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의 짧은 동거 : 장모씨 이야기 - 장경섭 지음 / 이미지프레임(길찾기) / 2005년



장경섭과 최초의 인연을 창비에서 나온 『십시일반』으로 생각했는데 어제 후배가 전해준 『저예산독립만화지 1996년 6월호 통권 제2호-화끈』을 보니 그와 나의 인연은 그가 데뷔한 1996년으로 거슬러 올라야 했다. 그런데 고백할 것은 그에 대한 내 기억을 되살려 준 것은 『화끈』에 실린 그의 작품 때문이 아니라 여기에 실렸던 김동고의 "돌아온 조단" 때문이었다. 이 작품의 그림체가 당시 내게는 꽤 특이하게 느껴졌고, 그 무렵 시카고 불스의 마이클 조단이 은퇴와 복귀를 반복하던 무렵이라 특별히 기억에 남았던 모양이다. 그런 점만 놓고 보자면, 국가인권위원회에서 기획하고 창비에서 펴낸 작품집 『십시일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작품집에서도 장경섭이란 이름은 내 기억 속에 명확하게 새겨지지 못했다. 『십시일반』에서 내가 눈여겨 본 작품은 조남준의 「누렁이1.2」였다. 조남준의 「누렁이2」는 훌륭한 단편 옴니버스 만화집인 『십시일반』의 여러 좋은 작품들 가운데서도 확실히 뛰어난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장경섭이란 이름은 내게 확실히 각인되었고, 그것도 매우 뛰어난 작가로 기억될 것이다. 그와의 오래된 인연에 비해 장경섭이란 이름은 내게 오래도록 각인되지 못하고 표류해왔다. 그 이유는 뛰어난 작가를 선별해내지 못한 나의 둔함 때문이자, 이런 작가의 작품을 자주 접할 수 없게 만드는 우리 만화계의 고질적인 구조 탓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이제라도 발견할 수 있게 된 그의 작품들은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지금도 장경섭 못지않은 실력과 진지한 작가 정신을 바탕으로 무명의 설움을 경험하고 있을 작가들은 많을 테니 말이다. 현재까지 내가 읽은 장경섭의 작품들은 『화끈』에 실린 「張某씨 이야기」와 『십시일반』에 수록된 「커밍아웃블루스」 그리고 이제 발간된 개인작품집 『'그'와의 짧은 동거』가 전부이다. 좀 더 노력한다면 그의 다른 작품들도 구해서 읽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나는 이 세 권에 수록된 장경섭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이 작가에 대해 일단 세 가지를 먼저 떠올리게 되었다. 우선 그가 나랑 동갑이란 사실인데 그 때문인지 이념적 퇴조기를 살아낸, 살아내고 있는 이들이 표출하는 비릿한 삶의 비애가 느껴졌다. 다른 한 가지는 장경섭이란 작가가 매우 고집스럽고, 우직한, 그리하여 매우 호흡이 느리거나 긴 작가일 것이란 추측이다. 앞서 삶의 비애감에 대한 나의 주장이 다소 근거 없는 추측이라면 그의 호흡에 대한 이야기는 내 나름대로는 비평적 근거가 존재한다. 우선 그의 데뷔작이랄 수 있는 『화끈』부터 꾸준하게 주인공(화자)으로 등장하고 있는 '張某씨'와 작가 사이의 길고 긴 인연이 그것이다. 데뷔작이랄 수 있는 96년 작의 "張某씨"의 얼굴선을 그린 펜촉의 느낌은 매우 굵은데 반해 마른 얼굴로 묘사되고 있다. 이에 반해 『'그'와의 짧은 동거』에 등장하는 "張某씨"의 얼굴선을 표현하는 선(line) 자체는 가늘지만 얼굴은 이전의 작품보다 상당히 둥글둥글해졌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張某씨"를, 작가 자체와 동일시할 필요는 없지만 주인공 화자가 만화가의 또 다른 페르소나임을 부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더군다나 작가의 작품들이 내보이는 자의식들, 분명히 때로는 과잉으로 보이는 그 느낌들은 작품의 리얼리티와 관련해 그만의 독특한 세계를 이룬다. "작가의 말"을 살펴보니 "출판사에서 만화책을 만들자는 제안을 해온 것이 지난해 12월이었다. 10년 가까이 만화판의 언저리에서 머물렀으니 이제는 한 권쯤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라는 나름의 초조감과 아직도 헤매는 모습을 꼭 드러내야 하나, 하는 부담감에 시달리며 5년 전에 시작만 했다가 끝내지 못했던 원고를 꺼내어 마무리에 들어갔다"고 말한다. 웃고 있는 작가의 안경 낀, 힘없이 열린 입모습에서 어쩐지 "張某씨" 캐릭터에 대해 그가 느꼈을 법한 애정과 슬픔이 동시에 느껴졌다.


