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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ERACY/바람구두의 유리병편지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과 희망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과 희망*
- 2002년 대통령 선거를 바라보면서


1952년 한국전쟁 중에 치러진 제2대 대통령 선거(직선제)에서 이승만 후보는 74.6%, 조봉암 후보는 11.4%를 얻어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좌·우가 그들의 이념을 실전으로 맞붙은 냉전과 열전의 와중에서 한국의 진보정당이 얻었던 최초의 득표율은 11.4% 였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직후 치러진 제3대 대통령 선거(직선제, 1956년)에서 이승만 후보는 70.0%, 진보당의 조봉암 후보는 30.0%의 득표율을 얻었습니다. 학자들의 견해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이때의 선거에서 눈에 보이는 지지율이 아닌 실제 득표율은 조봉암 후보가 더 앞섰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선거가 공정하게 치러지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 당시 시대 분위기가 지금보다 덜 냉혹했다거나 반공 신념이 덜 했기 때문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선거가 끝나고 이승만 대통령은 진보당의 조봉암을 북한 간첩 혐의로 체포해 사형시켜 버립니다. 이것을 우리 역사는 사법 살인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에서 저는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의 득표율이 정확히 얼마가 나올지, 사회당의 김영규 후보의 득표율이 정확히 얼마가 나올지 알지 못합니다. 다만 뉴스에서 출구 조사로 분석한 결과 민주노동당은 4.1% 내외, 사회당은 0.1% 내외로 이 두 진보(좌파만이 '진보'라는 개념을 독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의 좌파' 아닌 진보정당의 사례를 본 적이 없으므로 통칭하여 사용토록 하자)정당의 득표율을 합해 봐야 채 5%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최소한 우리 사회의 진보에 대한 똘레랑스의 정도가 한국 전쟁 중이나 전쟁 직후였던 50년대만도 못한 수준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증거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번 2002년 대통령 선거는 우리에게 그 사실을 일러줍니다. 투표율이 매우 저조하다는 중간 분석이 나오는 가운데 이번 선거에서 과연 진보정당이 제가 내심 처음 목표치로 설정했던 100만 표 이상 득표를 얻어낼 수 있을 지는 조금 미지수입니다.

우리 사회의 진보가 이토록 지지부진한 원인에 대해서야 여러 분석이 있겠지만 저는 조희연(성공회대 사회학과), 최장집(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가 차용하고 있듯이 안토니오 그람시의 개념을 빌어서 설명하도록 해 보겠습니다. 해방 이후 50여년간 우리 사회를 추동해왔던 틀(그것이 '산업발전'이라는 근대화가 되었든, 민주화가 되었든) 속에 민중이 배제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수동혁명' 또는 '위로부터의 혁명,' '보수적 근대화' 혹은 '보수적 민주화'였습니다. 대중의 참여가 배제된 상태에서 국가가 형성되었고, 산업화가 추진되었으며, 민주화에 이르는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냉전반공이데올로기, 재벌을 성장엔진으로 한 개발경제, 거대화한 국가관료제, 우익 일변도의 반공교육 속에서 우리 사회는 권위주의에 친화적인 사회구조 혹은 도저히 민주화될 것 같지 않은 조건 속에서 민주화를 추진했습니다.

1987년 대중의 거대한 폭발이랄 수 있는 6월 항쟁으로 조성된 해방 공간은 6.29선언이라는 '보수적 민주화'라는 협약을 통해 그 공간이 급속도로 위축되고 협소화합니다. 결국 이런 해방공간의 협소화(실제 정치지형 속의, 그리고 우리들 내면 속에서의 협소화)는 지난 50년간 수없이 많은 명칭으로 변화된 정당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하나는 권위주의 국가 구조가 만들어낸 정당과 해방 정국에서 지주의 이익을 대변한 한민당의 후계정당이라는 보수 양당 구조의 틀로 고착됩니다. 우리들은 이들 정당 명칭의 변천사를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귄위주의 체제 아래에서 만년 야당으로 존재해 온 한 정당에 대해 보수 야당이라는 이름으로 그동안 불러왔습니다.

