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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 - 이건 누구의 구두 한짝이지? 이건 누구의 구두 한 짝이지? - 김선우 내 구두는 애초에 한 짝, 한 켤레란 말은 내겐 폭력이지 이건 작년의 구두 한 짝 이건 재작년에 내다 버렸던 구두 한 짝 이건 재활용 바구니에서 꽃씨나 심을까 하고 살짝 주워온 구두 한 짝, 구두가 원래 두 짝이라고 생각하는 마음氏 빗장을 푸시옵고 두 짝이 실은 네 짝 여섯 짝의 전생을 가졌을 수도 있으니 또한 마음 푸시옵고 마음氏 잃어버린 애인의 구두 한 짝을 들고 밤새 광장을 쓸고 다닌 휘파람 애처로이 여기시고 서로 닮고 싶어 안간힘 쓴 오른발과 왼발의 역사도 긍휼히 여기시고 날아라 구두 두 짝아 네가 누군가의 발을 단단하게 덮어줄 때 한 쪽 발이 없는 나는 길모퉁이 쓰레기통 앞에서 울었지 울고 있는 다른 발을 상상하며 울었지 내 구두는 애초에 한 짝, 한 켤.. 더보기
이백(李白) - 산중문답(山中問答) 산중문답(山中問答) - 이백(李白, 701 ~ 762) 問余何事棲碧山 笑而不答心自閒 桃花流水杳然去 別有天地非人間 왜 산에 사느냐 묻기에 웃기만 하고 대답하지 아니했네 복사꽃잎 아득히 물 위로 떠 가는 곳 여기는 별천지라 인간 세상 아니라네. * 가끔 그런 이야기를 듣는다. 당신은 왜 회사 이야기를 집에 와서 하지 않느냐는 아내의 말부터, 친구들에게 당신은 남의 인생상담은 잘 해주면서 자기 이야기는 잘 하지 않는다는 말, 혹은 그래도 당신은 당신 하고 싶은 대로 다하면서 살고 있지 않느냐는 부러움 아닌 부러움을 듣곤 한다. 그럴 때 나는 그냥 웃기만 한다. 내가 이백이라면 별천지, 인간 세상 아닌 곳에 살아서 그렇다고 말할지 모르겠으나 사람 사는 세상이 왜 아니 힘들고, 어려울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 더보기
미겔 에르난데스(Miguel Hernandez) - 투우(鬪牛)처럼 투우(鬪牛)처럼 Como el toro - 미겔 에르난데스(Miguel Hernandez) 투우(鬪牛)처럼 죽음과 고통을 위해 나는 태어났습니다. 투우처럼 옆구리에는 지옥의 칼자국이 찍혀 있고 서혜부에는 열매로 남성(男性)이 찍혀 있습니다. 형용할 수 없는 이내 가슴 전부는 투우처럼 보잘 것 없어지고 입맞춤의 얼굴에 반해서 그대 사랑 얻기 위해 싸우겠습니다. 투우처럼 나는 징벌 안에서 자라나고, 혀를 가슴에 적시고 소리 나는 바람을 목에 걸고 있습니다. 투우처럼 나는 그대를 쫓고 또 쫓습니다. 그대는 내 바램을 한 자루 칼에 맡깁니다. 조롱당한 투우처럼, 투우처럼. 출처 : 미겔 에르난데스, 양파의 자장가, 솔 * "라틴" 하면 어째서 먼저 '태양'이 떠오르는 걸까. 그 뜨거움이 먼저 내 몸을 달아오르게.. 더보기
오규원 - 無法 無法 - 오규원 사람이 할 만한 일 가운데 그래도 정말 한 만한 일은 사람 사랑하는 일이다 -- 이런 말을 하는 시인의 표정은 진지해야 한다 사랑에는 길만 있고 법은 없네 -- 이런 말을 하는 시인의 표정은 상당한 정도 진지해야 한다 사랑에는 길만 있고 법은 없네 출처 : 오규원,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 문학과지성사, 1991 * "진지해야 한다", "상당한 정도 진지해야 한다"는 시인의 말씀은 스승의 말씀이다. "사랑에는 길만 있고/ 법은 없네"라는 시인의 말씀은 곧 스승의 말씀이다. 고로 나는 "사랑에는 법이 없고 오로지 길만 있다"고 상당한 정도 진지하고 진지해야만 하는 자세로 말하고 있다. 사랑은 무법이다. 하여 아무렇게나 사랑해도 좋은 것은 아니다. 난 너에게 가는 길을 열어야 하며, 내.. 더보기
백석전집 - 백석 | 김재용엮음 | 실천문학사(2003) 『백석전집』 - 백석 | 김재용엮음 | 실천문학사(2003) 『백석전집』 혹은 "백석"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쯤 해보자고 마음 먹은지는 상당히 오래되었다. 그럼에도 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아직도 어렵다. "밤이 깊어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르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하고 제비손이손이하고이렇게 화디의 사기방등에서 심지를 몇 번이나 돋구고 홍게닭이 몇 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릇못싸움 자리싸움을 하며 히드득거리다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치는 아침 시누이 동세들이 욱적하니 홍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틈으로 장지문틈으로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백석의 시 "여우난골족" 중 뒷부분만 발췌해봤다. 과연 저 시를.. 더보기
