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선물 ㅣ 네버랜드 Picture Books 세계의 걸작 그림책 74
존 버닝햄 글, 그림 | 이주령 옮김 / 시공주니어 / 1997년 1월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이다. 예전에 들었던 이야기 중에 마치 할아버지의 기다란 수염에 대한 천진난만한 손주의 질문, "할아버지는 잘 때 수염을 어떻게 해요? 이불 속에 넣고 자나요? 이불 밖으로 빼놓고 자나요?" 처럼 별로 고민할 일이 아님에도 의미를 찾기 시작하면 의미란 것이 별 것도 아니면서 사람의 심리를 집요하게 잡아끄는 힘이 있다. 어떤 인간도 자신의 인생을 매순간 의미로 가득채우고 싶어 안달이란 점에서 인생에 무의미한 일이란 없는 법이다.


그런 점에서 존 버닝햄의 "크리스마스 선물"은 한 편의 시이자, 아름다운 의미론이기도 하다. 산타클로스는 자본주의적으로 보자면 비효율의 상징이다. 1년 12두달 내내 놀다가 12월 24일 하루만 일하는 노동자란 점만 놓고 보아도 그렇다. 그러나 1년 12달 내내 밤마다 돌아다니는 산타클로스를 상상할 수는 없다. 기다림이 없는 산타클로스에게 어떤 매력을 찾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산타클로스가 1년에 단 하루 노동한다고 해서 나머지 시간 동안 놀고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나머지 시간 동안 산타클로스는 우리가 즐겨 부르던 크리스마스 캐롤처럼 "누가 착한 앤지, 나쁜 앤지"를 살피고, 그에 합당한 선물을 준비하는 존재다. 산타클로스에 의한 크리스마스 선물은 선행에 대한 당장의 보상이 아니라는 점에서 산타클로스는 아이들의 퇴행(다시 어려지고자)하고자 하는 집요한 욕구를 성장시키는 존재다.


이 책의 원제는 "하비 슬럼펜버거의 크리스마스 선물(Harvey Slumfenbuger`s Christmas Present)"인데, 제목만 보더라도 작가 존 버닝햄이 얼마나 짖궂을 정도로 위트가 넘쳐나는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아이의 성(性)을 보자 "슬럼(Slum)"펜버거다. 우리는 이 이름만 보더라도 크리스마스 선물을 빠짐없이 전달했다고 생각한 산타클로스가 어째서 순록이 너무 지쳐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서, 비행기 사고를 겪고, 자동차 사고를 겪고, 오토바이 사고를 겪고, 스키 사고를 겪고, 자일을 타고 등산을 하면서까지 반드시 크리스마스 선물을 전달하려 하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존 버닝햄의 그 천재성에 고개가 절로 떨구어진다. 이 짧은 동화에서 그는 어쩌면 이토록 많은 의미들을 담아낼 수 있을까.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의미를 이토록 빠짐없이 담아낼 수 있을까. 거기에 재미까지 선사할 수 있을까.


크리스마스를 앞둔 밤. 산타클로스는 온세상의 모든 아이들에게 골고루 선물을 나눠주었다. 순록은 밤새 온 세상을 돌아다니며 선물을 전하느라 지쳤고, 이제 산타클로스도 잠옷으로 갈아 입고 하룻동안의 피곤을 씻기 위해 잠자리에 들 찰나 한 명의 어린이에게 선물을 전달하지 못한 사실을 깨닫는다. 크리스마스에 선물을 못 받는 아이가 있다니... 산타클로스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다시 특유의 빨간 산타 복장을 갖춰 입고 길을 나선다. 한 명의 어린이를 위해 온 세상이 움직인다. 비행기를 갖고 있는 조종사는 비행기를, 자동차를 가지고 있는 이는 자동차를, 오토바이를 가지고 있는 오토바이를, 스키를 가지고 있는 이는 스키를, 등산용 자일을 가지고 있는 등산가는 등산용 자일을 아낌없이 선사하여 산타클로스의 사명을 다하도록 돕는다. 천신만고 끝에 산타클로스는 하비 슬럼펜버거의 굴뚝으로 들어가 잠들어 있는 하비의 머리맡에 놓인 양말에 준비해간 선물을 넣어준다. 그러나 존 버닝햄은 끝끝내 선물의 내용이 무엇일지 독자들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짖궂지 않은가? 그러나  버닝햄은 결코 짖궂은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하비 슬럼펜버거에게 주어진 선물의 내용이 무엇일지 알고 있다. 친절한 버닝햄 씨는 이미 너무나 많은 이야기들로 우리들에게 그 선물의 내용을 알려주었다.


예수는 "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고 말한다. 이 말의 의미는 이런 것이 아닐까? "한가지 비유를 가지고 설명하자.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아픈 손가락이 없다는 말이 있다. 중요한 장기가 병들었든, 손끝에 가시가 하나 박히든 그 중요성에 있어서는 마찬가지다. 인간의 육체는 심장이 손가락을 소외시키는 일이 없다. 육체라는 것은 상당히 이상적으로 우정과 사랑, 나와 너가 하나인 대단한 사랑의 조직체이다. 그러나 어떤 국가·사회·제국도 그렇게 순수한 육체의 조화로운 통일과 같은 유기성은 없다는 데 문명의 모순이 있다. 가령 어떤 사회에도 ‘천국이 따로 없다’고 생활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기본적인 물질적·정신적 보장조차 못받는 사람들이 공존한다.

물론 한쪽이 억압받는다고 해서 전체로서의 사회나 국가가 어떤 일다운 일을 못하거나 생산력을 발휘할 수 없느냐 하면 그것은 아니다. 한쪽은 병들어 있으면서도 몸 전체는 위대한 행동을 할 수도 있고 부인할 수 없는 유산도 남길 수도 있다. 어쨌든 그 사회에서 혜택을 받는 사람들은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문제는 나머지 부분인데 그 부분을 어떻게, 어느 정도 아파하느냐 하는 것이 인류역사 발전의 척도라고 할 수 있다."는 작가 최인훈의 말을 떠올려 보자. 만약 "인간의 육체"가 "심장이 손가락을 소외"시킨다면 그 손가락은 당장 오늘부터라도 썩어가기 시작할 것이다.

2004년 8월 현재 대한민국 전체 임금노동자의 60%가 비정규직 노동자이다. 이 통계 수치는 선진국의 2배에 이르는 수치이며 비정규직 임금노동자의 소득은 정규직의 50%미만이며 이들에 대한 우리 사회의 안전망은 매우 취약한 상황이어서 사회보험가입율이 정규직은 82%인데 비해서 비정규직 노동자는 30%를 간신히 넘어서고 있다. 이외에도 퇴직금, 상여금, 시간외수당, 유급휴가 등 노동조건의 적용 수준도 정규직의 82%에 비해 14%에 불과하다. 사회의 한쪽에선 한해 평균 1만여 명의 사람이 해외로 원정진료를 떠나 1조원 이상을 소비하고, 다른 한쪽에선 건강보험 지역가입 체납가구수가 약 170만 세대에 이른다. 한 세대 당 3-4인이라고 했을 때, 무려 700만에 이르는 사람(2005. 8.11. 연합뉴스 - 우리나라 빈곤층 716만명, 전체인구의 15%)들이 기초 사회복지라 할 수 있는 건강보험 혜택으로부터 소외되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손가락 하나가 썩는 정도가 아니라 몸통이 썩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정부와 이 땅의 지배계급은 아니 당신과 나는, 복지는, 분배는 시장을 먼저 살려놓고 나서 그 때 돌아봐도 괜찮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의 이웃과 친밀한 적대 관계다.


버닝햄은 가난하고 소외된 한 명의 어린이에게 사랑과 희망을 선사하기 위해 온세상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자본의 효율성이란 인간의 논리가 아니란 사실을 새삼 깨울칠 수 있다. 마더 테레사의 이야기, "난 결코 대중을 구원하려고 하지 않는다. 난 다만 한 개인을 바라볼 뿐이다. 난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다.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껴안을 수 있다." 그러나 "만일 내가 그 사람을 붙잡지 않았다면 난 4만 2천 명을 붙잡지 못했을 것이다."란 말을 단순히 한 명의 성자(聖子)만이 도달할 수 있는 경지로 생각할 때, 우리는 결국 손가락을 소외시킨다. 노조 대표가 다음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정규직 노동자의 이해관계만을 반영한 분배투쟁에 앞장설 때, 우리는 하나의 손가락을 소외시킨다. 교육 노동자가 자기 학교에 있는 비정규직 교사를 차별할 때 우리는 하나의 손가락을 소외시키고, 남성이 여성을, 한국인 노동자가 외국인 노동자를 차별할 때 우리는 또 하나의 손가락을 소외시킨다. 가장 급진적인 것은 어떤 경우에도 선언에 의한 것이 아니며, 가장 실천적인 것은 이론에 의한 것이 아니다. 누구도 자신의 주변에 눈물 흘리는 사람을 소외시키고는 급진적일 수도, 실천적일 수도 없다는 작고 소박함, 그 원칙에서 세상의 모든 급진은 꽃핀다. 꿈꾸고 사랑하라! 크리스마스가 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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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인 화성인 우주인 : 움베르토 에코가 들려주는 이야기 - 움베르토 에코 지음, 김운찬 옮김 / 웅진주니어(2005년)




불경하게도 움베르토 에코의 이 책을 피터 L. 버거의 "사회학으로의 초대"를 읽다가 머리를 잠시 식힌다는 의미에서 옆으로 젖혀두었다가 붙잡고 10여분만에 읽어 버렸다. "지구인 화성인 우주인"에는 모두 3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첫 번째 이야기는 원자폭탄을 사랑한 지구의 장군 이야기이고, 두 번째 이야기는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지구인 화성인 우주인 이야기이며, 세 번째 이야기는 우주 탐사를 나서 작은 난장이 외계인을 만난 지구 우주인의 이야기다.


당연한 말이지만, 에코라는 이름이 없었다면... 오히려 편안하게 읽었을지도 모르겠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 그렇다고 에코가 지은 유일한 어린이 책이라는데 실망스러울 것까지는 없다.


평범한 이의 걸작보다는 비범한 이의 졸작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훨씬 많다는 영화계 속설처럼 움베르토 에코라는 이름에 짓눌리지만 않는다면 나름대로 괜찮은 작품이다. 그런데 문제는 에코의 잘못인지, 역자의 잘못인지(분명 에코의 잘못이다) ... 문장이나 내용, 그림투도 그렇고 주요 대상층으로 어딜 겨냥하고 있는지 모호하다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문제다.


성인들을 위한 동화라고 하기엔 너무 단순한 이야기고,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동화라고 하기엔 기존의 동화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데다(이 부분이 에코라고 해서 큰 기대를 걸어선 안 된다는 것이고, 역시 제아무리 뛰어난 석학이라도 어린이 문학은 참 어려운 거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불친절하게 보이기까지 한다(에코라서 그런 선입견을 갖게 되는지도).

 

 

 




"에코"란 이름에선 에코 페미니즘을 비롯한 생태의 냄새가 자연스레 흘러나온다. 그런 탓일까? 이 책에서도 요사이 우리 사회에서 생태와 환경 문제, 그리고 배타성 문제에 대해 조금만 관심 있는 이라면 알 법한 내용과 주제가 담겨져 있음을 눈치챌 수 있다. 첫 번째 이야기는 반전반핵에 대한 이야기다. 원자를 의인화하여 그들이 원자폭탄이 되기 싫어 탈출을 감행하고, 장군은 창고에 하나 가득 쌓인 폭탄을 쓰지 못해 안달한 나머지 폭탄을 썼으나 원자들이 탈출하여 원자폭탄은 불발탄이 되고 "blahblahblahblah" 그런 얘기다.


