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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만화/애니

안전지대 고라즈데 - 조 사코 지음 | 함규진 옮김 | 글논그림밭(2004)


안전지대 고라즈데 - 조 사코 지음 | 함규진 옮김 | 글논그림밭(2004)


악을 행하는 사람은 우선 자기가 선을 행한다고 믿어야 한다. 이데올로기, 그것은 '정의의 실현'이라는 악마의 행위를 발생시키고, 악마의 행위자에게 신념과 결심을 갖도록 만든다. 그리하여 본인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나쁜 일이 아니라 좋은 일을 하는 것으로 비치고, 따라서 그들은 비난이 아니라 찬사와 명예로운 소리만 듣게 되는 것이다. - 알렉산더 이자예비치 솔제니친


말(言)은 종종 현실을 외면하거나 거짓으로 꾸며낸다는 점에서 소통을 위한 진실한 수단일 수 없다. 우리는 팻맨(Fatman)과 리틀 보이(Little Boy)란 이름의 어디에서도 죽음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이름이 지금으로부터 60년 전 8월 6일 히로시마에 떨어진 핵폭탄의 이름이었음을 알고 있다. 가장 초보적인 수준의 우라늄탄이었던 리틀 보이는 히로시마에, 최초의 플루토늄탄이었던 팻맨은 이틀 뒤인 9일 나가사키에 투하되었다. 굳이 공자의 정명론(正名論)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공화정의 이상이 짓밟힌 순간의 집권당이 "민주공화당"이었고, 가장 정의가 필요한 순간 집권당 이름이 "민주정의당"이었음을 기억한다.


가장 필요한 것이 가장 결핍된 순간, 이름은 필요를 배신한다는 점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결핍되는 순간은 비극의 순간이다. 조 사코의
"안전지대 고라즈데"의 비극 역시 가장 필요한 것이 가장 결핍되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안전"이었다. 가끔 나는 낯익은 사람들에게서 낯선 얼굴을 발견한다. 그것은 아주 오래된 기억으로부터 비롯된다. 길을 걷다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행해지는 폭력을 경험한 뒤로부터 나는 거리를 걸을 때마다 늘 어디선가 주먹이 날아오지나 않을까 조심하며 길을 걷는다. 백주 대낮의 당당한 폭력... 나에게 폭력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났던 순간은 알고 보면 1979년 12월 12일 밤부터 다음날 새벽 사이에 일어났던 모종의 군사반란 사건이었다. 밤 사이 간헐적으로 들려오던 총 소리에 놀랐으나 우리는 그것이 연례적으로 일어나는 사격 훈련인 줄 알았다. 그리고 그보다 극명한 것은 대낮의 경험이다.


1980년 5월의 어느 날. 국민학교 3학년이던 나는 한양대학교 병원에 담임 선생을 병문안하기 위해 방문해야 했다. 그때 한양대학교 앞에 자리하고 있던 장갑차에 설치된 중기관총과 지프들, 얼룩 무뉘 위장포를 씌운 철모를 쓴 병사들, 굳게 닫힌 입술로 오가는 사람들을 쏘아보던 군인들의 M16소총. 그것이 무엇인지 세상에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내가 그 때 그 사건들의 대략적인 전말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5년여가 흐른 어느 날의 일이었다. 전지전능한 신적인 존재였던 국가 기구가 권력을 찬탈하고 유지하기 위해 시민을 향해 총을 겨누고 실제로 방아쇠를 당길 수도 있다는 사실은, 국가란 틀 안에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도록 조건지어진 나란 사람을 두고두고 괴롭히는 사실이었다. 그로부터 나는 오랫동안 세상이란 거대한 쥐덫에 갇힌 한 마리 생쥐처럼 숨 막히는 공포를 머리 맡에 두고 사는 기분이었다.





이 책
"안전지대 고라즈데"의 부제는 "보스니아 내전의 기록"이다. 낯선 이름이다. 아마도 한국전쟁이 한창일 때 서울과 평양, 원산과 함흥을 찾고자 했던 유럽의 어느 시민이 그랬을 법하게도 우리 역시 보스니아 내전이 한창일 때 사라예보를, 고라즈데를 찾아 보려했다면 그와 흡사한 노력을 기울였어야 했을 거다. 우리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기에 비록 낯선 지명, 낯선 사람들의 모습에서이지만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결코 낯설지 않다. 이 책을 읽기 불과 며칠 전 나는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라는 다소 긴 이름의 시민 단체를 찾아 취재했다. 사무실 입구에는 전지(全紙) 크기의 한반도 지도가 걸려 있었고, 그 지도에는 한국전쟁을 전후한 기간 동안 한반도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 현장을 붉은 점과 파란 점, 노란 점 등으로 표시하고 있었다. 각각의 점들이 찍힌 지역에는 적게는 수십명, 많게는 수백 명에 이르는 민간인들이 미군과 한국군경, 우익 단체들에 의해 희생당한 곳이었다. 심지어는 울릉도 인근에서 발생한 희생자 표시까지 있었다.


