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축구의 영웅들 : 축구 명예의 전당 헌액 7인 열전 - 대한축구협회 엮음 | 랜덤하우스코리아(2005)


오늘날 많은 이들이 축구를 염려한다. 근대성(modernity)을 성찰하는 이들은 축구가 근대의 산물이라며, 민족국가의 정체성을 강화하는데 이바지하는 것을 염려한다. 또 반자본주의 활동가들 중에는 연원이 제법 오래된 3S(Sex, Screen, Sports)정책이나 최근 신경제의 새로운 조직이론, ‘연방주의(federalism)'의 최첨단이자 모태로서 FIFA라는 - 스포츠정신이나 도덕과는 별로 상관없어 보이는 - 조직을 연구한다. 축구를 사랑하는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최근 대한민국 사회에서 축구는 주목할 만한 문화적 현상이다.


축구는
정말 근대의 산물이었을까? 이 문제에 답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일이다. 서구에서 축구는 중세 이래 여러 지역에서 카니발 같은 행사의 여흥을 돋우는, 혹은 제의적 행사로 치러졌다. 우리나라 역시 지금의 축구와는 다른 것이었겠지만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시대 삼국 통일의 주역이었던 김유신과 김춘추가 ‘축국(蹴鞠)’이란 놀이 형태의 공차기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어쩌면 축구란 융의 원형상징처럼 세계의 모든 민족의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대~한민국”
에서 근대축구의 시작은 인천(제물포)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1882년 6월 인천항에 정박한 영국 군함 플라잉 피쉬(Flying Fish)호의 승무원들이 제물포에서 축구하는 것을 아이들이 구경하면서 한국에 근대 축구가 전파되었다. 인천은 한국 축구 월드컵 첫16강의 산실이자 동시에 한국 축구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또 역사적으로 보자면 한국의 근대 축구는 아르헨티나보다는 늦었지만 브라질이나 러시아보다는 좀더 이른 시기에 축구를 접했다. 다소 우스운 말이지만 아르헨티나, 브라질, 러시아 보다 한국이 축구의 역사에 있어서는 선배 격인 셈이다.


대한축구협회
가 엮은 『한국축구의 영웅들』은 그런 한국 축구의 역사 속에서 빛나는 7명을 선정해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펴낸 책이다. 지난 2002년 한․일월드컵의 성공적인 개최 이후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축구 역사를 되돌아 볼 자신감과 여유를 얻었다. 내가 기억하는 한 1982년 미스유니버스 선발대회, 1988년 올림픽 그리고 2002년 월드컵은 대한민국이 치른 국제행사들 가운데 가장 주목해서 살펴볼 만한 것들이다. 광주민중항쟁을 처참하게 진압한 군사정권이 그 피가 채 마르기도 전에 세계의 미인들을 데려다 치른 행사, 정권 차원에서 준비하고, 민주화항쟁의 뜨거운 열기가 가시기 전에 치러진 올림픽과 2002년 월드컵은 여러 차원에서 다른 행사였다.


국민이라 부르든
, 민중이라 부르든 혹은 대중이라 부르든 그 주체의 설정 문제와 상관없이 우리들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자들이 절박한 욕구나 시대적 요구에 의한 것이 아닌 다른 이유로 거리로 쏟아져 나와 그야말로 난장(亂場)을 치른 것은 고려시대 팔관회(八關會)에서 가무백희(歌舞百戱)를 즐긴 이래 최초의 일이 아닐까 싶다. 1902년 배재학당에 최초로 근대적 축구부를 만든 것을 기점으로 삼더라도, 지난 2002년 월드컵 4강은 한국 축구 100년사를 기념하는 의미 있는 축제이기도 했다.


『한국축구의 영웅들』
은 그런 의미에서도 한국 축구 100년사를 정리하는 의미 있는 작업으로 명예의 전당에 헌정된 한국 축구 영웅 7인의 이야기를 열전 형태로 기록하고 있다. 우선 가장 첫 번째로 손꼽히는 인물이 1936년 베를린올림픽 본선에서 일본대표팀의 유일한 한국 선수로 나섰던 故 김용식 옹이다. 그는 지난 2004년 5월에 FIFA로부터 FIFA 100년 기념 공로상(FIFA Centenial Order Of Merit)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종교는 축구라고 자부했다. 김용식은 젊었을 때 훌륭한 축구 선수가 되기 위해 첫째 술이나 담배에 일절 손대지 말고, 둘째 여자를 멀리하고, 셋째 마흔 살이 될 때까지 현역으로 뛸 것이며, 넷째 훌륭한 선수가 되기 위해 어떤 경우에도 교만하지 말고 겸손할 것을 스스로에게 서약했다. 물론 그는 이 모든 서약을 철저하게 지켰고, 마흔 세 살 까지 현역 선수 생활을 했다.


