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호 유령이 내게로 왔어 -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 | 김경연 옮김 | 풀빛(2005)


우리 집에 굴러다니는 책 중에 헌책방에서 구한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의 책 "그해 봄은 빨리 왔다"란 책이 있다. 원제는 "날아라 풍뎅이" 1988년에 출간된 동서문화사의 "에이스88" 아동문학전집 중 44번째 책이다. 그리고 엊그제 집에 굴러다니는 뇌스틀링거의 책 한 권을 새로 읽었다. "수호유령이 내게로 왔어"(원제는 "Rosa Riedl Schutzgespenst"로 "수호유령 로자 리들" 정도가 되겠다) 였다. "이거 무슨 책이야?" 하고 책을 집어드니 집사람이 "누가 좋아하는 누구 책이야"하며 놀린다. 흐흐... 웃어주고 낼름 책을 들고 나와 버렸다.

 

책을 읽는 동안 너댓 번 정도는 소리내서 웃고, 대여섯 번 정도는 미소 지었다. 나중에 아내의 설명으로 알게 된 사실이긴 하지만 뇌스틀링거는 굉장히 유명한, 거장 대접을 받는 동화 작가였다.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는 1936년 10월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서 출생했다. 1936년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우리 사회에 고스란히 대입시키기는 곤란하겠지만, 우리 식으로 바꿔보면 1945년 서울에서 태어난 세대의 경험과 흡사한 삶의 체험을 했다고 할 수 있겠다.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1945년 뇌스트링거의 나이는 대략 10세 가량이었을 것이다.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는 1970년부터 글을 쓰기 시작해서 200여 종의 책을 써냈고, 1984년엔 아동문학 분야의 노벨문학상이라 한다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상"을 수상하는 등 활발한 작품 활동과 명성을 쌓았다. 국내에도 20종 가량의 작품이 번역되어 있다고 하는데, 나는 그 중에 단지 두 권을 읽었을 뿐이다. 시계공 아버지와 빈의 변두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가 국내 모언론과 가진 인터뷰를 살펴보니 "어린 시절의 추억은 대부분 잘못된 것들이다. 나는 과거의 기억을 소재 삼아 글 쓰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유년기 영향이라면 나치와 2차 세계 대전을 겪었다는 사실뿐이고, 그것으로써 세상 보는 눈을 갖게 됐다."라고 말한다.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과 실제 체험을 결부시키려는 외부의 시선에 대해 저항하는 몸짓을 보이는 것이야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뇌스틀링거의 경우엔 나치와 제2차 세계대전이란 유년기의 역사적 체험이 작가의 시선을 규정하는 중요한 근거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전쟁을 경험한 모든 독일인들이 사회주의자가 되거나 좌파가 된 것이 아니듯 뇌스틀링거를 좌파적 이념을 지닌 작가로 몰고가려는 시도는 위험한 규정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뇌스틀링거는 "자유와 연대(혹은 평등)"라는 서로 상충될 수도 있는 두 가치 가운데 어느 하나도 포기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앞서의 인터뷰에서 젊은 부모들에 대한 조언을 부탁받고 그녀는 "나는 기본적으로 교육이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든 것에 반대한다. 어른들의 꾸중과 칭찬을 통해 아이들은 깨닫지 않는다. 경험과 고통을 통해 스스로 배우고 자란다."고 말한다.

 

"수호유령이 내게로 왔어"는 지난 1998년 출간되어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청소년문학상을 수상한, 뇌스틀링거의 최근작이다. 원제에서 알 수 있듯 이 작품의 주인공은 "로자 리들", 검은 머리에 흰 머리카락이 몇 개 섞여있고, 코에는 둥근 니켈 안경이 얹혀져 있고, 뺨이 늘어진, 이제는 날지도 못하는 뚱뚱보 아줌마 유령이다. 그녀가 유령이 된 것은 1938년 나치에 의해 부당한 처벌을 당하는 유대인을 도와주러 달려가다가 전차에 치인 사건 때문이다. 이 책의 독자층이 주로 초등 5-6학년생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었을 때, 1938년 무렵 나치가 지배하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약간의 보충 설명이 필요하다. 이 해에는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하고, 나치에 의한 유대인 대탄압, 이른바 "제국 수정의 밤(크리스탈 나흐트, 11. 9)" 사건이 벌어진 해이다. 이 이전에도 나치에 의한 유대인 탄압은 있어 왔지만, 본격적이고 대규모 탄압은 이 해를 기점으로 종전되던 1945년까지 계속되었다.

