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표 시인 초간본 총서 - 전20권 
김광균 | 김기림 | 김소월 | 김영랑 | 박남수 | 박목월 | 백석 | 오장환 | 유치환 | 윤동주 | 이육사 | 임화 | 정지용 | 조지훈 | 한용운 | 박두진 | 이용악 | 김상용 | 김억 | 김창술 (지은이) | 열린책들(2004)





위에서 언급하고 있는 시인 18인은 우리 문학사를 다루고 있는 책이라면 어느 책이든 빼놓지 않는 이들의 이름이다. 그러나 정작 이들의 시집을 찾아 읽는 일은 쉽지 않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우선 낯익음이 주는 게으름이 이들의 시집을 읽지도 않은 체 이미 다 아는 양하게 만들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이들의 시집은 주로 선집 혹은 전집 그도 아니면 여러 시인들을 한데 묶은 편집판본들이 허다하게 널린 탓이다.

 

모두 20명의 시인들의 펴낸 그네들의 시집 초간본을 한데 묶은 이 "초간본총서"는 "열린책들"이란 출판사의 기획력을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나 된다. 출판에 있어 총서(叢書)라는 것은 "일정한 주제(主題)에 관하여, 그 각도나 처지가 다른 저자들이 저술한 서적을 한데 모은 것"이라 정의된다. 그러므로 이들을 한데 묶어주는 기획에 있어 원칙이란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이 전체 기획의 통일성을 주기 때문이다. 이들은 시집을 선정하는 기준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첫째, 한국 현대시 100년사에 남아야 될 작품성 있는 시집, 둘째, 그중에서 문학사적으로 의의가 있는 시집을 골랐다. 표기는 원칙적으로 현행 맞춤법에 맞추었지만 특별한 시적 효과와 관련된다고 판단된 경우 원문의 표기를 그대로 살렸으며 필요한 경우 편자 주를 달았다." 그외의 점에서 이 책은 총서로서 뛰어난 역량과 아담한 판형과 제본 솜씨를 보이고 있으며, 쪽수면에서 얇은 시집의 특성상 낱권 보관의 어려움을 배려하여 예쁘게 박스 포장하는 배려까지 기울였다.(소장용으로도 그만이란 뜻이다)

 

우리는 문학 수업 시간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개인시집으로 소월의 스승이기도 한 김억의 시집 "해파리의 노래"라고 배웠다. 이 시집은 모두 164쪽으로 1923년 조선도서주식회사에서 간행되었다. 책의 첫머리에는 춘원 이광수(李光洙)와 지은이의 서문이 있고, 총 83편의 시를 9장의 구분으로 나누어 싣고 있다. "열린 책들"에서 출간된 김억의 시집 "해파리의 노래"를 살펴보니 틀림없이 내가 배우고 알고 있는 김억의 초판본의 수록 형태와 내용을 빠짐없이 담고 있었다. 춘원은 이 시집의 서문에서 "인생에는 기쁨도 많고 슬픔도 많다. 특히 오늘날 흰옷 입은 사람의 나라에는 여러가지 애닮고 그립고, 구슬픈일이 많다. 이러한 <세상살이>에서 흘러나오는 수없는 탄식과 감동과 감격과 가다가는 울음과 또는 우스꽝과, 어떤 때에는 원망과 그런 것이 시가 될 것이다. 흰옷 입은 나라 사람의 시가 될 것이다. .....<중략>..... 어디 해파리, 네 설움, 네 아픔이 무엇인가 보자." 라고 말한다.

 

이렇듯 이 총서는 우리 문학사의 중요한 시기이면서 상대적으로 접근하기 어려웠던 시기의 시인 18명의 시집 20권을 초간본 형태의 원형 그대로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런 기획 자체는 앞으로도 더욱 많아지길 희망하게 되는 그런 류의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 책의 장점은 이 책의 단점이기도 하다. 만약 원형 그대로의 초간본 형태를 보여준다면 일반 독자들은 과거의 맞춤법에 따른 이 시집들을 읽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 탓에 총서기획자들은 보다 대중적인 시집으로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 시집의 맞춤법과 문장 형태를 현대적인 것으로 개작하였으리라.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이것은 매우 합리적이고, 대중을 위한 배려이다. 그러나 연구자료로서 이 책을 기대했던 문학연구자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 책은 이전에 출판되었던 다른 시집들과 변별점을 찾기 어렵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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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전집』 - 백석 | 김재용엮음 | 실천문학사(2003)


백석전집 혹은 "백석"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쯤 해보자고 마음 먹은지는 상당히 오래되었다. 그럼에도 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아직도 어렵다.

