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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ERACY/바람구두의 유리병편지

이라크 전쟁 무엇이며, 무엇을 할 것인가?


이라크 전쟁 무엇이며, 무엇을 할 것인가?

대한민국은 지금 새로운 역사 앞으로 나가고 있다.

그런데 나는 얼마 전 뉴스에서 고건 신임 총리가 전화 인터뷰를 통해 "한미동맹의 강화와 결속을 유지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 때와 마찬가지로 공병과 의무 부대를 중심으로 이라크전쟁에 한국군을 파병하며 UN결의 이전에 미국의 이라크 공격에 동의하는 의사 표명을 해야할 것이다." 라는 요지의 말을 하는 것을 보았다. 공병과 의무, 수송부대의 파병은 물론 전투를 목적으로 하는 보병부대나 기갑부대, 전투헬기 부대를 파병하는 것과는 분명 다른 것일 게다. 그러나 이는 공병과 의무, 수송 부대를 엄호해줄 경비부대의 파병도 동시에 의미한다. 문제는 우리가 전세계 양심적인 시민들이 부도덕한 전쟁이라 지탄해 마지않는 이라크 전쟁에 우리 병사들을 내보내야 하느냐는 것이다.

물론 우리의 정치, 사회적 현실이 이를 감내하지 않으면 안될 처지에 있다 하더라도 과연 우리가 앞장서서 UN 결의 이전에 미국의 입장을 지지하는 외교를 해야할 것인가?

며칠 전 친구와의 통화 중에 나는 이것이 21세기에 재현되는 "제2의 아편전쟁"이라 했고, 그는 "무장 해제" 하라 해서 무장해제했더니 그래도 안되겠다며 카르타고를 침공해 초토화시켜 버린 "제3차 포에니 전쟁"에 비교했다. 그렇다. 이라크 전쟁은 그 전쟁의 부도덕함으로는 "아편전쟁"에 비유될만하며 그 전쟁의 잔혹함과 냉정함, 그리고 치사함으로는 "제3차 포에니 전쟁"에 버금갈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이라크 전쟁 위기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이 전쟁의 미국측 명분 중 하나이자 뿌리가 된 걸프전부터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중동에서의 국지전 - 석유(Oil)자원을 둘러싼 서구 열강의 각축, 걸프전

중동의 국경선은 19세기 유럽의 이해관계에 의해 그려졌다. 그리고 한 때는 서구 유럽이 아랍의 독립을 지원한 적이 있다. 우리도 데이비드 린 감독의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통해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유럽(그중에서도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의 승리를 위해 아랍의 지원이 필요했으므로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식민지였던 아랍의 독립을 지원했다. 1915년 아랍의 총독이었던 맥마흔은 전후 팔레스타인에 아랍인들의 독립국가를 수립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리고 1917년 전쟁에서 유태인들의 도움이 필요했으므로 팔레스타인에 유태인 민족 국가 수립을 지원하겠다는 선언을 한다. 이것이 발포어 선언이다. 한편 1916년엔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사이크스-피코' 비밀협정을 맺는데 이것은 전후 시리아와 쿠웨이트를 연결해서 북쪽은 프랑스가 남쪽은 영국이 갖는다는 것이었다. 아랍인들이 전통적으로 서구에 대해 갖게되는 반감의 뿌리는 십자군 전쟁에 이르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뿌리 깊은 것이기는 하나 근대에 이르러서도 지속되는 한 원인이 여기에 있다.

중동 지역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두 차례의 중요한 정치적 혁명을 겪었다. 1958년 이라크에서 영국 제국주의를 대변하던 왕정이 붕괴되는 군사혁명이 있었고, 1979년 이란에서는 팔레비 왕정이 회교혁명에 의해 붕괴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체제의 강화를 위해 값싼 원유의 확보가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되면서 미국은 중동에서 안정적인 석유자원을 공급해 줄 정치 세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전후 고조되는 아랍 민족주의는 서구의 거대 다국적 기업들에 의해 지배당하는 자국의 석유자원을 통해 자국의 경제적 부흥을 도모하고자 했다. 1951년 이란의 총리가 된 모하메드 모사데그는 영국-이란석유회사(현재 브리튼석유회사)의 국유화를 단행하고, 이란의 본격적인 근대화를 추진하며 국왕의 전제적인 권한을 제한하는 조치를 취하여 이란 민중의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1953년 미국 CIA의 지원(아작스 작전Operation Ajax: 2000년 3월 17일. 당시 미 국무장관이던 올브라이트는 미국-이란 협회 연설에서 미국이 1953년 좌파 성향의 모사데그 정권을 전복시키는 데 미 CIA가 개입한 사실을 인정하고, 80년대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이라크의 편을 드는 실수를 했다고 말했다.)을 받은 장군 자헤디의 군부쿠데타를 통해 실각하고 만다. 그는 체포·구금되었다가 1956년 석방된다. 서구 제국주의와 아랍 민중간의 이해가 날카롭게 충돌하게 되자 미국은 중동지배 전략을 간접지배방식으로 전환하고, 이 지역에 다국적 석유기업과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해 줄 보수적인 정권을 수립한다.

