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 : 사형의 기원과 역사, 그 희생자들 - 카를 브루노 레더 (지은이) | 이상혁 (옮긴이) | 하서출판사(2003)

끔찍한 연쇄살인마의 얼굴 - 인류(人類)의 자화상

나는 이 책의 구판을 가지고 있는데, 목차와 다른 이들의 리뷰를 보니 내용에는 변함이 없는 듯 하다. 최근 나는 사형과 사형제도에 대한 두 권의 책을 연이어 읽었다. 사실 이 책은 스콧 터로의 책 "극단의 형벌"을 읽기 위한 용도로 다시 읽은 것이다. 스콧 터로의 책이 보다 최근의 사형과 제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면 "카를 브루노 레더 (Karl Bruno Leder)"의 이 책은 부제 '사형의 기원과 역사, 그 희생자들' 이 알려주듯 사형과 사형제도의 기원으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모습을 역사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사형(死刑, Todesstrafe)이란 단어 자체로 이미 '제(制) 혹은 제도(制度)' 와 결부된다. 사형의 출발 자체가 국가나 사회 구조의 체계 및 형태에 따라 각기 다양한 목적과 형태를 띠고 실시되어 왔기 때문이다. 사형이 국가나 사회구조에 의한 것이 아닐 경우, 우리는 그것을 살인 혹은 살해라고 부른다. 영어로 살인 혹은 살해를 가리키는 단어인 'homicide, murder, man- slaughter' 는 각기 '살의의 유무' 로 구분되는데 사전에 살의가 있었던 살해 행위는 'murder' 로 사전에 모의가 없었던 살해 행위는 'manslaughter' 이 두 단어를 포괄하여 지칭하는 단어가  'homicide'이다. (이외에도 살해를 지칭하는 말은 'kill, slay, slaughter, assassinate' 등 그 양태와 양상에 따라 다르게 표현된다.) 과연 '제도로서의 살해' 즉 '사형'은 'murder'인가? 'manslaughter'인가? 또 그런 규정 뒤에 오는 사형에 대한 판단은 어떤 것이 될까?

과연 우리는 사람을 죽이는 방법을 몇 가지나 알고 있을까? 이 책은 사람을 살해하는 온갖 기술들을 나열하고 있는 듯 보인다. 사람 하나를 죽이기 위해 인류는 그토록 오랜 시간을 들여 연구해온 것이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한겨레21"에 연재하는 '역사이야기'칼럼 "우리는 무덤 위에 서 있다"를 통해 여러가지 살해 방법을 나열한 바 있는데, 그 도움을 얻어보자.

참으로 죽이는 방법도 가지가지였다. 때려죽이는 타살(打殺), 구살(毆殺), 주먹으로 쳐죽이는 박살(搏殺), 몽둥이로 때려죽이는 박살(撲殺), 격살(擊殺), 쏘아죽이는 사살(射殺), 총살(銃殺), 포살(砲殺), 칼로 찌르거나 베어죽이는 자살(刺殺), 찢어죽이는 육살(戮殺), 육시(戮屍), 생매장해 죽이는 갱살(坑殺), 바퀴로 치어죽이는 역살(轢殺), 단근질해 죽이는 낙살(烙殺), 밟아죽이는 답살(踏殺), 깔아죽이는 압살(壓殺), 독을 먹여죽이는 독살(毒殺), 껍데기를 벗겨 죽이는 박살(剝殺), 끓는 물에 삶아죽이는 팽살(烹殺), 불에 태워죽이는 분살(焚殺), 소살(燒殺), 베어죽이는 참살(斬殺), 여기서도 머리를 베어죽이는 참수(斬首), 허리를 끊어죽이는 요참(腰斬)이 있다. 또 물에 빠뜨려 죽이는 익살(溺殺), 수장(水葬), 잡아죽이는 포살(捕殺), 굶겨죽이는 아살(餓殺), 목졸라 죽이는 교살(絞殺), 액살(縊殺), 채찍질하여 때려죽이는 추살(추殺), 철퇴로 쳐죽이는 추살(鎚殺), 몽둥이로 쳐죽이는 추살(椎殺), 발로 차죽이는 축살(蹴殺), 높은 데서 내던져 죽이는 척살(擲殺), 곤장으로 때려죽이는 장살(杖殺), 폭탄을 터뜨려 죽이는 폭살(爆殺), 기둥에 묶고 창으로 찔러죽이는 책살(책殺), 꾀어내어 죽이는 유살(誘殺), 죽일 사람이 없을 때 가족 등 다른 사람을 대신 죽이는 대살(代殺) 등 인류의 역사에 있었던 사람 죽이는 방법이 모두 동원된 것이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의 현실이었다.

저자는 인류 사회가 제도로서 실시한 사형의 기원은 종교적인 '인신공양'과 종족 살해에 대한 '피의 복수'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제도로서의 살해 행위인 사형은 인간 사회에서 가장 오래된 형벌이었다. 그것은 인류가 최초로 만든 법률이랄 수 있는 거의 모든 고대의 법에 드러나는 '받은 그대로를 돌려준다'는 인과응보 원칙과 함께 공동체가 느끼는 죄책감, 불만, 공포 등을 발산하는 한 형태로서 존재해 왔다. 고대 바빌로니아 제 1 왕조 제 6 대 왕 함무라비(Hammurabi)왕이 제정한 함무라비 법전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문법(成文法)이다. 이 성문법은 또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이라는 복수주의(復讐主義) 법률로도 유명하다.즉, 타인의 목숨을 빼앗은 자는 그 자의 목숨을 빼앗는다는 것인데, 다른 말로는 동해보복형(同害報復刑, 탈리오의 법칙)이라고 부른다. 이외에도 사형에는 자연재해나 기타등등의 사유로 공동체의 위기 의식이 고조될 때 이를 해소하기 위한 희생양으로서 제거되는 인신 공양의 형태가 남아 있다.

우습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세계 101개 국가에 사형제도가 존치되고 있는 이유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강력 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사형제도 존치론이 목소리를 얻는 까닭을 살펴보면 하나는 잔인한 범죄 행위가 주는 충격과 남겨진 유가족의 보복심리(동해보복형)에 기인하는 측면과 더불어 강력범죄로 인해 사회가 받는 스트레스(공포, 불안심리)를 사형이라는 제도의 존속으로 보상받고자 하는 심리 때문으로 이는 과거 고대 사회의 인신공양이 주는 심리적 안정, 사회적 스트레스의 발산이란 측면에서 흡사하다.

계몽주의 시대를 거치며 사회에 의한 동일한 보복이라는 사형제도의 비윤리적인 측면이 강조되면서 독일, 프랑스 등 유럽을 중심으로 한 34개국이 모든 범죄에 대해 사형을 폐지하고 있으며, 전범과 군범죄를 제외한 일반 점죄에 대하여 사형을 폐지한 국가는 스위스와 영국을 비롯한 18개 국이 있다. 이외 법률로는 존속하지만 실제로는 사형을 집행하지 않는 국가로 벨기에와 그리스 등 26개 국이 있다. 북한을 비롯한 소위 불량국가들의 인권 상황을 질책하고 있는 세계 최고(?)의 인권 수호국을 자임하는 미국의 사형제도는 1972년 잠시 폐제되었다가 4년 뒤인 1976년 부활되어 2001년 현재까지 38개 주에서 사형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근대사법제도가 출범한 후 실시된 첫번째 사형 선고는1895년 3월 25일(양력 4월 19일) 재판소구성법이 공포되고 4일 뒤에 법무아문 권설재판소에서 녹두장군 전봉준(全琫準)에게 내린 교수형 선고가 최초이다. 1948년 이후 사형당한 사람은 모두 902명이다.

이 책은 고대와 중세, 근대를 거치면서 사형의 여러 모습들을 보여준다. 아마도 저자가 강하게 주장하고 싶었던 말은 사형제도를 폐지하자는 주장인 듯 싶다. 가장 이성적인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할 사법제도가 전혀 이성적이지 않은 이유를 들어 사형이라는 비이성적인 제도를 이성을 가장한 제도로 존치시키는 이유에 대해 우리는 사형제도 뒤에 숨겨진 국가, 사회의 집단 의식이 어느 정도의 단계에 이르렀는지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사형제도가 사회의 안전판 구실을 한다고 믿는 집단 의식은 국가보안법이 국가안보의 중요한 몫을 담당하고 있다는 집단 의식으로 연계된다. 그러나 사형제도가 범죄를 예방할 수 없고, 범죄율을 저하시킬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와 함께 더욱더 잘 알려진 사실은 사형이 빈번하게 실시된 시대일수록 독재자와 독재권력이 이를 그들의 목적에 맞게 적절하게 남용해 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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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칼 마르크스 그의 생애와 시대 - 이사야 벌린 | 안규남 옮김 | 미다스북스 | 2001


"모든 것을 의심해 보라(De omnibus dubitandum)."


이 말은 칼 마르크스가 가장 좋아했던 좌우명이라고 한다. 모든 것을 의심해보고 이를 다시 재정립했던 사상가 칼 마르크스. 이와 같은 인물에 대해 일대기도 아니고, 평전을 쓴다는 일을 그것도 불과 28세의 나이로 해냈다면, 더군다나 그 책이 60여년이 흐르는 동안 여전히 마르크스에 대한 가장 중요한 평전의 지위를 잃지 않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을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미덕이자 피할 수 없는 난제는 마르크스에 대한 입문자용으로 읽기에는 다소 녹록치 않은 난이도를 지녔다는 점이다.

 

같은 해(2001)에 출간된 프랜시스 원의 『마르크스 평전(푸른숲)』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보다 나은 선택일 수 있다. 물론 누군가 내게 마르크스에 대한 입문서 내지 그의 평전을 추천해달라면 나는 별 고민 없이 우선적으로 이사야 벌린(Isaiah Berlin)의 이 책과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쓴 마르크스의 사상(북막스, 2000)』 - 이 책은 책갈피 출판사에서 나온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상』과 동일한 책이다 - 을 추천하겠다. 물론 캘리니코스의 책은 전체적으로 보자면 마르크스의 생애는 부분적으로 다루는 대신 그의 사상을 개관하는데 치중하는 편이고, 프랜시스 원의 경우엔 마르크스의 생애사에 집중한 편이므로 나름대로 일장일단이 있다고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선 명확한 구분 없이 혼용되는 편이긴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건 평전은 연대기와 전기와 명확하게 구분될 필요가 있다. 평전과 전기, 혹은 연대기를 구분해야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가장 큰 차이점은 평전은 그 용어 자체가 잘 설명해주듯 작가의 비평(批評)적 관점이 삽입된다는 것에 있다. 그렇기에 당대의 뛰어난 평전 작가들은 이미 그들 자신이 뛰어난 비평가이자 역사가이고 저술가였다. 예를 들어 트로츠키와 스탈린의 평전을 저술했던 아이작 도이처, 마리 앙트와네트와 프랑스 대혁명에 대한 뛰어난 글을 남겼던(그 외에도 많지만) 슈테판 츠바이크, 바쿠닌에 대한 평전을 저술했던 E.H. 카 등은 이미 그들 자신이 뛰어난 문장가이자 사상가, 역사가들이었다. 우리는 이들의 평전을 통해 당대의 사회와 시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위인들의 대화를 엿들을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사야 벌린의 마르크스 평전을 읽음으로써 위대한 두 사상가의 대화에 관찰자이자, 적극적인 독해자로서 참가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이 책은 사상사가(思想史家)라는 저자 이사야 벌린의 위치가 잘 드러나고 있다. 그런 까닭에 마르크스의 사상과 이론에 대해 사전 지식이 있는 사람이거나 혹은 이사야 벌린은 마르크스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을까를 견주고, 궁리해가며 읽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그쪽이 훨씬 더 유익하고 재미있는 독서 체험이 될 것이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대중적'이라는 평가가 지탄받을 무엇이 아니듯, 정당한 까닭으로 보다 ’지적인' 수준을 요구하는 독서가 지탄받을 일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마치 칼 마르크스가 노동자를 위한 투쟁을 이야기하면서도 정작 그 자신은 부르주아적 취향을 지녔다고 공격당하는 것과 흡사해 보이는데, 어떤 의미에서건 마르크스는 당대의 교양을 두루 습득한 인물이었던 것에는 틀림없지만, 이것을 당대의 속물적 과시에 연연해하는(이는 또한 마르크스가 평생을 두고 혐오했던 것이기도 하다) 부르주아적 취향과 혼돈할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 교양을 부르주아만의 전유물로 생각하는 경향은 그때나 지금이나 냉소적인(좌파 혹은 노동자는 우아하게 살고 싶어하지 않는다거나 교양을 경시한다는) 착시 현상이다.