1987년 민주화의 결과는 역시 보수적 정치질서로 귀결되었습니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이행에 대한 대중의 요구와 개혁에 대한 바램을 저버린 채 결국 일부 정치 엘리트들간의 협약에 의해 부분적인 타협과 정쟁 차원에서의 합의로 이룩되는 절차를 밟아가게 됩니다. 권위주의 정권 하에서 이들에게 도전하거나 타협하며 정치적 이력을 쌓아온 이들에게 가장 큰 두려움은 그간 배제시켜 온 밑으로부터의 불만과 도전이었습니다. 이들은 이런 밑으로부터의 도전에 대해 폭력적으로 억압하거나 일부는 수용하는 방식으로 사회를 통제해 왔습니다. 이들에게 정치는 무엇을 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정치적 자산(부채와 자본)의 가치 변동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한국의 보수 정당들은 양 김의 집권 성공이라는 안락한 보수주의에 빠져 극우와 '죽음의 키스'를 나누며 그들과 한 몸이 되어 뒹굴었습니다.

한국의 진보진영(그 정도를 구분치 않고 통칭해서)은 김대중 정부의 출범을 다소 놀라운 시각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만년야당이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혹자는 이것을 '수평적 정권교체'라 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홍세화가 지적하고 있듯이 남한의 정치 권력 속에서 최초로 극우 헤게모니가 배제되었다는 정치사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사회의 진보진영은, 이로부터 파생된 시민운동단체들은 이만한 변화조차도 매우 극적인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니체 식으로 말하자면 한번 노예근성을 허락한 사람은 결코 그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말처럼 그 변화는 우리 사회에서는 매우 극적인 것으로 보였습니다. 극우를 배제시킨 김대중 정부에 의해 남북대화의 실질적인 진척이 이루어졌고, 전교조와 민노총이 합법화되었으며, 이근안이 감옥에 갔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른바 혼란과 부정부패라는 말로 이제 그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김대중 정부를 청산하는 과정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학교에서 정당에 대해 "정치상의 이념이나 이상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 정권을 획득하여 그 이념이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모인 단체"라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이는 정당에 대한 정의일 뿐이지 정당의 기능에 대한 설명으론 매우 부족한 것입니다. 오랫동안 우리는 자신이 속한 계급의 이해나 신념, 이상에 따라 정당을 선택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으며 정당이란 통,반장들이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하는 그런 것이고, 선거 시즌에나 잠깐 동원되는 것인줄 알았습니다. 대중은 최소한 한국의 정당 정치에 있어서 만큼은 참여하는 주체가 아니라 동원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정당이란 사회적 갈등과 균열을 표출하고 대변하며, 공익과 공공선에 대한 여러 경쟁적인 논의와 이슈들을 정책 대안으로 조직하는 역할을 합니다. 정당은 사회적 갈등의 균열이 격렬하게 대면하는 선거 경쟁의 결과에 따라 정부 여당이 되거나 야당이 됨으로써 정책 결정에 참여합니다.

여당은 정책의 실질적인 추진자로서, 야당은 이에 대한 비판적 조력자 혹은 대안을 제시하여 미래의 개선에 대한 희망과 비전을 제시함으로써 공동체의 이익과 유대를 깨뜨리지 않는 역할을 합니다. 민주주의 하에서 선거란 사회적 갈등과 균열을 표출하는 장이자 사회적 합의를 강제하는 절차입니다. 이때 '사회적 합의'란 당연히 만장일치의 개념이 아닙니다. 물론 과거 권위주의 정부(독재라 해도 무방한)도 이런 사회적 합의란 말을 선점하여 사용해 왔고, 경제발전이란 달콤한 성장의 과실을 통해 절차에 의한 사회적 합의 과정을 생략한 보상을 제시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우리 사회의 여러 갈등 요소들을 봉합하는 차원에서 혹은 갈등을 일부 정치 엘리트들의 것으로 사유화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지금까지 한국의 정당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자산을 보수 유지하는 데에만 급급해서 그간 우리 사회에 존재해온 여러 갈등들에 대해 외면해 왔습니다. 아니 외면만 해온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유리한 갈등만을 취사 선택해서 이를 재가공하는 방식으로 강조해왔습니다. 그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지역감정'입니다. 지역감정을 치유하겠다는 정당도, 지역감정을 극복하겠다는 정당도 결국 우리 사회의 중요 갈등에 대해서는 외면한 채 그들의 당선과 재선에 유리한 갈등 구조인 지역감정 문제만을 집중적으로 부각시켜 마치 그것만이 우리 사회의 지배갈등인 양 사실상 부추겨왔습니다. 마피아의 법칙, 적과 가장 먼저 협상을 주장하는 자가 바로 배신자라는 원칙이 가장 잘 부합되는 부분입니다. 이들은 지역감정에 대한 치유, 극복을 주장함으로써 갈등을 자신의 것으로 사유화합니다. 갈등이란 사유화의 대상이 아니라 사회화의 대상입니다.