이라크 왕정 역시 이런 서구 다국적 기업의 이해를 대변하면서 민중의 반발에 부딪혀 1958년 압둘 카림 케심 대령이 이끄는 '자유장교'의 군사 쿠데타로 붕괴된다. 군사쿠데타 당시 이라크 내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집단은 이라크 공산당이었다. 이 시기 이란, 이라크를 비롯한 이집트 등에서 개혁 시도는 1차적으로 석유산업의 국유화로부터 시작되었다. 군사쿠데타 이후 이라크의 여러 정치 세력들은 상이한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치열한 권력 투쟁을 벌여 나간다. 결과적으로 권력을 장악한 것은 바트당이었다. 바트당은 1963년 짧은 집권 이후 잠시 실각하기도 했으나 우익 군부와 연대하여 재집권에 성공하면서 이라크의 지배 세력으로 성장한다. '유물론적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아랍주의'라는 모토를 내걸었던 바트당은 아랍민족주의를 주장하며 이라크에서의 지배 체제를 안정시켰다. 표면적으로는 사회주의를 표방한 바트당이었으나 1973년 쿠르드족 진압을 위해 일시적으로 공산당과 연립정부를 수립한 기간을 제외하고 가장 먼저 철저히 실천에 옮긴 일은 공산당 탄압이었다.

1978년 이란에서 미국과 서구 다국적 기업의 이해를 대변하던 팔레비 왕정이 민중혁명에 의해 붕괴된다. 이란 팔레비 왕조의 제2대 국왕이었던 모하마드 레자 샤 팔레비는 석유 국유화와 왕권 제한을 추진하던 모사데그 총리와 대립하다가 1953년 로마로 망명했으나 망명 3일 뒤에 일어난 군부 쿠데타로 귀국한다. 그는 비밀경찰 사바크(SAVAK)를 통한 공포정치와 미국과 군사협정을 맺으며 급격한 서구화(백색혁명)을 추진한다. 중동 지역은 세계 석유 수요의 60% 이상을 공급하는 현대자본주의를 움직이는 연료 구실을 하고 있다. 미국은 안정적인 석유 공급을 보장받기 위해 중동의 급격한 변혁을 원치 않았다. 미국은 이 지역에서 민주주의와 경제적 자립을 원한 아랍 민중의 이해를 배신하고 그들의 파이프라인을 보호해줄 세력으로 보수 왕정과 부르주아 민족주의 세력을 지원해왔다. 이란에서의 민중혁명은 미국이 과소 평가해 온 아랍 민족주의의 힘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건으로 예상치 못한 결과에 대해 미국은 크게 당황한다. 그동안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해주던 보수왕정을 통해 저유가 시대의 호황을 누리던 세계 경제는 급전직하 곤두박질쳤다.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등의 걸프만 일대의 왕정 국가들과 미국을 포함한 서구 자본주의는 이란 회교 정권을 제거함으로써 자국의 이익을 보장받고 이 지역에서의 패권을 장악하고자 하여 이라크를 지원하여 이란·이라크 전쟁(1980-1988)을 일으킨다. 이 기간 동안 미국을 포함한 아랍 왕정 국가들이 이라크를 지원한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전쟁의 와중에서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등은 이라크에 무기를 수출하여 막대한 이득을 취했다. 그러나 8년에 걸친 전쟁이 이들 국가에 남겨준 것은 막대한 사상자와 전쟁 부채였다. 이 전쟁을 가리켜 당시 많은 언론들이 이슬람 내부의 전쟁, 시아파 국가인 이란과 수니파 국가인 이라크의 전쟁으로 표현했으나 이것은 전쟁의 원인을 오도한 것이다. 실제 이라크의 종교 분포는 시아파가 55%, 수니파가 20%, 쿠르드족이 20%로 되어있다. 다만 이라크의 지배 권력인 바트당의 기반이 수니파였고, 급격한 도시화로 농촌에 뿌리를 둔 대다수 시아파 농민들의 삶의 물적 토대가 붕괴되면서 이라크 내에서도 이슬람 민족주의의 움직임이 불어오자 이런 내적 긴장을 외부로 발산한 것이다. 8년간의 소모전이 끝난 뒤에 이란과 이라크에 남은 것은 폐허였지만 민중의 의지를 토대로 수립된 이란의 이슬람 정권은 호메이니의 사후 유연한 정책을 바탕으로 이 위기를 극복해 나갔지만, 아무 성과도 얻지 못한 이라크는 사담 후세인의 독재를 강화시키는 일환으로 아랍 민족주의를 다시 들고 나오면서 쿠웨이트를 침공한다.

