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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이영광 - 숲 숲 - 이영광 나무들은 굳세게 껴안았는데도 사이가 떴다 뿌리가 바위를 움켜 조이듯 가지들이 허공을 잡고 불꽃을 튕기기 때문이다 허공이 가지들의 氣合보다 더 단단하기 때문이다 껴안는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무른 것으로 강한 것을 전심전력 파고든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다면 나무들의 손아귀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졌을 리가 없다 껴안는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가여운 것이 크고 쓸쓸한 어둠을 정신없이 어루만져 다 잊어버린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이글거리는 포옹 사이로 한 부르튼 사나이를 有心히 지나가게 한다는 뜻이다 필경은 나무와 허공과 한 사나이를, 딱따구리와 저녁 바람과 솔방울들을 온통 지나가게 한다는 뜻이다 구멍 숭숭 난 숲은 숲子로 섰다 숲의 단단한 골다공증을 보라 껴안는다는 것은 이렇게 전부를 다 통과시켜주고.. 더보기
유하 - 뒤늦은 편지 뒤늦은 편지 - 유하 늘상 길 위에서 흠뻑 비를 맞습니다 떠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떠났더라면, 매양 한 발씩 마음이 늦는 게 탈입니다 사랑하는 데 지치지 말라는 당신의 음성도 내가 마음을 일으켰을 땐 이미 그곳에 없었습니다 벚꽃으로 만개한 봄날의 생도 도착했을 땐 어느덧 잔설로 진 후였지요 쉼 없이 날개짓을 하는 벌새만이 꿀을 음미할 수 있는 靜止의 시간을 갖습니다 지금 후회처럼 소낙비를 맞습니다 내겐 아무것도 예비된 게 없어요 사랑도 감동도, 예비된 자에게만 찾아오는 것이겠지요 아무도 없는 들판에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게으른 몽상만이 내겐, 비를 그을 수 없는 우산이었어요 푸르른 날이 언제 내 방을 다녀갔는지 나는 모릅니다 그리고 어둑한 귀가 길, 다 늦은 마음으로 비를 맞습니다 * "떠나야 .. 더보기
김선우 - 사골국 끓이는 저녁 사골국 끓이는 저녁 - 김선우 너를 보고 있는데 너는 나를 향해 눈을 끔뻑이고 그러나 나를 보고 있지는 않다 나를 보고 있는 중에도 나만 보지 않고 내 옆과 뒤를 통째로 보면서(오, 질긴 냄새의 눈동자) 아무것도 안 보는 척 멀뚱한 소 눈 찬바람 일어 사골국 소뼈를 고다가 자기의 뼈로 달인 은하물에서 소가 처음으로 정면의 나를 보았다 한 그릇…… 한 그릇 사골국 은하에 밥 말아 네 눈동자 후루룩 삼키고 내 몸속에 들앉아 속속들이 나를 바라볼 너에게 기꺼이 나를 들키겠다 내가 사랑하는 너의, 몸속의 소 , 2007년 봄호 * 최승자, 허수경, 김선우. 최승자, 허수경, 김선우는 내 연애의 대상이었다. 막노동판을 떠돌 때, 나는 최승자의 목을 비틀어 꺾으면 그 목에서는 이차돈의 흰 젖 같은 피 대신 시가 나.. 더보기
장영수 - 自己 自身에 쓰는 詩 自己 自身에 쓰는 詩 - 장영수 참회는 젊은이의 것이 아닌 것. 죽음은 젊은이의 것이 아닌 것. 젊은 시절엔 살아가고 있는 것이 이미, 있는 세상에 대해 죄악인 여러 날들이 지나가고. 그것은 대개 이 세상 손 안의 하룻 밤의 꿈. 하루 낮의 춤. 그러나 살게 하라. 살아가게 하라. 고 말하는 세상에 대해 조금씩 깨어나며 살아가게 하라. * 시인은 참회는, 죽음은 젊은이의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얼마 전 한 젊은이의 죽음을 보았다. 나와 동갑내기 청년이었다. 나는 내가 늙었다고 생각해왔는데, 그의 죽음을 보고 치밀어오르는 분노 혹은 슬픔의 켜켜이 쌓인 두께를 가늠하면서 아직 내가 젊다는 사실을 알았다. 살아가고 있는 것이 이미 죄악인 세상이다. 그렇게 치욕적인 여러 날들이 흘러간다. 가늠할 .. 더보기
김형영 - 갈매기 갈매기 - 김형영(金炯榮) 새빨간 하늘 아래 이른 봄 아침 바다에 목을 감고 죽은 갈매기 * 지역이 지역인만큼 가끔 아파트 옆 더러운 개천가 담벼락 위에 앉아 있는 갈매기들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냥 이 시를 읽고 나도 모르게 약간 서글퍼지면서 그렇게 비오는 날 더러운 김이 무럭무럭 오르는 개천가에 앉아 있는 갈매기가 떠 올랐다. 갈매기 깃털은 왜 더러워지지도 않고, 그런 순백으로 빛나는 건지 말이다. 그래서 시인의 갈매기는 "바다에 목을 감고" 죽나보다. 순백으로 빛나기 위해서.... 더보기
