙대, 허재와 강동희를 주축으로 한 중앙대 농구는 현실 속에 나타난 북산고의 모습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신선한 경험이었던 거다. 이들의 출현은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재현되지 못할 충격이었다. 그 무렵, 학교 체육 시간에 레이업슛을 배우는 과정이 있었다. “슬램덩크”에서는 이른바 ‘풋내기 슛’이라고 해서 가장 기초적인 슛 동작을 말하는데, 나는 워낙 운동 신경이 없는 탓인지, 핸드볼조차 한 손으로 잡을 수 없는 작은 손 때문인지 몰라도 슛 성공률이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강백호가 농구를 하게 된 시초는 북산고 부동의 센터 채치수의 여동생에 혹한 때문이지만, 실제로 그 자신을 바스켓맨이라고 부르며 농구에 집착하게 만든 것은 사람들의 시선을 한눈에 사로잡는 호쾌한 슬램덩크에 반한 탓이었다. 농구에 천부적 센스를 보이며, 슬램덩크를 작렬시키는 백호조차 농구 입문과정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단계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앞서 말한 ‘풋내기 슛', 바로 레이업 슛인데, 농구천재를 자청하는 강백호는 비록 엄청난 점프 능력을 가졌음에도 기본 중의 기본이라 할 레이업 슛을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아무리 멋진 슬램덩크도, 레이업 슛과 마찬가지로 2점에 불과하다. 고난이도 기술인 슬램덩크를 할 줄 아는 그조차도 성공하기 위해선 먼저 기초인 레이업슛부터 연습해야 한다는 작은 교훈을 작가는 놓치지 않는다.
백호는 바로 그 풋내기 슛을 하루에 천 개씩(맞나?) 연습한다. 그러고 보니 일명 슛도사로 불렸던 전성기의 이충희 선수조차 연일 계속되는 경기 시즌 중에도 슛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 매일 백 개의 슛을 던졌다는 일화가 생각난다. 백호는 거듭해서 레이업 슛을 연습하며 스스로에게 되풀이 한다.
"왼손은 거들 뿐."
그는 이 평범한 한 가지 깨우침을 얻기 위해 매일 같이 무수한 실패를 경험한다. 사람들은 ‘깨우침’이란 말을 손쉽게 내뱉지만, 무언가를 안다는 말은 이토록 어려운 말이다. 동양에선 무언가를 배운다고 말할 때 한자로 ‘습(習)’이라 쓴다. 깃우(羽)변에 백로(白鷺)를 의미하는 백자를 쓴 말이다. ‘습’은 백로 새끼가 둥지를 벗어나 비행하기 위해 날갯짓을 연습하는 모양을 뜻하는 한자어다. 만약 백로 새끼가 날갯짓을 제대로 깨우치지 못했다면 목숨을 건 최초의 비행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이렇듯 동양에서 무언가를 배운다, 깨우친다는 말은 단순히 안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몸 안에 깃들도록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강백호가 평범한 점프 슛을 하나를 성공시키기 위해 "왼손은 거들 뿐"이라고 되새기는 건, 머리로만 알고 몸으로 알지 못하기에 그것이 아직 완전한 배움, 완전한 깨달음이 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타인에게 손쉽게 마음을 다스리라고 충고하지만, 그렇게 충고하는 이조차 마음의 평화란 삽시간에 깨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은 안다는 건 때때로 허망한 일이다. 우리가 반드시 아는 데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종종 글을 쓰고, 공부를 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끼는 순간이 있다. 현학은 물론, 조금이라도 멋지게 문장을 꾸며보고 싶다는 욕심이야 누구에게나 잠재된 욕망이다. 그것은 마치 탄알을 잰 권총의 팽팽한 방아쇠처럼 당겨져 있다. 나는 학교에서 유도를 배운 적이 있고, 프로 복서였던 친구에게 권투를 배운 적이 있다. 우리가 올림픽에서도 본 적 있는 것처럼 유도엔 상대방의 힘을 이용해 메어꽂는 화려하고 호쾌한 기술들이 있다. 하지만 유도를 배우는 사람들은 누구나 남을 메어꽂는 기술을 배우기 전에 먼저 자신이 메어 꽂히는 걸 배우도록 한다. 그것이 낙법이다. 유도에 입문하는 사람 누가 되었든, 도장에서 가장 오랜 시간, 가장 정성스럽게 배우는 것이 바로 낙법이다. 낙법을 제대로 배우지 않고는 남을 메어꽂을 수도, 자신이 메어 꽂힐 때 스스로를 지킬 수도 없기 때문이다.
