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가에서

- 김수영

저이는 나보다 여유가 있다
저이는 나보다도 가난하게 보이는데
저이는 우리집을 찾아와서 산보를 청한다
강가에 가서 돌아갈 차비만 남겨놓고 술을 사준다
아니 돌아갈 차비까지 다 마셨나 보다
식구가 나보다도 일곱 식구나 더 많다는데
일요일이면 빼지 않고 강으로 투망을 하러 나온다고 한다
그리고 반드시 4킬로가량을 걷는다고 한다

죽은 고기처럼 혈색 없는 나를 보고
얼마전에는 애 업은 여자하고 오입을 했다고 한다
초저녁에 두 번 새벽에 한 번
그러니 아직도 늙지 않지 않았느냐고 한다
그래도 추탕을 먹으면서 나보다도 더 땀을 흘리더라만
신문지로 얼굴을 씻으면서 나보고도
산보를 하라고 자꾸 권한다

그는 나보다도 가난해 보이는데
남방셔츠 밑에는 바지에 혁대도 매지 않았는데
그는 나보다도 가난해 보이고
그는 나보다도 짐이 무거워 보이는데
그는 나보다도 훨씬 늙었는데
그는 나보다도 눈이 들어갔는데
그는 나보다도 여유가 있고
그는 나에게 공포를 준다

이런 사람을 보면 세상사람들이 다 그처럼 살고 있는 것 같다
나같이 사는 것은 나밖에 없는 것 같다
나는 이렇게도 가련한 놈 어느 사이에
자꾸자꾸 소심해져만 간다
동요도 없이 반성도 없이
자꾸자꾸 小人이 돼간다
俗돼간다  俗돼간다
끝없이 끝없이 동요도 없이

(1964년)

*


김수영을 일컬어 한국 현대시의 신화라고도 부르지만 아마도 이런 호명법에 대해 김수영 자신은 그다지 마뜩지 않게 여겼으리란 생각이다(개인적으로는 나역시 가장 좋아하는 시인 중 한 명인 김수영은 물론 그처럼 높이 평가받을 만한 시인이지만 동시에 지나치게 과대평가된 측면도 없지 않다). 무엇보다 그가 이런 평가를 마뜩지 않게 여겼을 것이란 사실은 김수영의 시 세계가 바로 신화 혹은 그 자신을 포함해 무엇이 되었든 덧씌우고 포장하는 코스튬을 경멸해 왔기 때문이다.


김수영의 시에서 자아는 거의 대부분 자아 과잉 상태에서 거울 혹은 도마 위에 올려진다. 이 시 "강가에서" 역시 첫 구절 "저이는 나보다 여유가 있다"로 시작한다. 시적 자아는 타인을 통해서 혹은 그 자신의 자아에 의해 분석대상이 되고 있다. 시 속의 '저이'는 '나'보다 가난해 보이지만 여유가 있고, 식구가 나보다도 일곱이나 많지만 돌아갈 차비만 남겨놓고 술을 사줄 만큼 호기롭다. 그리고 그는 일요일이면 빼지 않고 강으로 투망을 하러 나오고, 반드시 4킬로미터 가량을 걷는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건...

죽은 고기처럼 혈색 없는 나를 보고
얼마전에는 애 업은 여자하고 오입을 했다고 한다
초저녁에 두 번 새벽에 한 번
그러니 아직도 늙지 않지 않았느냐고 한다

그이는 '애 업은 여자'와 오입한 자신의 부도덕에 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고, 애 업은 여자와 초저녁에 두 번, 새벽에 한 번 오입할 수 있었던 자신의 성적 능력을 아무 고민 없이 자랑할 만큼 속물이다. 게다가 그는 '나보고도/ 산보를 하라고 자꾸 권한다'. 시적 자아는 그와 나를 비교하면 할수록 안으로부터 파괴된다. 나의 어조는 그에 대해 부정적으로 비교하고 있으나 그는 이미 나의 염치나 윤리의식 따위 개나 물어가라는 식으로 전혀 개의치 않는다. 부러우면 지는 거라고 했던가? 그에게 그런 의식 따위 없으니 도리어 부끄러워진 건 '나'이다. 그런데 이 '나'는 사지육신 멀쩡한 나(자아)인가?

이런 사람을 보면 세상사람들이 다 그처럼 살고 있는 것 같다
나같이 사는 것은 나밖에 없는 것 같다

나는 '나같이 사는 것은 나밖에 없는 것 같다'고 느낄 만큼 왜소해진 '나'이다. "동요도 없이 반성도 없이/ 자꾸자꾸 小人"이 되어가는 나를 김수영은 마치 도마 위의 생선처럼 올려놓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생선이 너무나 생생하고, 신선해서 마치 금방이라도 바닷속에서 끄집어 올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린다는 거다.

죽은 고기처럼 혈색 없는 나를 보고
얼마전에는 애 업은 여자하고 오입을 했다고 한다
초저녁에 두 번 새벽에 한 번
그러니 아직도 늙지 않지 않았느냐고 한다

이토록 파괴적인 정황을 시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쓰고 있는 김수영의 정직함은 무시무시하지만, 그가 느꼈을 위선과 암울한 시대가 또한 그를 사정 없이 내몰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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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백석전집』 - 백석 | 김재용엮음 | 실천문학사(2003)


백석전집 혹은 "백석"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쯤 해보자고 마음 먹은지는 상당히 오래되었다. 그럼에도 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아직도 어렵다.

 

"밤이 깊어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르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하고 제비손이손이하고이렇게 화디의 사기방등에서 심지를 몇 번이나 돋구고 홍게닭이 몇 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릇못싸움 자리싸움을 하며 히드득거리다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치는 아침 시누이 동세들이 욱적하니 홍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틈으로 장지문틈으로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 '여우난골족(族)' 중에서>

 

백석의 시 "여우난골족" 중 뒷부분만 발췌해봤다. 과연 저 시를 읽으며 중간에 사전 혹은 다른 해설 없이 읽는 것이 쉬운 일일까? '엄매'는 엄마일 테고, '아르간'은 '아랫간'일 테지만, '조아질'이라니 이건 무슨 말일까?

 

백석의 시를 좋아하는 이들이 부쩍 많이 늘었다. 지금 30대 이상인 사람들은 백석이란 이름을 교육 과정을 통해서는 한 번도 접해볼 수 없었다. 그런 시인이 어디 백석뿐이랴. 우리는 김기림(金起林), 박팔양(朴八陽) 등 소위 월북작가로 분류되었던 이들의 시를 접할 기회가 없었다. 백석을 비롯한 이들이 해금되어 본격적으로 다뤄지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반부터의 일이었다. 시인 고은(高銀)은 백석의 시를 “근대 시사(詩史)에서 가장 빛나는 시 중의 하나”라고 평했다. 고은뿐만 아니라 시인 신경림은 "내가 우리 시에서 단 하나만 꼽으라 해도 서슴지 않고 꼽는 시인이 백석이다"라고 단언하기도 했다. 문학평론가 김현은 "백석의 시 '남신의 주류동박시봉방'은 한국시가 낳은 가장 아름다운 시 중의 하나다"라고 말하며 그의 시가 지닌 아름다움에 아낌없는 헌사를 바치기도 했다.


 ▶ 아오야마(靑山) 학원 3년 무렵의 백석

그런 시인이 오랫동안 묶여 있었으니 우리 문학사에 드리워진 냉전과 분단의 그림자는 한반도의 허리만 두동강낸 것이 아니었다. 백석은 1912년 평북 정주에서 출생했다. 그의 본명은 백기행(白夔行). 1929년 오산고보를 졸업한 뒤 그는 도쿄로 건너가 아오야마(靑山) 학원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그가 필명으로 백석(白石)을 사용한 것은 일본 시인 "이시카와 타쿠보쿠(石川啄木)"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일본에서 새로운 문물과 문화를 익혔고, 1935년 조선일보에 '정주성'을 발표하며 문단에 나온 뒤 그의 별명은 '모던보이'였다. 그의 시가 한없는 토속성에 기대어 있는 것과 상관없이 그의 잘생긴 외모와 풍기는 멋으로 인해 지어진 별명이었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중에서>

 

백석의 고향 정주는 눈이 많은 곳이었다. 그가 수원 백씨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의 시에서 백색의 이미지는 고향 정주의 휘날리는 눈발과 함께 백석의 시세계의 주된 심상 중 하나이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 그에게 내리는 눈은 그냥 내리는 눈이 아니라 '가난한 내가' '나타샤'를 사랑하기에 내리는 눈이다. 나타샤, 자야(子夜)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진 김영한은 1916년 서울에서 태어나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했다. 원래 가난한 집안 출신은 아니었으나 어머니가 친척에게 속아 가산을 탕진하고, 거리에 나앉게 되어 조선 권번에 들어가 기생이 된 여인이었다. 자야의 기명은 진향(眞香). 당시 기생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기생과는 다른 의미에서 신여성이었다.



 

김영한은 당시 함흥 영생여고 교사들의 회식 장소에 나갔다가 우연히 백석을 접하게 된다. 백석은 김영한에게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에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내 사랑 백석’에서>라고 말했다 한다. 김영한에게 자야라는 아호를 지어준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子夜吳歌

李白

長安一片月 장안의 한조각 밝은 달 밤에
萬戶擣衣聲 집집마다 다듬이 소리 들려오고
秋風吹不盡 가을바람 소리 그치지 않으니
總是玉關情 이 모두 옥관을 향한 정이리라
何日平胡虜 어느 날에야 오랑캐 평정하고
良人罷遠征 원정 마치고 우리 낭군 돌아올까

 

이 시는 서역 원정을 나선 연인을 기다리는 여인의 정조를 그린 시이다. 김영한에게 자야라는 호를 지어준 탓일까. 백석과 자야는 이렇듯 평생을 서로 연모하며 지내야 할 운명이었다. 자야가 서울로 돌아온 뒤 백석은 학교를 그만두고, 백석을 따라 서울 청진동으로 올라와 두 사람은 혼례도 없이 살림을 차린다. 이상과 금홍이가 이 시절 그러했던 것처럼... 백석은 자야를 통해 많은 시적 영감을 얻는다.

