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바도르 (Salvador)
감독 : 올리버 스톤
출연 : 제임스 우즈
제작 : 1986 영국, 미국, 122분

올리버 스톤의 실질적 감독 데뷔작 <살바도르>

올리버 스톤의 감독 데뷔작은 1981년의 공포영화 <악마의 손(The Hand)>이었지만, 그를 할리우드의 이단아, 숨겨진 뇌관으로 만든 데뷔작은 <살바도르>였다. 이 영화가 중요한 것은 그가 앞으로 펼쳐나갈 작업들과 그의 생각들을 엿볼 수 있는 문제작이었기 때문이다. 올리버 스톤은 미국 역사에서 가장 드러내고 싶지 않은 부분들을 조망함으로써 가장 미국적인 감독이자, 미국적이지 않은 감독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올리버 스톤은 미국 현대사의 명암을 정공법으로 파고드는 감독으로 정평이 나 있지만, 그가 처음부터 그런 감독은 아니었다. 그의 데뷔작인 <악마의 손>은 컬트적인 구성이 돋보이긴 했으나 소수의 마니아들에게나 인정  받는 작품이었고, 그는 일찍 감독 데뷔를 했으나 이후엔 감독보다는 시나리오 작가로 더 명성을 얻었다. 그는 감독상을 받기 전에 <미드나잇 익스프레스(1978)>로 먼저 각본상을 받았다.


이후 브라이언 드 팔마와 <스카페이스>, 마이클 치미노와 <이어 오브 드라곤> 등을 촬영하며 전형적인 장르영화에 충실한 각본을 썼다. 이 무렵 그리고 이후에 다소 약화되기는 하지만 그의 작품들은 인종차별적인 묘사와 지나친 폭력으로 많은 비판을 받아 왔고, <미드나잇 익스프레스>는 한 때 한국에서도 영화를 볼 수 있었던 이들에게 한국적 인권 상황을 생각하게 해 많은 인기를 얻었으나 지금은 인종적 편견을 드러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올리버 스톤 자신도
“난 인종차별주의자였고 국수주의자였으며 총을 숭배했다”며 당시 자신의 문제점을 시인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그의 새로운 감독 데뷔작(?)이 된 <살바도르>는 그런 과도기적 상황에 놓인 자신의 처지를 종군 기자 리처드 보일(제임스 우즈)에 투사해내고 있는 작품인지도 모르겠다. 보일은 한때는 그나마 잘 나가던 카메라 기자였고, 영화 <킬링필드>의 주인공이기도 한 시드니 쉔버그와 함께 캄보디아 취재 기자로 나선 적도 있었다. 그러나 타고난 냉소와 좌충우돌하는 기질 때문에 그를 고용해주는 통신사 하나 없이 시시껄렁한 생활을 해나가고 있다. 아내는 넌덜머리나는 결혼 생활을 끝장내버리고, 그는 밀린 아파트 월세에 쪼들리다 못해 통신사에 전화를 해대며 취재거리를 달라고 애걸복걸한다.


엘살바도르 - 바나나공화국에서 벌어진 대량
학살

결국 리처드 보일은 카메라 한 대를 달랑 들고 내전이 한창인 엘살바도르에 간다. 이 영화는 엘살바도르 내전(1980-81년) 당시의 종군 기자였던 보일의 자서전적 기록을 재구성한 영화다. DVD에는 그의 실제 회고 일부가 담겨 있지만 아쉽게도 자막이 없다. 영화 초반의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주된 배경이 되는 엘살바도르는 어떤 나라인가.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엘살바도르는 1856년 독립하지만, 시몬 볼리바르가 꿈꾸었던 라틴아메리카 연방공화국의 꿈은 미국과 같은 새로운 강대국의 출현을 염려한 영국과 미국, 그리고 나머지 유럽 제국들의 방해, 내부적으로는 이미 기득권을 확보하고 있던 지주계급의 반대로 무산되고 만다. 특히 미국은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미국의 우선권을 주장하며 라틴 아메리카 지역에 대한 경제적, 정치적 종속을 강화해나간다.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약소국들을 일컬어 '
바나나공화국'이란 말로 부르는 것은 유나이티드 프루츠와 같은 미국계 다국적 기업이 한 나라의 경제와 사회를 좌우할 수 있는 상황에 대한 냉소 섞인 풍자이다. 미국과 이해를 같이하는 소수 지주계급은 부를 축적하여 전국토의 56%를 14개 문벌에서 차지할 정도로 엘살바도르의 빈부 차는 극심했다. 결국 1932년 농민을 이끌고 파라분도 마르티는 반란을 일으키지만 결과는 농민군 3만 명의 참살로 끝나고 만다. 오늘날 라틴 아메리카의 게릴라 집단의 명칭은 대개 그 지역 출신으로 과거 반란을 주모했던 혁명가들의 이름에서 유래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들의 저항, 아니 이들의 고통이 얼마나 오랜 역사적 연원을 지니는지 알 수 있다.


-> FMLN(Frente Farabundo Marti de Liberación Nacional)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 해방 전선은 1980년 8월에 4개의 게릴라가 모여 결성한 무장 혁명 조직으로 1980년부터 1992년까지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은 우익 쿠데타세력에 맞섰던 게릴라 저항조직이다. UN의 중재로 평화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엘살바도르 내전은 18만명의 희생자를 냈다. 지난 2009년 FMLN은 항쟁 20년만에 엘살바도르 대선에서 승리하여 평화적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라틴아메리카 민중들 전체에 커다란 자극을 준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난다. 쿠바가 소모사 정권을 전복시키는 혁명에 성공했고, 베트남이 거대한 코끼리인 미국의 밑창에 구멍을 내는 승리를 거두었고, 이란에서는 팔레비 정권이 강력한 비밀경찰과 미국의 지원을 물리치고,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을 성공시킨다. 이런 연이은 혁명의 성공은 라틴아메리카 민중들에게 큰 자극이 되었고, 1970년대부터 엘살바도르 안에서도 군부독재에 대한 좌익 게릴라 조직의 저항이 시작된다. 그리고 1980년 분열되어 있던 게릴라 조직은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FMLN)으로 통합되기에 이르렀다. 같은 해 3월 로메로 대주교 암살사건으로 촉발된 엘살바도르 내전은 더욱 극렬한 상황으로 치닫는다. FMLN은 1983년에 이르러서는 엘살바도르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거대 세력으로 거듭나지만 그 와중에 엘살바도르 군부는 '
죽음의 군단'이란 퇴역군인과 치안경찰 등 우익 민병대를 조직해 무수한 민간인들을 학살한다.