권투를 배울 때도 1라운드 3분간 쉬지 않고, 풋워크를 하면서 계속 주먹을 뻗을 수 있는 기초 체력부터 다지게 한다. 이때 주먹을 뻗는 것은 남을 때리기 위한 것이 아니다. 멋진 스트레이트, 속사포 같은 잽, 유도탄처럼 휘어들어가는 훅, 상대의 턱에 정확하게 명중하는 어퍼컷을 배우는 건 그로부터도 한참 뒤의 일이다. 주먹을 계속 내뻗는 것조차 남을 때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맞지 않기 위한 것이란 사실을 알아야 한다. 상대방이 맞든 안 맞든 내가 맞지 않기 위해서는 계속 헛손질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다. 아마추어는 라운드 당 3분, 3라운드 경기를 뛴다. 링 위에 단 한 번이라도 서 본 사람은 그 느낌을 안다. 마치 스키를 처음 배우는 이가 리프트에 오르기 전 밑에서 바라본 입문자 코스용의 완만한 슬로프처럼 링에 오르는 순간, 슬로프는 천애절벽이 되고, 사각의 링은 내가 주먹을 휘두를 땐 태평양 같이 넓고, 상대방의 주먹이 날아올 땐 사방이 막힌 벽 같다. 그런 건 해보기 전엔 알 수 없다. 그렇기에 가장 확실한 깨달음은 무용수의 몸처럼 가장 정확한 동작을 몸으로 깨우치는 바로 그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떤 소설가가 "아무런 희망도 절망도 없이 매일매일 조금씩 글을 쓴다." 라고 말한다. 그렇게 말했던 이는 기억나지 않지만, 저 말만큼은 뇌리에 박힌 듯 잊을 수가 없다. 그가 누구든 희망도, 절망도 없을 리 없다. 왜냐하면 이 말에서 중요한 건 희망이나 절망이 아니라 그날그날의 감정이 어떤 것이든 상관하지 않고 매일매일 조금씩 나아간다는 것에 있다. 희망도, 절망도 평생을 고민해야 떨쳐낼 수 없는 것들이고, 그런 사념들을 앞에 두고 고민하느라 멈춰있는 동안에도 그는 계속 나아간다. 물론 나 역시 인생을 다 살아보지 않았으니 무어라 할 수는 없으나 살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은 있는 법이다. 앞서 간 이들의 궤적이 있기 때문이다.
『슬램덩크』는 마치 나관중의 삼국지가 관우, 장비, 조운, 황충, 마초에게 각각 오관돌파와 장판파 전투를 보여주듯 주요 인물들 저마다에게 각각의 에피소드를 준비시켜 놓고 있다. 강백호, 서태웅, 송태섭, 채치수에게도 그런 순간들이 온다. 부상 끝에 농구를 포기했다가 다시 농구로 되돌아온 사내 ‘불꽃 남자’ 정대만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다. 그는 북산고를 이끄는 중요한 경기에서 자신의 체력이 바닥나 백업 수비도, 커버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는 너무나 지친 나머지 이제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것 같다.
결정적인 순간, 대만에게 농구공이 패스된다. 그는 볼을 잡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난 여기 서서 쏘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
정대만은 그 자리에서 슛을 날린다. 농구공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다 서서히 하강하고 림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정확하게 꽂힌다. 그는 지금 현재 코트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그 유일한 일을 했다. 이런 정대만의 모습은 순수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정대만은 '불꽃 남자'라는 그의 별칭에 어울릴 만큼 농구에 대한 동경과 증오를 오갔다. 그의 동경이 순수한 만큼 증오도 컸다. 그는 순수했으므로 아름답다. 중학시절 그의 팀이 결승전에서 뒤지고 있을 때 정대만은 공을 잡으려다가 넘어졌다. 그때 그를 주목해서 지켜봐주던 안 선생이 말한다.
