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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호 - 탈옥 탈옥 - 최승호 내가 간수이고 내가 죄수인 세월 흐를수록 욕망은 굳어만 간다 모범수로 늙어가는 욕망 감시하는 간수와 刑을 함께 사니 이 몸뚱이가 바로 벽 두꺼운 형무소, 깨라, 내 안의 벽들이 무너지며 위험한 알몸의 욕망은 뛰어 나온다. * 문학평론가 김현은 "프랑스비평사"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나에게 해야 할 다른 일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라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강박관념의 대부분은, 내가 소박한 문학비평가로 남아 있고 싶다는 욕망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론 서적을 뒤지기 보다는, 아직도, 작품을 앞에 두고, 연금술사들의 고독한 몽상을 즐기고 싶은 것이다. 그것은 마음대로 오류를 범하고 싶다는 욕망에 다름 아니다. 그것과 다른 또 하나의 체험은, 크게 실패한 자만이 크.. 더보기
정양 - 가난에 대하여 : 박재삼 시집 '비 듣는 가을나무'를 읽고 가난에 대하여 : 박재삼 시집 '비 듣는 가을나무'를 읽고 - 정양 어떤 사람에게는 가난이야 한낱 남루이므로 부귀공명이 끝끝내 그리운 타고난 살결까지는 다 가릴 수가 없었겠지만 아다시피 이 땅에는 가난이 너무 많아서 자랑도 슬픔도 부끄럼도 못 되었지만 밑이나 째지고 부황기 들고 모래밭에 혀나 빼물고 몸이나 팔고 맨주먹이나 파르르파르르 떨었었지만 모를 일이다 타고난 마음씨 하나로 어찌하여 그 가난이 이 세상에서 제일로 제일로 반짝이는지 다만 아직 만나지 못하고 사귀지 못한 그 많은 눈물까지를 해맑은 햇살로나 씻어 어떻게 반짝이게 하는지 정말로 정말로 모를 일이다 * 세상의 많은 길 중에서 커다란 대로를 놔두고, 굳이 비탈길, 돌무더기 켜켜이 쌓인 뒤안길로 가야 할 때, 혹은 그 길로 걸어가는 고행을 자처하.. 더보기
강은교 - 망와(望瓦) 망와(望瓦) - 강은교 한 어둠은 엎드려 있고 한 어둠은 그 옆에 엉거주춤 서 있다 언제 두 어둠이 한데 마주보며 앉을까 또는 한데 허리를 얹을까 * 가끔 내 안의 또다른 나와 분투를 벌이는 자신을 발견한다. 만화의 한 장면처럼 천사와 악마가 나타나 다투는 건 아니어도 우리는 매순간 수많은 생각들, 나를 바라보고 있는 또다른 나와 그 또다른 나를 의식하며 존재하고 있는 내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출몰한다. 우리가 프로이트에게 고마워 해야 할 것은 '내 안의 또다른 나'를 더이상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악귀나 악령이 아니라 그 어둠조차 또한 나라는 것을 긍정할 수 있도록 이론적 근거를 제시해주었기 때문이다. 강은교 시인의 에서 어둠은 서로 포개어진 기와 한 쌍이란 점에서 같은 존재이면서 개별적으로 호명된다. 이.. 더보기
하종오 - 지옥처럼 낯선 지옥처럼 낯선 - 하종오 서른 줄 사내는 골목에서 이불을 주워 왔다 마흔 줄 사내는 폐차장에서 담요를 주워 왔다 오십 줄 사내는 쓰레기 하치장에서 카펫을 주워 왔다 그리하여 세 사내는 밤마다 온몸에 말고 지하도에 누워서 잠들고 낮마다 접어서 옆구리에 들고 역전에서 어슬렁거리고 아무리 담배가 당겨도 한 사람에게서 한 개비만 얻어 아끼며 맛나게 피웠다 서른 줄 사내는 꼭 한 번 카펫을 덮고 싶어했다 마흔 줄 사내는 꼭 한 번 이불을 덮고 싶어했다 오십 줄 사내는 꼭 한 번 담요를 덮고 싶어했다 그러면 세 사내는 꿈에 먼 집으로 돌아가 뜨거운 아랫목에 누워서 식구의 다리를 사타구니에 끼고 달게 잠자겠다고 말했지만 서로서로 바꾸어가며 한 번도 덮지 않고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다가 날씨가 더워졌다 서른 줄 사내는 .. 더보기
황규관 - 마침표 하나 마침표 하나 - 황규관 어쩌면 우리는 마침표 하나 찍기 위해 사는지 모른다 삶이 온갖 잔가지를 뻗어 돌아갈 곳마저 배신했을 때 가슴 깊은 곳에서 꿈틀대는 건 작은 마침표 하나다 그렇지, 마침표 하나면 되는데 지금껏 무얼 바라고 주저앉고 또 울었을까 소멸이 아니라 소멸마저 태우는 마침표 하나 비문도 미문도 결국 한 번은 찍어야 할 마지막이 있는 것, 다음 문장은 그 뜨거운 심연부터다 아무리 비루한 삶에게도 마침표 하나, 이것만은 빛나는 희망이다 출처 : 황해문화. 2001년 여름호(통권31호) * “어쩌면 우리는 / 마침표 하나 찍기 위해 사는지 모른다”는 황규관 시인의 말에 나도 모르게 눈썹이 꿈틀했다. 난 삶이 별거 없다고 생각하는, 그야말로 나이브(naive)한 허무주의자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나보고.. 더보기