『한국축구의 영웅들』
은 인물을 중심으로 한 열전의 형태이지만 동시에 당시 시대상을 함께 엿볼 수 있게 꾸며져 있다. 예를 들어 김용식 편에서 우리는 당시 중등부 팀이었던 경신이 극동경기대회에 일본 대표로 참가하고 돌아가던 길에 조선에 들른 와세다 대학 축구팀에게 4:3으로 승리한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 그리고 승승장구하던 김용식이 광주 학생운동에 연루되어 결국 퇴학당하고 말았던 사실도 알게 된다. 그런 그가 베를린 올림픽에 일본 국가대표팀의 유일한 조선인 선수로 참가해야만 했던 심정은 어땠을까.


한국 축구의 역사
속에 영광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 책에는 1948년 런던 올림픽에서 스웨덴전에 0:12로 패패, 1954년 스위스 월드컵 헝가리전에서 0:9로 패하면서 가슴에 피멍이 들도록 한국 축구의 유년기를 지켜낸 골키퍼 홍덕영의 이야기도 만날 수 있다. 또 조금만 더 좋은 시대에 태어났다면 세계적인 스트라이커로 명성을 떨칠 수 있었던 한국 축구 스트라이커 계보사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이회택과 경제개발 시대 국민적 기대와 열망을 안고, 해외로 송출된 차범근, 축구계 인사들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덜 알려진 편이었던 국제심판 김화집 등의 이야기가 감동적으로 펼쳐진다.


한국 축구 명예의 전당에는
벽안의 외국인 거스 히딩크도 있다. 벽안의 이방인 히딩크가 한국 축구와 인연을 맺은 것은 불과 1년 6개월이었지만 그가 남긴 족적은 같은 네덜란드인이었던 하멜이나 박연이 남겼던 것과는 확연하게 다른 것이다. 그리고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을지도 모를 인물 정몽준 대한축구협회 회장의 이야기도 있다. 물론 공과를 따지기에 앞서 정몽준의 공적은 인정받을 만하지만 자신이 재임하는 중에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남기는 것은 그 선정과정이 아무리 엄정했다 하더라도 좋은 선례라고 보기엔 아쉬움이 남는다.


근대 축구의
종가라 할 수 있는 영국에서 축구는 근대산업문명을 거치면서도 여전히 과거의 민중(folk)적 놀이문화의 전통을 고수했다는 점에서 ‘여가의 상업화’, 자본주의적 레저 활동과는 일정하게 구분되는 면모를 지닌다. 아마도 그와 같은 노동자 문화의 전통이 오늘날 영국 사회의 뿌리 깊은 축구 사랑의 원천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현대라 부르는 시대, (근대)문화의 대부분은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일부 역사학자들의 주장을 100% 수용하지는 않더라도 일본에 의해, 혹은 일본과 겨루는 과정에서 - 물론, 그것이 시혜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당연한 만큼 - 강력하게 축적된 것들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 대표적인 증거가
또한 축구다. 많은 이들이 한국축구에서 국가주의의 증거를 발견하려고 한다. 그런 증거로 제시될 수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국가대표축구의 인기와 비례하지 않는 프로축구다. 하지만 이런 현상을 전적으로 국가주의의 결과물로만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 왜냐하면 한국에서의 축구문화는 지역(성)이 과소하고, 중앙이 과대화된 현실의 반영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중앙의 문화흡인력에 저항할 수 있는 지역(이웃)문화의 부재가 축구에서 나타나 자신의 귀속대상을 찾지 못한 현상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에게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 한 가지는 한 사회의 행복과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사회의 통합을 가능하게 해주는 존재가 필요하며(체제나 시대가 바뀌어도) 그것이 축구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동시에 축구에 열광하는 이들을 우민(愚民)시 해야 할 만큼 우리 사회의 대중이 덜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는데 희망을 걸어보면 안될까. 우리가 국민이라는 단일한 호명의 대상으로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아마도 축구와 축구를 즐기는 민중들은 자본주의 시대보다 힘이 세고 더 오래 갈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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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그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1987년 그의 노래들이 해금된 이후였다. 그러나 한국에서 한대수는 여전히 가수라기 보다는 기인적인 풍모, 사회의 아웃사이더로 일반인의 정서에 부합하는 가수는 아니었다. 아마도 그런 까닭에 가수로서 활동한지 30년이 지난 2001년 10월에서야 비로소 자신의 두 번째 콘서트를 열 수 있었으리라. 머리에 꽃을 꽂은 청년이 초로의 중년이 될 때까지 한국에서 머리에 꽃을 꽂은 사람은 그저 미치광이였을 뿐이다. LP시절 만났던 그의 첫 앨범을 CD로 다시 만났다. 청년 한대수의 노래를 당신에게 권해본다.