기자 정신과 보여주
고 싶은 것만 보여주는 미국 언론

영화는 그런 시대 배경 속에 있으며, 그중에서도 FMLN의 결성과 로메로 주교의 암살, 새로운 람보 - 레이건의 등장이란 극적인 순간의 엘살바도르를 다룬다. 영화 속에서 제임스 우즈는 그의 연기사상 거의 최고의 연기 솜씨를 보여주는데, 그 자신이 리처드 보일이 아닐까 싶을 만큼 대단했다. 영화는 미국의 라틴아메리카의 소국 엘살바도르를 어떻게 실질적으로 지배하는가를 할리우드 영화치고는 대단하단 생각이 들만큼 잘 지적해내고 있다. 비판의 화살은 단지 정치인들에게만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거기엔 한때 우리 사회에서 대통령을 하야시킬 만큼 대담한 비판정신과 공정성으로 찬탄의 대상이 되었던 미국의 언론이 어떤 방식으로 교묘하게 자본의 검열을 받는가를 살필 수 있다.


미국은 베트남전의 패배를 군사적 패배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베트남전의 패배를 내부의 전쟁에서 패한 것, 언론과의 전쟁에서 패한 것, 고도의 정치전, 심리전에서 패배한 것으로 생각한다. 베트남에서의 패배를 군사적인 패배로 생각지 않는 까닭은 미국이 세계 도처의 전쟁에 참전한 이래 거듭되는 그들만의 산술방식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기실 이런 전통은 인디언 헤드 헌터식 산술법이란 지극히 미국적인 산술법에 의한 것이다. 예를 들어 서부영화에 등장하는 인디언 헤드헌터들의 방식, 인디언 머리 가죽을 벗겨오면 가죽 당 얼마씩 달러를 지불하는 것 말이다. 베트남전에서 베트콩의 귀를 잘라 수집하는 것도 어쩌면 이런 전통에서 유래한 것이다. 미국은 전사자의 시체 수로 전투의 승리를 가늠한다. 미군 전사자보다 많은 베트콩을 죽인 전투라면 그 전투는 승리한 것이고, 이런 식의 전투에서 미국은 단 한 차례도 패배한 적이 없었다.


보일은 엘살바도르의 진실을 파헤치고자 하지만, 베트남전 이후 새로운 보도 정책과 검열 방식을 채택한 미국에서는 취재는 가능할지 모르나 이를 보도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 되었다. 종군기자들의 사망이 부지기수로 늘어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의 일이다. 이제 미군을 수행하는 종군기자들은 전쟁에서 가장 먼저 타깃이 되거나 에어컨디셔너에 의해 기온이 조절되는 안락한 브리핑 룸에서 미군 보도통제관이 전해주는 뉴스만을 앵무새처럼 되뇌는 존재가 되었다. 그 결과 미국의 시청자들은 안방에서 편안하게 매번 최고의 민간인 학살 수치를 갱신하는 미군의 전투 수행 방식을 역사상 가장 깨끗하고, 과학적인 첨단 전쟁으로 인식하게 된다. 미군은 그네들이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줌으로써 남북전쟁 당시 브로디의 사진처럼 전쟁은 일어났지만 단 한 명의 전사자 시신도 발견할 수 없는 화면을 본다. 영화 속에서 보일은 미 대사관에서 벌어지는 파티 석상에서 이런 기자들을 한껏 조롱한다. 그러나 보일 자신도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며 우익 지도자에게 밉보여 자신의 친구인 수녀일행이 강간당하고, 살해당하는 일을 겪는다.


엘살바도르와 광주, 1980년

나는 이 영화를 지난 1988년에 보았다. 87년의 후폭풍을 겪고, 88올림픽을 앞둔 노태우 정권은 민주화된 상징으로 코스타가브라스(Constantin Costa-Gavras)의 영화 <Z>와 올리버 스톤의 <살바도르>를 극장에서 개봉할 수 있게 해주었다. 1980년 5.18 광주로부터 8년 뒤에 다시 보는 1980년 엘살바도르의 상황은 광주라는 고립된 공간에서 최후의, 최후까지 저항했던 사람들을 떠올리게 해주었다. 나는 극장의 어두운 공간에서 엘살바도르가 아니라 광주를 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죽은 수녀들의 시체가 어둠 속에서, 흙 속에서 발굴되어 나오는 장면을 보며, 나는 욕지기를 느꼈고, 광주 인근의 어느 이름 없는 둔덕 속에 묻혀있을 시신들이 떠올랐었다. 레이건의 등장이 전혀 다른 새로운 미국의 출현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트루먼 대통령 이래 지속되어 온 미국의 대외정책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일이었고, 1980년의 봄은 그런 미국의 저강도전쟁이란 정책의 변화 속에서 이루어진 소리 없는(?) 학살들이었다. 레이건의 등장과 함께 전 세계 곳곳에서 수많은 전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런 사실들은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한 전쟁이고, 학살이었으며, 단지 그 나라 독재정권이 한 짓들이었다. 미국은 베트남전 이래 직접 개입하는 방식 대신 그들의 하수인을 부리는 방식을 택했다.


리처드 보일은 엘살바도르에서 한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그녀와 결혼하여 살바도르를 빠져나오게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미국에 도달한 직후 국경감시대에 의해 그 여인은 다시 엘살바도르로 되돌려 보내진다. 그녀를 실고 떠나는 국경감시대 차량을 향해 보일은 외친다.
“너희들은 되돌려 보낸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모른다.”고 말이다. 이 영화 역시 올리버 스톤의 작품들에 대해 쏟아지는 일반적인(인종 편견적이라거나, 미국 비판이지만 그것은 또 다른 이미지의 미국, 인권국가, 자유로운 미국에 대한 이미지를 증대시키는데 이바지한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하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고 있는 우리 영화인들 혹은 감상자들에게 되묻고 싶은 것이 있다. 그래, 우리는 이 영화보다 조금 더 나은 영화를 만들었는가? 만들고 있는가?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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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역사 - 마이클하워드. 로저루이스 외 | 차하순 옮김 | 이산(2000)


이 책은 지난 1998년 영국 옥스포드 대학 출판부에서  <20세기의 역사 "The Oxford History of the Twentieth Century">를 번역한 책이다.  


이런 류의 책들에 대한 독후감을 하기 위해서는 무척 많은 역량을 필요로 한다. 이유는 일단 책 자체가 다루고 있는 하중이 만만치 않은 데다가 분량 역시 만만치 않은 탓이 크다. 일단 그 묵직함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가장 좋은 방법은 목차를 보여주는 것이다. 목차는 책을 읽기 위해 필요한 일종의 로드맵이자, 그 책의 구조를 보여주는 가장 합리적인 설계도인 셈이다.

우리나라와 같이 중복 출판의 악명이 높은 곳이라면 목차의 중요성은 더욱더 커진다. 만약 같은 책이 중복 출판되었는데 그 중에서 좀더 좋은 책을 고르고 싶다면 우선적으로 목차를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목차가 상세하게 되어있고, 찾아보기가 잘 되어 있는 책일수록 번역의 질이 전반적으로 높은 책일 확률이 비약적으로 높아진다. 잡소리가 길었는데, 굳이 그런 이야기를 서두에서 장황하게 늘어놓고 있는 이유는 이 책이 그런 점에서 질적으로 매우 뛰어나기 때문이다.