 

물론 그럼에도 이 책이 좀 더 대중적인 난이도를 지니지 못한 점, 좀 더 풍성한 내용으로 꾸며지지 못한 점은 다소 아쉬움으로 남는다. 벌린을 위해 약간의 변명을 하자면 이 평전은 그가 28세 때 집필한 것이고, 애초에 그가 집필했던 원고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원고의 분량 보다 많았다.(물론 그렇다고 해서 현재의 평전보다 쉬운 글이 나왔을 것 같지는 않지만) 이 책의 말미에 실린 앨런 라이언은 이사야 벌린의 책이 처음 출간될 당시 “영어권에서는 이런 종류의 주제에 관한 진지한 학문적 연구가 거의 없었다.”고 말한다. 위와 같은 고백을 논외로 하더라도 마르크스에 대한 그간의 연구는 그가 사망했을 무렵, 영어권에서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으며, 그의 사후 러시아혁명을 통해 수립된 이른바 공식적 마르크스주의에서 바라보는 마르크스, 세계대전과 헝가리 사태를 겪으며 재발견되기 시작한 인간적(청년) 마르크스, 다시 루이 알튀세르에 의한 구조적 마르크스에 이르는 여러 연구 방향과 해석에 따라 각기 다른 얼굴의 마르크스가 출현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와 같은 해석과 관점의 차이, 시대의 변천에도 불구하고 이사야 벌린의 마르크스의 평전이 여전히 생명력을 잃지 않는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는 분명 마르크스의 사상 그 자체에서 발견되어야 하겠지만,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은 이사야 벌린의 뛰어난 지적 통찰과 한 인물의 사상과 지적인 흐름을 더 이상 요약하기 어려울 만큼 생생하게 살려내고 있다는 점에 있다. 이사야 벌린은 마르크스를 계몽주의 산물이자 계몽주의에 대한 낭만주의적 반동의 산물로 해석하면서 제1장 서론에서 "모든 것을 의심해 보라(De omnibus dubitandum)."던 마르크스의 모토에 지극히 합당한 인물평을 적고 있다.

 

마르크스는 선천적으로 강하고 능동적이며 실제적인 정신의 소유자였다. 그는 불의에 대한 감각이 남달랐으며 쉽게 상처를 받거나 감상에 빠지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는 부르주아지의 우둔함은 물론 지식인들의 자기만족적인 미사여구와 주정주의도 혐오했다. 그는 부르주아지를 위선적인 데다가 자기 기만적이며 부와 사회적 지위를 얻는 데 골몰해서 당대의 특징적인 사회적 현실을 전혀 보지 못하는 사람들로 평가했고, 지식인은 현실과 동떨어진데다가 진위 여부에 관계없이 하나같이 사람들을 자극하는 데 불과한 잡담이나 일삼는 사람들로 판단했다. <본문 20-21쪽>

 

이사야 벌린의 문장을 읽노라면 그 자신이 마르크스 못지않게 불친절한 사람이면서, 그가 마르크스에 대해 묘사하고 있듯 천재적인 발상에 비해 더딘 문장에 대해 조급해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하게 만든다.

 

생존을 위한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내부의 혼란과 궁극적 붕괴를 향해 막다른 골목으로 치닫는 사회는 반동적이다. 물론 어떤 사회 체제라도 붕괴에 직면하면 구성원들에게 비합리적으로 현체제의 궁극적 안정에 대한 믿음을 심어줌으로써 자신의 실상을 보여주는 징후들을 스스로 감추려 들게 마련이다. 그러나 어떤 사회체제라도 일단 역사의 판결을 받으면 필연적으로 사라질 수밖에 없다.
어떤 것이 구원될 수 없는 데도 구원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우주의 합리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인류는 바로 이러한 고통스러운 투쟁을 거쳐, 그리고 이러한 고통스러운 투쟁에 의해 자신의 힘을 완전히 실현하고자 분투하고 있다. <본문 32-33쪽>

 

위의 문장을 읽으며 이사야 벌린이 바라보는 마르크스의 얼굴이 입체적으로 잡히기 시작했다. 그는 마르크스 못지않게 신랄하고, 핵심으로 곧장 진입해가는(물론 두 사람 모두 불친절하다는 공통점을 지녔으나) 문장을 지녔다. 그렇기에 그는 마르크스의 학설에 대해 "(마르크스의)학설은 적이 보유하고 있는 모든 기지의 무기에 대처할 수단을 갖추고 있어서 직접적인 공격으로는 함락할 수 없는 일종의 거대한 구조물"과도 같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이사야 벌린이 쓴 글 가운데 우리에게도 비교적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우화를 바탕으로 세상 사람들을 고슴도치와 여우로 비교한 글이다. 그는 「고슴도치와 여우」란 에세이에서 "여우는 많은 것을 알지만, 고슴도치는 한 가지 큰 것을 안다."고 말한다. 여우는 영리하고, 교활한 짐승이기에 고슴도치를 기습할 많은 전략들을 무수히 짜낸다. 그리고 고슴도치를 습격할 수 있는 적절한 타이밍을 노려 고슴도치를 덮친다. 그에 비해 고슴도치는 단지 송곳처럼 날카로운 가시를 방패삼아 숲 속 한적한 오솔길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닐 뿐이다. 기회를 틈타 여우는 잽싸게 고슴도치를 덮친다. 그러나 위험을 느낀 고슴도치는 제 몸을 잔뜩 웅크리고 송곳 같은 가시를 곤두세운다. 여우는 고슴도치의 날카로운 가시를 어찌하지 못해 결국 다음 기회를 노리며 물러나 어떻게 하면 고슴도치를 공략할 수 있을까 새로운 전략 세우기에 골몰한다. 여우와 고슴도치의 지혜를 따질 때, 우리는 당연히 여우의 지혜가 뛰어날 것으로 생각하지만 번번이 싸움에서 이기는 건 고슴도치다.

 

이사야 벌린은 이 우화를 통해 사람들을 두 가지 그룹, 여우와 고슴도치로 나누었는데, 여우는 여러 가지 목적을 동시에 추구하며 세상의 그 복잡한 면면들을 두루 살피고, 그런 까닭에 자신의 생각을 하나의 종합적인 개념이나 통일된 비전으로 통합해내기 보다는 모순도 한데 아우르는 편이다. 그에 비해 고슴도치는 세상이 아무리 복잡해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구상으로 종합해내고 통합해낸다. 그에 따르면 이 고슴도치들이 바로 프로이트(무의식), 다윈(자연도태), 마크르스(계급투쟁) 등이다. 그렇다고 이사야 벌린이 절대적으로 고슴도치들의 손을 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벌린이 여우에 속하는 인물로 거론하는 이(아리스토텔레스, 몽테뉴, 셰익스피어, 몰리에르, 괴테, 발자크 등)들의 면면이 또한 그렇게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책을 읽을 때, 특히나 어떤 인물에 대한 평전을 읽을 때 다뤄지는 인물 못지않게 그를 다루고 있는 인물(저자)에 대해서도 주목해야 한다. '이사야'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사야 벌린은 유대계로 구소련 영토였던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에서 부유한 목재상의 아들로 태어나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이 리가에 진군하자 부모를 따라 러시아로 이주, 그곳에서 볼셰비키 혁명을 경험하고, 11세 무렵 영국으로 망명한다. 유대인에겐 특히나 격동의 시대였을 20세기 초엽의 유럽, 라트비아라는 슬라브 문화의 영향 아래 놓인 지역 출신의 인물이 냉전 시대 영국에서 주로 활동했다는 것, 물론 당시 독일의 박해를 피해 영국으로 망명한 유대계 지식인들과 미국인으로 망명한 유대계 지식인들 사이에는 일정한 차이가 있지만 당시 유대계 출신 지식인들의 일반적인 성향(탈민족주의적 세계주의)을 그 역시 어느 정도 공유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전쟁 기간 중 영국 정보부에서 근무하며 모스크바에서 수개월간 머물며 당대의 소련 지식인들과 교유했고(그 가운데 안나 아흐마또바와는 연인 관계였다고 한다), 전후에는 사상사 연구에 집중하면서 그는 자유주의자로서의 면모뿐만 아니라 러시아 문화에 대한 애정과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그 자신의 삶의 역정이 한 시대의 다양한 면모를 반영하고 있는 이사야 벌린, 그 자신은 마르크스주의자라거나 정치적 좌파로 구분될 수 없음에도 (만약 그런 분류가 가능하다면 우리는 그를 우리 사회에 산재해있는 속류 우파들과 다른 진정한 의미의 ‘리버테리언’이었다고 생각한다), 칼 마르크스에 대한 균형감각과 사상사적 통찰을 통해 우리에게 마르크스와의 격조 있는 지적 대화에 동참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 이사야 벌린의 이 책은 1982년 신복룡 선생의 번역으로 평민사에서 출간된 적이 있다. 다만 이 책을 선택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두 가지를 고민해봐야 한다. 첫째는 이 책이 마르크스와 그의 사상에 대한 약간의 사전 지식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오탈자가 종종 눈에 띄고, 요사이 유행하는 작은 판형(이 책은 110X190)이다 보니 펼쳐놓고 밑줄 쳐가며 읽는 습관이 있거나, 좀 오랫동안 생각하며 읽기에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다. 일부러 오탈자에 신경 쓰며 읽는 편은 아니지만 이왕 눈에 띈 오탈자가 몇 개 있어 이야기해보면  57쪽 "유대인 출신인 시인하이네"에서 시인과 하이네는 띄어 써야 하고, 276쪽의 "마르스크"는 "마르크스"로, 451쪽의 사진 캡션에 들어간 "리프크네이트"는 "리프크네히트"의 오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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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지구화의 위기와 녹색희망 


『지구화, 되돌아보기와 넘어서기』, 조명래 지음, 환경과생명, 2009





위기의 진화((鎭火)? 더 큰 위기로의 진화(進化) 

1929년 미국의 증시 폭락으로 시작된 경제대공황은 인류에게 두 가지 교훈을 남겼다. 첫째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시장 균형이 유지할 것이라는 자유방임적 자본주의는 정부(공동체)가 경계를 정해 확실히 통제하지 않는다면 스스로의 탐욕으로 인해 무력화되고 자기 파괴적인 존재가 될 것이라는 점이고, 둘째는 경제대공황 같은 세계적인 위기가 닥쳤을 때 초국가적인 대책이 아닌 개별 국가단위의 생존자구책은 도리어 위기를 고조시킬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경제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을 경험한 세계는 전승국을 중심으로 국가가 시장에 개입한다는 수정자본주의(케인스주의)를 정책을 선택했고, 전 지구적 경제를 위한 새로운 규범으로 ‘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IMF)’,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을 맺는다.


