乍晴乍雨
- 김시습(金時習)
乍晴還雨雨還晴, 天道猶然況世情
(사청환우우환청 천도유연황세정)
譽我便是還毁我, 逃名却自爲求名
(예아변응환훼아 도명각자위구명)
花門花謝春何管 雲去雲來山不爭
(화개화사춘하관 운거운래산부쟁)
寄語世人須記憶 取歡無處得平生
(기어세인수기억 취환무처득평생)
갰다가 비가 오고 비 오다가 다시 개이니,
하늘의 도도 이러하거늘, 하물며 세상 인정이랴.
나를 기리는 사람 문득 돌이켜 또 나를 헐뜯을 터,
공명을 피하더니 저마다 또 공명을 구하네.
꽃이 피고 지는 것을, 봄이 어찌 상관하랴,
구름이 가고 오는 것을 산이 무엇을 다투랴.
세상 사람들아 내 말 새겨들으시라,
즐겁고 기쁜 일 평생 가지 않나니.
조선 초기 생육신의 한 사람이었던 매월당((梅月堂) 김시습이 지은 "사칭사우"를 우리말로 옮겨보면 "변덕스러운 날씨"쯤 될 것이다. 세조가 단종을 쫓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자 통곡하며 책을 불사르고 중이 되어 온갖 기행을 일삼으며 살아갔던 김시습이다. 어릴 적 읽었던 김시습의 위인전에서 기억에 남았던 일화가 있는데, 김시습의 나이 5세에 이미 신동으로 널리 소문이 나 당시 임금이었던 세종의 귀에도 그 소문이 들어갈 정도였다.
세종은 김시습을 친히 궁으로 불러들여 어린 신동에게 이것저것을 묻고 그의 지혜를 살핀 뒤 크게 만족해 상으로 비단 몇 필을 내려 주었다. 세종은 어린 신동에게 상을 내려주는 대신 어른의 도움 없이 홀로 비단을 집으로 가져가도록 했는데, 진짜 시험은 바로 이것이었다. 어린 김시습은 비단을 풀어 자신의 허리에 묶고는 집까지 비단을 끌고 돌아가니 세종이 이 사실을 전해듣고 크게 경탄했다는 이야기이다.
공자께서 '나는 나면서부터 안 자가 아니라 옛것을 좋아하여 힘써 구하는 자(我非生而知之者 好古敏以求之者也)'라고 했는데 이것은 공자가 스스로를 낮춰 겸양을 표한 것이기도 하지만 지혜란 후천적인 노력에 의해 깃드는 것이란 의미에서 공부를 강조하기 위해 한 말이다. 어쨌든 '나면서부터 아는 것(生而知之)'라면 '배워서 하는 것(學而知之)'인데 주자는 천하의 지극한 성인이라야 이처럼 나면서부터 아는 총명예지(聰明睿知)가 임할 수 있으니 이것이야 말로 '생지지질(生知之質)'이라 했다. 그런데 조선 역사상 이처럼 '생지지질(生知之質)'로 일컬어진 단 한 명이 바로 김시습이었다.
태어난지 8개월 만에 스스로 글을 깨우칠 만큼 천품이 탁월해 임금도 친히 관심을 기울일 정도이긴 했으나 세종이 친히 김시습을 불러 시험을 치르게 했다는 이야기는 민간의 설화가 부풀려진 듯 싶다. 세종은 민간에 널리 퍼진 김시습의 천재성에 대한 소문으로 인해 혹시라도 어린 아이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이 두려워 지신사 박이창을 시켜 승정원으로 불러들여 이를 확인토록 했을 뿐이며 박이창의 보고를 받은 뒤 "내가 친히 그 아이를 불러보고 싶으나 일반 백성들이 해괴하게 여길까 두려워 그러니 그 가정에 권하여 잘 감추어 교양을 쌓도록 하고 그가 성취되기를 기다려 장치 크게 쓰리라"는 전교를 내렸다 한다. 그러나 김시습의 나이 21세 때 단종이 폐위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김시습은 문을 굳게 닫아 걸고 나오지 않은지 3일만에 크게 통곡하면서 책을 불태워버리고 이후 미친 척하며 스스로 머리를 깎고 중노릇을 하며 살았다.
