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멸의 시대 - 20세기와 늑대왕 로보
동물도 인간과 똑같이 감정이 있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이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살아갈 권리가 있다.
- 어네스트 톰슨 시튼(Ernest Thomson Seton, 1860 - 1946)
어려서 다들 『시튼 동물기』나 『파브르 곤충기』를 읽고 독후감 숙제를 해본 경험이 있을 겁니다. 세상 모든 인연이 비슷하겠지만 만남이란 스쳐가는 것이 될 수도 있고, 영원토록 간직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런 '스침'을 순간에서 영원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만남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자세에 놓인 문제겠지요. '시튼 동물기' 완역본이 나왔다는 기쁜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인터넷서점을 통해 책을 구했습니다. 사실 시튼은 한번도 '동물기'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한 적이 없습니다. 이 책의 원제목은 "야생동물들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들 Wild Animals I have Known" 정도의 번역이 어울리겠지만 국내에 소개될 당시엔 일본어판의 중역이었을 것이기 때문에 '동물기'라는 다소 박물지(博物誌)적인 제목이 붙은 것 같습니다. 시튼 자신이 "자연사가 동물들에 관해 너무도 일반적으로 다루는 바람에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고 믿고 있다. 인간의 관습과 풍습에 관한 열 쪽 분량의 소묘로 인간에 대해 도대체 얼마나 알 수 있겠는가?… 중략 … 무관심하고 적의에 찬 인간의 눈으로 바라본 동물 일반에 대한 것이 아니라 어느 한 개체의 개성과 그의 인생관이 바로 나의 주제"라고 밝히고 있듯이 그는 야생동물에 대해 과학적이고 보편적이란 미명 아래 정복과 이용의 대상으로 접근하는 방식을 혐오했다. 그러므로 '시튼 동물기'란 제목은 제목 자체의 밋밋함도 문제지만 시튼의 본뜻이 왜곡된 제목이라 할 것입니다.
어쨌든 번역의 정도를 떠나 조나단 스위프트『걸리버 여행기』에서 L.프랭크 바움의 『오즈의 마법사』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는 완역 붐은 다이제스트 도서들을 통해 아쉬움과 갈증을 느껴왔던 독서가들에게는 가뭄 끝에 단비처럼 즐거운 소식입니다. 다만 완역인 만큼 번역이나 책의 품질에도 신경 써주길 바란다면 너무 대단한 욕심일까요? 시튼 동물기 완역본의 경우에도 그 대상을 초등학교 5·6학년으로 잡았지만 어른이 읽더라도 무난하게 읽을 수 있도록 한 번역은 마음에 들지만 애초 시튼이 집필했던 것처럼(이 책은 <내가 알던 야생동물들>, <동물 영웅들>, <회색곰 왑의 일생> 3권을 완역한 책이다) 3권 정도로 나누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5권으로 나눈 것은 지나치게 상업적(총 17편의 이야기가 5권에 나누어 실려 있다)입니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완역본을 통해 미처 읽지 못했던 여러 야생동물들의 잔인하고도 슬픈 이야기들을 통해 받게 되는 감동을 피할 수는 없을 겁니다. 게다가 시튼의 서문은 구구절절이 감동적인 내용으로 이어지고 있으므로.
"이 책에 실린 이야기들은 모두 사실이며, 여기에 실린 동물들은 모두 실제로 존재했단 동물들이다. 그들은 이 책에서 묘사된 그대로의 삶을 살았지만, 사실 내가 쓴 것보다 훨씬 영웅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개성도 더 강했다. … 중략 … 이 이야기들이 사실이라는 점이 바로 왜 이 모든 이야기들이 비극인가에 대한 이유이다. 야생 동물들의 삶은 항상 비극적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에서 사람들이 성서만큼이나 오래된 하나의 도덕을 발견하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와 야생 동물은 모두 친척이다. 비록 우리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나름대로의 느낌과 소망이 있는 생명체들이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그들 나름의 권리도 분명 있다."