이 책은 크게 5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장 '20세기의 구조'에서는 20세기를 규정할 수 있는 성격들을 모두 7개 단락으로 나누어 풀고 있다. 물론 그 면면이 20세기의 구조를 밝히는데는 과부족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무엇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다음의 세 가지이다. 하나는 이 책이 기술된 시점이 20세기 말엽의 현실사회주의권 몰락의 역사적 결과를 바라보며 기획되어서 나토의 유고공습 시점에 집필되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이 책의 주요기술자들이 영미권 역사학자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셋째는 이들의 시각이 실증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으나 주된 관점은 영미적인 시각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먼저 그런 세가지 사안들을 유념해서 보아야 한다. 이 책은 그런 점에서 20세기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또 한 권의 주목할 만한 책인 에릭 홉스봄의 "극단의 시대"와는 극명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

대표 저자인 마이클 하워드 (Michael Howard)는 1922년 영국 출생으로 제 2차 시계대전에 참전하였고, 1946년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하여 이듬해인 1947년부터 1963년까지 런던대학 킹스 칼리지에서, 1963년부터 1968년에는 전쟁사 석좌교수로 재직하였다(마이클 하워드의 책 중 국내에 번역된 것은 이외에도 "평화의 발명" 등이 있다). 그외에도 로저 루이스, 윌리엄 맥닐, 1979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스티븐 와인버그, 우리에게도 중국사 전문가로 널리 알려진 조너선 스펜스(그의 책은 국내에 번역 출판된 것이 많은 편이다.), 아키라 이리에, 사회학자 랠프 다렌도르프 등이다. 이 책은 단지 저자들이 유명한 것으로만 이야기할 수는 없다. 그것을 번역해낸 연구자들 역시 국내의 저명한 학자군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다. 우선 대표 번역자로 서강대 명예교수인 차하순 선생을 비롯해서 경제쪽의 인하대 경제학과의 김진방, 중동분야의 권위자인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이희수 선생 등등 그들이다. 이외에도 라틴 아메리카 부분을 번역한 서성철 선생 등도 모두 해당 분야의 최고 전문가 그룹이다.

그렇다면 그 내용도 과연 최고인가?를 물을 수 있을 것이다. 먼저 말하고 싶은 것은 앞서 말했던 이 책의 세 가지 특징을 염두에 두라는 것이다. 이 책은 이념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실증적인 관점을 유지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영미적 시각을 고수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즉, 이 책에서 구소련과 중국, 공산주의는 전체주의와 다르나 아주 다르지는 않다는 식으로 다뤄진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기에 대해 쓰여진 현존하는 역사서 중에서 '아직까지는' 이 책을 열 손가락 안에 꼽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저자들을 비롯해서 근현대사를 연구한 많은 학자들이 우리들이 흔히 생각하듯 물리적인 시간으로서의 20세기는 기왕에 종료되었으나 지난 세기인 19세기가 역사적으로는 과연 언제 종료되었는가를 규정짓는데 여러 의견이 있는 것처럼 물리적인 21세기는 시작되었으나 역사적인 맥락에서의 20세기는 아직 종료되지 않았다고 볼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책이 말하고 있는 20세기는 먼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과거의 관점과는 다른 새로운 관점에 의한 해석의 통로들을 열어놓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빌헬름 뢴트겐이 X선을 발견한 것은, 사건 자체로는 그다지 대단한 것이 아니었으나 그것을 통해 19세기의 물리학자들이 더이상의 과학 발견은 없다고 믿었던 자연상의 발견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제공해주었고, 그로부터 새로운 20세기의 물리학이 시작되었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우리는 20세기와 아직까지는 너무나 밀접한 삶을 살고 있으므로 20세기를 역사적으로 규정짓고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종료된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


이 책은 서구 제국주의의 팽창으로부터 양차 세계대전, 스페인, 러시아 혁명과 대공황, 냉전에서 공산주의의 붕괴 그리고 홍콩의 중국 반환과 동티모르 사태 등 정치적인 사건의 맥락에서 혹은 양자역학과 상대성 이론에서 DNA  복제 문제에 이르는 다종다양한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세계화에 대해 비교적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 아마도 이 책이 2000년에 나왔다면 틀림없이 1999년의 세계화에 대한 전세계 민중들의 뜨거운 반대 함성을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1999년 시애틀 전투 말이다. 어떤 맥락에서도 21세기가 20세기보다 희망적일 것이라는 증거는 없으며 그것은 앞으로 우리들의 삶으로 체현되는 역사이기 때문이다.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당신에게 20세기는 이미 지난 과거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20세기는 당신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여전히 현재 지속형으로서 존재하며 당신과 나, 우리 지역사회와 대한민국, 그리고 나아가 한반도와 동아시아, 세계 문제에 계속되는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당신의 20세기를 찾아가는 지적인 여행을 펼치는 것은 어떠한가?
이 책의 작은 재미 중 하나는 본문 사이사이에 배치된 120컷에 달하는 컬러와 흑백화보다. 또, 70쪽에 이르는 20세기 연표는 지난 100년의 흐름을 각 분야별로 일목요연하게 살펴볼 수 있도록 편집되어 있는데,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에서 제공하고 있는 연표를 만들 때도 참고하였다. 물론 전적으로 참고하지는 않았다.

끝으로 많은 분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고, 그와 더불어 번역에는 제법 문제가 많지만 에릭 홉스봄의 "극단의 시대"도 함께 읽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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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와 야만 사이의 내부고발자(whistle blower)

『진보와 야만』을 읽기 전에 들었던 두 가지 생각

클라이브 폰팅(Clive Ponting)의 책 『진보와 야만-20세기의 역사』를 처음 받아들었을 때 들었던 생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진보와 야만'이란 시선으로 20세기를 바라보려는 시도가 그다지 낯설지 않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생태적 관점에서 진보의 의미를 파헤쳤던 『녹색세계사』(2003, 그물코)를 통해 인류의 환경파괴 역사를 진지하게 담아냈던 저자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아마 서유럽과 북미의 잘사는 나라들과, 오스트레일리아에 사는 교양 있는 중산층 시민들일 것”
이라고 예측한다. 뒤이어 그는 “이들과 그 가족들의 경험은 20세기에 세계 대다수 인구가 겪은 전형적인 경험들”과는 다르다고 말한다.