그리고 두 번째 이야기는 화성에 간 미국인, 러시아인, 중국인들이 처음엔 서로 어색해하다가 팔이 여섯개 달리고 코끼리 코를 한 화성인을 만나자 금새 지구인이란 이유로 단합하는 모습을 보이는 광경에서 타자화의 문제를 이야기한다. "우리와 다르니 넌 적이다"란 세 우주인의 생각은 화성인도 역시 새를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금새 풀린다. 차이를 인정하니 다를 것이 없는 생명체더란 이야기다.


세 번째 이야기는 지구의 지리상 대발견을 종료하신 황제 폐하께서 지구의 문명을 드디어 우주로 전파하기 위해 파견한 우주탐험가가 발견한 외계 행성인들과 나눈 대화라 할 수 있다. 에코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지 초반부터 쉽게 이해되는 내용이다. 서구인들이 신대륙을 발견(?)하고, 원주민들을 문명화한다면서 그네들의 생명과 재산을 노략질하고 약탈한 뒤에 이룩한 문명이 과연 무엇을 주었는가? 하는 생각을 해보면 말이다.


앞서도 누차 이야기하고 있지만 에코의 이름에 걸맞는 무언가를 기대했다면 실망할 수도 있고, 그런 기대없이 편하게 대한다면 나름대로 좋은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어린이 책이 넘쳐나는 세상에 너무 쉽게(이 말은 어린이들이 읽기 쉽다는 뜻이 아니라, 작가가) 쓰인 건 아닌가 하는 ... 그런 선입견을 완전히 거둬들이기엔 미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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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
로버트 브라우닝 (지은이) | 케이트 그린어웨이(그림) | 정영목 (옮긴이) | 비룡소 | 2006





"나는
피리부는 사나이 근심하나없는 떠돌이 멋진 피리 하나 들고서 언제나 웃고 다니지 쿵작작 쿵작~~"


내가
기억하는 한 내 인생의 첫 노래는 송창식의 "피리부는 사나이"였다. 하멜른의 유명한 전설을 책으로 옮긴 것이 있다는 걸 알기도 전에 내게 있어 피리부는 사나이는 "근심하나없는 떠돌이", "멋진 피리 하나"만 있다면 언제나 홀로인 것을 감내한 채 웃고 다닐 수 있는 그런 사내였다. 노래가 날 선택한 것이었을까? 내가 노래를 선택한 것이었을까?


비록
어렸을 무렵이라지만 그 때 노래란 것이 저것 하나만 있었을리 없건만, 유독 기억에 남고, 어린 시절에도 즐겨 따라 부르던 노래가 "나는 피리부는 사나이~ 근심 하나 없는 떠돌이"하는 노래였다는 건 필경 내 안에 유랑하는 피가 있어서 그렇다고 내 마음대로 생각해버렸다. 내가 가장 되고 싶어하는 존재는 에뜨랑제, 보헤미안, 뭐 요새 유행하는 노마드니 그런 말로 표현되기 보다는 그저 떠돌이, 장돌뱅이 같은 존재였다. 부초처럼 어디든 얽매임 없이 마음대로 떠돌 수 있다면 그렇게 살 수만 있다면 하는 소원을 품었던 것이 내 나이 일곱 살 때의 일이라면 너무 이른 소원이었을까.


그런
소원 뒤에 나는 두 번째 "피리부는 사나이"를 만났다.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였다. 송창식의 영향 탓이었을까? 이 동화 혹은 민담, 전설은 나에게 깊은 인상으로 남았고, 어찌보면 잔인한 교훈을 담고 있으며, 어찌보면 괴기스러운 이 이야기는 내 인상에 여러 차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각인되었다. 어렸을 적부터 내가 로버트 브라우닝과 케이트 그린어웨이 판의 "피리부는 사나이"를 읽었던 건 아니다. 이런 류의 이야기엔 명확하게 누가 저자라고 말할 수 없다. 그림 형제가 이 이야기를 채록했다고 해서 이것이 그림 형제의 작품이라 할 수 없는 것처럼, 이 이야기는 그저 하멜른 지방을 떠돌던 전설에 불과하다. 그것을 그림 형제가 채록하고, 다시 로버트 브라우닝이 글로 정리하고, 거기에 케이트 그린어웨이가 삽화를 그려넣어 지금의 이 책을 만든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수많은 판본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이 책을 정본이라 생각한다. 워낙 로버트 브라우닝과 케이트 그린어웨이 솜씨가 결정판에 가깝기 때문이다. 어렸을 적 내가 읽었던 "피리 부는 사나이"에선 그저 하멜른에 출몰한 쥐떼를 묘하게 생긴 고깔 모자를 쓴 피리 부는 사내가 피리를 불어 몯 퇴치해주었는데, 하멜른 사람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 피리 부는 사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사라졌다는 이야기였다. 나도 그저 그런 줄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1987년을 경험한 뒤 다시 읽은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에서 내 눈길을 잡아 끈 것은...

좀더 정확하게 말해서 로버트 브라우닝의 이 이야기 가운데 내 눈시울을 젖게 만든 대목은, 작가가 직접 윌리에게 말해주는 부분이었다.


"아, 아이들이 언덕 기슭에 다다랐을 때에, 갑자기 굴이 뚫리는 것처럼 언덕이 활짝 열리는 게 아닙니까! 피리 부는 사람이 그리로 들어가자 아이들도 따라 들어갔습니다. 맨 뒤에 선 아이까지 모두 다 들어가자 갈라진 언덕은 재빨리 닫혔습니다.

다 들어갔을까요? 아닙니다! 한 아이는 절름발이여서 춤을 추며 따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 해가 지나도록 절름발이 아이가 슬퍼하는 것을 보고 나무라는 사람이 있다면, 절름발이 아이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소꿉 친구들이 떠나고 나서 우리 마을은 아무 재미도 없어졌어요! 이젠 사라져 버렸지만 난 잊을 수가 없어요. 피리 부는 아저씨가 우리에게 보여 주겠다던 그 즐거운 곳을.
피리 부는 아저씨가 우리 마을 이웃에 있는 즐거운 나라로, 맑은 물 흐르고 과일 나무 자라는 곳으로, 우리를 데려가겠다고 했거든요. 거기서는 모든 것이 신기하고 새롭지요. 꽃도 더 고운 색으로 피어나고, 참새도 우리 마을 공작보다 화려하고, 사슴도 우리 마을 사슴보다 빠르고, 꿀벌은 독침이 없고, 말은 독수리 날개를 달고 태어난답니다. 나는 언덕 밖으로 밀려나 있었고, 엉겁결에 나만 혼자 마을에 남아서 전처럼 절뚝거리며 다녔지요. 그후로 다시는 그 나라 이야기를 듣지 못했어요.”
그러니 윌리야.
너와 나는 사람들의 상처를 다독거려 주는 사람이 되자.
그들이 우리에게 피리를 불어 쥐를 쫓아주겠다고 하든 안하든 우리가 약속한 것이 있다면, 그 약속을 꼭 지키자."


내가
어머니 뱃속에서 10개월을 자라는 동안 나의 부모는 과연 내가 어떤 아이로 자라날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문득 되돌아보면 내 인생에 터닝 포인트라 할 만한 어떤 순간들이 있었다. 그 순간 내 앞에서, 하멜른 소년, 소녀를 뒤쫓던 윌리 앞에서 그러했듯 동굴 문이 사라져 버린 듯한 느낌을 받은 순간도 있었다. ‘삶이란 얼마간의 굴욕을 지불’해야 거쳐갈 수 있다. 어느 한 시기를 살아낸 뒤, 어느날 갑자기 기성 세대가 되어 있는 날 발견한다. 내가 너무나 옳다고 믿었던, 그래서 거창하게 목숨을 걸기도 했던 그 무엇이 어느날 갑자기 썰물처럼 빠져나가 버렸다. 마치 전광판의 화면 바뀌듯 연대의 해방 공간은 순식간에 단절이란 고립 공간으로 변해버렸다. 내가 변하고 네가 변하여서 세상을 바꾸자던 공공연한 약속들이 깃발이 되고 구호가 되었던 시대에서 이제 어떤 친구들은 내게 그래도 당신은 다행이지 않은가, 여기 비명 한 번 못 질러보고 시드는 청춘도 허다하다고 볼멘 소리를 한다. 


마치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를 따라 나섰다가 다리를 절룩거렸던 탓에 유일하게 그 문 앞에 홀로 서게 된 윌리처럼 ... 어느 순간 나는 그런 절망감에 사로잡혔었다.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에서 나는 김수영의 싯귀가 떠올랐다.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왔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 피의 냄새가 섞여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 혁명은 /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홀로
남았다는... 고독.... 하멜른의 피리부는 사나이에서 내가 자기동일시를 이루었던 대상은 송창식의 피리부는 사나이가 아니라 홀로 남은 절름발이 윌리였음을 깨닫고 나는 많이 울었다... 피리 부는 아저씨가 보여주겠다고 약속했던 유토피아의 이상이 사라진 탓이 아니었다. 그저 홀로 남았다는 것, 전장에서 혼자 생환한 듯한 절망감이 나로 하여금 한동안 가슴 먹먹하게 만들었다. "도옹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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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 침대(The Magic Bed) - 존 버닝햄 지음 | 이상희 옮김 | 시공주니어(2003)



개인적으로 존 버닝햄(John Burningham)의 작품 가운데에는 교육에 대한 신랄한 풍자가 녹아있는 "지각대장 존"을 가장 좋아한다. 탈민족주의를 외치는 시대 조류에 부응하지는 못할 망정 헛소리로 비칠 수도 있는 이야기 한 마디해보자. 민족을 '상상의 공동체'라고까지 하지만 같은 지역, 같은 환경, 같은 습속, 같은 문화(이때 같다는 건 절대적인 동일함을의미하진 않는다)를 공유한 이들끼리 비슷한 기질을 보이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나는 개인적으로 영국식의 신랄한 풍자를 상당히 좋아하는 편이다. 예를 들어 조나단 스위프트 식의 그런 풍자 말이다.


존 버닝햄의
"지각대장 존" 역시 나는 그런 영국식 유머로 받아들였는데, 그가 이런 그림책을 써낸 배경에는 그 자신이 영국의 대안학교인 서머힐스쿨 출신이란 점도 적지 않게 작용한 듯 싶다. 우리 화가인 이중섭의 경우에도 그에게 평생을 두고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 그가 오산학교 출신이란 교육 체험이 컸다고들 하는데, 버닝햄이 비록 "지각대장 존"에서 교육에 대해 신랄한 풍자를 가하긴 했으나 자기 자신은 서머힐의 교육 방식에서 비롯된 혜택을 본 수혜자이기도 하다. 인간이 만들어낸 교육이 인간에게 이토록 깊은 영향을 미치는데, 하물며 매일 들이쉬고, 내쉬며 살아온 대기와 흙, 물과 햇빛은 인간에게 얼마나 깊은 영향을 줄까.


