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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

김일영 - 바다로 간 개구리 바다로 간 개구리 - 김일영 창자가 흘러나온 개구리를 던져놓으면 헤엄쳐 간다 오후의 바다를 향해 목숨을 질질 흘리면서 알 수 없는 순간이 모든 것을 압수해갈 때까지 볼품없는 앞발의 힘으로 악몽 속을 허우적거리며 남은 몸이 악몽인 듯 간다 잘들 살아보라는 듯 힐끔거리며 간다 다리를 구워 먹으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도시로 헤엄쳐 갔다 출처 : 실천문학, 2008년 가을호(통권91호) * 시가 담아내고자 하는 것 자체가 형상화(image)는 아니어도 형상화되지 못한 시를 보는 것은 괴롭다. 김일영 시인의 가 그런 시란 뜻은 물론 아니다. 나에겐 정반대다. 내 안에서 너무 잘 형상화되어 도리어 가슴 아픈 시다. 우연치 않게 다큐멘터리 전문 채널에서 서바이벌 생존전문가가 사막에서의 생존기술을 보여주는 프로그램.. 더보기
루이 아라공 - 죽음이 오는 데에는 죽음이 오는 데에는 - 루이 아라공 (Louis Aragon, 1897 - 1982) 죽음이 오는 데에는 거의 일순간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마침 그때 알몸의 손이 와서 나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 손은 되돌려주었다 내 손이 잃었던 색깔을 내 손의 진짜 모습을 다가오는 매일 매달 광활한 여름의 인간들의 사건에로 업무에로 뭐가 뭔지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에 항상 몸을 떨고 있었던 나에게 나의 생활에 바람과 같은 커다란 목도리를 두르고 나를 가라앉히는 데는 두 개의 팔이면 족했던 것이다 그렇다 족했던 것이다 다만 하나의 몸짓만으로 잠결에 갑자기 나를 만지는 저 가벼운 동작만으로 내 어깨에 걸린 잠 속의 숨결이나 또는 한 방울의 이슬만으로 밤 속에서 하나의 이마가 내 가슴에 기대며 커다란 두 눈을 뜬다 그.. 더보기
박주택 - 방랑은 얼마나 아픈 휴식인가 방랑은 얼마나 아픈 휴식인가 - 박주택 여행자처럼 돌아온다 저 여린 가슴 세상의 고단함과 외로움의 휘황한 고적을 깨달은 뒤 시간의 기둥 뒤를 돌아 조용히 돌아온다 어떤 결심으로 꼼지락거리는 그를 바라다본다 숫기적은 청년처럼 후박나무 아래에서 돌멩이를 차다가 비가 내리는 공원에서 물방울이 간지럽히는 흙을 바라다보고 있다 물에 젖은 돌에서는 모래가 부풀어 빛나고 저 혼자 걸어갈 수 없는 의자들만 비에 젖는다 기억의 끝을 이파리가 흔들어 놓은 듯 가방을 오른손으로 바꾸어 들고 느릿한 걸음으로 돌아온다 저 오랜 투병의 가슴 집으로 돌아온다 지친 넋을 떼어 바다에 보탠 뒤 곤한 안경을 깨워 멀고 먼 길을 다시 돌아온다 출처 : 박주택, 방랑은 얼마나 아픈 휴식인가, 문학동네(1996) * 박주택 시인의 두 번째 .. 더보기
프란시스 윌리암 버어딜론 - 사랑이 끝날 때 사랑이 끝날 때 The Night has a Thousand Eyes - 프란시스 윌리암 버어딜론 (Francis William Bourdillon) 밤은 천 개의 눈을 가졌지만 낮은 하나뿐 하지만 밝은 세상의 빛은 사라진다 저무는 태양과 함께 마음은 천 개의 눈을 가졌지만 가슴은 하나뿐 하지만 한평생의 빛은 사라진다 사랑이 끝날 때에는 The night has a thousand eyes, And the day but one; Yet the light of the bright world dies With the dying sun. The mind has a thousand eyes, And the heart but one: Yet the light of a whole life dies When love.. 더보기
손택수 - 아버지의 등을 밀며 아버지의 등을 밀며 - 손택수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엘 가지 않았다 여덟살 무렵까지 나는 할 수 없이 누이들과 함께 어머니 손을 잡고 여탕엘 들어가야 했다 누가 물으면 어머니가 미리 일러준 대로 다섯 살이라고 거짓말을 하곤 했는데 언젠가 한번은 입속에 준비해둔 다섯살 대신 일곱 살이 튀어나와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나이보다 실하게 여물었구나, 누가 고추를 만지기라도 하면 잔뜩 성이 나서 물속으로 텀벙 뛰어들던 목욕탕 어머니를 따라갈 수 없으리만치 커버린 뒤론 함께 와서 서로 등을 밀어주는 부자들을 은근히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하였다 그때마다 혼자서 원망했고, 좀더 철이 들어서는 돈이 무서워서 목욕탕도 가지 않는 걸 거라고 아무렇게나 함부로 비난했던 아버지 등짝에 살이 시커멓게 죽은 .. 더보기
