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 엘리트(오늘의 사상신서 10) - C. 라이트 밀즈 (지은이) | 한길사(1991년)


먼저 다음의 문장을 읽어보자.

18세기에 들어와서 역사의 무대를 관찰하는 사람들은 근대사회를 사회구조의 정점에서 권력의 분화라는 뚜렷한 현상이 전개되고 있음을 주목하게 되었다. 즉, 문관이 권위를 독점, 군사적 강제력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들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고 그 반면에 군인의 세력은 제한되었으며 정치적인 중립화를 유지해야 했고 따라서 그 세력이 점차 쇠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략>... 그러나 20세기에 이르러 공업화를 이룬 여러 국가에서는 문관 우위라는, 일견 위대하기는 하지만 불확실한 사실이 점차 근본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나폴레옹 시대로부터 1차 대전까지의 오랜 평화기간이 끝남과 동시에 세계 역사는 바야흐로 군부 중심시대로 다시 되돌아가기 시작하였다. 전 세계적으로 장군들이 다시금 종전처럼 활약하게 되었다. 전 세계의 현실적인 성격은 군부의 지도자들이 제출한 조건에 따라서 결정되고 있었다. 미국에서도 정치적인 진공 속으로 장성들이 진군해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회사 중역이나 정치가와 어깨를 나란히 한 장성들이 -- 미국의 엘리트 세계에서 가장 우대받지 못하였던 이들 장성들이 진출, 지극히 중대한 결과를 가져오는 결정을 내리기도 하고 혹은 그것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강대한 권력을 부여받기에 이르렀다. <243쪽>


위의 문장을 살펴보았을 때, 이 내용이 과연 현재의 미국 혹은 세계와 무관한 내용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책의 13장에 논의된
"대중사회" 부분을 읽어보기 위해 오랜만에 손 때 묻은 이 책을 꺼내서 읽다가 심심한데(물론 절대로 심심할 겨를이 없지만) 이 책에 대해 사람들이 써 논 글이나 읽어보자는 심산에서 클릭해봤더니 절판이란다. 이런 걸 문화적 아노미라고 해야 하나? 문화지체(cultural lag)라고 해야 하나? 사회과학 분야의 관심이 예전 같지 못한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한 시대를 풍미했던 C.W. 밀스의 책이 절판되었을 줄이라곤 상상도 못했다.


세상이 이토록 빠르게 변화하는 걸 애통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이 책의 가치 효용이 다한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모를 지경이다. 사실 이 책
"파워엘리트"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의 상당수는 이제 그 효용이 다한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어 미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작동하는 지배구조의 엘리트들이 누구라는 걸 오늘날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하지만 이 책이 처음 나온 1950년대 중반 "파워 엘리트"가 미국 사회에 던진 충격이 어떤 것이었을지 상상해보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잘 알려진 대로 C.W.밀스는 1950년대를 전후한 미국 사회의 파워엘리트들을 상류사회, 지방사회, 대도시 상류사회의 400대 가문과 유명인사들, 대부호, 기업의 최고 간부, 기업체 부호, 군부 지도자 등등의 범주로 나누어 이들을 세밀하게 연구하고 있다. 그 가운데 미국 사회의 구조가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지를 균형이론
(권력을 독점하지 못하도록 견제하고, 분점하도록 하여 균형을 맞춘다는 이론)과 파워엘리트, 대중사회의 틀로써 설명한다. 책의 말미에는 미국 사회의 보수적 분위기(1950년대 미국은 이미 보수적 분위기의 나라라고 스스로를 인식하고 있었다)에 대해 전하고 있는데, 럿셀 커크를 인용해 미국의 보수주의에 대해 이렇게 정의내리고 있다.


"1) 신의 의도가 사회를 지배한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인간은 스스로가 사회를 지배할 수 있는 어떤 위대한 힘을 자기의 이성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2) 보수주의자는 전통적 생활의 다양성과 신비성에 애착을 느끼고 있다."
이들은 "사회는 지도자를 찾고 있다"고 믿는다. 마치 유대 민족이 선지자를 통해 하느님이 예시해준 왕을 찾아내는 것처럼 말이다. 보수주의자(미국의)들은 사람들 사이에 자연적 우열이 있으며 거기에서 계급과 권력의 자연적 질서가 형성된다고 주장한다(이는 현재 미국이 드러내놓고 말하진 않지만 내재된 보수주의의 도덕률이다). 미국의 전통은 신성한 것이며, 전통을 통해서 신의 섭리의 참된 시화적 방향이 명시된다고 보았다. C.W.밀스의 "파워엘리트"가 왜 대단한 책인지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대목들이다. 미국 사회는 신의 섭리에 따른 전통에 의해 승인된(기름부음을 받은) 엘리트들에 의해 통치되는 균형잡힌 사회인 셈이고, 밀즈는 바로 미국의 그런 보수주의를 비판한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끝낸 미국은 세계 최대의 강대국이 되었으나 내외부적으로는 두 가지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외부적인 위협이란 것은 일찌기 패튼이 주장한 바대로 소련의 위협이었고, 내부적으로는 미국 사회가 이전과 다르게 크게 변모했다는 사실이었다. 전쟁이 유럽에 미국식 문화를 광범위하게 퍼뜨린 것과 마찬가지로 미국 역시 전쟁으로 인한 사회구조의 변화로 말미암아 커다란 변화를 경험한 것이다. 우선, 전쟁전에 비해 기업의 구조가 대규모화되었다. 이전의 중소기업들은 전쟁 기간 동안 소멸되거나 거대 기업에 합병되었고, 소규모
(물론 우리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농장들 역시 거대 기업 속에 포함되어 갔다.


전쟁은 참전한 남성 병사들을 대신해 노동 현장을 메꿔 준 여성과 청소년의 사회진출을 가속화시켰고, 전쟁 수행 능력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미국 동부와 서부의 도시들이 거대화되었다. 한 마디로 이야기해서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지속되었던 미국의 기존 문화 시스템이 대중사회화
(산업화와 도시화)되었다는 것이다. 미국 자신이 대중문화의 총본산 역할을 하면서 자신들 역시 대중문화에 대해 고민했다는 것이 되는데, "파워엘리트"의 C.W.밀스 역시 이런 당시의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 J.S.밀과 A.토크빌의 자유주의적 견해의 연장선상에 서 있는 밀스의 견해는 물론, 대중사회에 대해 비판적이다.