<서문 중에서>
언젠가는 어네스트 톰슨 시튼에 대해 <망명지>에서 좀더 자세하게 다룰 것을 약속드립니다. 쓸데없는 말들이 다소 길었군요. '동물기'에서 제게 가장 감동적이었던 것은 '커럼포의 늑대왕 로보'의 이야기였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짐승이 늑대가 된 이유의 원천이기도 하지요. 내용이 다들 잘 아실 테고, 안 읽어서 모르겠다는 분들은 책을 읽으시라고 권해드릴 테니 한 번 읽어보세요. 다음은 그 중에서도 가장 극적인 부분을 옮겨 본 것입니다.
커럼포(Currumpoe)의 늑대왕 로보
로보의 사나운 눈동자에서 빛이 꺼지기 전에 내가 소리쳤다.
"잠깐 죽이지는 맙시다. 그냥 야영지로 데려가자구."
우리는 이제 기운을 완전히 잃은 로보의 송곳니 뒤쪽에 굵은 막대기를 물린 다음, 턱과 막대를 튼튼한 밧줄로 묶었다. 로보는 막대기 때문에 밧줄을 물어뜯지도 못했고, 밧줄 때문에 막대기를 뱉어 내지도 못했다. 이제 더 이상 사람을 물 수 없게 된 것이다. 로보는 턱이 묶이자 더 이상 발버둥치지도 않았고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저 우리를 차분히 바라보았는데, "드디어 나를 잡았으니, 이제 너희들 마음대로 해라"하고말하는 듯 했다. 그 뒤로 로보는 우리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우리가 발을 단단히 묶을 때도 로보는 신음소리를 내지도 으르렁거리지도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우리 두 사람은 가까스로 로보를 말에 실었다. 로보는 마치 잠을 자듯이 고른 숨소리를 냈고 눈동자도 다시 맑게 빛났지만, 결코 우리를 쳐다보지 않았다. 로보의 눈길은 메사의 벌판을 떠날 줄 몰랐다. 지금까지 로보의 왕국이었던 그 곳에는 한때 이름을 날리던 부하들이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로보는 조랑말에 실려 골짜기로 들어가, 바위산이 앞을 가릴 때까지 하염없이 메사 벌판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천천히 길을 더듬어 무사히 목장에 이르렀다. 그리고 로보를 튼튼한 사슬로 단단히 묶고 목줄을 채워서 풀밭에 말뚝을 박은 다음 올가미를 풀었다. 그제서야 비로소 나는 로보를 꼼꼼히 관찰할 수 있었고, 이 살아있는 영웅이나 폭군에 관해 떠도는 소문이 그야말로 허풍임을 깨달았다. 로보의 목에는 금목걸이도 없었고, 어깨에 악마와 한통속이라는 표시인 꺽어진 십자가가 새겨져 있지도 않았다. 엉덩이에 크고 넓적한 흉터가 있긴 했는데, 소문에 따르면 태너리의 우두머리 사냥개인 주노의 이빨 자국이라고 했다. 로보가 주노를 골짜기 모래밭에 내던져 목숨을 끊어 놓기 전에, 주노가 로보한테 남긴 흔적이라는 것이다.
고기와 물을 곁에 놓아주어 봤지만 로보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로보는 차분히 땅바닥에 엎드려 고요한 황토빛 눈동자로 골짜기 입구 너머에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자신의 들판을 바라볼 뿐, 옆에서 건드려도 털끝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해가 기울고 나서도 로보는 하염없이 들판만 바라보았다. 나는 밤이 되면 로보가 부하들을 불러들일 거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대비했다. 로보가 가장 다급한 순간 딱 한 번 울부짖었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고 그 뒤로 로보는 두 번 다시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힘 잃은 사자나 자유를 잃은 독수리, 또는 짝잃은 비둘기들은 상심해서 죽는다고 한다. 그러니 타협을 모르는 무법자가 힘과 자유와 사랑을 잃고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는가? 내가 아는 것은 오직 하나, 동틀 무렵 로보는 여전히 차분하게 누워있었지만 이미 영혼이 그에게서 떠났다는 사실뿐이다. 늑대왕 로보는 죽은 것이다.