쳔양희 - 생각이 사람을 만든다 생각이 사람을 만든다 - 천양희 이 생각 저 생각 하다 어떤 날은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고 막무가내 올라간다 고비를 지나 비탈을 지나 상상봉에 다다르면 생각마다 다른 봉우리들 뭉클 솟아오른다 굽은 능선 위로 생각의 실마리들 날아다닌다 뭐였더라, 뭐였더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의 바람소리 生覺한다는 건 生을 깨닫는다는 것 생각하면 할수록 生은 오리무중이니 생각이 깊을수록 生은 첩첩산중이니 생각대로 쉬운 일은 세상에 없어 생각을 버려야 살 것 같은 날은 마음이 종일 벼랑으로 몰린다 생각을 버리면 안된다는 생각 생각만 하고 살 수 없다는 생각 생각 때문에 밤새우고 생각 때문에 날이 밝는다 생각이 생각을 놓아주지 않는다 지독한 생각이 사람을 만든다 출처 : 천양희, 오래된 골목, 2003, 창비 * 마지막 행 .. 더보기
신동엽 - 담배연기처럼 담배연기처럼 - 신동엽 들길에 떠가는 담배 연기처럼 내 그리움은 흩어져 갔네 사랑하고 싶은 사람들은 많이 있었지만 멀리 놓고 나는 바라보기만 했었네. 들길에 떠가는 담배 연기처럼 내 그리움은 흩어져 갔네. 위해주고 싶은 가족들은 많이 있었지만 어쩐 일인지? 멀리 놓고 생각만 하다 말았네. 아, 못다한 이 안창에의 속상한 드레박질이여. 사랑해 주고 싶은 사람들은 많이 있었지만 하늘은 너무 빨리 나를 손짓했네. 언제이던가 이 들길 지나갈 길손이여 그대의 소맷 속 향기로운 바람 드나들거든 아퍼 못 다한 어느 사내의 숨결이라고 가벼운 눈인사나, 보내다오. * 가끔 철지난 느와르풍의 옛날 한국 영화들을 보게 될 때가 있습니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더라도 참 이국적(異國的)이란 생각이 들게 하는, 프랑스와 미국의 느.. 더보기
최승호 - 탈옥 탈옥 - 최승호 내가 간수이고 내가 죄수인 세월 흐를수록 욕망은 굳어만 간다 모범수로 늙어가는 욕망 감시하는 간수와 刑을 함께 사니 이 몸뚱이가 바로 벽 두꺼운 형무소, 깨라, 내 안의 벽들이 무너지며 위험한 알몸의 욕망은 뛰어 나온다. * 문학평론가 김현은 "프랑스비평사"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나에게 해야 할 다른 일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라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강박관념의 대부분은, 내가 소박한 문학비평가로 남아 있고 싶다는 욕망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론 서적을 뒤지기 보다는, 아직도, 작품을 앞에 두고, 연금술사들의 고독한 몽상을 즐기고 싶은 것이다. 그것은 마음대로 오류를 범하고 싶다는 욕망에 다름 아니다. 그것과 다른 또 하나의 체험은, 크게 실패한 자만이 크.. 더보기
정양 - 가난에 대하여 : 박재삼 시집 '비 듣는 가을나무'를 읽고 가난에 대하여 : 박재삼 시집 '비 듣는 가을나무'를 읽고 - 정양 어떤 사람에게는 가난이야 한낱 남루이므로 부귀공명이 끝끝내 그리운 타고난 살결까지는 다 가릴 수가 없었겠지만 아다시피 이 땅에는 가난이 너무 많아서 자랑도 슬픔도 부끄럼도 못 되었지만 밑이나 째지고 부황기 들고 모래밭에 혀나 빼물고 몸이나 팔고 맨주먹이나 파르르파르르 떨었었지만 모를 일이다 타고난 마음씨 하나로 어찌하여 그 가난이 이 세상에서 제일로 제일로 반짝이는지 다만 아직 만나지 못하고 사귀지 못한 그 많은 눈물까지를 해맑은 햇살로나 씻어 어떻게 반짝이게 하는지 정말로 정말로 모를 일이다 * 세상의 많은 길 중에서 커다란 대로를 놔두고, 굳이 비탈길, 돌무더기 켜켜이 쌓인 뒤안길로 가야 할 때, 혹은 그 길로 걸어가는 고행을 자처하.. 더보기
강은교 - 망와(望瓦) 망와(望瓦) - 강은교 한 어둠은 엎드려 있고 한 어둠은 그 옆에 엉거주춤 서 있다 언제 두 어둠이 한데 마주보며 앉을까 또는 한데 허리를 얹을까 * 가끔 내 안의 또다른 나와 분투를 벌이는 자신을 발견한다. 만화의 한 장면처럼 천사와 악마가 나타나 다투는 건 아니어도 우리는 매순간 수많은 생각들, 나를 바라보고 있는 또다른 나와 그 또다른 나를 의식하며 존재하고 있는 내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출몰한다. 우리가 프로이트에게 고마워 해야 할 것은 '내 안의 또다른 나'를 더이상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악귀나 악령이 아니라 그 어둠조차 또한 나라는 것을 긍정할 수 있도록 이론적 근거를 제시해주었기 때문이다. 강은교 시인의 에서 어둠은 서로 포개어진 기와 한 쌍이란 점에서 같은 존재이면서 개별적으로 호명된다. 이..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