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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한국시

고정희 - 지울 수 없는 얼굴

지울 수 없는 얼굴

- 고정희

냉정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얼음 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불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무심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징그러운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아니야 부드러운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그윽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샘솟는 기쁨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아니야 아니야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는 당신이라 썼다가
이 세상에 지울 수 없는 얼굴 있음을 알았습니다

*

고정희 시인의 시가 자꾸만 밟히고, 자꾸만 눈에 들어오고, 자꾸만 지리산에 가고 싶은 건 내 삶이 위독한 탓이다.

산에 오르면 세상이 좁쌀만 해 보여 간이 커지고 엄지와 검지를 들어 눈 앞의 빌딩을 들어 옮기고, 지나는 버스를 막아세우고, 거리를 오가는 죄 없는 사람들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본다. 산에서 내려올 즈음에서야 나는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쥐락펴락했던 그 세상 속 가장 작은 존재가 바로 나였다는 걸 깨우치고 공연히 소심해지곤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당신의 얼굴을 떠올린다. 냉정하기 얼음 같고, 사랑할 땐 불 같고, 무심한 척 등돌렸지만 나 돌아가는 길까지 살펴주던 부드럽고, 그윽하며 샘솟는 기쁨 같았던 당신... 사랑이란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존재의 다른 이름이란 걸 깨우치고 나서야 나 이제 세상의 모퉁이 길로 가만히 들어설 용기가 생긴다. 사랑은 공연(空然)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