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가(Po Karekare Ana)
만약 누군가에게 "Po Karekare Ana"라는 노래 아세요? 라고 묻는다면 십중팔구는 무슨 노래인지 되묻게 될 것이다. 키리 테 카나와(Kiri Te Kanawa)가 부른 마오리족의 전통 민요라고 설명한다면 아는 사람은 물론 더 늘어날 것이다. 하지만 "비바람이 치던 바다 잔잔해져오면, 오늘 그대 오시려나 저 바다건너서~"라고 이 노래의 첫 소절을 불러주면 모르는 사람이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세계적인 음반 레이블인 EMI가 지난 20세기 발매하는 마지막 앨범으로 선정했던 키리 테 카나와의 앨범 "마오리 송Maori Songs"에 담겨졌고, 21세기를 맞이하기 위해 1999년 12월 31일 뉴질랜드 기스본에서 열린‘2000 투데이’행사 때 뉴질랜드 심포니 오케스트라와의 협연되었던 곡이기도 하다.
우리는 키리 테 카나와의 <마오리 송> 앨범에 담긴 노래들 대부분을 마오리족의 전통 민요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이 음반에 담긴 곡들의 상당수는 구전 가요라기 보다는 1900년대부터 1910년대 사이에 유럽의 음악을 받아들인 마오리인들이 그들의 풍으로 새롭게 만든 노래들이 상당수라고 한다. 엄밀히 말하면 마오리족도 뉴질랜드의 원주민은 아니다. 그들보다 먼저 뉴질랜드에 거주하고 있던 원주민들은 모리오리족으로, 그들은 멸종된 모아새를 사냥하며 뉴질랜드에 살고 있었다. 뉴질랜드로 이주해온 마오리족은 모리오리족과의 경쟁에서 승리하였고, 모리오리족은 다른 섬으로 이주해 가야 했다. 뉴질랜드를 최초로 찾은 서구인 네덜란드 출신의 탐험가인 아벨 반 태즈만(Abel van Tasman)이었다. 1642년 지금의 오스트레일리아 근처를 항해하다 우연히 뉴질랜드의 서부 해안에 도착한 태즈만은 부하 몇 명을 시켜 이 부근을 탐사하게 했으나 마오리족의 공격을 받아 살해당한 뒤 잡아먹히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이곳을 자신의 고향인 젤란드(Zeeland)의 지명을 따 '노바젤란디아'라 명명했는데, 뉴질랜드라는 국명은 이를 영역한 것이다.
그후 영국의 J.쿡 선장이 1769 ~ 1777년 두 차례에 걸쳐 뉴질랜드를 탐사했고, 영국인들의 본격적인 식민 진출이 시작되었다. 영국의 식민지 정책이 추진되면서 이주해온 백인과 마오리 원주민 사이에 토지 매매와 관련된 분쟁이 일어나면서 1843~1870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마오리 전쟁이 일어났고, 그 결과 많은 마오리족이 급감하는 결과가 빚어졌다. 그러나 당시 영국은 미국의 독립 전쟁과 캐나다 식민지 경영 등에서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그레이 지사(知事)는 마오리족의 반영(反英)감정 완화, 식민지 회의에 마오리족 대표를 참가시키는 등 영국인과 동등하게 대우하는 정책을 썼다. 1840년에는 마오리족 지도자들과의 사이에서 와이탕이 조약을 맺는 등의 노력을 기울여 1870년부터는 사실상 인종분쟁이 끝나고 마오리족의 영국화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영화 <전사의 후예>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백인이 지배하는 뉴질랜드 사회에서 마오리들의 불평등한 조건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다.