 

바닷가에 왔드니
바다와 같이 당신이 생각만 나느구려
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

 

구붓하고 모래톱을 오르면
당신이 앞선 것만 같구려
당신이 뒤선 것만 같구려

 

그리고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
당신이 이야기를 끊는 것만 같구려
<'바다' 중에서>

 

그러나 두 사람의 사랑이 오래가지는 못했다. 백석의 아버지는 이 사실을 알고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을 떼어내기 위해 강제로 결혼을 시킨다. 부모의 강요에 못이겨 결혼하였으나 자야를 잊지 못한 백석은 다시 자야에게 도망질쳐 온다. 동경 유학생 백석과 자야는 그렇게 뜨거운 사랑을 불태웠으나 결국 사랑을 이루지 못했다. 백석은 자야에게 함께 만주로 도망쳐 살자고 했으나 자야는 이를 거절했다.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중에서>

 

자야, 아니 나타샤는 끝끝내 오지 않았다. 자야는 자신 때문에 한 명의 훌륭한 시인, 아니 자신의 연인이 행보에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었다. 결국 1939년 백석은 '100편의 시를 담고서' 돌아오겠다는 결심을 하고, 홀로 만주 신경으로 떠난다. 두 사람은 이것이 영원한 이별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만주에서 잠시 세관 업무를 하기도 했으나 해방 이후엔 고향 정주로 돌아와  ‘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을 발표한다.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끝에 헤메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남신의주(南新義州) 유동(柳洞) 박시봉방(朴時逢方)' 중에서>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은 그가 분단 이전에 발표한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백석에게 '월북 작가'란 딱지를 붙이는 것은 잘못된 것이었다. '남의 정지용, 북의 백석'이라고 하듯 백석은 한 번도 월북한 적이 없었다. 그의 고향이 평북 정주였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죄가 있다면 '월북'한 것이 아니라 '월남'하지 않은 것이겠지만, 그에게 고향이 담고 있는 의미를 생각한다면 쉽게 결론지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북관(北關)에 혼자 앓아 누어서
어느 아침 의원(醫員)을 뵈이었다
의원은 여래(如來) 같은 상을 하고
관공(關公)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옛적 어느 나라 신선 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더니
문득 물어 고향이 어데냐 한다
평안도 정주라는 곳이라 한즉
그러면 아무개씨 고향이란다
그러면 아무개씰 아느냐 한즉
의원은 빙긋이 웃음을 띠고
막역지간(寞逆之間)이라며 수염을 쓸는다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의원은 또 다시 넌지시 웃고
말없이 팔을 잡아 맥을 보는데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故鄕' 전문>

 

백석의 시에서는 평안북도의 토속 방언들이 생생하게 묻어나고 있다. 해방 이후까지 박인환이 모더니즘의 독소로부터 헤어나오지 못하는 동안, 김수영이 모더니즘을 '근대를 향한 모험'으로 삼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평생을 노력한 것을 생각해보면 그보다 훨씬 이른 시기라 할 수 있는 1930년대 백석은 '근대'라 할 수 있는 '모더니즘'과 '전근대'라 할 수 있는 '민족'을 결합해냈다.



  1980년대 중반 백석이 70대 중반일 무렵 촬영한 가족사진. 백석 옆이 부인 이윤희씨, 뒤는 둘째아들(중축 씨)과 막내딸.

오랫동안 금기였던 시인이었기 때문일까? 1987년의 해금 이후 이동순의 "백석 시전집"을 비롯해 내가 알고 있기로만 "백석 시전집"은 네 차례에 걸쳐 만들어졌다. 평생을 살며 시를 쓰지만 전집은 커녕 한 권의 시집을 묶기도 쉽지 않은데 비해 어쩌면 그는 호사를 누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백석의 시전집은 아직도 미완성일 게다. 이동순의 백석시전집에는 그가 북에 남아 있는 동안 쓴 시들은 누락되어 있고, 북한문학연구가 김재용(원광대 교수)의 이 전집은 백석이 북에 머무는 동안 쓴 동화를 비롯해 여러 작품들을 수록하고 있다. 제1부에서는 8.15이전에 발표된 그의 첫시집 "사슴"에 수록된 작품을 비롯해서 이에 수록되지 않은 작품들과 수필, 소설 등을 담고, 제2부에서는 8.15 이후 즉, 그가 북한에 머무는 동안 발표한 작품들을(여기에는 국내에도 동화로 출판된 바 있는 백석의 동화시 '집게네 네 형제'가 포함되어 있다)을 수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어디 전부일까. 사실 김재용 교수의 "백석 전집"은 가치있는 책이긴 하지만 몇 가지 점에서 아쉬움을 남긴다. 앞서 '여우난골족'에서도 이야기했듯 오늘날 우리에게 백석이 살던 시기의 평북 방언이 생생하게 전달되기 어렵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이해하기 어려운 시어들에 대해서는 편집자주 처리를 해서라도 원뜻을 밝혀주었어야 한다. 다음 개정증보판에서는 이런 점들과 다른 미비점이 좀더 보충될 수 있기를 바란다.

 

한동안 백석은 1961년 '돌아온 사람' 등 3편을 "조선문학" 지에 발표한 뒤 숙청된 것으로 알려져 왔고, 1963년 52세를 일기로 사망했을 것이라는 설도 있었다. 지난 1999년 세상을 등진 자야 김영한은 매년 백석의 생일인 7월 1일 하루 동안은 일체의 음식을 먹지 않았다고 하는데, 실제 백석은 1995년 1월 8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밝혀졌다. 이 해에는 자야 김영한이 "내 사랑 백석"을 '문학동네'에서 발간하기도 했다. 김영한은 1997년 창작과비평사에 2억원을 재원을 출연해 '백석문학상'을 제정토록했다. 시집을 대상으로 선정하는 백석문학상은 1999년부터 수상되기 시작했다. 자야는 이 상이 처음 시행되던 1999년 11월 백석이 있는 세상으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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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연기처럼


- 신동엽


들길에 떠가는 담배 연기처럼
내 그리움은 흩어져 갔네

사랑하고 싶은 사람들은
많이 있었지만
멀리 놓고
나는 바라보기만
했었네.

들길에 떠가는
담배 연기처럼
내 그리움은 흩어져 갔네.

위해주고 싶은 가족들은
많이 있었지만
어쩐 일인지?
멀리 놓고 생각만 하다
말았네.

아, 못다한
이 안창에의 속상한
드레박질이여.

사랑해 주고 싶은 사람들은
많이 있었지만
하늘은 너무 빨리
나를 손짓했네.

언제이던가
이 들길 지나갈 길손이여

그대의 소맷 속
향기로운 바람 드나들거든
아퍼 못 다한
어느 사내의 숨결이라고
가벼운 눈인사나,
보내다오.

*

가끔 철지난 느와르풍의 옛날 한국 영화들을 보게 될 때가 있습니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더라도 참 이국적(異國的)이란 생각이 들게 하는, 프랑스와 미국의 느와르 영화풍의 미장센들이 난무하는 장면들, 중절모를 멋있게 쓴 남자 배우들의 건들거리는 연기를 보면서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참, 마초적이지요. 사랑에 울고, 의리에 울고, 배신에 우는 ... 사람은 옛사람이 좋다고 하던데, 그것이 비록 시대착오적이란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예를 들어 "아리조나 카우보이"란 노래 가삿말의  "인디안의 북소리"에 연이어 나오는 "주막집"이란 가사처럼, 그럼에도 옛시인의 얼굴을, 김수영이 중절모를 삐딱하게 눌러쓰고, 입에는 담배를 꼬나물고 있는 사진 한 장이 주는 선연한 인상은 오래 남습니다. 비록 김수영 자신은 박인환의 댄디즘을 겉멋으로 평가절하했지만 지금의 우리 시각으로 보면 김수영도 은근짜하게 댄디 스타일을 자기 것으로 했다는 생각이 들지요. 개폼도 몸에 착 붙는 사람이 있는데, 김수영이 그런 사람이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박인환과 김수영이 부리던 개폼(댄디즘)의 차이는 그것이 얼마나 몸에 맞춘 듯 잘 들어맞는가에도 있지만 박인환과 달리 김수영은 자신의 개폼을 자기 검열하는 정도의 자의식을 늘 품고 있었다는데 있었을 겁니다.

요사이 포트레이트 사진에서 소위 얼짱 각도라는 것이 있는데, 신동엽 시인의 사진 가운데 널리 알려진 사진 중에서도 이른바 얼짱 각도의 사진이 있습니다. 상방 45도 각도에서 내려찍은 구도의 사진이죠. 신동엽 시인을 요새 청소년들은 교과서를 통해 배우는 것으로 아는데, 널리 알려진 그의 시들에 비해서 "담배연기처럼"은 상당히 센티멘탈합니다. 사실 신동엽 시인을 소개할 때 자주 붙는 말인 '민족시인'이란 말은 전혀 어색하지 않은 말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엔 '민족시인'이란 말이 신동엽 시인이 지닌 여러가지 풍모들을 가리는 역효과를 발한다는 생각이 들어 안타까울 때가 있는데, 위의 시를 보면 마치 5-60년대 한국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이 자신이 돌아오지 못하는 마지막 길을 떠나는 정서를 담아 남기는 유언 같은 느낌이 들어요. 죽음을 예감한 사내가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며 "사랑해 주고 싶은 사람들", "위해주고 싶은 가족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늘은 너무 빨리 나를 손짓했네."라며 노래하고 있지요. 이런 서정적인 정조가 소시민적인 모습으로 비춰질 때도 있지만, 바로 그런 모습이 신동엽 시인을 오래도록 우리 가슴에 남게 만드는 힘이기도 합니다.