중동 지역의 국경선은 석유 자원을 탐낸 서국 제국주의 국가들이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지배를 받던 부족들을 부추겨 독립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에서 투르크의 패배로 독립한 이들 국가들은 다시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의 보호국이 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다시 보호국, 독립국을 오가게 된다. 쿠웨이트 역시 그런 나라 중 하나였다. 이라크와 쿠웨이트는 오래 전부터 역사적, 문화적으로 동일한 행정구역상에 속하는 등 많은 동질성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 지역에서의 석유 자원을 탐낸 영국에 의해 분리되었다. 이런 역사적 배경 속에 이라크의 후세인은 자신을 아랍민족주의자, 반제국주의자라고 부르며 쿠웨이트 알 사바 왕가를 미 제국주의의 하수인이며 아랍민족주의의 배신자라고 규정하고 1990년 8월 개전 5시간만에 쿠웨이트를 완전히 장악한다. 한동안 미국은 이런 이라크의 영토 확장욕을 비밀리에 부추겼으나(1990년 쿠웨이트는 이라크 영토와 연결된 지역에서 암암리에 원유를 뽑아냈다.) 쿠웨이트 침공 일주일 전 바그다드 주재 미국 대사 에프릴그라피스는 사담에게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훈령을 받았다. 미국은 이라크-쿠웨이트 국경분쟁에 대해 아무런 의견이 없다"고 여러번에 걸쳐 거듭 밝혔다. 그리고 침공 이틀 전 국무차관 존 켈리는 "미국은 쿠웨이트 방위의 감시자가 아니다"라고 하원에서 강조함으로써 사담에게 청신호를 보냈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후 이라크는 새로운 국경설정안을 포함해서 여러차례 협상제의를 했으나 어떠한 협상이나 대화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44일간의 단기전에서 이라크 군인 10만 명(그것도 대부분 전의를 상실하고 도망치던 군인들)이 전사했고, 민간인 약 20만 명이 사망해서 모두 30만 명의 희생자가 났다. 이에 비해 동맹군은 미군 148명, 영국군 47명을 포함해서 모두 211명이 전사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마저도 1/3은 미군의 오포 공격으로 인한 것이다. 걸프전 후 국제연합식량기구(FAO)의 1995년 보고서에 의하면 이미 56만명의 이라크 어린이들이 사망했고, 국제보건기구(WHO)는 현재 이라크에서 아이들의 불필요한 죽음이 6분마다 1명꼴로 진행된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1949년 제네바 협정에는 "어떤 전쟁도 시민들의 생존에 필수적인 대상은 공격을 금지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나 미국은 이라크의 식량부문과 농경지, 상수도, 댐, 발전소 등 사회 전부문에 걸쳐 파상적인 공격을 단행했다. 막상 전쟁이 벌어지자 이 때를 놓치지 않고, 중동지역에서 자신들의 패권을 확대하는 기회로 삼았다. 미국은 UN을 통해 신속하게 이라크 제재를 결의하고 이라크의 패권주의와 아랍민족주의에 위기를 느낀 사우디아라비아를 포함한 일부 아랍 국가까지 포함된 33개국의 다국적군을 편성 1991년 1월 17일부터 '사막의 폭풍 작전'을  개시한다. 6주간 지속된 이 작전은 1천여 시간의 공중폭격과 그 뒤 1백 시간의 지상작전을 통해 지상작전 개시 4일 만에 이라크의 항복을 받아냈다.