본래 영국엔 수많은 요정들이 살고 있었다. 영국의 기후와 풍토가 수많은 요정들과 함께 살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대륙과 바다로 단절된 섬이고, 사방에 많은 숲과 습지, 깊은 안개와 잦은 비가 영국에 많은 요정들이 살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래서 영국의 여러 지방엔 그들 나름의 많은 요정 이야기가 산재해 있다. 그런 영국에서 요정이 사라지게 된 것은 대중교육이 일반화되면서부터였다. 즉, 아이들이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티 타임 시간에 마을 인근의 숲이나 습지에 살고 있는 재미난 요정 이야기를 듣는 대신, 선생님이 엄격하게 훈육하는 초등학교로 보내진 뒤부터 영국의 요정들은 점점 일반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싶을 수 있겠다. 한 마디로 축약해보면 산업 문명과 요정들은 함께 동거할 수 없다는 말이다. 아이들이 크리스마스의 산타클로스를 몇 살 때까지 믿을까? 매년 성탄 시즌이면 TV에서 방영해주는 성탄절 특집 할리우드 영화들이 도리어 아이들의 머리속에서 산타클로스를 몰아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문명화 과정을 거치며 우리의 산야에서도 우리와 함께 머물던 수많은 귀신
(왜 귀신이라고 말하면 어쩐지 싫고, 요정이라고 말하면 괜찮은가?)들도 함께 사라져버렸다.


"이디오진크라지(idyosynkraise)"
란 말이 있다. 고도로 문명화된 현대인에게도 유일하게 남아있는 원시적이고 동물적인 반응 형식을 일컫는 말인데, 예를 들어 말미잘의 촉수 같은 무조건 반응을 말한다. 이디오진크라지는 인간을 순식간에 생물학적인 원초 상태로 만든다. 예를 들어 어떤 광경이나 상태에 처했을 때 자신도 모르게 머리카락이 곤두서거나 심장이 급하게 뛰고, 사지가 경직되는 것과 같이 일순간 신체 부분들이 주변 세계에 동화되는 현상이다.


아도르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근대의 계몽을 통해 새로운 방식의 사회적 삶이 새로운 종교나 사고 방식에 공간을 내어줄 때, 보통 옛 신들도 함께 내던져진다고 말한다. 예전에 사랑받던 습관이나 신성한 행동이나 경배 대상들은 가증스러운 비행이나 공포스러운 유령으로 변질된다. 이는 인류의 폭력적 진보가 만들어낸 상흔들이다. 다신교는 일신교로, 옛 신화는 계몽된 신화로, 위대한 대지모신은 여호와(분명히 남성적인)로, 토템에 대한 경배는 그리스도에 대한 경배로 변화된다. 모든 신화를 해체되고, 예전의 터부들은 미신이 된다. 교육은 아이들의 계몽과정, 문명화 과정이다.


존 버닝햄의
"마법 침대(The Magic Bed)"의 첫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조지는 자신의 작은 침대 - 아이들이 잠결에 떨어지지 않도록 사방에 난간을 댄 - 를 잡고 일어나 있다. 테디 베어 인형이 이불에 반쯤 묻혀있고, 침대 밑엔 아이용으로 만들어진 작은 변기가 놓여 있다. 할머니와 어머니가 어린 조지에게 말한다.


"조지야, 이 침대는 이제 너한테 작아. 아빠랑 쇼핑센터에 가서 새 침대 좀 사오라니까?"


머리가 훤하게 벗겨진 아버지는 안경을 쓰고, 방금 화장실이라도 다녀왔는지 신문을 반으로 접어 들고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조지 사이의 대화를 방관자처럼 듣는 포즈다.






이제 조지는 더이상 어린 아기가 아니라 한 명의 어린이가 되어가는 중이다. 그렇기에 조지에겐 새 침대가 필요했다. 조지와 아버지는 쇼핑센터 가는 길에 중고가구점을 발견하고, 가게 주인이 말한 마법침대를 구입하게 된다. 농경민족의 마법 도구는 산신령이나 도깨비가 흘린 물건을 우연히 줍거나 연못에 빠뜨린 도끼를 줍는 것처럼 신령에게 우연히 받는 것고, 아랍 유목 민족의 마법 도구는 알라딘처럼 바자(시장)에서 우연히 구매하는 것이다. 산업화되고 도시화된 영국에서 마법 도구는 이처럼 쇼핑센터 가는 길에 우연히 들른 중고가구점에서 구매하게 된다는 차이가 있다. 이처럼 우리 주변에서 마법을 일으킬 도구들은 산재해 있다. 당신이 믿어주기만 한다면 말이다.


조지와 아빠는 침대를 가져와 깨끗하게 닦아내다가 마법의 주문을 발견한다.
"엄"으로 시작하는 다섯 글자를 읽으면 되는데, 뒤에 있는 글자들은 지워졌는지 보이지 않는다. 비록, 마법이라도 본인의 정성이 깃들지 않는다면 효험을 잃는다는 건, 신화와 전설의 서사구조에 흔히 있는 난관이다. 조지는 설레는 마음으로 어서 밤이 오길 기다린다. 첫날 밤 조지는 "엄"으로 시작하는 마법 주문을 발견해내기 위해 노력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조지는 그냥 잠들었다. 하지만 조지는 그냥 포기하지 않았다. 이 말은 조지가 마법을 믿었다는 거다. 믿지 않는 자에겐 어떤 마법도 효험이 없는 법이다.


드디어 조지는 마법의 주문을 찾아냈고, 그 덕분에 도시 위를 날고, 들판에서 난쟁이들과 요정들을 만날 수 있었다. 조지는 밀림에도 가고, 그곳에서 아기 호랑이를 만나 부모를 찾아주고, 동굴 속에서 보물이 가득찬 상자를 발견하기도 한다. 조지는 돌고래를 만나기도 하고
(버닝햄은 위트있게 돌고래를 만났기 때문에 조지의 침대에 젖어있다고 말해준다), 빗자루를 탄 마녀들과 빨리 날아가기 시합도 벌인다. 조지와 가족이 휴가를 떠난 사이 할머니는 조지의 마법 침대를 버리고, 새침대를 들여놓았다. 조지는 잽싸게 쓰레기통에 실려있는 마법 침대를 따라 달려가 마법의 주문을 외워 마법 침대를 구출해내고, 마법 침대에 올라타고 하늘로 올라간다. 버닝햄은 마지막에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도 지금 침대에 누워, 그 침대의 주문을 알아 내 보세요. 조지처럼 멀리멀리 여행을 떠날 수 있을 거예요."


어떤 이는 버닝햄의 이런 마무리 보다는 조지가 침대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는 결말을 내려주었으면 좋았을 뻔 했다고 이야기한다. 아마, 부모의 마음으로는 그것이 좀더 교훈적이고, 해피엔딩에 가까우리라 생각을 했을 법하다. 독실한 크리스찬으로 조지가 마녀들과 시합을 벌인 것이 이단적이란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 근대의 계몽
- 산업화, 근대화, 도시화, 과학화로 일컬어지는 -  근대화는 우리에게 많은 물질적 혜택을 주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째서 무언가를 잃은 듯한 상실감에 젖게 되는 걸까? 어째서 무언가 순수한 세계를 잃어버린 기분이 드는 걸까? 그건 아마도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는 순진무구한 영혼, 자연에 깃들어 있을지도 모르는 또 하나의 신성(神性)을 우리들 자신이 살해해버린 탓은 아닐까?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것만 존재하며,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만 실재한다고 믿는 동안 어쩌면 우리는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더 많은 세계의 무언가를 잊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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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터의 서커스(Wasteground Circus, 1975) - 찰스 키핑 지음 | 서애경 옮김 | 사계절출판사(2005)




아내가 주문한 책이 내게로 왔다. 첫 장을 넘겨본다. 칙칙한 그림이다. 그런데 참 낯이 익다. "찰스 키핑"이란 이름은 처음 들었는데, 그림을 보니 낯이 익다. 예전에 이 사람의 그림책을 본 적이 있는 것이다. "찰스 키핑""빈터의 서커스"를 보면서 어째서 이런 쓸데없는 생각들이 들었을까. 그건 아마도 내 기억 속 어딘가 버려져있을 빈터의 기억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봄바람이 황사를 몰고 왔을 때 바라본 거리 풍경이다. 시내 한 복판에 들어차 있던 낡은 주택이며 창고들이 헐리고 생겨난 빈터에서 두 아이, 스콧과 웨인은 공을 차고 놀았다. 첫 장의 그림은 저 멀리 공장과 새로 짓는 건물들 그리고 빈터와 그곳에서 공놀이를 하고 있는 두 아이가 그려져 있다. 두 아이가 차 올린 공이 마치 황사와 스모그에 가린 태양처럼 보인다. 만약 이곳이 런던이라면 이스트엔드의 어디쯤일 것이다. "스콧과 웨인", 이 두 아이는 아마도 런던이나 글래스고의 어디쯤 변두리에 사는 노동자의 자식일 게다. 우리식으로 치자면 서울 강남이 아닌 강북 어딘가. 이제 막 뉴타운 건설이 초읽기에 들어간 구파발이나 삼송리 어디쯤이 아닐까.


내 어릴 적 기억 속에도 동춘 서커스단이 있다. 어느날 갑자기 뚝딱 지어올려진 거대한 장막과 풍악소리, 얼굴에 붉은 연지 곤지로 매무새를 다듬은 피에로, 그리고 끽끽 소리를 지르며 공중제비를 돌던 원숭이. 바나나 한 송이가 몹시 비싸던 시절의 이야기다.
"장 그르니에(Jean Grenier)""空의 매혹"이란 글에서 " 누구나 살아가노라면, 무엇보다도 그 삶의 첫 시기에 삶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 순간을 맞는다. 그 순간을 다시 맞게 되기란 쉽지 않다. 그 순간은 수많은 시간들의 퇴적 아래 깊이 묻혀 있다. 다른 시간들이 그 위로 헤아릴 수 없이 스쳐 지나갔지만, 티끌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져 갔다는 것은 정말 섬?하다. 그렇다고 그 순간이 언제나 한줄기 빛과 같은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유년기와 청년기에 걸쳐 내내 지속되면서 겉으로 보기에는 그지없이 평범할 뿐인 세월들을 오묘한 무지개빛으로 물들이기도 한다."고 말했는데, 찰스 키핑의 이 그림책은 마치 장 그르니에의 글 "空의 매혹"을 그림책으로 옮겨 놓은 듯 하다.





서커스단이 온 것을 안 웨인과 스콧은 당장 집으로 달려가서 돈을 얻어가지고 빈터로 돌아왔다. 두 아이는 서커스단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닌다. 서커스 단원들, 돈점박이 말, 사자, 영리하게 생긴 코끼리, 두 아이는 관람차를 타고, 회전 목마도 타고, 작은 기차도 타고, 미끄럼틀도 탔다. 그리고 드 높은 음악 소리에 이끌려 곡예가 펼쳐질 천막 속으로 들어갔다. 브라스 밴드 근처에 앉아 공연을 관람한다. 어릿광대들, 우아한 돈점박이 말들의 곡예, 외줄타기, 공중 그네, 불길을 뚫고 빠져나오는 사자, 코끼리 묘기까지 웨인과 스콧의 머리속을 온통 무지개빛으로 물들인 서커스가 한 바탕 지나갔다. 천막이 걷히고 짐차들도 사라졌다. 빈터는 다시 텅비었다. 두 아이는 고개를 숙인 채 집으로 돌아간다. 세상은 다시 잿빛으로 변해버렸다. 하지만 그건 웨인에게만 맞는 말이었다. 스콧에게 이 빈터는 더이상 옛날의 빈터가 아니었다. 스콧은 서커스가 마을에 들어왔던 이 날을 오래도록 기억할 테니까. 스콧의 마음 속에서 그 빈터는 언제나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곳이 되었으니까 말이다.