민주주의에서 통합이란 사회적 갈등과 균열을 서로 경쟁하는 복수의 정당을 통해 표출하여 이에 대한 해법을 찾고, 대안을 찾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정책적으로 보다 극명하게 보이도록 하는 것은 결국 좌우의 갈등과 대립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정당체제와 정치사는 좌우의 이념적 스펙트럼을 매우 협소하게 조작해 왔고, 강제해 왔습니다. 좌우 이념 대립이 배제된 상태에서 남는 것은 결국 지역감정이었습니다. 이번 대선 결과 역시 아무리 지역 감정을 극복하는 정권이 되겠다고 주장하지만 결국 당락을 결정하는 차이의 가장 중요한 요소에 이 '지역감정'을 배제할 수는 없었습니다.

따라서 현재의 정당구조 아래에서는 지역간 화해, 지역 협력 행사, 공평한 인사정책을 수없이 반복한다 할지라도 결국 지역감정은 극복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보수와 보수가 맞붙는 현실 속에서 지역감정해소라는 공약은 마피아의 협상 주장처럼 결국 사기이고 기만입니다. 좌우이념간의 정책적 대립의 폭이 협소할수록 지역에 기반을 둔 보수 정당간 갈등 구도는 극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정치 현실, 투표 행태의 반복이 깨지기 전에는 지역 감정에 기생하는 수구 보수 정당을 해체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권위주의 정부에 의존해 온 수구 보수 세력이 권력이라는 실질적 헤게모니를 상실한 상황에서 - '보수적 민주화' 이후 - 우리 사회에서 이를 대체할 최고의 권력 기관으로 부상한 것은 수구 보수 세력의 기득권을 위해 복무해온 언론 기관들이었습니다. 언론기관은 기존 수구 보수 세력의 이익은 물론 우익 세력의 이익에 충실히 복무하며 우리 시민사회의 다양한 요구와 이해를 반영해야 한다는 역할을 외면해 왔습니다. 그 결과 시민사회의 욕구는 좌절되었고, 이런 좌절은 여러 경로를 통해 표출되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안티 조선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라는 압력솥은 다양한 갈등과 요구로 끓어오르고 있는데 그 모든 출구는 막혀있고, 비등점이 한계에 다다른 순간 조그만 틈만 있다면 그것은 놀라운 기세로 뿜어져 나오게 될 것입니다. 저는 '노풍'과 '정풍'의 일단이 거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는 그간의 모든 갈등과 다양한 이해를 해결해줄 방편으로 영웅적 해결사를 갈구한 것입니다. '영웅적 해결사'는 우리 사회의 다양한 요구와 이해를 반영하는 절차를 밟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제시하는 정책과 해결책엔 우리가 정당에 기대하는 것과 같은 원칙과 이념이 상대적으로 희석되어 나타납니다.

영웅적 해결사는 정책적 대안이나 이념을 먼저 제시하지 않고, 이를 둘러싼 갈등의 표출, 정책 대결로 등장하지 않고, 인물에 대한 믿음과 신뢰, 과거 전력으로 후보가 되고, 대통령이 된 뒤에 비로소 정책 대안을 만들고 새로운 통치 이념을 만듭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영웅적 해결사는 애초에 그를 지지한 기대에 부응하기도 어렵고, 안정적인 개혁을 추진하기도 어려운 상황에 봉착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때 예측 가능한 정책이나, 인선보다는 여러 의외적인 결과, 돌출상황들과 맞닥뜨리게 됩니다. 이번 대선을 치르는 과정에서도 우리는 이미 여러 돌출상황들과 맞물려 여러 차례 절차적 합의가 번복되고 부인되는 것을 지켜봐 왔습니다. 정치적 결정이란 지난 번 프랑스 선거가 잘 증명해주고 있듯이 어느 정도 인과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민주주의는 제도화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좌파는 당장 눈앞의 선거에서의 승리를 위한 단합보다는 이런 정치적 결정의 인과성을 지켜내기 위해 눈앞의 이익을 외면했고, 그 결과 선거에서 패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를 비롯한 세계 어느 나라 정파도 이들의 정치적 결정을 우둔한 짓이라고 비판하지 않습니다.

