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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한국시

허수경 - 혼자 가는 먼 집

혼자 가는 먼 집

- 허수경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 킥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 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망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으로 돌아감 당신……, 킥킥거리며 당신이라고……,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병자처럼, 그러나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킥킥 당신 이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 아니라서 끝내버릴 수 없는, 무를 수도 없는 참혹…… 그러나 킥킥 당신


<출처> 허수경, 혼자 가는 먼 집, 문학과지성사, 1992

*

올해(2009) ‘기형도’가 세상을 등진지 20년이 되었다고 떠들썩하다. 시의 시대였다고 하는 1980년대가 저물던 무렵, 기형도가 유성(流星)처럼 나타났다고 스러졌으므로 그를 기념하는 행사가 올해 대대적으로 벌어진다한들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기형도가 유성처럼 곤두박질쳤다면 1980년대의 마지막에 혜성처럼 등장한 시인으로 ‘허수경’을 논하지 않고 지나간다면 개인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허수경은 1988년 《실천문학》에서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라는 시집을 통해 나를 비롯한 수많은 문학청년들의 가슴을 시퍼렇게 멍들게 한 혁혁한 전과가 있다.

‘기형도와 고정희’처럼 극장 안에서, 지리산에서 이승을 하직하지 않고, 멀고 먼 독일까지 날아가 서서히 긴 꼬리를 남기고 사라져가고 있는 허수경.

1964년생이니까 첫 시집을 내던 1988년에 그녀의 나이 불과 24세였다. 그러나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를 읽은 독자들 중 누구도 시인의 약력을 읽기 전에는 시인이 불과 24살의 어린 처자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도저히 나이를 가늠할 수 없으리만치 처연(凄然)한 어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첫 번째 시집이 던진 파괴력이 너무 컸던 탓일까. 허수경의 시는 이후 내게 혜성처럼 “끝내버릴 수 없는, 무를 수도 없는” 청춘의 짙은 그림자를 남기고 멀리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말줄임표(……)에는 누구에게나 감추고 싶은 민감한 과거의 기억[治病] 하나쯤은 숨기고 있는 것이다. 묻지 말라고, 아니, 물어달라고 환후(患候) 쯤은 물어줄 수도 있는 것 아니냐는 듯 드러내놓고 감추는 것이다.

나 또한 그래서 말줄임표를 쓴다. 묻지 말아달라고 아니 아프니까 나 좀 다독거려달라고 숨기면서 드러내기 위해서 쓴다. 당신쯤 되면 내게 그런 여백을 허용해줄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말하지 못한 내 사랑~ 음, 어디까지 왔을까?”“~음이거나 아니면 “흘러내릴까봐 차마 감지 못하는 눈꺼풀”처럼 말줄임표의 침묵 뒤에는 그런 물음이 숨겨져 있다. 적요(寂寥)한 무덤가에서 힘없이 돌아서는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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