1900년에 가장 부유했던 나라들은 2000년에도 여전히 가장 부유했고(이 집단 안에서 일정한 변동이 있었지만), 최빈국들도 대체로 변함이 없었다. 실제로 중심부와 주변부 사이의 부의 격차는 20세기 동안 줄어들기는커녕 더욱 커졌다. 1900년에 중심부에 사는 사람들은 주변부에 사는 사람들에 비해 평균적으로 약 3배 더 부유했다. 1990년대 말에 이 격차는 7배로 커졌다. 어떤 경우에 그 격차는 개괄적인 수치가 제시하는 것보다 훨씬 더 컸다. 1990년대에 미국의 1인당 소득은 자이르보다 평균적으로 80배 더 높았다. 많은 나라에서 상황은 급속히 악화되고 있었다. 1990년대 중반에 89개국 사람들이 1980년대 보다 훨씬 더 가난해졌고, 43개국 사람들이 1970년대 보다 더 가난해졌다. 이것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부의 하락이었다. … <중략> … 20세기 말 세계에서 부의 격차는 막대했다. 세계 인구의 가장 가난한 20%(약 12억 명)는 세계 총소득의 채 1%도 차지하지 못했다. 세계보건기구(WHO)의 기준에서 ‘극빈층’으로 분류되는 이들은 충분한 식량과 주택, 음용수도 공급받지 못했다. 세계 어린이의 1/3이 영양결핍을 분류되었고, 그 중에서 1,200만 명의 5세 이하 어린이가 빈곤 관련 질병, 대개는 13펜스의 비용밖에 들지 않는 경구용 수액치료를 받지 못해 사망했다. <본문 155-156쪽>

이 책을 읽는 우리들, 대한민국 사람들은 그가 상정하고 있는 서구 세계, 중심부의 교양 있는 중산층 시민들과는 또 다른 경험들 속에 놓여 있다. 우리는 1900년대 가장 가난했던 나라에서 탈출해 중심부에 근접하는 위치까지 올라섰기 때문이다. 저자는 우리 모두가 20세기 전반에 걸쳐 최소한 평균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훨씬 더 부유해지는 진보를 이루었지만, 문제는 세계의 부가 불평등하게 분배되었고, 세계 인구의 20%가 전 세계 부의 80%를 향유한다는 이 사실이 20세기의 가장 큰 야만일 것이라고 지적한다. 비록 IMF 이후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구성원들이 먹고 살기 힘들다고 난리를 치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우리는 국민소득 상위 20%에 든다.

진보와 야만 사이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

대한민국은 건국 당시(1948년) 1인당 국민소득 50달러였던 최빈국에서 2006년 현재 16,000달러에 육박하는 나라가 되었다. 물론 문제는 이 같은 통계나 외형적 수치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다른 주변부 국가들보다 잘 살고 있다는 객관적 조건들을 무시할 수는 없다. 다른 중심부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들 역시 경제위기와 실업을 완화하기 위한 노동시간 단축이란 정책은 펼쳐보지도 못했다. 우리들 모두는 좀더 많은 소비를 위해 충실한 노동중독자가 되기를 자처하고 있다. 1997년 IMF 경제 위기 이후 우리 사회는 더욱더 각박해졌고, 지금껏 피땀 흘려 누려온 모든 풍요가 일순간에 사라질 수 있다는 공포와 불안에 사로잡혔다.

우리에게 이 같은 공포와 불안이 더욱 극대화된 까닭은 우리의 성공과 풍요가 불과 최근 2~30년 사이의 일이라는 단기적인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자본주의라는 착취의 먹이사슬에서 우리들 역시 하나의 정점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주변부에 속한 인류가 채 1%도 안 되는 소득으로 비탈진 삶을 살아가더라도 오늘의 우리는 풍요로운 소비를 만끽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도, 서구의 중심부를 형성하고 있는 교양 있는 중산층 시민들에게도 여전히 진보로 받아들여진다. 이 공포와 불안의 먹이사슬이야말로 20세기의 진보와 야만을 이루는 핵심 고리이다. 우리는 『진보와 야만 - 20세기의 역사』를 통해 이 두 가지가 나란히 공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어떻게 할 것인가? 또 21세기의 세계는 어떻게 될 것인가? 앞서 언급했던 20세기 초 만연했던 중심부 엘리트들의 낙관주의가 그러하듯, 21세기 초반인 현재 장기적인 예측은 불가능하겠지만 이 책의 저자가 내리고 있는 비관적인 결론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 역시 매우 어렵다. 클라이브 폰팅은 “20세기 동안 세계가 진화해온 길과 세기말의 경제력과 정치력의 분포를 고려할 때, 세계는 다음 수십 년 동안에도 과거와 마찬가지로 한줌의 소수에게는 진보로, 압도적 다수에게는 야만으로 다가올 공산이 크다”고 전망한다. 이 전망은 1900년에 가장 부유했던 나라들이 20세기에 여전히 부유했던 것처럼 21세기에도 여전히 부유할 것이란 전망이기도 하다. 그러나 20세기와 21세기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1992년 미국 과학아카데미와 영국의 왕립협회의 공동보고서는 “현재의 인구성장 예측이 정확한 것으로 판명되고 지구상에서 인간 활동 패턴이 변화하지 않는다면, 과학과 기술은 세계의 상당한 부분에서 진행되고 있는 불가역적인 환경 악화나 계속되는 빈곤을 방지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다. 21세기에도 한줌의 소수는 여전히 세상이 진보하고 있다고 믿겠지만, 그 같은 방식으론 더 이상 지구의 자원과 생태계가 지속가능할 수 없기 때문이다.

1965년 미국의 국무장관 딘 러스크(Dean Rusk)는 미국의 전 지구적 권력과 세계의 모든 일에 개입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아래와 같이 말했다.

“지구는 매우 작은 행성이 되었다. 우리는 육지에서든 바다에서든 대기권에서든 심지어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우주에서든 지구상의 모든 것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본문327쪽>

이제 21세기의 인류, 아니 저자가 이 책을 읽을 것이라고 상정하고 있는 중심부의 교양 있는 시민들은 불안과 공포에 억눌린 풍요로운 이 체제의 내부고발자로서, 생존의 가파른 비탈에 서 있는 주변부와 “지구상의 모든 것”, 생명을 가진 것들과 그렇지 않은 모든 것들을 지속가능하게 만들기 위한 권력과 개입할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











출처 : 『환경과생명』 2007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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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로 보는 20세기 - 학고재신서 19/ 이주헌 지음/ 학고재/ 1999년