"마지막까지 희망을 버려선 안돼. 단념하면 바로 그때 시합은 끝나는 거야"
그는 동경과 증오 사이를 방황했다. 그리고 포기하지 않았다. 내가 “슬램덩크”의 여러 주인공들 중 유독 정대만을 좋아하는 이유다. "Dum vita est, spes est. 생명이 있는 한 희망은 있다." 내가 편지 말미에 종종 서명 대신 쓰는 글이다. 청춘의 어느 시기에 나는 건너야만 했던 강들을 자신 있게 건너지 못한 적이 있다. 그로인해 대신 다른 많은 것을 떠나보낸 경험도 있다. 물론 『내일의 조』와 『슬램덩크』는 여러 면에서 다르다. 비장한 대사들이 결코 촌스럽거나 우스워 보이지 않던 시절의 『내일의 조』들은 이제 『슬램덩크』 세대의 코믹하면서 가벼운 자세에 대해 어째서 너는 나처럼 비장하지 않은가? 라고 물을 필요는 없다. 지금의 세대가 그대들은 어째서 그리 비장한가를 되물을 필요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지나온 청춘의 고민을 현재의 청춘들이 똑같이 붙잡고 있다는 건 우리에게 미래가 없다는 것과 같은 말이 아니겠는가. 그 안을 들여다보면 모양만 다를 뿐 모두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슬램덩크가 걸작인 이유. 그건 삶의 자세에 대한 질문을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1994년의 어느 겨울, 나는 세 명의 친구와 함께 롯데월드로부터 올림픽공원까지 걸었다. 우리 세 사람은 같은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87년 이후 세 사람이 살아간 삶의 방향은 각기 달랐다. 그 무렵 TV에선 『마지막 승부』라는 드라마가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었고, 갓 발견된 "심은하"라는 앳된 얼굴의 탤런트는 장안의 뭇 남성들을 설레게 했다. 『마지막 승부』가 방영되던 시절. 나와 그 두 친구는 뭔가 쓸쓸했다. 이제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왔지만 무엇도 확실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 나이에 확실한 무엇이 있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확실치 않은 것 가운데는 오랫동안 신념으로 삼아왔던 무엇이 사라진 뒤에 오는 그런 공황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떤 것들은 반드시 그 나이 때에 통과해내지 않으면 평생 동안 느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10대의 첫사랑과 40대에 경험하는 첫사랑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듯 TV드라마 『마지막 승부』는 우리에겐 그런 부류에 속하는 것이었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한 10년쯤 전에) 케이블TV를 통해 재방송되는 드라마를 보면서 그때는 이 드라마를 왜 그리 열심히 보았는지 의아해지기까지 했다. 내가 『마지막 승부』에 열심이었던 시절, 내 동생들은 한참 어떤 만화에 빠져있었다. 『슬램덩크』,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대표작이자 사실상 장편만화 데뷔작이기도 했던 이 만화는 1990년 슈에이사(集英社)의 "소년점프"에 연재되면서 오늘날까지 1억 부 가까운 판매고를 올린 만화다. 물론 우리 집에도 한 질이 있는데 완전판은 아니다(완전판은 만화방에서 보았을 뿐이다).
완전판과 구판의 가장 큰 차이는 일단 판형과 좀 더 좋아진 지질이다. 그 덕분에 구판에선 확인할 수 없었던 작가의 섬세한 터치와 선들이 제법 잘 드러난다. 물론 이전의 구판에 비해 완전판이란 말이 정확히 어떻게 달라졌고, 무엇이 좋아졌다고 말하려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최소한 애장판이라고 부를 만한 수준은 된다.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슬램덩크』는 여러 면에서 한 세대 전에 히트했던 치바 데츠야의 『내일의 조』와 비교할 만하다. 두 작품 모두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는 점, 스포츠 만화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또 한 가지 특기할 점은 두 작품이 지닌 시간 차이다. 1968년의 『내일의 조』와 1990년의 『슬램덩크』는 그 시간차만큼이나 정확하게, 당대 사회의 변천, 젊은 세대의 의식 변화를 견주어가며 살펴볼 만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1970년대 초 일본항공(JAL) 요도호 납치사건은 일본 적군파의 최후를 알리는 사건이었다. 그 시대를 말하는 이들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는데, 당시 일본의 전공투 세대가 "우리는 <내일의 조>다"라고 스스로를 느끼고 표현했던 것만큼은 사실인 듯하다. 내가 읽은 당시 일본의 문화사, 청년운동에 대한 책자마다 한 쪽은 요도호 납치범이, 다른 한 쪽은 와세다 대학 강당을 점거한 전공투 학생들이 벽에 쓴 낙서에서 나온 말이라고도 한다. 어느 쪽이든 일본 내에서 궁지에 몰린 학생 운동 세력들이 스스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표현으로 치바 데츠야의 『내일의 조』를 택한 것이다. 제목엔 ‘내일’의 조였으나 만화 속 주인공에게도 일본의 전공투 세대들에게도 내일은 없었다. 그에 비해 1990년대의 대표작 『슬램덩크』는 탈이념 시대의 아우라를 잘 반영하고 있다.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청소년들은 설령 문제가 있더라도 그 문제를 사회 구조에 빗대어 고민하는 법이 없다. 작가 자신도 그런 문제를 작품 속에 표현하고 있지 않다.
