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는 없을 거예요
- 황인숙
후회 가득한 목소리로
오, 오, 오오, 여가수가 노래한다
남겨진 여자가 노래한다
마음을 두고 떠난 여자도 노래한다
후회로 파르르 떠는 노래를 들으며
나는 인터넷 벼룩시장에서
마사이 워킹화를 산다
판매글 마지막에 적힌
‘후회는 없을 거예요’
그 한 구절에
일전엔 돌체앤가바나 손목시계를 샀다
작년 여름엔 소니 디지털 카메라를 샀다
나를 무장해제시키는,
후회는 없을 거예요
벌써 후회하는 듯한,
후회는 없을 거예요
서글픈 목소리로 나직이,
후회는 없을 거예요
그 시계와 카메라는 상자째
서랍 안에 있다
후회는 없다
오, 오, 오오~
<출처> 황인숙, 문학과사회, 2008년 겨울호(통권 84호)
*
“킥킥”, 황인숙의 신작시를 읽으며 나는 “킥킥” 웃었다. 오다가다 서너 번 스쳐갔던 것이 황인숙 선배와 내 인연의 전부였다. 구태여 스쳐가는 만남을 부여잡기 위해 학연을 내세운 바도 없지만, 언제나 허공 어디쯤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이 선후배 같은 세속의 인연쯤 안중에 없을 듯이 보인 탓도 크다. 무엇보다 나는 선후배로 만나기 전에 그녀의 애독자 중 한 명이었으므로, 나중의 인연을 시인과 독자의 관계보다 앞세우고 싶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번의 스침은 시인이 풀어놓은 일상의 공간을 충분히 상상하게 만든다. 실은 우리 모두 비일비재(非一非再) - 한 번도 아닌, 두 번도 아닌 - 한 경험 속에 익숙한 일들을 그녀는 시(詩)로 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마사이 워킹화, 돌체앤가바나 손목시계, 소니 디지털 카메라”같은 브랜드 제품들은 ‘나는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시대의 풍속도를 드러내기 위한 장치들일 뿐이다.
‘후회는 없을 거예요’란 구절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에디트 피아프의 “Non, je ne regrette rien”을 먼저 떠올렸는데 막상 ‘후회는 없을 거예요’를 놓고 인터넷 검색기를 돌려보니 “딱!! 5분만 읽어봐 주세요! 후회 없을 겁니다. 저 두 첨엔 안 믿었는데 밑 져야 본전이구 해서 시작 했답니다~”부터 시작해서 “돈따는 재미 ...높은승률....님도느껴보세요...후회는없을겁니다.”까지 죄다 돈 쓰는 얘기 아니면 돈 벌 기회를 제공해주겠단 글들이었다.
얼마 전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던 ‘경제대통령 미네르바’ 현상에 은폐된 대중의 욕망도 들춰보면 사실 그런 것이다. 개인은 더 이상 삶의 향배를 ‘사회적 기획’ - 그것이 거시적인 경제정책이든 아니면 근대 개인의 해방을 기획했던 계몽적 기획이든 - 을 통해 개선해나갈 수 있다고 믿지 않으며, 비판적 지성이 사라진 시대, 더 이상 신뢰할 수 있는 존재가 부재하게 된 대중의 관심이 이제는 ‘사회적 기획’에서 ‘개인적 기획’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월간 『신동아』 12월호(2008)에 실린 미네르바의 글에는 그가 어째서 대중의 사랑과 신뢰를 받는지에 대한 이유가 잘 드러나고 있다. 그는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독자들 개개인에게 보내는 당부의 글로 <스태그플레이션에서 살아남기>란 내용을 적고 있다. 그는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시대에 친절하게도 개개인이 어떻게 해야 이 험난한 시대를 살아갈 수 있는지 해설해주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준다. “더 이상 사회를 믿지 말고 각자도생(各自圖生)하는 길을 찾아봐!”
그런데 내가 “킥킥”대며 웃은 까닭은 황인숙 시인의 시적인 삶의 풍경을 상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거나 경제대통령 미네르바 현상에 은폐된 대중의 욕망을 읽어냈기 때문이 아니라 아침나절 공중화장실에서 발견한 광고문구가 황인숙의 시 속에 나오는 ‘후회는 없을 거예요’보다 더 극적이고, 또한 매우 시적(?)이었기 때문이다. 그 문구는 이렇다.
24시간 1:1 전화애인
무료체험 : 1544-0XXX
실제 애인보다 “훨” 편합니다.
이 광고에 에디트 피아프의 <난 아무 것도 후회하지 않아요(Non, je ne regrette rien)>의 마지막 부분을 연결했더라면 훨씬 더 와 닿을 뻔 했다.
왜냐하면 나의 삶, 나의 기쁨이
오늘, 그대와 함께 시작되거든요!
실제 애인보다 "훨" 편한 애인은 전화기 저 멀리(tele)에 있고, 뒤끝도 없다. 이런 시대에 “제발, 후회 좀 하고 살아!”라고 하면 욕먹는다.
