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잃다
- 김해자
전태일기념사업회 가는 길
때로 길을 잃는다 헷갈린 듯
짐짓 길도 시간도 잊어버린 양
창신동 언덕배기 곱창 같은 미로를 헤매다 보면
나도 몰래 미싱소리 앞에 서 있다
마찌꼬바 봉제공장 중늙은이 다 된 전태일들이
키낮은 다락방에서 재단을 하고 운동 부족인
내 또래 아줌마들이 죽어라 발판 밟아대는데
내가 그 속에서 미싱을 탄다 신나게 신나게 말을 탄다
문득 정신 들고나면 그 속에 내가 없다 현실이 없다
봉인된 흑백의 시간은 가고 기념비 우뚝한 세상 거리와
사업에 골몰한 우리 속에 전태일이 없다 우리가 없다
회의도 다 끝난 한밤중
미싱은 아직도 돌고 도는데
<출처> 김해자, 『황해문화』, 2005년 겨울호(통권49호)
*
내가 아직 ‘바람구두’라 불리기 전에 나는 떠돌이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용 잡부로 떠돌던 시절,
곰빵(등짐 지는 것)에 질벽돌 4~50개는 거뜬히 지어 나르던 내가 있었다.
쓰미(벽돌쌓기)부터, 미장, 방수까지 못하는 게 없었다.
내 땅만 있었다면 나는 혼자 집도 지었을 것이다.
목수 데모도(조수)부터 시작해서 처음 못 주머니를 차던 날,
나는 한 사람의 기공이 되어 기뻤다.
일당이 배로 올랐으므로.
오야지가 사주는 삼겹살에 소주 한 잔을 마시며 흐뭇했다.
나는 왜 계속해서 일용직 노동자로 살지 않았을까?
그 때 나는 가야만 하는 길이 있다고 믿었다.
그로부터 20여년이 흐른 지금의 나는 두툼해진 뱃살을 걱정하며
그 시절보다 월등하게 풍족한 삶을 누린다.
그리고 지금 나는 가야만 한다고 믿었던 길을 기억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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