그의 일생을 두고 가장 격렬했던 시기는 대략 분단 직후와 한국전쟁, 그리고 연애 시절, 4.19혁명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어려서 형제를 여럿 잃은 그는 친구들과 뛰어놀기 보다는 혼자서 생각에 잠겨 있을 적이 더 많았다고 하는데요. 어려서 공부를 잘해서 내리 1등만 차지했던 그였지만, 당시 지방의 공부 잘하는, 가난한 수재들이 그러했듯 그 역시 어려운 집안 사정 때문에 전주 사범에 지원합니다. 지금도 교육문제를 고민하는 이들은 교육이 해방이 될 것인지, 통제의 수단이 될 것인지를 고민하지만, 식민 치하에서의 교원이란 고민이 많은 자리였을 겁니다. 신동엽에 대한 부모의 기대는 매우 컸지만 해방 직후인 1948년 신동엽은 전주 사범을  중퇴합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는 없지만 해방 직후의 극렬한 이념 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가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동맹 휴학에 참여했던 까닭이 크리라고 추측하곤 합니다. 전주 사범을 중도에 그만두긴 했지만 워낙 어수선한 시기였던 터라 그에게 초등학교 교원 자격은 인정되어서 인근의 어느 국민학교에 부임했지만, 부임한 학교에서도 대립하는 사람이 있어 결국 학교를 그만두고 단국대 사학과에 입학합니다.

그러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고향인 부여에 머물던 그는 국민방위군이란 것에 징집당하게 됩니다. 한국전쟁을 둘러싼 여러 곡절 깊은 사건들 중에서도 가장 어처구니없는 사건 중 하나가 국민방위군 사건이었을 텐데, 원래 국민방위군이란 것 자체가 중국군의 갑작스런 참전으로 전세가 밀리면서 이승만 정권이 서울을 다시 내주게 되자 혹시라도 인민군에게 빼앗기게 될지 모를 젊은 장정들을 자신들의 통제 아래 두기 위해서 급조해낸 일종의 예비군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승만 정권은 1950년 12월 군경과 공무원이 아닌 만 17살 이상 40살 이하의 장정은 제2국민병에 편입하고 제2국민병 중 학생이 아닌 자는 지원에 의해 국민방위군에 편입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엄동설한에 소집된 장정들에게 피복이나 식량도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고, 그나마 지급되어야 할 물품들은 중간 관리자들이 모조리 착복해서 국민방위군에 소집된 장정들은 살인적인 추위 속에 두 사람 앞에 하나씩 지급되는 가마니 한 장씩을 덮고 자야했습니다. 그 결과 소집된 50만 명의 젊은 장정들 중 무려 5만명이 굶어죽거나 얼어죽고, 전체의 80% 가량이 폐인이 되고 말았던 사건이었습니다. 이 때 신동엽 시인의 몸도 만신창이 폐인의 몸이 되었고, 간을 상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상한  건강 때문에 훗날 그의 나이 40세도 되기 전에 요절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전쟁 기간 동안 '대전 전시 연합대학'을 졸업한 신동엽은 전쟁이 끝난 1953년 졸업 후에는 서울에서 친구의 헌책방을 일을 도우며 자취 생활을 했습니다. 그 해 초겨울 어느 따뜻한 날 신동엽은 당시 이화여고 3학년생이었던 단발머리 소녀 인병선(印炳善)을 이곳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녀는 남편 신동엽과 사별한 이듬해인 1970년 <여성동아>에 「당신은 가신 분이 아닙니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시인과의 첫만남을 이렇게 회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난 것은 내가 여고 졸업반이던 해 겨울 어느 따뜻한 날이었다. 그 날은 마침 일요일이서 한낮이 되자 나는 집 근처 책방으로 신간 서적을 사러 나갔다. 가끔 들러 주간지와 월간지를 사오던 서점이었다. 몇 가지 뒤적이다 찾는 것이 눈에 띄지 않자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책방 주인에게 "○○ 없어요?" 하고 물었다. 그러자 바로 등뒤에서 굵직하고 낮은 목소리가 대답했다. "그 책은 아직 못 갖다 놓았읍니다만 그 대신 이건 어떨까요?" 그리고 내 어깨 너머로 책 한 권을 빼들었다. 나는 책을 따라 자연히 그와 마주섰다. 그리고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속 깊이 “아!”하고 부르짖었다. 그 크고 빛나는 눈! 비록 작달막한 키에 빛 바랜 허름한 군복점퍼를 걸치고 있었지만 나는 그때까지 그처럼 빛나는 눈을 본 일이 없었다. 그 눈빛은 너무 깊고 넓어 나의 온 가슴을 채우고도 남는 것 같았다. 이것이 우리들의 운명의 해후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는 나를 그전부터 눈여겨보고 있었다고 한다. 그의 말을 빌 것 같으면 맵찬 눈매를 한 소녀가 가끔 들러 대중잡지 같은 건 거들떠보지도 않고 문예지 아니면 사상지 그리 어려운 학술 서적만 사가더란다.

인병선은 이화여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문리대 철학과에 입학했고, 두 사람은 열렬한 연애 끝에 1956년 결혼해서 부여에 신혼 살림을 차렸다. 두 사람은 매우 가난했고, 아내 인병선이 양장점을 개업하면서 비로소 어느 정도 안정된 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비로소 신동엽은 시인으로 본격적인 창작활동에 전념할 수 있게 됩니다. 가난한 예술가와 능력있는 아내의 결합이란 등식이 이 경우에도 성립된 셈인 거죠. 아내 인병선의 회고에 따르면 다정다감하고, 좋은 남편이자 아버지이긴 했으나 생활인으로서의 신동엽은 못질 하나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세상을 등지기 전까지 명성여고 야간부 교사 일을 했는데, 제자들에게도 매우 인기있는 스승이어서 교지를 만드는 학생들이 실시하는 앙케이트 조사에서 제자들이 선정하는 인기교사 순위에 늘 올라 있었다고 합니다.

새로운 시대는 늘 새로운 말들로 표현되는 법입니다. 만약 4.19가 없었다면, 신동엽도 없었다는 가정도 가능하겠지만 그와 반대로 신동엽이 없었다면 4.19혁명을 표현하는 새로운 말들은 태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시 가운데 하나인 "껍데기는 가라"가 바로 4.19가 만들어낸, 우리의 기억 속에 남겨진 4.19를 만들어준 시(詩)인 거죠. 신동엽 시인은 4.19혁명이라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실패를, 그가 사용했던 시어들, 비약의 언어로 혁명으로 승화시켜 줍니다. 우리가 4.19를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개혁 실패로 인한 반동으로 기억하지 않고, 민중에 의한 혁명으로 기억하게 만들어주는 힘은 어쩌면  그 시대를 살았던 시인의 힘, 시의 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1969년 3월 중순, 40세의 신동엽은 세브란스 병원에서 간암 진단을 받았고, 그동안에도 그는 죽음을 예감한 듯 계속 술을 마셨습니다. 결국 입원치료 일주일만에 병원측에서는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퇴원을 지시했고, 며칠 후인 4월 7일, 신동엽은 문병 온 작가 남정현의 품에 안긴 채 마지막 숨을 거둡니다. 이 글을 쓰는 오늘이 마침 신동엽 시인의 기일인 4월 7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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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1987년 그의 노래들이 해금된 이후였다. 그러나 한국에서 한대수는 여전히 가수라기 보다는 기인적인 풍모, 사회의 아웃사이더로 일반인의 정서에 부합하는 가수는 아니었다. 아마도 그런 까닭에 가수로서 활동한지 30년이 지난 2001년 10월에서야 비로소 자신의 두 번째 콘서트를 열 수 있었으리라. 머리에 꽃을 꽂은 청년이 초로의 중년이 될 때까지 한국에서 머리에 꽃을 꽂은 사람은 그저 미치광이였을 뿐이다. LP시절 만났던 그의 첫 앨범을 CD로 다시 만났다. 청년 한대수의 노래를 당신에게 권해본다.


물 좀 주소 물 좀 주소 목 마르요 물 좀 주소
물은 사랑이여 나의 목을 간질여 놀리면서 밖에 보내네
난 가겠소 나는 가겠소 저 언덕 위로 넘어가겠소
여행 도중에 처녀 만나 본다면 난 살겠소 같이 살겠소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물 좀 주소 물 좀 주소 목 마르요 물 좀 주소
그 비만 온다면 나는 다시 일어나리 아 그러나 비는 안오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어렸을 적 대학 다니던 삼촌이 사들였던 LP중에는 한대수가 가방을 어깨에 짊어매고 초가집이 있는 시골 밭두렁길을 걸어가는 사진으로 장식된 그의 1집 앨범 <멀고먼-길>이 있었다. 구닥다리 턴테이블이었지만 LP음반을 통해 처음 접했던 한대수의 음악은 어린 마음에도 충격이었다. 그 무렵 나는 송창식의 최대히트곡 중 하나인 <피리부는 사나이>를 콧노래로 흥얼거리며 뛰노는 어린아이였는데, 어느날 갑자기 송창식이 향군법 위반 혐의로 끌려가면서
(그때의 충격으로 나는 민방위비상소집도 열심히 나간다) 뭐 다른 노래 들을 만한 것이 없나 삼촌의 LP창고를 뒤적이다 발견한 것이 한대수의 <멀고먼-길>이었다.