- 도상학자 파노프스키가 그랬다던가? 그 시대를 알기 위해서는 그 시대의 미술 작품을 보라고... 이 책 "미술로 보는 20세기"의 저자 이주헌 선생은 확실히 그런 의도를 가지고 이 책을 집필하고 있다. 저자는 서문에서 "20세기에 만들어진 미술작품들을 통해 이 100년의 실체를 이해해 보려는 나름의 새로운 접근법"으로서 이 책을 만들었음을 밝히고 있다. 역사를 말할 때 간혹 '청사(靑史)'라는 말을 쓰곤 하는데, 이 때 청사라는 것은 아직 종이가 발명되기 전의 시기에 대나무를 다듬어 역사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이때 기록된 역사는 당연히 문자를 통한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파노프스키는 어째서 미술 작품을 보라고 말할까? 그것은 문자가 미처 기록하지 못하는 당시의 정서를 읽어낼 수 있는 중요한 텍스트의 기능을 미술작품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런 점에서 미술관련 예술서이면서 동시에 역사를 다루는 인문학 서적이다. 저자는 미술작품을 통한 역사 접근법을 통해 문자 기록에 의한 사실 나열과 파급효과를 따지는 객관적인 분석보다는 당대인들의 보편적인 정서와 느낌, 그리고 그 반응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생생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렇다고 이 책의 긴장이 오로지 지난 100년의 역사적 사건들에만 집중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도리어 지난 100년의 다양한 미술사조와 역사의 긴장 관계를 밝히는 탐색 작업을 통해 그간 난해하게만 받아들여졌던 현대 미술의 흐름이 어떻게 우리 사회의 현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지를 더불어 밝혀주고 있다. 이 책을 읽을 때 특히 주목하게 되고, 주목해야 할 부분은 미술사조나 양식사적인 접근법이 아니라 그 기준을 현실 속에서 빚어지고 있는 다양한 현상을 아우르는 역사를 통해 역으로 미술을 향해 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주헌 선생은 20세기에 제작된 다양한 미술작품들과 함께 지난 100년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을 범주로 구분하고 있다. 예를 들어 '관능의 시대, 혁명, 팝문화, 전쟁, 갈등의 시대, 테크노피아, 잃어버린 낙원' 등의 구분 방식을 통해 여성에 대한 인식의 변천사와 현대 사회의 기술력이 미술에 파급시킨 영향과 예술가들이 이에 대해 보인 반응들인 작품을 비교해가며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알기 쉽다고 해서 깊이를 얻지 못한 그런 글이 아니라 문장 하나, 인용된 작품 하나하나가 매우 섬세하게 신경 써서 고른 것들임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이 책의 무수한 장점들 중 가장 뛰어난 대개의 요소들은 저자에 의한 것이다. 그는 종종 미술비평가들이 등한히 하기 쉬운 사상의 문제나 이념의 문제, 우리의 미래를 좌지우지할 기술만능, 환경파괴, 제3세계의 문제 등도 빼놓지 않고 있다. 이 책은 역사와 미술 사이를 분주하게 오가며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처음 <한겨레>신문에 연재될 때부터 주목해서 보았는데 단행본으로 나온 것을 읽는 마음도 여전히 설렌다.) 저자는 두 마리 토끼를 쫓는 시도를 비교적 성공리에 수행하고 있다. 다만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20세기의 굵직굵직한 테마들과 현대미술을 아우르려는 시도 자체가 매우 방대한 요구인데 이를 축약해서 다루려는 시도가 가끔 총망라하겠다는 욕심에 시달린 흔적들을 보인다는 것이다. 이런 것은 결국 분량의 문제일 수도 있으리란 생각이 들고, 충족시키기 어려운 문제점이 있음에도 저자는 이를 매우 훌륭하게 수행해냈다.

지난 1999년에 나온 이 책을 나는 몇 권 사서 주변 지인들에게 선물한 적이 있었다. 누구에게 선물해도 괜찮은 책이란 것이 찾아보면 그리 흔한 것도 아니다. 우리는 지난 1999년을 새로운 천년을 맞는다는 호들갑 속에 보냈다. 새로운 천년이 시작되었음에도 20세기의 유산들은 아직 청산되지 않고 이어져 온다. 지난 세기를 조망해보는 중요성이 현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점에서 매우 소중하다. 현재를 조망해보고 미래 문명을 예견해 볼 수 있게 만드는 책 역시 흔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한 권 샀다면 한 권 더 사서 주변 사람들에게 권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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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 광고, 소비의 문화사/ 제임스 트위첼 지음, 김철호 옮김 / 청년사 / 2001년 10월

1. 광고 - 범죄의 재구성 혹은 당의정?

살아가다보면 누구나 그런 경험들
- 자신의 인생이 어느 사건, 혹은 순간을 계기로 극적인 전환을 거쳐 질적인 변화에 이르는 - 을 하게 된다. 어떤 맥락에서 보든 나 역시 내 삶의 이력을 때로 매우 극적으로 변환시킨 계기가 되었던 몇몇 사건들을 경험했다. 그 중 몇 가지는 이런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4년간 막노동꾼으로 건축현장의 거의 전 분야, 가령 목수로 시작해서 미장이, 벽돌공, 방수공사 일꾼을 전전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대학생이 되었던 것, 대학을 졸업하고 모 광고회사에서 대리까지 승진했다가 어느날 갑자기 때려치우고 지방의 모 시민문화단체로 업종을 전환한 사건이 그것이다. 광고회사에서 일한 기간은 전부 합쳐봐야 2년 남짓한 기간이었지만, 지금의 내가 업무적으로 해내야 하는 일들의 거의 대부분을 실무적으로 배우게 된 것은 학교가 아니라 그 회사에서였다. 그곳에서 2년을 근무하는 동안 나는 운이 좋았던 것인지 운이 나빴던 것인지 프로야구단 홍보물, 모재벌그룹의 그룹 브로슈어, 철강회사 브로슈어, 이탈리아산 수입 자동차 브로슈어 등 주로 출판물에 의한 광고를 전담해서 진행했다.

그곳에서 일하는 동안 내가 가장 존경했던 광고인 데이비드 오길비였고, 클라이언트들 앞에서 행하는 프리젠테이션은 총성없는 전쟁이었다. 나는 모 그룹 브로슈어 제작을 따내기 위한 공개 경쟁에서 LG애드와 같은 메이저 광고회사를 따돌리고 광고물을 수주한 경험도 있었다. 그날의 기분은 베르사이유궁에서 독일 통일을 강제한 뒤 독일 브란덴부르크문으로 개선하는 프로이센 장군의 심정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그곳에서 일하는 동안 나는 설 연휴에 쉬어 본 적이 없고, 추석 명절에도 쉬어 본 적이 없었다. 하루 세 끼를 고스란히 사무실에서 해결해야 했고, 모두가 퇴근한 빈 사무실에서 디자인팀과 함께 BB탄 에어건을 가지고 서바이벌 게임을 하며 스트레스를 푼 적도 있었다. 아침엔 인근 사우나에 가서 사우나를 한 뒤 박카스 한 병과 우루사 한 알로 해장을 했다. 작은 원룸에서 살고 있었지만 집에 들어가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다보니 연애는 자연도태되었고, 나는 7년을 사귄 사람과 헤어졌다. 충격이었다. 나쁜 일은 함께 온다고 했던가? 그렇게 따낸 재벌의 그룹 브로슈어를 납품하고 얼마 안가 이 회사는 그룹 전체가 정권과 밀착한 비리와 연루되어 공중분해되고 말았다. 그룹 회장은 물론 계열별로 경영권을 물려받은 형제가 줄줄이 구속되었다. 문어발식 경영과 무리한 업종 확대, 권력과 밀착한 비리가 불러온 파국이었다.