C.W. 밀스는 공중(public)과 대중(mass)을 다음과 같이 구별하였다.
공중은 ① 의견을 받는 쪽과 거의 같은 정도로 많은 수의 의견을 보내 주는 쪽이 있고 ② 공중에 대해서 표명된 의견에 효과적으로 반응을 나타낼 기회를 보장하는 공적(公的) 커뮤니케이션이 존재하며 ③ 그와 같은 토론을 통해서 형성된 의견이 효과적인 행동으로서 실현되는 통로가 용이하게 발견되며 ④ 제도화(制度化)된 권위가 공중에게 침투되어 있지 않고 공중으로서의 행동에 자율성이 유지되어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대중에 있어서는 ① 다수의 사람들은 단순히 의견을 받는 쪽에 불과하다. ② 지배적인 커뮤니케이션은 개인이 신속하고도 효과적으로 반응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며 또는 불가능하게까지 만드는 조직에 놓여 있다. ③ 의견이나 행동으로의 실현은 여러 가지의 저항으로 인해 통제되고 있다. ④ 대중은 제도화된 권위로부터의 자율성을 전혀 지니고 있지 않고 있다. 밀스는 어떠한 양식의 커뮤니케이션이 지배적인가에 따라 공중과 대중을 구별하고, 대중사회에서 지배적인 커뮤니케이션의 형태는 제도화된 미디어이며, 대중은 주어진 매스미디어의 내용을 받아들이기만 하는 존재라 하였다. 그런데 매스미디어는 누가 장악하고 있는가?


밀스에 의하면 당시
(1950년대) 미국 사회의 엘리트들이 누리고 있는 지위는 도덕, 덕성과 상관없는 것이며 그들의 능력은 칭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과 결부되어 있지도 않다고 주장한다. 다만 그 지위를 누리고 있는 이들은 사회의 지배적인 권력 수단이나 부의 원천, 명성의 기구에 의해서 선발되고 형성된 사람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공중(public - 요새 말로 하자면 '참여 민주주의')의 토론을 정책 결정자의 의사와 결부시켜 주고 있는 자발적 결사체의 다원적 존재에 의해서 견제를 받으면서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들도 아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인류사상 일찌기 찾아볼 수 없는 거대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령관이며 미국의 무책임한 제도의 조직 내부에서 성공을 차지한 인물들이다. (낡은 이야기라고 하기엔 지금 읽어봐도 너무나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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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작전명 발키리 - Valkyrie



 

난제 - 역사성과 오락성(흥행성적) 그리고 작품성
역사 속에 실존했던 인물과 사건을 영화나 드라마, 소설로 재구성하는 일은 화살 하나로 세 개의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일처럼 어렵다. 역사성과 오락성(흥행성적) 그리고 작품성을 동시에 만족시킨다는 일이 어디 그렇게 쉬운 일이겠는가? 언젠가 어느 신문 기자던가, 평론가가 영화 <트로이>에서 헥토르가 아킬레스에게 죽임을 당한다는 이야기를 썼다가 인터넷 누리꾼들을 중심으로 스포일러를 유포했다고 혹독한 비난의 대상이 된 적이 있었다. 내가 이 일을 기억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 무렵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옆 좌석의 젊은 여성 둘이 나누는 대화를 실제로 들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기자인지, 평론가인지를 혹독하게 비판했고 그 덕분에 영화 보는 재미가 반감되었다고 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읽지 않았다는 것을 힐난하고 싶어서 꺼낸 이야기가 아니다. 대성(大聖) 공자도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것을 알았던 사람이 아니라고 고백하는데, 뉘라서 태어나면서부터 세상의 모든 고전을 읽을 수 있을까. 영화를 통해서이든, 원작을 통해서이든 누구나 그 이야기를 처음 접하는 순간은 있는 법이다. 고전이란 인류의 문화유산이란 점에서는 보배이겠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수많은 세월 동안 대중들에게 다양한 형태로 널리 전파된 이야기란 뜻이기도 하다. 이것을 영화화하거나 드라마로 장르 전이(轉移)를 할지라도 기본적인 이야기 틀을 바꾸긴 매우 어렵다. 고전이 살아남는 이유 중 하나는 그 익숙한 이야기 스타일이 대중에게 이미 숱하게 검증받았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천재가 아니고서야 누가 감히 이에 도전할 수 있을까?


두 번째 장편영화인 <유주얼 서스펙트>에서 스릴러물에 놀라운 재능을 보여주었던 신예감독 브라이언 싱어였지만, 이후 <엑스맨> 1편과 2편, 그리고 <수퍼맨 리턴즈>에서는 할리우드의 상업영화 감독으로 안주하는 것으로 보였다. 어릴 때부터 제2의 스티븐 스필버그를 꿈꿔왔던 브라이언 싱어로서는 선배가 <쉰들러 리스트>로 보여 주었던 길을 따라가고 싶은 의욕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자진해서 영화 <발키리>의 감독을 맡았다. 사실 역사를 공부하다보면 매력적인 인물과 유난히 끌리는 사건, 극적인 요소들로 인해 깊이 매료되는 시대가 있는 법이다. 나는 나치 독일 치하에서 억압에 저항했던 숄 남매의 <백장미단> 이야기를 처음 접했던 것과 거의 동시에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의 히틀러 암살 음모 사건을 접했다.


결과를 빤히 아는 역사영화(EPIC)를 보는 재미는 어디에서 오는가?

아돌프 히틀러는 생전에 모두 42차례의 암살 기도(『독재자들』, 교양인, 2009)에도 불구하고,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정치지도자로서 가장 많은 암살 시도가 있었던 인물은 아마도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였으리라 싶은데, 『피델 카스트로 - 마이 라이프』(현대문학, 2008)에 따르면 모두 600여 차례나 있었다고 한다. 그를 제외하고는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프랑스의 샤를르 드골 대통령이 6차례의 암살 기도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다. 늑대 무리는 조직적으로 사냥감을 공격하지만 우두머리를 잃으면 사냥을 포기한다고 하는데, 국가조직의 수장을 제거함으로써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겠다는 암살은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정치수단 중 하나다.