어린이들은 누굴까? 그들은 어른의 축소판, 미래의 어른, 전혀 다른 세계에서 온 이들일까? 글쎄, 어떤 한 존재가 자신의 모습(본성)을 드러내는 일에 대해 우리 옛 선인들은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한다지만, 그건 잘 되었을 경우에 한정하는 게 좋겠다. 역사적 위인들을 살펴보면 꼭 들어맞는 말은 아니었으니까. 다시 장 그르니에로 돌아와서
"어떤 아이들은 지나치게 자기 자신의 세계 속에 깊이 파묻혀 있어서 새벽빛이 결코 그들에게서는 떠오를 것 같지 않게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그 어린아이들이 문득 수의(壽衣)를 떨쳐 버리면서 나자레처럼 몸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깜짝 놀라기도 한다. 그런데 그 수의란 다만 어린아이의 배내옷이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나에게 일어난 일이다. 나의 최초의 기억은 여러 해에 걸쳐 세월 위에 펼쳐진 이 아련한 꿈과 같은 기억이다. 누군가 나에게 세상의 덧없음을 굳이 말해 줄 필요는 없었다. 나는 이미 그보다 더한 것을, 세상이 비어있음을 경험했던 것이다. "이라고 말한다.




세상의 모든 어린이들이 어른이 되기 전 세상 깊숙이 숨겨진 비밀스러운 삶의 의미를 깨우치는 건 아닐 게다. 그때 내 나이 몇이었던가?


내 어린 날의 기억 속에서 나는 결코
"행복한 왕자"가 아니었다. 운동장이 터질 듯 들어차도 내게는 텅 비게만 느껴지던 국민학교 운동회에서 모두가 달리기하러 나가도, 나는 혼자 꼬래비로 서서 하늘을 보았다. 음악 소리가 낡은 스피커로 쩌렁쩌렁 울려도 내 귀에 들려오는 소리는 때늦은 매미소리 뿐이었다. 솜사탕 과자, 고무 풍선, 만국기. 모두가 떠나버린 국민학교 운동장 한쪽 귀퉁이 쓸쓸히 가을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을 나는 차마 짓밟을 수 없었다. 모두가 돌아간 운동장에 쓰러져 있는 것은 모두가 버려진 존재들이었다. 가족이 아무도 오지 않은 운동회 날, 버려진 신문, 터져버린 고무 풍선, 철봉대 그늘에 웅크리고 앉은 채 아무도 오가지 않는 교문을 응시하고 있는 동안 아마도 해는 저물고, 국민학교 유리창은 그렇게 황금빛으로 빛났다. 그 순간 어째서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가 떠올랐었는지.... 그건 지금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달리다 넘어져 생긴 상처가 따끔거렸지만 그 따위는 기억의 아픔보다는 차라리 사치스러운 통증이었다. 그로부터 나는 아마도 다른 목적이 있을 리 없는 그런 여행을 떠나온 것 같다. 상처없는 인생이 어디있으랴? 그러므로 그때가 어느 때인가를 기억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닐 것이다. 나는 세상에 대해 왜라는 질문을 던지기에 앞서 늘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란 질문을 먼저 해야 했다. 아마도 키핑의 동화책 속 인물, 웨인과 스콧 두 어린이 가운데 어느 하나가 나라면 스콧보다는 웨인에 가까웠을 게다. 어쨌든 나는 그 빈터 주변에서 살아가야 했으니까. 나이를 먹고 어느날 그 운동장으로 되돌아갈 일이 있었다. 어린 시절 아무도 없었던 운동장은 어린 아이에게 그 얼마나 광막한 공간이었을까. 방향을 알려 줄 이정표 하나 없는 사막처럼 느껴졌던 운동장이 한 눈에 보이던 순간... 나는 쓸쓸하게 돌아서야 했다. 


삶의 어딘가에는 빈터가 있다. 그 빈터에 무엇을 채울 것인가? 비록 어린 시절엔 통증이었으나 비어있음의 매혹이 나를 어딘가로 이끌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빈터. 그곳엔 두려움과 매혹이 공존한다. 누구도 제 자리에 갇힌 채 살아갈 수는 없기에 우리는 또 어딘가를 향한다. 마음 속의 빈터가 메워질지 아니면 성장과 함께 더욱 큰 공허로 함께 성장해 갈지는 알 수 없다. 찰스 키핑은 두 아이 중 어느 아이가 좀더 행복했을지 미리 색채를 이용해 보여주지만.... 인생의 갈림길에서 그 미래를 점쳐보는 것은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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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 번 산 고양이(100万回生きたねこ) - 사노 요코 | 김난주 옮김 | 비룡소(2002)

시인 윤동주는 "슬픈 인연"이란 시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단, 단 한번의 눈마주침으로/ 서로를 그리워하고/ 서로를 사랑하게 되었으니/ 슬픔은 시작되었습니다/ 서로를 그리워하면서도 못본체 했고,/ 사랑하면서도 지나쳤으니/ 서로의 가슴의 넓은 호수는/ 더욱 공허합니다// 자신의 초라함을 알면서도/ 사랑은 멈출 줄을 몰랐고,/ 서로가 곁에 없음을 알면서도/ 눈물은 그칠줄을 몰랐습니다/ 이제, 서로가 한 발씩 물러나/ 눈물을 흘릴 줄 압니다/ 이들을 우린/ 슬픈 인연이라 합니다" <전문>


 

그의 인연은 슬프고, 미묘하며 또한 신비롭다. 그것은 "단, 단 한 번의 눈 마주침"으로 서로의 가슴에 "넓은 호수"를 만들고, 눈물을 그칠 줄 모르게 만든다. 그럼에도 결국 서로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서로가 한 발씩 물러나 눈물을 흘리게 만든다. 이 때의 인연이란 사랑이란 인과율에 얽매였으나 서로의 사랑이 맺어지지 못함을 알게 되고, 결국 한 발씩 물러나는 것을 말한다. 인연이란 운명이기도 하다. 

 

인연(因緣)...
불교에서는 일체(一切) 중생(衆生)은 인(因)과 연(緣)에 의하여 생멸(生滅)한다고 보았는데, 인이란 결과에 대한 직접 원인을 말하고, 연이란 그로 인해 얻게 되는 간접적인 힘(결과)이다. 인이 전생의 업에 의해 이승에서 연결된 하나의 고리라면, 연은 전생의 연결고리에 현재의 나란 존재가 만들어내는(기독교식으로 말하자면 자유 의지가 관여할 수 있는) 현생의 업(결과)에 해당한다. 불교에서는 인연이 발생하는 것을 "연기(緣起)"라 하는데, 인과 연은 상호작용하는 것이므로 서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세상 만물은 인연으로 얽매여 있으므로 나와 너는 남이 아닌, 둘이 아닌 하나란 사상으로 이어진다. 너와 나는 남이 아니므로 너를 구원하는 것은 곧 나를 구원하는 것이 되고, 내가 남을 돕는 사랑(혹은 구원)을 일컬어 불교에서는 자비(慈悲)라 부른다.

 

사랑 '자', 슬플 '비', 물론 저 '자'를 그저 사랑이라고 옮길 수도, '비'자가 그저 슬프다는 뜻만 가진 것은 아니다. 사실 자비의 속뜻은 세상 사람들의 고통스러움을 함께 탄식하며 슬퍼한다는 뜻이다. 그러고보니 윤동주의 시와도 일맥상통하지 않는가. 인간의 삶이 고통스러운 것은 인연의 씨줄날줄이 빚어내는 번뇌로부터 비롯된다. 석가의 사랑인 자비는 일체중생의 괴로움을 자신의 것으로 하기에 괴로운 것이고, 우리 같은 무지랭이 중생은 인연으로 비롯된 사랑때문에 그 사랑의 괴로움을 내 것으로 하기에 괴롭다.

 

여기 백만 번이나 죽고, 백만 번이 살았던 한 마리 얼룩 고양이가 있다. 자크 르 고프의 "연옥의 탄생"을 읽노라면 기독교 문명권을 제외한 다른 문명권에서 상상했던 저승의 지리학이 비교적 상세하게 소개되고 있는데, 대개의 저승의 지리학엔 소위 "중간계"가 존재한다. 지옥에 보내자니 아직 이승과의 인연 혹은 해탈할 기회가 남아있는 영혼, 천국(극락)에 보내기엔 아직 이승의 업이 쌓인 존재들은 이승에서의 업을 다 씻어내기 위해 혹은 전생의 업보에 대한 벌을 받기 위해 다시 이승으로 보내진다. 얼룩 고양이 한 마리가 백 만 번이나 죽고 다시 살았다는 이야기는 굳이 불교적 윤회전생을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신화적 이야기이다.

 

"사노 요코"의 이야기는 소설의 문체에 비견할 수 있는 그림책의 그림체와 캐릭터에도 등장하지만 드러내놓고 교훈적이지 않다. 백만 번을 죽고 살아난 고양이라면 의당 그럴 것이라고 어른들이 상상할 수 있는 때묻고, 거만한 표정의 얼룩 고양이. 얼룩 고양이가 백 만 번 죽고, 다시 태어나는 동안 고양이는 결코 행복하지 않았으리란 건 이미 그림만으로도 충분히 전달된다. 이 심드렁한 표정의 고양이는 늘 "난 백만 번이나 죽어 봤다고. 새삼스럽게 이런 게 다 뭐야!" 라고 냉소적으로 말한다. 얼룩 고양이의 냉소는 백만 번이나 반복된다. 중요한 건 백만 번이란 횟수가 아니다. 우리는 잠시 잠깐 출근길 만원 지하철 안, 인파로 북새통을 이룬 미술전시장에서 한 꺼번에 수 만 번의 미움을 같은 시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인연들에게 쏟아내지 않는가. 가령, 이렇게 "이 사람들이 말이야. 집구석에나 처박혀들 있을 것이지. 뭐 처먹을 거 있다고 돌아다니냐."  한 마디 뱉어낼 때 어쩌면 우리의 인연은 그렇게 상처받을 지도 모른다.


 


 

사노 요코는 반복한다.

"한때 고양이는 임금님의 고양이였습니다. / 한때 고양이는 뱃사공의 고양이였습니다. / 한때 고양이는 서커스단 마술사의 고양이였습니다. / 한때 고양이는 도둑의 고양이였습니다. / 한때 고양이는 홀로 사는 할머니의 고양이였습니다. / 한때 고양이는 어린 여자 아이의 고양이였습니다."

 

"싫어 했습니다. 싫어 했습니다. 싫어 했습니다. 싫어 했습니다. 싫어 했습니다." 이 장면들을 보노라면 얼룩 고양이의 잘난 척하는 얼굴이 떠오르면서 얼핏 얼룩 고양이의 본성이 원래부터 그런 것이어서 그런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임금, 뱃사공, 서커스단, 도둑, 홀로 사는 할머니, 어린 여자 아이와 고양이의 관계를 살펴보면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고양이가 이전의 누군가와 관계맺고 있던 형식은 주인과 그 애완동물, 소유와 종속의 관계였을 뿐 진정한 관계라 부를 수 없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고양이는 누군가의 소유물이었던 그 횟수만큼 관계맺은 상대를 싫어했다. 이런 관계의 의미는 크게 두 가지로 분화될 수 있다. 진정한 관계맺기의 형식은 소유나 종속이 아니란 사실과 누군가와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선 우선 그 관계가 대등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친구란 누군가의 꿈에 상대방이 종속되거나 소유되거나 이용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도 자신만의 세계와 꿈을 가지고 있을 때 비로소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제 아무리 멋진 경험, 꿈이라 할지라도 다른 존재를 억압하는 형태로 출현할 때, 그것은 종종 폭력의 형태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이런 폭력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순간들은 가부장적 가족 관계이다.