신자유주의는 영국의 대처 총리와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무한한 부의 축적을 열망하는 자본의 동학은 케인스주의 국가들의 성장이 둔화되고, 개발도상국들의 국가주도 계획주의가 성장의 한계에 봉착하면서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신자유주의는 자본의 효과적 증식과 성장을 위한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기 시작했고, 성장의 한계, 경제위기는 모두 정부의 잘못된 정책, 불필요한 간섭과 규제, 과도한 사회복지가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1980년대 말 현실사회주의가 붕괴되자 마거릿 대처는 신자유주의 이외에 더 이상 “대안은 없다(There is no alternaitive)”며 신자유주의의 전면적인 승리를 선언했다. 그 사이 대공황이 남겨주었던 교훈은 저 멀리 사라져버렸다.


또 다시 미국발 금융위기로 시작된 경제위기는 세계를 하나로 연결한 초고속 인터넷망에 번진 바이러스처럼 순식간에 세계의 경제위기로 번졌다. 냉전체제 해체 이후 꾸준히 추진되어왔던 신자유주의 지구화의 결과였다. 금융경제를 넘어 세계 각국의 실물경제를 파탄 상황에 몰아넣은 위기의 원인을 두고, 한국 사회의 진보진영은 신자유주의 체제의 실패로, 보수 진영은 정치제도의 실패로 규정하고 있다. 과연 현재의 위기는 진화(鎭火)될 것인가? 아니면 더욱더 큰 위기로 진화(進化)해나갈 것인가? 지금의 위기를 불러들인 근본적인 위기는 무엇인가?


발전국가, 사회국가, 경쟁국가

조명래 교수는 지구화의 한국적 방식이거나 호명이라 할 만한 ‘세계화’가 이제 막 시작될 무렵이었던 1994년부터 지구화의 문제에 천착해왔다. 『지구화, 되돌아보기와 넘어서기』는 지구화의 전개 과정에서 드러난 다양한 현상들, 특히 사회과학도로서 계몽주의 이래 지속되어온 근대적 현상인 ‘국민국가’ 중심 체제가 전복되면서 삶의 원초적 불안정성이 극대화되는 신자유주의적 현실에 주목한 결과물이다.


제1부 「지구화 시대의 공간과 환경」에서는 전 지구적 공간과 환경을 매개로 전개되는 지구화의 다양한 양상들을 살피고, 제2부 「지구화와 한국 사회의 현주소」에서는 지구화의 영향으로 한국 사회가 경험하고 있는 변화의 구체적인 양상과 결과에 주목하고 있다. 마지막 제3부 「지구화 시대를 넘어서기」에서는 또 다시 우리 앞에 닥친 세계 경제 위기의 원인인 신자유주의 지구화를 넘어설 수 있는 대안과 삶의 가능성을 짚어보고 있다. 그는 공동체와 생태계의 생존을 위협하고, 끊임없이 불안정하게 만드는 신자유주의 지구화라는 병증의 현상에만 집착하지 않고, 그 이면에 드리워진 근대적 삶의 양식까지 파헤치는 근원적인 해부를 마치 내과 수술을 집도하는 의사처럼 치밀하게 파고들었다.


그는 우선 신자유주의 지구화라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공간과 환경의 구체적인 장으로서 국민국가의 변화양상에 주목한다. 근대적 패러다임의 산물인 국민국가모델, 발전국가와 사회국가라는 기존의 모델에서 신자유주의 지구화에 따른 국가 재조직화의 결과물로 출현한 경쟁국가 체제의 등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매뉴얼 월러스타인(Immanual Wallerstein)은 “자본주의는 시작부터 세계경제적인 사건이었으며 민족국가적인 사건이 아니었다. 자본은 자신의 열망이 민족의 경계로 한정되도록 방관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자본주의의 출현은 처음부터 세계질서의 근본적인 변화를 예고하고 있었으며 국가들과 사회들 사이에서 처음으로 진정한 전 지구적인 상호연결을 시도한 세계체제의 등장이라는 것이다. 새로운 세계경제 체계는 무한한 부의 축적 과정에 기반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계경제는 주어진 어떠한 정치구조의 경계도 초월하는 경제 단위였다.


서구의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이 자본과 노동의 계급적 합의를 바탕으로 시장에 대한 국가의 전면적인 개입을 통해 국민들의 사회적 삶(복지)을 책임지는 사회국가(social state)의 형태였다면,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여러 국가들은 국가가 정책적으로 주도하는 저임금 노동집약형 산업을 통한 발전국가(developmental state)였다. 오일달러를 통한 북반부의 차관이 아프리카와 라틴 아메리카 같은 저개발 국가들에서 권력자 개인의 착복 수단으로 망실된 반면 비교적 건전한 국가엘리트들이 주도한 아시아의 개발도상국들은 ‘수출주의 축적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국가가 조정 역할을 확대하고 시민사회의 조건을 결정하는데 깊숙이 개입할수록 국가는 자본과 노동 사이에서 더욱 격렬한 투쟁의 장이 되었다. 국가는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서서히 시민사회의 이해관계와 반목하기 시작했다. 국가지배자와 국가요원들은 자신이 선택한 정책을 추구하고 집행하기 위해 자금을 조달해야 했다. 신흥독립국이자 개발도상국들의 국가형성기 동안엔 유력한 정치집단과 경제집단 사이에 이해관계의 동맹이 성립했지만, 그 동맹은 내부적 갈등을 미봉한 체제였다. 새로운 자본가계급은 정치적 간섭으로부터 경제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 봉건적 특권의 잔재에 대해 대항했을 뿐만 아니라 국가와 경제를 점진적으로 분리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신흥 계급은 국가가 조정 역할을 확대하고 경제에 대해 간섭함으로써 생기는 위험부담, 무역이나 사업에 대한 규제에 대한 저항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신흥 계급은 국가의 방향설정에 개입하여 국가의 재구조화를 시도했다. 지구화로 인해 생산 활동이 초국가적으로 전개되고, 금융거래의 지구적 통합이 가속화되면서 국민국가는 국민경제의 통합적 조절자로서 거시 경제 조절 기능이 무력화되었다. 국가주도의 경제성장을 추구해온 아시아 각국들은 외환위기라는 자본의 지구화 앞에 무력했고, 외환위기는 새로운 세계 경제 질서로의 편입을 순조롭게 하기 위한 수단이 되었다. 외환위기 이후 제시된 IMF의 정책들은 국가역할의 재조직화를 의미했다. 1997년 IMF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발전국가 모델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고, 기업과 시장을 통제할 수단을 잃은 사회는 조절력을 상실한 채 지구적 자본의 운동에 따라 끌려 다닐 수밖에 없게 되었다.


지구화 시대 국가들은 생산 및 유통의 모든 부문에서 자국 경제의 지구적인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 자신의 역할을 집중시킴에 따라 대부분 ‘경쟁국가(competition state)’로 전환하고 있다. 다시 말해 지구적 경쟁력의 동학을 중심으로 국가의 역할이 설정되고 특화되는 ‘경쟁국가’는 지구화 시대 국가 역할의 새로운 모델이 되고 있다. 전통적인 국민국가가 국민적 합의나 명분을 바탕으로 국민경제의 안정적 성장과 발전을 도모함과 더불어 국민적 헤게모니 하에서 국민 대중을 통합하는 것을 자신의 역할로 설정했다면, 경쟁 국가는 국민경제의 국제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국제화․세계화되는 자본 운동 논리에 국가 경영의 방향을 맞춘다. 따라서 경쟁 국가 하에서 조절은 고용증대, 수요 관리, 분배 등과 같은 국민경제의 재생산 부문보다 신기술․신상품․신생산 체제 개발, 해외 직접 투자, 금융 거래 자유화 등과 같은 부분을 우선한다. <본문 40쪽>



지구화 시대를 넘어선 초록정치의 가능성

조명래 교수는 현재의 위기를 초래한 ‘고삐 풀린 자본주의’의 표면은 지구화이지만 내부는 신자유주의가 채우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현재의 위기를 불러온 신자유주의 지구화의 누적효과는 “전략적인 결정의 장에서 사회의 공익성이나 시민성을 보장하는 국가의 역량을 잠식”하는 데서 절정을 이룬다고 지적한다. 근대적 국민국가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한 진보진영은 신자유주의 지구화가 국민국가의 약화, 기능을 마비시키는 형태로 나타났기에 국민국가의 기력을 다시 회복시키고 강화해야 한다는 반동적인 딜레마에 빠졌다.


그러나 조명래 교수는 ‘국민국가의 덫’에 빠져서는 “초국민화 ․ 탈국가화를 수반하는 지구화의 힘에 효과적으로 대항”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신자유주의 지구화의 근본 원인에 대한 적절한 진단, 다시 말해 발전국가 ․ 사회국가 모델의 경제적 토대를 이루었던 포드주의 성장체제, 산업자본주의가 처한 위기를 반복하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무한한 축적 과정을 추구하는 자본의 근본적인 추동력과 자본주의 체제가 만들어낸 소비중심의 근대적 삶의 패러다임에 대한 본질적인 고민 없이는 어떠한 대안도 만들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근대 국민국가 체제를 해체하고 재구조화하면서 진행되었던 현재의 신자유주의 지구화가 촉발시킨 위기는 결국 특정한 성장체제의 종말이다. 문제는 이것이 다시 임금과 연동되는 포드주의 성장체제로의 회귀, 국민국가의 기능회복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이다. 현재의 위기는 지구 생태계와 인류공동체가 더 이상 자본주의적 경제발전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기 때문이다.


