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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한국시

이윤학 - 전생(全生)의 모습

전생(全生)의 모습

- 이윤학

작년에 자란 갈대
새로 자란 갈대 사이에 끼여 있다

작년에 자란 갈대
껍질이 벗기고
꺾일 때까지
삭을 때까지
새로 자라는 갈대

전생의 기억이 떠오를 때까지
곁에 있어주는 전생의 모습

출처 : 이윤학, 『세계의 문학』, 2005년 겨울호(통권118호)

*

전생(前生)이나 전생(轉生)이 아니라 전생(全生)의 모습이다.

가끔.

서로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 그것도 <인간극장> 같은 TV프로그램에 비춰지는 가난하고, 온전치 못한 육신(肉身)의 사람들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게 웃으며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공연히 질투가 인다.

마치 성서에 나오는 동방의 의인 욥을 두고 시험에 들게 하고 싶은 악마처럼 공연히 그 두 사람에게 더한 고난이, 더한 고통이 닥친다면 그래도 여전히 너희 두 사람은 사랑할 테냐고 하고 싶을 만큼 질투가 인다.

더 이상 불행해지기도 힘들 만큼 불행한 사람의 행복한 얼굴에 공연히 침을 뱉고 싶어진다. 욥은 남부럽지 않을 만큼 부유했고, 슬하에 7남 3녀의 자식들을 둘 만큼 다복했으며, 만인의 존경을 받았다. 그의 삶은 행복했다. 그러나 욥은 갑자기 재앙의 진구렁에 빠져버렸다. 재산을 모두 잃었으며 자식들마저 삽시간에 세상을 떠났다. 온몸에 병이 들어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성한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그러나 욥의 하느님은 그를 돕지 않았다. 아내조차 그를 가까이하려 하지 않았다.

그의 벗들은 욥에게 회개하라고 말한다. 그러지 않고서야 네가 이토록 엄청난 고통과 재앙에 시달릴 이유가 없다며 하나님께 범한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욥은 친구들에게 “환란과 고통을 당한다고 다 악인은 아니다. 세상에서 잘 산다고 다 선인은 아니다. 너희 눈으로 세상을 보아라. 나보다 악한 강도들이 형통하고 하나님을 진노케하는 자들이 평안을 누리며 떵떵거리고 잘 살지 않느냐. 그들의 자녀들이 다 잘되고 그들의 재산은 나날이 불어나고 악기와 노래로 인생을 즐기고 있지 않느냐?”라고 답한다.

기독교적인 사랑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나 가난과 육신의 고통 속에서도 서로 사랑하는 사람을 볼 때마다 한 가지 느끼는 것이 있다. 그 어떤 고통과 고난 속에서도 “곁에 있어주는 전생의 모습”, 전생(前生)이나 전생(轉生)이 아니라 전생(全生)의 모습으로, “껍질이 벗기고/ 꺾일 때까지/ 삭을 때까지” 갈대가 새로 자라날 때까지 삶의 모든 것(全生)으로 버텨주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어째서 착한 사람, 선인(善人)들, 아니 기독교적으로 말해 예수의 뜻대로 사는 자가 더한 고통과 고난을 겪는가? 그건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거나 죄를 범했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이 악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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