이런 이야기들을 할 때면 종종 어떤 이들에게 북한측이 훨씬 더 많은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을 텐데, 남한만의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하는가? 하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북한이 학살 주체로 자행했다고 하는 민간인 학살 규모에 대해 우리 정부의 공식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12만 9,000여명 선이다. 그에 비해 남한 정부나 비정규 무장 단체에 의한 학살로 추정되는 수치는 100만에 달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제 시선을 다시 보스니아로 되돌려 보자. 보스니아 지역을 흔히 '종교와 문화의 모자이크'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보스니아 무슬림계, 세르비아 정교계, 크로아티아 가톨릭계가 다양하게 혼재되어 있기는 하지만 구성원을 종교의 구분이 아닌 민족 구성으로 보았을 때 이들은 모두 남슬라브 계를 뿌리로 둔 사람들이다. 이들이 종교적, 문화적으로 분화된 것은 유럽과 아시아 대륙을 잇는 교통로, 전략적 요충지 역할을 한 탓이다. 이렇게 먼 역사까지 가지 않더라도 우리에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념으로 갈라진 남과 북이 치른 내전으로 같은 민족간에 수많은 상처를 남긴 것처럼 구 유고슬라비아 사람들 역시 그 상처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제2차 세계대전의 기억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추축국과 연합국 사이에서 어디를 편들어야 할지 몰랐던 유고의 구 지배 계급은 우왕좌왕하다가 쿠데타와 역쿠데타를 거듭하다 결국 추축국 독일의 침략을 불러들였다. 나치는 크로아티아계 민족주의 세력인 우스타샤(A. 파벨리치)와 손잡고 세르비아와 무슬림 세력을 억압하도록 했다. 우스타샤는 크로아티아 지역은 물론 유고 전역에서 세르비아 계를 몰아내고자 하는 일환으로 대대적인 인종청소를 자행해 약 35만 명에 이르는 세르비아 인들을 처형했다. 우스타샤의 잔인한 학살에 저항하는 단체들은 세르비아 민족주의 세력인 체트니크와 민족, 종교적 구성을 망라한 세력으로 공산주의자 티토가 이끄는 파르티잔이 있었다. 체트니크가 전후
"대 세르비아 건설"을 목표로 했다면 티토의 파르티잔은 공산주의 유고 연방의 건국을 목적으로 했다. 이런 목적의 차이에서 보이듯 체트니크는 우스타샤의 학살에 저항하면서 동시에 크로아티아 계와 무슬림계 사람들에 대해선 우스타샤 못지 않은 학살극을 자행했다.


파르티잔 세력은 체트니크와 우스타샤 그리고 추축국의 집중적인 공격을 방어해내야만 했고, 전후엔 이들의 범죄행위에 대한 문제들을 역사적으로  해결하고 유고 연방이란 단일한 국가 체제를 존속시켜야 했다. 조 사코는 보스니아의 무슬림계인 에딘(Edin)의 입을 빌어 말한다.
"티토의 시대와 그의 정책은 대부분 아주 좋았다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여겨지고 있어요. 그의 시대가 끝난 것을 아쉬워 하는 사람들이 많죠. 나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시대를 되돌릴 수는 없다. 그럼에도 이 책의 어딘가는 미진하다. 조 사코가 코믹저널리즘이란 만화를 통한 저널리즘을 말하려 할 때 우리가 궁금한 것 중 하나는 과연 보스니아에서 이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동안 서방에선 무엇을 했는가 하는 것이다. 그에 대한 좀더 자세한 언급이 없었다는 점은 끝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보스니아의 고라즈데에서 아가씨들이 리바이스 501 청바지를 갈구하고 있을 때... 정작 그 리바이스 청바지의 나라에선 무얼 했는가? 정말 이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을 한 원인은 단지 종교적인 이유뿐인가? 그런 의문들... 이삼성 교수의 "세계와 미국"을 읽으며 나는 미국이란 나라에 대한 나의 불만이 때론 순전히 나의 자의적 편의에 따라 바뀐단 생각을 했다. 국가테러와 패권테러 사이에서 느끼는 무력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