앞서 저는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은 특정정치인이나 정당에 의해 사유화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화해야 해결 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유권자들은 중국, 일본을 비롯한 외국의 정치학자들이 바라보기에도 놀라울 만큼 변화 지향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사회는 그간의 변화 욕구를 기존의 정당 시스템이 충족시켜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대중에 의해 불안정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런 불안정한 상황을 반영하는 바로미터는 바로 투표율의 저하입니다. 자신의 갈등(정치적 이해, 이념)을 극명하게 대변해주지 않는 정당은 앞으로 그 존재가치를 잃게 될 것입니다. 이번 선거를 통해 드러난 낮은 투표율에 대해 경각심을 갖지 않는 정당은 결국 도태될 것입니다. '민주주의의 위대한 엔진'은 대중의 정치 참여입니다. 진보를 주장하는 정당도, 개혁을 주장하는 정당도 결국 대중의 정치 참여 없이는 엔진이 빈약한 정당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시점에서 진보를 표방하는 정당은 자신들이 그어야 하는 갈등과 균열의 전선을 어디로 할 것인지를 좀더 고민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긋는 전선에 따라 앞으로 장착하게 될 엔진의 출력이 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앞서 지적한대로 우리 사회의 중심 갈등에 가로놓인 여러 위태로운 요소들은 잠재적인 진보정당의 지지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이해관계를 누가 대변하는지 알 수 없게 만들었고, 설령 알더라도 여러 위협들로 인해 자신의 정치적 열망을 솔직하게 표현할 수 없도록 구조화하고 있습니다. 이번 대선에서도 진보정당 지지자들은 자신의 솔직한 정치적 의사를 이런 위태로운 요소들 - 가령 사표 논리, 최악의 후보론, 전쟁불사론, 비판적지지, 전략적 투표행위, 막판 위기론, 정몽준의 지지철회에 따른 동정론, 진보정당의 입지 마련을 위한 우선 지원론 주장 등 -로 인해 유형무형의 온갖 압력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런 압력의 결과 표면적으로 드러난 진보정당의 지지도는 5%도 안 되는 것이 되었고, 이것을 현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물론 차기 대통령 당선자의 공약대로 우리 사회의 진보정당의 입지가 다소 넓어질 수 있다는 기회가 된다는 점에서 이를 반길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갈등 구조를 또다시 왜곡한 투표 형태가 되어버렸다는 점에서 평소 스스로를 진보적 좌파로 자부한 지식인이었다면 자신의 비판적 지지 행위에 대해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비록 결선투표제가 없다는 구조적 모순이 있기는 하지만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현재의 정치 현실이라면 다음 대선에서도 역시 지역에 기반을 둔 보수 정당간의 대립은 재연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왜곡된 투표 행위는 시정될 수 없으며 보수적 민주화에 의한 우리 사회의 중요 갈등 요소는 잠재적인 폭발의 위협 속에 고스란히 노출된 상황이 지속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사회에든 진보와 보수의 대립은 있기 마련이며, 정치적 좌파와 우파의 갈등 역시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문제는 극우와 맞서는 좌파의 수나 세력이 너무 적다는 데에만 있지 않습니다. 좌파가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아직도 고민하고 있거나, 일정한 수준의 보수적 민주화에 너무 일찌감치 만족한 나머지 예전의 분열 양상을 재현하려 한다는 데 그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늘상 여러 지식인들에 의해 지적되어 왔듯이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보수다운 보수, 극우와 싸울 줄 아는 보수가 없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진정한 보수 우익을 자부한다면 당연히 극우 세력의 위험에 대처해야 합니다. 진정한 보수 우익이라면 좌파와는 열린 대화가 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하고, 극우와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는 보수와 자칭 보수를 자칭하는 수구의 안락한 연대 속에 정책상의 차이는 없으면서도 지역의 차이로 차별을 강제하거나, 아니면 상대 후보의 과거에만 집착하는 형태의 선거만을 치러왔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선거는 그에 대한 개선과 한계를 보여주었습니다. 분명하진 않지만 보수와 보수 사이에서의 정책의 차별성을 일부 보여주었고, 진보정당에 대해서도 분명 대화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는 정당의 출현 가능성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던 문제들 역시 고스란히 노출되고 있다는 문제도 지적하고 싶습니다. 이제 새로 출범하는 정부의 가장 큰 걸림돌은 이번 선거에서 패배한 상대당이 아니라 한국의 언론이 될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 사회의 권위주의가 남긴 유산의 거의 마지막 집합체이며 진보정당과 노동자, 농민의 숨통을 죄고 있는 최후의 전선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노동자의 파업 등, 우리 사회의 갈등이 표출되는 사건을 바라보면서 절대로 왜? 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습니다. 그 원인과 해법을 찾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결과만을 보도하고 철저히 현실논리에 입각하여 파업과 시위의 결과가 파생시킨 부정적인 결과들만을 확대합니다.