이윤학 - 전생(全生)의 모습 전생(全生)의 모습 - 이윤학 작년에 자란 갈대 새로 자란 갈대 사이에 끼여 있다 작년에 자란 갈대 껍질이 벗기고 꺾일 때까지 삭을 때까지 새로 자라는 갈대 전생의 기억이 떠오를 때까지 곁에 있어주는 전생의 모습 출처 : 이윤학, 『세계의 문학』, 2005년 겨울호(통권118호) * 전생(前生)이나 전생(轉生)이 아니라 전생(全生)의 모습이다. 가끔. 서로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 그것도 같은 TV프로그램에 비춰지는 가난하고, 온전치 못한 육신(肉身)의 사람들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게 웃으며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공연히 질투가 인다. 마치 성서에 나오는 동방의 의인 욥을 두고 시험에 들게 하고 싶은 악마처럼 공연히 그 두 사람에게 더한 고난이, 더한 고통이 닥친다면 그래도 여전히 너희 두 .. 더보기
강윤후 - 불혹(不惑), 혹은 부록(附錄) 불혹(不惑), 혹은 부록(附錄) - 강윤후 마흔 살을 불혹이라던가 내게는 그 불혹이 자꾸 부록으로 들린다 어쩌면 나는 마흔 살 너머로 이어진 세월을 본책에 덧붙는 부록 정도로 여기는지 모른다 삶의 목차는 이미 끝났는데 부록처럼 남은 세월이 있어 덤으로 사는 기분이다 봄이 온다 권말부록이든 별책부록이든 목련꽃 근처에서 괜히 머뭇대는 바람처럼 마음이 혹할 일 좀 있어야겠다 * 내가 기거하는 하루 중 절반 이상의 시간을 보내는 사무실은 바람의 길 옆이라 담배라도 한 대 태우기 위해 그 길 옆에 서면 하루종일 바람소리가 '휘이휘이~'하며 불어댄다. 하늘, 바람, 구름, 돌, 꽃, 나무, 숲, 달, 강, 호수, 바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자연의 이름들이지만 이중 내가 유독 좋아하는 것은 '바람'. 잡히지 않고, 보.. 더보기
김왕노 - 사칭 사칭(詐稱) - 김왕노 나는 사람과 어울리려 사람을 사칭하였고 나는 꽃과 어울리려 꽃을 사칭하였고 나는 바람처럼 살려고 바람을 사칭하였고 나는 늘 사철나무 같은 청춘이라며 사철나무를 사칭하였고 차라리 죽음을 사칭하여야 마땅할 그러나 내일이 오면 나는 그 무엇을 또 사칭해야 한다 슬프지만 버릴 수 없는 삶의 이 빤한 방법 앞에 머리 조아리며 출처 : 김왕노, 『슬픔도 진화한다』, 천년의 시작, 2002 * 가을이라 모든 것이 허망해 보이지만 세상에 끝이 없으면 시작도 없는 법이다. 시인 김왕노의 「사칭(詐稱)」을 읽노라니 문득 얼마 전 내가 어느 젊은 영혼에게 씹어 뱉듯 내쏘아준 말이 생각났다. 나는 그에게 ‘너도 나처럼 사람들 앞에서 사기 치면서 살라’고 그렇게 충고한 적이 있다. 새나 짐승을 관찰하려는.. 더보기
황인숙 - 후회는 없을 거예요 후회는 없을 거예요 - 황인숙 후회 가득한 목소리로 오, 오, 오오, 여가수가 노래한다 남겨진 여자가 노래한다 마음을 두고 떠난 여자도 노래한다 후회로 파르르 떠는 노래를 들으며 나는 인터넷 벼룩시장에서 마사이 워킹화를 산다 판매글 마지막에 적힌 ‘후회는 없을 거예요’ 그 한 구절에 일전엔 돌체앤가바나 손목시계를 샀다 작년 여름엔 소니 디지털 카메라를 샀다 나를 무장해제시키는, 후회는 없을 거예요 벌써 후회하는 듯한, 후회는 없을 거예요 서글픈 목소리로 나직이, 후회는 없을 거예요 그 시계와 카메라는 상자째 서랍 안에 있다 후회는 없다 오, 오, 오오~ 황인숙, 문학과사회, 2008년 겨울호(통권 84호) * “킥킥”, 황인숙의 신작시를 읽으며 나는 “킥킥” 웃었다. 오다가다 서너 번 스쳐갔던 것이 황인.. 더보기
정호승 - 마음의 똥 마음의 똥 - 정호승 내 어릴 때 소나무 서 있는 들판에서 아버지 같은 눈사람 하나 외롭게 서 있으면 눈사람 옆에 살그머니 쪼그리고 앉아 한 무더기 똥을 누고 돌아와 곤히 잠들곤 했는데 그날 밤에는 꿈속에서도 유난히 함박눈이 많이 내려 내가 눈 똥이 다 함박눈이 되어 눈부셨는데 이제는 아무 데도 똥 눌 들판이 없어 아버지처럼 외롭고 다정한 눈사람 하나 없어 내 마음의 똥 한 무더기 누지 못하고 외롭고 쓸쓸하다 * 아버지 없는 손자 녀석을 바라보며 할머니가 제일 많이 했던 말 중 하나는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일어나지”라는 말이었다. 혀를 끌끌 차며 쏟아내던 당신의 무거운 한숨이 이마에 솜털도 가시기 전에 내 어깨를 내리 눌렀다. 비빌 언덕 하나 없을 내 앞의 삶이 외롭고 쓸쓸할 것이라는 걸, 해가 뜨..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