 

그것 한 가지만으로도 아줌마 유령 "로자 리들"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단정지어 버리는 건 이 작품의 재미를 반감하는 선입견이기도 하다. 작가도 그런 선입견을 염려한 탓인지 이야기를 시작하는 첫 머리에 '이 이야기를 1944년부터 시작하지 않는 편이 좋은 까닭' 이란 소제목의 글을 배치해두고 있다. 작가는 이야기를 가까운 과거인 1978년부터 시작한다. 1938년 전차에 치어 죽은 로자 리들은 1978년 열한살짜리 어린 소녀 나스티에게 나타나 말을 건다. 나스티는 공부는 잘하지만  겁도 많고, 외동 아이로 자라 소심한 데다가 아주 이기적이라고는 할 순 없지만 개인주의적이긴 한 소녀다. 한 마디로 말해 친구들보다 몇몇 과목에서 좀더 성적이 좋다뿐,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평범한 소녀란 말이다. 다만 한 가지 나스티가 티나에겐 있는데 자신에겐 없는 존재를 부러워한단 사실 한 가지만 빼놓고...

 

티나에겐 있지만 나스티에겐 없는 존재는 무엇일까? 그건 어느날 체육 시간 티나의 목에 걸려 있는 작은 펜던트였다. "작은 금빛 원판인데 한쪽 면은 에나멜"로 된 펜던트에는 볼이 포동포동하고, 날개가 달린 어린 아이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다. 티나는 자랑스럽게 자신의 "수호천사"라고 말한다. 나스티는 짐짓 관심없는 척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자신에게도 수호천사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품는다. 그런 나스티에게 어느날 갑자기 유령 로자 리들이 나타난다. 볼이 포동포동한 천사는 커녕 뺨이 축 늘어진 데다 날개도 없고, 게다가 날지도 못하는 유령의 출현은, 마치 나비를 꿈꾼 소녀에게 갑자기 나방이 날아든 격이었다. 하지만 로자 리들의 인간적인 매력은 나스티를 사로잡았다. 나스티에겐 수호유령이 생겼고, 로자 리들에겐 좋은 말벗이 생겼다. 두 사람, 아니 한 명의 유령과 한 명의 소녀는 서로에게 의지하며 과거와 현재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유령 친구가 생긴 나스티에게 많은 변화가 생긴다. 그 변화는 "다른 아이들과 잘 놀지도 않을 뿐더러 친했던 여자 친구와 사이가 나빠지고, 파티에 가지 않고, 대신 홀로 외로이 오후를 다락방에서 선인장과함께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이다. 물론 나스티가 혼자인 건 아니었다. 로자 리들과 함께 하지만 엄마 안네마리의 눈엔 유령이 보이지 않을 뿐이다. 엄마는 나스티를 다그치지만 나스티는 엄마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도 싫고, 엄마에게 진실을 말했을 때 생길 충격이 두려워 입을 다문다. 엄마는 우연히 나스티와 유령의 존재를 알게 된다. 이때부터 나스티와 로자의 관계에는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나스티의 엄마, 아빠를 포함한 나스티 가족과 로자, 그리고 관계가 점차점차 확대되어 가는 내용을 다룬다.

 

아빠인 좀머 씨가 유령 로자와 관계 맺는 과정을 살펴보자. 로자 리들의 존재를 알게 된 아빠는 깜짝놀라 말한다.

 

"다만, 제 세계관이 완전히 뒤집어졌다는 걸 아시는지!"
로자 리들이 외쳤다.
"난 누구의 세계관도 뒤집은 일은 없어! 그렇고 말고! 유령이 있는 걸 알아도 부자들은 여전히 부유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여전히 가난하지! 그래, 자네가 나를 알게 되었다고 해서 비열한 것, 선한 것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기라도 했나? 아니면 자네가 가능하다고 여기지 않았던 것이 가능해졌다고, 다음 번 선거 때 다른 정당을 뽑을 건가?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자네는 분명 올바른 선택을 할 걸세!"
<본문 145쪽>

 

다행히도 아빠 좀머 씨는 로자 리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엄마 안네마리 역시 나스티와 로자를 이해하며 한 가족으로 맞아들인다. 이렇듯 로자 리들은 처음엔 나스티만의 수호유령이었으나 점차 나스티 가족의 친구로 옮겨간다.