비록 이 시에서 김시습은 관조달통(觀照達通)한 듯한 어조로 말하고 있지만 매월당이 이후 살아온 삶의 내력을 조목조목 살펴보고 있노라면 그것을 어떤 이는 편벽이라고도 하던데 일종의 결벽증 같은 것이 있었던 사람이 아닐까 싶다. 그는 아무리 가난하여도 무엇이건 빌리지 않았고 남이 주어도 받지 않았으며 자신을 찾아오는 이에게 물어 자신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자가 있다면 아주 즐거워했고, 거짓으로 미친 체하면서 그 속에는 다른 배포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눈썹을 찡그렸다고 한다. 얼핏 세상사에 초연한 듯 보이지만 또한 자신이 세상에서 잊혀지는 것은 원치 않았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봉건시대의 정치체제란 왕이 곧 체제인데 단종을 죽이고 왕권을 찬탈한 세조와 그 후손이 집권하는 것은 김시습에게 있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체제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이 체제를 뒤집을 만한 권력이나 의지가 있었던 것 또한 아니었기에 그는 살아도 살아있지 못한 삶을 살아야 했을 것이다. 체제의 외부를 만들어 낼 수 없는 자는 그것을 상상하게 된다. 아마도 김시습이 지은 금오신화는 이와 같은 그의 상상이 빚어낸 체제의 바깥, 어디쯤이었으리라. 쓸쓸하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김시습, 그의 나이 59세에 무량사에서 입적했으나 그는 죽음 뒤에도 여전히 색다른 사람이었다. 화장을 거부한 탓에 몇 해 동안 절 옆에 안치해두었는데 3년후 장사를 지내기 위해 관을 열었을 때도 생시와 다름 없는 안색이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가 죽음 이후에 부처가 되었다고 믿어 화장하였는데 이때 사리 1과가 나와 부도를 만들어 세우고 그의 풍모와 절개를 기렸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김시습에게 이조판서가 추증되고, 청간공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나 그것이 김시습에게 무슨 의미였을까?
- 김시습(金時習)
乍晴還雨雨還晴, 天道猶然況世情
(사청환우우환청 천도유연황세정)
譽我便是還毁我, 逃名却自爲求名
(예아변응환훼아 도명각자위구명)
花門花謝春何管 雲去雲來山不爭
(화개화사춘하관 운거운래산부쟁)
寄語世人須記憶 取歡無處得平生
(기어세인수기억 취환무처득평생)
갰다가 비가 오고 비 오다가 다시 개이니,
하늘의 도도 이러하거늘, 하물며 세상 인정이랴.
나를 기리는 사람 문득 돌이켜 또 나를 헐뜯을 터,
공명을 피하더니 저마다 또 공명을 구하네.
꽃이 피고 지는 것을, 봄이 어찌 상관하랴,
구름이 가고 오는 것을 산이 무엇을 다투랴.
세상 사람들아 내 말 새겨들으시라,
즐겁고 기쁜 일 평생 가지 않나니.
조선 초기 생육신의 한 사람이었던 매월당((梅月堂) 김시습이 지은 "사칭사우"를 우리말로 옮겨보면 "변덕스러운 날씨"쯤 될 것이다. 세조가 단종을 쫓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자 통곡하며 책을 불사르고 중이 되어 온갖 기행을 일삼으며 살아갔던 김시습이다. 어릴 적 읽었던 김시습의 위인전에서 기억에 남았던 일화가 있는데, 김시습의 나이 5세에 이미 신동으로 널리 소문이 나 당시 임금이었던 세종의 귀에도 그 소문이 들어갈 정도였다.
세종은 김시습을 친히 궁으로 불러들여 어린 신동에게 이것저것을 묻고 그의 지혜를 살핀 뒤 크게 만족해 상으로 비단 몇 필을 내려 주었다. 세종은 어린 신동에게 상을 내려주는 대신 어른의 도움 없이 홀로 비단을 집으로 가져가도록 했는데, 진짜 시험은 바로 이것이었다. 어린 김시습은 비단을 풀어 자신의 허리에 묶고는 집까지 비단을 끌고 돌아가니 세종이 이 사실을 전해듣고 크게 경탄했다는 이야기이다.
