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석, 김의찬 지음 / 씨엔씨미디어 / 2000년 3월
이 책에 대해 리뷰를 한 번 써보리라 마음 먹은 건 상당히 오래전 일인데, 생각보다 책 구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이 책의 제목을 "13금의 세계"로 잘못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 어제 저녁에도 다시 붙잡고 읽었었는데도 불구하고, 오늘 아침에도 이 책을 검색할 때 "13금의 세계"로 했으니 쉽사리 찾아질리가 없다. 어쩌면 은연 중에 나는 "18금"을 좀더 낮춰 13금만 존재하는 세계에 살고 싶은 건 아닐까?
TV를 시청하다보면 종종 나이제한 표시들을 볼 수 있다. 세계 어느 나라든 시청대상이나 관람대상을 제한하는 방식의 나이별 등급이 있는데, 자라나는 청소년들을 보호하려는 이유에서라고들 한다. 이 책은 그러니까 보호되는 청소년들이 넘보지 말았으면 하는 측의 시선이 쌓아올린 그 벽 너머의 세계를 말하고자 하는 책이다. 그 세계가 담고 있는 주된 내용은 이 책의 부제인 "일본의 에로 만화와 애니메이션, 그리고 게임"이다. 하지만 저자인 김봉석, 김의찬은 단순히 국적의 차원에서 일본의 에로 만화와 애니, 게임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한국의 소위 성인문화와 일본의 성인문화를 비교/분석함으로써 분명히 존재하지만 금지된 우리 사회의 성과 문화에 대한 이중적인 자세를 비판한다.
이것이 내가 읽고 파악한 이 책의 주된 내용과 지향점인데, 다른 이들의 평을 보니 설득에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18禁의 세계"는 대중문화론으로 분류되는데, 뭉뚱그려 대중문화라고 하지만 영어권에서는 이 단어를 다음과 같이 구분하여 사용한다. 그것은 mass culture와 popular culture인데, 이 둘은 모두 대중문화를 지칭하는 말이지만 전자는 대중문화를 부정적인 관점에서 말하는 것이고, 후자는 긍정적인 측면까진 아니라도 최소한 중립적인 개념으로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후자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즉, 대중문화의 역할, 그것도 금지된 성인문화의 역할에 대해 긍정적인 관점, - 최소한 그 효용성을 인정하고- 이미 존재하고 있고, 앞으로도 존재할 이 문화의 역할을 살펴보고자 한다는 거이다.
우리 말로 성인을 가리키는 단어인 "어른"은 "어르다"란 옛말에 어원을 두고 있다. "어르다"란 말은 "혼인하다, 교합하다"란 말인데, 즉 성교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성인, 어른이 된다는 것은 성교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여기서 "할 수 있는"을 생물학적으로 "임신이 가능한, 수태를 시킬 수 있는"으로 본다면 간단하지만, 이를 사회학적으로 바라보면 여러 양태들이 나타날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성교(sex)에 대한 의식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으로 묵시적인 제약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르다"란 말을 사전적으로 정의하고 있는 첫 구절이 다름아닌 "혼인하다"란 말로 규정된 것과 같다. 이 말은 다시 말해 혼인하지 않은 성인은 섹스를 할 수 없으며, 혼인이란 정식절차에 의하지 않은 모든 성 관계는 부도덕한 것으로 규정당한다.
그런 점에서 성인문화는 성인이되 별도의 성인인증을 필요로 한다. 예를 들어 처녀총각이 성인문화를 즐기는 것은 어딘가 부도덕한 것이지만, 혼인한 부부가 부부관계의 자극을 더하기 위해 성인문화를 즐기는 것(간단히 이 때의 성인문화를 포르노 무비 혹은 에로티시즘을 담은 핑크무비라고 해두자)은 묵인된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가장 중요한 문화적 화두는 누가 뭐래도 성(性)이다. 그것이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 가운데 무엇이든 말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자체를 금기시하고, 성에 대한 발화자체가 곧 남성의 성적 욕망에 고스란히 연결되는 맹점을 지닌다. 성인 문화는 그 긍정성을 아무리 높이 평가하더라도 그 자체로 남성적인 문화가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것은 책으로써의 "18禁의 세계"가 지닌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함께 해결해가야 할 문제이며, 성인문화만의 문제는 역시 아니다. 하지만 이 부분을 지적하고 넘어가지 않는다면 한국이든, 일본이든 성인문화엔 미래가 없다.