 

마지막으로 환생했을 때, 고양이는 누구의 고양이도 아니었다. 고양이는 도둑의 고양이가 아니라 그 자신이 도둑고양이였고, 누구의 고양이도 아니었다. 그는 온전히 자기 자신만의 고양이였고, 이전의 상처들이 있으므로 누군가의 소유나 종속된 고양이가 되길 원치 않았다. 그런 얼룩 고양이는 모든 암고양이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먹이로, 아양으로 유혹하는 고양이들에게 얼룩 고양이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자신의 거만함이, 혹은 상처가 이들과 관계 맺는 것을 거부하게 만들었을지도, 인연의 새로운 싹이 자라나지 않는한 백만 번 죽어도 아플 일은 없을 것이었다. 얼룩 고양이가 상처받는 것, 상처 주는 것이 두려워서 다른 존재들과 관계, 인연을 맺지 않았다고 해서 이 얼룩 고양이가 이기적이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마치 네버랜드에서 영원히 어른으로 성장하지 않는 피터팬터럼 비록 영원히 어린이로 머물 수는 있겠지만, 그곳엔 고통도 슬픔도 없는 대신 성장도, 발전도 기대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얼룩 고양이는 성장하지 않았고, 성장을 거부한다는 것은 타인의 도움도 기대치 않고, 타인에게 도움을 주기도 싫다는 점에서 이기적이다.

 

하얀 암고양이가 얼룩 고양이에게 관심을 주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얼룩 고양이를 성적인 미숙함, 어른이 되지 못한 미성숙한 고양이라고 한다면, 성숙한 암고양이로서야 이 고양이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얼룩 고양이는 아직 어린 아이처럼 하얀 고양이 앞에서 자기 자랑만 늘어놓는다. 

 

"난 백만 번이나 죽어 봤다고!"

 

그러자 하얀 고양이는 "그러니." 라고만 대꾸할 뿐이었다. 자신을 몰라주는 하얀 고양이의 행동에 화를 내는 얼룩 고양이의 모습은 더욱 미성숙해 보인다. 다음날에도 얼룩 고양이는 자기 자랑만 늘어놓는다.

"너 아직 한 번도 죽어 보지 못했지?"

 

하얀 고양이는 단지 "그래." 라고만 대꾸할 뿐이었다. 얼룩 고양이는 하얀 고양이 앞에서 공중 돌기를 세 번이나 해보이면서 "나 서커스단에 있었던 적도 있다고." 하지만, 하얀 고양이는 "그래." 라고만 대꾸할 뿐이다. 얼룩 고양이는 자신을 앞세우는 미숙함 탓에 관계 맺는데 실패한다. 이번에도 "난 백만 번이나...." 라는 말을 꺼내려다 얼룩 고양이는 "네 곁에 있어도 괜찮겠니?" 라고 하얀 고양이에게 묻게 되었다. 이제 이 둘 사이의 관계에 질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그 변화는 일방적인 통보나, 자기 자랑이 아닌 대화로 시작된다. 그제서야 하얀 고양이는 "으응."이라고 대답하고, 얼룩 고양이는 하얀 고양이와 새로운 관계를 맺어나갈 수 있게 된다. 자신들의 분신인 새끼 고양이들을 많이많이 낳아가면서 말이다. 이후부터 얼룩 고양이는 "난, 백만 번이나....." 란 말을 하지 않게 된다.


 


 

고양이는 나 자신보다 하얀 고양이와 아기고양이들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 불교에서 말하는 자타불이인 셈이다. 그리고 아기 고양이들도 자라 뿔뿔이 흩어지고, 하얀 고양이는 조금씩 할머니가 되었다. 그리고 어느날 하얀 고양이는 세상을 떠난다. 얼룩 고양이는 밤이 되고 아침이 되고, 또 밤이 되고 아침이 되도록 백 만 번이아 울었다. 그리고 어느 날 그도 하얀 고양이 곁에서 숨졌다. 사노 요코가 백 만번이란 횟수만큼은 아니더라도 같은 이야기를 리드미컬하게 반복함으로써(국내 번역에 비해 일어 원문을 살펴보면 더욱 잘 알 수 있는데) 반복의 의미를 더욱 잘 살려내고 있다. 비록 백 만 번을 환생했으나 그 백 만 번의 삶과 단 한 번의 삶 가운데 얼룩 고양이는 어떤 삶을 살고 싶었을까? 어떤 삶을 기억하고 싶었을까? 

 

얼룩 고양이가 두 번 다시 환생하지 않았다는 것을 불교적으로야 해탈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지만, 사노 요코의 이 이야기를 반드시 불교적인 우화로만 해석할 필요는 없다. 앞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백 만 번 인연 맺기를 이야기했던 것처럼 우리도 이미 백 만 번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네 삶을 다람쥐 쳇 바퀴 돌 듯이라고 말한다.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매일 한 번 잠들 때마다 한 번씩 죽는다. 1년에 365번 죽었다 깨어나기를 반복하는 동안, 우리는 과연 얼마나 훌륭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가?

 

못본 체 지나치고, 더이상 그리워할 것도 없이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또 그리워하는 만큼 스스로를 성숙시키기 위해 노력하는가? 스스로 대등해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 "100만 번 산 고양이"는 우리에게 인연의 고리에서 피어난 관계맺기란 어떠해야 하는가를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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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의 두꺼비(A Toad for Tuesday) - 러셀 에릭슨 | 김종도(그림) | 사계절출판사 (1997)


 

러셀 에릭슨의 "화요일의 두꺼비"는 아내와 함께 출타 길에 지하철 안에서 다 읽은 책이다. 덕분에 내리는 역을 깜박해서 집사람에게 질질 끌려 내렸다. 러셀 에릭슨은 미국 코네티컷 주 출신으로 한국과 일본에서 군 생활을 했었다고 한다. 아마도 주한 미군으로 근무했던 모양인데, 30대를 넘긴 뒤부터 비로소 동화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하는데, 국내에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역시 "화요일의 두꺼비"이다. 이 책은 초등학교 저학년 생들이 읽기에 적당한 내용과 형식, 120쪽의 짤막하지도 길지도 않은 적당한 분량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뭐 꼭 그러란 법은 없다. 나 같은 사람이 읽어도 감동이 물결친다. 게다가 김종도의 삽화(일러스트)들은 다소 섬뜩할 수도 있는 이 이야기를 훨씬 읽기 편하고, 이해하기 쉽도록 순화시켜 주고 있다.

 

두꺼비 형제 모턴과 워턴은 추운 겨울날 땅 속 아늑한 보금자리에서 형 모턴이 만들어 준 딱정벌레 과자를 맛있게 먹고 있었다. 그러니까 동생 워턴이 이 맛난 과자를 툴리아 고모에게도 가져다 드리고 싶다는 얼토당토 않은 계획을 말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형 모턴은 워턴에게 두꺼비가 한겨울 지상의 숲으로 나가 배고픈 동물들의 습격을 피해 툴리아 고모에게 가는 위험에 대해 설명하지만 워턴은 온몸을 추위로부터 보호할 수 있도록 꽁꽁 여민 뒤, 지난 여름에 배운 스키를 타고 가면 될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두꺼비 워턴의 모험이 시작된다.

 

한겨울에 밖으로 나온 두꺼비가 겪는 우여곡절이 이 이야기의 핵심적인 축이란 점에서 이 책은 물론 모험담이다. 아이들은 아마도 두꺼비 워턴에게서 지난 겨울 자신의 경험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창 밖엔 눈이 내리고 나가서 뛰어놀고 싶은데, 부모는 온몸을 칭칭 감싸고도 안심 못하고, 따라 나서거나 못 나가게 하는 그런 경험 말이다. 워턴은 형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참나무로 만든 스키와 고슴도치의 털을 이용한 막대를 들고 툴리아 고모댁을 향해 머나먼 여정을 떠난다.

 

워턴은 우연히 거꾸로 처 박혀있는 사슴쥐를 구해주고 친구가 된다. 사슴쥐에게서 빨간 목도리를 얻은 워턴은 다시 스키를 타고 숲 속을 유유히 지나가고 있었다. 그때 하늘에서 소리없이 날갯짓을 하며 올빼미 한 마리가 날아와 워턴을 덥석 잡아간다. 올빼미는 워턴에게 달력을 보여주며 여섯 밤이 지난 다음주 화요일에 워턴을 잡아 먹을 거라고 알려준다. 그 날이 바로 자신의 생일이란 거다. 포식자 올빼미의 눈에 워턴은 그저 먹잇감에 불과했다. 이름을 묻는 워턴에게 올빼미는 자신에겐 이름 같은 것이 없다고 말한다.

 

기호에 불과한 이름에 우리가 연연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이름이 사물로부터 자신을 구분하는 첫번째 상징이기 때문이다. 이름을 부여받는다는 것은 김춘수의 시 "꽃"에서 드러나듯 존재를 형성하게 되는 시작에 해당한다. 워턴은 올빼미에게 "조지"라는 이름을 붙여 준다. 조지라는 이름을 얻은 올빼미는 이전까지는 그저 무수히 많은 올빼미에 불과했으나 이제 올빼미는 그냥 올빼미가 아니라 "조지"였다. 정체성이 생긴 것이다. 로빈슨 크루소우가 하인 프라이데이를 만나 가장 먼저 한 일이 이름을 붙였다는 것, 그것은 사물과 구분되는 의미를 부여했단 뜻이 된다.

 

서로의 이름을 알게 된 조지와 워턴은 밤새도록 서로의 이야기를 나눈다. 동화를 비롯한 모든 내러티브 구조를 가진 이야기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캐릭터이다. 만약 올빼미 조지가 스스로의 표현대로 자신의 삶을 영위해가는데 그 어떤 존재도 필요치 않는 존재라면 그것은 가히 절대적인 공포(존재)다. 하지만 조지는 친구를 필요로 하지만 친구의 존재를 스스로 깊이 느껴보지 못했을 뿐이다. 게다가 밤에만 사냥에 나서는 올빼미의 본성에서 어긋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상처를 지닌 자이기도 하다. 워턴은 올빼미의 집을 청소해주고, 뜨거운 차를 끓여주지만 조지가 워턴을 잡아먹기로 한 날짜는 하루하루 줄어든다. 조지는 달력에 X표시를 하며 하루하루를 가슴 졸이게 만든다. 워턴은 탈출하기 위해 비밀스럽게 준비를 하지만 올빼미 조지에게 들켜버려 사태는 더욱 악화되기까지 한다.