생태적 위기는 단순히 국토 환경의 파괴로 치부할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생명을 포함한 사회 전반의 지속가능성에 관한 문제를 포괄하는 ‘진보의 근본 위기’이다. … 생태 위기는 사회의 존립과 지속 가능성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 민주․성장․평등․참여 등 인간 중심의 전통적인 진보로는 이러한 상황을 결코 돌파할 수 없다. <본문 333쪽>


현재 우리 앞에 놓인 경제 위기의 실체, “공동체적 ․ 민주적 삶의 양식”이 해체되는 현실은 신자유주의 지구화의 산물인 동시에 근대 인간중심주의 진보의 산물이기도 하다. “더 많이 갖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고 다투며 약자를 차별화하고 배제하는 ‘경쟁적이고 불평등한 삶’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데서 연유한다. 결국 현재의 위기는 바로 우리 안의 경쟁적이고 불평등한 삶의 추구가 외적으로 표출된 결과이다. 진정한 진보는 사람과 사람의 평등만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호혜로운 관계설정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어야 하고, 사람 중심의 사회적 진보와 사람과 자연의 공존 속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형평성을 재구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명래 교수의 신자유주의 지구화라는 병증에 대한 원인 진단이 정확하고 그에 대한 대안 역시 적절하다 할지라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그가 초록정치의 희망을 보았던 지난 2007년 촛불시위에 대한 해석을 유보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민주화 20년 뒤에 맞닥뜨린 대한민국은 사회국가로 발전하기는커녕 여전히 발전국가의 망령에 사로잡혀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의 공존에 의한 진보를 근원적으로 위협받고 있기 때문이다. 소비적 다중으로 포섭된 시민들이 초록정치의 주체로 세계체제의 바깥을 상상할 수 있게 되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오랜 시간을 암흑 속에서 헤매야 할까.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땅 위의 길과 같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라고 했던 루쉰 선생의 말씀에 한 가닥 희망을 걸어본다.

 


* <환경과생명>2009년 봄호(통권 59호)에 청탁 받아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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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비잔티움 제국사 324-1453  |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 | 김경연  한정숙 옮김 | 까치글방(1999)




천년제국 : 비잔티움 324-1453을 이해하기 위해

나는 역사 공부를 즐기는 편이다. 그간 역사를 공부하면서 내가 깨우친 것이 한 가지 있다면
"제국은 스스로의 힘을 파악하지 못할 때 가장 강성하고, 경계를 세우는 순간부터 몰락하기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종말론적인 기독교에서는 종종 천년왕국의 도래를, 불교의 미륵신앙처럼 이야기한다. "천년왕국""신약성서"의 '요한의 묵시록' 제20장에 적힌 문장에 대한 해석에서 비롯된 것으로 최후의 심판이 있기 전에 그리스도가 지상에 재림하여 1,000년간 통치한 뒤 세상의 종말이 온다는 해석이다. 신앙으로서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라 나는 그 '천년'이란 시간에 주목해보고 싶은데, 이 책 "비잔티움 제국사"엔 굳이 324년으로부터 1453년 비잔틴 제국의 멸망에 이르는 시간을 명시해두고 있다. 이 때 내가 놀라고, 의문을 품은 것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비잔티움 제국이 무려 1,129년간 존속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흔히 "비잔티움 제국(Byzantine Empire)"의 건국을 기점으로 로마 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가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천도한 330년 5월 11일을 기점으로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은 어째서 324년으로 명시하고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의문을 푸는 것이 이 책을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즉, 비잔티움 제국은 어떻게 천년제국을 건설하고, 유지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 어째서 저자는 324년을 기점으로 잡고 있으며 그것이 유의미한 것이라면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이 책이 의도하는 목적 - 즉, 비잔티움 제국을 이해하는 것 - 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 하는 것이다.

먼저 고백할 것은 올해 목표로 세웠던 "서양중세사 이해"를 위한 나의 독서 계획에 따라 구한 책이긴 했지만, 책을 읽으면서 중도에 몇 번이고 덮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이 책은 내게 어려웠다. 사실 이 책의 번역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명사 "비잔티움"은 오랫동안 그저 영어의 형용사적 표현인 "비잔틴"이었다. 여기엔 영어식 표기를 그대로 받아들인 우리들의 문제이기도 하겠지만, 그만큼 비잔티움 제국이 우리에겐 '잊혀진 제국'이자, 별관련이 없는 제국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것은 나에게도 마찬가지여서 내가 알고 있는 비잔티움 제국이란 그저 비잔틴 미술의 몇 가지 양식인 이콘(icon) 성화들, 모자이크 양식이나 독특한 문양, 성상숭배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서로마교회(가톨릭)와의 논쟁, 동아시아적인 정치술로 폄하되는 매수와 모략, 암살의 정치, 이슬람 제국의 침공을 견뎌내게 했다고 전하는 "그리스의 불(Greek fire)", 고구려 철갑기병을 연상케 하는 비잔티움 제국의 주축이 되었던 중기병 카타플락타이(Cataphract), 콘스탄티노플의 일곱겹 성벽과 이를 둘러싸고 이슬람제국의 메메드 2세와 벌였던 사투 등등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서로 연결되어 이해되었던 것이 아니라 각각 별개의 것으로 알고 있었을 뿐이고, 시오노 나나미의 전쟁3부작 중 하나인 "콘스탄티노플 함락"이 그나마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나의 궁금증을 조금 덜어주었을 뿐이다.

어떤 한 나라, 그것도 천년의 역사를 가진 제국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사전 지식이 필요하지만, 나에겐 비잔티움 제국의 일곱 겹 성문을 열어젖히기에 아는 게 너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국내에서 비잔티움 제국에 대해 다루고 있는 책들이 태부족하단 것도 비잔티움 제국에 다가서기 어렵게 만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가령 비잔틴 미술이 아니라 비잔티움 제국에 대해 다루고 있는 책들은 미셀 카플란의 시공디스커버리 총서 79 "비잔틴 제국 : 동방의 새로운 로마" 와 앞서 말한 시오노 나나미의 책, 그리고 예전에 <한국일보, 타임라이프북스>에서 펴냈던 것을 가람기획에서 재출간하고 있는 "타임라이프세계사" 시리즈 정도가 '비잔틴 미술'이 아닌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책이라고 할 것이다. 내가 읽은 것들도 저 정도다. 그외에는 서양중세사를 다루는 과정에서 일부 언급하고 있는 정도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이 책이 읽기 쉬울 리 없다. 그나마 이 책은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Georg Ostrogorsky)"가 일반 대중들을 위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풀이한 것이라고 하니 숨이 턱턱 막혀 올 밖에... 그러나 바로 그와 같은 이유로 이 책은 소중하다.




비잔티움 제국은 어떻게 천 년간 유지될 수 있었나?

내가 던졌던 첫 번째 질문 "비잔티움 제국은 어떻게 천 년간 유지될 수 있었나?"에 대해 저자인 "오스트로고르스키"는 이렇게 대답한다.

비잔티움 발전의 주된 원인은 로마의 국가제도와 그리스 문화 그리고 기독교 신앙이다. 이 세 요소들 가운데 어느 하나를 제외한다면 비잔티움의 본질은 생각할 수 없다. 우리가 흔히 비잔티움 제국이라고 부르는 역사적 구조물은 헬레니즘 문화와 기독교라는 종교 그리고 로마의 국가형태가 종합되면서 비로소 성립했다. <본문 9쪽>


석학만이 내릴 수 있는 명쾌한 해석이면서, 이 책의 첫 문장이기도 하다. 기억이 정확하다면 학교 세계사 시간에 나는 서로마제국의 멸망을 기점으로 서양 중세가 시작되고, 동로마제국의 멸망을 기점으로 서양 근대가 시작된다고 배웠다. 어찌되었든 오스트로고르스키식 표현을 빌자면 서양이란 역사적 구조물은 로마제국의 국가제도와 기독교 정신, 그리고 동양으로부터 전해져 온 문명에 의한 것이며 이 중 어느 하나를 빼놓고서는 말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는 오랫동안 서유럽인들에 의해 무시당해왔고, 이런 그들의 경향은 우리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런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서유럽인들의 폄하는 역자 후기에도 있지만 "로마 제국 쇠망사"를 저술한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 1737-1794)의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영국의 부유한 지주계급 출신으로 평생을 독신으로 살며 로마사 집필에 매진한 역사가이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영국과 프랑스가 치열한 식민지 쟁탈전을 벌이던 시대였고,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이 일어났다. 부르조아지들이 성장하고 프랑스에서는 혁명이 일어났다. 그가 "로마제국 쇠망사" 전 6권을 발간하던 해에 엠마누엘 칸트가 "실천이성비판"을 발간했고, 루이16세는 삼부회의 소집을 결정했다. 그는 그런 시기의 역사가였다. 계몽주의 시대의 역사가들은 합리주의에 기초를 둔 역사연구를 통해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도덕성의 문제를 다룸으로써 불변하는 보편적인 인간상을 보여주려고 했다. 그들은 인간의 이성을 믿었고, 인간의 진보를 믿었다. 그에 따라 과거의 역사에서 등장하는 미신, 환상, 종교적 신앙 등은 위험한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다. 우리 식으로 하자면 맥락상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을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 동로마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

게다가 에드워드 기번은 16세 때 옥스포드 대학에 입학했다가 종교적인 문제로 인해 퇴교당한 경험도 있었다. 물론 그가 계몽주의적 입장에 서서 "로마제국 쇠망사"를 기술한 것을 그런 사적인 이유에서만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서로마 제국의 멸망을 다신교적인 보편성에 기대고 있던 로마 제국의 기풍이 기독교화로 말미암아 훼손된 것으로 보았고, 그로인해 서로마 제국이 멸망에 이른 것으로 해석했다. 이는 기독교적 믿음이 제국 형성의 기초가 되었던 동로마 제국에 대한 폄하로 이어졌고, 이런 그의 영향력은 오늘날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까지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다. 한 국가의 몰락, 서구 문명의 근간을 이루던 대제국의 멸망의 원인을 어디에서든 찾아내야 하는 것은 옳을 것이고, 거기엔 이들 역사가들의 해석도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멸망 원인을 기독교화에서만 찾는 것은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시키는 것이다. 게다가 기번은 동로마 제국 자체를 서양 중세의 암흑기와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손쉽게 규정하는 듯 보인다. 오늘날의 역사가들은 서양 중세를 계몽주의 시대 역사가들처럼 암흑기로 보지도 않을 뿐더러 근대의 중요한 맹아들을 품고 있던 새로운 시대로 해석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동로마인들은 스스로를 '비잔티움적인 사람'들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그런 말 자체를 알지 못했다. '비잔틴'이란 말 자체가 후세인들이 그들을 규정하며 붙인 말이었을 뿐, 그들 스스로는 로마인으로 생각했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안정을 찾은 과거의 게르마니아 일대를 차지한 서유럽인들은 스스로를 로마의 후예로 생각하고자 했다. 그들은 로마 제국의 힘의 상징인 로마군단의 독수히 휘장을 제국의 상징으로 삼았고, 이런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미국 모두 국가 상징을 독수리로 삼았다. 동유럽의 작은 국가인 "루마니아"는 국명 자체가 "Rumania"다. 그네들은 그렇게 말할 권리가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혈통 자체가 로마인들과의 혼혈로 이루어졌고, 라틴인에 가까운 언어와 형질을 지녔다고 하니 말이다. 그렇게 로마제국이 서구 문명에 끼친 영향력은 압도적이었다. 비잔티움 사람들이 스스로를 로마인으로 여긴 것은 당연한 결과였을 것이고, 실제 제국 말엽에 이르렀을 때는 과거의 로마제국과는 상당히 다른 형태가 되었음에도 그들은 멸망하던 그 순간까지 로마인으로 살다 죽었다.

