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났을 때 대통령은 박정희였고, 내 딸이 태어나고 치른 첫 번째 선거에서 대통령은 박근혜가 되었다. 사실 인류가 지구상에 출현한 이래 혈육이 대를 이어 통치자가 되는 것을 이상한(또는 비정상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 것은 극히 짧은 한 순간이다. 그것을 한반도의 역사로 치환해보면 그 역사는 더욱 더 짧아진다. 2012년 대선을 분석하기에 지금은 너무 이른 시간이지만 몇 가지 지점은 고민스럽다.
우선 나는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 당선인으로 신분이 바뀌는 상황은 극한의 독재 상황을 겪고 민주화한 공화국이기 때문에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보지는 않는다. 이와 같은 시선의 한 지점에는 한국이 제3세계(식민 독재를 경험하고 이후 근대화를 추진한 나라) 국가의 외부에 존재한다는 일종의 오리엔탈리즘이 작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선거 이후의 상황이기 때문에 결과론적으로 말하는 것으로 비출지는 몰라도 제3세계권에서 전임 통치자(그가 국부였든 독재자이든 권위주의 정부였든 간에)의 후광을 얻어 후임자(가까운 근친이나 혈육)가 선출된 사례는 매우 많았다.
이외에도 민주적 정부 체제 아래에서도 유교적 권위주의 질서(동남아의 민족적 구성이나 종교적, 문화적 사례와 관계없이 이 경우 대부분은 정치, 경제적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화교 경제권 아래에서)가 통치의 명분이나 효과면에서 제법 능률적으로 작동한 사례들이 제법 있다. 싱가포르의 리콴유,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같은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박정희의 통치를 독재로 바라보기보다 여전히 유교적 권위주의 정치체제 정도로 이해하는 노년층에게 싱가포르나 말레이시아의 성공(?) 사례를 박근혜 당선인이 재현해줄 것으로 기대했으리라 예측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선거를 전쟁에 비유하는 까닭은 선거 과정에서의 네거티브, 여권 후보에게 호의적인 또는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는 언론의 여론 조작 사례 조차 선거 승리 이후의 결과를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조지 H. 부시와 마이클 듀카키스의 선거는 미국 역사상 유례가 없을 만큼의 네거티브 선거전이었고, 이 선거에서 부시 후보는 대선 초반 듀카키스 후보 보다 계속해서 지지도가 낮았음에도 불구하고 리 애트워터(Lee Atwater), 다쓰베이더, 나쁜 놈(Bad boy)이라는 별명으로 더 많이 불렸던 불과 37세의 선거전략가를 기용해 엄청난 네거티브로 결국 듀카키스를 낙선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후 이들이 사용했던 네거티브 홍보 내용들은 거의 대부분 거짓 혹은 이전 레이건 행정부 시절의 과오였던 것으로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선거 결과를 뒤바꿀 수는 없었다.
이번 선거에서 정책과 비전을 보여준 후보는 없었다. 거기에 선거를 지배한 커다란 이슈도 없었다. 그런 까닭에 이번 선거는 사실상 네거티브 선거전으로 치러지기에 매우 적합한 선거였으며 실제로도 처음부터 끝까지 네거티브(흑색선전)로 진행된 선거였다. 네거티브로 치러지는 선거에서 최고의 피해자는 국민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선거란 단지 적합한 후보를 선출하는 과정이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 국민에게 후보의 정책과 정견을 알리고, 국민의 동의를 얻는 (홍보)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박근혜 당선인이 비록 양강 구도로 치러진 선거에서 국민 과반의 지지를 얻어 당선되었다고 하더라도 향후 자신의 정책을 펼쳐나가는 과정에서 그를 지지하지 않았던 절반의 반대자들은 물론 설령 지지했다고 하더라도 손쉽게 지지를 철회할 사람들에게 정책 진행 과정에서 저항에 부딪칠 가능성은 매우 농후하다.
또 한 가지는 이번 선거가 이념, 지역간 갈등을 넘어 세대간 갈등이라는 새로운 갈등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선거가 되었다는 것이다. 비록 청년 세대의 3분의 1은 박 후보를 지지했다고 하지만 20-40세대('핵심경제활동인구'의 절대다수)는 박 당선인의 경제정책(비록 박 당선인이 '경제민주화' 이슈를 선점한 효과는 있다지만)에 대해 비판적이며 비우호적이란 뜻이다. 출산율 저하로 인해 20-40세대의 인구가 줄고, 50-60세대가 늘어났다는 분석은 현재로선 다소 멀리 나아간 듯 보이지만 어쨌든 양측 지지자들이 총집결해 치른 선거에서 50-60세대의 결집율이 더 높았다는 것이 높아진 투표율은 잘 보여준다.