 

"밤이 깊어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르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하고 제비손이손이하고이렇게 화디의 사기방등에서 심지를 몇 번이나 돋구고 홍게닭이 몇 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릇못싸움 자리싸움을 하며 히드득거리다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치는 아침 시누이 동세들이 욱적하니 홍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틈으로 장지문틈으로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 '여우난골족(族)' 중에서>

 

백석의 시 "여우난골족" 중 뒷부분만 발췌해봤다. 과연 저 시를 읽으며 중간에 사전 혹은 다른 해설 없이 읽는 것이 쉬운 일일까? '엄매'는 엄마일 테고, '아르간'은 '아랫간'일 테지만, '조아질'이라니 이건 무슨 말일까?

 

백석의 시를 좋아하는 이들이 부쩍 많이 늘었다. 지금 30대 이상인 사람들은 백석이란 이름을 교육 과정을 통해서는 한 번도 접해볼 수 없었다. 그런 시인이 어디 백석뿐이랴. 우리는 김기림(金起林), 박팔양(朴八陽) 등 소위 월북작가로 분류되었던 이들의 시를 접할 기회가 없었다. 백석을 비롯한 이들이 해금되어 본격적으로 다뤄지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반부터의 일이었다. 시인 고은(高銀)은 백석의 시를 “근대 시사(詩史)에서 가장 빛나는 시 중의 하나”라고 평했다. 고은뿐만 아니라 시인 신경림은 "내가 우리 시에서 단 하나만 꼽으라 해도 서슴지 않고 꼽는 시인이 백석이다"라고 단언하기도 했다. 문학평론가 김현은 "백석의 시 '남신의 주류동박시봉방'은 한국시가 낳은 가장 아름다운 시 중의 하나다"라고 말하며 그의 시가 지닌 아름다움에 아낌없는 헌사를 바치기도 했다.


 ▶ 아오야마(靑山) 학원 3년 무렵의 백석

그런 시인이 오랫동안 묶여 있었으니 우리 문학사에 드리워진 냉전과 분단의 그림자는 한반도의 허리만 두동강낸 것이 아니었다. 백석은 1912년 평북 정주에서 출생했다. 그의 본명은 백기행(白夔行). 1929년 오산고보를 졸업한 뒤 그는 도쿄로 건너가 아오야마(靑山) 학원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그가 필명으로 백석(白石)을 사용한 것은 일본 시인 "이시카와 타쿠보쿠(石川啄木)"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일본에서 새로운 문물과 문화를 익혔고, 1935년 조선일보에 '정주성'을 발표하며 문단에 나온 뒤 그의 별명은 '모던보이'였다. 그의 시가 한없는 토속성에 기대어 있는 것과 상관없이 그의 잘생긴 외모와 풍기는 멋으로 인해 지어진 별명이었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중에서>

 

백석의 고향 정주는 눈이 많은 곳이었다. 그가 수원 백씨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의 시에서 백색의 이미지는 고향 정주의 휘날리는 눈발과 함께 백석의 시세계의 주된 심상 중 하나이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 그에게 내리는 눈은 그냥 내리는 눈이 아니라 '가난한 내가' '나타샤'를 사랑하기에 내리는 눈이다. 나타샤, 자야(子夜)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진 김영한은 1916년 서울에서 태어나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했다. 원래 가난한 집안 출신은 아니었으나 어머니가 친척에게 속아 가산을 탕진하고, 거리에 나앉게 되어 조선 권번에 들어가 기생이 된 여인이었다. 자야의 기명은 진향(眞香). 당시 기생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기생과는 다른 의미에서 신여성이었다.



 

김영한은 당시 함흥 영생여고 교사들의 회식 장소에 나갔다가 우연히 백석을 접하게 된다. 백석은 김영한에게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에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내 사랑 백석’에서>라고 말했다 한다. 김영한에게 자야라는 아호를 지어준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子夜吳歌

李白

長安一片月 장안의 한조각 밝은 달 밤에
萬戶擣衣聲 집집마다 다듬이 소리 들려오고
秋風吹不盡 가을바람 소리 그치지 않으니
總是玉關情 이 모두 옥관을 향한 정이리라
何日平胡虜 어느 날에야 오랑캐 평정하고
良人罷遠征 원정 마치고 우리 낭군 돌아올까

 

이 시는 서역 원정을 나선 연인을 기다리는 여인의 정조를 그린 시이다. 김영한에게 자야라는 호를 지어준 탓일까. 백석과 자야는 이렇듯 평생을 서로 연모하며 지내야 할 운명이었다. 자야가 서울로 돌아온 뒤 백석은 학교를 그만두고, 백석을 따라 서울 청진동으로 올라와 두 사람은 혼례도 없이 살림을 차린다. 이상과 금홍이가 이 시절 그러했던 것처럼... 백석은 자야를 통해 많은 시적 영감을 얻는다.