출처: 월간사진 http://www.monthlyphoto.com

개인적으로 한국 포크음악사에서 가장 중요한 뮤지션 세 사람을 꼽으라면 나는 송창식, 한대수, 김민기라고 생각하는데, 언급한 순서는 사실 내가 그들을 처음 만난 순서이기도 하다. 시인에 빗대어 하는 비유가 적절할지는 모르겠지만 송창식이 서정주에 가깝다면, 한대수는 김수영, 김민기는 신동엽의 흐름과 근사치를 이룬다고 생각한다. 송창식은 번안곡으로 시작해 트로트와 국악을 그의 음악에 접맥했다면, 한대수는 밥 딜런류의 사실적인 포크에 한국적인 정서를 가미했고, 김민기는 서구적 포크의 전통을 한국적 현실에 맞춰 계승한 인물들이다. 이들 세 사람은 포크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인 싱어송라이터의 개념에 부합하는 인물들이기도 했다.


어쨌든 송창식에서 한대수로 처음 넘어갔을 때 한대수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뭐, 이렇게 노래 못하는 가수가 다 있냐?'였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한대수의 보컬은 가수로서의 본격적인 트레이닝으로 다듬어진 목소리가 아닌 '날것'이었기 때문에 그동안(1977년 무렵까지, 무려 내 나이 8살 때까지) 내가 접해왔던 가수들의 목소리와는 완전히 다른 부류의 것이었다. 아마도 그의 목소리가 언더그라운드로 묻히게 된 까닭 중 하나는 정치적인 금지조치 이외에도 당시 대중적으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그의 보컬에도 영향이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한대수'란 가수는 2집 앨범 <고무신> 마저 반체제적이란 이유로 금지되면서 더이상 노래를 계속하기 어려워진다. 그의 2집 앨범이 반체제적이란 지적을 받은 이유는 앨범 재킷 사진이 문제가 되었는데 높은 벽돌담 위 가시철조망에 놓인 고무신이 반체제적이라는 지적을 받았기 때문이다. 포크음악에 대한 체제의 감시와 억압이 심해지자 결국 그는 노래를 접고, 모신문사의 사진기자로 일하다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박광현 감독의 영화 <웰컴 투 동막골>에서 배우 강혜정은 약간 모자라지만 때묻지 않은 동막골의 순수를 머리에 꽂은 꽃으로 표현한다. 동막골은 민족이 서로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눈 한국전쟁의 이념도, 정치도 사라진 가상의 비무장지대(DMZ)를 넘어 유토피아로 상징된다. 그런 '동막골'에 불쑥 난입하게 된 전사들은 서서히 이들의 순수에 감화된다. 인민군 하사관 장영희(임하룡)의 명대사 "내레 꽃 꽂았습니다"는 이념과 정치, 증오와 분노를 넘어 사랑과 평화, 자연과 신비로의 전이를 의미한다. 정치적으로 적녹색맹인 수구보수세력들은 <웰컴 투 동막골>에서 친북의 색채를 읽었지만 이 영화는 서구의 1960년대 히피문화를 연상케하는 매우 복고적인 영화였다.



1960년대말 미국은 '꽃을 든 아이들(flower children)'이란 히피들을 중심을 기존의 제도정치와 문화에 도전하는 청년문화가 출현했고, 그 한 가운데 있었던 것이 포크음악과 사이키델릭 록음악이었다. 미국의 문화적 영향력 속에 갇혀있던 한국사회에도 자연스럽게 이들의 문화가 흘러들기 시작했다. 명분없는 베트남전쟁에 반대했던 당시의 청년들은 '반전, 평화, 사랑'을 구호로 1969년 8월 우드스탁 페스티벌을 열었고, 3일간 치러진 이 행사에는 50만명의 청년들이 모여 자유롭게 사랑을 나누고, 마리화나를 피웠다. 우드스탁 페스티벌에는 조니 미첼, 크로스비. 스틸. 내시&영, 지미 헨드릭스, 제퍼슨 에어플레인, 산타나 등 당대 최고의 포크와 록 뮤지션들이 무대에 올랐다.



미국으로부터 유입된 포크문화는 1968년 <트윈폴리오>에 의해 번안곡 형태로 반영되었다. 본래 <트윈폴리오>는 송창식, 윤형주, 이익근 트리오로 구성되었으나 이익근이 군에 입대해야 하는 바람에 송창식, 윤형주만의 '트윈'으로 출발했다.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은 한국 포크의 트로이카를 이루었지만, 이들이 노래했던 포크 음악가 히트곡들은 주로 번안곡 위주로 구성되었다는 한계가 있었다. 단 한 장의 데뷔음반을 끝으로 해산한 <트윈폴리오>에서 이후 솔로로 독립하여 본격적인 포크음악을 시작한 송창식과 함께 한국에서 본격적인 포크음악의 출발, 한국적인 포크음악을 시작한 사람이 누구냐라고 물을 때 우리가 먼저 떠올려야 할 사람은 '한대수'다.




한대수는 선교사였던 할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갔지만 미국인 새어머니와 함께 살던 십대 시절엔 불량써클에도 가입하는 등 말썽장이이기도 했다. 사진가를 꿈꾸었던 그는 뉴욕의 사진학교에서 사진을 공부하면서 밥 딜런, 도노반 등의 포크 음악에 깊이 매료되었다. 귀국 후에는 한국 청년문화의 산실이라 할 수 있는 서린동의 음악감상실 '세시봉'에서 노래를 했는데 이것이 인연이 되어 TBC의 <쇼쇼쇼>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되었다. 장발의 히피 청년이었다. <트윈폴리오>의 부드러운 포크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한대수의 노래는 쉽게 이해받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의 노래에 감동한 두 명의 여성 팬이 자청해 한대수의 콘서트를 열어주었는데 1969년 9월 남산드라마센터에서 열린 그의 공연은 한국 포크 음악의 진정한 시작을 알렸다.



그의 뒤를 이어 서유석, 양병집, 김민기 등이 출현했다. 그러나 파격적인 한대수의 풍모와 행동, 세태 풍자적인 노래들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못했고, 히피문화와 포크를 미국의 저질문화로 생각한 일부 사람들은 한대수에게 미국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한대수의 1집에 실린 그의 대표곡 중 하나인 <물 좀 주소>는 물고문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금지곡이 되었다. 군사정권은 '물'이라는 말이 상징하는 바가 의미심장하다고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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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두시

- 김지하


새벽 두시는 어중간한 시간
잠들 수도 얼굴에 찬 물질을 할 수도
책을 읽을 수도 없다
공상을 하기는 너무 지치고
일어나 서성거리기엔 너무 겸연쩍다

무엇을 먹기엔 이웃이 미안하고
무엇을 중얼거리기엔 내 스스로에게
너무 부끄럽다. 가만 있을 수도 없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새벽 두시다
어중간한 시간
이 시대다


*

나에게는 한 권의 오래된 시집이 있다. 조태일의 국토라는 시집이다. 1975년 5월 20일 인쇄, 1975년 5월 25일 발행이라는 판권에 적힌 세월만큼 낡고 시들해진 시집이다. 책값은 600원. 거기에 적힌 창작과 비평사의 전화번호는 국번이 두 자리다. 장난삼아 조태일이라는 시인의 고명한 이름을 "좆털"이라 불렀던...아, 이젠 고인이 된 시인의 시를 보면서...그의 시 후기에 실린 시인의 말을 읽으며....난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리고
시인과 시대에 대해 문득 생각해보게 되는 순간이 있었다.

그리고 다시 김지하.
솔직히 나는 김지하를 용서하지 않았지만, 그의 시를 읽으며 한 인간이 한 시대에 제몫을 하며 산다는 것의 어려움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게 된다. 그건 <역사는 변하고 만다>는 역사학자 강만길 교수의 근작을 읽으며 그 서문에 적힌 그의 심경의 일단을 되새김질하며 증폭된다.

어떤 이는 살아가면서 평생 역사라는 말을 가슴이던, 머릿속이던 새겨둘 일이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런 삶이라고 무시할 수 있는 삶도 아니다. 그런데 나는 가끔 이곳을 통해 무수한 말들을 뱉아내면서도 내가 과연 역사의 맥락에서 옳다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을 말하는가 두려워질 때가 있다. 따지고 보면 이곳에서 내가 혼잣말처럼 지껄여대는 것에 무슨 부담을 느낄 필요가 있을까 싶다가도 하 세월 지나 돌이켜 보며 부끄러워질 생각을 하면 아무 말도 예사로이 지껄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김지하가 누구냐.

