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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기영 - 토마토 하나의 이유 토마토 하나의 이유 - 송기영 엄마는 기어코 토마토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여 불렀습니다. 못마땅했지만 엄마와 장에 나가 기수, 선규, 홍구, 계영, 소연, 재정, 춘희, 현구, 보경이, 영식이를 팔았습니다. 덤으로 만수와 은이를 넣어주자, 만수가 싱싱하지 않다며 엄마가 아끼는 정이를 집어 들었습니다. 아무리 말해도 막무가내여서, 만수에다 천수까지 얹어주고 삼천 원을 받았습니다. 잔돈을 거슬러주다가, 아주머니 이 사이에 낀 정이를 보고 화가 났습니다. 반 토막 난 정이를 찾으려고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비닐 봉지가 터지며 홍구, 계영, 보경이가 흙바닥을 떼구루루 굴렀습니다. 홍구, 계영, 보경이를 안고 얼굴을 씻기던 엄마가 마침내 싸움을 말렸습니다. 왜들 싸우구 그래? 그깟 토마토 하나 가지구. 송기영, 『.. 더보기
고트프리트 벤 - 혼자 있는 사람은 혼자 있는 사람은 - 고트프리트 벤 혼자 있는 사람은 또한 신비 속에 있는 사람, 그는 언제나 이미지의 밀물 속에 젖어 있다. 그 이미지들의 생성, 그 이미지들의 맹아, 그림자조차도 불꽃을 달고 있다. 그는 모든 층을 품고 있고 사색에 충만하며 그것을 비축해 두고 있다. 그는 파멸에 강하며 남을 부양하고 짝을 맺어주는 모든 인간적인 것에 강하다. 대지가 처음과는 다른 것으로 바뀌는 것을 그는 아무 감동 없이 바라본다. 더는 죽을 것도, 더는 이루어질 것도 없이 조용한 형식의 완성이 그를 지켜 보고 있을 뿐. * 종종 혼자 있을 수 있다면 하는 상상을 해보지만, 혼자 머무는 시간 동안엔 절대 그걸 꿈꾸지 않는다. "혼자 있는 것이 조용한 형식의 완성이 될 수 있다." 고 시인은 말한다. "더는 죽을 것도,.. 더보기
강희안 - 탈중심주의(脫中心注意) 脫中心注意 - 강희안 캠릿브지 대학의 연결구과에 따르면, 한 단어 안에서 글자가 어떤 순서로 배되열어 있는가 하것는은 중하요지 않고, 첫째번와 마지막 글자가 올바른 위치에 있것는이 중하요다고 한다. 나머지 글들자은 완전히 엉진창망의 순서로 되어 있지을라도 당신은 아무 문없제이 이것을 읽을 수 있다. 왜하냐면 인간의 두뇌는 모든 글자를 하나하나 읽것는이 아니라 단어 하나를 전체로 인하식기 때이문다. 너는 전후에 존재한다. 고로 나는 가운데토막이다. 출처 : 강희안, 『나탈리 망세의 첼로』, 천년의시작 * 언젠가 TV의 과학상식 프로그램에서 우리의 감각능력이 얼마나 쉽게 혼돈당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실험을 본 적이 있다. 그중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실험은 피실험자에게 입만 벙긋벙긋하여 소리내지 않으면서 '아'.. 더보기
박경리 - 옛날의 그 집 옛날의 그 집 - 박경리 비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휑뎅그렁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국새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이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살았다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의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 더보기
허수경 - 혼자 가는 먼 집 혼자 가는 먼 집 - 허수경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 킥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 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망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으로 돌아감 당신……, 킥킥거리며 당신이라고……,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병자처럼, 그러나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킥킥 당신 이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 아니라서 끝내버릴 수 없는, 무를 수도 없는 참혹…… 그러나 킥킥 당신 허수경, 혼자 가는 먼 집, 문학과지성사,.. 더보기
