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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대중문화

제임스 트위첼 - 욕망, 광고, 소비의 문화사/청년사(2001년)

욕망, 광고, 소비의 문화사/ 제임스 트위첼 지음, 김철호 옮김 / 청년사 / 2001년 10월

1. 광고 - 범죄의 재구성 혹은 당의정?

살아가다보면 누구나 그런 경험들
- 자신의 인생이 어느 사건, 혹은 순간을 계기로 극적인 전환을 거쳐 질적인 변화에 이르는 - 을 하게 된다. 어떤 맥락에서 보든 나 역시 내 삶의 이력을 때로 매우 극적으로 변환시킨 계기가 되었던 몇몇 사건들을 경험했다. 그 중 몇 가지는 이런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4년간 막노동꾼으로 건축현장의 거의 전 분야, 가령 목수로 시작해서 미장이, 벽돌공, 방수공사 일꾼을 전전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대학생이 되었던 것, 대학을 졸업하고 모 광고회사에서 대리까지 승진했다가 어느날 갑자기 때려치우고 지방의 모 시민문화단체로 업종을 전환한 사건이 그것이다. 광고회사에서 일한 기간은 전부 합쳐봐야 2년 남짓한 기간이었지만, 지금의 내가 업무적으로 해내야 하는 일들의 거의 대부분을 실무적으로 배우게 된 것은 학교가 아니라 그 회사에서였다. 그곳에서 2년을 근무하는 동안 나는 운이 좋았던 것인지 운이 나빴던 것인지 프로야구단 홍보물, 모재벌그룹의 그룹 브로슈어, 철강회사 브로슈어, 이탈리아산 수입 자동차 브로슈어 등 주로 출판물에 의한 광고를 전담해서 진행했다.

그곳에서 일하는 동안 내가 가장 존경했던 광고인 데이비드 오길비였고, 클라이언트들 앞에서 행하는 프리젠테이션은 총성없는 전쟁이었다. 나는 모 그룹 브로슈어 제작을 따내기 위한 공개 경쟁에서 LG애드와 같은 메이저 광고회사를 따돌리고 광고물을 수주한 경험도 있었다. 그날의 기분은 베르사이유궁에서 독일 통일을 강제한 뒤 독일 브란덴부르크문으로 개선하는 프로이센 장군의 심정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그곳에서 일하는 동안 나는 설 연휴에 쉬어 본 적이 없고, 추석 명절에도 쉬어 본 적이 없었다. 하루 세 끼를 고스란히 사무실에서 해결해야 했고, 모두가 퇴근한 빈 사무실에서 디자인팀과 함께 BB탄 에어건을 가지고 서바이벌 게임을 하며 스트레스를 푼 적도 있었다. 아침엔 인근 사우나에 가서 사우나를 한 뒤 박카스 한 병과 우루사 한 알로 해장을 했다. 작은 원룸에서 살고 있었지만 집에 들어가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다보니 연애는 자연도태되었고, 나는 7년을 사귄 사람과 헤어졌다. 충격이었다. 나쁜 일은 함께 온다고 했던가? 그렇게 따낸 재벌의 그룹 브로슈어를 납품하고 얼마 안가 이 회사는 그룹 전체가 정권과 밀착한 비리와 연루되어 공중분해되고 말았다. 그룹 회장은 물론 계열별로 경영권을 물려받은 형제가 줄줄이 구속되었다. 문어발식 경영과 무리한 업종 확대, 권력과 밀착한 비리가 불러온 파국이었다.