걸프전은 베트남전 이후 실추된 미국의 자존심을 회복한 전쟁이자 미국이 앞으로 추진할 전쟁의 양상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명확히 보여주는 전쟁이었다. 미국은 베트남전이 TV 수상기를 통해 안방까지 전쟁의 참상이 생생히 방영된 결과 반전여론이 조성돼 전쟁에서 패했다고 보고, 걸프전 전기간을 통해 언론 보도를 적절한 수준으로 통제(걸프전쟁에 나타난 미국 언론통제전략의 실상을 연구한 룬 오트슨(Rune Ottoson)에 의하면 미군 당국은 3가지 언론통제전략을 처음부터 구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1)가능한 언론을 전선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도록 조처를 취하고 2)동시에 가능한한 오랫동안 취재, 보도를 할 수 없도록 하고 3)최대한의 보도 통제를 가한다는 것이다. … 미군 당국은 엄밀한 선발과정을 거쳐 미국과 세계에서 특파된 약 192명의 신문, 방송, 통신사 기자들을 몇 그룹으로 나눠 각각 다른 미군기지에 주둔시켰다.  전세계 175,000명의 기자를 대표하는 국제기자연맹(IJF)은 이에 대해 강력히 항의했다. "현재 실시하고 있는 기자풀제는 명백한 언론 자유 침해이다. 또한 중요한 정보는 차단되고 있으며 이 시스템은 비영국, 비미국 기자들을 차별하고 있다." … 걸프전 당시 세계 방송사에서 방영된 미군에 의한 바그다드 군사시설 정조준 폭격장면이 미군당국에 의해 신중하게 선택된 방영물이란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다. 이런 방송은 이 전쟁에서 미군이 얼마나 효과적이고 신속하게 이라크 군사기지만 포격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역할을 했다. 이라크의 무고한 국민들이 얼마나 미군의 포격에 희생됐는지는 어쩌면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세계적십자사의 조사로는 걸프전으로 이라크의 시민 15~20만명이 희생당한 것으로 추정할 뿐이었다. - 김창룡, 「신문의 2001년 미국테러사건보도와 문제점에 관한 연구」에서)했다.

또한 이 전쟁은 철저한 하이테크 전쟁으로 이라크 사망자 15만 명에 비해 다국적군 사망자는 100여명에 불과했다. 걸프전의 결과로 미국은 중동 지역에서 그들의 패권을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고, 사우디아라비아에 군사기지를 건설할 수 있었다(오사마 빈 라덴이 '알 카에다'를 건설한 이유를 보자. 그는 테러 조직 알 카에다를 만든 이유 중 하나로 성지 메카가 있는 사우디 아라비아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현실을 들었다). 한편 사우디아라비아로 망명했다가 돌아온 쿠웨이트의 사바 왕가는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에 위축돼 걸프만 국가들 중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명실상부한 의회를 설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후 재산피해는 750억 달러, 전쟁 전 1,000억 달러 이상의 해외자산은 550억달러로 감소했고, 계속되는 다국적군의 주둔을 위해 막대한 비용을 부담하게 돼 1997년까지 경제성장률은 1%였다. GDP의 12.8%인 35억 달러를 첨단 무기 구입 등 국방예산에 쏟아 부으며 전력강화에 힘쓰고 있다. 그들이 구입하는 무기의 대부분이 걸프전을 통해 놀라운 성능을 입증한 미국제라는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이다. 중동 지역에서 긴장이 유지되는 동안 오일달러는 계속해서 무기를 구입하는데 지불될 것이다.

걸프전의 전후 처리 문제에서 불거져 나온 대량살상무기 파괴와 명분 없는 전쟁 도발

걸프전이 종결된지도 어느새 10년이 넘었다. 지금 미국 대통령의 아버지였던 부시 대통령이 이끌었던 전쟁은 개전 초판 미국 주도의 다국적군이 이라크군의 정예 공화국 수비대를 휩쓸면서 전쟁이라기 보다 대량 학살극에 가까울 정도의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초토화시켜 버리는 승리를 거두었고, 그들의 애초 목표였던 쿠웨이트와 이라크 국경선의 재확립에는 성공했다. 그들의 애초 계획에는 사담 후세인의 축출도 들어 있었다고 하는데 후세인 현 이라크 대통령의 축출 이후에도 그를 대체할 만한 정치권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친미적인 세력으로의 정권 교체가 불투명하다는 이유로 사담 후세인의 권력은 유지될 수 있었다(우리는 물론 사담 후세인이 결코 훌륭한 인물도, 그 스스로가 주장하는 바대로 이라크, 나아가 아랍 민족의 지도자일 수 없음을 이미 알고 있다).