- 황인숙
후회 가득한 목소리로
오, 오, 오오, 여가수가 노래한다
남겨진 여자가 노래한다
마음을 두고 떠난 여자도 노래한다
후회로 파르르 떠는 노래를 들으며
나는 인터넷 벼룩시장에서
마사이 워킹화를 산다
판매글 마지막에 적힌
‘후회는 없을 거예요’
그 한 구절에
일전엔 돌체앤가바나 손목시계를 샀다
작년 여름엔 소니 디지털 카메라를 샀다
나를 무장해제시키는,
후회는 없을 거예요
벌써 후회하는 듯한,
후회는 없을 거예요
서글픈 목소리로 나직이,
후회는 없을 거예요
그 시계와 카메라는 상자째
서랍 안에 있다
후회는 없다
오, 오, 오오~
<출처> 황인숙, 문학과사회, 2008년 겨울호(통권 84호)
*
“킥킥”, 황인숙의 신작시를 읽으며 나는 “킥킥” 웃었다. 오다가다 서너 번 스쳐갔던 것이 황인숙 선배와 내 인연의 전부였다. 구태여 스쳐가는 만남을 부여잡기 위해 학연을 내세운 바도 없지만, 언제나 허공 어디쯤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이 선후배 같은 세속의 인연쯤 안중에 없을 듯이 보인 탓도 크다. 무엇보다 나는 선후배로 만나기 전에 그녀의 애독자 중 한 명이었으므로, 나중의 인연을 시인과 독자의 관계보다 앞세우고 싶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번의 스침은 시인이 풀어놓은 일상의 공간을 충분히 상상하게 만든다. 실은 우리 모두 비일비재(非一非再) - 한 번도 아닌, 두 번도 아닌 - 한 경험 속에 익숙한 일들을 그녀는 시(詩)로 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마사이 워킹화, 돌체앤가바나 손목시계, 소니 디지털 카메라”같은 브랜드 제품들은 ‘나는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시대의 풍속도를 드러내기 위한 장치들일 뿐이다.
‘후회는 없을 거예요’란 구절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에디트 피아프의 “Non, je ne regrette rien”을 먼저 떠올렸는데 막상 ‘후회는 없을 거예요’를 놓고 인터넷 검색기를 돌려보니 “딱!! 5분만 읽어봐 주세요! 후회 없을 겁니다. 저 두 첨엔 안 믿었는데 밑 져야 본전이구 해서 시작 했답니다~”부터 시작해서 “돈따는 재미 ...높은승률....님도느껴보세요...후회는없을겁니다.”까지 죄다 돈 쓰는 얘기 아니면 돈 벌 기회를 제공해주겠단 글들이었다.
얼마 전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던 ‘경제대통령 미네르바’ 현상에 은폐된 대중의 욕망도 들춰보면 사실 그런 것이다. 개인은 더 이상 삶의 향배를 ‘사회적 기획’ - 그것이 거시적인 경제정책이든 아니면 근대 개인의 해방을 기획했던 계몽적 기획이든 - 을 통해 개선해나갈 수 있다고 믿지 않으며, 비판적 지성이 사라진 시대, 더 이상 신뢰할 수 있는 존재가 부재하게 된 대중의 관심이 이제는 ‘사회적 기획’에서 ‘개인적 기획’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월간 『신동아』 12월호(2008)에 실린 미네르바의 글에는 그가 어째서 대중의 사랑과 신뢰를 받는지에 대한 이유가 잘 드러나고 있다. 그는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독자들 개개인에게 보내는 당부의 글로 <스태그플레이션에서 살아남기>란 내용을 적고 있다. 그는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시대에 친절하게도 개개인이 어떻게 해야 이 험난한 시대를 살아갈 수 있는지 해설해주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준다. “더 이상 사회를 믿지 말고 각자도생(各自圖生)하는 길을 찾아봐!”
그런데 내가 “킥킥”대며 웃은 까닭은 황인숙 시인의 시적인 삶의 풍경을 상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거나 경제대통령 미네르바 현상에 은폐된 대중의 욕망을 읽어냈기 때문이 아니라 아침나절 공중화장실에서 발견한 광고문구가 황인숙의 시 속에 나오는 ‘후회는 없을 거예요’보다 더 극적이고, 또한 매우 시적(?)이었기 때문이다. 그 문구는 이렇다.
24시간 1:1 전화애인
무료체험 : 1544-0XXX
실제 애인보다 “훨” 편합니다.
이 광고에 에디트 피아프의 <난 아무 것도 후회하지 않아요(Non, je ne regrette rien)>의 마지막 부분을 연결했더라면 훨씬 더 와 닿을 뻔 했다.
왜냐하면 나의 삶, 나의 기쁨이
오늘, 그대와 함께 시작되거든요!
실제 애인보다 "훨" 편한 애인은 전화기 저 멀리(tele)에 있고, 뒤끝도 없다. 이런 시대에 “제발, 후회 좀 하고 살아!”라고 하면 욕먹는다.
'POESY > 한국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선우 - 이건 누구의 구두 한짝이지? (0) | 2011.01.05 |
---|---|
오규원 - 無法 (0) | 2011.01.04 |
이윤학 - 전생(全生)의 모습 (0) | 2011.01.03 |
강윤후 - 불혹(不惑), 혹은 부록(附錄) (0) | 2010.12.31 |
김왕노 - 사칭 (2) | 2010.12.30 |
정호승 - 마음의 똥 (0) | 2010.12.28 |
최금진 - 웃는 사람들 (0) | 2010.12.27 |
윤동주 - 별 헤는 밤 (2) | 2010.12.24 |
김종삼 - 묵화(墨畵) (0) | 2010.12.23 |
이면우 - 그 나무, 울다 (0) | 2010.12.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