제임스 1세를 암살하려 했던 가이 포크스(Guy Fawkes)를 비롯해서 링컨 대통령을 암살했던 존 윌크스 부스(John Wilkes Booth),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범이라는 리 하비 오스월드(Lee Harvey Oswald), 그의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을 암살한 시르한 비샤라 시르한(Sirhan Bishara Sirhan)에 이르기까지 정치인을 겨냥한 암살은 성공유무와 상관없이 대중의 관심이 쏠린다. 이런 사건들이 수많은 음모론의 대상이 되는 까닭은 누군가 한 개인의 죽음이 시대의 향배를 어긋나게 하거나 방향을 바꿀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올리버 스톤 감독을 비롯해 수많은 미국인들은 케네디 대통령이 살아있었다면 미국이 베트남전의 수렁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유력한 대통령 후보였던 동생 로버트 케네디가 암살당한 까닭 역시 그가 범죄와의 전쟁을 강력하게 추진했던 법무부 장관 출신이었고,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당시 미국의 군산복합체가 막대한 이득을 얻고 있던 베트남전에서 미군을 철수시키겠다고 공약했던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역사를 움직이는 것이 개인으로서의 위인(偉人)인지, 아니면 평범한 다수를 차지하는 대중(大衆)인지는 역사학의 오래된 논쟁거리로 남겨두자.


어찌되었든 역사영화를 보는 재미 중 하나는 그것이 우리 인류의 생애사 속에 포함되는 실존했던 인물들이 시대를 고민했던 흔적이란 것이고, 두 번째 재미는 과연 나폴레옹이 불면증과 위장장애에 시달리지 않았다면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지 않았을 것이며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지 않았다면 프랑스의 역사, 나아가 유럽의 역사 더 나아가 인류의 역사가 어떻게 달라졌을까와 같은 역사 속 작은 국면들이 차지하는 결과를 되짚어봄으로써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서양의 역사를 우리 한국의 역사에 대입시켜봄으로써 우리가 처해있는 실제 현실의 문제와 한계 등을 점검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비록 영화 <발키리>는 <유주얼 서스펙트>라는 걸출한 스릴러를 연출했던 감독의 작품이라고 하기엔 극적인 요소가 약한 편이긴 하지만 이와 같은 점들을 감안해서 본다면 상당히 재미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슈타우펜베르크 vs. 김재규

정치적 수장을 제거하는 암살의 상당 부분은 브루투스와 케사르의 예에서 알 수 있듯 측근에 의해 실행될수록 성공 확률이 높아진다. 최고 권력자는 항상 삼엄한 경호를 받기 때문에 암살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하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만 있다면 암살의 성공가능성은 비약적으로 높아진다. 그러나 암살이 암살만으로 정치적 의도까지 성공했다고 볼 수 있을까?


정치적 보복이 아니라면 한 개인에 불과한 정치인의 암살을 통해 정치적 의도까지 관철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버지와 마찬가지였던 케사르를 암살한 브루투스의 의도는 로마공화정을 수호하고자 했던 것이지만 그의 죽음은 공화정의 몰락을 앞당기는 결과만을 초래했다.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겨냥해 민주주의를 회복하려고 했다는 김재규의 의도와 달리 그의 죽음으로 군부독재를 청산할 수는 없었다. 현대적인 국가조직은 ‘관료제’라는 단단한 배후조직에 의해 보호되기 때문이다.


영화 <발키리>에서 암살 음모의 주동자였던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 정치인들과 군인들의 논의에 답답해했던 이유는 히틀러 암살 이후 무주공산(無主空山)이 될 최고 권력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없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은 독일 군부의 뇌리에는 쉽게 자리 잡을 수 없는 논의, ‘쿠데타’를 끌어들인 장본인이었다. 비록 규모나 역사적 의의란 차원에서 여러 가지 차이는 있지만 슈타우펜베르크와 김재규는 상당히 닮은꼴이다. 이 두 사람을 닮은꼴이라 비교한다는 것은 본의든 아니든 박정희 전 대통령과 아돌프 히틀러를 비교하게 된다.


일제 식민 통치와 한국전쟁을 치르며 출발한 신생공화국 대한민국은 좌우 갈등, 분단, 부정부패, 경제난 등으로 최악의 위기 속에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은 군부쿠데타를 통해 집권했지만 이후 형식상으로는 민주선거를 통해 연속해서 재집권에 성공한다. 그의 최대 업적은 경제개발에 성공하여 수백 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한국인들에게 ‘보릿고개’란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3선 개헌에 성공한 뒤 유신이라는 초헌법적 쿠데타를 통해 독재의 길로 들어섰다. 뒤이어 오일쇼크 등으로 인한 경제위기, 민주화를 바라는 국민의 열망을 철권으로 억압하는 독재에 염증을 느낀 민중의 저항 속에 최측근이었던 김재규 중앙정보부 부장의 총에 살해당한다.


히틀러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뒤 제정을 대신해 출범한 바이마르공화국의 정치, 경제적 무능과 볼셰비즘의 발흥에 위기를 느낀 독일의 일부 민족주의자들, 군국주의자들과 결합해 국가사회주의당(나치당)을 독일 의회의 주요 정당으로 성장시킨다. 이후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사망과 독일제국의회 방화사건 등을 통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에 비견할 만한 ‘비상대권’을 차지하고 독일 내 유일무이한 최고 권력자가 된다. 유신체제가 정권에 대한 어떤 비판, 헌법 개정에 대한 발언만으로 처벌되었던 것처럼 히틀러가 비상대권을 차지한 독일 역시 나치 체제와 총통에 대한 어떤 비방, 비판도 처벌의 대상이었다.


서민적 독재자와 귀족적 민주주의자

내가 아는 한 독일 역사에서 군부에 의한 쿠데타는 거의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퇴한 빌헬름 제정을 물러나게 한 키일 군항의 반란은 있었지만 그것은 쿠데타라기보다는 혁명이었다. 어떤 이는 독일에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았던 까닭을 독일의 민주주의가 그만큼 강력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기엔 그와 정반대의 이유로 독일에선 군부에 의한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았다. 독일을 통일한 프로이센을 일컬어 ‘국가가 군대를 소유한 것이 아니라 군대가 국가를 소유한 이상한 체제’라는 평가가 있을 만큼 독일은 국가구조 속에 군대의 전통이 강력하게 존재했다. 그러나 한국의 역사적 전통 속에는 군부가 민간권력을 장악하는 일이 고려 무신정권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 군부의 정치화는 일제의 식민통치 기간 동안 일본 군대를 통해 습득하게 된 경우라 할 수 있다.


한국의 최고통치자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풍경 중 하나는 막걸리를 마시는 대통령이다. 민주공화정의 주인이라는 대다수 국민들이 맥주와 위스키를 섞어 마시는 동안에도 대통령은 논두렁에 앉아 막걸리 마시는 풍경을 즐겨 연출한다. 이런 풍경이 연출되는 까닭은 단순하다. 최고통치자들의 실생활이 서민적이지는 않지만 서민적이라는 인상을 줄수록 통치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그의 정적이라 할 수 있는 윤보선이나 장면에 비해 우위에 설 수 있었던 중요한 부분 중 하나가 이 두 사람과 달리 서민적인 풍모와 출신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독일의 최고통치자였던 히틀러는 그동안 독일을 지배해왔던 기존의 지배엘리트들과 달리 매우 서민적인 인물이었다.