 

위기감은 점점 고조되고, 읽는 사람은 작가가 대관절 결말을 어찌낼 것인가? 함께 가슴 조리게 된다. 물론, 이야기 구조 자체는 뻔하다면 뻔하지만 워낙 이야기에 대한 몰입할 수 있는 장치들을 잘 꾸려 놓아서 그런 생각 같은 건 할 겨를이 없다. 드디어 조지의 생일날이 닥쳤다. 아침부터 조지는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고, 워턴은 최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때 뜻밖의 곳에서 구원의 손길이 닥친다. 사슴쥐가 둥지 안 구멍 사이로 고개를 내민 것이다. 사슴쥐 씨이에게 구원받은 워턴은 둥지 안에 흩어져있던 제 짐들을 꾸려 함께 탈출한다. 워턴은 사슴쥐 무리와 함께 스키를 타며 신나게 들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때 워턴의 눈에 한 마리 올빼미가 여우에게 공격당하는 모습이 보였다. 조지였다. 워턴은 사슴쥐가 말리는 것도 뿌리치고 조지를 구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어쩔 수 없이 사슴쥐 무리들도 함께 나서서 조지를 구출해주었다. 하마터면 여우에게 당할 뻔한 조지는 워턴에게 어딜 가는 중이냐고 도리어 묻는다. "어딜 가긴 탈출하는 중이지" 워턴의 대답을 들은 조지는 깜짝 놀라 자기가 남겨둔 쪽지를 보지 못했느냐고 묻는다. 그 쪽지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쪽지 내용을 알려주는 건 스포일러다)

 

이 책의 결론은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했던 말과도 일맥상통하고 있다. 그녀는 "더불어 사는 사람들을 세상과 자연, 우주에 대해 함께 기뻐할 가치가 있는 존재라고 여길 때 비로소 우리의 인간성이 유지될 수 있다. 현실정치는 우리가 무엇을 정치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가에 따라 달리 형성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우리의 이웃을 나와 똑같은 고통과 슬픔, 기쁨과 희망을 지닌 사람으로 받아들일 때, 그들이 나와 같이 세상과 자연, 그리고 우주에 대해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그런 가치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비로소 우리가 우리의 인간성이 유지될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타인에 대해 함께 이 세상과 자연, 우주에 대해, 봄을 맞이한 들판에 피어난 꽃과 새들의 지저귐에 대해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고 웃으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존재로서 상대방을 느끼고 존중할 때 비로소 우리들의 인간성도 유지될 수 있다는 뜻이다. 한 엘리베이터 안에 탑승하고 있으면서도 상대방을 인간이 아닌 하나의 사물처럼 느끼는 순간에, 연휴를 맞이해 오랜만에 찾은 야외에서 북적이는 인파를 만나 온통 짜증으로 점철되는 순간에, 어두컴컴한 골목에서 피부색이 다른 외국인 노동자와 마주쳐 지나가게 될 때 간혹 우리는 상대를 나와 같은 양심과 지각을 가진 인간으로 느끼고 생각하지 못할 때가 종종 있다. 좁은 공간에서 그저 부담스러운 존재로, 야외의 복잡함을 더하는 짜증스런 집단으로, 혹시나 나에게 위해를 가해오지나 않을까 하는 잠재적 공포로 상대를 대할 수도 있다.

 

한나 아렌트는 바로 그 순간에 파괴되는 것은 상대방의 인격만이 아니라 나의 인간성도 똑같이 공격받고, 피해입음을 이야기한다. "화요일의 두꺼비"는 우화 속에 등장하는 은혜 갚는 짐승 이야기라는 흔하디 흔한 여러 버전들 가운데 하나다. 흔하다는 건 그만큼 익숙한 이야기 구조이고, 그만큼 진부하여 재미없을 수도 있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화요일의 두꺼비"는 그 모든 내용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아니 거꾸로 결론부터 읽고 본다고 하더라도 똑같은 감동을 경험할 만큼 잘 짜여진 이야기다. 게다가 교훈 역시 결코 작지 않다. 어른이 읽어도 그렇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런 교훈을 가장 뼈저리게 느껴야 할 대상은 바로 이라크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들이나 군 위안부 문제를 이미 해결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일본의 극우파들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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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화 - 에드거 파린 돌레르 | 인그리 돌레르 | 최영미 옮김 | 시공주니어(1999)


집에 신화와 관련된 책자들은 나름대로 꽤 된다. 그 가운데 원작자는 같지만 번역자가 다른 그리스로마신화가 몇 종되고, 같은 원작자와 같은 번역자이지만 기획 의도에서 차이가 나거나, 출판사가 다른 경우도 꽤 있다.

 

예를 들면

토마스 벌핀치, 이윤기 옮김(1996), 『그리스와 로마신화』, 대원사.
토마스 불핀치, 최혁순 옮김(1995), 『그리스․로마신화』, 범우사.
이윤기 편역(2001), 『벌핀치의 그리스로마신화』, 창해.
오비디우스, 이윤기 옮김(1998), 『변신이야기1.2』, 민음사.
미하엘 쾰마이어, 유혜자 옮김(1999), 『신그리스 신화』, 현암사.
이경덕(2002), 『신화 읽어주는 남자』, 명진출판.

와 같은 책들이 그것이다(이외에도 더 있지만).

 

종종 그리스로마신화는 토마스 벌핀치의 작품으로 착각할 수도 있을 만큼, 그리스로마신화의 대명사로 벌핀치판 그리스로마신화의 영향력은 대단한다. 서양에서도 거의 정본으로 인정받는다 할 수 있지만, 실제로 벌핀치는 이윤기 편역과 마찬가지로 산재해있는 그리스로마신화를 그가 모아들이고, 그의 관점에서 저술했을 뿐이다. 즉, 한 가지 신화에 한 가지 의미와 판본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다른 판본들, 다른 이야기들이 또 있다는 것이다.

 



신화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뮈토스(mythos)' 는 사람이 하는 얘기를 의미하는 말이다. 뮈토스는 문명화된 종교의 '로고스(logos)' 와 대립한다. 즉, 인간과 신, 성과 속, 이승과 저승, 선과 악을 이원화하는 것과 대립한다는 것이다. 신화(무속을 포함해서)는 뮈토스는 자연과 신, 사회, 인간 등을 분화시키지 않고 단일체계로 이루어진 것으로 바라본다. 피에르 그리말은 “로고스와 뮈토스는 말의 양면이며, 양자 다같이 정신생활의 기본적 기능이다. 논증으로서의 로고스는 올바르고 논리에 닿을 경우는 진실이지만 뭔가 속임수가 있을 경우는 허위가 된다. 그러나 뮈토스는 오로지 뮈토스 외에 아무 목적도 없다.”고 말한다.

 

지금 우리 나라에서는 신화가 열풍이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말하는 사람들은 없지만, 신화의 시대가 도래한 것처럼 출판계에서도 신화 바람이 거세다. 그런데 왜 신화를 읽고, 신화를 이야기하는가에 대한 논의는 태부족인 상황이다. 우리는 어째서 신화, 신화의 세계에 흥미를 느끼는 것일까?

 

신앙의 시작은 자연을 섬기는 것에서부터 출발했다. 사람들이 섬김의 대상으로 삼았던 자연은 하늘과 땅, 해와 달, 별처럼 우주의 천체와 함께, 바람과 구름, 비 등 기상현상 및 산과 강, 바위, 나무 등 자연물들을 두루 포괄한다. 한정된 수명을 지닌 인간에 비해 자연현상은 끊임없이 순환하며, 사라지는가 하면 다시 나타나고 죽었는가 하면 되살아나는 힘을 지녔다. 해는 서쪽으로 지는가 하면 동쪽에서 다시 뜨고, 달은 그믐에 죽었는가 하면 초사흘에 초승달로 다시 살아나며, 너무들 또한 겨울이 닥쳐 잎을 떨어뜨리고 죽었는가 하면 봄을 맞아 싹을 틔우며 되살아나는 힘을 지녔다.

 




그것이 바로 자연의 생생력(生生力)이자 순환적 생명력이다. 일생의 삶을 단 한 차례만 누리는 사람들로서는 이러한 자연현상이 초월적 생명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 “사람이 세상을 처음 볼 때 자연만큼 자연스럽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들에게 자연은 커다란 경이이자 큰 공포였으며, 그것은 불가사의이자 영원한 신비였다.” 고대인들의 신화적 사고는 인지력이 결여된 미개 사고가 아니며, 신화적 사고는 근대의 과학적 사고 못지않게 지적이고 논리적이다.

원시인이나 고대인들의 자연에 관한 지식과 근대인의 과학적 지식에 차이가 있다면 전자는 후자처럼 자연을 대상화하고 객관화하는 지식이 아니라, 인간이 가야할 길을 알려주는 지혜이다. 인간은 자연과 대화를 나누고 자연의 질서와 오묘한 섭리에 귀 기울여 자연에 동화되어 살아야 함을 일깨워주는 지혜인 것이다. 이렇듯 신화적 사고로 바라본 자연은 인간이 마음껏 이용하기만 하면 되는 물질적 대상의 천연자원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은 서로의 삶에 영향을 주고받으며 교감하는 동일 유기체의 일부라는 사고에서 유래하기 때문이다. 신화적 사고는 또한 생태적 사고와도 연결 고리를 갖는다.

 

그 힘이 우리로 하여금 역사(계몽, 이성, 합리)의 시대가 저무는 현대가 신화에 열광하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막상 어린이들에게 신화에 대한 읽을 거리를 제공해주고 싶어도 마땅한 책을 찾기가 어렵다. 얼마전 대히트를 친 만화 그리스로마신화가 있긴 하지만, 어쩐지 선뜻 권하고 싶지 않은 찜찜함이 있다. 그런 이들에게 에드거 파린 돌레르, 인그리 돌레르의 글과 그림, 시인 최영미의 번역으로 이루어진 "그리스 신화"는 꽤 괜찮은 대안일 수 있다.

 

우선 이 책의 첫장을 넘기면 속표지가 시작되는 우측에 그리스 신들의 계보도가 살짝 드러나고 있다(물론 전원은 아니고, 주로 주신들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가이아로부터 크로노스, 제우스, 아폴론에 이르는 계보도가 보기 쉽게 설명되어 있다. 그리고 속표지를 넘기면 그리스 신화의 진정한 고향이라 할 그리스 반도와 지중해 연안의 지도가 함께 수록되어 있다. 물론 이들 모두는 새롭게 그려진 것들이라 유아들도 쉽게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돌레르 부부는 컬러와 흑백 그림을 풍부하게 사용하여 아이들도 쉽게 신화의 세계에 다가갈 수 있도록 한다. 아마 밤에 아이들을 앉혀놓고 하루에 한 장씩 이야기를 들려주다보면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더 빨리 그리스 신화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역사적 사고에 익숙한 어른들보다 아이들은 신화적 사고에 좀더 근접해 있는 존재들이니 말이다.

 

만약 아이들에게 신화의 세계, 신화적 사고(물론 서구 문화의 원형질을 익히는 기회도 되겠지만)를 손쉽게 익히게 해주고 싶다면 그 시작을 이 책으로 하는 것은 훌륭한 선택이 될 것이다. 수록된 삽화의 완성도, 판형과 지질, 인쇄 등을 고려할 때도 12,000원이란 가격은 그리 비싸 보이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 지적해두고 싶은 것은 그리스로마신화는 결국 서양의 신화이다. 물론, 신화의 세계에서 동서양으로 구분하는 것은 다소 우스운 일일지도 모르나 앞서도 말했다시피 현재의 그리스로마신화는 신화의 원형이 아니라 후세인들에 의해 그들의 입맛에 맡게 다소 각색되고 깍여나가며 정의되었다는 점에서 서구적이란 점을 먼저 기억해두자는 것이다. 서구에서 기독교에 의해 신화적 세계의 다원,다층성이 억압되었다면, 동양에서는 유교적 세계관에 의해 신화의 세계가 오랫동안 부정되어 왔다. 그런 까닭에 동양의 신화는 아직까지 그리스로마신화처럼 정제된 것을 얻기가 쉽지 않다. 그런 점은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아쉬움으로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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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 유령이 내게로 왔어 -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 | 김경연 옮김 | 풀빛(2005)


우리 집에 굴러다니는 책 중에 헌책방에서 구한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의 책 "그해 봄은 빨리 왔다"란 책이 있다. 원제는 "날아라 풍뎅이" 1988년에 출간된 동서문화사의 "에이스88" 아동문학전집 중 44번째 책이다. 그리고 엊그제 집에 굴러다니는 뇌스틀링거의 책 한 권을 새로 읽었다. "수호유령이 내게로 왔어"(원제는 "Rosa Riedl Schutzgespenst"로 "수호유령 로자 리들" 정도가 되겠다) 였다. "이거 무슨 책이야?" 하고 책을 집어드니 집사람이 "누가 좋아하는 누구 책이야"하며 놀린다. 흐흐... 웃어주고 낼름 책을 들고 나와 버렸다.