그때 나는 회사를 그만두었다.
아마도 내가 썼던 말들, 소위 '컨셉'이니 '카피'니 '비주얼 이미지'들이 그들의 범죄를 어떻게 재구성하고 포장해냈는지를 느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 무렵엔 모든 재벌들이 변화에 목말라했다. 아직 IMF는 터지기 전이었지만 5공화국 시절 3저와 함께 누렸던 호황의 거품이 빠지면서 변화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자각도 있었다고 느꼈다. 그래서 내가 광고로 관여하기도 했던 모 재벌그룹 총수는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는 모두 바꾸라"고 말하며, 전세계에 걸쳐 있는 자사 임직원들을 모아 서울잠실경기장에서 그들만의 축제를 벌이며 변화의 몸짓, 아니 안간힘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변화를 위한 것이었을까? 결론만 말하자면 나는 본질을 바꾸지 않고, 그에 대한 포장을 통한 변화의 이미지 메이킹만으로, 남에게 보이기 위한 선전만으로는 아무 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거짓을 포장해서 달콤한 설탕으로 덧씌운 당의정을 팔았다.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지방의 작은 시민문화단체에 취직했다. 업무 환경은 열악했고, 주변에서는 아직 그 일의 가치를 알아주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이 일에 만족하고 있다. 비록 4년제 대학을 졸업한 대학생들의 초봉에도 미치지 못하는 월급을 받고 있지만... 나는 일 자체가 주는 보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2. 다시 읽는 광고 - 욕망, 광고, 소비의 문화사
나는 홈페이지를 하나 가지고 있다.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http://windshoes.new21.org)" 제법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고, 햇수로 4년째를 하다보니 여기저기 알려진 모양이다. 그 덕분에 재작년이던가? 대학생연합광고동아리의 강연을 부탁받은 적이 있다. 글쎄, 왜 그런 부탁을 했는지 정확한 의도는 모르겠지만 장차 광고인이 되고자 하는 이들이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광고인으로서의 나는 실패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메이저 광고회사를 다닌 적도 없고, 단지 2년 남짓한 짧은 시간 동안 어쩔 수 없이 광고를 생업으로 삼았을 뿐인데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며 한두시간 남짓한 이야기로 과연 무슨 영향을 줄 수 있을까? 그러난 그것은 광고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말이다.

우리는 예술을 '문학, 미술, 음악, 사진, 영화, 무용, 연극' 등등의 장르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고전 시대의 그리스, 로마 시대 사람들이 생각했던 예술엔 오늘날 우리가 예술이라 인식하지 못하는 장르들이 종종 예술로 평가받는다. 가령, 오늘날 정치인의 웅변을 예술로 생각하고 규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당시의 사람들은 '웅변'을 분명히 예술 장르 중 하나로 포함시키고 있다. '사진'이나 '영화'는 기술적 진보로 만들어진 예술 장르이며 지난 100여년 전만 하더라도 이것을 예술로 인식하던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그들은 이것을 '요지경'과 마찬가지로 신기한 장난감 정도로 인식했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분명히 이것을 예술로 인식한다. 만약 예술을 상업적인 의도와 무관한 어떤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당장 영화를 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예술과 상업주의는 서로 떼어낼 수 없다.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21세기, 22세기에는 혹시 '광고'도 예술 장르에 포함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 자리에서 그런 질문을 그들에게 던졌다. 역시 반응은 거의 돌아오지 않았지만....
편견과 고정관념은 광고의 적이다.

이 책의 저자 제임스 트위첼은 우리가 흔히 광고하면 떠올리는 마케팅 전문가로서의 광고학자는 아니다. 그는 미국 플로리다대학의 영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미국의 몇몇 광고 잡지에 고정칼럼을 쓰고 있는 인문학자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측면에서 보자면 그는 아마추어리즘에 입각해 프로페셔널리즘으로 무장한 광고를 분석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광고업종에 종사하는 이들이 격찬하는 광고가 실제로 대중들에게는 외면당한 사례가 종종 있다. 그것은 광고를 실제로 접하고 구매에 이르는 이들은 아마추어 광고 매니아(?)들이자 프로 소비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을 읽다보면 쉽게 제임스 트위첼의 시선이, 일반 독자들의 시선과 쉽게 교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책이 다루고 있는 내용에 비해 무척 쉽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은 그런 점 때문이다.

이 책의 한국 도서명은 "욕망, 광고, 소비의 문화사"인데, 큼지막하게 쓰인 한글 도서명 옆에 작고 붉은 타이포그라피로 원제명인 "Twenty Ads that Shook The World : The Century's Most Groundbreaking Advertisings And How It Changed Us All"이다. 우리 말로 번역해보자면 "세계를 놀라게 한 이십 편의 광고 - 20 세기 최고의 창조적인 광고, 그것은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켰나"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런데 영어 원제명은 모두 대문자로 표기되어 있지만, 맨 앞에 오는 글자만 조금씩 크게 표기되어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광고업계에서는 알파벳 타이포그라피를 사용할 때 모든 글자를 대문자로 표기하는 방법과 소문자로 표기하는 방법, 앞 글자만 대문자로 표기하고 따라오는 글자는 소문자로 표기하는 방법 중 어떤 표기 방식을 사용할 때 일반인들이 가장 쉽게 알아볼 수 있는가를 연구해왔다. 그 결과 앞글자만 대문자로 표기하고, 뒷글자는 소문자로 표기할 때 인지율이 가장 높다는 결론을 얻었다. 이 책의 표지에서 앞글자만을 다소 큰 폰트 크기를 이용한 까닭도 거기에 있다.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이렇듯 광고를 위한 심리적 기법에 말려든다.

3. 광고는 자본주의 꽃인가? - 20 세기의 창조
저자 제임스 트위첼은 저자 서문에 해당할 "0장" - 이 책은 모두 21장의 구성인데, 저자 서문을 0장으로 표기하고 있다 - 의 제목을 '예술인가, 쓰레기인가'로 뽑았다. 아마도 그것이 이 책 전체를 총괄할만한 저자의 의도이자 결론내릴 수 없는 결론일 것이다. 흔히들 광고를 자본주의의 꽃이라고 말한다. 광고가 자본주의의 꽃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면 우리는 먼저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묻지 않으면 안된다. 그 결과에 따라 광고는 예술 혹은 쓰레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20세기를 결코 자본주의의 시대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복잡다기한 20세기의 사건들을 이리 정리하고, 저리 정리하면서 20세기를 때로는 혁명의 시대로, 총력전의 시대로, 문명과 야만의 시대로, 사회주의의 시대로, 자본주의의 시대로 정의한다. 저자나 나 역시 이런 정의들에 동의하지만 동시에 그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함을 느꼈는지 저자는 20세기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그것은 "물질주의"와 "상업주의"이다.