나는 로보의 사슬을 풀고, 목동의 도움을 받아 블랑카의 시체가 있는 헛간으로 로보를 옮겨주었다. 로보를 블랑카 곁에 내려놓자 목동이 큰 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오고 싶어하더니만, 이제 너희 둘은 다시 하나가 되었구나."
시튼 자신이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늑대왕 로보의 이야기는 실제의 이야기입니다. 개척시대의 미국 서부는 총이 지배하는 무법지대였습니다. 이런 무법자들에게는 현상금이 걸렸고, "Dead or Alive"라는 무시무시한 글귀와 함께 현상금을 노리고 이들을 추적하는 현상금 사냥꾼들이 있었죠. 그런데 당시 현상범이 되었던 것은 단지 이런 무법 총잡이만이 아니었습니다. 당시로서는 상당한 거금인 1천 달러의 거금이 걸렸던 것이 바로 이런 네브라스카 늑대들이었습니다. 이 늑대는 시튼이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늑대들보다 훨씬 덩치가 큰 녀석들이었죠. 약 165㎝ 정도의 크기에 체중은 34㎏에서 45㎏까지 나갔습니다. 보통은 시속 8㎞로 이동하지만 긴급한 상황에서는 시속 55㎞에서 75㎞의 속도로 20분 이상 질주할 수 있었고, 예민한 후각은 2.4㎞ 전방의 냄새도 탐지할 수 있었으니 당시의 목장주로서는 여간 골치 아픈 짐승이 아니었을 겁니다. 이 녀석의 영어 이름은 Great Plains Lobo Wolf(대평원의 늑대, 로보)였고, 정식 학명은 Canis lupus nubilus, 분류는 식육목 개과 짐승이었죠.
사냥감의 냄새를 탐지한 네브라스카 늑대는 최단거리에 일를 때까지 주의깊게 접근해 결정적인 기회를 노리다가 기회를 잡으면 단번에 5m나 도약해서 사냥감을 덮칩니다. 습격 직후부터 추격에 나서 보통 수백 미터에서 수 킬로미터까지 추격전을 벌여 자신의 몇 배나 되는 버팔로(이것도 사실 잘못된 표기 방식입니다. '버팔로'는 그냥 '물소'를 지칭하는 말이고, 엄밀히 말하자면 '아메리칸 바이슨'이 올바른 명칭이죠)와 큰뿔산양을 사냥했습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이런 네브라스카 늑대의 탁월한 사냥능력을 대단히 존경했고, 포니족은 사냥 전에 이런 늑대의 행동을 흉내낸 손짓으로 동료들에게 신호를 보내 주변 종족으로부터 '늑대족'이란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들도 늑대를 사냥하긴 했지만 늑대에 대해 경의를 표하는 방식으로 사냥했고, 늑대의 모피 역시 그런 용도로 사용되는 등 한 마디로 늑대와 인디언은 공존의 방식으로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유럽에서 이주해 온 백인들은 늑대와 공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런 네브라스카 늑대를 the Loafer Wolf(깡패 늑대), 또는 Lobo(무법자)로 부르며 혐오했습니다.