▶ 헤밍 폰 트레스코프(Henning von Tresckow) 대령

히틀러 암살음모를 추진했던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은 물론 에빈 폰 비츨레벤 장군, 헤닝 폰 트레스코프, 메르츠 폰 크비르하임, 베르너 폰 헤프텐, 파울 폰 하세, 하인리히 폰 헬도르프 등 히틀러 암살 음모의 주역들 대다수는 중간 이름에 귀족을 뜻하는 폰(von)이 들어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 독일의 전통적인 귀족(융커)계급 출신이었다. 하사출신이었던 히틀러는 귀족계급이 지배하던 독일군 수뇌부를 신뢰하지 않았고,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를 자초한 무능한 무리로 멸시하기 까지 했다. 그가 에르빈 롬멜을 총애했던 까닭 중 하나는 그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서민 출신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히틀러 암살 이후 권력수반에 앉을 계획이었던 루드비히 베크 전 독일육군 참모총장을 비롯해 칼 프리드리히 괴들러(전 라이프치히 시장) 같은 인물들이 히틀러 암살 이후 수립하려 했던 독일은 과거와 같은 지배엘리트들의 복귀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사실 히틀러 암살 음모에 가담했던 이들이 처음부터 히틀러의 반대파는 아니었다. 도리어 이들은 히틀러의 지지자들이었고, 그로부터 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런 이들이 히틀러에게 등을 돌리게 된 까닭에 대해 영화 <발키리>는 유대인학살 등 인류에 대한 범죄, 역사 앞에 선 인간으로서의 양심적 갈등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킨다. 히틀러가 권좌에 앉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볼셰비즘의 발호에 위기감을 느낀 독일 내 자본가들과 중산층, 영국과 프랑스의 무관심 등 여러 요인들이 합쳐진 결과이긴 하지만 일반 서민들의 열렬한 지지가 밑바탕이 되었다. 한국전쟁을 전후해 외국 유학을 다녀온 지배계급의 자식들이 사회주의자가 되고, 서구로부터 들어온 기독교식 교육을 받은 피지배계급의 자식들이 청교도적 민주주의 사상을 받아들여 자신의 계급적 뿌리와 이반된 사상을 지니게 되었던 것처럼 히틀러를 가까이에서 접한 귀족적 민주주의자들은 히틀러를 제거하고자 했고, 그의 통치로 가장 큰 피해를 겪어야 했던 대다수 독일 서민들은 여전히 히틀러를 지지했다.


쿠데타로 나치지배가 종식될 수 있었을까

역사가들이 가장 즐겨하는 질문이자 가장 꺼리는 질문은 “만약에~”란 것이다. 역사란 이미 과거에 일어난 사건 중에서 현재까지 영향을 미치는 주요한 사건을 찾아내 인과관계와 그 의미를 찾아 묻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과거에 아무리 중요한 사건이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현재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거나 의미가 없다면 그것은 역사적 사건이 될 수 없다. 브라이언 싱어 감독이 영화 <발키리>로 우리에게 묻고 싶은 질문은 무엇이었을까?

 


사실 영화 <발키리>는 역사영화로서는 매우 훌륭한 편이다. 할리우드에서 제작되는 역사 영화들이 지닌 문제점의 상당수는 역사를 희화화하거나 제멋대로 왜곡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발키리>는 마치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처럼 진지하다(물론 다큐멘터리도 허구이며 창작자의 의도가 반영된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브라이언 싱어 감독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에 ‘나치’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히틀러와 나치체제에 저항하려다 목숨을 잃은 이들도 있었다는 사실을 전세계인들에게 보여주고자 했다. 그의 이런 의도는 톰 크루즈라는 대중적인 스타에 의해 충분히 담보되었고 나름대로 성공을 거두었다.


영화 <발키리>의 장점은 이처럼 진지하다는 데 있지만, 동시에 관객들에게 왜 진지해져야 하는지 충분히 설명해주지 않는다. 역사 속의 사건이 그 자체로 극적인 요소들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관객 모두가 읽었다고 할 수 없는 것처럼 히틀러 암살이란 대의에 목숨을 거는 요 인물들의 당위적 결의는 영화 내부에 있지 않고, 관객들의 영화 외부에서 배운 역사에서 나온다. 그 결과 논리적으로는 공감할 수 있어도 영화를 보는 동안 정서적으로 공감하기란 쉽지 않다. 


슈타우펜베르크는 영화 서두에 이미 히틀러의 제거를 결심한 사람이었고, 베를린의 히틀러 암살 음모 세력 역시 이미 준비된 사람들이다. 그들이 왜 목숨까지 걸면서 히틀러를 제거하려 하는지에 대해 관객들 보고 스스로 역사에서 배우라고 말하는 것 같다. 영화의 진행상 필요한 등장인물 수가 너무 많은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영화 <발키리>자체가 지닌 극적인 요소에만 천착해버리면 역사영화가 줄 수 있는 재미로부터 너무 멀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일반 관객들이 히틀러 암살 음모 사건을 접하게 될 때, 가장 먼저 던지게 될 핵심적인 질문이 무엇이었을까를 상상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아마도 그 질문은 ‘만약 히틀러가 슈타우펜베르크 대령과 그의 동지들이 계획했던 대로 암살당했다면 과연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였을 것이다. 역사는 정말 달라졌을까? 슈타우펜베르크의 히틀러 암살 작전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있었던 1944년 6월 6일로부터 44일이 경과한 1944년 7월 20일의 일이었고, 독일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한 것은 발키리작전으로부터 10개월쯤 뒤인 1945년 5월 8일의 일이었다. 과연 한 명의 정치지도자가 암살당하고, 쿠데타로 나치 정권은 전복될 수 있었을까? 그 결과 독일은 연합국, 소련 등과 휴전을 맺을 수 있었을까?


우리는 이 영화 <발키리>를 통해 역사 앞에 무수한 질문들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김재규의 총탄이 유신에 종지부를 찍기는 했으나 뒤이어 12.12쿠데타와 5.18광주학살을 불러들인 것처럼 히틀러의 암살이 역사의 냉정한 잔혹성을 보여주었을지도 모른다. 역사에는 가정(假定)이 없다고 하지만 어쩌면 그와 반대의 경우를 보여주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와 같은 질문은 그저 영화를 재미있게 보면 그뿐인 관객의 입장에서 호사스러운 질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내일을 살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어제가 있는 법이다. 설령, 그것이 역사의 잔인한 수레바퀴 앞에서 실패라 불리게 될지라도 목숨을 걸고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되는 오늘도 있는 법이다.