그때 나는 회사를 그만두었다.
아마도 내가 썼던 말들, 소위 '컨셉'이니 '카피'니 '비주얼 이미지'들이 그들의 범죄를 어떻게 재구성하고 포장해냈는지를 느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 무렵엔 모든 재벌들이 변화에 목말라했다. 아직 IMF는 터지기 전이었지만 5공화국 시절 3저와 함께 누렸던 호황의 거품이 빠지면서 변화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자각도 있었다고 느꼈다. 그래서 내가 광고로 관여하기도 했던 모 재벌그룹 총수는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는 모두 바꾸라"고 말하며, 전세계에 걸쳐 있는 자사 임직원들을 모아 서울잠실경기장에서 그들만의 축제를 벌이며 변화의 몸짓, 아니 안간힘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변화를 위한 것이었을까? 결론만 말하자면 나는 본질을 바꾸지 않고, 그에 대한 포장을 통한 변화의 이미지 메이킹만으로, 남에게 보이기 위한 선전만으로는 아무 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거짓을 포장해서 달콤한 설탕으로 덧씌운 당의정을 팔았다.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지방의 작은 시민문화단체에 취직했다. 업무 환경은 열악했고, 주변에서는 아직 그 일의 가치를 알아주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이 일에 만족하고 있다. 비록 4년제 대학을 졸업한 대학생들의 초봉에도 미치지 못하는 월급을 받고 있지만... 나는 일 자체가 주는 보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2. 다시 읽는 광고 - 욕망, 광고, 소비의 문화사
나는 홈페이지를 하나 가지고 있다.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http://windshoes.new21.org)" 제법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고, 햇수로 4년째를 하다보니 여기저기 알려진 모양이다. 그 덕분에 재작년이던가? 대학생연합광고동아리의 강연을 부탁받은 적이 있다. 글쎄, 왜 그런 부탁을 했는지 정확한 의도는 모르겠지만 장차 광고인이 되고자 하는 이들이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광고인으로서의 나는 실패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메이저 광고회사를 다닌 적도 없고, 단지 2년 남짓한 짧은 시간 동안 어쩔 수 없이 광고를 생업으로 삼았을 뿐인데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며 한두시간 남짓한 이야기로 과연 무슨 영향을 줄 수 있을까? 그러난 그것은 광고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말이다.

우리는 예술을 '문학, 미술, 음악, 사진, 영화, 무용, 연극' 등등의 장르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고전 시대의 그리스, 로마 시대 사람들이 생각했던 예술엔 오늘날 우리가 예술이라 인식하지 못하는 장르들이 종종 예술로 평가받는다. 가령, 오늘날 정치인의 웅변을 예술로 생각하고 규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당시의 사람들은 '웅변'을 분명히 예술 장르 중 하나로 포함시키고 있다. '사진'이나 '영화'는 기술적 진보로 만들어진 예술 장르이며 지난 100여년 전만 하더라도 이것을 예술로 인식하던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그들은 이것을 '요지경'과 마찬가지로 신기한 장난감 정도로 인식했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분명히 이것을 예술로 인식한다. 만약 예술을 상업적인 의도와 무관한 어떤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당장 영화를 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예술과 상업주의는 서로 떼어낼 수 없다.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21세기, 22세기에는 혹시 '광고'도 예술 장르에 포함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 자리에서 그런 질문을 그들에게 던졌다. 역시 반응은 거의 돌아오지 않았지만....
편견과 고정관념은 광고의 적이다.

이 책의 저자 제임스 트위첼은 우리가 흔히 광고하면 떠올리는 마케팅 전문가로서의 광고학자는 아니다. 그는 미국 플로리다대학의 영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미국의 몇몇 광고 잡지에 고정칼럼을 쓰고 있는 인문학자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측면에서 보자면 그는 아마추어리즘에 입각해 프로페셔널리즘으로 무장한 광고를 분석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광고업종에 종사하는 이들이 격찬하는 광고가 실제로 대중들에게는 외면당한 사례가 종종 있다. 그것은 광고를 실제로 접하고 구매에 이르는 이들은 아마추어 광고 매니아(?)들이자 프로 소비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을 읽다보면 쉽게 제임스 트위첼의 시선이, 일반 독자들의 시선과 쉽게 교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책이 다루고 있는 내용에 비해 무척 쉽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은 그런 점 때문이다.