흔히 성인문화라고 하면 성과 폭력을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성인문화의 핵심은 누가뭐래도 성일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는 폭력에 대해 특히 관대한 편이고, 심지어 이것을 남성성의 핵심으로 부추기는 측면마저 있다. 이런 태도는 비단 우리 사회만의 문제는 아니다. 폭력적인 장면보다 더 많은 검열과정을 거치게 되어있는 것이 바로 성적인 암시, 관능성, 에로티시즘이기 때문이다. 에로티시즘의 역사적 연원을 거슬러 오르면 신화, 관습, 종교에 도달하게 된다. 이는 에로티시즘이 인간의 본원적 욕망에 자리하고 있음을 입증해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중세를 거치며 수그러들었다가 인간의 본성을 강조하는 르네상스 시대에 접어들면서 에로티시즘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당연하다. 프랑스 혁명 이후 에로티시즘은 점차 종교적 속박에서 벗어나 개인의 자유를 표현하는 부르주아 혁명과 어깨를 나란히 했고, 예술 사조상 낭만주의와도 함께 했다. 그러나 지금의 관점에서도 에로티시즘은 포르노그라피와 구분하기 어렵다는 문제를 지닌다. 어디부터 어디까지를 에로티시즘으로 볼 것인지, 포르노그라피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결국 우리 사회의 "18禁의 세계"가 지닌 한계치이기도 하다.
그런 한계치의 문제를 한 권의 책이 모두 해결할 수 있다면 오죽이나 좋겠냐만 시대의 금서들이 걸어온 길을 생각해본다면 그것이 결코 단순한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대신에 저자들은 성인문화의 가능성을 성인만화의 가능성에 찾고자 한다. 과연 성인만화가 우리 사회의 18금 문화에 대한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 그건 나도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저자들은 너무 쉽게 단언하는 경향이 있다. "18禁의 세계"는 크게 두 장으로 구분되는데 "1장 18금이란 무엇인가"에서 저자들은 성인만화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사실 한국의 성인은 불쌍하다. 흔히 천민자본주의라고 하지만, 그 천민성에 억눌려 스스로 타락해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측은한 생각까지 든다."<본문20쪽> 이렇게 단언하고는 있지만 이 부분의 마지막에 가면 대체 성인문화란 무엇이고, 왜 필요한가? 산업적으로는 왜 중요한가? 란 식의 질문만 던져놓고, 바로 이어지는 글에서 "지금 한국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인문화를 만드는 것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며 움츠러들고 만다.
앞서 큼지막하게 주장한 이야기가 서글퍼질 결말이다. 성인문화가 필요한 이유 중 하나로 제시된 건 진짜 성인문화가 존재한다면 청소년 보호도 오히려 쉬울 거란 말이다. 그렇게 간단한 이유라면 앞서의 천민자본주의와 그 천민성에 억눌린 채 타락해가는 성인들까지 들먹일 이유는 없어 보인다. 사실 이 책의 저자들이 추구하고, 주장하는 바가 무엇일지 짐작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바로 그 부분을 독자의 한 사람으로 듣고 싶은 것이다. 성인문화의 존재 필요성을 역설하지만 정작 이 책에서 강조된 부분은 일본의 헨타이 만화를 비롯한 여러 성인 매체와 장르들에 무게 중심이 실려 있다. 그렇기에 독자들은 이 책을 읽으며 저자들이 일본 성인 만화의 애독자이고, 전문가란 사실은 확인할 수 있지만 성인문화가 우리에게 왜 필요한지, 그 통로가 어째서 성인만화를 시작으로 해야하는지에 대해선 알 수 없는 것이다.
끝의 대안으로 주장되고 있는 "한국 성인 만화의 가능성" 부분이 그 내용의 가치판단을 떠나 맥없고, 공허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하지만 책의 부분부분들에서 보이는 내용들은 무척 재미있고, 동의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다 읽고 난 뒤로도 종종 다시 읽어보곤 한다. 에로와 포르노의 차이를 말하는 것만큼 미묘한 문제가 또 어디에 있겠나? 그건 정상과 변태의 차이만큼이나 복잡해지는 문제가 아닌가.
* 참고로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우로츠키 도지(우로츠키 동자)"는 지금껏 내가 본 일본 아니메 중 가장 뛰어난 것들 속에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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