이원규 - 겁나게와 잉 사이 겁나게와 잉 사이 - 이원규 전라도 구례 땅에는 비나 눈이 와도 꼭 겁나게와 잉 사이로 온다 가령 섬진강변의 마고실이나 용두리의 뒷집 할머니는 날씨가 조금만 추워도, 겁나게 추와불고마잉! 어쩌다 리어카를 살짝만 밀어줘도, 겁나게 욕봤소잉! 강아지가 짖어도, 고놈의 새끼 겁나게 싸납소잉! 조깐 씨알이 백힐 이야글 허씨요 지난 봄 잠시 다툰 일을 얘기하면서도 성님, 그라고봉께 겁나게 세월이 흘렀구마잉! 궂은 일 좋은 일도 겁나게와 잉 사이 여름 모기 잡는 잠자리 떼가 낮게 날아도 겁나게와 잉 사이로 날고 텔레비전 인간극장을 보다가도 금세 새끼들이 짜아내서 우짜까이잉! 눈물 훔치는 너무나 인간적인 과장의 어법 내 인생의 마지막 문장 허공에라도 비문을 쓴다면 꼭 이렇게 쓰고 싶다 그라제, 겁나게 좋았지라잉! 출.. 더보기
김해자 - 길을 잃다 길을 잃다 - 김해자 전태일기념사업회 가는 길 때로 길을 잃는다 헷갈린 듯 짐짓 길도 시간도 잊어버린 양 창신동 언덕배기 곱창 같은 미로를 헤매다 보면 나도 몰래 미싱소리 앞에 서 있다 마찌꼬바 봉제공장 중늙은이 다 된 전태일들이 키낮은 다락방에서 재단을 하고 운동 부족인 내 또래 아줌마들이 죽어라 발판 밟아대는데 내가 그 속에서 미싱을 탄다 신나게 신나게 말을 탄다 문득 정신 들고나면 그 속에 내가 없다 현실이 없다 봉인된 흑백의 시간은 가고 기념비 우뚝한 세상 거리와 사업에 골몰한 우리 속에 전태일이 없다 우리가 없다 회의도 다 끝난 한밤중 미싱은 아직도 돌고 도는데 김해자, 『황해문화』, 2005년 겨울호(통권49호) * 내가 아직 ‘바람구두’라 불리기 전에 나는 떠돌이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 더보기
허연 -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 - 허연 세월이 흐르는 걸 잊을 때가 있다. 사는 게 별반 값어치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파편 같은 삶의 유리 조각들이 너무나 처연하게 늘 한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무섭게 반짝이며 나도 믿기지 않지만 한두 편의 시를 적으며 배고픔을 잊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랬다. 나보다 계급이 높은 여자를 훔치듯 시는 부서져 반짝였고, 무슨 넥타이 부대나 도둑들보다는 처지가 낫다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외로웠다. 푸른색.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더럽게 나를 치장하던 색. 소년이게 했고 시인이게 했고, 뒷골목을 헤매게 했던 그 색은 이젠 내게 없다. 섭섭하게도 나는 나를 만들었다. 나를 만드는 건 사과를 베어 무는 것보다 쉬웠다. 그러나 나는 푸른색의 기억으로 살 것이다. 늙어서도 젊을 수 있는.. 더보기
최영미 - 서투른 배우 서투른 배우 - 최영미 술 마시고 내게 등을 보인 남자. 취기를 토해내는 연민에서 끝내야 했는데, 봄날이 길어지며 희망이 피어오르고 연인이었던 우리는 궤도를 이탈한 떠돌이별. 엉키고 풀어졌다, 예고된 폭풍이 지나가고 전화기를 내려놓으며 너와 나를 잇는 줄이 끊겼다 얼어붙은 원룸에서 햄버거와 입 맞추며 나는 무너졌다 아스라이 멀어지며 나는 너의 별자리에서 사라졌지 우리 영혼의 지도 위에 그려진 슬픈 궤적. 무모한 비행으로 스스로를 탕진하고 해발 2만 미터의 상공에서 눈을 가린 채 나는 폭발했다 흔들리는 가면 뒤에서만 우는 삐에로. 추억의 줄기에서 잘려나간 가지들이 부활해 야구경기를 보며, 글자판을 두드린다. 너는 이미 나의 별자리에서 사라졌지만 지금 너의 밤은 다른 별이 밝히겠지만… 최영미, 『문학사상』,.. 더보기
김형영 - 별 하나 별 하나 - 김형영 별 하나 아름다움은 별 둘의 아름다움, 별 둘 아름다움은 별 셋의 아름다움, 별 셋 아름다움은 별 여럿의 아름다움, 별 여럿 아름다움은 별 하나의 아름다움, 별 하나 별 둘 어우러지고 별 둘 별 셋 어우러지고 별 셋 별 여럿 어우러지고 별 여럿 별 하나 어우러지고 아름다운 하늘의 별 어느 별 하나 혼자서 아름다운 별 없구나. 혼자서 아름다우려 하는 별 없구나. 출처 : 김형영, 다른 하늘이 열릴 때, 문학과지성사, 1987 * 세시(歲時)에 받은 일지(日誌) 중 세모(歲暮)가 되어 들춰보면 아무런 메모나 기록 한 줄 없이 말끔한 날들이 있다. 중도에 찢겨나간 일지도 있고, 낙서로 가득한, 지금은 누구에게 무슨 일로 받았는지 기억나지 않는 전화번호가 적힌 일지도 있다. 살다보면 의미로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