 

바닷가에 왔드니
바다와 같이 당신이 생각만 나느구려
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

 

구붓하고 모래톱을 오르면
당신이 앞선 것만 같구려
당신이 뒤선 것만 같구려

 

그리고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
당신이 이야기를 끊는 것만 같구려
<'바다' 중에서>

 

그러나 두 사람의 사랑이 오래가지는 못했다. 백석의 아버지는 이 사실을 알고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을 떼어내기 위해 강제로 결혼을 시킨다. 부모의 강요에 못이겨 결혼하였으나 자야를 잊지 못한 백석은 다시 자야에게 도망질쳐 온다. 동경 유학생 백석과 자야는 그렇게 뜨거운 사랑을 불태웠으나 결국 사랑을 이루지 못했다. 백석은 자야에게 함께 만주로 도망쳐 살자고 했으나 자야는 이를 거절했다.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중에서>

 

자야, 아니 나타샤는 끝끝내 오지 않았다. 자야는 자신 때문에 한 명의 훌륭한 시인, 아니 자신의 연인이 행보에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었다. 결국 1939년 백석은 '100편의 시를 담고서' 돌아오겠다는 결심을 하고, 홀로 만주 신경으로 떠난다. 두 사람은 이것이 영원한 이별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만주에서 잠시 세관 업무를 하기도 했으나 해방 이후엔 고향 정주로 돌아와  ‘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을 발표한다.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끝에 헤메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남신의주(南新義州) 유동(柳洞) 박시봉방(朴時逢方)' 중에서>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은 그가 분단 이전에 발표한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백석에게 '월북 작가'란 딱지를 붙이는 것은 잘못된 것이었다. '남의 정지용, 북의 백석'이라고 하듯 백석은 한 번도 월북한 적이 없었다. 그의 고향이 평북 정주였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죄가 있다면 '월북'한 것이 아니라 '월남'하지 않은 것이겠지만, 그에게 고향이 담고 있는 의미를 생각한다면 쉽게 결론지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북관(北關)에 혼자 앓아 누어서
어느 아침 의원(醫員)을 뵈이었다
의원은 여래(如來) 같은 상을 하고
관공(關公)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옛적 어느 나라 신선 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더니
문득 물어 고향이 어데냐 한다
평안도 정주라는 곳이라 한즉
그러면 아무개씨 고향이란다
그러면 아무개씰 아느냐 한즉
의원은 빙긋이 웃음을 띠고
막역지간(寞逆之間)이라며 수염을 쓸는다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의원은 또 다시 넌지시 웃고
말없이 팔을 잡아 맥을 보는데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故鄕' 전문>

 

백석의 시에서는 평안북도의 토속 방언들이 생생하게 묻어나고 있다. 해방 이후까지 박인환이 모더니즘의 독소로부터 헤어나오지 못하는 동안, 김수영이 모더니즘을 '근대를 향한 모험'으로 삼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평생을 노력한 것을 생각해보면 그보다 훨씬 이른 시기라 할 수 있는 1930년대 백석은 '근대'라 할 수 있는 '모더니즘'과 '전근대'라 할 수 있는 '민족'을 결합해냈다.



  1980년대 중반 백석이 70대 중반일 무렵 촬영한 가족사진. 백석 옆이 부인 이윤희씨, 뒤는 둘째아들(중축 씨)과 막내딸.

오랫동안 금기였던 시인이었기 때문일까? 1987년의 해금 이후 이동순의 "백석 시전집"을 비롯해 내가 알고 있기로만 "백석 시전집"은 네 차례에 걸쳐 만들어졌다. 평생을 살며 시를 쓰지만 전집은 커녕 한 권의 시집을 묶기도 쉽지 않은데 비해 어쩌면 그는 호사를 누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백석의 시전집은 아직도 미완성일 게다. 이동순의 백석시전집에는 그가 북에 남아 있는 동안 쓴 시들은 누락되어 있고, 북한문학연구가 김재용(원광대 교수)의 이 전집은 백석이 북에 머무는 동안 쓴 동화를 비롯해 여러 작품들을 수록하고 있다. 제1부에서는 8.15이전에 발표된 그의 첫시집 "사슴"에 수록된 작품을 비롯해서 이에 수록되지 않은 작품들과 수필, 소설 등을 담고, 제2부에서는 8.15 이후 즉, 그가 북한에 머무는 동안 발표한 작품들을(여기에는 국내에도 동화로 출판된 바 있는 백석의 동화시 '집게네 네 형제'가 포함되어 있다)을 수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어디 전부일까. 사실 김재용 교수의 "백석 전집"은 가치있는 책이긴 하지만 몇 가지 점에서 아쉬움을 남긴다. 앞서 '여우난골족'에서도 이야기했듯 오늘날 우리에게 백석이 살던 시기의 평북 방언이 생생하게 전달되기 어렵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이해하기 어려운 시어들에 대해서는 편집자주 처리를 해서라도 원뜻을 밝혀주었어야 한다. 다음 개정증보판에서는 이런 점들과 다른 미비점이 좀더 보충될 수 있기를 바란다.