『슬램덩크』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인물은 "정대만"이었다. 물론 가장 닮고 싶은 인물이 있다면 "윤대협"이었는데, 그래서 나중에 사내아이를 낳는다면 이름을 "대협"이라고 지을까 생각도 해보았는데, 마침 내 성(性)이 "전"가라 그리되면 자식 이름이 "전대협"이 될듯하여 고만 머리에서 지웠다. 윤대협과 정대만 뿐만 아니라 작품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캐릭터들을 비교해보는 것도 이 만화를 즐겁게 보는 재미 중 하나다. 『슬램덩크』와 『내일의 조』의 차이는 단순히 비장미, 비애감의 차이가 아니라 좀 더 다양다종해진 캐릭터의 차이에서도 비롯된다. 그런 점에서 『슬램덩크』는 천재적인 캐릭터에게도 다양한 개성을 부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윤대협이 순수한 의미에서의 천재라면, 정대만은 한 차례 실패를 경험한 뒤 천재성보다는 노력하는 인물로 탈바꿈한 수재형 인물이다.
물론 『슬램덩크』에도 일본만화 특유의 과장된 어법으로 등장하는 천재들이 있지만, 그 천재들조차 허점을 지닌, 다시 말해 인간적이란 데 그 매력이 있다. 만화의 주인공격인 자칭 '바스켓맨, 농구 천재' 강백호. 그에게는 무엇이든 빠르게 배우고 익히는 농구센스라는 재능이 숨겨져 있다. 하지만 그 반면에 작가 이노우에 다케히코는 재능만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목표와 어설픈 실수들을 반복해서 보여준다.
사실 아마추어 야구 못지않게 학원 스포츠로서 농구 역시 꽤 오랜 동안 인기를 누려왔다. 연세대, 고려대라는 전통적인(재벌에 비견할 학벌이란 점에서 더욱더) 양대 라이벌 사이에서 일종의 마이너리거였던 중앙대, 허재와 강동희를 주축으로 한 중앙대 농구는 현실 속에 나타난 북산고의 모습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신선한 경험이었던 거다. 이들의 출현은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재현되지 못할 충격이었다. 그 무렵, 학교 체육 시간에 레이업슛을 배우는 과정이 있었다. “슬램덩크”에서는 이른바 ‘풋내기 슛’이라고 해서 가장 기초적인 슛 동작을 말하는데, 나는 워낙 운동 신경이 없는 탓인지, 핸드볼조차 한 손으로 잡을 수 없는 작은 손 때문인지 몰라도 슛 성공률이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강백호가 농구를 하게 된 시초는 북산고 부동의 센터 채치수의 여동생에 혹한 때문이지만, 실제로 그 자신을 바스켓맨이라고 부르며 농구에 집착하게 만든 것은 사람들의 시선을 한눈에 사로잡는 호쾌한 슬램덩크에 반한 탓이었다. 농구에 천부적 센스를 보이며, 슬램덩크를 작렬시키는 백호조차 농구 입문과정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단계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앞서 말한 ‘풋내기 슛', 바로 레이업 슛인데, 농구천재를 자청하는 강백호는 비록 엄청난 점프 능력을 가졌음에도 기본 중의 기본이라 할 레이업 슛을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아무리 멋진 슬램덩크도, 레이업 슛과 마찬가지로 2점에 불과하다. 고난이도 기술인 슬램덩크를 할 줄 아는 그조차도 성공하기 위해선 먼저 기초인 레이업슛부터 연습해야 한다는 작은 교훈을 작가는 놓치지 않는다.
