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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근 - 길 길 - 박영근 장지문 앞 댓돌 위에서 먹고무신 한 켤레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동지도 지났는데 시커먼 그을음뿐 흙부뚜막엔 불 땐 흔적 한 점 없고, 이제 가마솥에서는 물이 끓지 않는다 뒷산을 지키던 누렁개도 나뭇짐을 타고 피어나던 나팔꽃도 없다 산그림자는 자꾸만 내려와 어두운 곳으로 잔설을 치우고 나는 그 장지문을 열기가 두렵다 거기 먼저 와 나를 보고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저 눈 벌판도 덮지 못한 내가 끌고 온 길들 * "나는 그 장지문을 열기가 두렵다" 시인의 시가 가슴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사실 이런 일이 좋은 건 아니다. 그건 내가 몹시 지쳤거나 다쳤거나 힘겹다는 증거다. 거기 먼저 와 나를 보고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저 눈 벌판도 덮지 못한 내가 끌고 온 길들 시인의 마지막 연이 나를 .. 더보기
윤제림 - 길 길 - 윤제림 꽃 피우려고 온 몸에 힘을 쓰는 벚나무들, 작전도로 신작로 길로 살 하나 툭 불거진 양산을 쓰고 손으로 짰지 싶은 헐렁한 스웨터를 입고 곰인형 가방을 멘 계집애 손을 붙들고 아낙 하나가 길을 간다 멀리 군인트럭 하나 달려가는 걸 보고, 흙먼지 피해 일찍 피어난 개나리 꽃 뒤에 가 숨는다 흠칫 속도를 죽이는 트럭, 슬슬 비켜가는 짐 칸 호로 속에서 병사 하나 목을 빼고 외치듯이 묻는다 "아지매요, 알라 뱄지요?" 한 손으로 부른 배를 안고,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아낙이 수줍게 웃는다 금방이라도 꽃이 피어날 것 같은 길이다. * "아지매요, 알라 뱄지요?" 내가 아주 어렸을 적 동네 어귀에서 부른 배를 뒤뚱거리며 걷는 아줌마를 본 적이 있다. 한동안 우두커니 서서 아줌마 저 배에 들어있는 게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