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지
- 고영조
맹지盲地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오세영 시인이 우포에서 가르쳐 주었다 경기도 안성 어딘가 만년에 누옥을 앉히겠다고 마련한 곳이 길 없는 땅 맹지라고 맹인이 있으면 맹지도 있다는 뜻이다 눈멀고 귀 먼 청맹과니 길 없는 땅 마음 끊긴 마음들 길도 마음도 닿을 수 없다면 그게 장님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 혜안이 눈부시다 가시덤불 길길이 우거진 저 쪽에 맹지가 있고 마음 굳게 닫힌 저쪽에 그대가 있다 산하도처 길 없는 땅 마음 끊긴 마음들 버려져 있다 눈 먼 마음으로 가는 그 곳에 맹지가 있다 그걸 배웠다.
출처 : 시집 <새로난 길> 2010. 현대시시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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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없는 땅, 길을 낼 수 없는 땅을 가리켜 '눈먼 땅'이란 의미에서 '맹지(盲地)'라 부른다는 걸 이 시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시의 정황을 살펴보면 오세영 시인과 고영조 시인이 우포에 가서 대화를 나누다가 오 시인이 교수직을 정년하고 은퇴하여 안성 어딘가에 집을 한 채 짓고 소일하려다 알고보니 그 땅이 길을 낼 수 없는 땅이라 집을 지을 수 없는 '맹지'라 말하는 것을 듣고 새롭게 알게 된 단어 한 마디로 시작된 시이다.
진술로 이루어진 시(詩)인 만큼 자칫하면 단조롭게 흐르기 쉬운데 고영조 시인은 그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담담한 어조로 시를 이어간다. 길을 낼 수 없어 집을 지을 수도 없는 눈먼 땅 '맹지'라는 용어에서 "눈멀고 귀 먼 청맹과니 길 없는 땅 마음 끊긴 마음들"이라면 그게 장님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로 이어지는 시인의 깨달음은 마음의 장애가 신체의 장애보다 더 큰 장애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헬렌 켈러는 "빛을 못보는 사람보다 마음 속에 빛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 더 불행합니다"라고 했다. "산하도처 길 없는 땅 마음 끊긴 마음들 버려져 있다" 마음과 마음 사이에 길을 내는 일, 그것을 가리켜 누구는 사랑이라 하고, 누구는 정치라 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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