 

어느 날 학교에서 나스티는 영어 선생님이 예고도 없이 한 친구에게 시험을 치르도록 하는 것에 대해 항의하는 사건이 벌어진다(우리하고는 교육환경이 많이 다르기 때문에 이것이 얼마나 부당한 일인지 나로서는 잘 체감할 수 없지만). 나스티로서는 영어에 자신없어 하는 게롤트에게 미리 준비도 없이 시험을 치르도록 하는 일이 부당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영어 선생에게 항의하다 교실 밖으로 뛰쳐나온 나스티는 역사 선생을 만나 아이들이 동조해주지 않은 억울함을 호소한다.

 

"사람은 자기 권리를 위해 투쟁해야 해요!"
나스티가 훌쩍이며 말했다. 역사 선생이 말했다.
"얘야, 내가 보니 너는 투쟁하는 게 아니라, 울고 있다!"
 .....< 중략 >.....
"반 아이들 모두에게 반장을 잘못 뽑았다고 납득시키기까지는 너무 오래 걸리는 걸요! 걔들은 영어 선생님이 얼마나 비열한지도 모르고 있어요!"
"투쟁이란 대부분 지루하고 힘든 일이란다, 얘야!"
역사 선생이 말했다.
"그렇지만 반 아이들 대부분은 다른 아이가 어떻든 전혀 관심이 없어요. 자기 자신만 생각한다고요!"
<본문 165쪽>

 

영어 선생은 평소 공부를 잘하는 나스티를 귀여워했는데, 나스티가 영어 선생에게 대든 것은 분명 자기만 생각한 행동은 아니었다. 역사 선생의 말대로 반장을 교체하려는 나스티의 시도는 나스티네 반 아이들을 반장 토미 패거리와 나스티 패거리로 양분시켜 버렸고, 싸움까지 벌어졌다. 나스티는 억울함을 풀지 못하고, 수호유령 로자 리들에게 달려가 말한다. 로자는 뭔가를 이루려면 단결해야 한다며 나스티를 설득하지만, 나스티는 토미 패거리를 멍청하고, 비열한 바보 천치들이라고 비난한다.

 

"나스티, 설마 너도 반 아이들 절반 이상이 멍청하고 바보 천치고 비열하다고 믿지는 않겠지! 너와 몇몇 아이들만 얌전하고 친절할까! 네가 티나랑 하는 말을 들었다. 토미는 돼지야! 가브리엘레는 사팔뜨기야! 후버트는 아버지가 부자니까 밥맛이야! 요하나는 정신병자야! 잉게는 다리가 X자야! 너희들 둘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그런 게 대체 예고 시험하고 무슨 상관이 있지?"
....< 중략 >....
"로자, 어쩔 수 없이 서로 욕을 하게 돼요! 저절로 그렇게 된다고요!"
그러면 로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피해야 할 일이야. 그렇지 않으면 진정 원하는 게 무엇이었는지 깡그리 잊어먹게 된단다."
<본문 188-189쪽>

 

수호유령 로자 리들은 비록 날지도 못하고, 열쇠 구멍 같이 작은 구멍으로 몸을 빼내는 재주는 없었지만 정치적으로(?) 아니 무엇보다 오래 산 사람의 지혜와 균형잡힌 시선을 지닌 양심적인 유령이었다. 그런 수호유령 로자 리들에게도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는데, 하나는 평발이라 오래 걸어다니지 못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오랫동안 지하실에 묻혀 있었던 경험으로 생긴 폐쇄공포증이었다.