이제 새해가 시작되고, 새로운 정부가 출범하게 되면 우리 사회에서는 그간 외면 당하고, 무시당해 왔던 온갖 갈등들이 새롭게 표출될 것입니다. 지난 5년간 김대중 정부 하에서 이루어지지 못했던 숱한 개혁의 약속들, 이를테면 IMF와 경제구조개혁이라는 정부의 일방적인 주장과 정책에 억눌려왔던 노동자들의 요구, 쌀 개방과 자유무역협정에 따른 농민들의 요구, 남북 화해와 협력을 좌절시키고 자신의 이익을 강제하려는 미국의 요구, SOFA 개정 문제, MD체제 종속을 요구하는 미국의 이해와 상충되는 우리 주변 강대국들 사이에서의 외교 관계를 비롯해서, 선거 시즌을 맞이해 풀어놓았던 숱한 공약의 부메랑들이 몰매가 되어 돌아올 것입니다. 게다가 그는 대중의 요구에 따라 정치 개혁 프로그램도 추진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그 시점에서 누가 우리의 적이고, 아군인지 보다 정확히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새로 출범하게 될 노무현 정부의 개혁이 어떤 것이 될 것인지를 말입니다.

그때 당신의 적들은 먼저 이런 말을 할 것입니다. 그들은 짐짓 노동자와 농민의 안타까운 처지를 동정하며 시위와 파업 등으로 인해 시민들이 일상생활에 불편을 겪는다. 이런 혼란은 결국 국가 경쟁력을 약화시키고, 국가 대외 신인도 문제를 발생시킬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처음엔 달콤한 태도로 대화와 타협을 요구할 것입니다. 정부의 미온적인 태도를 질타할 것입니다. 정권 출범 이후 한동안 납작 엎드려 있던 재벌과 언론은 그리고 우리 사회 수구 세력들은 성장과 생산성 저하, 증시 불안 등을 이유로 정부의 미온적인 대처를 질타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정부에게 정당한 행정 조치들을 요구할 것입니다. 바로 그 시점에서 개혁은 또다시 좌초할 위험에 고스란히 노출될 것입니다.

한국의 개혁적 보수(이것은 비단 자칭 보수인 수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들은 우리 역사상 단 한 번 이번 선거에서만 단지 세 차례 열린 대선 후보 합동 토론회가 불러일으킨 반향만을 놓고도 엄청난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미국의 지난 대선 결과를 왜곡(네이더의 지지 계층과 전통적인 민주당의 지지 계층이 달랐다는 점)해 알리거나 사표, 비판적 지지, 전략적 투표행위, 전쟁불사론, 심지어는 동정표까지 호소해 왔습니다. 그리고는 너나할 것없이 이번 대선의 가장 큰 수혜자로 민주노동당을 꼽습니다. 이것은 우리 사회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제도적, 구조적 장치들을 통해 진보정당을 무시하고 외면해왔는지를 잘 보여주는 처사이자 반응입니다. 아시다시피 우리의 대통령 선거제도는 결선 투표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국회의원 선거 역시 정치적 소수의 목소리를 담아낼 수 있는 제도적 장치(비례대표제 등)가 미흡합니다.

