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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한국시

김왕노 - 사칭

사칭(詐稱)

- 김왕노

나는 사람과 어울리려 사람을 사칭하였고
나는 꽃과 어울리려 꽃을 사칭하였고
나는 바람처럼 살려고 바람을 사칭하였고
나는 늘 사철나무 같은 청춘이라며 사철나무를 사칭하였고
차라리 죽음을 사칭하여야 마땅할
그러나 내일이 오면 나는 그 무엇을 또 사칭해야 한다
슬프지만 버릴 수 없는 삶의 이 빤한 방법 앞에 머리 조아리며

출처 : 김왕노, 『슬픔도 진화한다』, 천년의 시작, 2002

*

가을이라 모든 것이 허망해 보이지만 세상에 끝이 없으면 시작도 없는 법이다. 시인 김왕노의 「사칭(詐稱)」을 읽노라니 문득 얼마 전 내가 어느 젊은 영혼에게 씹어 뱉듯 내쏘아준 말이 생각났다. 나는 그에게 ‘너도 나처럼 사람들 앞에서 사기 치면서 살라’고 그렇게 충고한 적이 있다.

새나 짐승을 관찰하려는 사람은 우선 자기 몸에서 사람 냄새를 지워야 한다. 늑대무리에 섞여서 오랫동안 늑대를 관찰했던 어떤 과학자는 먼저 늑대의 변을 자기 몸에 바르고, 늑대와 함께 으르렁거리며 늑대처럼 날고기를 씹었다. 늑대무리에 섞이기 위해 그는 늑대를 사칭(詐稱)했다.

어미를 잃은 한 마리 새끼 들소가 늑대무리에 쫓기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어미가 없으므로 무리 중에서 그를 보호해줄 존재가 없었다. 간신히 늑대를 피한 새끼 들소는 그만 진구렁에 빠져버렸다. 당연히 들소무리 중 누구도 새끼 들소를 구하려들지 않았다. 새끼 들소는 제 힘으로 버둥거리고, 안간힘을 쓴 뒤에야 마른 땅 위로 올라설 수 있었다.

그러자 이번엔 들소 무리들이 새끼 들소의 냄새를 맡다가 밀어내기 시작했다. 진구렁에 빠진 탓에 들소무리 본래의 체취를 잃어버린 탓이었다. 무리 속으로 섞이지 못한 새끼 들소는 계속해서 주변을 배회하다가 몸이 마른 뒤에야 간신히 무리에 합류할 수 있었다. 새끼 들소는 한 번도 다른 존재를 사칭(詐稱)하지 않았으나 무리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다.

사람이 사람무리 속에서 사람 새끼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건 무얼까? 그게 사칭(詐稱)이라면 내가 속이는 건, 사람들일까? 아니면 나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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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12.30 09:30

    슬픔도 진화하는군요
    슬픔이 발산하여 더 큰 진폭을 지니면 그 에너지를 작가들은 창작으로 풀어 놓겠지만
    저같은 일반인은 그냥 조용히 수렴하고 싶어합니다. 가능하면 0에 가깝게
    그리고 "마치 아무일도 없는것처럼" 살아가려고 발버둥치지요.

    저도 매일 무언가를 사창하고 살아요.
    미천한 재주로 그나마 흉내라도 내는 것이라곤 이 재주뿐이라 밥벌이를위해 과학자를 사칭하고,
    인간 꼴 값을 하고 살고 싶은데 그저 사람 새끼들 사칭하고 살지요.
    아마도 죽음을 사칭하는 게 가장 양심적일 듯합니다.

    • windshoes 2010.12.30 17:03 신고

      죽음이야 우리가 매일 밤마다 사칭하고 있잖아요.
      작가들도 그냥 살면서 쓰는 것이지 그네들이라고
      특별한 진폭을 가지고 있진 않으리라 봐요.
      율님은 율님 나름의 감각과 생각이 있는 분이니
      그걸 소중히 여기는 마음도 필요해요.
      새해엔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갖도록 노력하시길...
      (주제넘은 충고였다면 용서를 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