문제는 박 당선인 측과 새누리당이 다음 번에 치러질 대통령 선거(4년 중임제 개헌이 없다면 2017년 대선)에서 지금과 같은 세대간 갈등을 해소할 방법으로 선택할 수 있는 정책적 수단이 과연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대통령 후보 간 토론 당시 박 당선인의 발언과 비록 정당 추천 후보는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서울시 교육감 선거에서 보수 세력이 다소간의 마찰에도 불구하고 문용린 후보로 단일화를 이루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아마도 박근혜 집권 이후 정부 명칭을 '국민행복정부'로 하겠다는데 국민행복정부 기간 중에 스스로를 가장 불행하다고 여기게 될 사람들은 교육계 종사자들, 특히 '전교조 교사'들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교육은 대한민국 최대의 배틀 그라운드로 떠오르고 있으며 어떤 이름이 붙든 현재의 20-40세대를 앞뒤로 샌드위치처럼 고립시키려는 교육의 이념적 보수화 정책이 한국 보수 세력의 새로운 재집권 카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선거 최대의 패착은 누가 뭐래도 민주당의 무능이다. 박근혜에게 박정희 프레임을 씌운 것은 국민(이른바 중도층으로부터 진보(노동)층)의 반노 정서를 이해하지 못한 친노 세력의 착시 현상 때문이며, 후보 단일화 전략을 메인 전략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후보 단일화 전략은 '전쟁은 언제나 지난 번 마지막 전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자들이 패배한다'는 교훈으로부터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바로 민주당 집행부란 사실이다. 자신들이 보여줘야 할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것은 물론 안철수의 비전도 자기화하지 못하는 기생정당화해버렸다. 경제민주화는 박근혜에게, 정치쇄신은 안철수에게 빼앗겨 버린 뒤 문재인은 유권자들에게 이것 만큼은 문재인만이 할 수 있으며 문재인이 해내겠다는 이슈를 아무 것도 갖지 못한 채 선거를 치렀다.
민주당 내부의 분열도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지만 무엇보다 이번 선거가 아픈 까닭은 2002년 대선 이후 10년 세월 동안 진보의 지리멸렬, 완벽한 패배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 분당 이후 통합진보당 사태에 이르는 과정은 물론 이후 사회당과 통합한 진보신당이 사실상 사회당계와 구 진보신당 계가 분열되어 대선 후보를 내는 과정은 20년 진보정당 지지자들마저 이번엔 진보세력도 심판받아야 할 대상으로 전락시켜 버렸다. 민주당의 몰락과 두 차례의 패배는 진보가 대안으로 떠오를 수 있는 기회였지만 이제 그 대안의 몫(이미지)은 안철수에게 넘어갔다. 진보정치세력이 김대중, 노무현 시대(이른바 자유주의 정치 세력이 집권한 동안) 노동자, 서민이 이전 정권들 보다 나은 삶을 살았느냐고 대중들에게 퉁명스럽게 혹은 계몽적으로 되묻는 동안 대중은 진보정치세력의 행보를 눈뜬 장님처럼 보았을까? 이 점은 진보정치세력 스스로 뼈아프게 되물어야 할 지점이기도 하다.
어쨌든 결과는 나왔다. 어떤 이는 MB 정권 5년도 살아냈는데 박근혜 정권 5년 못 참겠는가라며 자위한다. 하지만 5년 전 그 어떤 이들이 민주화 10년, 과연 MB라 할지라도 이런 과정을 얼마나 되돌이킬 수 있겠는가라며 민주화는 대세라고 자위했던 기억을 떠올려보면 '심판해야 할 때 심판하지 못하는 국민은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민주주의의 징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민주화 10년이란 좋은 기억은 이제 머릿속에서 지우는 것이 좋겠다. 이제야 말로 보수 정치 세력이 10년을 집권하는 상황이 도래했으며 이 말은 권력과 언론, 재벌의 유착이 좀더 공고하게, 좀더 공공연하게 대한민국의 리빌딩을 시도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게다가 과반을 넘긴 지지와 국회를 등에 업은 수직적 권위주의 정권의 탄생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우리의 삶은 얼마나 가파르고 거친 일이 될 것일지 일말의 희망과 의지로 견뎌내기에는 걱정이 너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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