그는 70년대를 그야말로 일세를 풍미한 시인이 아닌가. 김수영의 풍자는 옳았다 그러나 그에게 민중은 스쳐가는 바람에 눕는 풀이 아니었던가. 김지하에 이르러 우리는『黃土』에 배인 비명을 읽게 되었다. 남도를 가보라! 거기 어디엔들 붉은 땅이 없는가? 한 때 살아있는 불온문서였던 김지하. 수화기를 타고 전해오던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칼칼하건만....그의 목소리엔 여전히 힘이 실려 있건만.....난 그의 초기 시에서 느꼈던 그런 붉은 맥박을 더이상 느끼지 못하였더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새벽 두시다/ 어중간한 시간/ 이 시대다

그런데 왜 난 남들 모두 잠든 새벽 두시에 문득 이 시를 읽다가 왜 왈칵 눈물이 쏟아지는 거냐. 왜 이리 서러운 거냐. 새벽 두시에.... 과연 우리는 여전히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거냐. 때로는 오래 산다는 것도 욕이 되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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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2010.10.26 09:23


- 김수영

나무뿌리가 좀더 깊이 겨울을 향해 가라앉았다
이제 내 몸은 내 몸이 아니다
이 가슴의 동계(動悸)도 기침도 한기도 내것이 아니다
이 집도 아내도 아들도 어머니도 다시 내것이 아니다
오늘도 여전히 일을 하고 걱정하고
돈을 벌고 싸우고 오늘부터의 할일을 하지만
내 생명은 이미 맡기어진 생명
나의 질서는 죽음의 질서
온 세상이 죽음의 가치로 변해버렸다

익살스러울만치 모든 거리가 단축되고
익살스러울만치 모든 질문이 없어지고
모든 사람에게 고해야 할 너무나 많은 말을 갖고 있지만
세상은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이 무언의 말
이때문에 아내를 다루기 어려워지고
자식을 다루기 어려워지고 친구를
다루기 어려워지고
이 너무나 큰 어려움에 나는 입을 봉하고 있는 셈이고
무서운 무성의를 자행하고 있다

이 무언의 말
하늘의 빛이요 물의 빛이요 우연의 빛이요 우연의 말
죽음을 꿰뚫는 가장 무력한 말
죽음을 위한 말 죽음에 섬기는 말
고지식한 것을 제일 싫어하는 말
이 만능의 말
겨울의 말이자 봄의 말
이제 내 말은 내 말이 아니다


*

어떤 시는 해석 이전에 먼저 말을 걸어온다. 마음으로 쓰인 시라 그럴 수도 있고, 비슷한 심리적 정황 속에 스스로 놓여 본 경험이 또한 그런 경험을 가능케 한다. 시인이란 무엇인가? 말로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때로 시인은 지장보살의 현연이다. 이렇게 말하는 까닭은 지장보살의 기능이 시인의 기능과 일정하게 맞아 떨어지는 탓이 크다. 지장보살은 불덕으로 보자면 부처가 되고도 남는 이다. 그렇지만 지장보살은 염라지옥의 가장 하층의 저주받은 중생들이 모두 구원받을 때까지 스스로 부처가 되지 않겠다는 마음의 염을 세운 이가 아닌가. 물론 시인들이 모두 불립문자의 경지에 도달하였으나 스스로 그리하지 않은 존재들인지는 묻지 말자. 비유일 뿐이니까.

같은 말을 풀어내는 이들이지만 산문을 주요한 표현 방식으로 사용하는 작가와 시인의 가장 큰 차이는 언어가 표현할 수 있는  한계에 가장 가까이 접근하고 있는 이가 바로 시인이라는 데 있다(유치하게 우월성을 논하는 것이 아니다). 시인은 말하지 않음으로 해서 가장 많은 말을 한다. 시는 말로 표현되고 있는 부분들에 의해 세상의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몇 마디 말로 인해 드러내진 부분 이외에 말이 가리고 있는 부분을 통해 세상의 진실을 드러낸다. 우리가 사물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 혹은 보다 멀리 보기 위해 나도 모르게 눈가에 양손을 모아 시야를 좁혀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인은 언어의 양손을 들어 우리의 눈을 보다 자세히, 깊이 들여다 볼 수 있도록 한다. 깊이, 자세히를 통해 넓이를 확보해내는 것이다.

그런 시인이 말에 대해 말하고 있다.
"나무뿌리가 좀더 깊이 겨울을 향해 가라앉았다"라고 말한다. 그것도 겨울에 말이다. 모든 생명이 죽은 듯 엎드려 있는 얼어붙은 땅을 향해 뿌리가 깊이 가라앉았다. "이 가슴의 동계(動悸)", 동계라는 것은 숨이 차오는 것을 말한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손발이 떨리고,숨이 차오는 현상이다. 그런데 시인은 이 모든 생리적, 본능적 현상들 - 기침, 한기 - 도 내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나에게 속해있는 혹은 뗄 수 없는 관계들조차 내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여전히 살아가지만  이 모든 것이 나의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나의 질서가 죽음의 질서에 종속되어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두번째 연에서 시인의 그런 마음은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된다.

익살스러울만치 모든 거리가 단축되고
익살스러울만치 모든 질문이 없어지고
모든 사람에게 고해야 할 너무나 많은 말을 갖고 있지만
세상은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거리가 단축된다는 것은 심리적인 거리를 말할 수도 있고, 원근감의 상실을 말할 수도 있고, 세상의 사물들이 실제로 존재해야 하는 공간을 이탈한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질문이 없어진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의문이 사라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의문이 사라지는 순간은 해탈하지 않는 한 불가능한 것이다. 게다가 의문과 질문은 다른 것이다. 의문은 품을 수 있겠으나 그것을 입밖에 내어 질문으로 전환시킬 수 없는 순간. 그것은 폭력의 순간이거나 강압의 순간이다. 묻고자 하나 물을 수 없다. 게다가 시인은 고립되어 있다. 세상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말은 곧 깨달음이지만 세상은 나의 깨달음에 귀기울이지 않는다.

셋째 연에 가면 그 결과물이 나온다. 그런 침묵의 결과, 마음 속 동계의 결과들은 그러나 추상적이지 않다. 시인은 세상의 불의나 억압에 대해 진실을 고하고 싶지만,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다. 게다가 그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은 매우 구체적이라 그는 조무래기처럼 느껴진다. 스스로의 삶은 허접하다. 말하지 못하는 말 때문에 "아내를 다루기 어려워지고" 자식도, 친구도 점점 그를 업수이 여긴다. 그럼에도 그는 말하지 못한다. 공연한 타박이 두려울 수도 있을 것이고, 너 혼자 그래봐야 세상이 변하니 하는 그런 일리있는 포기의 답변을 들을까 두렵다. 그래서 그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다.

4연의 역설은 놀랍도록 마음 아프게 다가온다.

하늘의 빛, 물의 빛, 우연의 빛인 말은 고로 우연히 나에게 스며든 말일 수도 있다. 천지 사물 속에 깃든 빛의 말은 감히 나같이 하찮은 존재에게 스밀 수 없는 말이므로 감히 나의 말이라 할 수 없다. 그것은 우연에 가까운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말들은 - 가장 무력한 말, 죽음을 위한 말, 죽음에 섬기는 말 - 이다. 말은 나의 말이되, 나의 말이 아니다. 시인은 고립됐다. 그의 말은 신의 말을 모사하는 방언이 되었고, 방언은 지껄인다 한들 그것을 해석해줄 이 없으니 말이 아니다.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니 무어라 지껄여도 상관없는 만능의 말이다. 그의 말을 겨울의 말로 만들던지, 봄의 말로 만들던지 하는 것은 이제 우리의 몫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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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방을 생각하며

- 김수영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그 방의 벽에는 싸우라 싸우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어둠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나는 모든 노래를 그 방에 함께 남기고 왔을 게다
그렇듯 이제 나의 가슴은 이유없이 메말랐다
그 방의 벽은 나의 가슴이고 나의 사지일까
일하라 일하라 일하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나의 가슴을 울리고 있지만
나는 그 노래도 그 전의 노래도 함께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나는 인제 녹슬은 펜과 뼈와 광기―
실망의 가벼움을 재산으로 삼을 줄 안다
이 가벼움 혹시나 역사일지도 모르는
이 가벼움을 나는 나의 재산으로 삼았다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었지만
나의 입 속에는 달콤한 의지의 잔재 대신에
다시 쓰디쓴 냄새만 되살아났지만

방을 잃고 낙서를 잃고 기대를 잃고
노래를 잃고 가벼움마저 잃어도

이제 나는 무엇인지 모르게 기쁘고
나의 가슴은 이유없이 풍성하다

(1960)

*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라는 첫 구절의 유명세에 비하여 전문을 다 인용되는 경우는 드문 김수영의 시 "그 방을 생각하며"를 옮겨봤다. 역시 첫 구절이 주는 강렬함이 드세다. 그 방에는 "싸우라", "일하라"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죄다 헛소리 혹은 헛소리 같이 공허한 것들이다. 그리고 시인은 그 노래들 - 싸우라, 일하라 - 라는 구호들을 이전의 구호들처럼, 아니 이전의 노래들처럼 잊어버렸다.

그리고 다시 첫연의 구절을 두 번째 연에서 반복한다. 시인이 현재 소유하고 있는 것은 녹슨 펜, 앙상하게 남은 뼈, 그리고 표독한 광기, 그리고 가벼운 실망이다. 그런데 시인은 이를 "역사일지도 모르는"이라고 말한다. 이 순간 가장 중요한 말은 "역사란 무엇인가?"하는 정의이다. 역사를 묵직함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고, 개인적인 체험의 연속, 낙망의 연속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역사의 정의는 무수하나 역사란 기본적으로 흘러간 과거를 말한다. 그에게는 이번이 처음의 실망도, 낙망도 아니다. 그런 탓에 펜은 녹슬어 버렸다. 그것을 한탄만 하고 있다면 이 시는 그저 그런 재미없는 시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시인은 3연에 와서 1,2연에서 반복했던 구절을 교묘하게 비튼다.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었지만" 그의 입속에는 의지의 잔재 대신에 쓰디쓴 냄새만 되살아났다. 구취(口臭)! "bad breath" 그는 방, 낙서, 기대를 잃었고, 노래를 잃고, 가벼움도 잃었다. 그럼에도 시인은 무엇인지 모르게 기쁘고, 가슴은 이유없이 풍성하다. 이런 낙망한 순간이 있는가? 시인이 구체적으로 그것이 무엇인지 말해주지 않으니, 읽는 나도 그게 대관절 무슨 말인지 알아챌 수가 없다. 하기사 시를 쓴 본인 스스로도 모른다 하지 않던가?

이럴 때 제목은 이 시 전체를 암시해준다. 시 제목이 무엇이던가? "그 방을 생각하며"가 아닌가.
시인은 방, 낙서, 기대, 노래, 가벼움을 잃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현재의 일이 아니라 과거의 일이다. 그래서 시인은 제목도 "그 방을 생각하며"라고 지었다. 그는 혁명을 꿈꾸었으나 방만 잃었다, 방만 잃은 것이 아니라 그와 관계되는 온갖 허접한 것들을 잃었다. 그런데 그 방에서 나와 그 방을 생각해보니 이 모든 것이 허접이었다. 버림받은 것인지, 버려진 것인지 모르겠으나 시인의 가슴이 이유없이 풍성한 까닭은 그것이다.