비잔티움 제국이 천년을 존속할 수 있었던 원인에 대해 저자의 표현대로 "로마의 국가제도와 그리스 문화 그리고 기독교 신앙"에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좀더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저자가 앞서 강조한 것과 다른 원인 몇 가지를 더 추가할 수 있다. 물론 저자 역시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들인데, 정리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우선  시간적으로 이슬람제국과 서유럽제국의 세력 판도가 최전성기를 맞이하기 전이었다는 것이고, 공간적으로는 이들 두 세력의 완충지대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것 역시 중요하다. 다른 한 가지는 비잔티움 제국의 탁월한 관료제도인데, 익히 잘 알려진대로 동로마제국의 황제들은 마치 로마제국의 말기 황제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종종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안위 자체가 지켜진데는 일반 백성의 입장에서는 곤혹스러웠을 테지만 관료제도 자체가 튼실했던 탓이다. 비슷한 시기의 서유럽 군대의 엘리트 계급이랄 수 있는 기사들이 사실상 문맹이었던 것과 비교해보면 동로마의 군대의 주축을 이룬 귀족들은 최고의 지식인들이라 할 수 있다.

거기에 덧붙여 비잔티움 제국이 오랫동안 독점해오다시피 한 동방무역을 통해 벌어들인 경제적 성공도 크다. 동로마는 로마제국의 라티푼디움(latifundium)체제 아래에서 희생당한 소규모 농민들들의 예속 상황을 완화시키고 이들을 군사력의 주축으로 삼는 건실한 체제를 복원할 수 있었다. 비잔티움 제국이 로마 제국의 계승자를 자부한 만큼 정복 전쟁에 나설 수는 없었던 근본적인 요인은 주변 국가들의 강성함에도 이유가 있었지만 토지와 지역에 기반한 농민으로 이루어진 군대가 자기 지역을 떠나 정복전쟁에 나서는 일 자체를 꺼려한 탓도 크다 할 것이다.


324-1453년의 의미는 무엇인가?

앞서 비잔티움 제국의 시작을 330년 5월 11일로 잡지 않고, 324년으로 잡은 이유는 무엇이고, 그 의미는 무엇인가를 물었다. 그렇다면 324년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서기324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동부 황제 리키니우스를 격파하고 로마제국을 재통일했다. 이전까지 비잔티움은 고대 그리스가 세운 식민지에 불과했다. 나는 저자 오스트로고르스키가 330년을 기점으로 하지 않고, 324년을 기점으로 잡은 데에는 다음의 이유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로마의 진정한 계승자가 누구인가?를 확실히 해두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를 간략히 살펴보면 서기 330년 콘스탄티누스가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오고, 유스티니아누스 때의 과도기를 거쳐 헤라이클레이오스 황제기에 이르러 강력한 중앙 집권 조직과 기독교, 동방적 색채를 두루 갖춘 전제국가가 되었다. 이것이 일반적인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설명이다.

그런데 여기 한 가지 빠져 있거나 종종 간과되기 쉬운 부분이 있다. 우리는 최근 중국의 "동북공정" 혹은 "고구려사 왜곡"이란 말을 자주 듣게 되었다. 도대체 동북공정은 무엇이고, 그로인한 고구려사 왜곡은 무엇인가? 중국의 문화권 안에 있던 동북아시아의 국가들에겐 "연호(年號)"란 개념이 있게 마련이다. 가령, 건원(建元)26년이란 말이 역사서에 실려 있다면 이는 B.C.115년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이 연호라는 것은 대개 중국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나라들에서 볼 수 있는 것인데 한자(漢字)를 사용하는 아시아의 군주제 국가에서 쓰던 기년법(紀年法)이다. 이전까지는 각 지방의 제후들도 각자의 재위에 따라 연도를 기록했는데 이 시기로부터 중국은 통일된 연호를 사용하게 되어 기년(紀年)도 통일되었으며, 중국에 신속(臣屬)한 외국들도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리고 중국측은 자신들에게 신속된 나라에게 복종의 의미로 자신들의 이런 연호를 사용하도록 강요하기도 했지요. 고구려에게 자신들의 연호를 사용하라고 강요하다가 이를 거부당하자 침략한 역사가 있다. 아마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당 태종 때의 일인 것 같다.)이를 “정삭(正朔)을 받는다”고 하는데, 이는 중국의 황제로부터 연호가 붙은 달력을 하사받아 사용한다는 뜻이다.

그런 고구려도 말기에 이르러서는 대중국 화친책을 사용하면서 중국의 연호를 받아 사용하게 되는데, 중국은 향후 남북한의 통일 문제까지 염두에 두고,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 정권이었다는 식의 주장을 펼쳐서 문제가 된 것이죠. 간혹 역사기행을 다니다보면 이름있는 옛 선인들의 비석이나 고승들의 부도를 만나게 되는데 그네들의 비석이나 부도에 새겨진 연호를 확인해보면 대개 '유당(有唐) 신라(新羅)'나 '유명(有明)조선(朝鮮)'이란 글귀를 볼 수 있다. 이는 '당나라에 속한' 혹은 '명나라에 속한' 이란 뜻이 된다. 그와 상관없이 우리들의 민족 감정은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 정권에 불과하다는 중국측의 역사 서술에 동의할 수 없을 것이다. 이이화 선생이 신라를 최초의 통일국가로 규정하지 않고, 고려를 우리 민족 최초의 통일 국가로 규정하는 것도 어느 정도 그런 뜻이 숨겨져 있으리라. 지금 우리나라의 영어식 표기인 "Korea"를 만든 고려는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고구려를 계승하겠다는 의식이 강했다. 그런 까닭에 고려는 발해를 멸망시킨 여진족에 대해 적대적이었고, 서경(지금의 평양)을 개성 다음으로 중요하게 여겼다. 고려가 실제로 북방 정벌에 나선 일은 적었다 하더라도 그네들의 국명에 나타나듯 고구려의 옛 영토 회복은 매우 중요한 국정 지표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정신은 다들 잘 아는 것처럼 고려의 멸망 이후 조선 개국에 앞장 섰던 삼봉 정도전의 요동 정벌로 이어졌다.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 역시 우리의 고려가 그러했던 것처럼 자신들을 로마의 계승자, 혹은 로마 그 자체로 여겼고, 이는 비잔티움 제국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이다. 비잔티움 제국이 사방의 적들에게 포위당해 국경 경비만으로도 막대한 군비를 지불하면서 끊임없이 제국의 외연을 확장하려 들었던 이유 역시 거기에 있었고, 결과적으로 비잔티움 제국의 이런 노력이 훗날 중세 서유럽에 로마의 자산을 전수해줄 수 있었던 토양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 점을 고려한다면 이 책의 저자 오스트로고르스키가 324년을 기점으로 이 책을 출발시킨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 것이다.

유스티니아누스(527-565)는 실제로 서로마 제국의 옛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대원정군을 이끌고 아프리카와 이탈리아, 에스파니아를 공격했고, 일부 성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과거 로마 제국 시대의 정신과 사상을 계승했다 하더라도 세상은 변했고, 비잔티움 제국은 옛 로마의 영화를 회복할 만한 사회경제적 토대가 부족했다. 제국 황제들의 정복 사업은 실패했고, 비잔티움 제국의 영화는 시들었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로마의 옛 영토엔 새로운 주인들이 차지했고, 비잔티움 제국 자신들도 라틴 문화 보다는 그리스 문화에 젖어들며 급격히 그리스화해갔기 때문이다. 게다가 8세기 무렵부터는 동지중해 지역에 새로운 패자가 등장하게 되니 이들이 이슬람 세력이었다. 또한 프랑크 왕국의 수장이었던 카를(샤를마뉴) 대제에 의한 비잔티움 제국의 이념적 권위 상실은 심대한 타격이 되었다. 카를 대제는 바이에른, 작센, 롬바르드 왕국 등을 차지하며 기독교 세계 최고의 강국이자 왕이 되었다. 비잔티움 제국이 실패한 것을 성취한 카를 대제에게 로마 교회의 신망이 쏠렸고 그는 로마 황제의 권위를 얻어냈다. 우리는 로마교회의 분리가 단순히 성상숭배에 따른 견해 차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니케아 공의회에서 콘스탄티노플과 로마 사이의 종교적 갈등이 해결되고, 성상숭배에 대한 견해차도 사라졌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한다. 로마 교회는 더이상 과거의 "로마" 교회가 아니라 로마 "가톨릭" 교회가 되었다. 그들은 로마를 단일한 제국이라 생각했으므로 카를 대제를 인정한다는 것은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를 부인한 것이 된다. 당시 유럽의 정신적 세계 질서는 그렇게 형성되어 있었다.

우리는 종종 이슬람 세력의 침략으로부터 유럽을 지켜낸 것을 카롤링거 왕조의 샤를마뉴 대제만의 공로로 생각하기 쉽다. 비잔티움 제국은 오랜 시간 동안 이슬람 세력의 서유럽 진출에 대한 교두보 역할을 충실히 해냈고, 그 와중에 이슬람 왕국의 속주만도 못한 지경에 빠진 적도 있었다. 그러나 비잔티움 제국의 가장 큰 의의는 역자 후기에서도 밝히고 있듯 "고전고대의 문화를 보존하여 이를 서유럽에 전해준 것과 정교의 정신적 유산을 슬라브 세계에 남겨준 것에 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덮으며 나는 우리에게 비잔티움 제국이 무엇이며, 유럽의 시작 - 오늘날 아시아를 비롯해 전세계를 사실상 "하나의 거대한 유럽 문명권"으로 보이도록 묶어버린 유럽의 힘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과 뒤이어 안드레 군더 프랑크의 "리오리엔트"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역사는 더이상 역사가들에게만 맡겨 놓을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역사는 종종 과학이 그러했듯 그것을 저술하는 이들에 의해 다른 이야기가 된다. 분명 비잔티움 제국이 오늘날의 서유럽에 미친 영향은 작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는 잊혀진 것이었다. 오늘날 대한민국 사학계가 끓어오르는 냄비처럼 고구려사 문제로 시끄럽지만 과거 신라지역 출신의 정치 권력과 남북한이 냉전으로 인해 분단된 결과 오늘날의 북한 지역인 고구려 역사에 대해 무관심했거나 애써 축소해왔던 것 역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자는 현대의 역사에서 역사가의 몫을 빼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 들라크루아, 콘스탄티노플 함락

같은 유럽이라 할지라도 동방에 가까왔던 비잔티움의 역사를 축소함으로써 유럽의 사가들은 빛이 동방에서 왔다는 사실을 애써 무시하거나 축소한 것은 아닌가. 나는 그런 의문을 품어 본다. 물론 이 책이 유럽중심주의 역사에서 벗어나자는 주장을 담고 있지 않으며, 나 자신도 앞으로는 아시아 중심주의 역사관으로 무장하자는 주장을 펼치는 것도 아니다. 나는 비잔티움 제국사를 읽으며 내가 알고 있던 상식의 일부를 교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우리가 인류의 역사를 바라봄에 있어 보다 전지구적인 시선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은 이렇게 연결되어 있지 않은가.