이 책의 한국 도서명은 "욕망, 광고, 소비의 문화사"인데, 큼지막하게 쓰인 한글 도서명 옆에 작고 붉은 타이포그라피로 원제명인 "Twenty Ads that Shook The World : The Century's Most Groundbreaking Advertisings And How It Changed Us All"이다. 우리 말로 번역해보자면 "세계를 놀라게 한 이십 편의 광고 - 20 세기 최고의 창조적인 광고, 그것은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켰나"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런데 영어 원제명은 모두 대문자로 표기되어 있지만, 맨 앞에 오는 글자만 조금씩 크게 표기되어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광고업계에서는 알파벳 타이포그라피를 사용할 때 모든 글자를 대문자로 표기하는 방법과 소문자로 표기하는 방법, 앞 글자만 대문자로 표기하고 따라오는 글자는 소문자로 표기하는 방법 중 어떤 표기 방식을 사용할 때 일반인들이 가장 쉽게 알아볼 수 있는가를 연구해왔다. 그 결과 앞글자만 대문자로 표기하고, 뒷글자는 소문자로 표기할 때 인지율이 가장 높다는 결론을 얻었다. 이 책의 표지에서 앞글자만을 다소 큰 폰트 크기를 이용한 까닭도 거기에 있다.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이렇듯 광고를 위한 심리적 기법에 말려든다.

3. 광고는 자본주의 꽃인가? - 20 세기의 창조
저자 제임스 트위첼은 저자 서문에 해당할 "0장" - 이 책은 모두 21장의 구성인데, 저자 서문을 0장으로 표기하고 있다 - 의 제목을 '예술인가, 쓰레기인가'로 뽑았다. 아마도 그것이 이 책 전체를 총괄할만한 저자의 의도이자 결론내릴 수 없는 결론일 것이다. 흔히들 광고를 자본주의의 꽃이라고 말한다. 광고가 자본주의의 꽃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면 우리는 먼저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묻지 않으면 안된다. 그 결과에 따라 광고는 예술 혹은 쓰레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20세기를 결코 자본주의의 시대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복잡다기한 20세기의 사건들을 이리 정리하고, 저리 정리하면서 20세기를 때로는 혁명의 시대로, 총력전의 시대로, 문명과 야만의 시대로, 사회주의의 시대로, 자본주의의 시대로 정의한다. 저자나 나 역시 이런 정의들에 동의하지만 동시에 그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함을 느꼈는지 저자는 20세기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그것은 "물질주의"와 "상업주의"이다.

우리의 마음 속에 전초기지를 구축해놓고 있는 문화를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기쁨은 두 배로 만들어주는 즐겁고 행복한 쌍둥이" 운운하는 추잉검 광고를 무심결에 흥얼거리면서 입냄새와 비듬과 물때를 걱정하면서, 서른일곱 가지나 되는 치약 중에서 한 가지를 고르기 위해 고민하면서, 커다란 꺽쇠가 그려진 운동화를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에 구입하면서 상업주의를 비판하기는 어렵다는 얘기다. 바로 이것이 핵심이다. 이런 것들은 물이고, 우리들은 물고기인 것이다. <본문 8쪽>


"물과 물고기"의 비유는 낯익다. 그것은 마오쩌뚱이 중국의 사회주의 혁명을 이끌며 혁명가와 인민 대중의 관계를 지칭하며 한 말이다. 광고인들 입장에서 보자면 자신들은 물고기이고, 소비자들은 물이겠지만, 소비자들 입장에서 보자면 광고의 홍수는 물이고, 자신들은 본의든 아니든 그 안에서 살고 있는 물고기이다. 이 비유에서 가장 확실한 것은 어느 경우이든 물고기는 물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이다.