장겹섭의 첫 작품집 『'그'와의 짧은 동거』는 표제작인 중/장편에 「'그'와의 짧은 동거」 이외에도 매우 뛰어난 단편 「즐거운 나의 방」, 「즐거운 나의 방 - 다시 열기」를 비롯해 「서브웨이 카니발」, 「히.말.라.야.에.가.보.셨.나.요?」까지 모두 5편이 수록되어 있다. 만화체로 그려진 「히.말.라.야.에.가.보.셨.나.요?」를 제외하곤 극화체와 만화체가 혼재되는 느낌(그러나 전반적인 경향을 놓고 살필 때, 장경섭에겐 이런 구분이 거의 필요 없어 보인다) 속에 자연스럽게 경계를 허물고 있다. 그림체만 놓고 보자면 『십시일반』에 수록된 「커밍아웃블루스」가 가장 세련된 그림체이다. 문학에 있어 문체는 작품을 구성하는 중요 요소 중 하나이며 이것은 만화의 그림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장경섭의 그림체는 매우 어눌해 보인다. 세련된 그림체를 선호하는 이들에겐 그의 어눌해 보이는 그림체가 거슬릴 수도 있겠으나 작가 대신에 약간의 변명을 하자면, 문체가 작가의 자의식을 반영하기 위한 선택적 글쓰기 전략의 일환이라면 만화가의 그림체 역시 그렇다는 것이다.


어떤 작가에게 장면 혹은 다루는 이야기에 따라 문체나, 문장의 호흡에 변화를 주는 방식을 택한다면 만화가에겐 만화체와 극화체, 혹은 펜의 선택,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만의 독특한 그림체를 통해 자신만의 이야기(이 속에는 작가의 주제의식과 세계관, 그에 따른 표현방식을 모두 포함하는)를 전개해나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만화가의 그림체는 캐릭터 못지않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런 점에서 『'그'와의 짧은 동거』가 선보이는 어눌한, 어쩌면 아마추어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그림체는 작품에 대한 몰입의 과정에서 다큐멘터리적인 진실함을 보인다. 이것이 독자로 하여금 카프카의 『변신』 같은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리얼리티의 문제로 이의를 제기하거나 과잉되어 보이는 자의식의 세계를 낯설면서 낯설지 않게 느끼도록 하는 힘의 원천이다.




「'그'와의 짧은 동거」가 주는 첫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다. 어두컴컴한 싱크대 앞 펑퍼짐한 몸매의 누군가가 설거지를 하고, 침대에 누운 채 책을 보며 과일을 먹고 있는 "張某씨"의 모습은 낯이 익다. 아버지나 남편은 소파에 누워 TV를 보고, 어머니나 아내는 홀로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고, 아버지 혹은남편이 쉬고 있는 모습은 매우 낯익은 정경이다. 그러나 작가는 이 낯익은 정경으로부터 시작하는 ‘낯설게 하기’를 시도한다. 갑자기 "쨍그랑" 소리가 들린다. 설거지 도중에 컵을 놓쳐 깨뜨린 것이다. 그런데 깨진 컵을 주워 담는 손이 이상하다. 깨진 컵을 주워 담는 건 바퀴벌레였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장면 분할에 있어 바퀴벌레의 손이 등장하는 것은 다음 페이지로 넘겼으면 좀더 효과적이었을 것이란 생각.) 


"張某씨"는 컵을 줍고 있는 바퀴벌레에게 다가가 "야! 손으로 만지면 안돼! 다친단 말야!"라며 바퀴벌레를 걱정하듯 말한다. 그러나 바퀴벌레는 화를 내며 다시 싱크대로 가 설거지를 한다. "張某씨"는 다시 침대로 돌아와 ‘후욱’하고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대체 왜 그래? 그래 불만 있는 거 알아. 아무래도 요새는 일이 좀 바쁘니까 신경도 못 쓰고.... 그래도 그렇게 꽁하니 말도 안하고 그러면 답답해서 어쩌냐. 우리 기분전환 삼아서 해남이나 한 번 다녀올까? 전번에 갔던 갯벌이 근사하던데 가서 갯지렁이도 잡고."라며 바퀴벌레의 마음을 달래주고자 한다. 마치 부부의 대화처럼 낯익지만 이질적인 존재들의 동거가 이 작품의 긴장과 매력 속으로 우리들을 끌어당긴다. 바퀴벌레는 검은 비닐봉지에서 수거한 '컴배트 파워(바퀴벌레약)'를 늘어놓으며 말한다. "화장실에 2개, 침대 밑에 2개, 싱크대 밑에 2개. 이건 무슨 뜻이지? 이젠 끝인가?" 작가 "張某씨"가 의뭉스럽게 깔아놓은 컴배트 파워, 삶이란 지뢰밭 사이로 이 제 우리들은 끌려들어간다.




