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여자들은
- 최승자
외로운 여자들은
결코 울리지 않는 전화통이 울리길 기다린다.
그보다 더 외로운 여자들은
결코 울리지 않던 전화통이
갑자기 울릴 때 자지러질 듯 놀란다.
그보다 더 외로운 여자들은
결코 울리지 않던 전화통이 갑자기 울릴까봐,
그리고 그 순간에 자기 심장이 멈출까봐 두려워한다.
그보다 더 외로운 여자들은
지상의 모든 애인들이
한꺼번에 전화할 때
잠든 체하고 있거나 잠들어 있다.
출처 : 최승자, 『기억의 집』, 문학과지성사, 1989
*
'외롭다'는 말은 '고독하다'는 말에 비해 표피적이다. 고독이란 『맹자(孟子)』 〈양혜왕장구(梁惠王章句下)〉 '호화호색장(好貨好色章)'에서 나오는 '환과고독(鰥寡孤獨)'에서 유래한 것이다. 제(齊)나라 선왕(宣王)이 맹자에게 왕도정치(王道政治)에 대해 묻자 "늙어 아내 없는 이를 홀아비(鰥), 늙어 남편이 없는 이를 과부(寡), 늙어 자식이 없는 이를 외로운 사람(獨), 어리고 아비 없는 이를 고아(孤)라고 합니다. 이 네 부류의 사람들은 천하에 궁벽한 백성들로서 의지할 데가 없는 사람들입니다."라고 답했다. 맹자의 말에서 알 수 있듯 고독이란 감각의 문제였다기 보다 본래는 처지(조건)의 문제였다가 그 의미가 확장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그런 탓인지 몰라도 '고독하다'는 말은 '외롭다'는 말에 비해 원근법적으로 말하자면 원경(遠景)으로 비춰진다. 최승자의 시 <외로운 여자들은> '잊혀진 여자가 가장 불쌍하다'고 했던 마리 로랑생의 시와 의미의 확장 형식이나 구조가 매우 흡사하지만 마지막 국면까지 구체적인 정황들을 진술한다는 점에서 고독보다는 외롭다는 감각에 끝까지 천착한다.
그보다 더 외로운 여자들은
지상의 모든 애인들이
한꺼번에 전화할 때
잠든 체하고 있거나 잠들어 있다
시인의 말대로라면 '미인은 잠꾸러기가 아니라 외로운 여자들이 잠꾸러기'인 셈이다. 미인이 외로운 걸까? 아니면 외롭기 때문에 잠을 통해 죽음을 앞당겨 오려 하는 것일까? 여자들은, 아니 사람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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