광고를 들여다보면 상업주의의 종교적 뿌리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이 물건을 사면 구원받으리라. 그대는 오늘 휴식할 자격이 있도다. 당신, 당신, 당신은 모두 하나다. 우리는 당신을 염려하는 벗이다. 당신은 정말 운이 좋다. 우리가 보살핀다. 우리를 믿어라. 당장 사라." <본문 23쪽>


20세기를 규정하는 중요한 움직임 중 하나는 분명 사회주의였다. 많은 역사학자들이 20세기를 러시아 10월 혁명과 함께 출발해 지난 1991년 무렵의 소연방 해체가 역사적 맥락에서 종결되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역으로 지난 18세기 무렵 서구 유럽이 제국주의를 통해 축적한 자본을 통해 본격적으로 가동된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을 20세기의 중요한 역사적 본질로 평가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자본주의를 구성하고 있는 두 가지 중요한 축은 '물질주의와 상업주의'이며 이것이 가능하도록 한 토대에는 인간의 욕망이 잠재해 있다. 우리들은 이미 우리들의 욕망에 지배당하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몸에 일단 새겨진 안락함의 기억이 얼마나 질긴지 너무 잘 알고 있으며, 대부분은 그 기억에 맞서 싸울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20세기의 사람들은 기독교나, 이슬람교, 불교, 유교와 같은 종교적 가치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20세기의 인류는 이미 단일 종파, 단일 종교로 통합되었는데, 그 신의 이름은 바로 "물신(物神)"이다.



4. 빨간코 사슴 루돌프로부터 페미니즘에 이르기까지
- 팔 수 있는 모든 가치를 파는 광고

이 책은 모두 20편의 광고 이야기로 꾸며져 있다. 제1장 "야바위의 왕자 - 흥행의 천재 바넘"으로부터 제20장 "영웅 신화 - 나이키와 마이클 조던"에 이르기까지 20세기의 가장 창조적이었던 광고들이 과연 우리들에게 무엇이었는가를 묻고 있다. 1장에서 다루고 있는 바넘은 쇼비즈니스계의 천재였다. 그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팔았고, 제2장에 등장하는 댄 핑크햄은 아무런 효능도 없는 싸구려 물약을 만병통치약으로 팔았다. 우리가 흔히 위약(僞藥)이라고 알고 있는 플라시보(placebo)의 시초인 셈이다. 사람들은 그에게서 약효를 산 것이 아니라 광고를 샀다. 제3장 "페어스 비누"편에서는 사람들이 상류층 사람들과 같은 물건(비누)을 구매하고 소비함으로써 자신이 어떻게 상류층 사람들과 물질적 평등을 이루었다는 자기만족감에 빠져드는지를 말한다. 제5장 "리스터라인 구강청정제"는 한 광고인이 이전까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던 구취를(서양에서는 식사 중에 소리를 내며 먹는 것을 에티켓에 어긋난다고 여기지만, 동양에서는 맛있다는 표현이다. 그들은 남들 보는 앞에서 코 푸는 행위가 에티켓에 어긋난다고 생각지 않지만 우리는 이것을 예의없는 행위로 생각한다) 에티켓에 어긋나는 것으로 몰아부쳐 결국 사회의 분위기를 구취 자체가 문명인의 예의 범절에 어긋나는 것으로 강제했는지를 말한다. 구강청정제를 팔기 위해 구취는 문명세계에서 추방당해 마땅한 존재가 되었다.

제8장 "드비어스 다이아몬드"는 오늘날에도 즐겨 사용되는 대표적인 광고 문구를 만들어 냈다.
"다이아몬드는 영원하다 A Diamond is Forever." 드비어스사는 다이아몬드를 사랑의 맹세와 결부시킴으로써 탄소 덩어리에 불과한 다이아몬드를 보석의 최고봉으로 올려놓았다. 1866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대규모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되고, 근대적 채굴법이 이용되면서 다이아몬드 재고는 쌓여갔지만 다이아몬드는 여전히 비싼 보석이다. 그럼에도 다이아몬드는 대중화되었다. 그것은 다이아몬드 제국을 이루려는 드비어스가 만든 '영원불멸'이란 이미지 전략 덕택이었다. 그러나 이런 드비어스의 광고 전략 덕에 아프리카 시에라리온에서는 전인구의 3분지 1이 난민이 되었고, 4천여 명의 어린이, 민간인들의 팔다리가 반군에 의해 조직적으로 잘려 나갔다. 아름다운 순백의 신부의 손가락에 끼어진 다이아몬드 반지는 사실 아이들의 잘려나간 팔다리이다(보다 자세한 내용은 "총.균.쇠"와 "다이아몬드 잔혹사"를 참고하시라). 드비어스와 같은 다이아몬드 상인들은 다이아몬드 광산 채굴을 위해 광산을 장악한 반군에게 군비를 제공했고, 반군들은 다이아몬드를 팔아챙긴 돈으로 사람들을 죽였다.