백호는 바로 그 풋내기 슛을 하루에 천 개씩(맞나?) 연습한다. 그러고 보니 일명 슛도사로 불렸던 전성기의 이충희 선수조차 연일 계속되는 경기 시즌 중에도 슛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 매일 백 개의 슛을 던졌다는 일화가 생각난다. 백호는 거듭해서 레이업 슛을 연습하며 스스로에게 되풀이 한다.
"왼손은 거들 뿐."
그는 이 평범한 한 가지 깨우침을 얻기 위해 매일 같이 무수한 실패를 경험한다. 사람들은 ‘깨우침’이란 말을 손쉽게 내뱉지만, 무언가를 안다는 말은 이토록 어려운 말이다. 동양에선 무언가를 배운다고 말할 때 한자로 ‘습(習)’이라 쓴다. 깃우(羽)변에 백로(白鷺)를 의미하는 백자를 쓴 말이다. ‘습’은 백로 새끼가 둥지를 벗어나 비행하기 위해 날갯짓을 연습하는 모양을 뜻하는 한자어다. 만약 백로 새끼가 날갯짓을 제대로 깨우치지 못했다면 목숨을 건 최초의 비행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이렇듯 동양에서 무언가를 배운다, 깨우친다는 말은 단순히 안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몸 안에 깃들도록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강백호가 평범한 점프 슛을 하나를 성공시키기 위해 "왼손은 거들 뿐"이라고 되새기는 건, 머리로만 알고 몸으로 알지 못하기에 그것이 아직 완전한 배움, 완전한 깨달음이 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타인에게 손쉽게 마음을 다스리라고 충고하지만, 그렇게 충고하는 이조차 마음의 평화란 삽시간에 깨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은 안다는 건 때때로 허망한 일이다. 우리가 반드시 아는 데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종종 글을 쓰고, 공부를 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끼는 순간이 있다. 현학은 물론, 조금이라도 멋지게 문장을 꾸며보고 싶다는 욕심이야 누구에게나 잠재된 욕망이다. 그것은 마치 탄알을 잰 권총의 팽팽한 방아쇠처럼 당겨져 있다. 나는 학교에서 유도를 배운 적이 있고, 프로 복서였던 친구에게 권투를 배운 적이 있다. 우리가 올림픽에서도 본 적 있는 것처럼 유도엔 상대방의 힘을 이용해 메어꽂는 화려하고 호쾌한 기술들이 있다. 하지만 유도를 배우는 사람들은 누구나 남을 메어꽂는 기술을 배우기 전에 먼저 자신이 메어 꽂히는 걸 배우도록 한다. 그것이 낙법이다. 유도에 입문하는 사람 누가 되었든, 도장에서 가장 오랜 시간, 가장 정성스럽게 배우는 것이 바로 낙법이다. 낙법을 제대로 배우지 않고는 남을 메어꽂을 수도, 자신이 메어 꽂힐 때 스스로를 지킬 수도 없기 때문이다.