 

책을 읽는 동안 너댓 번 정도는 소리내서 웃고, 대여섯 번 정도는 미소 지었다. 나중에 아내의 설명으로 알게 된 사실이긴 하지만 뇌스틀링거는 굉장히 유명한, 거장 대접을 받는 동화 작가였다.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는 1936년 10월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서 출생했다. 1936년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우리 사회에 고스란히 대입시키기는 곤란하겠지만, 우리 식으로 바꿔보면 1945년 서울에서 태어난 세대의 경험과 흡사한 삶의 체험을 했다고 할 수 있겠다.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1945년 뇌스트링거의 나이는 대략 10세 가량이었을 것이다.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는 1970년부터 글을 쓰기 시작해서 200여 종의 책을 써냈고, 1984년엔 아동문학 분야의 노벨문학상이라 한다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상"을 수상하는 등 활발한 작품 활동과 명성을 쌓았다. 국내에도 20종 가량의 작품이 번역되어 있다고 하는데, 나는 그 중에 단지 두 권을 읽었을 뿐이다. 시계공 아버지와 빈의 변두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가 국내 모언론과 가진 인터뷰를 살펴보니 "어린 시절의 추억은 대부분 잘못된 것들이다. 나는 과거의 기억을 소재 삼아 글 쓰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유년기 영향이라면 나치와 2차 세계 대전을 겪었다는 사실뿐이고, 그것으로써 세상 보는 눈을 갖게 됐다."라고 말한다.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과 실제 체험을 결부시키려는 외부의 시선에 대해 저항하는 몸짓을 보이는 것이야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뇌스틀링거의 경우엔 나치와 제2차 세계대전이란 유년기의 역사적 체험이 작가의 시선을 규정하는 중요한 근거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전쟁을 경험한 모든 독일인들이 사회주의자가 되거나 좌파가 된 것이 아니듯 뇌스틀링거를 좌파적 이념을 지닌 작가로 몰고가려는 시도는 위험한 규정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뇌스틀링거는 "자유와 연대(혹은 평등)"라는 서로 상충될 수도 있는 두 가치 가운데 어느 하나도 포기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앞서의 인터뷰에서 젊은 부모들에 대한 조언을 부탁받고 그녀는 "나는 기본적으로 교육이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든 것에 반대한다. 어른들의 꾸중과 칭찬을 통해 아이들은 깨닫지 않는다. 경험과 고통을 통해 스스로 배우고 자란다."고 말한다.

 

"수호유령이 내게로 왔어"는 지난 1998년 출간되어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청소년문학상을 수상한, 뇌스틀링거의 최근작이다. 원제에서 알 수 있듯 이 작품의 주인공은 "로자 리들", 검은 머리에 흰 머리카락이 몇 개 섞여있고, 코에는 둥근 니켈 안경이 얹혀져 있고, 뺨이 늘어진, 이제는 날지도 못하는 뚱뚱보 아줌마 유령이다. 그녀가 유령이 된 것은 1938년 나치에 의해 부당한 처벌을 당하는 유대인을 도와주러 달려가다가 전차에 치인 사건 때문이다. 이 책의 독자층이 주로 초등 5-6학년생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었을 때, 1938년 무렵 나치가 지배하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약간의 보충 설명이 필요하다. 이 해에는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하고, 나치에 의한 유대인 대탄압, 이른바 "제국 수정의 밤(크리스탈 나흐트, 11. 9)" 사건이 벌어진 해이다. 이 이전에도 나치에 의한 유대인 탄압은 있어 왔지만, 본격적이고 대규모 탄압은 이 해를 기점으로 종전되던 1945년까지 계속되었다.

 

그것 한 가지만으로도 아줌마 유령 "로자 리들"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단정지어 버리는 건 이 작품의 재미를 반감하는 선입견이기도 하다. 작가도 그런 선입견을 염려한 탓인지 이야기를 시작하는 첫 머리에 '이 이야기를 1944년부터 시작하지 않는 편이 좋은 까닭' 이란 소제목의 글을 배치해두고 있다. 작가는 이야기를 가까운 과거인 1978년부터 시작한다. 1938년 전차에 치어 죽은 로자 리들은 1978년 열한살짜리 어린 소녀 나스티에게 나타나 말을 건다. 나스티는 공부는 잘하지만  겁도 많고, 외동 아이로 자라 소심한 데다가 아주 이기적이라고는 할 순 없지만 개인주의적이긴 한 소녀다. 한 마디로 말해 친구들보다 몇몇 과목에서 좀더 성적이 좋다뿐,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평범한 소녀란 말이다. 다만 한 가지 나스티가 티나에겐 있는데 자신에겐 없는 존재를 부러워한단 사실 한 가지만 빼놓고...

 

티나에겐 있지만 나스티에겐 없는 존재는 무엇일까? 그건 어느날 체육 시간 티나의 목에 걸려 있는 작은 펜던트였다. "작은 금빛 원판인데 한쪽 면은 에나멜"로 된 펜던트에는 볼이 포동포동하고, 날개가 달린 어린 아이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다. 티나는 자랑스럽게 자신의 "수호천사"라고 말한다. 나스티는 짐짓 관심없는 척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자신에게도 수호천사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품는다. 그런 나스티에게 어느날 갑자기 유령 로자 리들이 나타난다. 볼이 포동포동한 천사는 커녕 뺨이 축 늘어진 데다 날개도 없고, 게다가 날지도 못하는 유령의 출현은, 마치 나비를 꿈꾼 소녀에게 갑자기 나방이 날아든 격이었다. 하지만 로자 리들의 인간적인 매력은 나스티를 사로잡았다. 나스티에겐 수호유령이 생겼고, 로자 리들에겐 좋은 말벗이 생겼다. 두 사람, 아니 한 명의 유령과 한 명의 소녀는 서로에게 의지하며 과거와 현재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유령 친구가 생긴 나스티에게 많은 변화가 생긴다. 그 변화는 "다른 아이들과 잘 놀지도 않을 뿐더러 친했던 여자 친구와 사이가 나빠지고, 파티에 가지 않고, 대신 홀로 외로이 오후를 다락방에서 선인장과함께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이다. 물론 나스티가 혼자인 건 아니었다. 로자 리들과 함께 하지만 엄마 안네마리의 눈엔 유령이 보이지 않을 뿐이다. 엄마는 나스티를 다그치지만 나스티는 엄마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도 싫고, 엄마에게 진실을 말했을 때 생길 충격이 두려워 입을 다문다. 엄마는 우연히 나스티와 유령의 존재를 알게 된다. 이때부터 나스티와 로자의 관계에는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나스티의 엄마, 아빠를 포함한 나스티 가족과 로자, 그리고 관계가 점차점차 확대되어 가는 내용을 다룬다.

 

아빠인 좀머 씨가 유령 로자와 관계 맺는 과정을 살펴보자. 로자 리들의 존재를 알게 된 아빠는 깜짝놀라 말한다.

 

"다만, 제 세계관이 완전히 뒤집어졌다는 걸 아시는지!"
로자 리들이 외쳤다.
"난 누구의 세계관도 뒤집은 일은 없어! 그렇고 말고! 유령이 있는 걸 알아도 부자들은 여전히 부유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여전히 가난하지! 그래, 자네가 나를 알게 되었다고 해서 비열한 것, 선한 것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기라도 했나? 아니면 자네가 가능하다고 여기지 않았던 것이 가능해졌다고, 다음 번 선거 때 다른 정당을 뽑을 건가?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자네는 분명 올바른 선택을 할 걸세!"
<본문 145쪽>

 

다행히도 아빠 좀머 씨는 로자 리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엄마 안네마리 역시 나스티와 로자를 이해하며 한 가족으로 맞아들인다. 이렇듯 로자 리들은 처음엔 나스티만의 수호유령이었으나 점차 나스티 가족의 친구로 옮겨간다.

 

어느 날 학교에서 나스티는 영어 선생님이 예고도 없이 한 친구에게 시험을 치르도록 하는 것에 대해 항의하는 사건이 벌어진다(우리하고는 교육환경이 많이 다르기 때문에 이것이 얼마나 부당한 일인지 나로서는 잘 체감할 수 없지만). 나스티로서는 영어에 자신없어 하는 게롤트에게 미리 준비도 없이 시험을 치르도록 하는 일이 부당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영어 선생에게 항의하다 교실 밖으로 뛰쳐나온 나스티는 역사 선생을 만나 아이들이 동조해주지 않은 억울함을 호소한다.

 

"사람은 자기 권리를 위해 투쟁해야 해요!"
나스티가 훌쩍이며 말했다. 역사 선생이 말했다.
"얘야, 내가 보니 너는 투쟁하는 게 아니라, 울고 있다!"
 .....< 중략 >.....
"반 아이들 모두에게 반장을 잘못 뽑았다고 납득시키기까지는 너무 오래 걸리는 걸요! 걔들은 영어 선생님이 얼마나 비열한지도 모르고 있어요!"
"투쟁이란 대부분 지루하고 힘든 일이란다, 얘야!"
역사 선생이 말했다.
"그렇지만 반 아이들 대부분은 다른 아이가 어떻든 전혀 관심이 없어요. 자기 자신만 생각한다고요!"
<본문 165쪽>

 

영어 선생은 평소 공부를 잘하는 나스티를 귀여워했는데, 나스티가 영어 선생에게 대든 것은 분명 자기만 생각한 행동은 아니었다. 역사 선생의 말대로 반장을 교체하려는 나스티의 시도는 나스티네 반 아이들을 반장 토미 패거리와 나스티 패거리로 양분시켜 버렸고, 싸움까지 벌어졌다. 나스티는 억울함을 풀지 못하고, 수호유령 로자 리들에게 달려가 말한다. 로자는 뭔가를 이루려면 단결해야 한다며 나스티를 설득하지만, 나스티는 토미 패거리를 멍청하고, 비열한 바보 천치들이라고 비난한다.

 

"나스티, 설마 너도 반 아이들 절반 이상이 멍청하고 바보 천치고 비열하다고 믿지는 않겠지! 너와 몇몇 아이들만 얌전하고 친절할까! 네가 티나랑 하는 말을 들었다. 토미는 돼지야! 가브리엘레는 사팔뜨기야! 후버트는 아버지가 부자니까 밥맛이야! 요하나는 정신병자야! 잉게는 다리가 X자야! 너희들 둘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그런 게 대체 예고 시험하고 무슨 상관이 있지?"
....< 중략 >....
"로자, 어쩔 수 없이 서로 욕을 하게 돼요! 저절로 그렇게 된다고요!"
그러면 로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피해야 할 일이야. 그렇지 않으면 진정 원하는 게 무엇이었는지 깡그리 잊어먹게 된단다."
<본문 188-189쪽>

 

수호유령 로자 리들은 비록 날지도 못하고, 열쇠 구멍 같이 작은 구멍으로 몸을 빼내는 재주는 없었지만 정치적으로(?) 아니 무엇보다 오래 산 사람의 지혜와 균형잡힌 시선을 지닌 양심적인 유령이었다. 그런 수호유령 로자 리들에게도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는데, 하나는 평발이라 오래 걸어다니지 못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오랫동안 지하실에 묻혀 있었던 경험으로 생긴 폐쇄공포증이었다.