김경인 - 인형탄생기 인형탄생기 - 김경인 처음엔 고무 덩어리였죠. 나를 만든 아주머니는 백한 번째 얼굴을 완성하는 중이었어요. 엄마, 엄마, 엄마, 나는 거듭거듭 태어났습니다. 예쁜 이름이구나. 누군가의 목소리 속에서 나는 나를 처음 불러 봤어요. 백한 개의 포장 박스가 차곡차곡 쌓였습니다. 나는 속삭였어요. 얘들아, 나는 모든 이름을 사랑해. 처음엔 그저 고무 덩어리였죠. 서로를 바라보며 눈을 떴어요. 그런데 얘들아, 나는 누구니? 같은 모양의 이파리를 잔뜩 매달고 문득 호수를 굽어본 나무들처럼 우리는 깜짝 놀랐구요. 눈코입은 미로를 따라 끝없이 달아났지요. 발자국은 언제 발견될까요? 지도를 버리세요. 유리창에 매번 다른 지문을 찍어 대는 눈발처럼 내 몸은 드문드문 변하고 있지만요. 아직은 다리는 두 개. 손가락은 다섯 .. 더보기
정현종 -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 정현종 그래 살아 봐야지 너도 나도 공이 되어 떨어져도 튀는 공이 되어 살아 봐야지 쓰러지는 법이 없는 둥근 공처럼, 탄력의 나라의 왕자처럼 가볍게 떠 올라야지 곧 움직일 준비 되어 있는 꼴 둥근 공이 되어 옳지 최선의 꼴 지금의 네 모습처럼 떨어져도 튀어오르는 공 쓰러지는 법이 없는 공이 되어. * "그래 살아 봐야지"란 의미심장한 독백으로 시작하는 은 '공'이 지닌 탄력성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역전이 울림으로 다가온다. 내가 다니는 직장에서는 1년에 한 차례씩 초등학생부터 어머니들까지 참가하는 전국백일장을 개최하고 있다. 백일장을 개최할 때마다 대략 5천에서 6천 명 정도되는 참가자들이 주어진 주제로 시나 산문을 작성하는데 내가 심사위원으로 참여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중에 수상.. 더보기
박정대 - 그녀에게 그녀에게 - 박정대 고통이 습관처럼 밀려올 때 가만히 눈을 감으면 바다가 보일 거야 석양빛에 물든 검은 갈색의 바다, 출렁이는 저 물의 大地 누군가 말을 타고 아주 멀리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모습이 보일거야 그럴 때, 먼지처럼 자욱이 일어나던 生은 다시 장엄한 음악처럼 거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되돌아오기도 하지 북소리, 네 심장이 고동치는 소리를 들어봐 고독이 왜 그렇게 장엄하게 울릴 수 있는지 네 심장의 고동소리를 들어봐 너를 뛰쳐나갔던 마음들이 왜 결국은 다시 네 가슴속으로 되돌아오는지 네 가슴속으로 되돌아온 것들이 어떻게 서로 차가운 살갗을 비벼대며 또다시 한 줄기 뜨거운 불꽃으로 피어나는지 고통이 습관처럼 너를 찾아올 때 그 고통과 함께 손잡고 걸어가 봐 고통과 깊게 입맞춤하며 고독이 널 사랑.. 더보기
마종기 - 낚시질 낚시질 - 마종기 낚시질하다 찌를 보기도 졸리운 낮 문득 저 물속에서 물고기는 왜 매일 사는 걸까. 물고기는 왜 사는가. 지렁이는 왜 사는가. 물고기는 평생을 헤엄만 치면서 왜 사는가. 낚시질하다 문득 온 몸이 끓어오르는 대낮,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만은 없다고 중년의 흙바닥에 엎드려 물고기같이 울었다. * 나도 중년인가 보다. 이 시를 읽고 문득 눈물이 났다. 물고기 같아서.... 물고기 처럼 입을 뻐끔거리며 눈물 흘리려고 했는데 슬픈 눈물 대신 늘어져라 하품이 나와서 슬펐다. 왜 먹먹한 거냐? 인생아! 더보기
공광규 - 나를 모셨던 어머니 나를 모셨던 어머니 - 공광규 늙은 어머니를 따라 늙어가는 나도 잘 익은 수박 한 통 들고 법성암 부처님께 절하러 간 적이 있다 납작 납작 절하는 어머니 모습이 부처님보다는 바닥을 더 잘 모시는 보살이었다 평생 땅을 모시고 산 습관이었으리라 절을 마치고 구경삼아 경내를 한 바퀴 도는데 법당 연등과 작은 부처님 앞에는 내 이름이 붙어 있고 절 마당 석탑 기단에도 내 이름이 깊게 새겨져 있다 오랫동안 어머니가 다니며 시주하던 절인데 어머니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평생 나를 아름다운 연등으로 작은 부처님으로 높은 석탑으로 모시고 살았던 것이다. 출처 : 『황해문화』, 2008년 여름호(통권 59호) * “눈에 밟히다”라는 표현이 있다. 이런 말을 흔히 관용구(慣用句)라 하는 데, 관용구란 본래..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