더군다나 당시 유럽에서 이주해온 이주민들은 그들의 고향으로부터 늑대에 대한 여러 안 좋은 선입견들, 가령 '늑대인간'과 같은 이야기와 더불어 자신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대상으로서만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Wolfer'라 불리우는 늑대 사냥꾼들을 고용해 네브라스카 늑대의 대량 학살을 시작했습니다. 1870년대부터 1880년대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버팔로 시체에 '스트로키니네'라는 매우 독성이 강한 독약을 주입해 늑대들을 사냥했고, 많은 수의 늑대가 이것을 먹고 죽었으며 늑대뿐만 아니라 독수리, 까마귀, 개, 검은발족제비, 코요테 그리고 꽤 많은 수의 인디언들이 늑대 사냥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네브라스카 늑대들 중에는 강력한 우두머리가 지배하는 무리가 있었고, 그런 늑대들은 미국 서부의 살아있는 전설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강력한 늑대 이야기가 바로 커럼포의 늑대왕 로보와 블랑카의 이야기일 겁니다. 다섯 마리의 늑대를 이끌고 2,000마리나 되는 소를 죽였다는 로보의 머리엔 1,000달러의 현상금이 걸렸고, 여러 사냥꾼들이 덤벼들었으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로보는 역시 늑대였지요. 그는 이성이 아니라 본능으로 살아가는 야생의 들짐승이었고, 암늑대 블랑카에 대한 사랑은 늑대왕 로보의 용의주도함을 마비시켰습니다. 결국 인간과 자연의 대결에서 인간은 또 한 번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무법자 로보의 일생이 끝나고 시튼에게는 1,000달러의 상금이 지불되었습니다. 그것이 1894년의 일이었지요. 그로부터 35년 후인 1927년 6월. 드디어 최후의 네브라스카 늑대가 몬타나주에서 죽었습니다. 이제 서부 개척 시대, 대초원을 누비던 당당한 체구의 네브라스카 늑대는 이 지구상에 단 한 마리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이 살 수 있는 태양계의 단 하나뿐인 행성, 지구 46억년의 역사 속에 수많은 생물들이 명멸해갔습니다. 오늘날 이들 생물 종 하나하나가 지구 생태계를 유지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러나 당시엔 누구도 그런 사실을 몰랐습니다. 중세이래 인간은 다른 생물종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지적 생명체라는 오해 섞인 독선에 빠져 자신들에게 지구상의 모든 생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 증거가 오늘날까지 기록이 남아있는 생물 중에서 절멸된 것으로 확인된 종 수가 726종이나 되고, 현재 절멸 위기에 처해있는 종 중 포유류만 505종에 이르고 있습니다. 절멸한 종 중에서 포유류가 59종으로 이들 대부분은 1900년이래 최근 100년 동안 사라진 것들입니다. 수만년, 수십만년에 걸쳐 진화하며 지구상에 살아왔던 무수한 동식물들이 100년만에 인간에 의해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렸습니다.
『총균쇠』의 저자이자 동물학자 제레드 다이아몬드(J. Diamond)는 지금까지 일어난 종의 절멸 원인을 일러 '악마의 사중주'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과도한 살육', '서식지의 파괴와 분단', '귀화(歸化) 동물로 인한 충격(황소 개구리와 같이)','절멸의 연쇄(먹이사슬의 파괴)'를 말합니다. 우리나라의 현실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전래동요에 등장하며 우리에게도 익숙한 '따오기', 우리나라가 원산지인 '원앙이 사촌' 등은 이제 전세계에 단 3개의 표본이 남아 있을 뿐 살아있는 개체를 확인할 수 없게 되었으며 이외에도 수십에 이르는 생물 종들이 더 이상 우리나라에서 번식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 곁을 떠나는 생물들이 많아질수록 우리들의 미래 또한 예측할 수 없는 것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풍성한 벼이삭 뒤로 날아다니던 메뚜기로부터 산림을 포효하던 호랑이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들이 그들의 수명대로 살며, 자손을 이어갈 수 있을 때 인간도 비로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커럼포의 늑대왕 로보와의 대결에서 인간은 승리했지만 그것이 과연 진정한 승리인지 다시 한 번 되묻지 않을 수 없는 시대에 우리들은 살고 있습니다. 서구인들에게 탐험과 모험, 개척정신으로 상징되는 지구상의 발견 시대가 그들에게 발견당한 입장에서는 침략과 약탈, 노예화의 길이었듯이 20세기의 인류는 물질문명의 풍요로운 시대를 열었다고 자부할지 모르지만 그 뒤안길에서 사라진 생명체들 입장에서 보자면 바로 절멸의 시대였던 것입니다. 지금과 같은 속도로 다양한 생명 종들을 절멸시켜 나간다면 금세기 중 지구상에서 사라질 다음 생명 종은 어쩌면 인류일지도 모릅니다.
당신에게 권하는 참고 서적
시튼 동물기 1-5권/ 어네스트 톰슨 시튼 지음/ 햇살과 나무꾼 옮김/ 논장/ 2000년
총균쇠/ 제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김진준 옮김/ 문학사상사/ 1998년
지구에서 사라진 동물들/ NHK 위성방송 생물의 묵시록 제작팀 편/ 한상훈 옮김/ 도요새/ 2000년
<2002/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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