 

한동안 백석은 1961년 '돌아온 사람' 등 3편을 "조선문학" 지에 발표한 뒤 숙청된 것으로 알려져 왔고, 1963년 52세를 일기로 사망했을 것이라는 설도 있었다. 지난 1999년 세상을 등진 자야 김영한은 매년 백석의 생일인 7월 1일 하루 동안은 일체의 음식을 먹지 않았다고 하는데, 실제 백석은 1995년 1월 8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밝혀졌다. 이 해에는 자야 김영한이 "내 사랑 백석"을 '문학동네'에서 발간하기도 했다. 김영한은 1997년 창작과비평사에 2억원을 재원을 출연해 '백석문학상'을 제정토록했다. 시집을 대상으로 선정하는 백석문학상은 1999년부터 수상되기 시작했다. 자야는 이 상이 처음 시행되던 1999년 11월 백석이 있는 세상으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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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가(戀歌)

- 김기림

두 뺨을 스치는 바람결이 한결 거세어 별이 꺼진 하늘 아래
짐승처럼 우짖는 도시의 소리 피해오듯 돌아오면서
내 마음 어느 새 그대 곁에 있고나
그대 마음 내게로 온 것이냐

육로(陸路)로 천리(千里) 수로(水路) 천리
오늘 밤도 소스라쳐 깨우치는 꿈이 둘
가로수 설레는 바람소리 물새들 잠꼬대……
그대 앓음소리 아닌 것 없고나

그대 있는 곳 새나라 오노라 얼마나, 소연하랴
병 지닌 가슴에도 장미 같은 희망이 피어
그대 숨이 가뻐 처녀같이 수다스러우리라

회오리 바람 미친 밤엔 우리 어깨와 어깨 지탱하여
찬비와 서릿발 즐거이 맞으리라
자빠져 김나는 뭉둥아리 하도 달면 이리도 피해 달아나리라

새나라 언약이 이처럼 화려커늘
그대와 나 하루살이 목숨쯤이야
빛나는 하루 아침 이슬인들 어떠랴
({중앙신문}, 1946.4.27)

*

사람들은 가끔 자신의 한 몸을 희생해서 세상을 구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이 한 몸 바칠 각오가 되어 있다고 생각하거나 말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 한 몸 조국을 위해 바칠 수 있고, 신을 위해 생명을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상이, 조국이, 신이 제정신이라면 그렇게 스스로도 가치없고, 하찮게 생각하는 목숨이라면 별로 중하다 생각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와 반대의 경우로 당신이나 나의 목숨이 당신이나 나에게나 중요한 것이지 남들에게도 똑같이 중한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그러나 옛 어르신들은 참깨 하나 털면서도 조심조심해서 털고, 우리들의 먹을 거리 하나도 허투루 다루지 않으려 했다. 그것이 다른 생명을 섭취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이 다른 생명들에 대해서 갖출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 같은 것일게다. 혹시 밥상없이 맨땅에서 밥을 먹게 되더라도 먹는 사람은 맨땅에 앉지만 먹을 거리들은 반드시 어딘가 올려놓고 먹도록 하고 맨땅에 내려두지 않았다고 한다.

생명에 대한 경외심과 고마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니까 나의 생명도 중히 여기시고, 나의 생명을 중히 여기는 만큼 남의 생명도 중히 여기시길. 그리고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해 죽지 마시고, 열심히 살자. 김기림 시인의 시를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은 어인까닭일가?

**

김기림(본명 : 김인손)은 1908년 5월 11일 함경북도 학성에서 출생하였다. 부친 김병연은 과수원과 많은 전답을 가지고 있었다. 1914년 김기림은 임명보통학교에 입학했고, 1921년 상경해서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병 때문에 중퇴한다. 그는 1925년 일본으로 건너가 이듬해 니혼(日本)대학 문과에 입학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뒤 <조선일보> 기자로 근부하며 주로 G.W.란 필명으로 글을 발표하였다. 1933년 이효석, 조용만, 박태원 등과 함께 구인회를 결성하여 활동하였고, 특히 나중에 가입한 이상, 박태원 등과 친하게 지냈다. 1936년 신문사의 후원으로 도후쿠(東北)제국대학 영문과에 입학, 1939년 도후쿠 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되자 낙향하여 고향 인근의 경성중학에서 영어와 수학을 가르치다가 해방 이후 서울로 올라와 조선문학가동맹에 참여, 중앙집행위원 및 서울시 문학가동맹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6.25때 서울에 머물러 있다가 인민군에게 납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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