"Po Karekare Ana"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 찾은 외국의 인터넷 사이트의 소개에 의하면 이 노래는 작자 불명의 마오리 전통 민요로 1914년 P. H. Tomoana에 의해 편곡되어 1917년 제1차 세계대전 중 초연되면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한다(일설에는 구애 의식용 노래라고도 하는데 확인하지 못했다). 우리나라에 이 노래가 알려진 것은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뉴질랜드 참전 병사가 불러 알려지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오늘날엔 우리나라 사람들도 배낭 여행이나 기타등등의 이유로 오스트레일리아나 뉴질랜드를 찾을 일이 많아서 낯이 좀 익은 지명일 텐데, 이 노래에 얽힌 마오리들의 전설 같은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곳이 바로 뉴질랜드의 유명한 관광지인 로터루아(Rotorua) 호수(뉴질랜드 북섬 중앙에 위치한 로터루아(Rotorua)는 도시 전체가 대지열 지대의 온천 도시이다)이다. 그 이야기를 소개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마오리족은 본래 '태평양의 바이킹'이라 할만큼 항해에 능한 민족이었고, 전사로서의 영예를 매우 높이 평가했다. 마오리 전사들의 유명한 문신인 '모코' 역시 그들의 높은 긍지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아주 오래된 옛날 로터루아 호수 안에 있는 모라이아 섬에는 아래하 부족이 살았고, 로터루아 호숫가에는 흰스터 부족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아래하 부족 추장의 딸인 히네모네와 흰스터 부족의 젊은이 두타니카는 처음 본 순간 서로 사랑하게 되었지만 이 두 부족은 오랜 반목으로 서로 갈등하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만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게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의 사람은 그런 어려움쯤 대수롭지 않았다. 두타니카는 밤만 되면 로터루아 호숫가에 나와 피리를 불었고, 피리소리를 들은 히네모네는 아버지와 부족 사람들 몰래 카누를 저어 호수를 건너와 두 사람은 밤새 서로를 붙들고 놓아줄 줄 몰랐다. 밤이 새고 새벽이 올 무렵 히네모네는 아쉬움을 달래며 두타니카의 손을 놓고 다시 섬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이 사실을 알게 된 히네모네의 아버지는 불같이 화를 내며 섬의 카누를 모두 불태워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이 사실을 모르는 두타니카는 그것도 모르고 피리를 불었다. 피리 소리가 고요한 로타루아 호숫가에 울려퍼지자 히네모네는 연인 두타니카를 보고 싶은 마음에 자신의 몸에 표주박 수십 개를 동여매고 호수를 헤엄쳐 갔다. 딸의 목숨을 건 사랑에 아버지는 결국 굴복하고 말았고, 마침내 이 두 부족도 화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전설에는 당연히 다른 판본도 존재하기 마련인데, 위의 이야기가 "그래서 두 사람은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다"는 버전이라면 다른 버전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연가>의 느낌과 비슷한 이야기이다. 두 연인은 부족의 눈치를 피해 호수에 있는 조그만 섬으로 도망쳤는데 어느날 부족 마을에 다녀온다던 연인 두타니카가 사고로 돌아오지 못하게 되자 섬에 갇힌 히네모네가 그를 그리워하며 부른 노래라고도 한다.
Po Karekare Ana
Pokarekare ana nga wai o Waiapu,
Whiti atu koe hine marino ana e.
E hine e hoki mai ra. Ka mate ahau
I te aroha e.
Tuhituhi taku reta tuku atu taku ringi,
Kia kite to iwi raru raru ana e.
Whati whati taku pene ka pau aku pepa,
Ko taku aroha mau tonu ana e.
E kore te aroha e maroke i te ra,
Makuku tonu i aku roimata e.
(키리 테 카나와의 노래를 들으며 조금만 노력하면 원어로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Now is the hour
They are agitated the waters of Waiapu, cross over girl 'tis calm.
Oh girl
return (to me), I could die of love (for you).
I have written my letter
I have sent my ring, so that your people can see (that I am) troubled.
My pen is shattered, I have no more paper (But) my love is still steadfast.
(My) love will never be dried by the sun, It will be forever moistened by my tears.
연가
작사/ 이명원
노래/ 은희, 바블껌, 쉐그린 등
비바람이 치던 바다 잔잔해져오면 오늘 그대 오시려나 저 바다건너서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빛도 아름답지만 사랑스런 그대 눈은 더욱 아름다워라
그대만을 기다리리 내사랑 영원히 기다리리.
그대만을 기다리리 내사랑 영원히 기다리리.