우리의 마음 속에 전초기지를 구축해놓고 있는 문화를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기쁨은 두 배로 만들어주는 즐겁고 행복한 쌍둥이" 운운하는 추잉검 광고를 무심결에 흥얼거리면서 입냄새와 비듬과 물때를 걱정하면서, 서른일곱 가지나 되는 치약 중에서 한 가지를 고르기 위해 고민하면서, 커다란 꺽쇠가 그려진 운동화를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에 구입하면서 상업주의를 비판하기는 어렵다는 얘기다. 바로 이것이 핵심이다. 이런 것들은 물이고, 우리들은 물고기인 것이다. <본문 8쪽>


"물과 물고기"의 비유는 낯익다. 그것은 마오쩌뚱이 중국의 사회주의 혁명을 이끌며 혁명가와 인민 대중의 관계를 지칭하며 한 말이다. 광고인들 입장에서 보자면 자신들은 물고기이고, 소비자들은 물이겠지만, 소비자들 입장에서 보자면 광고의 홍수는 물이고, 자신들은 본의든 아니든 그 안에서 살고 있는 물고기이다. 이 비유에서 가장 확실한 것은 어느 경우이든 물고기는 물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이다.

광고를 들여다보면 상업주의의 종교적 뿌리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이 물건을 사면 구원받으리라. 그대는 오늘 휴식할 자격이 있도다. 당신, 당신, 당신은 모두 하나다. 우리는 당신을 염려하는 벗이다. 당신은 정말 운이 좋다. 우리가 보살핀다. 우리를 믿어라. 당장 사라." <본문 23쪽>


20세기를 규정하는 중요한 움직임 중 하나는 분명 사회주의였다. 많은 역사학자들이 20세기를 러시아 10월 혁명과 함께 출발해 지난 1991년 무렵의 소연방 해체가 역사적 맥락에서 종결되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역으로 지난 18세기 무렵 서구 유럽이 제국주의를 통해 축적한 자본을 통해 본격적으로 가동된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을 20세기의 중요한 역사적 본질로 평가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자본주의를 구성하고 있는 두 가지 중요한 축은 '물질주의와 상업주의'이며 이것이 가능하도록 한 토대에는 인간의 욕망이 잠재해 있다. 우리들은 이미 우리들의 욕망에 지배당하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몸에 일단 새겨진 안락함의 기억이 얼마나 질긴지 너무 잘 알고 있으며, 대부분은 그 기억에 맞서 싸울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20세기의 사람들은 기독교나, 이슬람교, 불교, 유교와 같은 종교적 가치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20세기의 인류는 이미 단일 종파, 단일 종교로 통합되었는데, 그 신의 이름은 바로 "물신(物神)"이다.



4. 빨간코 사슴 루돌프로부터 페미니즘에 이르기까지
- 팔 수 있는 모든 가치를 파는 광고

이 책은 모두 20편의 광고 이야기로 꾸며져 있다. 제1장 "야바위의 왕자 - 흥행의 천재 바넘"으로부터 제20장 "영웅 신화 - 나이키와 마이클 조던"에 이르기까지 20세기의 가장 창조적이었던 광고들이 과연 우리들에게 무엇이었는가를 묻고 있다. 1장에서 다루고 있는 바넘은 쇼비즈니스계의 천재였다. 그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팔았고, 제2장에 등장하는 댄 핑크햄은 아무런 효능도 없는 싸구려 물약을 만병통치약으로 팔았다. 우리가 흔히 위약(僞藥)이라고 알고 있는 플라시보(placebo)의 시초인 셈이다. 사람들은 그에게서 약효를 산 것이 아니라 광고를 샀다. 제3장 "페어스 비누"편에서는 사람들이 상류층 사람들과 같은 물건(비누)을 구매하고 소비함으로써 자신이 어떻게 상류층 사람들과 물질적 평등을 이루었다는 자기만족감에 빠져드는지를 말한다. 제5장 "리스터라인 구강청정제"는 한 광고인이 이전까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던 구취를(서양에서는 식사 중에 소리를 내며 먹는 것을 에티켓에 어긋난다고 여기지만, 동양에서는 맛있다는 표현이다. 그들은 남들 보는 앞에서 코 푸는 행위가 에티켓에 어긋난다고 생각지 않지만 우리는 이것을 예의없는 행위로 생각한다) 에티켓에 어긋나는 것으로 몰아부쳐 결국 사회의 분위기를 구취 자체가 문명인의 예의 범절에 어긋나는 것으로 강제했는지를 말한다. 구강청정제를 팔기 위해 구취는 문명세계에서 추방당해 마땅한 존재가 되었다.

제8장 "드비어스 다이아몬드"는 오늘날에도 즐겨 사용되는 대표적인 광고 문구를 만들어 냈다.
"다이아몬드는 영원하다 A Diamond is Forever." 드비어스사는 다이아몬드를 사랑의 맹세와 결부시킴으로써 탄소 덩어리에 불과한 다이아몬드를 보석의 최고봉으로 올려놓았다. 1866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대규모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되고, 근대적 채굴법이 이용되면서 다이아몬드 재고는 쌓여갔지만 다이아몬드는 여전히 비싼 보석이다. 그럼에도 다이아몬드는 대중화되었다. 그것은 다이아몬드 제국을 이루려는 드비어스가 만든 '영원불멸'이란 이미지 전략 덕택이었다. 그러나 이런 드비어스의 광고 전략 덕에 아프리카 시에라리온에서는 전인구의 3분지 1이 난민이 되었고, 4천여 명의 어린이, 민간인들의 팔다리가 반군에 의해 조직적으로 잘려 나갔다. 아름다운 순백의 신부의 손가락에 끼어진 다이아몬드 반지는 사실 아이들의 잘려나간 팔다리이다(보다 자세한 내용은 "총.균.쇠"와 "다이아몬드 잔혹사"를 참고하시라). 드비어스와 같은 다이아몬드 상인들은 다이아몬드 광산 채굴을 위해 광산을 장악한 반군에게 군비를 제공했고, 반군들은 다이아몬드를 팔아챙긴 돈으로 사람들을 죽였다.