영화 <발키리>는 의인이 10명만 있어도 소돔을 멸망시키지 말아달라던 아브라함의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비록 실패로 끝났고, 대중의 지지도 받지 못했지만 그들이 있어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의 광기에 휩싸인 독일이 역사 앞에서 그래도 우리 속에 이 체제에 저항한 사람들이 있었노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1980년 5월 광주의 마지막 날은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계엄군이 탱크를 앞세워 광주도청으로 진격해오던 날 밤을 어떤 소설가는 이렇게 말했다. "그날, 살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살았고 죽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죽었다."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역사는 그날 죽고자 마음 먹은 시민들의 피를 통해 산 사람들의 의식을 일깨우는 역사이기도 했다. 나는 역사가 어느 한 사람에 의해 결정되거나 이끌려 간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천하흥망에는 필부에게도 책임이 있는 법(天下興亡 匹夫有責)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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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시대의 일상사 - 개마고원신서 33
데틀레프 포이케르트 지음, 김학이 옮김 / 개마고원 / 2003년 7월


국가규모의 범죄집단은 폭력과 공포만으로 지배하는가?

007 시리즈에 등장하는 "스펙터"와 같이 국가적 규모를 갖춘 범죄집단은 과연 가능할까? 어떤 만화나 영화들을 보면서 가끔 설명이 불충분하더라도 으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들도 나는 심각하게 궁리할 때가 있다. 앞서 말한 스펙터같이 국가와 경쟁할 수 있는 범죄집단의 가능성이 그렇고, 영화 "혹성탈출"에 등장하는 유인원 인류가 사용하는 자동소총(혹은 반자동소총)이 과연 영화 속에서 그리고 있는 문명 수준에서 개발 가능했을까? 하는 의문들이 그렇다(세계 최초의 반자동소총은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주력으로 사용한 M1소총이었다).


과연 영화 속에서 그리고 있는 원숭이들의 문명 수준이 당시 미국의 문명 수준에 이르렀는가를 생각해보면 이런 의문이 나름대로 정당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총 한 자루 만드는 것에도 그에 합당한 기술 수준이란 것이 있으니까. 007 시리즈뿐만 아니라 거대한 조직을 유지하는 폭력집단(유사국가 혹은 국가 그 자체라고 해도 좋은)이 단순히 폭력과 억압을 이용한 공포만으로 국가라는 조직과 헤게모니를 장악할 수 있었을까? 소규모 폭력조직이라면 가능하겠지만 국가 단위의 폭력구조를 유지하는 일은 구태여 그람시의 이론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폭력과 공포 이상의 무엇인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감지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이 책 "나치 시대의 일상사"는 역사란 "과거의 의미있는 사실만을 기록한다"는 원칙에 따라 그간 의미없음으로 치부되어 왔던 일상의 역사적 진실을 들춘다. 저자는 독일 나치 시대를 살던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 주목하여 나치의 인종주의와 같은 중세적 야만성이 선진사회에서 돌출할 수 있었는지를 탐구하고 있다. 결론삼아 저자의 주장을 미리 말하자면, 이것은 결코 돌출이 아니라 서구의 근대성, 선진 사회가 내세우는 '진보' 안에 내재된 당연한 귀결이었다. 저자 데틀레프 포이케르트 (Detlev Peukert)는 독일의 역사가로 '나치 시대 공산당의 저항운동' 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책은 그가 81년에 저작한 것으로 나치 시대의 일상사를 선구적으로 개척했다는 평을 받는다. 그래서인지 포이케르트의 이 책의 전체를 관통하며, 부제로 되어 있는 세 가지 "순응, 저항, 인종주의"란 맥락 가운데 좌파의 역할은 "저항"에서 두드러져 보인다.


제3공화국의 기억과 제3제국의 기억

평소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유럽에서 소비에트 러시아를 제외하고는 가장 강력한 좌파 정당들이 존재했던 독일에서 어떻게 나치즘과 같은 극우파 정당이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풀리지 않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던 나에게 그의 책은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처럼 느껴졌다. 물론, 이 책 한 권으로 그런 의문이 모두 해갈된 것은 아니나 상당 부분 도움을 얻게 되었다. 포이케르트는 우선 "순응"이란 측면에서 나치즘이 폭력적인 권력 탈취 방식을 일부(?) 사용한 것은 사실이나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독일내 중산층과 부르주아지들이 이에 순응했기 때문으로 규정한다.


영국의 웰링턴 장군은 나폴레옹 군대를 격파한 뒤  “워털루의 승리는 이튼 교정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 말을 독일식으로 바꿔보면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의 승리는 신무기인 후장식 소총의 도입이 아니라 프로이센 교사들의 몽둥이 찜질에 의한 훈육 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독일 국민들에게는 1866년부터 일반적이었다. 독일의 민족주의는 모든 면에서 군대식으로 각을 잡은 직각형 인간들을 선호했다. 그들에게 직장에서 빈둥거린다거나 공연히 공적인 장소에서 모나게 행동하는 일탈 행위를 처벌하는 것이 사회적 책무라고 여겼다. 저자의 지적은 때때로 우리에게도 뼈아픈 일침이 된다.


제3제국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노인들의 기억 속에 두 가지 업적으로 기억된다. 당시에는 자전거에 자물쇠를 채우지 않고, 문 앞에 세워둘 수 있었다는 것과, 당시에는 장발과 싸움패는 제국노동봉사단에 끌려갔다는 것이 그것이다. 물론 그러한 생각이 당시 유행하던 사형 혹은 가스실에 대한 요구로 이어졌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특수한 형태의 테러, 즉 일탈적인 입장 혹은 일탈적인 존재를 수용소에 집어넣고, 죽이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그곳에 격리시키고 훈련시키는데 테러 방식에 동의하는 것을 의미한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히틀러 치하에서는 자전거에 자물쇠를 채우지 않아도 도둑맞지 않았다는 판에 박힌 좋은 기억이 "절도할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지는" 집시들이 수용소에 수감된 것에 대한 기억과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데틀레프 포이케르트, 나치 시대의 일상사, 303-304쪽 중에서>


질서를 위한 폭력을 권장하는 세력들

오늘날 우리들의 기억 속에 있는 제3공화국 박정희에 대한 향수와 독일 제3제국 히틀러에 대한 독일 노인들의 향수는 어딘지 모르게 일탈 행위를 그나마 용납해주는 현재의 사회 분위기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지고, 이런 판에 박힌 기억은 과거 독재 시대를 미화하는데 일조하고 있다. 우리는 얼마전 광화문 광장에서 있었던 극우파들과 일부 교회의 목사들이 성조기를 나부끼며 벌였던 시위를 기억하고 있다. 독일에서 나치가 집권하기 전인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독일 개신교 총감독 디벨리우스가 "포츠담의 날"에 행한 설교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자.


