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의 그 집


- 박경리



비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휑뎅그렁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국새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이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살았다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의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출처: 박경리, 『현대문학』, 2008년 4월호



*


아무도 없는 빈 집을 얻어 한 달여를 살아본 적이 있었다.

구례구역에 내려 섬진강을 건너 시골 사람에게 물으면 '가찹지만' 도회 사람에게 물으면 차 없이 어떻게 가느냐고 할 거리만큼 떨어져 있는 시골 마을 폐가에 들어가 한 달여를 살아본 적이 있었다. 강감찬 장군이 호령하여 한여름에도 개구리가 울지 않고, 여름내 극성이기 마련인 모기 한 마리 얼씬하지 않는다는 그 마을에서 서울서 온 작가 선생으로 한 달 넘게 머물며 살았다.

내가 아직 푸릇푸릇한 문학청년이던 시절, 살기 나빠 고향을 떠났는지, 빚더미에 앉아 어느 밤 야반도주를 했는지 알 수 없는 폐가를 빌려 살았다. 창호를 열면 방 뒤편으로 대숲이 밤새 ‘솨아솨아’ 울어댔고, 밤늦게 사냥 나온 너구리와 오소리 가족들이 내 방 앞으로 슬그머니 지나다녔다. 한밤중에 닭들의 호들갑소리가 들리면 다음날 산책 길 대숲 속 어딘가엔 어김없이 피묻은 깃털 서너 개 떨어져 있었다.

여름내 나무 아래 떨어진 낙과(落果)를 주워 먹으며 시장에서 파는 시큼한 자두가 사실은 이처럼 달콤한 과일이란 걸 처음 알았다.

폐가, 부엌문을 열면 갑자기 들이닥친 햇빛을 피해 지네들이 어둠 뒤편으로
빠르게 뒷걸음질치고, 지네들이 정말 ‘사사삭’ 발자국 소리를 낸다는 걸 알았다. 폐가를 떠나온 뒤로 어느덧 20여년을 살았다. 냉장고, 세탁기, TV도 라디오조차 없이 살았던 그 시절, 나는 누구보다 부자였는데, 이제 이 모든 것을 가진 나는 결국 버릴 것이 나만 남았을 때 비로소 다시 젊어질 수 있겠지.... 그때 나는 과연 홀가분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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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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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1.14 17:14

    지금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 그 무엇하나 버리지 못할것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시를 읽고 나서( 바람구두님 글은 읽고나면 그렇다면 나는 어떤가,하고 생각할 여지를 주곤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지닌것은 또 무엇인가 생각해보면, 버리지 못해 가지고 있는 건 무엇인가 생각해보게 되더군요. 사람도 몇 사람만 정을 트고 걷는 길도 한정된 단순한 길이었으니 버릴 것도 단순하구나 싶어지기도하고요. 다 가지고 있는것 같았는데 하나 하나 떠 올려보니 전 가진게 별로없군요. 이 글을 쓰는 순간
    개 짖는 소리 컹컹 울리는 적막한 들판처럼 서 있는 제모습이 떠 오르는군요. 까닭없이요.

  2. 2011.01.15 22:58

    박경리선생님 시도 바람님 설명 글도 어찌나 가든한지요.
    게가 어딘지 모르지만 바람님께 꼭 어울리는 蔣詡之 三逕이네요.
    달게 익은 낙과가 바구니에 넘치거든 저도 불러주십사...뭐 이런 소망^^

    • 2011.01.17 09:32 신고

      구례였지요.
      첫 사랑의 친구네 고향이라 소개받아 갔던 곳이었습니다.
      그 친구가 이처럼 세월지난 지금도 애틋한 걸 보니
      출세에는 '蔣舍三逕'할 수 있어도
      정에는 그리할 수 없는 못난 서생인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