"張某씨"는 외로운 사람이다. 그의 집은 마치 김중식의 시 속에 등장하는 귀가할 때마다 "세상의 끝에 대해/ 끝까지 간 의지와 끝까지 간 삶"에 대해 생각해야 할 만큼 멀고도 먼 곳이다. "큰길이 뚫려 있어도 사방이 막다른 골목"처럼 힘주어 올라간 계단 끝 막다른 옥탑방이었다. 그는 아무도 없는 방으로 들어간다. 치약을 밟고 그는 혼자 말한다. '오늘은 어째 도가 좀 지나친 날이다. 외로움의 정도가...' 그런데 그의 방 침대에 바퀴벌레 한 마리가 미처 피하지 못한 것인지 그처럼 피곤에 지친 탓인지 침대 위에 올라가 있다. "張某씨"는 너무나 외로웠고, 오늘은 그 정도가 좀 지나친 날이었기에 바퀴벌레를 잡아 죽이거나 집 밖으로 내?는 대신에 침대를 바퀴벌레에 내어주고, 대신 방바닥에 입던 옷을 덥고 잠이 든다. "외로움의 도가 지나친 날이었기 때문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잠깐을 제외하곤 결혼할 때까지 10여년을 혼자 살았던 경험이 있다. "張某씨"처럼 옥탑방에 산적도 있지만 바퀴벌레와 가장 오랫동안 동거한 것은 인천의 허름한 연립 원룸에 살던 때였다. 아무도 없는 방, 아침에 출근할 때 급한 마음에 휙휙 던져 논 옷가지 그대로 쌓여있고, 싱크대 통에 누렇게 말라가는 밥풀과 하수도를 메우며 시큼하게 상해 가는 음식찌꺼기들. 그곳은 네가 떠나있는 동안엔 마치 네모난 관(棺)처럼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날 돌연 출현한 바퀴벌레들, 분명 함께 살고 있는데도 불을 켜면 한 마리도 보이지 않고, 가끔 살충제나 방충제를 뿌려놓으면 죽은 채 발견되는 시신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었다. 정둘 것 없어 병에도 정을 준다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너무나 외로웠기에 밤이면 자기 자신에게라도 말을 걸지 않을 수 없던 외롭고 쓸쓸하게 보낸 밤들이 있었다. 그런 어느 아침에 눈을 떠보니 어젯밤 그 바퀴벌레가 설거지를 하고 있다. 작가 "張某씨"는 말한다. "혼자서 생활할 때는 자잘한 모든 것을 내가 선택해야 한다. 어떤 신문을 사야할지부터 재떨이를 비워야 하는 시점까지 일일이 신경을 쓰다보면 예민한 자아는 지칠 수밖에 없고 한 번 지치고 나면 무서운 고독감에 라면 한 봉지 사러 나가는 데도 하루 종일을 고민해야 한다."


외로움 때문에 시작된 바퀴벌레와의 동거는 여러 측면에서 알레고리로 읽힌다. 장경섭은 이미 전작 『십시일반』에 수록된 「커밍아웃블루스」를 통해 외국인 이주노동자와의 동성애를 그린 바 있다. 바퀴벌레는 문명화된 도시의 삶(자연, 사회, 공동체로부터 고립된 개인) 속에서 초대받지 못한 곤충 바퀴벌레 그 자체를 의미할 수도 있고, 주류 세계에 포섭되지 못한 배타적 소수자(동성애자, 외국인 이주노동자 등)를 우의(寓意)적으로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바퀴벌레와 동거하는 "張某씨"는 마치 우렁각시처럼 설거지하고 살림을 도와주고, 친밀한 동료로서 이야기 상대가 되어주는 바퀴벌레와 함께 일상의 생활을 영위한다. 그러나 사회가 허락하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가 협소한 통념(通念)의 세계, 일상은 고통의 나날이다. 나이트클럽에서 볼 일을 보던 바퀴벌레는 사람들에게 뭇매를 맞고 쫓겨나고, 친구 바퀴벌레와 함께 탄 택시에서도 다시 쫓겨난다. "張某씨"에게도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주변의 시선이 그를 괴롭히고, 생활 자체도 그를 힘겹게 한다. 다만 바퀴벌레와 동거하는 "張某씨"를 이해해주는 ‘그녀’를 통해 그는 숨구멍을 열어놓을 수 있었다.('그녀'를 통해서도 극적인 반전이 기다리고 있지만 스포일러일 듯하여 말을 아낀다.)