* 끝으로 이 책의 역자와 출판사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품어 본다. 왜냐하면...
어느 출판평론가의 말을 빌자면... 외국어를 할 수 없는 나로서는 우리 말로 번역된 것이 아니라면 그 책은 이 세상에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마루야마 마사오와 가토 슈이치의 "번역과 일본의 근대"를 떠올려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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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길은 없으나 걸어가면 만들어지리


책을 덮고 나서 한동안 막막했다. “관련분야의 전공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풍부한 소양을 갖추었다고 하기도 뭐한, 그런 분야의 책을 맡을 때는 오랫동안 망설이게 마련이다. …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책은 몇 가지 이유에서 내 손을 거칠 운명이었다.”는 옮긴이의 말이 없었다면 서평을 겸한 에세이 한 편을 써달라는 청탁에 끝내 응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 역시 관련분야의 전공자가 아니고, 풍부한 소양을 갖췄다고 할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책이 몇 가지 이유에서 내 손을 거칠 운명이었다고 말하고 싶어졌다.

고전적 지식인과 근대적 지식인

『다른 곳을 사유하자』는 ‘정주하지 않는 지식인의 삶과 자유’란 부제를 통해 더 자연스럽게 설명될 수 있다. 저자는 우리를 “어디에도 멈추지 않고 한없이 달릴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하는” 사유의 국제특급열차로 이끈다. 시대적으로는 근대 초 계몽주의 지식인 몽테스키외로부터 탈국가지역담론의 최신이론가 아르준 아파두라이에 이르고, 게오르그 짐멜, 한나 아렌트, 칼 만하임, 발터 벤야민, 피에르 부르디외 같이 우리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지식인이 있는가 하면 ‘바벨의 도서관’에서 찾는 것이 빠를 것 같은 낯설고 생소한 이름들이 텍스트 위에 ‘유령의 집’이라도 들어선 것처럼 도처에서 잇따라 출몰한다. 글쓰기의 형식면에서도 저자의 텍스트는 자신의 사적인 체험으로부터 사상사의 한 대목, 때로는 픽션까지 동원하며 경계선상에서, 경계 너머로 자유로운 월경을 마다하지 않는다. 수많은 지식인들의 이름과 사유가 현란하게 호명되지만, 그들에겐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우리는 자기 고장이나 터전을 떠나지 않고도 다른 곳을 사유할 수 있다. 하지만 거리두기, 사회의 규준이나 권력 중추 및 기관들에서 벗어나는 행위는 바로 그 사회를 이해하고 분석하며 그곳의 긴장과 변화를 포착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다.
결국 비판적 지식인이란 ‘이동한 사람’이다. 실제적인 의미로는 자신의 배경이나 다소간 고통스러운 역사적 우연 때문에 본디자리에서 떠나야 했던 사람. 하지만 비유적인 의미에서는 인식론적 필요성 때문에 극적으로 자신의 자리를 떠나야 했던 사람이다. - <본문 26-27쪽>


‘통행, 이주, 이동, 이산, 혼합, 전환’ 등 다양한 열쇠 말들을 통해 분류되고, 호명되고 있긴 하지만 저자가 불러내고 있는 지식인들은, 본래 뿌리내리고 있던 글쓰기의 거처를 떠나 고통스러운 거리두기를 통해 새로운 인식에 도달한 ‘비판적’ 지식인들이다. 이들은 교조주의와 불관용, 지배계급의 보수적인 관성에 맞서 싸우며 스스로를 유배하거나 망명하는 과정에서 획득한 비평적 거리두기를 통해 새로운 길을 내고자 시도한다. 지식인의 정의에 대해 저자는 코저(L. Coser)와 네틀(J. Nettle)의 정의에 입각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코저와 네틀은 단순히 개인이 수행하는 사회적 역할에 따라서 지식인을 규정하는 것에 반대한다. 이들은 교육의 정도, 새로운 이념이나 사상을 창조했다고 해서 지식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비판 정신’, 개인이 가지고 있는 관심, 창조하는 이념과 사상의 내용에 의해 지식인을 정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지식인을 하나의 계급으로 부르지 않는 이유는 무엇보다 이들 집단이 끝없이 분열되고 재구성되기 때문이다.

역사상 이들이 거의 유일하게 분열되지 않은 채 존재했던 시대가 있었다면(실제로는 이 시대조차 그럴 수 없었지만), 서구의 지적 고향인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에 살았던 철학자들이 아니었을까 싶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은 진리를 추구하고, 시민을 계몽하며, 정치가들에게 조언을 하는 최초의 지식인이자 동시에 지배계급이었다. 이 시대의 철학자들을 지식과 권력이 결합된 이른바 ‘고전적 지식인’이라 한다면, 프랑스 혁명 이후 출현한 지식인들을 가리켜 ‘근대적 지식인’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는 계몽(교육)을 통해 누구나 지식인(철학자)이 될 수 있고, 특권적 소수(지배계급)가 지식의 생산과 배분을 담당하는 것에 맞서 공론공간을 확장하고자 했다. 계몽시대의 살롱문화는 봉건시대 절대왕정과 교회로부터 고립된 공간에 갇혀있던 지식인들에게 새롭게 제공되기 시작한 공론의 공간이었다. 그러나 계몽의 이상은 혁명 이후 부르주아의 교양으로 전락해갔다.

이런 까닭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근대적 지식인의 기원을 프랑스로 이야기한다고 해서 특별한 이견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프랑스대혁명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산업혁명은 산업화와 도시화를 유발했고, 대중사회의 도래를 촉발했다. 언론의 자유가 제도적으로 보장되면서 잡지와 신문을 비롯한 대중매체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매체들은 대중교육의 역할(사회화)을 맡으면서 새로운 지식인뿐만 아니라 새로운 대중을 생산했다. 다양한 대중매체의 출현은 지식인들에게 보다 넓은 지식시장을 제공했고, 신문과 잡지들은 근대화된 노동자 대중을 새로운 고객으로 확보했다. 이 과정에서 지식인들은 거대한 집단을 형성하고, 매스미디어라는 공론공간을 장악하게 된다. 그 힘을 바탕으로 프랑스 지식인들은 정치권력과 사회권력에 도전하는 드레퓌스 사건 같은 앙가주망의 전통과 신화를 수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곳을 사유하자』는 지식인들의 앙가주망 전통과 신화를 더욱 극적으로 부각시키는 책이 아니다. 저자는 도리어 20세기와 함께 막을 내리고 있는 지식인들의 앙가주망과 역할이 쇠락해가는 지점으로부터 새로운 과정적 성찰의 세계로 우리들을 이끈다.

방황하는 화란인, 지식인의 저주

비판적 지식인에 이르는 과정적 성찰로서 저자가 제시하고 있는 ‘통행, 이주, 이동, 이산, 혼합, 전환’은 그 형태가 어느 것이든 현재에 멈춰있지 않는 상태, 정주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바그너의 오페라 <방황하는 화란인(Der Fliegende Holländer)>과 정반대에 위치한다. <방황하는 화란인>은 신의 저주를 받아 죽음을 맞이하지 못하고 유령선을 탄 채 영원히 바다 위를 떠돌아 다녀야 하는 화란인 선장의 이야기이다. ‘망명자이자 통행자이자 경계에 있던’ 칼 만하임을 빌어 말하면 그는 ‘자유롭게 떠도는 지식인(free floating intellect)'인 셈이다. 그는 7년에 단 하루만 육지로의 상륙이 허락되는데, 이날 하루 동안 자신을 영원히 사랑해 줄 순수한 여인을 만나야만 저주가 풀려 죽음을 맞을 수 있다. 고통스러운 방황이 끝나고 안주하는 순간, 지식인은 죽을 수밖에 없다. 어째서 지식인들은 이처럼 끊임없이 방황해야 하는 것일까? 니콜 라피에르는 짐멜의 ‘이방인(etranger)’, 한나 아렌트의 ‘파리아(paria)', 에드워드 사이드의 ‘망명자(exile)' 등을 이용해 설명하고 있다.

짐멜은 이방인의 불편하고도 불안정한 이 상황이 그가 현재 머물고 있는 사회와 좀더 객관적인 관계를 맺게 해준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것으로 판단한다. “그의 사고는 집단의 편파성이나 특수성에 근거하지 않으므로 ‘객관성’이라는 특정 태도를 취하며 거리를 둘 수 있다. 이 객관성이란 초탈이나 무관심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맺고 있는 동시에 거리두기, 관심과 무관심이 특수하게 조합되어 이루어진 태도다.” - <본문 76-77쪽>

그녀는 이후로 관념의 세계에 숨어서 진짜 세상을 외면할 수 없었다. 진짜 세상이 아무리 모질고 음험해도 어쩔 수 없었다. 파리아들에게는 정치적 사유와 그에 따른 행동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니까. - 본문 <88쪽>

팔레스타인 독립을 옹호하기는 했으나 자신의 나라를 포함하여 어떤 형태의 민족주의도 편들지 않았던 그는 “조금 비껴나 있는 것, 어긋나 있는 것을 선호한다”고 말했다.
두 세계 사이를 항해하는 그의 작품 또한 두 가지 모습을 띤다. 하나는 현재의 증인이자 비판자로서 20세기 망명 유럽지식인의 고독한 모습이다. - <본문 121쪽>


결국 지식인이란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1권에 적혀있는 “Amicus Plato, magis amica veritas(플라톤은 친구지만 진리는 그보다 더 큰 친구이다)”란 말대로 자발적 선택이든, 상대적인 조건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선택이든 진리 이외의 것들에 대한 사랑을 포기한 존재이다. ‘자기 고장이나 터전’, ‘사회의 규준이나 권력 중추 및 기관’들에서 벗어난다면 지식인으로서의 모든 책임을 다하는 것일까. 만하임은 지식인이 매인 데가 없더라도 책임까지 없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들 앞에는 “대립적인 계급들 중 어느 한편에 기꺼이 가담”하여 그 계급의 대변자가 되든가, “지식인이라는 운명을 받아들여 사회 전체의 변호사로서 임무를 완수”하든가 둘 중 하나의 운명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지식인이란 개념이 언제나 논쟁적인 까닭은 지식인은 노동자와 달리 자발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위치, 다시 말해 더 나은 삶의 기회를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수가 될 수도 있었지만 선동가가 되기를 꿈꾸었던 젊은 학위 소지자 린하르트는 작업 속도를 따라잡는 것만이 힘든 게 아니었다. 그는 노동자들의 수동적인 태도와 공포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진 프로파간다’에 지쳐버렸다. 게다가 그가 어디서 왔는지 밝혔을 때에는 심각한 몰이해에 부딪혔다. 왜냐하면 그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이 공장에 들어온 사람들이었으니까! - 142쪽


지난 1980년대 우리 사회에서도 청년지식인들은 ‘위장취업’을 통해 노동현장으로 진출했다. 노동자들과 삶의 조건을 공유하고, 이를 통해 사회를 개선해보겠다는 이들의 노력과 헌신을 통해 우리는 절차로서의 민주화를 성취할 수 있었다. 과거의 청년지식인들은 민변 출신 대통령, 노동운동가 출신 도지사, 학생운동가 출신 국회의원으로 변모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진보의 위기’, ‘지식인의 종말’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과 대면하고 있다. 민중계급 출신의 지식인 제라르 누아리엘은 비록 68혁명의 반체제운동에는 관심을 가졌지만,  자신이나 그와 비슷한 과정을 거친 이들은 오히려 “거대한 공장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관건이었다며 쥘 미슐레를 인용해 이렇게 말한다. “올라가는 게 아니라 올라가면서 자기 모습을 지켜나가는 게 어려운 것이다.”