미국은 걸프전의 전후 처리에 있어 이라크의 군사력을 억제하고, 중동 지역의 평화 정착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이라크에 임의로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하고, 이라크가 스스로 대량 살상 무기를 폐기하도록 한다는 규정을 두었다. 현재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겠다는 표면적인 명분은 바로 지난 10여년 간 미국이 묵인해온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를 빌미로 이라크를 공격하겠다는 것이다. 거기엔 20세기 자본주의의 주요 동력원이었던 석유 자원을, 21세기에도 여전히 아니 좀 더 확고히 거머쥐겠다는 의지의 표명이 숨겨져 있다. 미국은 지난 10여년간 이라크를 경제적 압박해 자체적인 붕괴를 이끌어내겠다는 전술을 구사해 왔으나 결과적으로 사담 후세인을 제거하기는커녕 이로인해 이라크 민중의 삶의 터전만을 붕괴시키는 결과를 빚어냈다. 현 부시 대통령은 밥 우드워드와의 인터뷰에서 '북의 김정일에 대한 원초적인 증오의 감정을 표출하며 그가 국민을 굶주리게 하고 있는 것을 이유'로 삼았다. 그러나 이라크 국민을 굶주리게 하는 것은 바로 미국이다. 유니세프와 세계식량기구는 UN의 경제봉쇄로 이라크의 5세 미만 어린이가 매달 4,500-6,000명씩 죽어가고 있다고 밝히고 있지만 정작 미국 언론은 자국민들에게 이런 사실을 널리 알리지 않았다.

이라크는 미국의 이런 표면적인 전쟁 명분을 감쇄시키기 위해 UN의 무기 사찰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이고 있고, 이에 대해서는 UN을 비롯한 IAEA 등도 인정하고 있다. 미국의 이라크 공격에 대한 유일한 명분이랄 수 있는 대량 무기 제거에 대한 이라크의 미흡한 조치가 문제라면 UN의 결의 없는 미국의 이라크 공격은 전쟁이 아니라 명분 없는 테러 범죄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미국은 어째서 이라크 침공을 강행하려는 것인가?

미국은 지난 9.11테러로 촉발된 미 국민의 분노를 배출할 적당한 출구로 이라크를 선정했다. 이는 높아진 전세계의 반전여론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시행된 미국의 여론 조사에서도 다시금 입증된다. 미국인의 55%가 UN결의 없이 미국 단독으로 이라크 침공을 했을 때에도 이를 지지한다는 의견이 나온 것이다. 현 부시 대통령은 내년 재선을 위해서라도 이미 군사력 배치가 완료된 상태에서 이라크 전쟁을 중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 자신의 아버지 부시가 걸프전에서 승리했음에도 결국 재선에 실패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그가 지금 이 시점에서 물러난다는 것은 재선 승리를 포기한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현재 이라크는 세계 제2위의 원유 보유량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이라크의 석유 채굴권의 3분의 1에서 2 가량을 미국계 석유회사가 아닌 프랑스계 석유회사가 가지고 있다. 프랑스가 미국의 이라크 전쟁에 대해 강력히 반발하는 원초적인 이유는 물론 프랑스 국민의 강력한 반전 의지가 뒷받침되기 때문이지만, 이라크 전쟁 이후 자국이 보유하고 있던 이라크 석유 채굴권을 미국에게 빼앗길 것이라는 정세 판단이 강력히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중동 전략의 기반을 친이스라엘, 반아랍에 기초하고 있다. 사우디 아라비아를 비롯한 중동 지역의 산유국들은 친미라는 정치적 기반에 의해 아랍 민중의 정치적 의지(민주화를 비롯한)를 억누르는 형태로 정치 체제를 보장받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아랍의 맹주를 자임하는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을 제거함으로써 아랍 민중에게 힘으로 유지되는 중동의 질서를 다시금 확인시켜 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미국이 계획하고 있는 이라크 전쟁 계획