우리의 교육은 그동안 반공이데올로기만을 주입하도록 강요당했고, 그 결과 우파와 좌파의 차이가 무엇인지 구분할 수 있는 방법조차 알 수 없도록 했습니다. "우파 : 적은 세금, 가진자 위주, 성장 중심, 개인의 경제적 자유 강조, 좌파 : 많은 세금, 없는 사람 위주, 분배 중심, 개인의 정치적 자유, 평등 강조"라는 등식은 우리 사회에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소득층일수록, 교육의 혜택을 적게 받을수록 정치적으로 우파를 선호하는 투표 형태가 그 증거입니다. 이번 선거는 우리가 그간 치러왔던 그 어떤 선거보다도 정책 대결의 비중이 컸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어느 정책이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인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투표행위가 무엇인지 구분하는 민주의 학습장으로서 이번 선거는 과연 합리적인 방식으로 치러졌는지 우리는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 단적인 예로 이번 선거에서 내 걸린 무수한 공약들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누가 대통령이 되었든 엄청난 재원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번 대선 토론회에서 그나마 명백한 재원을 밝힌 후보가 누구인가를 생각해보면 될 것입니다. 결국 그 모든 공약이 정책화되어 추진되기 위해서 현재의 조세 정책대로라면 기층 민중은 더욱 허리띠를 졸라 맬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까지 치러진 선거는 그 과정에서 정책 토론은 사라지고, 후보 개인의 이미지에 치중하거나 지역, 색깔론의 말 잔치에 불과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나마 희미한 정책적 차이는 드러나지 않았고, 선거란 단순한 이미지 경쟁이나 각 지역간의 인구 증가도를 측정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졌으며 국내외적인 변수들 가령 북풍이나 안보 위기 등에 의해 손쉽게 좌우되었습니다. 몇 십년만에 최초로 양당 구도 하에 치러진 선거였음에도 불구하고 진보정당의 참여와 활약은 우리 대통령 선거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진보정당은 우선 선거 때마다 불어왔던 색깔론 공방의 가장 확실한 방패가 되었으며, 후보 개인에 대한 선호도, 지역 대결 구도의 균열을 가져왔고, 각 당의 정책과 그 지지기반의 차이를 부각시키는 긍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혹자는 지난 지방 선거에서 이룩한 8.1%의 지지율을 민주당에 실망한 유권자들의 지지가 유입된 결과로 분석하고 그 지지율을 허수(虛數)로 평가 절하하려 했으나 진보정당이 이번 선거에서 불러일으킨 바람은 그 지지율이 결코 우습게 볼 것이 아니며 우리 사회의 신선한 정치적 대안이 존재함을 부각시켰다고 볼 수 있습니다.

권 후보와 민주노동당 그리고 사회당은 돈 안 드는 선거, 당원의 자발적인 참여로 뒷받침되는 정당의 모범을 보였으며 색깔론 공방을 잠재우고, 지역 감정 균열, 정책 대결 중심의 선거 문화 정착 등은 우리 정치사에 커다란 공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모든 결과가 단순히 진보정당의 몫만은 아닐 것입니다만 그 가장 큰 공헌자임에는 분명할 것입니다. 더욱이 이번 선거에서 몰아친 노무현 바람의 배후엔 전쟁불사론자로 낙인찍힌 이회창 후보의 당선 절대 불가라는 당면과제를 위한 전략적 투표행위가 분명히 존재했다는 점입니다. 결국 민주노동당을 비롯한 진보정당의 득표율과 잠재적 지지율 사이에는 훨씬 큰 격차가 있을 것이라는 추측은 합리적인 예상일 것입니다. 노무현 후보의 대통령 당선은 우리 사회에서 극우를 배제한 합리적 보수, 개혁적 보수 우파의 정권 연장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민개혁정당(아직은 그 정체성이나 이념이 모호한)이라는 힘찬 엔진을 달고 출발하는 노무현 정부의 한계 역시 이미 어느 정도는 예정되어 있습니다. 비단 국민통합21과의 정책공조와 같은 문제만이 아니라 앞서 이미 지적한 숱한 난관들을 뚫고, 정치 개혁(소수파 정권의 한계)을 이룩해야 하며 구조적인 부분의 개혁(진보정당의 성장) 없이는 불가능한 지역 감정을 극복해야 하며, 향후 5년간 7% 성장(세계 경기 불황의 조짐)이라는 여러 문제점들이 새로운 정부 앞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정부는 4개의 관계를 풀어가야 합니다. 노동자·농민, 지역, 북한, 미국과의 관계. 이 중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과제들입니다.