문충성 - 무의촌의 노래 無醫村의 노래 - 문충성(文忠誠) 바다가 휘몰아오는 어둠이 바람 속에 바람이 어둠 속을 걸어 오는 아이가 빛을 찾아 미닫이 새로 얼굴 내밀고 호롱불 곁으로 비집어드는 마을, 불치의 병든 아이들이 모여 산다, 東西南北 아이야 어디를 가나 끝이 없는 시작은 장만이 되는 것, 맨발에 빠져든다, 겨울의 깊이 그 차가운 깊이 속 아이들은 한 줌의 무게를 찾아 빈 손을 들고 바다로 떠나간다 그렇다, 가만히 귀 기울이면 삼백 예순 날 아이들의 발걸음은 바다 끝에서 칭얼칭얼 열려 죽음을 살려내는 자맥질 속 숨 가빠라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숨 가빠라 누더기를 벗지 못한 채 누더기 속에 바람을 키우며 떠났지만 떠난 자리로 자꾸만 떠나가고 있다, 깨어진 사발에 구겨진 꿈을 담고 꿈속에 일렁이는 바닷길을 절뚝절뚝 달려가.. 더보기
정양 - 토막말 토막말 - 정양 가을 바닷가에 누가 써놓고 간 말 썰물진 모래밭에 한줄로 쓴 말 글자가 모두 대문짝만해서 하늘에서 읽기가 더 수월할 것 같다 정순아보고자퍼서죽껏다씨펄. 씨펄 근처에 도장 찍힌 발자국이 어지럽다 하늘더러 읽어달라고 이렇게 크게 썼는가 무슨 막말이 이렇게 대책도 없이 아름다운가 손등에 얼음 조각을 녹이면 견디던 시리디시린 통증이 문득 몸에 감긴다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는 가을 바다 저만치서 무식한 밀물이 번득이며 온다 바다는 춥고 토막말이 몸에 저리다 얼음 조각처럼 사라질 토막말을 저녁놀이 진저리치며 새겨 읽는다 * 문학을 아름다운 우리말의 보고(寶庫)이자 보루(堡壘)라고들 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자어를 쓰고 있구나). 때때로 나는 문학, 특히 시(詩)를 빙산에 비유하곤 하는데, 그것은.. 더보기
마종기 - 성년(成年)의 비밀 성년(成年)의 비밀 - 마종기 최후라고 속삭여다오 벌판에 버려진 부정한 나목은 알고 있어, 알고 있어, 초저녁부터 서로 붙잡고 부딪치며 다치며 우는 소리를. 목숨을 걸면 무엇이고 무섭고 아름답겠지. 나도 목숨 건 사랑의 연한 피부를 쓰다듬고 싶다. 날아도날아도 끝없는 성년의 날개를 접고 창을 닫는다. 빛의 모든 슬픔을 닫는다. 출처 :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문학과지성사> * 이 시 은 에 실린 시이다. 성년, 어른이 된다는 것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 걸까. 오늘날 우리가 '번지 점프'라고 일종의 레저 스포츠 삼아 하는 놀이의 유래가 남태평양 펜타코스트 섬의 원주민들의 성인식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성인의 대우를 받기 위해서는 그만한 체력과 담력을 부족민들에게 보증하기 위해 3.. 더보기
김지하 - 새벽 두시 새벽 두시 - 김지하 새벽 두시는 어중간한 시간 잠들 수도 얼굴에 찬 물질을 할 수도 책을 읽을 수도 없다 공상을 하기는 너무 지치고 일어나 서성거리기엔 너무 겸연쩍다 무엇을 먹기엔 이웃이 미안하고 무엇을 중얼거리기엔 내 스스로에게 너무 부끄럽다. 가만 있을 수도 없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새벽 두시다 어중간한 시간 이 시대다 * 나에게는 한 권의 오래된 시집이 있다. 조태일의 국토라는 시집이다. 1975년 5월 20일 인쇄, 1975년 5월 25일 발행이라는 판권에 적힌 세월만큼 낡고 시들해진 시집이다. 책값은 600원. 거기에 적힌 창작과 비평사의 전화번호는 국번이 두 자리다. 장난삼아 조태일이라는 시인의 고명한 이름을 "좆털"이라 불렀던...아, 이젠 고인이 된 시인의 시를 보면서...그의 시 후기.. 더보기
나희덕 - 길 위에서 길 위에서 - 나희덕 길을 잃고 나서야 나는 누군가의 길을 잃게 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어떤 개미를 기억해내었다 눅눅한 벽지 위 개미의 길을 무심코 손가락으로 문질러버린 일이 있다. 돌아오던 개미는 지워진 길 앞에서 두리번거리다가 전혀 엉뚱한 길로 접어들었다 제 길 위에 놓아주려 했지만 그럴수록 개미는 발버둥치며 달아나버렸다. 길을 잃고 나서야 생각한다. 사람들에게도 누군가 지나간 자리에 남는 냄새 같은 게 있다는 것을, 얼마나 많은 인연들의 길과 냄새를 흐려놓았던지, 나의 발길은 아직도 길 위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 때로 어떤 시인들의 깨달음은 흔하다. 시적인 성취나 문학적 성취에 앞서 소중한 깨달음이 있는 반면에 어떤 깨달음은 흔하디 흔하여 구태여 시인이 저런 깨달음에도 일일이 말 걸고, 정 주어..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