국가사의 새로운 장은 언제나 폭력과 더불어 열립니다. 왜냐하면 국가는 권력이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결정, 새로운 지향, 변화, 전복은 언제나 한 편에 대한 다른 한 편의 승리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국가의 존망이 걸린 경우, 국가 권력은 안을 향해서든 밖을 향해서든 강력하게 행사되어야 합니다. (...) 국가가 국가질서를 파괴하는 자들, 특히 더럽고 비열한 언어로 국가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신앙을 경멸하는 자들, 그리고 조국을 위해 희생한 목숨을 비방하는 자들에 대해 자신의 직분을 다한다면, 그것은 신의 이름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 질서가 수립되면 다시 정의와 사랑이 지배해야 합니다.


그날 광화문에서 있었다는 쿠데타 선동 발언에 버금가는 말이다. 독일 개신교 세력이 모두 그러했던 것은 아니지만, 독일에서 나치즘이 발호할 수 있었던 근본 배경에는 독일 개신교 세력의 은근한, 때로는 적극적인 지지가 작동한다. 그들은 좌파에 대한 두려움으로 도리어 나치즘을 선동하고 나섰다. 1933년 초 몇달 동안 독일 내 좌파들에게 행해졌던 가혹한 억압 상황에서 독일의 일반 국민들은 이것을 위협받고 있는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것으로 받아 들였다. 그들은 원하는 것을 얻었다. 좌파에 대한 공포로 반공에 대한 공포를 잠시 잊은 결과 독일 국민은 최악의 전쟁을, 최악의 패배를, 최악의 생존을 감수해야 했다.


독일 제3제국의 신화

오늘날까지 독일 제3제국의 신화는 여전하다. 인터넷상으로도 쉽게 볼 수 있는 밀리터리 매니아들은 나치즘에 대한 이해보다는 그들이 보여준 절도와 형식에 깊이 매료된다.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전쟁 발발 이전의 나치 시대는 부흥과 복지의 시대로 미화된다. 그러나 그것은 세계대공황과 전쟁동안, 전후(제1차 세계대전)의 질식할 듯한 궁핍과의 비교를 통한 것일 뿐이다. 실제 나치가 집권한 뒤인 1930년대의 경제 분위기도 낙관적이진 않았다는 것이 저자의 해석이다. 요컨대 사람들은 경제의 호전 기미만으로 이를 반가워했고, 이를 곧바로 경제호황에 대한 낙관적 기대와 연계시켰지만, 여전히 생필품은 치명적으로 부족했다. 지금 노무현 정부는 그와는 정반대의 입장에 처해있다. 국가차원에서 보았을 때 경제는 여전히 나름의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나 내수경제가 살아나지 않아 실질경제는 불황 속에 처해 있는 현실은 전적으로 언론의 탓이라 할 수는 없어도, 부분적으로는 언론의 부풀리기가 경제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또 한 가지는 히틀러가 실업문제를 조속히 해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실제 제3제국의 현실이 아니라 나치의 선전이란 측면에서만 그러했다. 현실에서 수치와 통계로 드러난 실업자 감소 추세는 매우 느린 속도로 일어나고 있었다. 과거 5.16직후 군사정부가, 1978년 오일쇼크 이후 급증한 실업자 문제를 제5공화국이 해결한 방식은 이미 1930년대 독일에서 실시된 것이다. 그들은 최소한의 임금만을 받고 노동봉사대와 긴급노동대로 결성되어 체제 위신용 건물 건설에 동원되었다. 실업자 수치 자체가 감소한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실질적인 실업자 감소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실제 독일에서 완전고용이 이루어지게 된 것은 1936년 무렵 전시 경제에 접어들어 군수산업이 폭발적인 호황을 누린 뒤부터이다.


다른 하나의 신화는 독일 (나치)관료 집단이 청렴했다는 것인데, 이 역시 실제와는 완전히 다른 사실이다. 공직과 권위를 충분히 획득한 그들은 관료로서 권력과 직위, 특권을 마음대로 전용함으로써 그들 자신이 과거 비판해 마지 않던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의 공무원들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아니 더욱 부패해 있었다. 그럼에도 히틀러 개인에 대한 인기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은 그가 최초의 권력기반으로 삼았던 돌격대를 무자비한 폭력을 통해 해체한 결과로 얻은 것이었다. 초기 나치당의 지도자였던 에른스트 룀과 그의 사조직이라 할 수 있는 돌격대는 나치의 중요한 권력기반이었지만, 권력을 장악해 더이상 사병집단이 필요없어진 히틀러에게 그들은 골칫거리이자 장차 그의 권력에 도전할 수 있는 세력으로 비춰졌다.


히틀러는 재빨리 룀을 제거함으로써 권력기반을 공고히하는 결과를 나았다. 그러나 이것이 독일 국민들에게는 묘하게도 그 자신의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한 일로 비춰지기 보다는 독일의 골칫거리가 된 자신의 신뢰하는 수하들인 돌격대를 국민들을 위해 제거한 것으로 보였다. 히틀러는 알기만 한다면 이를 악물고 부패한 자신의 수족을 잘라낼 만큼 결단력있고, 공정한 총통으로 비춰졌고, 실제로 그렇게 선전되었다. 독일 국민들이 전쟁에서 패배하는 그 순간까지도 독일 국민들의 총통에 대한 신뢰는 절대적이었다. 이승만이 모든 실정의 근간이자, 부패의 근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비난이 이기붕과 자유당에 집중되었던 것처럼 히틀러는 나치당의 모든 부패와 실정으로부터 격리될 수 있었다. 과연 대통령 중심제 국가에서 대통령과 상관없이 집권당만 실책을 거듭할 수 있는가? 우리는 오늘의 현실에도 물어보아야 한다.


새로운 고전의 기미를 엿볼 수 있었던 책...