미국 역시 세계의 반전 여론을 부담스러워 하고 있다. 게다가 날이 갈수록 미국 내 반전 분위기 역시 지난 베트남전 이래 최대 규모로 표출되고 있음을 역시 잘 알고 있다. 그런 까닭에 미국은 이번 이라크 전쟁을 사상 유례없는 고강도 전쟁으로 끌어갈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으며 현재 발표되고 있는 미국의 전쟁 수행 계획은 자체가 매우 비인도적인 설정 아래 놓여 있다. 미국은 자국의 반전 분위기를 염려하여 월남전 이래의 모든 전쟁에서 미국의 지상군의 손실을 최소한으로 줄이며 그들이 목적하는 바의 승리를 거두는 전략을 채택하여 실천해 왔다. 그 결과 미군의 인명 손실은 최소화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의 그런 전술로 목숨을 담보로 전투에 참가한 자국 군인의 인명 손실은 극소화되었으나 그로 인해 아무 죄 없는 비무장 민간인 피해가 참전 군인의 인명 손실을 상회하는 결과가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라크 전쟁의 양상은 대규모 폭격에 의한 공중으로부터의 초토화 작전으로 시작될 것이다. 개전 초반에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대규모 미사일 공격과 공중 폭격을 통해 이라크 측으로 하여금 이에 반항할 엄두도 낼 수 없을 만큼 초전에 기세를 장악한 후 지상군을 투입하여 전쟁을 조기에 마무리하겠다는 것이 미국의 전쟁 계획이다. 최근 <조선일보>는 이라크 전쟁에 미군측 종군기자 진영에 자사의 신문 기자가 동참할 수 있게 되었다며 이를 홍보하고 있다. 과연 미군의 진격에 따라 이동하며 미군의 브리핑을 받아 내 보내는 기사가 역사의 진실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우리는 미군의 지난 파나마 침공 당시부터 미군이 얼마나 엄격한 보도 관제를 실시하고 있는지, 그들의 필요에 따라 어떻게 언론을 조작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그들은 파나마의 실권자 마누엘 노리에가를 체포하는 과정에서 그의 집 주방에서 발견된 밀가루를 마약이라고 보도했고, 항공모함에서 이착륙하는 전폭기의 촬영 장소와 촬영 각도까지 면밀하게 검토한 뒤 허가해주는 형편이다. 이런 형편인데 당신은 CNN이 전쟁의 진실을 말해주고 있다고 믿을 수 있겠는가?

군인보다 민간인 사망률이 더 큰 전쟁을 우리는 인도주의적인 전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는 이 전쟁을 과연 무고한 민간인이 희생당한 테러를 멈추게 하기 위해 벌이는 테러와의 전쟁이며, 정의를 바로 세우는 전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자국의 민간인 일부가 희생당한 것을 빌미로 석유자원의 독점을 노리는 미국의 전쟁에 희생당하는 민간인 대량 학살극에 우리는 과연 우리의 소중한 아들, 딸들을 내보내야 하는가?

과연 우리들을 파멸시킬지도 모르는 대량살상무기는 이라크의 미사일인가? 아니면 미국의 넘치는 증오인가?(걸프전 당시 이라크는 이스라엘에 약 30발의 스커드미사일 공격을 가했으나 3명을 살상하는데 그쳤다. 오히려 미사일을 보고 심장마비로 죽고, 생화학무기가 장착되었을 것이라며 방독면을 오랫동안 쓰고 있다가 질식해서 죽은 사람들이 더 많다.)

"한 세대가 조용히, 그리고 무자비하게 사라지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은 죽어가고 있고, 더 많은 사람들은 불구자가 되고 있으며, 이보다 더 많은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증오심을 키우고 있다. 이것이 전쟁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리고 이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우리는 이 미친 짓을 끝내야 한다.
이라크에 대한 경제제재를 끝내고, 전쟁을 끝내자.
어느 누구도 이라크 어린이들의 미래와 살아갈 권리를 짓밟을 수 없다.
우리는 미국의 더러운 전쟁에서 흘릴 피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라크 전쟁이 개시된다면....

- 전쟁이 개시된 주 토요일 오후 2시 마로니에 공원에서 항의 집회가 있을 것이라 한다.
<2003-03-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