오늘날 우리가 산타클로스하면 자동적으로 떠올리는 빨간 외투의 뚱뚱한 산타는 코카콜라의 광고 대행사에서 만들어낸 것이고, 빨간코 사슴 루돌프 역시 디즈니사가 만든 아기 사슴 밤비에 힌트를 얻은 광고대행사의 한 카피라이터가 만들어낸 창조물이다. 이렇듯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 그리고 추억이 되는 산타와 루돌프는 예술인가? 쓰레기인가? 우리는 해마다 발렌타인 데이니, 화이트데이니 해서 사랑하는 연인에게 사탕이나 초콜릿을 주며 사랑을 고백한다. 사람들은 이를 무대책으로 수용한다. 그 결과 캔디 나라의 왕자들인 제과 회사들은 한 해 매출액의 상당 부분을 이때 올린다. 미국의 경우엔 부활절 하루만 5억 달러의 매출을 올린다고 하니 이건 우리나라만의 현실은 아니다.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하고, 이런 날은 소비자들 스스로도 재미를 위해 만들어낸다. 가령 '빼빼로데이'처럼 말이다.

때때로 광고는 드러내기 보다는 스스로를 감추는 방식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제10장 "폭스바겐의 풍뎅이" 편을 보면 광고업계에서 잘 알려진 광고 카피 "Think small"이 어떻게 소비자들에게 먹혀들어갔는지, 무엇을 드러내고 무엇을 감추는지 말한다. 모두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안달할 때 폭스바겐은 스스로를 감춘다. 사람들은 호기심이 생겨 제 발로 성큼성큼 광고 안으로 들어온다. 사람들은 폭스바겐이 딱정벌레 비틀에 대해 공부하고, 이를 전파해준다. 그러나 이때 그들이 알고 있는 비틀에 대한 정보는 모두 긍정적인 것 뿐이다. 부정적인 내용은 결코 소개된 바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이외에도 말보로 담배와 같이 구체적인 상품으로부터 시작해서 '페미니즘'과 같이 우리가 긍정적인 가치로 인정하고 있는 생각이 어떻게 광고의 효과적인 도구로 이용당할 수 있는지를 밝히고 있다.

5. Protect Me From What I want

개념미술(conceptual art)가인 제니 홀저(Jenny Holzer)는 전광판에 "나의 욕망으로부터 날 좀 지켜줘"란 말을 했는데, 이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었다. 제임스 트위첼은 "예술인가, 쓰레기인가"의 말미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인정할 것이 하나 더 있다. 비록 우리가 광고에 대해 사정없이 비난을 퍼붓고는 있지만, 광고가 우리를 타락시킨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광고는 우리 자신이다. 광고가 인위적인 욕망을 만들어낸다는 생각은 역사와 인간 본성에 대한 씁쓸한 무지의 소치며, 옛날옛적에 순수하게 자연적인 욕구를 지닌 고상한 야만인들의 평화로운 시대가 있었으리라는 막연하고 낭만적인 추측의 소치다. 식량과 피난처가 충족된 이후로, 인간의 욕구는 언제나 문화적이었지 자연적이지 않았다. 그 같은 욕구와 갈망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만족시켜주는 모종의 다른 체제가 도래하기 전까지는, 상업주의는 - 또한 그에 수반된 문화는 - 끊임없이 전진하여 번성을 이룩할 뿐 아니라 승리를 쟁취할 것이다.