 

전세계에 걸쳐 4,000여종이 존재하고, 한국에도 7종이 살고 있는 바퀴벌레는 아프리카가 원산이라 따뜻하고 어두운 곳을 즐겨 찾는다. 그런 바퀴벌레가 아프리카를 벗어나 세계로 퍼지게 된 것은 흑인 노예들을 잡아다 팔던 노예 상인들의 선박에 의한 것이었다. 본래 추운 곳에서는 살 수 없는 바퀴벌레는 화석에너지를 통해 난방을 해결한 문명적 삶의 혜택(?)으로 오늘날 우리가 거주하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살게 되었다. 마치 이주노동자들이 자본의 이동 경로를 따라 삶의 정주지를 옮기는 것처럼, 그러나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은 허용되는 반면, 노동의 이동은 엄격하게 통제되는 것처럼, 이주노동자들은 사회적 통합을 가로막는 골칫거리로 치부되곤 한다. 이주노동자들, 피부색, 인종에 대해 비교적 열린사회로 평가 받아오던 프랑스에서 일어난 폭동 사건은 이를 잘 반증한다. 「'그'와의 짧은 동거」에서는 사마귀가 사귀어오던 여성을 과실치사한 사건에서 비롯되는 폭동 사건과 이의 전개 과정을 삽입하고 있다. 「'그'와의 짧은 동거」는 그간 문학의 영역에서 감당해왔던 우리 시대와 사회에 대한 작가 나름의 치열한 고뇌와 사투의 흔적을 담고 있으며, 이는 가라타니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말」에서 말하듯 “근대에서 소설이라는 형식이 역사적으로 이상하게 팽대해진 현상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왜 소설일까. 그것은 다른 수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혹시 다른 수단이 있었다면 굳이 소설이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란 것처럼 이제 과거의 문학 특히 소설이 감당하던 몫을 더 이상 수행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더욱 커다란 미덕으로 드러난다. 이렇게 말한다면 내 판단이 지나친 비관에 의존한 것일까.


그의 다른 작품들 특히 단편 「즐거운 나의 방」, 「즐거운 나의 방 - 다시 열기」은 만화만이 보여줄 수 있는 놀라운 표현들로 가득하다. “내 방에 들어와 보니 누군가 죽어 있었다. 나였다”로 시작되는 이 단편에서 그는 마치 유체이탈한 영혼처럼 자신이 죽음(주체의 죽음)을 목격하는 또 다른 주체로서의 나를 보여준다. 내가 나를 잡고 슬퍼하고, 내가 나를 위로하며, 다시 “내 방에 들어와 보니 누군가 죽어 있었고” 다시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달려온 내가 “내 방에 들어와 보니” 나 아닌 내가 나의 장례식을 치르고 있다. 그 중 누군가인 내가 “내 방에서 뭐 하는 짓들이야. 이게 다 뭐야! 집어치우지 못해!”라며(이 또한 장례식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들 중 하나다) 나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다시 나 아닌 나가 “저 자식, 또 지랄이네...”, “받아들이기 힘든가봐.”라며 술잔을 들이킨다. 「즐거운 나의 방」, 「즐거운 나의 방 - 다시 열기」은 마치 에셔의 무한순환하는 그림처럼 그렇게 삶과 죽음의 곡절들을 보여준다. 나는 과연 나를 사랑하고 있는가? 나는 과연 타인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작가는 그렇게 원자화되고 고립된 개인, 일상의 주체이자 소멸되어버린 몰개성의 주체들에게 묻고 있다.


나는 감히 장경섭의 이 작품들 『'그'와의 짧은 동거』를 2005년, 올해 내가 만난 내러티브 있는 모든 이야기(작품)들 중에서 가장 훌륭한, 첫손에 꼽을 책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그에게서 무한한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 인간에 대한 우울하기 그지없는 온갖 예언들로 가득한 2005년, 대한민국 문학 판이 온갖 상업주의의 만신전(萬神殿)으로 변해버린 이 시간, 이 시대를 보내며 내가 발견한 희망과 절망이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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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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