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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ERACY/WORK

정치적인 것들의 귀환을 꿈꾸며 - 2007년 12월 21일자 <경인일보>

정치적인 것들의 귀환을 꿈꾸며 - 2007년 12월 21일자 <경인일보>

서구 문명의 기원이자 민주주의의 대명사처럼 이야기되는 그리스는 현대적 의미로 보자면 이민족인 도리아족이 남하하면서 선주민들을 무력으로 복속시켜 만들어진 고대 노예제 도시국가였다. 당시 스파르타에는 ‘포로’라는 뜻의 헤일로타이(heilotai)라 불리는 노예가 시민 1인당 15명의 비율로 존재했는데, 그 수가 25만 명에 이르렀다. 어떻게 소수의 도리아족 시민들이 정치로부터 소외된 다수의 선주민들을 지배할 수 있었을까? 그 비결은 도리아족의 지배를 받아들이는 대신 참정권을 제외한 신분상의 자유와 재산권을 인정받은 중간 계층 페리오이코이(perioikoi)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페리오이코이란 ‘주변인(marginal man)’이란 뜻이다.


87년 직선제 개헌 이후 모두 다섯 차례 대통령을 뽑았지만 이번 선거는 역대 선거 중 가장 낮은 투표율(62.9%)을 보였다. 영국 BBC방송은 대통령 직선제를 도입한 이래 "가장 지저분한 선거 중 하나를 치렀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이번 선거는 대통령 당선자가 특검의 수사대상이 되었고, 지지 여부와는 별도로 국민 대다수가 의혹을 제기하는 여론 조사 결과가 보여주듯 유권자인 대다수 국민들을 크게 실망시켰다. 새로운 대안을 모색했던 국민들 입장에서는 최선을 대신하는 차선의 선택이 아니라 최악을 피해 차악을 선택해야 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이 같은 실망감이 고스란히 낮은 투표율로 연결되었다.

현직인 노무현 대통령과 이명박 당선자는 이념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여의도 정치의 비주류라는 탈정치적 이미지로 지지를 얻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2002년 당시 노무현 후보는 시류에 편승하지 않는 꿋꿋한 이미지로 스스로를 기성정치인과 차별화시켰고, 이명박 후보는 정치인이기보다는 성공한 CEO의 이미지를 강조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역설적이게도 한 나라의 대통령을 선출하는 두 번의 대선에서 대중은 가장 비정치적인 이미지를 선보인 사람을 최고통치자로 뽑았다.

다시 말해 국민들은 기존의 정치와 정치인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번 대선 과정에서 벌어진 삼성과 BBK 특검 사태(?)는 대중의 국가기구와 정치에 대한 불신과 혐오의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 잘 보여준다. 사실 우리 사회에서 대중의 정치 혐오는 그 뿌리가 매우 깊고 오래된 것이다.

미국국립문서보관소에서 기밀 해제된 1956년 2월 13일자 보고서는 한국 국민들의 정치적인 태도에 대해 "파벌주의, 실용주의, 정치적 허무주의, 개인주의, 지도자들에 대한 사적인 충성심, '거물'이 되고자 하는 희망, 통일을 향한 열망, 민족주의 또는 더 정확하게 인정(忍情)의식, 전통적인 유교사상의 영향, 서양 정치이론의 영향들로 인해 새로운 그룹에 표를 던지지 않으며 빨리 불신하게 되는 현상, 단기적인 안전 또는 만족을 위해 이상을 내던져버리는 현상, 즉각적이며, 눈에 보이는 보상을 제공하지 않는 그룹을 지지하지 않는 현상 등이 나타난다"고 분석하고 있다.

민주화 이후 20년 동안 유권자들이 선거를 통해 분출시킨 열망은 선거 이후 실망으로 변하는 주기적 순환을 반복해왔다.

선거를 앞두고 언제나 이벤트처럼 벌어지는 정치권의 이합집산, 단일화, 사표 논쟁은 단임제 대통령을 5년간만 사용하고 싫증나면 버려도 되는 일회용품처럼 만들었고, 이념과 정책 패러다임으로 분화된 민주적 정당구조를 뿌리내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정치의 문제가 언제나 현실을 긴박(緊縛)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만, 먹고 사는 문제만으로도 피곤한 당신, 잘 살게 되기를 희망하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우리에게 정치는 더욱더 중요하며 참여 없이는 성취될 수 없는 것이다. 민주화 이후 20년, 오늘 우리가 성찰해야만 하는 것은 절차적 민주주의의 완성이라는 작은 성과와 만족 속에 창고에 가둬 둔 일상의 모든 정치적인 것들을 귀환시키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2007년 12월 21일 (금) 경인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