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이후의 삶
- 곽효환
지구 역사상 스스로의 수명을 끊임없이 놀라울 정도로 늘려온 유일한 존재인 인간이 직
면한 가장 큰 고민은 삶 이후의 삶이다.
페루 중남부 안데스 산맥 고원에 자리 잡은 고대 잉카 제국의 후예들은 인생은 사람으로
그리고 사랑으로 쓰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살만치 살았다고 생각하면 스스로 좋은
날을 택해 가족과 친지, 은인, 더불어 살고 있는 마을 사람 그리고 척 지고 등 돌렸던 사
람들까지 모두를 불러 성대한 잔치를 연다. 그렇게 한바탕 놀고 나면 세상일에 손을 놓고
더 이상 관여하지 않는다. 그것이 그들의 오랜 관습이다. 사람들도 그날 이후엔 그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가 무엇을 하든 개의치 않고 보아도 보았다 하지 않는다.
남은 삶은 그렇게 살아 있으나 죽어 있고 혹은 그렇게 존재하거나 사라진다
출처: 곽효환, 지도에 없는 집, 문학과지성사, 2011
법률용어로 부존재(不存在)라는 말은 참으로 무미건조한 말이다. 존재여부가 분명하지 아니한 상태를 일컫는 말이거나 절차상의 하자로 인해 결정된 어떤 결의가 원칙적으로 성립되지 아니하는 상태, 다시 말해 특정한 권리나 법률적 존재 유무를 가름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곽효환 시인은 그의 두 번째 시집 "지도에 없는 집"을 통해 끊임없이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 묻고 있다. 그 중에서 '삶 이후의 삶'은 타의에 의해 존재가 부정당한 것이 아닌 존재와 삶의 방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인간의 존엄, 존엄을 지키며 살고, 살고, 살고, 살아내는 일, 그리고 이 일과 밀접하게 맞닿아있는 소멸 혹은 사라짐에 대해 말한다.
법률용어로 부존재는 권리의 문제에 해당한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치부되는 많은 것들, 비정규직 노동자, 사회적 소수자들의 문제 역시 그렇다. 하지만 시인이 이 시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과 차원을 달리한다. 그는 좀더 철학적으로 존재와 소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존엄의 문제에 이르러서 이 문제들은 서로 만나게 되어 있다.
어쨌든 그들은 존재를 부정당한 존재들이 아니라 스스로의 존엄을 위해 사라진 자들, 스스로 삶의 한 단계를 매듭짓고 삶 이후의 삶을 준비하는 자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존엄의 문제는 주체성의 문제이자 인간의 존엄에 대한 사회의 제도적 장치, 합의의 문제이다.
자연적인 죽음이야 그 누구도 피할 수 없으나 스스로 선택하여 사라질 수 있는 사회적 죽음의 권리까지 인정하는 고대 잉카 제국의 후예들에게 인생은 사람으로 그리고 사랑으로 쓰는 것이라고 믿는단다. 우리의 인생은 무엇으로 쓰이는가? 너무 늦게까지 너무 열심히 살아낼 수밖에 없는 인생 앞에서 그들이 부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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