"나치 시대의 일상사"가 고전이 될 수 있을까? 나는 가능하단 생각이 들고, 이미 어느 정도는 고전의 지위를 얻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몇 가지 이 책의 단점이랄까, 아쉬움이 남아 딴지를 걸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독일 내 좌파들의 맥없는 몰락에 대해 저자의 "일상사"적인 분야에 대한 연구는 매우 훌륭했다. 그러나 독일 내부의 문제만으로 독일 좌파의 몰락이 빚어진 것은 아니다. 이 부분이 저자의 주된 연구 분야이므로 저자의 다른 책을 보노라면 더 세세한 지적들이 있을 것이고, 이 책의 주제가 일상사이므로 국제사적인 맥락을 짚기는 어려웠겠으나 당시 독일내 좌파가 나치에 대한 이렇다 할 저항을 하지 못한 가장 큰 원인 중 하나인 스탈린과 코민테른의 실책(소련은 영국과 프랑스의 대 소련 고립정책을 타개할 방편으로, 나치 독일이 프랑스와 우선적으로 경쟁할 것이란 판단에서 독일 내 공산주의자들의 나치에 대한 저항을 금지시켰고, 독일 좌파는 사분오열되고 만다.), 영국과 프랑스의 오판 등에 대해 거의 언급이 없다는 사실은 아쉽다.


그러나 가장 아쉬움이 남는 것은 저자의 단명이다. 그는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살아 있었다면 좋은 연구 업적들을 보다 많이 남겨주었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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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 대전략 (Battle Of Britain)
감독 : 가이 해밀턴
출연 : 해리 앤드류즈, 마이클 케인, 트레버 하워드, 커드 저진스
제작 : 1969(영국)
 

 

서구의 몰락과 나치의 유럽 통합 계획

영화의 시작은 이렇다. 한 대의 허리케인 전투기가 패주하는 영국군과 프랑스 피난민들의 머리 위로 공중제비(소위 "승리의 횡전"이란 비행 포메이션)를 넘으며 멀리 사라진다. 그러자 전차에 올라탄 채 후퇴하고 있던 영국 병사 하나가 쓰디쓴 입맛을 다시며 말한다. "저게 어디서 사기를 쳐."  1940년 6월 5일 아침 몇 명의 독일군 장교가 프랑스의 덩케르크 해안 근처를 산보하듯 거닐었다. 그곳에 독일의 전격전에 휘말려 패전하며 간신히 프랑스에서 철수한 영국군 장비와 미처 후퇴하지 못하고 전사한 영국군 시체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독일은 전유럽을 석권했고, 이제 남은 것은 영국 하나뿐이었다. 영국만 독일에 굴복한다면 유럽의 통합은 오늘날 EU에 의한 것이 아니라 1940년 6월 독일에 의해 이룩될 뻔 했다.

 

어떤 의미에서 분열과 통합을 거듭한 유럽의 역사에서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은 곧 유럽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가 만년에 나치즘에 경사되었던 까닭, 그것은 유럽이 하나의 강력한 문명권으로 재통합하여 다시 세상의 주도 문명(패권)을 이루길 소망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다. 그러나 이렇듯 유럽을 힘으로 통합하려는 시도로서의 제2차 세계대전의 의미를 파악하려는 시도는 정치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여러 위험요소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쉽게 시도되지 않았던 역사 평가이다. 제2차 세계대전은 그보다 자유민주주의와 전체주의 사이의 대결로서 더 의미지어져 왔다. 그러나 이런 평가만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을 완전히 규명해내는데 한계가 있다.

 

왜냐하면 최소한 1940년 6월까지의 독일은 분명 문제가 많은 폭력적 국가이긴 했으나 특별히 인류의 적이라 규정당할 만큼 사악한 국가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독일과 나치즘을 두둔하고자 하는 말은 아니나 서구문명에서 한 인종에 대한 잔학한 멸종 정책의 원조는 엄밀히 말하자면 나치즘이나 독일이 아니다. 그들이 소위 문명화라고 주장하는 것들이 성취된 이후에도 혹은 그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이미 그들은 다른 인종을 멸종시킨 전례가 있다. 그 대부분은 게르만인종에 의한 것이 아니라 앵글로 색슨종에 의한 것이었는데, 아메리카 대륙에서 일어난 인디언 멸종에 이르는 과정,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서 일어난 애보리진 멸종에 이르는 과정과 비교하자면 독일과 유럽에서 일어난 유대인 말살정책은 오히려 덜 잔인한 측면이 있다. 최소한 독일인들은 유대인들과 대화는 했으니 말이다.

 

 

파시즘이 유럽에서 발호할 수 있었던 근본 원인은 무엇인가?

그보다 더 정교하게 규명해볼 문제는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시기의 유럽 혹은 서구(미국을 포함한)에서 파시즘(나치즘)을 바라본 시각에 대한 것이다. 그들은 파시즘을 유럽문명을 수호할 하나의 중요한 정신 혁명으로 보거나, 전혀 위험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거나 최소한 공산주의보다는 덜 위험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런 까닭에 슈펭글러나 하이데거와 같은 역사학자와 철학자들은 나치즘을 지지했고, 독일 이외의 국가들 - 프랑스, 오스트리아, 벨기에,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노르웨이 - 심지어 미국에서도 나치즘을 지지하는 정당이 만들어졌다. 미국의 자동차왕 헨리 포드가 유대인 혐오와 함께 히틀러를 격찬했었다는 것은 너무나 유명한 사실이다. 헨리 포드뿐만이 아니었다. 윈스턴 처칠 역시 공산주의에 대한 대단한 혐오를 드러내면서 나치즘과 히틀러를 매우 유능한 인물이자 훌륭한 정치 파트너로서 격찬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나치즘이 지배하는 독일을 소련에 대한 자본주의의 유능한 방패로 인식했고, 독일이 비록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하긴 했지만 그만한 지위를 누릴만한 자격과 권리를 충분히 지니고 있다고 여겼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목전에 다가오고 있는 새로운 전쟁의 위험을 감지한 소련의 스탈린이 수 차례에 걸쳐 영국과 프랑스에 대해 유화적인 제스춰를 보내고,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즘에 대해 연합전선을 만들 것을 요청했음에도 이들 국가들은 도리어 소련을 고립시켰다. 소련이 강력한 반공을 주장하는 독일과 "독소불가침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궁지에 몰린 소련의 입장에서는 피치 못할 상황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가 생각했던 것처럼 소련에 대한 파수견 입장보다는 좀더 쓸만하고 구미에 맞는 먹잇감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으니 바로 프랑스를 비롯한 서유럽 국가들이었다.