 

이제 나스티와 가족으로부터 뗄래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된 로자 리들이 불의의(로자 리들이 파출리향이  나는 궤짝에 갇혀 궤짝째 필츠마이어 씨 집으로 팔려가는) 사고로 행방불명 되어버리는 사건이 생긴다. 나스티와 티나, 온가족의 갖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로자 리들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과연 나스티의 수호유령 로자 리들에겐 어떤 일이 생긴 걸까?(아쉽지만 그건 책으로 읽으시라.)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의 "수호유령이 내게로 왔어"는 이렇듯 재미와 교훈이 절묘하게 배합된 작품이다. 착하지만 외동딸로 자라 개인적인 나스티, 남을 배려해줄 줄 알지만 엘리트적인 면도 있는 나스티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이다. 자식이 7남매, 8남매 되는 대가족은 이제 "인간극장"류의 휴먼 다큐에서나 볼 수 있는 과거의 흔적이 되었다. 과거의 아이들은 넘쳐나는 가족, 형제들 틈에서 서로 미워하고, 싸우고, 화해하는 과정에서 저절로 공동체의 미덕과 사회화 과정을 배울 수 있었다. 가족이란 그저 사회 교과서에서 배우는 사회를 구성하는 기초단위 이상의 의미가 있는 중요한 학교였다. 그러나 이제 아이들에게 가족은 늘 부모라는 어른이고, 그나마 동년배 가족은 명절에나 만날 수 있는 존재이다. 아이들은 가족 속에서 고립되어 있다. 그건 1978년을 경험하며 어른이 된(그 이후에 태어난 이들도 있겠지만)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작가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는 우리의 80년대라 할 수 있는 유럽의 68혁명과 동구 현실사회주의 몰락을 경험한다. 그런 까닭일까. "70년대만 해도 나는 문학이 세상을 개선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문학은 독자들을 웃고 울릴 뿐, 세상을 바꿔 놓지는 못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이들의 현실에 대한 통찰력을 높여 주고 그들이 느끼는 불안감, 경험했지만 말로써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표현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뿐이다."라고 말한다. 작가가 문학을 통해 세상을 개선할 수 있다고 믿었던 시대로부터 벗어나버린 현시대의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언제나 되풀이되는 질문이지만, 문학은 단지 그것을 읽고, 표현함으로써만 경험할 수 있는 무엇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아마도 작가는 수호유령 로자 리들을 만나는 어린이들로 하여금 현실에 대한 통찰을 통해 우리가 살아온 시대보다는 덜 편협한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가도록 일깨워주고 싶었던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 불과 200여쪽이 조금 넘는 이야기임에도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로자 리들이 나스티와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는 게 단지 그것뿐은 아닐 거다. 훌륭한 작품들의 미덕은 늘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이야기들을 품고 있기 마련인데, 바로 이 작품이 그렇다. 이 책을 읽고 혹시 내게도 수호유령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당신 가슴 속 양심의 목소리에 귀기울여 주기 바란다. 거기 당신의 수호유령이 말을 걸기 시작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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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가이아  : 살아있는 생명체로서의 지구』 - 제임스 러브록 | 홍욱희 옮김 | 갈라파고스(2004)


신화가 죽은 것을 산 것과 동일시한다면 계몽은 산 것을 죽은 것과 동일시한다. - T.W. 아도르노


세상 모든 믿음의 시작은 자연을 섬기는 것에서부터 출발했다. 한정된 수명을 지닌 인간은 끊임없이 순환하며, 사라지는가 하면 다시 나타나고, 죽었는가 하면 되살아나는 힘을 지닌 자연의 놀라운 생명력에 경외심을 품었다. 인간의 신화적 상상력은 지구가 하나의 거대한 신이란 생각에 이르렀고, 고대 그리스인들은 신화 속에서 ‘대지의 여신'을 일컬어 대지모신(大地母神), 즉
“가이아(Gaia)”라고 불렀다. 만유인력을 발견한 뉴턴은 인간의 엄지손가락이 지닌 복잡한 기능만 보더라도 신의 존재를 믿을 수 있다고 말했는데, 만약 그가 불안정한 지구의 대기가 이루고 있는 절묘한 균형과 유지방법을 알았다면 그는 지구 자체를 하나의 신이라 불렀을지도 모른다.