민주노동당으로 대표되는 진보정당, 좌파 정당도 마찬가지입니다. 채 5%가 되지 않는 득표율이 말해주듯이 아직 우리 사회에서 좌파에 대한 지지도나 이해도 혹은 이해도와 득표율은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정파로서 우리 사회의 좌파 세력이 가진 수가 그만큼 적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현실적으로 과거 민주노동당은 진보정당, 좌파정당의 유일한 적자를 자부할 수 있었으나 더 이상은 그런 현실이 아님을 깨달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사회당이 출범했고, 조만간 민주사회당이 출범합니다. 현재의 정치 상황 안에서 진보에 대한 덕목은 국민개혁정당과 나눠가져야(좌파 입장에서는 조금 부당하지만) 할 판이고, 좌파 정당으로서의 덕목은 과거 80년대 운동 구성원들 사이를 치명적으로 갈라놓았던 NL, PD의 재현 조짐까지 보이고 있습니다. 민주노동당의 내부는 물론 외부에서도 이런 문제는 심각하게 비춰지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좀더 많은 자발적인 시민 당원들, 지지자들의 확보 노력 역시 병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과거 역사를 비춰보았을 때 보수 정당은 기득권 세력과의 야합, 부패로 망하고, 진보정당은 분열로 망해왔습니다. 물론 신념과 이상을 위해 움직이는 좌파의 분열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겠습니다만 같은 좌파, 진보 사이에서도 이번 선거뿐만 아니라 지난 시기에도 어떤 공조, 연대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들의 미래를 위해서도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민주노동당 아니 우리 사회의 좌파 정당이 아이러니하게도 이회창 후보의 말대로 '수권정당'이 되기 위해서는 좀더 책임있는 자세를 보여야 할 때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번 대통령 선거를 치르는 내내, 대통령 선거를 치른 뒤에 노무현 후보의 당선을 바라보면서 환호가 없는 선거의 비참함을 새삼 깨우쳤습니다. 왜 우리의 선거가 의미가 없었겠습니까. 그 누가 냉혹한 역사의 현실 속에서, 영하의 엄동설한 속에서 진보의 이상과 신념을 위해 투쟁해 온 이들의 싸움을 감히 패배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들은 그 이상과 신념을 위해 지금까지 사회의 곳곳에서, 일상에서 한치의 양보도 없이 싸워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노 후보의 당선을 뼛속 깊이 기뻐하는 지지자들의 함성 소리를 지켜보면서 어쩔 수 없이 성냥팔이 소녀가 쇼 윈도우 너머의 케이크를 바라보는 슬픔에 젖어 들었습니다. 승리는 언제나 달콤한 유혹이기 때문이겠죠. 우리의 미래가 오늘의 결과인 것은 무시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겠죠. 그러나 저는 우리 사회, 인류 공동체의 진보와 연대라는 희망을 믿기에…달콤한 잠시의 케이크를 사양합니다.

* 저는 이번 선거 기간을 통해 가까운 친구, 친지, 동료들, 존경했던 사람들과도 마음속으로 잠시 불화 했습니다. 이곳 망명지를 찾는 이들의 마음도 다소 불편하게 만들었을 겁니다. 그러나 이 망명지의 애초 모토가 자유, 반항, 연대, 마이너리티의 정신이었다는 점을 기억하신다면 이런 저의 슬픔과 희망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해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저와 함께 끝까지 정치적 소신을 함께 해준 분들에게 특별한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리고 이와 똑같은 이유로 노무현 후보 지지자들에게도 역시 감사와 축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리고 광화문 추모 시위에 한 번 다녀올 때마다 몸살에 시달리면서도 끝까지 함께 해준 동지이자 동반자인, 이번 선거를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지켜보며 제가 괴로워할 때마다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제 아내에게 특히 사랑과 감사, 그리고 존경의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제목으로 달린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과 희망"은 이 글을 쓰면서 참고한 홍세화 선생의 최근작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에서 따온 것입니다. 최장집 교수의 신간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도 참고했습니다. 그 외에도 제 어설픈 사유 속에 녹아든 많은 것들이 있겠지만 여러분에게 이 두 권의 책을 추천하는 차원에서 밝혀둡니다. 최종 개표 결과, 민주노동당은 94만여 표로 3.9%의 득표율을 얻었습니다.

<2002/1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