 

이제 나스티와 가족으로부터 뗄래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된 로자 리들이 불의의(로자 리들이 파출리향이  나는 궤짝에 갇혀 궤짝째 필츠마이어 씨 집으로 팔려가는) 사고로 행방불명 되어버리는 사건이 생긴다. 나스티와 티나, 온가족의 갖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로자 리들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과연 나스티의 수호유령 로자 리들에겐 어떤 일이 생긴 걸까?(아쉽지만 그건 책으로 읽으시라.)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의 "수호유령이 내게로 왔어"는 이렇듯 재미와 교훈이 절묘하게 배합된 작품이다. 착하지만 외동딸로 자라 개인적인 나스티, 남을 배려해줄 줄 알지만 엘리트적인 면도 있는 나스티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이다. 자식이 7남매, 8남매 되는 대가족은 이제 "인간극장"류의 휴먼 다큐에서나 볼 수 있는 과거의 흔적이 되었다. 과거의 아이들은 넘쳐나는 가족, 형제들 틈에서 서로 미워하고, 싸우고, 화해하는 과정에서 저절로 공동체의 미덕과 사회화 과정을 배울 수 있었다. 가족이란 그저 사회 교과서에서 배우는 사회를 구성하는 기초단위 이상의 의미가 있는 중요한 학교였다. 그러나 이제 아이들에게 가족은 늘 부모라는 어른이고, 그나마 동년배 가족은 명절에나 만날 수 있는 존재이다. 아이들은 가족 속에서 고립되어 있다. 그건 1978년을 경험하며 어른이 된(그 이후에 태어난 이들도 있겠지만)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작가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는 우리의 80년대라 할 수 있는 유럽의 68혁명과 동구 현실사회주의 몰락을 경험한다. 그런 까닭일까. "70년대만 해도 나는 문학이 세상을 개선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문학은 독자들을 웃고 울릴 뿐, 세상을 바꿔 놓지는 못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이들의 현실에 대한 통찰력을 높여 주고 그들이 느끼는 불안감, 경험했지만 말로써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표현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뿐이다."라고 말한다. 작가가 문학을 통해 세상을 개선할 수 있다고 믿었던 시대로부터 벗어나버린 현시대의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언제나 되풀이되는 질문이지만, 문학은 단지 그것을 읽고, 표현함으로써만 경험할 수 있는 무엇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아마도 작가는 수호유령 로자 리들을 만나는 어린이들로 하여금 현실에 대한 통찰을 통해 우리가 살아온 시대보다는 덜 편협한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가도록 일깨워주고 싶었던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 불과 200여쪽이 조금 넘는 이야기임에도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로자 리들이 나스티와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는 게 단지 그것뿐은 아닐 거다. 훌륭한 작품들의 미덕은 늘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이야기들을 품고 있기 마련인데, 바로 이 작품이 그렇다. 이 책을 읽고 혹시 내게도 수호유령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당신 가슴 속 양심의 목소리에 귀기울여 주기 바란다. 거기 당신의 수호유령이 말을 걸기 시작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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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아모스와 보리스 - 윌리엄 스타이그 | 우미경 옮김 | 시공주니어(1996)




"아모스와 보리스"
의 주제를 생각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톰과 제리" 같은 우리 부부가 떠올랐다. 톰은 고양이고, 제리는 생쥐다. 그런데 이 둘 사이는 그렇게 단순한 고양이와 생쥐 사이가 아니다. 비록 톰은 고양이지만, 영리한 생쥐인 제리에게 늘상 골탕을 먹는 상대이기 때문이다. 윌리엄 한나와 조셉 바바라 콤비는 그들 자체가 뗄래야 뗄 수 없는 사이이기에 통칭 "한나 바바라(Hannah Barberra)"라고 불린다. 한나 바바라 시리즈 중 하나인 "톰과 제리"를 내 동생은 넋을 놓고 보았었다. 입에 밥 숟가락 넣는 것도 잊은 채 넋을 빼놓고 보았기에 종종 야단을 맞곤 했는데, 어렸을 때는 나 역시 동생과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조금만 나이가 들어 이 시리즈를 다시 보면 어렸을 적엔 왜그리 넋을 빼놓고 웃었는지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각각의 에피소드들은 배경과 소재만 약간씩 변화를 줄 뿐 판에 박힌 듯 빤한 스토리가 전개된다.

 

못되고, 음흉하지만 늘 골탕만 먹는 고양이 톰과 작고 힘없지만 영리해서 늘 승자가 되는 생쥐 제리 사이의 슬랩 스틱풍 액션이 반복되는 에피소드들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제리에겐 늘 사납지만 우둔한 불독 부자가 있어 든든한 후견인 노릇을 해준다. 이 시리즈의 매력은 그런 역전과 반전의 미학에 있다. 현실 세계에선 당연히 강자인 고양이와 생쥐 사이의 관계가 역전되어 있고, 음흉한 계획을 세운 톰의 흉계가 결국 톰 자신을 괴롭히는 상황 말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판에 박힌 이야기뿐이었다면 "톰과 제리"가 그렇게 인기있는 만화 시리즈로 살아남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한나 바바라 콤비는 종종 대중의 이런 반응을 알아채고, 톰에게 실컷 복수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한다. 언제나 착하기만 한 제리가 아니라 종종 음흉해지는 제리가 있고, 그런 제리는 벌을 받는다. 혹은 톰과 제리가 합작해서 어려움을 해결하기도 한다. 톰과 제리는 할리우드 고전 코미디 영화의 전형이랄 수 있는 슬랩 스틱과 스크루볼(톰과 제리의 우정은 종종 사랑의 차원으로 승화되는 것 같다는 점에서) 코미디를 만화로 절묘하게 옮겨온 것이 성공의 배경이다.

 

아모스는 생쥐다. 그러나 제리 같은 생쥐는 아니다. 아모스는 제리보다 진지하고, 무엇보다 바다를 사랑하는 생쥐다. 아모스는 뭍에서 태어나 뭍에서 살았지만 바다를 동경했고, 어느날 우연히 바다에 나갔다가 그만 바다에 빠져 곤경에 처하고 만다. 뭍에서 태어난 뭍에서 자란 생쥐, 아모스의 이야기는 마치 부모의 품을 갓 떠나 좀더좀더 넓은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우리 인간의 삶과 흡사하다. 아이는 자라면서 점점 어머니의 품을 떠나 유치원으로, 초등학교로, 사회로 점점더 넓고 각박한 세상으로 나간다. 아무리 훌륭한 부모도 언젠간 자식의 곁을 떠날 수밖에 없는 것이 운명이다. "아모스와 보리스"는 어린이들에게 이별의 의미, 우정의 의미를 알려준다. 그리고 사랑도...

 

종종 우리네 어린이문학 책들을 읽다보면 천편일률적이란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아동문학평론가 원종찬은 "아동문학과 비평정신"에서 우리 아동문학엔 "쿠오레주의"에 비해 "피노키오주의"가 부족하단 말을 하고 있다. 오래된 이야기지만 문학에는 해방과 교화의 기능이 있다. 해방이라 함은 거칠게 말해 "카타르시스"를 의미하는 것이고, 교화란 일종의 간접체험(교육)을 의미하는 말인데, 우리 어린이문학이 많이 다양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아동문학에서 "피노키오주의"는 여전히 결핍상태이다. 혹여라도 그런 판타지를 다룬 아동문학작품들도 뭔가 사유의 뿌리가 없이 수경재배된 식물성 이미지를 지닌다. 식물성 느낌을 주는 건 교화를 주어야한다는 강박과 현실에 뿌리박은 동화를 쓰고 싶다는 작가의 의지가 결합되어 생긴 가장 안좋은 경우를 의미한다. 톰과 제리, 아모스와 보리스는 모두 의인화된 동물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그 자체가 일종의 우화적 판타지라 할 수 있다. ("톰과 제리"의 경우엔 약간의 이견이 있겠지만 긍정적인 부분에만 집중해 말하자면 재미라는 측면에서 다소 비교육적일 수 있는 요소들 혹은 미국식 이데올로기를 적절하게 이용하고 있다.)

 

이 작품이 다루고 있는 내용은 사실 낯선 판타지의 세계는 절대 아니다. 도리어 이 이야기는 매우 낯익다. 힘은 없지만 항해를 꿈꾼 생쥐 아모스는 겁도 없이 바다로 나간다. 그러다 풍랑을 만나 파선되고 넓디넓은 바다를 떠다니게 된다. 그런 아모스를 구한 것은 바다에서 아니 지구상에 현존하는 가장 거대한 생물인 고래 보리스이다. 아무의 도움도 필요없을 것 같은 보리스도 어느날 바다로부터 밀려나 해변으로 떠밀려 온다. 그런 보리스를 발견한 아모스는 친구 코끼리들을 불러 보리스를 다시 바다로 돌려보낸다. 이것이 이 야기의 전체적인 얼개이다. 낯설기는 커녕 너무 낯익어 어디에서 이런 이야기를 보았는지 도리어 생각나지 않을 지경이다.

 

기실 아동문학시장의 거대함에도 불구하고, 질좋은 창작품보다 훨씬 더 많은 이야기들이 이런저런 전래 동화 혹은 국적 불명의 세계 민속 동화,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위인전들이 난립해 있다. 게다가 워낙 소문에 눈 어둡고, 귀 얇은 유행이다 보니 한 번 입소문을 타고 번진 아동도서들은 불티나게 팔린다. 모모 출판사는 원래 한 번도 아동문학이나 그와 관련된 책을 출간한 적이 없음에도 흥행 대박의 결과로 빌딩을 올리네, 원작자와 저작권료 지급 문제로 송사에 걸리더니 원래의 기획을 살려 새로운 시리즈를 기획 출판하면서 중국에 진출한다고 한다. 저작권협약이 본격적으로 발효되면서 괜찮은 작가들의 작품을 서로 판형만 달리해서 중복 출간하는 일은 없어졌지만 대신에 저작권 시효가 만료된 작품들이나 애초부터 저작권을 따지기 어려운 전래 동화류들이 난립한다.

 

그런 중에 이 작품 "아모스와 보리스"는 낯익은 이야기를 어떻게 낯설게 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란 생각이 들었다. 도움받고 은혜갚는 동물 이야기는 인간 사회의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소재이고, 그러다보니 숱하게 많은 이야기들이 이런 류의 교훈을 다룬다. 그런 이야기들 속에서 "아모스와 보리스"를 변별시켜 주는 중요한 요소는 아모스의 진지함이다. "아모스와 보리스"의 두 주인공은 모두 죽음의 공포에 직면해본 경험이 있는 존재들이다. 게다가 이 둘의 결말은 "그리하여 아모스와 보리스는 그후로도 오랫동안 행복했더래요"가 아니다. 이 둘의 우정은 서로의 목숨을 구할 만큼 진한 것이지만, 정작 이 둘 사이를 가르는 것은 바다와 육지라는 두 존재가 누리는 삶의 토대가 다르다는 것에 있다. 이 둘의 결말이 이별이란 점에서 이 둘의 결말은 결코 해피엔딩이 아니다.

 

우리가 살면서 접하게 되는 가장 강렬한 이별은 무엇일까? 졸업과 입학, 전학, 이사, 이민, 실연, 이혼... 여러 종류의 이별이 있지만 가장 확실하고 가장 오랜 이별은 죽음이다. 바다와 육지라는 삶의 토대를 떠나선 살 수 없는 두 생물의 이별은 각각의 생물들이 죽음의 고비를 넘기는 경험을 한다는 점에서 더욱 각별해진다. 이 둘의 이별은, 이별과 죽음에 대해 이승과 저승에 대해 구체적이진 않지만 어린이들 마음에 무언가를 심어줄 수 있는 것이다. 이 둘은 서로의 목숨을 구명할 만큼 친한 사이지만 영원히 만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물론 순진한 아이들은 아모스가 바닷가에 살고, 보리스는 그 해안가에 살면 되지 않느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그 순진한 아이들도 자라서 언젠가는 이별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작가는 이 어리고 순진한 존재들의 가슴에 이별과 죽음이란 성인이 되어서도 감당하기 어려운 사건을 극복할 씨앗 하나를 몰래 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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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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