권투를 배울 때도 1라운드 3분간 쉬지 않고, 풋워크를 하면서 계속 주먹을 뻗을 수 있는 기초 체력부터 다지게 한다. 이때 주먹을 뻗는 것은 남을 때리기 위한 것이 아니다. 멋진 스트레이트, 속사포 같은 잽, 유도탄처럼 휘어들어가는 훅, 상대의 턱에 정확하게 명중하는 어퍼컷을 배우는 건 그로부터도 한참 뒤의 일이다. 주먹을 계속 내뻗는 것조차 남을 때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맞지 않기 위한 것이란 사실을 알아야 한다. 상대방이 맞든 안 맞든 내가 맞지 않기 위해서는 계속 헛손질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다. 아마추어는 라운드 당 3분, 3라운드 경기를 뛴다. 링 위에 단 한 번이라도 서 본 사람은 그 느낌을 안다. 마치 스키를 처음 배우는 이가 리프트에 오르기 전 밑에서 바라본 입문자 코스용의 완만한 슬로프처럼 링에 오르는 순간, 슬로프는 천애절벽이 되고, 사각의 링은 내가 주먹을 휘두를 땐 태평양 같이 넓고, 상대방의 주먹이 날아올 땐 사방이 막힌 벽 같다. 그런 건 해보기 전엔 알 수 없다. 그렇기에 가장 확실한 깨달음은 무용수의 몸처럼 가장 정확한 동작을 몸으로 깨우치는 바로 그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떤 소설가가 "아무런 희망도 절망도 없이 매일매일 조금씩 글을 쓴다." 라고 말한다. 그렇게 말했던 이는 기억나지 않지만, 저 말만큼은 뇌리에 박힌 듯 잊을 수가 없다. 그가 누구든 희망도, 절망도 없을 리 없다. 왜냐하면 이 말에서 중요한 건 희망이나 절망이 아니라 그날그날의 감정이 어떤 것이든 상관하지 않고 매일매일 조금씩 나아간다는 것에 있다. 희망도, 절망도 평생을 고민해야 떨쳐낼 수 없는 것들이고, 그런 사념들을 앞에 두고 고민하느라 멈춰있는 동안에도 그는 계속 나아간다. 물론 나 역시 인생을 다 살아보지 않았으니 무어라 할 수는 없으나 살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은 있는 법이다. 앞서 간 이들의 궤적이 있기 때문이다.
『슬램덩크』는 마치 나관중의 삼국지가 관우, 장비, 조운, 황충, 마초에게 각각 오관돌파와 장판파 전투를 보여주듯 주요 인물들 저마다에게 각각의 에피소드를 준비시켜 놓고 있다. 강백호, 서태웅, 송태섭, 채치수에게도 그런 순간들이 온다. 부상 끝에 농구를 포기했다가 다시 농구로 되돌아온 사내 ‘불꽃 남자’ 정대만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다. 그는 북산고를 이끄는 중요한 경기에서 자신의 체력이 바닥나 백업 수비도, 커버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는 너무나 지친 나머지 이제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것 같다.
결정적인 순간, 대만에게 농구공이 패스된다. 그는 볼을 잡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난 여기 서서 쏘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
정대만은 그 자리에서 슛을 날린다. 농구공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다 서서히 하강하고 림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정확하게 꽂힌다. 그는 지금 현재 코트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그 유일한 일을 했다. 이런 정대만의 모습은 순수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정대만은 '불꽃 남자'라는 그의 별칭에 어울릴 만큼 농구에 대한 동경과 증오를 오갔다. 그의 동경이 순수한 만큼 증오도 컸다. 그는 순수했으므로 아름답다. 중학시절 그의 팀이 결승전에서 뒤지고 있을 때 정대만은 공을 잡으려다가 넘어졌다. 그때 그를 주목해서 지켜봐주던 안 선생이 말한다.
"마지막까지 희망을 버려선 안돼. 단념하면 바로 그때 시합은 끝나는 거야"
그는 동경과 증오 사이를 방황했다. 그리고 포기하지 않았다. 내가 “슬램덩크”의 여러 주인공들 중 유독 정대만을 좋아하는 이유다. "Dum vita est, spes est. 생명이 있는 한 희망은 있다." 내가 편지 말미에 종종 서명 대신 쓰는 글이다. 청춘의 어느 시기에 나는 건너야만 했던 강들을 자신 있게 건너지 못한 적이 있다. 그로인해 대신 다른 많은 것을 떠나보낸 경험도 있다. 물론 『내일의 조』와 『슬램덩크』는 여러 면에서 다르다. 비장한 대사들이 결코 촌스럽거나 우스워 보이지 않던 시절의 『내일의 조』들은 이제 『슬램덩크』 세대의 코믹하면서 가벼운 자세에 대해 어째서 너는 나처럼 비장하지 않은가? 라고 물을 필요는 없다. 지금의 세대가 그대들은 어째서 그리 비장한가를 되물을 필요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지나온 청춘의 고민을 현재의 청춘들이 똑같이 붙잡고 있다는 건 우리에게 미래가 없다는 것과 같은 말이 아니겠는가. 그 안을 들여다보면 모양만 다를 뿐 모두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슬램덩크가 걸작인 이유. 그건 삶의 자세에 대한 질문을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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