물 좀 주소 물 좀 주소 목 마르요 물 좀 주소
물은 사랑이여 나의 목을 간질여 놀리면서 밖에 보내네
난 가겠소 나는 가겠소 저 언덕 위로 넘어가겠소
여행 도중에 처녀 만나 본다면 난 살겠소 같이 살겠소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물 좀 주소 물 좀 주소 목 마르요 물 좀 주소
그 비만 온다면 나는 다시 일어나리 아 그러나 비는 안오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어렸을 적 대학 다니던 삼촌이 사들였던 LP중에는 한대수가 가방을 어깨에 짊어매고 초가집이 있는 시골 밭두렁길을 걸어가는 사진으로 장식된 그의 1집 앨범 <멀고먼-길>이 있었다. 구닥다리 턴테이블이었지만 LP음반을 통해 처음 접했던 한대수의 음악은 어린 마음에도 충격이었다. 그 무렵 나는 송창식의 최대히트곡 중 하나인 <피리부는 사나이>를 콧노래로 흥얼거리며 뛰노는 어린아이였는데, 어느날 갑자기 송창식이 향군법 위반 혐의로 끌려가면서
(그때의 충격으로 나는 민방위비상소집도 열심히 나간다) 뭐 다른 노래 들을 만한 것이 없나 삼촌의 LP창고를 뒤적이다 발견한 것이 한대수의 <멀고먼-길>이었다.


출처: 월간사진 http://www.monthlyphoto.com

개인적으로 한국 포크음악사에서 가장 중요한 뮤지션 세 사람을 꼽으라면 나는 송창식, 한대수, 김민기라고 생각하는데, 언급한 순서는 사실 내가 그들을 처음 만난 순서이기도 하다. 시인에 빗대어 하는 비유가 적절할지는 모르겠지만 송창식이 서정주에 가깝다면, 한대수는 김수영, 김민기는 신동엽의 흐름과 근사치를 이룬다고 생각한다. 송창식은 번안곡으로 시작해 트로트와 국악을 그의 음악에 접맥했다면, 한대수는 밥 딜런류의 사실적인 포크에 한국적인 정서를 가미했고, 김민기는 서구적 포크의 전통을 한국적 현실에 맞춰 계승한 인물들이다. 이들 세 사람은 포크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인 싱어송라이터의 개념에 부합하는 인물들이기도 했다.


어쨌든 송창식에서 한대수로 처음 넘어갔을 때 한대수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뭐, 이렇게 노래 못하는 가수가 다 있냐?'였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한대수의 보컬은 가수로서의 본격적인 트레이닝으로 다듬어진 목소리가 아닌 '날것'이었기 때문에 그동안(1977년 무렵까지, 무려 내 나이 8살 때까지) 내가 접해왔던 가수들의 목소리와는 완전히 다른 부류의 것이었다. 아마도 그의 목소리가 언더그라운드로 묻히게 된 까닭 중 하나는 정치적인 금지조치 이외에도 당시 대중적으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그의 보컬에도 영향이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한대수'란 가수는 2집 앨범 <고무신> 마저 반체제적이란 이유로 금지되면서 더이상 노래를 계속하기 어려워진다. 그의 2집 앨범이 반체제적이란 지적을 받은 이유는 앨범 재킷 사진이 문제가 되었는데 높은 벽돌담 위 가시철조망에 놓인 고무신이 반체제적이라는 지적을 받았기 때문이다. 포크음악에 대한 체제의 감시와 억압이 심해지자 결국 그는 노래를 접고, 모신문사의 사진기자로 일하다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박광현 감독의 영화 <웰컴 투 동막골>에서 배우 강혜정은 약간 모자라지만 때묻지 않은 동막골의 순수를 머리에 꽂은 꽃으로 표현한다. 동막골은 민족이 서로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눈 한국전쟁의 이념도, 정치도 사라진 가상의 비무장지대(DMZ)를 넘어 유토피아로 상징된다. 그런 '동막골'에 불쑥 난입하게 된 전사들은 서서히 이들의 순수에 감화된다. 인민군 하사관 장영희(임하룡)의 명대사 "내레 꽃 꽂았습니다"는 이념과 정치, 증오와 분노를 넘어 사랑과 평화, 자연과 신비로의 전이를 의미한다. 정치적으로 적녹색맹인 수구보수세력들은 <웰컴 투 동막골>에서 친북의 색채를 읽었지만 이 영화는 서구의 1960년대 히피문화를 연상케하는 매우 복고적인 영화였다.