지식인의 죽음 - 대중의 배신인가, 지식인의 배신인가

볼리비아 산중에서 체 게바라와 함께 포로가 되었던 레지 드브레는 “20세기 초 위풍당당하게 시작한 프랑스 지식인들의 영웅 서사시는 오류와 망상에 빠지더니 급기야 오늘날에는 조롱거리가 됐다. 그것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다. 공연을 중단하고 무대를 떠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지식인의 죽음을 말한다. 그는 파리고등사범의 촉망받는 철학자, 알튀세르의 수제자였다가 무장게릴라로, 다시 학자로 돌아와 사회당 미테랑 대통령의 보좌관을 역임했으나 자신도 얼마 전엔 좌파 대신 우파 후보를 지지했었다. 어쩌면 그 자신이야말로 ‘근대의 종언’과 함께 나타나고 있는 ‘지식인의 죽음’이란 현상에 가장 잘 부합하는 인물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가 질타하고 있는 오늘날 지식인의 5가지 중병(重病), “자신들 속에 갇혀 대중 혹은 민중과 단절되어 있으며(집단자폐증),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고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도 못하면서(현실감 상실증) 여전히 사회의 모럴을 선도한다고 자만하고(도덕적 자아도취증), 들어맞지도 않는 예측을 쏟아놓고(만성적 예측 불능증), 자신의 이름이 자칫 잊혀질까, 매스컴의 리듬에 맞추어 설익은 견해들을 유창한 언변으로 늘어놓는다(순간적인 임기응변증)”는 지적까지 폐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1987년 이후 민주화 20년을 맞아 ‘지식인의 죽음’을 이야기한다. 사실 이 논쟁의 연원은 여야 정권 교체를 이룬 김대중 정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대중 정부는 학력 위주의 지식인 개념을 독창성, 능동성 위주로 확장시킨 ‘신지식인’이란 슬로건을 제시했다. 관이 주도한다는 사실만 제외한다면 평범한 대중이라도 그만한 능력과 식견을 갖추고 있다면 지식인으로 대접해야 한다는 발상은 계몽주의 시대의 이상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국가가 ‘제2의 건국’ 캠페인과 함께 대대적으로 주도했던 ‘신지식인’이란 것이 얼마나 많은 부가가치를 생산해낼 수 있는가라는 산업적 측면만 고려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과거 민주화운동을 거치며 사회적 현실비판과 공적담론의 생산자였던 지식인은 오늘날 대중과 괴리되고, 비판정신이 거세된 채 논문연구업적과 연구비 따내기에 몸 바치는 논문기술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대학은 산학연 협력이란 미명 아래 재벌로부터 기부금을 따내고, 그 돈으로 새로운 건물을 짓고 동판에 기업명을 새겨주며 한 몸이 되어갔다. 이 같은 지식인 사회의 위기 속에서 대중은 지식인과 학력을 열망하면서도 이에 대한 혐오 증세를 가중시켜 나갔고, 신정아 사건을 맞아 네티즌들의 연예인 학력검증 사태, 황우석 ․ <디 워>를 둘러싼 반지성적 논쟁으로 분출되기에 이르렀다.

이 같은 현상은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을까. 마르크스를 비롯한 지식인들이 인간의 물적 욕망을 과소평가하고, 지배계급의 문화적 헤게모니에 장악된 대중에 대해 지나치게 낙관한 결과일까. 어떤 이는 현실사회주의의 붕괴로 자본주의가 세계의 유일한 체제가 되어 역사는 종말을 고했고, 더 이상의 외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지금 대한민국의 현실을 바라보면 제국과 신자유주의가 ‘지구적 규모’로, ‘무의식적 수준’까지 관철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외부가 없으므로 ‘다른 곳’을 사유할 수 없고, “어디로도 떠날 수 없는, 절망의 끝에서 떠나는 여행”의 본보기는 자살이다. 저자는 ‘자살’이란 출구가 없을 때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데드 엔드(dead end)'라고 말한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하루 평균 35.5명이 자살하는 세계 1위의 자살 국가다.

과연 역사는 종말을 고했고, 우리들은 새로운 외부를 상상할 수 없는 것일까.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는 역사를 갖지 않는다”란 테제의 의미를 그것이 역사를 갖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반대로 이데올로기가 모든 역사에 걸쳐 어디서나 나타나고 역사를 관통한다는 뜻이라고 말한다. 이 말을 “다른 곳을 사유하자”는 방식으로 바꿔보면 진보는 모든 역사에 걸쳐 어디서나 나타나고 역사를 관통하므로 “진보는 역사를 갖지 않는다”, “진보는 축적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진보는 언제나 현재를 고민하는 가운데 출현하며, 그것은 도달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현실 속에 모순이 존재하는 한 끊임없이 등장하는 새로운 삶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다른 곳을 사유하는 일, 문화망명

이제부터 앞서 이야기했던 운명 혹은 인연에 대해 이야기해보아야 할 텐데, 나는 지난 2000년부터 “사람으로 본 20세기 문화예술사 -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라는 사이트를 현재까지 8년 동안 운영하고 있다. 아마도 이 책 『다른 곳을 사유하자』가 내 손에 쥐어진 인연 중 하나는 거기에 있을 것이다. 저자 니콜 라피에르가 책 속에서 주장하는 ‘다른 곳을 사유하자(pensons ailleurs)’는 말은 끊임없이 걸어가며 묻고 생각하는(과정적 성찰) 행위를 말한다. ‘다른 곳’이 지향하는 바가 반드시 현존하는 거의 유일한 체제로서의 자본주의와 그것이 배태하고 생산하는 문화의 바깥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현재와 다른 문화를 꿈꾸고 사유하며 이것을 실천하자는 주장은 내가 생각하는 ‘문화망명’과 닮아있다. 문화란 우리의 외부(세계)와 내부(의식)를 총체적으로 규정하는 본성(뿌리와 근본)이 본래부터 존재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믿도록 만드는 신화의 체계를 지녔다. 새로운 세상은 기존의 지배이데올로기에 의해 주어진 문화에서 벗어나 우리가 새로운 세상을 상상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문화망명’이란 이 같이 외부를 상상할 수 없는 세계체제 속에서 나를 새롭게 발견하고, 주체를 재설정하여 새로운 세상을 상상하고 실천에 옮기는 행위를 의미한다.

우리는 20년 전 그토록 힘들고, 아프게 외쳤던 민주공화국이 신자유주의가 만들어 낸 적자생존의 공포 속에서 재벌권력의 시장형 자기 계발 인재들에 둘러싸여 한없이 추락하는 광경을 목격하고 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마르크스를 변주해 현재의 상황을 이야기해 보면 우리 인간은 이미 지나버린 과거를 만들어낼 수 없다. 우리는 현실의 조건들을 만들어 내지만, 반대로 우리들 또한 그 결과물이다. 우리는 모든 죽은 세대의 전통, 과거의 망령들과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이루고 있는 존재와 싸우고 있다. 현재 우리 사회, 아니 전 세계적으로 맞닥뜨리고 있는 위기는 표면적으로는 경제의 문제이지만 동시에 담론의 위기이기도 하다. 이 위기 속에 길을 만들고, 다리를 놓을 자가 누구인가? 마지막 질문에 답을 하자면 ‘지식인은 지도하지 않는다. 그는 방향을 잡고, 길을 내고, 다리를 놓는다. 그대 길을 내는 자여, 길은 없으나 걸어가면 만들어지리.’




출처 : 기전문화예술, 2007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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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벌거벗은 여자 - 데스몬드 모리스 | 이경식 옮김 | 휴먼앤북스(2004)


영국 최초의 미술학과 교수였던 존 러스킨(John Ruskin)은 29세에 결혼했다. 그와 그의 아내는 당시 관습에 따라 상당 기간의 연애 기간을 거쳐(약혼을 포함해서) 결혼한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러스킨은 미술에 상당히 조예가 깊어 고대의 대리석 조각과 회화 등을 통해 여성의 신체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잘 알고 있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여성의 벗은 몸에 대해 나름대로 잘 알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심미적 관점에서 여성의 육체를 즐길 줄 알았다. 러스킨의 아내는 결혼 얼마 뒤 남편과 이혼을 결심하게 된다. 이유는 남편인 러스킨이 섹스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을 뿐더러 그 자신과 관계를 갖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관계만 갖지 않으려 했던 것이 아니라 멀리 하려 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결국 러스킨의 아내는 신체검사를 받아 자신이 아직 처녀라는 사실을 증명해야 하는 창피함을 무릅쓰고 결혼을 무효로 만들었다.

> 존 러스킨(John Ruskin, 1819-1900), 런던의 부유한 포도주 상인 집안에서 태어나 캘빈주의자인 모친의 엄격하고 청교도적인 교육을 받으면서 자랐다. 부친을 따라 유럽 여러 곳을 여행하여 미술과 문학에 대한 취미를 길렀고 그림을 배웠다. 부친의 넓은 문학적 취미와 낭만파 시인의 작품, 모친의 교육에서 성서를 접하면서 그의 문학적 경향이 굳어져갔다. 처음에는 목사가 되려고 하였으나, 옥스퍼드대학 재학 중에 이 뜻을 버리고, 졸업한 이듬해인 1843년 낭만파의 풍경화가인 J.터너를 변호하기 위하여 쓴 《근대 화가론》(5권, 1843∼1860)의 제1권을 익명으로 내어 예술미의 순수감상을 주장하고 '예술의 기초는 민족 및 개인의 성실성과 도의에 있다'는 자신의 미술원리를 구축해 나갔다.

러스킨은 어째서 아내와 관계를 갖지 않았을까? 사실, 러스킨의 일화는 널리 알려진 바가 있는데 그 이유는 아내의 사타구니에 난 털(음모)때문이었다. 고대의 대리석 조각상을 통해 여성의 몸을 심미적으로 관찰해온 러스킨이었지만 빅토리아 시대의 관습으로는 상류층 남녀는 혼전관계를 맺지 않았고, 그 자신은 여성과의 섹스에 대해 완전한 무지에 가까왔다. 그로서는 사랑스런 아내의 몸, 가장 아름다워야 할 곳에 남자처럼 숭숭 솟아오른 음모가 도저히 용납되지 않았다. 결국 러스킨은 이런 사실을 아내에게 고백했고 이혼당했다.