시인은 이제부터 자유다. 까닭이 있는 것은 대항할 구체적인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인지 모르고도 기쁠 수 있다는 것은 구체적인 대상이나 현상이 현재로서는 타개된 것을 의미한다. 이유없이 풍성하다는 것은 그를 옭죄던 현실의 무게로부터 그가 자유로와질 수 있다는 심리적 상태를 의미한다. 이 시가 1960년에 쓰였으므로 이 시에 대해 역사적 현실을 찾아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비록 혁명은 안 되었으나 그는 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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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1.
시인 김수영(金洙暎 , 1921.11.27~1968.6.16)은 밤새 술을 마시고 깨어나는 아침, 뱃속으로 시냇물이 졸졸 흘러가는 그 느낌을 사랑했던 시인이었다. 그는 공복상태에서 오는 정신의 맑음, 답답했던 머릿속을 헤집고, 맑은 물이 담긴 세숫대야에 한 두 방울 씩 떨어져 퍼지는 코피의 핏물처럼 비록 피를 흘린다한들 그 순간의 상쾌함, 정신의 맑음을 흠모한 시인이었다.

개인적으로 어느 시인을 좋아한다는 것은 연예인이나 영화배우 혹은 가수를 좋아하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일 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우리가 책을 구입하는 선택이 자본주의적 상품의 유통경로 중 가장 이성적인 판단에 기대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외모가 아니라 그의 깊고 넓은 정신을 흠모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 김수영은 우리 문학의 거대한 산맥이자 동시에 우리 문단의 대표 스타이기도 하다. 그의 사유의 소산들이 여러 시인들에게 계승된 탓도 있을 것이고, 많은 문학 청년들의 가슴에 그가 시인의 한 전형처럼 여겨지는 탓도 있을 것이다. 런닝셔츠 차림에 선병질의 얼굴, 신경질적으로 치켜뜬 눈의 시인을 담은 사진은 우리 집에도 있다. 그러나 그가 이렇듯 '문학적인 스타'라는 모습을 갖추고 있는 이면엔 많은 오해의 소지도 있다. 무턱대고 난해한 시인으로, 혹은 신랄한 풍자의 시인으로, 지식인적인 풍모만을 지닌 시인으로, 때로 소시민적인 시인으로만 평가되는 것들은 분명 옳지만 일견 오해이기도 하다. 이런 점들은 그 스스로가 자초한 것이기도 하다.

정작 중요한 것은 이 글을 쓰면서 새삼 느끼는 것인데, 나 자신이 고교시절부터 입이 닳도록 극구 흠모하던 그에 대해 너무나 많은 정보들이 있어 실제 그를 발견한 것이 나 자신인지 아니면 타인들의 시선을 통해 주입된 것인지 스스로도 잘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시인 "김수영"이 "신화"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진짜 시인 김수영을 발견하는데 도리어 어려움을 겪을지도 모르며, 그가 1960년대의 위대한 시인, 그 당시만의 해석에 붙들리는 우를 범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시인은 "친구여, 이제 바로 보마"라고 말했던 시인이 아닌가? 그러므로 "우리들도 우리들 당대의 시선으로 이제 시인을 바로 보자"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그에 대한 이전의 수많은 논문과 연구, 평론들이 그를 조명하고 있으므로 우리가 그에 대하여 잘 알 수 없다는 말은 게으름의 소치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우리에겐 우리의 김수영이, 나에겐 나의 김수영이 필요한 것이다. 이 글의 출발점은 이 부분이 아니고선 안 될 것이다.(이 독후감은 편의상 "김수영 전집"에 대한 것이지만, 김수영이란 한 인물을 내 나름대로 입체적으로 읽어낼 수 있었던 그의 시집, 그에 대한 좋은 책들에 대한 종합적인 독후감이다. 시집을 제외한 도서명은 말미에서 소개하겠다.)

2.
시인은 산문을 쓰는 것을 꺼리고 때로는 불편하게 여긴다. 그러나 많은 시인들이 자신들의 시론을 산문의 형태로 남긴다. 그것은 시인이 시를 통해 산출하게 된 과정을 산문이란 형식으로 보상받고자 하는 마음 때문일지 모른다. 흔히들 김수영의 시론은 <詩여, 침을 뱉어라 - 힘으로서의 詩의 存在>와 <反詩論>에서 그의 시론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다고들 하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시여, 침을 뱉어라>는 실천적인 관점에서의 시론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시론이라고는 하지만 김수영이 詩가 무엇인가를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는“시를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시를 논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말하고 있을 따름이다. "詩에 대한 정의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라는 엘리오트의 말처럼 시가 무엇인지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사전 편찬자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시란 무엇인가를 정의할 재간은 나에게도 없지만 내 나름의 좋은 시인을 구분해내는 법이 하나 있다면 그 중 하나는 "산문 잘 쓰는 시인"은 믿을 만하다는 것이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그것은 시라는 장르가 지닌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인 "진정성"이란 측면에서, 혹은 동양적인 미덕인 "언행일치"란 측면에서 시인의 일상과 시의 진정성이 결합되는 부분, 그의 사유가 시라는 정신적 산물로 귀결되는 과정에서 노출되지 못한 사유의 잔재들이 표현되는 것이 산문이란 측면에서 그러하다. 시인의 산문이 중요한 것은 그런 측면에서이다. 즉, "시"는 언어의 험난한 절애(絶崖)에 세워진 탑으로, 시인의 사유(산문)의 정점에 세워진 금자탑이다. 그런 점에서 내가 아는 한 가장 산문을 잘 쓰는 시인 중 한 명은 바로 김수영이다.

3.
김수영의 시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의 첫구절은 종종 인용된다. 김수영의 시들은 너무나 유명해서 우리는 가끔 저널이나 평론가들의 산문에서 한두 구절씩 인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가령 이 시의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와 같은 대목도 그런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이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王宮 대신에 王宮의 음탕 대신에
五十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우리는 이 시를 시인 자신의 소시민적 행동을 솔직하게 보여 주는 작품이라는 평을 많이 들었다. 그는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자신의 현실 속에 존재하는 모습이 자신이 추구하는 시의 경향이나 참여시인이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하지만 그가 이 시에서 언급하고 있는 소위 '힘있는 자들의 위세'가 생각외로 그리 대단한 존재들이 아니란 사실에 주목해보아야 한다. 그들은 기껏해야 '땅 주인'이나 '구청 직원' 또는 '동회 직원' 나부랑이에 불과하다. 김지하의 <오적>에 등장하는 그런 거물들이 아닌 것이다. 나는 그가 언급하고 있는 권력자들을 보며 솔직히 키득거리며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시인 김수영은 이렇게 바닥에 납죽 엎드린 시늉을 하며 우리들의 비위를 살살 건드린다. 아니 소위 '지식인'이라는 비루한 인간들의 비위를 확 뒤집어 놓는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그런 똥물에 빠져 고상한 척, 있는 척 하는 지식인들의 쓸개를 꺼내 씹어준다. 김수영이 "풍자냐, 자살이냐"를 말할 때엔 적어도 이 정도 배포와 익살은 가지고 한 말이란 생각이 든다.

그는 기껏해야 눈 앞의 작은 이익에 연연하여 '이발장이'나 '야경꾼'들과 같이 가지지 못한 자, 힘 없는 자에게는 단돈 일 원 때문에 흥분하지만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다 '붙잡혀 간' 소설가를 보면서는 두려움 때문에 아무 말도 못하는 그런 존재이다. 그는 이렇게 스스로에게 똥물(자기비하)을 뒤집어 씌우면서 그보다 더큰 불의에 대항하지 못하고, '설렁탕집'에서 '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 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는 이들의 똥침을 찌른다. 얼얼하게 아팠을 것이다. 그는 이런 과정을 거치며 그의 최대 히트작인 <풀>의 세계로 나아간다. 바로 서기 위해서는 누구라도 자기 모멸과 반성을 거쳐야 한다. 스스로 더러운 땅에 들어가 온몸을 오물을 적시며 그는 세례자 요한처럼 우리들에게 비판의 세례를 준다.