키리 테 카나와가 이 노래를 부를 때 머나먼 이역 만리 한국 사람들이 이 노래를 따라 불러서 매우 놀란 적이 있다고 한다. 사실 한·일전에서 우리 측 응원단이 우리 노래인 줄 알고 불렀던 <마징가Z>,<은하철도 999> 등의 만화 주제가가 나중에 알고 봤더니 일본 노래였더라 하는 이야기는 이제 모르는 이가 거의 없을 것이다. 꼭 이런 만화영화 주제가만이 아니라 우리가 알게 모르게 불렀던 대중가요 혹은 동요 중에서도 이렇듯 외국 곡을 번안하여 부른 노래들이 상당수 있다. 가령 "날이 밝으면 멀리 떠날 사랑하는 님과 함께 마지막 정을 나누노라면 기쁨보다 슬픔이 앞서 떠나갈 사 이별이란 야속하기 짝이 없고 기다릴 사 적막함이란 애닲기가 한이 없네…" 같은 노래나 "아름다운 노래 정든 그 노래가 우리 마을에 메아리 쳐 오면 어둡던 내 마음 멀리 사라지고 나도 모르게 노래 불러봐요…", "꽃잎 끝에 달려 있는 빗줄기 이들을 찾아와서 음 어디로 데려갈까"와 같은 노래들은 외국의 가요나 민요를 번안한 것들이다.
앞서 키리 테 카나와의 <마오리 송> 앨범에 수록된 곡들 중 상당수가 유럽풍으로 편곡되었거나 그 무렵 새롭게 창작된 곡들이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서구 문화의 영향을 이식 혹은 받아들여야 했던 대개의 나라와 민족들은 대개가 다 경험한 것이었다. 우리가 오늘날 국가라고 부르는 애국가 역시 1896년 12월 21일 독립문 건립 정초식 자리에서 스코틀랜드의 민요"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에 윤치호가 지은 노랫말을 붙여 배재학당 학생들이 부른 노래라고 한다(윤치호가 훗날 악질적인 친일파로 변절한 까닭에 오늘날 애국가의 작사자는 그저 불명으로 치부해버리긴 하지만, 태극기를 만든 것으로 알려진 박영효 역시 친일파였다). 그런데 이런 일을 비단 세계 열강에 의해 국권을 침탈당하던 시기의 우리 민족만이 겪은 일이라고 할 수는 없다. 비록 우리 국가의 가사를 쓴 사람과 국기를 만든 이가 훗날 매국노가 되긴 했지만 어쨌든 안익태 선생이 작곡하고, 우리나라 사람이 작사했으니 어떤 점에서는 일본의 기미가요보다는 그래도 처지가 좀 낫다고 해야할지도 모르겠다. 기미가요는 1868년 일본에 있던 영국인 군악단장 존 펜턴(John Fenton)이 처음 서양곡으로 편곡했으나 당시에는 국가로 사용되지 못하고, 훗날 독일 음악가 프란츠 에케르트(Franz Eckert)에 의해 완성된 것이었다. 국가가 한 나라를 상징하는 노래라고 했을 때 일본의 입장 역시 그다지 떳떳할 것은 없다고 해야할지 아니면 동병상련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런 생각을 담아 오늘 <유리병편지>는 키리 테 카나와의 노래로 "Po karekare ana"를 보내드린다. 키리 테 카나와는 1944년 3월 6일 뉴질랜드의 기스본에서 마오리족 남자와 아일랜드 여자의 사생아로 태어났으나 친부모가 양육을 포기하여 양부모 밑에서 성장하게 된다. 그런데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그녀를 키운 양부모 역시 마오리족 남자와 아일랜드계 여인이었다. 그녀의 양어머니는 음악적 소양이 있는 이로 자신들의 딸이 음악적 재능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딸의 음악적 재질을 개발해주기 위해 키리 테 카나와가 12살 무렵엔 오클랜드로 이사하기까지 한다. 1971년 <피가로의 결혼>에서 백작 부인 역으로 출연하면서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하게 되면서 영국 찰스 황태자의 결혼식 때는 축가를 부르기도 했다. 그런 공로를 인정받은 탓인지 영국 왕실로부터 남자의 `기사(Knight)' 작위에 해당하는 `데임(Dame)' 칭호를 받기도 했지만 그녀는 뉴질랜드 국적을 버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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