“가이아 이론”이란 영국의 과학자 제임스 러브록은 1978년 「지구상의 생명을 보는 새로운 관점(A New Look at Life on Earth)」이란 책(『가이아 - 살아있는 생명체로서의 지구』)을 통해 주장한 하나의 새로운 과학적 가설이다. 러브록의 가설에서 ‘가이아’란 지구와 지구에 살고 있는 생물, 대기권, 토양, 대양까지를 포함하는 하나의 범지구적 실체를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대지모신의 이름을 빌어 사용한 말이다. 그에 따르면 지구는 생물과 무생물이 상호 작용하는 마치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임을 강조한다. 가이아 이론이 처음 등장했을 때 많은 과학자들은 ‘가이아’라는 이름 때문에 지구를 하나의 인격체로 취급한다는 오해를 했다(러브록은 도리어 그 반대의 측면에서 지나친 환경주의를 경계하며, 철저히 과학적으로 사고하고자 노력한 과학자였고, 과학에 대한 낙관적인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그의 이론을 과학을 빙자한 유사과학으로 취급하고, 이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고자 했으나 지구 온난화 현상 등 지구의 환경 생태 문제와 관련해 가이아 이론은 더욱 큰 힘을 얻고 있다.


▶ 제임스 러브록 박사


제임스 러브록은 1950년대 후반 전자포획기라는 새로운 물질 분석장치를 발명해 과학자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전자포획기를 이용하면 지구상의 어느 곳이라도 대기에 섞여있는 미세한 원소를 분석해낼 수 있었다. 미 항공우주국(NASA)은 러브록에게 화성탐사우주선 바이킹호에 탑재할 생명체 탐지장치에 대한 자문을 구했다. 러브록은 화성의 대기를 분석한 결과
“화성에 생명이 존재하는지 알고 싶다면 굳이 탐사선을 보낼 필요가 없어요. 여기서도 알 수 있지요. 화성은 광물처럼 완전히 죽은 존재”라고 단언했다. 러브록이 이렇게 단언할 수 있었던 것은 화성의 대기를 분석한 결과(화성을 비롯한 천체들은 빛의 스펙트럼 분석을 통해 화학적 조성을 알 수 있다)였다. 분석 결과 화성의 대기는 대부분 이산화탄소로 구성되어 있고 산소는 거의 없었다. 무수한 생명체가 살아가고 있는 지구의 대기에 산소는 21%나 되었고, 이산화탄소는 1% 미만이었다.

생명체가 호흡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산소는 실제로는 매우 불안정한 기체로 다른 물질들과 반응성이 크고, 잠재적인 폭발성까지 가지고 있다. 산소에 의한 산화작용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지만 세포를 늙게 만들고, 불이 계속 타오르도록 하며, 쇠를 녹슬게 만든다. 호흡도 녹이 스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주 느리게 진행되는 연소현상(산화작용)이다. 즉 인간의 호흡은 자신도 모르게 불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구상에 산소가 생겨난 이래 그토록 오랫동안 갖가지 산화작용, 연소 반응들이 진행되어 왔다면 마땅히 지구상의 대기 속의 산소 역시 닳아 없어졌어야 할 것이다. 지구상의 생명체들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산소나 암모니아와 같은 공기 중의 기체들은 언제나 적당한 수준으로 유지되어야 하고 만약 이런 수준에서 약간만 벗어나더라도 생물들에겐 치명적인 결과를 빚을 수 있다. 그런데 무엇이 지구의 산소 농도를 수억 년이 넘도록 일정하게 유지시켜 왔는가? 지구상의 모든 생물체들이 이루고 있는 하나의 거대한 생물권(biosphere)이 지구의 다른 부분들과 복잡한 상호작용을 통해 절묘한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인가?

가이아 이론의 핵심은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외부 환경으로부터 자유 에너지를 섭취하여 자기 생존에 맞게 조절하는 능력(자기조절능력)을 지녔고, 살아있는 지구는 지구의 생물권, 대기권, 대양 그리고 토양까지를 포함하는 하나의 복합적인 실체이며, 가이아는 지구상의 모든 생물들을 위하여 스스로 적당한 물리적·화학적 환경을 조성(항상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피드백 장치나 사이버네틱 시스템(cybernetic system)을 구성한 총합체”라는 것이다. 그 결과 러브록은 지구를 생물과 무생물이 상호 작용하는 생물체로 설정한 가이아 이론, 지구가 생물에 의해 조절되는 하나의 유기체라는 가설을 펼쳤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단순히 주위 환경에 적응해 간신히 생존하는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지구의 물리 ․ 화학적 환경에 영향을 주는 능동적인 존재로 규정한 가설을 담은 것이 이 책 『가이아 - 살아있는 생명체로서의 지구』이다.