이 시의 배경 중 다소 특별한 것은 그의 포로수용소 경험이 녹아있다는 것이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第十四野戰病院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느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아는 이들은 아는 이야기지만 그는 의용군이었다. 반공시대를 살아오면서 생존을 위해 강제로 의용군에 끌려갔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특별한 의식까지는 아니어도 단지 강제에 의한 것이었는가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수도 있다. 어차피 그 속은 누구도 모르는 일이 되어 버렸으므로... 다소 무례한 추측을 해본다면 그가 북의 체제에 대한 호기심에 이끌렸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그는 의용군에 끌려갔다가 도망쳤는데 다시 인민군에게 붙들려 파묻어두었던 군복과 총기를 다시 파서 보여주고서야 총살을 면했단 이야기도 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후퇴하던 중 포로가 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지만 그는 영어실력을 인정받아 병원에서 통역관으로 근무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시에는 그때의 경험이 녹아 있다. 이때 그가 포로수용소에서 느낀 모멸감은 상당한 것으로 후일 영어를 할 줄 알았음에도 번역일을 맡아서(이 무렵 그가 번역해낸 양서들이 상당수 되며, 그는 외국잡지들을 통해 외국의 문화계소식에도 정통했던 편이다) 생활에 보탬이 되는 정도를 제외하고는 실생활에서 영어를 통해 할 수 있는 밥벌이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포로수용소에 잡혀 있는 동안 그의 아내는 수원의 어떤 서양화가와 살림을 차려 살고 있었다. 시인이 포로의 몸에서 풀려나와 다시 사회로 복귀한 뒤에도 한동안 아내를 만나러가지 못하고 망설인 데에는 물론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중 한 가지는 이런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은 까닭도 있었다. 그의 아내는 해방 정국에서 목숨을 잃은 시인 배인철의 연인이기도 했다. 어떤 의미에서 김수영은 현대판 처용이었을지도 모르겠으나 시에 등장하는 아내의 모습이 그닥 긍정적이지 못했던 이유 중 하나가 거기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4.
시인은 말로 산다. 좀더 고상하게 말하자면 언어로 살아간다. 태초에 말씀이 있어서 가장 즐거웠던 이들은 어쩌면 시인들이었을 것이다. 김수영은 <말>이란 제목의 시를 썼다. 어떤 시는 해석 이전에 먼저 말을 걸어온다. 마음으로 쓰인 시라 그럴 수도 있고, 비슷한 심리적 정황 속에 스스로 놓여 본 경험이 또한 그런 경험을 가능케 한다. 시인이란 무엇인가? 말로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때로 시인은 지장보살의 현연이다. 이렇게 말하는 까닭은 지장보살의 기능이 시인의 기능과 일정하게 맞아 떨어지는 탓이 크다. 지장보살은 불덕으로만 보자면 득도하여 부처가 되고도 남는 이다.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존재이다. 그렇지만 지장보살은 염라지옥의 가장 하층의 저주받은 중생들이 모두 구원받을 때까지 스스로 부처가 되지 않겠다는 마음의 염을 세운 이가 아닌가. 물론 시인들이 모두 불립문자의 경지에 도달하였으나 스스로 그리하지 않은 존재들인지는 묻지 말자. 비유일 뿐이니까. 시는 동시대의 공기와 접하여 가장 먼저 산화되는 사유의 접점이므로 시인들은 늘 시대의 변화에 가장 민감하며 더불어 정신의 피로와 슬픔을 호소한다.  

같이 말을 풀어내는 존재들이지만 산문을 주요한 표현 방식으로 사용하는 작가와 시인의 가장 큰 차이는 언어가 표현할 수 있는 한계의 차이에 있다.(유치하게 시의 우월성을 논하는 것이 아니다) 시인은 말하지 않음으로 가장 많은 말을 한다. 시는 말로 표현되고 있는 부분들에 의해 세상의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몇 마디 말로 인해 드러내진 부분 이외에 말이 가리고 있는 부분을 통해 세상의 진실을 드러낸다. 우리가 사물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 혹은 보다 멀리 보기 위해 나도 모르게 눈가에 양손을 모아 시야를 좁혀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인은 언어의 양손을 들어 우리의 눈을 보다 자세히, 깊이 들여다 볼 수 있도록 한다. 깊이, 자세히의 포즈를 통해 넓이를 확보해낸다.

그런 시인이 "말"에 대해 말하고 있다.
"나무뿌리가 좀더 깊이 겨울을 향해 가라앉았다"라고 말한다. 그것도 겨울에 말이다. 모든 생명이 죽은 듯 엎드려 있는 얼어붙은 땅을 향해 뿌리가 깊이 가라앉았다. "이 가슴의 동계(動悸)", 동계라는 것은 숨이 차오는 것을 말한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손발이 떨리고,숨이 차오는 현상이다. 그런데 시인은 이 모든 생리적, 본능적 현상들 - 기침, 한기 - 도 내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나에게 속해있는 혹은 뗄 수 없는 관계들조차 내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여전히 살아가지만  이 모든 것이 나의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나의 질서가 죽음의 질서에 종속되어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두번째 연에서 시인의 그런 마음은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된다.

익살스러울만치 모든 거리가 단축되고
익살스러울만치 모든 질문이 없어지고
모든 사람에게 고해야 할 너무나 많은 말을 갖고 있지만
세상은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거리가 단축된다는 것은 심리적인 거리를 말할 수도 있고, 원근감의 상실을 말할 수도 있고, 세상의 사물들이 실제로 존재해야 하는 공간을 이탈한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질문이 없어진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의문이 사라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의문이 사라지는 순간은 해탈하지 않는 한 불가능한 것이다. 게다가 의문과 질문은 다른 것이다. 의문은 품을 수 있겠으나 그것을 입밖에 내어 질문으로 전환시킬 수 없는 순간. 그것은 폭력의 순간이거나 강압의 순간이다. 묻고자 하나 물을 수 없다. 게다가 시인은 고립되어 있다. 세상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말은 곧 깨달음이지만 세상은 나의 깨달음에 귀기울이지 않는다.

셋째 연에 가면 그 결과물이 나온다. 그런 침묵의 결과, 마음 속 동계의 결과들은 그러나 추상적이지 않다. 시인은 세상의 불의나 억압에 대해 진실을 고하고 싶지만,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다. 게다가 그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은 매우 구체적이라 그는 조무래기처럼 느껴진다. 스스로의 삶은 허접하다. 말하지 못하는 말 때문에 "아내를 다루기 어려워지고" 자식도, 친구도 점점 그를 업수이 여긴다. 그럼에도 그는 말하지 못한다. 공연한 타박이 두려울 수도 있을 것이고, 너 혼자 그래봐야 세상이 변하니 하는 그런 일리있는 포기의 답변을 들을까 두렵다. 그래서 그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다.

4연의 역설은 놀랍도록 마음 아프게 다가온다.

하늘의 빛, 물의 빛, 우연의 빛인 말은 고로 우연히 나에게 스며든 말일 수도 있다. 천지 사물 속에 깃든 빛의 말은 감히 나같이 하찮은 존재에게 스밀 수 없는 말이므로 감히 나의 말이라 할 수 없다. 그것은 우연에 가까운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말들은 - 가장 무력한 말, 죽음을 위한 말, 죽음에 섬기는 말 - 이다. 말은 나의 말이되, 나의 말이 아니다. 시인은 고립됐다. 그의 말은 신의 말을 모사하는 방언이 되었고, 방언은 지껄인다 한들 그것을 해석해줄 이 없으니 말이 아니다.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니 무어라 지껄여도 상관없는 만능의 말이다. 그의 말을 겨울의 말로 만들던지, 봄의 말로 만들던지 하는 것은 이제 우리의 몫이 되었다.

5.
시인의 삶 속에는 우리 현대사의 격렬한 순간들이 많았다. 그는 일제 치하에서 태어나 자랐고, 한국전쟁을 겪었고, 다시 이승만 독재 시절을 거쳐 4.19혁명을 겪는다. 그가 4.19의 순간에 얼마나 가슴 뿌듯한 희열에 가득찼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증언들이 입증해주고 있다. 그러나 혁명은 곧 좌절된다. 그런 시기에 나온 시가 유명한 <그 방을 생각하며>였다. 이 시 역시 전문이 인용되기 보다는 첫행의 격렬함 탓인지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 버렸다"가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역시 첫 구절이 주는 강렬함이 드세다. 그 방에는 "싸우라", "일하라"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죄다 헛소리 혹은 헛소리 같이 공허한 것들이다. 그리고 시인은 그 노래들 - 싸우라, 일하라 - 라는 구호들을 이전의 구호들처럼, 아니 이전의 노래들처럼 잊어버렸다.

그리고 다시 첫연의 구절을 두 번째 연에서 반복한다. 시인이 현재 소유하고 있는 것은 녹슨 펜, 앙상하게 남은 뼈, 그리고 표독한 광기, 그리고 가벼운 실망이다. 그런데 시인은 이를 "역사일지도 모르는"이라고 말한다. 이 순간 가장 중요한 말은 "역사란 무엇인가?"하는 정의이다. 역사를 묵직함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고, 개인적인 체험의 연속, 낙망의 연속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역사의 정의는 무수하나 역사란 기본적으로 흘러간 과거를 말한다. 그에게는 이번이 처음의 실망도, 낙망도 아니다. 그런 탓에 펜은 녹슬어 버렸다. 그것을 한탄만 하고 있다면 이 시는 그저 그런 재미없는 시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시인은 3연에 와서 1,2연에서 반복했던 구절을 교묘하게 비튼다.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었지만" 그의 입속에는 의지의 잔재 대신에 쓰디쓴 냄새만 되살아났다. 구취(口臭)! "bad breath" 그는 방, 낙서, 기대를 잃었고, 노래를 잃고, 가벼움도 잃었다. 그럼에도 시인은 무엇인지 모르게 기쁘고, 가슴은 이유없이 풍성하다. 이런 낙망한 순간이 있는가? 시인이 구체적으로 그것이 무엇인지 말해주지 않으니, 읽는 나도 그게 대관절 무슨 말인지 알아챌 수가 없다. 하기사 시를 쓴 본인 스스로도 모른다 하지 않던가?

이럴 때 제목은 이 시 전체를 암시해준다. 시 제목이 무엇이던가? "그 방을 생각하며"가 아닌가.
시인은 방, 낙서, 기대, 노래, 가벼움을 잃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현재의 일이 아니라 과거의 일이다. 그래서 시인은 제목도 "그 방을 생각하며"라고 지었다. 그는 혁명을 꿈꾸었으나 방만 잃었다, 방만 잃은 것이 아니라 그와 관계되는 온갖 허접한 것들을 잃었다. 그런데 그 방에서 나와 그 방을 생각해보니 이 모든 것이 허접이었다. 버림받은 것인지, 버려진 것인지 모르겠으나 시인의 가슴이 이유없이 풍성한 까닭은 그것이다.