오늘날 우리가 산타클로스하면 자동적으로 떠올리는 빨간 외투의 뚱뚱한 산타는 코카콜라의 광고 대행사에서 만들어낸 것이고, 빨간코 사슴 루돌프 역시 디즈니사가 만든 아기 사슴 밤비에 힌트를 얻은 광고대행사의 한 카피라이터가 만들어낸 창조물이다. 이렇듯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 그리고 추억이 되는 산타와 루돌프는 예술인가? 쓰레기인가? 우리는 해마다 발렌타인 데이니, 화이트데이니 해서 사랑하는 연인에게 사탕이나 초콜릿을 주며 사랑을 고백한다. 사람들은 이를 무대책으로 수용한다. 그 결과 캔디 나라의 왕자들인 제과 회사들은 한 해 매출액의 상당 부분을 이때 올린다. 미국의 경우엔 부활절 하루만 5억 달러의 매출을 올린다고 하니 이건 우리나라만의 현실은 아니다.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하고, 이런 날은 소비자들 스스로도 재미를 위해 만들어낸다. 가령 '빼빼로데이'처럼 말이다.

때때로 광고는 드러내기 보다는 스스로를 감추는 방식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제10장 "폭스바겐의 풍뎅이" 편을 보면 광고업계에서 잘 알려진 광고 카피 "Think small"이 어떻게 소비자들에게 먹혀들어갔는지, 무엇을 드러내고 무엇을 감추는지 말한다. 모두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안달할 때 폭스바겐은 스스로를 감춘다. 사람들은 호기심이 생겨 제 발로 성큼성큼 광고 안으로 들어온다. 사람들은 폭스바겐이 딱정벌레 비틀에 대해 공부하고, 이를 전파해준다. 그러나 이때 그들이 알고 있는 비틀에 대한 정보는 모두 긍정적인 것 뿐이다. 부정적인 내용은 결코 소개된 바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이외에도 말보로 담배와 같이 구체적인 상품으로부터 시작해서 '페미니즘'과 같이 우리가 긍정적인 가치로 인정하고 있는 생각이 어떻게 광고의 효과적인 도구로 이용당할 수 있는지를 밝히고 있다.

5. Protect Me From What I want

개념미술(conceptual art)가인 제니 홀저(Jenny Holzer)는 전광판에 "나의 욕망으로부터 날 좀 지켜줘"란 말을 했는데, 이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었다. 제임스 트위첼은 "예술인가, 쓰레기인가"의 말미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인정할 것이 하나 더 있다. 비록 우리가 광고에 대해 사정없이 비난을 퍼붓고는 있지만, 광고가 우리를 타락시킨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광고는 우리 자신이다. 광고가 인위적인 욕망을 만들어낸다는 생각은 역사와 인간 본성에 대한 씁쓸한 무지의 소치며, 옛날옛적에 순수하게 자연적인 욕구를 지닌 고상한 야만인들의 평화로운 시대가 있었으리라는 막연하고 낭만적인 추측의 소치다. 식량과 피난처가 충족된 이후로, 인간의 욕구는 언제나 문화적이었지 자연적이지 않았다. 그 같은 욕구와 갈망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만족시켜주는 모종의 다른 체제가 도래하기 전까지는, 상업주의는 - 또한 그에 수반된 문화는 - 끊임없이 전진하여 번성을 이룩할 뿐 아니라 승리를 쟁취할 것이다.

우리는 영화 <하이랜더>를 알고 있다. 필립 아리에스(Philippe Aries)는 그의 명저『죽음의 역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은 수천 년 동안 자신의 죽음과, 그 죽음의 국면을 지배하는 주권자로 존재했다. 인간은 오늘날 그런 존재의 모습을 중단했다. 경위는 바로 다음과 같다. 먼저, 당연한 일이지만 인간은 자신이 죽게 될 것이라는 사실 ― 스스로 죽음을 느끼든지, 아니면 다른 사람이 그에게 죽음을 알려주어야 하든지 간에 ― 을 알고 있었다.… 중략 … 인간이 자신의 죽음이 가까이 와 있다는 것을 느낀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에는 사고나 전투의 경우에서조차도 급작스런 죽음은 드물었다. 급사(急死)는 인간에게 회한의 시간을 허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죽음을 박탈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단히 두려운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따라서 약간 위중한 병도 거의 치명적이었던 시대에 죽음은 항상 예고되는 것이었다."


인간의 욕망은 단지 좀더 많은 것을 소비하고자 하는 것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 인간이 지닌 욕망의 근본적인 뿌리는 어쩌면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가 죽음을 초극하고자 하는 강한 욕망은 종종 무한을 향한 욕망, 불멸을 향한 욕망과 끊임없는 상승작용을 일으킨다. 영화 <하이랜더> 속의 코너 맥클라우드는 불멸불사의 몸을 지녔다. 그는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제 수명을 다하여 사라지지만 죽지 못하고 계속해서 살아가야 한다. 그는 최후의 일인이 남을 때까지 그와 같은 불멸불사의 몸을 지닌 전사들과 무한의 쟁투를 벌여야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수레 바퀴는 지구상에서 최후의 자원이 소모될 때까지 지속될까?

극중의 '코너 맥클라우드'는 최후의 승자로서 온전한 생명 - '유한한 생명', 자신을 기억하는 대상들과 함께 소멸할 수 있는 죽음, '낯익은 죽음'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 을 상으로 받았지만 우리는 연이어 김 빠진 속편이 제작되었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다. 자본주의라는 욕망의 무한 추구 시스템은 결국 욕망의 폭주를 의미하고, 400년을 넘게 살아온 불사신에게 새로운 투쟁을 강요한다. 욕망의 폭주는 결국 '지구'라는 인류 공동체의 터전을 파괴하는 길로 나아가고 있다. '나의 욕망으로부터 날 좀 지켜달라(Protect Me From What I Want)'는 제니 홀저의 작품을 보면서 <하이랜더>가 떠오르는 까닭, 우리는 우리의 파괴적인 욕망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렇다면 처음에 던졌던 질문을 다시 한 번 확인해보자? 광고는 21세기에 혹은 22세기에 예술이 될 수 있을까?

예술엔 분명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것에 대항하는 인간의 순수한 의지를 반영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예술은 상업주의와 결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가장 자본적인 의사 표현 방식인 광고는 예술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은 물론 미래의 언젠가 발생할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는 살 수 없듯 예술이 광고의 차원을 떨어지든, 광고가 예술의 차원으로 승화되든 이 둘이 극적으로 결합하는 순간 인류의 삶 역시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진정한 본래의 의미로서 예술이 광고가 되거나 아니면 광고가 예술이 되는 순간, 인류는 스스로의 욕망에 굴복하거나 욕망을 지구의 다른 인류와 함께 살아가는 방법으로 순치시킨 결과일 것이다. 분명 전자는 파멸일 것이고, 후자는 공존이 될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 아래 살아가는 인간은 그가 어떤 지위, 어떤 위치에 있든 스스로의 욕망을 절제하지 않고서는 결단코 행복해질 수 없다. 자, 광고가 아니라 당신의 욕망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내길 바란다. 과연.... 가능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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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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