우리는 영화 <하이랜더>를 알고 있다. 필립 아리에스(Philippe Aries)는 그의 명저『죽음의 역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은 수천 년 동안 자신의 죽음과, 그 죽음의 국면을 지배하는 주권자로 존재했다. 인간은 오늘날 그런 존재의 모습을 중단했다. 경위는 바로 다음과 같다. 먼저, 당연한 일이지만 인간은 자신이 죽게 될 것이라는 사실 ― 스스로 죽음을 느끼든지, 아니면 다른 사람이 그에게 죽음을 알려주어야 하든지 간에 ― 을 알고 있었다.… 중략 … 인간이 자신의 죽음이 가까이 와 있다는 것을 느낀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에는 사고나 전투의 경우에서조차도 급작스런 죽음은 드물었다. 급사(急死)는 인간에게 회한의 시간을 허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죽음을 박탈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단히 두려운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따라서 약간 위중한 병도 거의 치명적이었던 시대에 죽음은 항상 예고되는 것이었다."


인간의 욕망은 단지 좀더 많은 것을 소비하고자 하는 것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 인간이 지닌 욕망의 근본적인 뿌리는 어쩌면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가 죽음을 초극하고자 하는 강한 욕망은 종종 무한을 향한 욕망, 불멸을 향한 욕망과 끊임없는 상승작용을 일으킨다. 영화 <하이랜더> 속의 코너 맥클라우드는 불멸불사의 몸을 지녔다. 그는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제 수명을 다하여 사라지지만 죽지 못하고 계속해서 살아가야 한다. 그는 최후의 일인이 남을 때까지 그와 같은 불멸불사의 몸을 지닌 전사들과 무한의 쟁투를 벌여야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수레 바퀴는 지구상에서 최후의 자원이 소모될 때까지 지속될까?

극중의 '코너 맥클라우드'는 최후의 승자로서 온전한 생명 - '유한한 생명', 자신을 기억하는 대상들과 함께 소멸할 수 있는 죽음, '낯익은 죽음'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 을 상으로 받았지만 우리는 연이어 김 빠진 속편이 제작되었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다. 자본주의라는 욕망의 무한 추구 시스템은 결국 욕망의 폭주를 의미하고, 400년을 넘게 살아온 불사신에게 새로운 투쟁을 강요한다. 욕망의 폭주는 결국 '지구'라는 인류 공동체의 터전을 파괴하는 길로 나아가고 있다. '나의 욕망으로부터 날 좀 지켜달라(Protect Me From What I Want)'는 제니 홀저의 작품을 보면서 <하이랜더>가 떠오르는 까닭, 우리는 우리의 파괴적인 욕망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렇다면 처음에 던졌던 질문을 다시 한 번 확인해보자? 광고는 21세기에 혹은 22세기에 예술이 될 수 있을까?

예술엔 분명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것에 대항하는 인간의 순수한 의지를 반영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예술은 상업주의와 결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가장 자본적인 의사 표현 방식인 광고는 예술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은 물론 미래의 언젠가 발생할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는 살 수 없듯 예술이 광고의 차원을 떨어지든, 광고가 예술의 차원으로 승화되든 이 둘이 극적으로 결합하는 순간 인류의 삶 역시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진정한 본래의 의미로서 예술이 광고가 되거나 아니면 광고가 예술이 되는 순간, 인류는 스스로의 욕망에 굴복하거나 욕망을 지구의 다른 인류와 함께 살아가는 방법으로 순치시킨 결과일 것이다. 분명 전자는 파멸일 것이고, 후자는 공존이 될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 아래 살아가는 인간은 그가 어떤 지위, 어떤 위치에 있든 스스로의 욕망을 절제하지 않고서는 결단코 행복해질 수 없다. 자, 광고가 아니라 당신의 욕망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내길 바란다. 과연.... 가능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