1960년대말 미국은 '꽃을 든 아이들(flower children)'이란 히피들을 중심을 기존의 제도정치와 문화에 도전하는 청년문화가 출현했고, 그 한 가운데 있었던 것이 포크음악과 사이키델릭 록음악이었다. 미국의 문화적 영향력 속에 갇혀있던 한국사회에도 자연스럽게 이들의 문화가 흘러들기 시작했다. 명분없는 베트남전쟁에 반대했던 당시의 청년들은 '반전, 평화, 사랑'을 구호로 1969년 8월 우드스탁 페스티벌을 열었고, 3일간 치러진 이 행사에는 50만명의 청년들이 모여 자유롭게 사랑을 나누고, 마리화나를 피웠다. 우드스탁 페스티벌에는 조니 미첼, 크로스비. 스틸. 내시&영, 지미 헨드릭스, 제퍼슨 에어플레인, 산타나 등 당대 최고의 포크와 록 뮤지션들이 무대에 올랐다.



미국으로부터 유입된 포크문화는 1968년 <트윈폴리오>에 의해 번안곡 형태로 반영되었다. 본래 <트윈폴리오>는 송창식, 윤형주, 이익근 트리오로 구성되었으나 이익근이 군에 입대해야 하는 바람에 송창식, 윤형주만의 '트윈'으로 출발했다.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은 한국 포크의 트로이카를 이루었지만, 이들이 노래했던 포크 음악가 히트곡들은 주로 번안곡 위주로 구성되었다는 한계가 있었다. 단 한 장의 데뷔음반을 끝으로 해산한 <트윈폴리오>에서 이후 솔로로 독립하여 본격적인 포크음악을 시작한 송창식과 함께 한국에서 본격적인 포크음악의 출발, 한국적인 포크음악을 시작한 사람이 누구냐라고 물을 때 우리가 먼저 떠올려야 할 사람은 '한대수'다.




한대수는 선교사였던 할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갔지만 미국인 새어머니와 함께 살던 십대 시절엔 불량써클에도 가입하는 등 말썽장이이기도 했다. 사진가를 꿈꾸었던 그는 뉴욕의 사진학교에서 사진을 공부하면서 밥 딜런, 도노반 등의 포크 음악에 깊이 매료되었다. 귀국 후에는 한국 청년문화의 산실이라 할 수 있는 서린동의 음악감상실 '세시봉'에서 노래를 했는데 이것이 인연이 되어 TBC의 <쇼쇼쇼>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되었다. 장발의 히피 청년이었다. <트윈폴리오>의 부드러운 포크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한대수의 노래는 쉽게 이해받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의 노래에 감동한 두 명의 여성 팬이 자청해 한대수의 콘서트를 열어주었는데 1969년 9월 남산드라마센터에서 열린 그의 공연은 한국 포크 음악의 진정한 시작을 알렸다.



그의 뒤를 이어 서유석, 양병집, 김민기 등이 출현했다. 그러나 파격적인 한대수의 풍모와 행동, 세태 풍자적인 노래들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못했고, 히피문화와 포크를 미국의 저질문화로 생각한 일부 사람들은 한대수에게 미국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한대수의 1집에 실린 그의 대표곡 중 하나인 <물 좀 주소>는 물고문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금지곡이 되었다. 군사정권은 '물'이라는 말이 상징하는 바가 의미심장하다고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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