시인은 이제부터 자유다. 까닭이 있는 것은 대항할 구체적인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인지 모르고도 기쁠 수 있다는 것은 구체적인 대상이나 현상이 현재로서는 타개된 것을 의미한다. 이유없이 풍성하다는 것은 그를 옭죄던 현실의 무게로부터 그가 자유로와질 수 있다는 심리적 상태를 의미한다. 이 시가 1960년에 쓰였으므로 이 시에 대해 역사적 현실을 찾아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비록 혁명은 안 되었으나 그는 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비슷한 시기의 시 <푸른 하늘을>을 나는 유독 좋아하는 편이다. 알고 보면 시는 사람을 죽이지는 않는다. 시에 무슨 무기가 달려 있는 것도 아닌데 시가 사람을 죽일리 있나? 그런데 이상한 일은 왜 권력자들은 시인들을 감옥에 가두거나 그들을 감시하거나 혹은 그들의 시에 갖가지 죄목을 붙여 감옥에 가두는 것일까? 그것은 시가 사람을 죽이지 않고, 대신에 사람들을 깨우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민족이 만들어낸 시인 중에서 앞으로 100년 후에도 여전히 위정자들의 골치를 아프게 할 만한 시를 제조해낸 시인. 그가 김수영이다.

6.
사적인 면모로 보았을 때 이토록 오만과 편견으로 그득한 시인 역시 드물 것이다. 보라! 그는 <목마와 숙녀>의 시인. 박인환을 이유없이(?) 극도로 미워했고, 후배 시인이 술 한 잔을 청하고자 집을 찾았을 때 속이 빤히 보이는 모시저고리 윗 주머니에 누런 배춧잎이 몇 장을 꽂아두고도 돈 없다고 후배 시인과 문학평론가들을 야단치며 젊은 친구들이 공부를 해야지 맨날 술타령만 한다고 야단쳤던 인물이다. 그 야단맞은 후배 시인 중 하나가 바로 '고은'이다. 그럼에도 정작 자신은 늘상 술에 절어 있었다. 자신은 살아 생전에 시나 평문을 써주고 받아오는 몇 푼의 원고료를 제외하고는 돈 한 푼 벌어보지 못했으나 집안에서는 큰소릴치는 아버지요, 남편이었다. 그래서 아내와 자식들에게는 죄인이었지만 언제나 이유없이 당당했던 그이기도 했다. 물론 잠든 아이들을 살뜰히 보살피는 일면도 지녔던 시인이다.

1980년대를 뜨겁게 달구었던 '민중문학'의 시대를 김수영이 살아서 겪었다면 그는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역사의 가정은 없지만 가끔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그는 무엇을 했을까? 그런 순간 존경할만한 스승, 선배란 것은 그의 말에 모두 동의할 수는 없다손 치더라도 돌아갈만한 중요한 전통이란 측면에서 그의 존재는 컸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시인 김수영은 분명히 절필하거나 민중문학론에 반기를 드는 따위의 행동은 하지 않았을 것 같다. 물론 그가 자신이 소망했으나 당대에 자신은 도달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그런 문학적 토양들이 뿌리내리기 전에 세상을 달리했으므로 우리는 그의 그런 시론과 시들은 접할 수 없었다. 김수영이 민족문학론이나 민중문학론자가 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분명 어떤 태도를 보여주었을 것이라고는 추측할 수 있으며, 그의 그런 태도는 때로 보수적으로 비췄을지 모르겠으나 믿고 기댈만한 든든한 보수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했을 것이다.

김수영에 대해 한 마디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누가있겠는가? 그러나 내 청소년기의 이 시에 대한 감상과 피끓는 느낌은 오롯이 나의 것이었다. 친구들이 신동엽의 민중성을 말할 때도 나는 김수영의 저 솔직함을 보라고 외쳤었다. 그렇다고 신동엽 시인을 부인한 것은 아니나 나는 김수영 시인의 저 부끄러움이 좋았다. 무엇보다 그의 통찰은 신동엽의 농촌 정서와는 다른 풍모가 있었다. 그는 그래서 중도에 그렇게 가버린 것이겠지. "아름다운 상상"을 했다. 그것은 임화가 그렇게 죽지 않고, 우리가 이렇게 남북으로 갈라지지 않아서 그래서 임화가 스승이 되어 제자들을 기르고, 우리들은 즐겁게 임화에서 김수영 그리고 다른 또 누군가로 이어지는 선생들에게 배우고, 신동엽이 그렇게 죽지 않아서 여전히 꼬장꼬장한 늙은이로 후학들을 다그치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러나 우리 문학사에서 임화는 죽고, 김수영은 죽고, 신동엽은 죽고... 또 조태일이 죽고, 김남주가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우린 아름다운 스승이 없는 시대에 나서 스스로를 가르치며 살아가야 한다. 우리가 늘 쫓기고, 절박하며, 기갈에 들린 것. 그들이 펼쳐놓은 길을 따라가면 절대로 헤매지 않을, 딛고 올라설 스승이 없어서다. 그것이 늘 나를 아름답지 못한 고민들 속에서 헤매게 만든다.

(시인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시집을 읽는 것이다. 민음사에서는 시와 산문으로 구분된 김수영 전집이 있으므로 이 책을 읽는 것이  김수영의 세계로 들어가는 좋은 첫 단추가 될 것이다. 두 번째로는 시인 최하림 선생의 김수영 평전이 있다. 이전에 나왔다가 절판되었던 것을 수정증보하여 재출간한 좋은 평전의 본보기가 될 만한 책이니 이는 그의 삶과 사유의 뿌리를 더듬어볼 수 있는 좋은 책이다. 세 번째로는 문학평론가 김명인 선생이 소명출판에서 펴낸 <김수영, 근대를 향한 모험>이란 비평서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근대를 향한 모험가로서의 김수영의 시세계와 생애를 더듬어 본 좋은 책이다. 그외에도 그에 관한 좋은 책들은 많이 있으므로 찾아 읽는 노고를 사양치 않는다면 김수영은 우리에게 좋은 고민거리들을 던져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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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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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王宮 대신에 王宮의 음탕 대신에
五十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越南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二十원을 받으러 세번씩 네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앞에 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第十四野戰病院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느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을 지고
머리도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絶頂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二十원 때문에 十원 때문에 一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一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

(시집 {거대한 뿌리}, 1974)


- 80년대를 뜨겁게 달구었던 '민중문학론'을 김수영 시인이 살아서 겪게 되었다면 그는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하고 가끔 꿍금해지는 순간이 있다. 그는 반성문을 썼을까? 아니면 절필 했을까? 그도 아니면 민중문학론에 반기를 들었을까?

내가 생각하기에 시인 김수영은 분명히 절필하거나 민중문학론에 반기를 드는 따위의 행동을 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불행히도 그는 자신이 꿈꾸었던 건강한 문학들이 피어나기 전에 세상을 달리했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이런 반성문같은 시들을 읽고 있는 것이다.

이 시는 시인 자신의 소시민적 행동을 솔직하게 보여 주는 작품이다. 그는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자신의 현실 속에 존재하는 모습이 자신이 추구하는 시의 경향이나 참여시인이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가 언급하고 있는 소위 힘있는 자들의 위세 또한 그리 대단한 존재들은 아니다. 그들은 기껏해야 '땅 주인'이나 '구청 직원' 또는 '동회 직원' 나부랑이에 불과하다. 나는 그가 언급하고 있는 권력자들을 보며 솔직히 키득거리며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시인 김수영은 이렇게 바닥에 납죽 엎드려 우리들의 비위를 살살 건드린다. 아니 소위 '지식인'이라는 비루한 인간들의 비위를 확 뒤집어 놓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그런 똥물에 빠져 고상한 척, 있는 척 하는 지식인들의 쓸개를 꺼내 씹어주는 것이다. 시인 김수영이 "풍자냐, 자살이냐"를 말할 때에는 이 정도 배포는 가지고 한 말이란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는 기껏해야 눈 앞의 작은 이익에 연연하여 '이발장이'나 '야경꾼'들과 같이 가지지 못한 자, 힘 없는 자에게는 단돈 일 원 때문에 흥분하지만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다 '붙잡혀 간' 소설가를 보면서는 두려움 때문에 아무 말도 못하는 그런 존재이다. 그는 이렇게 스스로에게 똥물을 뒤집어 씌우면서 그보다 더큰 불의에 대항하지 못하고, '설렁탕집'에서 '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 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는 이들의 똥침을 찌른다.

얼얼하게 아팠을 것이다. 그는 이런 과정을 거치며 그의 최고 최대 명작인 <풀>의 세계로 나아간다. 자기 모멸과 반성을 거치면서 말이다. 스스로 더러운 땅에 들어가 온몸을 오물을 적시며 그는 세례자 요한처럼 우리들에게 비판의 세례를 준다.

이 시의 배경 중 다소 특별한 것은 그의 포로수용소 경험이 녹아있다는 것이다. 아는 이들은 아는 이야기지만 그는 의용군이었다. 그후 반공시대를 살아오면서 생존을 위해 김수영 역시 의용군에 들어갔던 것이 특별한 의식이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고 강제였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자원했다고 하는 이야기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 역시 의식이 투철한 편은 아니었으로 입대했다가 도망쳤는데 다시 인민군에게 붙들려 파묻어두었던 군복과 총기를 다시 파서 보여주고서야 총살을 면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인천상륙작전으로 포로가 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지만 그의 영어실력을 인정받아 병원에서 통역관으로 근무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 그가 느낀 모멸감은 상당한 것으로 후일 영어를 할 줄 알았음에도 실생활에서는 영어를 통해 할 수 있는 밥벌이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포로수용소에 잡혀 있는 동안 그의 아내는 수원의 어떤 서양화가와 살림을 차려 살고 있었다. 그가 포로에 풀려나와 다시 사회로 북귀한 뒤에도 한동안 아내를 만나러가지 못하고 망설인 데에는 물론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그 중 한 가지는 이런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은 까닭도 있었을 것이다. 얘기는 길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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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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