공자께서 '나는 나면서부터 안 자가 아니라 옛것을 좋아하여 힘써 구하는 자(我非生而知之者 好古敏以求之者也)'라고 했는데 이것은 공자가 스스로를 낮춰 겸양을 표한 것이기도 하지만 지혜란 후천적인 노력에 의해 깃드는 것이란 의미에서 공부를 강조하기 위해 한 말이다. 어쨌든 '나면서부터 아는 것(生而知之)'라면 '배워서 하는 것(學而知之)'인데 주자는 천하의 지극한 성인이라야 이처럼 나면서부터 아는 총명예지(聰明睿知)가 임할 수 있으니 이것이야 말로 '생지지질(生知之質)'이라 했다. 그런데 조선 역사상 이처럼 '생지지질(生知之質)'로 일컬어진 단 한 명이 바로 김시습이었다.
태어난지 8개월 만에 스스로 글을 깨우칠 만큼 천품이 탁월해 임금도 친히 관심을 기울일 정도이긴 했으나 세종이 친히 김시습을 불러 시험을 치르게 했다는 이야기는 민간의 설화가 부풀려진 듯 싶다. 세종은 민간에 널리 퍼진 김시습의 천재성에 대한 소문으로 인해 혹시라도 어린 아이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이 두려워 지신사 박이창을 시켜 승정원으로 불러들여 이를 확인토록 했을 뿐이며 박이창의 보고를 받은 뒤 "내가 친히 그 아이를 불러보고 싶으나 일반 백성들이 해괴하게 여길까 두려워 그러니 그 가정에 권하여 잘 감추어 교양을 쌓도록 하고 그가 성취되기를 기다려 장치 크게 쓰리라"는 전교를 내렸다 한다. 그러나 김시습의 나이 21세 때 단종이 폐위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김시습은 문을 굳게 닫아 걸고 나오지 않은지 3일만에 크게 통곡하면서 책을 불태워버리고 이후 미친 척하며 스스로 머리를 깎고 중노릇을 하며 살았다.
비록 이 시에서 김시습은 관조달통(觀照達通)한 듯한 어조로 말하고 있지만 매월당이 이후 살아온 삶의 내력을 조목조목 살펴보고 있노라면 그것을 어떤 이는 편벽이라고도 하던데 일종의 결벽증 같은 것이 있었던 사람이 아닐까 싶다. 그는 아무리 가난하여도 무엇이건 빌리지 않았고 남이 주어도 받지 않았으며 자신을 찾아오는 이에게 물어 자신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자가 있다면 아주 즐거워했고, 거짓으로 미친 체하면서 그 속에는 다른 배포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눈썹을 찡그렸다고 한다. 얼핏 세상사에 초연한 듯 보이지만 또한 자신이 세상에서 잊혀지는 것은 원치 않았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봉건시대의 정치체제란 왕이 곧 체제인데 단종을 죽이고 왕권을 찬탈한 세조와 그 후손이 집권하는 것은 김시습에게 있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체제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이 체제를 뒤집을 만한 권력이나 의지가 있었던 것 또한 아니었기에 그는 살아도 살아있지 못한 삶을 살아야 했을 것이다. 체제의 외부를 만들어 낼 수 없는 자는 그것을 상상하게 된다. 아마도 김시습이 지은 금오신화는 이와 같은 그의 상상이 빚어낸 체제의 바깥, 어디쯤이었으리라. 쓸쓸하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김시습, 그의 나이 59세에 무량사에서 입적했으나 그는 죽음 뒤에도 여전히 색다른 사람이었다. 화장을 거부한 탓에 몇 해 동안 절 옆에 안치해두었는데 3년후 장사를 지내기 위해 관을 열었을 때도 생시와 다름 없는 안색이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가 죽음 이후에 부처가 되었다고 믿어 화장하였는데 이때 사리 1과가 나와 부도를 만들어 세우고 그의 풍모와 절개를 기렸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김시습에게 이조판서가 추증되고, 청간공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나 그것이 김시습에게 무슨 의미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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