가이아 이론의 핵심인 자기조절능력은 인간의 체온(36.5℃)이 주변 환경의 변화나 급격한 열량 소모 등으로 체온이 급격히 오르거나 내려갈 수도 있지만 신체대사를 조절하는 기능을 통해 생명을 유지할 수 있도록 자신의 체온을 조절하는 것처럼 지구 역시, 아니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들이 서로 협력하고 공존하는 방식으로 지구의 산소량과 대기의 온도를 유지해왔다는 것이다. 그것은 러브록이 지구의 모든 것(지구의 생물권, 대기권, 대양 그리고 토양 등)을 이르는 복합적인 실체로서의 지구를 은유적으로 가이아라고 표현한 데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결과다. 지금까지 우리가 발견한 은하계의 어떤 행성도 지구처럼 생물권 전체가 하나의 유기체처럼 행동하며,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 낸 곳은 없다. 어떤 행성도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에 의해 조절되는 절묘한 환경조절 메커니즘, 사이버네틱 시스템을 갖추지 못했다. 그러나 인간은 살아있는 생명체로서의 지구를 죽은 것으로 간주해 이용과 정복의 대상으로만 취급해 왔다.




그 결과 지구는 점점 자기조절능력을 잃어가고 있다. 인류는 가이아의 파트너이자, 가이아의 일원 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자기들의 농장으로 간주해왔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지구를 살아있는 생명체로 바라보는 일은 칼 G 융이 주장하는 인간 영성의 회복으로 나아가는 것이기도 하다. 러브록은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어 우리에게 말한다.

대부분 정치가들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경제성장과 교역증대이며 환경문제는 기술적으로 해결될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있다. 이런 사람들의 일반적인 낙관론은 내게 2차 세계대전 직전의 런던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그 당시 나는 독일군의 공습을 피하기 위해 어느 한 방공호 속의 공기의 적합성 여부를 평가하는 일에 종사했다. 그 방공호는 템스강을 따라 진흙탕 속에 조성된 과거의 하수관 시설이었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나는 좀도둑들이 그 폐기된 하수관의 접속 철판 부분에 조여진 볼트를 풀어 훔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만약 그 풀어진 이음새 사이로 강물이 침범하게 된다면 순식간에 온 터널이 물바다가 될 판이었다. 하지만 그 터널을 방공호로 이용하는 지역 주민들은 자신들이 진흙탕 속에 묻혀버릴 수도 있다는 위험가능성에 전혀 개의치 않는 듯 했다. 그들은 공습 경보와 폭탄의 폭발음에 더 놀라는 것처럼 보였지만 내게는 그 방공호 속이 훨씬 더 위험해 보였다. 어떤 점에서는 현재의 우리도 역시 그 방공호 속의 런던 시민들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여전히 하수관의 이음매 볼트를 빼내어 팔아먹고 있으면서도 지금 당장 아무런 일도 발생하지 않는 것에 만족하여 정작 우리가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는지 확인조차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본문 29~30쪽>

러브록은 우리가 부주의하여 고래를 멸종으로 이끌면 그것은 분명 일종의 종족학살(genocide)이며, 또한 게으르고 완고한 국가관료주의에 빠진 결과라고 경고하면서 마르크스주의자나 자본주의자를 막론하고 인류는 이 같은 범죄의 심각성을 깨우치지 못했다고 말한다. 한나 아렌트는 “더불어 사는 사람들을 세상과 자연, 우주에 대해 함께 기뻐할 가치가 있는 존재라고 여길 때 비로소 우리의 인간성이 유지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말은 수정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세상과 자연, 우주가 우리와 함께 살아있는 존재라고 여길 때 비로소 우리의 인간성도 유지될 수 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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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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