< 루이스 캐럴(Lewis Carroll, 1832~1898)
영국 체셔 테어스베리에서 성공회 사제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본명은 찰스 루트위지 도즈슨(Charles Lutwidge Dodgson)이다. 럭비학교에서 1951년 옥스퍼드 크라이스트 처치 칼리지에 진학하여 수학, 신학, 문학을 공부하였으며, 훗날 모교의 수학 교수를 지냈다. 그는 성직자의 자격을 얻었음에도 내성적인 성격과 말더듬이 때문에 평생 설교단에 서지 않았다. 그의 성격은 괴팍했고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엄격한 규칙으로 정한 일상을 고집스럽게 반복했으며 이를 일기에 꼼꼼하게 남겼다. 모든 일상을 기록하여 편지로 주고받았는데 약 9만 9천통의 편지를 보관하였다. 그는 글을 쓰면서 루이스 캐럴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

우리에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루이스 캐럴(찰스 루트위지 도지슨)'은 이 책을 집필하는 동안 세 명의 어린 소녀들을 초대하여 한여름의 뱃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그 중 한 명인 '앨리스 리델'은 일곱 살이었다. 청년 도지슨은 옥스퍼드의 수학강사로 일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도지슨이 어린 앨리스에게 유아성학대의 범죄를 저질렀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는 성을 극도로 혐오하던 사람에 속했으므로... 그는 여성에게 키스 이외에는 그 어떤 성적인 접촉도 가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가 키스했던 여성은 대체로 열두 살이었거나 아니면 그보다 더 어렸을 것으로 생각된다. 도지슨은 사춘기 이전의 나이에 있는 어린 소녀들을 편집적으로 사랑했다. 도지슨에게 찾아온 사랑은 그런 것이었다. 도지슨은 상급자의 딸인 앨리스 리델을 사랑했다. 그는 앨리스가 다섯 살에서 열한 살때까지는 늘 만날 수 있었다. 바로 이웃에 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날부터인가 도지슨은 그 소녀를 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가 12살 밖에 안 된 어린 소녀인 앨리스 리델에게 청혼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았고, 일설에는 앨리스의 어머니가 도지슨이 앨리스에게 보낸 모든 편지를 불태우고, 앨리스의 일기장에서도 도지슨과 관련된 모든 페이지를 찾아 찢어냈다고 한다. 이들의 관계에서 영감을 얻어 나보코프가 소설
"롤리타" 를 집필했다는 이야기 역시 이들의 이야기만큼 유명하다. 이것은 여성의 성기 일부를 가리고 있는 음모가 남성들에게 어떤 인상과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간략한 일화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러스킨과 같은 엄숙한 금욕주의자(?)에게 여성의 음모가 미친 영향과 거의 같은 이유로 루이스 캐럴에겐 여성의 음모가 영향을 미쳤다.


여성 자신도 자신의 신체에서 2차 성징의 하나로 자라나는 음모에 대해 대부분 혐오의 감정을 갖는다고 한다. 물론, 남성인 나는 잘 알 수 없으나 나와 애 주변의 경험에 비추어보았을 때, 남성 성기 주변에서 음모가 자라는 것에 대해서도 이와 흡사한 혐오와 자부심이 함께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즉, 성기 주변에 자라나는 음모는 음란한 느낌과 함께 사자의 갈기와 같이 힘과 성장을 의미하는 자부심을 품게 해준다

사춘기에 들어선 영국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이 연구에 따르면, 사춘기 진입 후 소년들과 달리 소녀들은 거미를 싫어하는 비율이 비약적으로 증가한다고 한다. 음모가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14세 쯤에는 이 비율이 더욱 증가해 거미를 싫어하는 소녀의 비율이 소년의 두 배로 껑충 뛴다.

언뜻 보기에 위의 연구 결과가 음모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의아해 할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왜 그렇게 거미를 싫어하느냐는 질문에 소녀들이 한결같이 거미가 '역겹고 털로 뒤덮인' 동물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는 점이다.  <"19장 _ 여성의 음모" 중 333쪽>

어찌되었든 독실한 종교인과 진보적 자유주의자 모두 자연 그대로의 여성 음모가 매력적이라 생각한 것처럼, 음모 제거를 찬성하는 부류에도 금욕주의자와 쾌락주의자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이 두 사람의 일화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 여성의 신체에 대한 남성들의 그릇된(?) 혹은 본능적인 시각을 보여준다. 즉, 여성의 몸은 아무런 이유없이 오해받고 있으며, 여성의 음모가 생리적으로는 그저 성장의 표징임에도 불구하고
(성적인 이유는 의견이 제각각이긴 하지만) 남성들은 때로 각자의 성적 취향에 따라 여성의 음부를 제멋대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성의 신체는 오해받고 있다는 것이 데즈몬드 모리스가 이 책 "벌거벗은 여자"를 집필한 이유가 될 것이다. 이 책의 부제는 "여자 몸에 대한 연구"이다. 원래의 책에서도 부제가 그리 붙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이 책을 읽다보면 부제가 여러 이유로 적당하단 생각을 하게 된다. 첫째는 앞서 러스킨과 도지슨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듯 우리가 여성의 몸에 대해 알지 못하므로 연구가 필요하단 것이고, 둘째는 저 부제가 아무런 꾸밈없이 이 책의 직선적이고, 어느 부분에서는 고지식해보이기 까지 하는 서술 방법에 합당하다는 것이다(데즈몬드 모리스의 이전 책들 가령 "털없는 원숭이"나 "피플 워칭" 과 같은 책들, 특히나 "털없는 원숭이"는 영국식 블랙유머가 적당히 가미된 산문 문체를 보여주고 있지만, 이 책 "벌거벗은 여자"는 상대적으로 건조해 보인다).

이 책 "벌거벗은 여자"는 모두 23장의 부분으로 나뉘어 여성의 신체를 연구한 결과를 담고 있다. 제1장 '진화'로부터 시작해서 제23장 '여자의 발'에 이르기 까지 저자 데즈몬드 모리스는 여성의 신체를 그 특유의 시선으로 샅샅이 훑어간다. 이때 데즈몬드 모리스 특유의 시선은 여러모로 편리하다. 이전의 연구서에서도 그러했듯 그는 인간을 인간이기 이전에 지구상에서 진화해 살아남은 독특한 영장류의 일종으로 연구한 것처럼, 여성을 그런 영장류의 암컷으로 연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편리하게 보이는 이유는 여성의 신체를 대상화하고, 물신화한다는 식의 여성주의적 관점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고, 변명할 여지가 생기는 측면 때문이다. 나쁜 의미로 보자면 이 책이 여자의 몸은 보여줄지 몰라도, 여성의 몸을 보여주지는 못할 수도 있다는 의미가 된다. 종종 과학이란 말로 혹은 객관화한다는 뜻에서 자신은 어떤 주의나 주장으로부터 상대적인 자유를 누리고자 하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이 책이 객관적인 사실을 보여준다고 해서 이 책이 정치적으로도 올바르다고 할 수 없는 측면을 우리는 알아두어야 한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여성의 신체를 해부학적인 방식으로 시작해서 사회적인 방식, 문화인류학적 방식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해 연구하고 있다. 데즈몬드 모리스와 이 책의 저자들이 구태여 '여성'이란 표현을 피하고, '여자'라고 표기한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내 개인적으로 특별히 재미있었던 부분은 제14장 '여자의 가슴' 편이었다. 프랑스의 마지막 국왕 루이 16세의 악명높은 비운의 황후 마리 앙트와네트와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 한 가지를 소개한다면
(앞서 루이스 캐럴과 지금의 이 일화는 이 책에서 나온 이야기가 아니다) 그녀의 유방이 현재까지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좀더 엄밀하게 말하면 마리 앙트와네트의 유방이 아니라 그녀의 유방에 석고를 대고 본을 떠서 만든 황금잔이 전시되고 있다.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을까? 18세기 유럽을 뜨겁게 달궜던 것은 계몽주의 철학이었다. 그 중에서도 루소의 영향력은 참으로 막강했는데, 당시 귀족 출신의 부인이라면 누구도 자신들의 아이들에게 직접 젖을 먹여 키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루소의 "에밀"을 통해 수유는 비로소 귀족사회에서도 수용될 수 있었고, 이 논리를 확장시켜 국가의 아버지, 어머니로 자부한 마리 앙트와네트는 자신의 유방을 본떠 만든 도자기 잔에 우유를 담아 따라주는 행사를 치뤘다. 이런 국가적 의례를 통해 마리 앙트와네트의 유방은 루이16세의 유방이면서 동시에 국가의 유방, 프랑스 국민의 유방이 되었다.  

오늘날에도 종종 여성의 유방 혹은 수유 행위는 국가적 관심사가 되곤 한다. 그것은 데즈몬드 모리스가 여성의 신체를 아무리 여자의 신체로 혹은 영장류 중 인간의 암컷으로 객관화시키려 할지라도 사회적인 시각에서 여성의 몸은 단순히 한 개인의 신체가 아니라 국가적으로 관리해야 할 신체, 어머니의 신체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여성의 신체는 종종 이중의 처벌 속에 놓인다. 단적인 사례가 여성의 수유행위이다. 수유행위는 국가 단위에서 미래 국민들의 보건과 건강을 위해 권장되는 사안이면서 사회적으로 엄격한 금기였다. 1975년 미국 여성 세 명이 마이애미의 한 공원에서 가슴을 내놓고 젖을 먹였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죄목은 '부적절한 노출'이었다. 여성의 수유행위는 국가적으로 권장되는 일이면서 동시에 처벌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후 이런 체포관행에 대한 반대가 늘어나면서 오늘날 대부분의 북미지역에서는 공공장소에서 행해지는 모유 수유가 합법으로 인정받는다. 

데스몬드 모리스의 책들은 분명 우리에게 여성의 신체 혹은 우리들 지구상에 살고 있는 특이한 영장류인 인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보여준다(사실은 에드워드 윌슨의 시각을 계승한 듯 보이는). 데스몬드 모리스가 저자 서문에서 "이 책을 쓰면서 여자 몸의 복잡한 원리와 신비를 모두 깨달을 수 있었다"고 자신있게 밝히고 있는 대로 여자 몸에 대한 복잡한 원리와 신비를 모두 깨달았던 것은 아니다. 그것을 최소한 '여자'라고 국한시키더라도 나는 저자의 이런 자신만만함에 절대 동의할 수 없다. 저자가 인간을 유인원으로부터 진화해서 지상을 지배하는 강자로서의 영장류로 인간을 파악하여 보여주는 시선은 분명 새롭고,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들 자신에 대해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해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people이면서 동시에 Human이고, sex로서의 여성이 있으면, gender로서의 여성 또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와 같은 의미에서 여성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우리가 그동안 간과해온 새로운 사실들을 알려주기는 하지만 그것이 저자의 말대로 여자의 모든 것은 아니며, 더더군다나 여성의 모든 것은 아니다. 그것은 여성의 음모가, 여성의 유방이 한 가지 의미망으로 포착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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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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