 

 

제2의 정복왕 윌리엄을 꿈꾼 히틀러

거기에는 동시에 두 곳에서 전선을 만들지 않는다는 제1차 세계대전의 교훈도 크게 작용했으리라. 어찌되었든 독일은 서부 유럽의 패자이자, 유럽을 석권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서야 할 프랑스를 단번에 패퇴시키는 위용을 거두었고, 독일 공군(Luftwaffe)는 일찌기 찰스 린드버그가 말했던 것처럼 "독일의 공군력은 전유럽 제국을 합친 것보다 강력"했고, 유럽 최강을 넘어 세계 최강이었다. 영국은 우군 하나 없이(미국은 이 당시 참전하지 않고 있었다) 세계 최강의 육군국이자, 공군국인 독일을 상대로 고립된 상태에서 전쟁을 벌여야 했다. 당시 영국 수상이었던 윈스턴 처칠은 자신의 방공호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방에서 나는 전투를 지휘하겠다. 그리고 만일 침공이 시작된다면 이 의자가 내가 앉을 자리이다. 우리가 독일인들을 격퇴하거나, 아니면 그들이 내 시체를 끌어낼 때까지 나는 저 자리를 고수하겠다." 이 말은 당시 영국이 처해 있던 고립무원의 상황을 너무나 적확하게 보여준다.

 

이 무렵 독일은 영국진공계획인 "강치(시라이온) 작전"을 구상하고 있었다. 이 작전은 도버 일대의 벼랑 동쪽에 있는 램즈 게이트에서 와이트도 서쪽의 라임만까지 거리로 약 320km에 달하는 장대한 영국의 해안선에 25만명의 독일군을 상륙시키는 것이었다. 이곳은 1066년 정복왕 윌리엄이 소수의 노르만 기사들을 이끌고 영국 정복에 나설 때 상륙한 바로 그곳이었다. 독일은 영국 점령 이후 체포할 유명인사들 - 영국수상인 윈스턴 처칠을 비롯해 작가인 올더스 헉슬리, 버지니아 울프 등 - 의 리스트까지 작성해 논 상태이고, 독일공정부대원들 가운데 일부에게는 버킹검궁 강하 직후 체포할 영국왕에게 건넬 인사말까지 준비시켰다. 모든 것은 치밀한 독일인들의 머리에서 나온 것들로 착착 진행되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도버 해협을 안전하게 건너기 위해서는 두 가지 필수적인 요소들이 보장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우선, 폭이 40km에 불과한 도버해협이긴 했지만 이 해협을 건너기 위해서는 제해권과 제공권이 보장되어야 했는데, 제해권을 장악하는데는 필수적으로 제공권을 장악해야 했기 때문이다.

 

 

배틀 오브 브리튼의 시작 - 제공권을 잡아라

제공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영국의 공군들을 섬멸해야 했다. 히틀러에 이어 독일의 2인자였던 헤르만 괴링에게 이건 닭을 비트는 일보다 쉽게 여겨졌다. 그도 그럴 것이 그에게는 스페인 시민전쟁 때부터, 폴란드 침공, 프랑스 점령에 이르는 기간 동안 무적의 전투 경험을 쌓은 강력한 공군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독일 공군은 1선에 배치된 항공기만 4,500대에 이르렀지만, 영국은 제2선급 항공기(여기에는 수송기, 중폭격기)까지 모두 긁어모아야 고작 2,900대 공군기만 보유하고 있었다. 단지 산술적으로만 보더라도 평균 2:1의 약세에 처해 있었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독일 공군의 파일럿들은 스페인 시민전쟁을 비롯한 수않은 전투에서 경험을 쌓은 에이스들인데 비해 영국 공군 파일럿들은 그런 경험이 전무한 애송이들이었고, 그나마 파일럿의 숫자는 비참할 정도로 모자라 보유하고 있는 항공기들을 공중에 모두 띄울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간단히 살펴보더라도 도저히 영국은 독일의 거센 공격을 견뎌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만약 영국인들이 이런 비교만으로 전쟁의 승패를 가늠했더라면 제2차 세계대전은 1940년 6월에 끝났을 지도 모르겠다. 그랬다면 오늘날 세계의 모습은 지금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것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영국은 협상을 권유한 독일의 제의를 거절했고, 그로부터 독일의 가혹한 대공습을 견뎌내는 "불의 나날들"을 보내야 했다. 오늘날 "Battle of Britain"이란 말은 단순히 우리 말로 번역한 "영국의 전투"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 말은 1940년 6월부터 시작해서 1941년 5월 10일까지 영국 상공에서 벌어진 공군대 공군 사이의 대혈전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사용된다. 이 영화는 바로 그 때를 다룬 영화이다.

 

 

자유를 수호한 영국의 찬가

미국에게 "지상최대의 작전"이 파시즘의 위협으로부터 자유 진영을 사수한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그들 나름의 찬가라면, 영국에게 "배틀 오브 브리튼(공군대전략)"은 그들이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유럽과 자유 진영을 사수하기 위해 악전고투한 그들만을 위한 찬가이다. 그런 까닭에 "지상최대의 작전"에서 미국과 할리우드가 그들이 동원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 제작한 영화라면, "배틀 오브 브리튼"은 영국이 동원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 제작한 영화이다. 감독은 "007시리즈"로 유명한 "가이 해밀톤(Guy Hamilton)"이 맡았고(아마도 이 영화의 제작자가 007시리즈의 제작자인 탓인지도 모르지만), 출연하는 배우들의 면면 역시 영국 출신의 쟁쟁한 주연급 배우들이 앞장서고 있다(이 영화의 서플먼트에 따르면 이 배우들은 모두 제각각 가장 적은 출연료라도 감수하면서라도 이 영화에 출연하고자 했다고 한다).

 

마이클 케인 (Michael Caine), 트레버 하워드 (Trevor Howard), 커드 저진스 (Curd Jurgens), 해리 앤드류스(Harry Andrews), 이안 맥쉐인, 케네스 모어, 나이젤 패트릭, 크리스토퍼 플러머, 마이클 레드그레이브, 랄프 리처드슨, 로버트 쇼, 패트릭 위마크, 수잔나 요크 등 모두 주연급으로 한가락씩 하는 배우들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돋보이는 주인공은 영국 공군 대장역을 맡았던 로렌스 올리비에(Laurence Olivier)경이었다. 그는 이 영화에 출연할 당시 이미 암이 발병한 상태였으나 이 사실을 숨기고 출연해 "배틀 오브 브리튼"의 명장 "휴 다우딩(Hugh Dowding)" 역을 맡았다. 로렌스 올리비에 경의 연기에 대해 여러 찬사들이 있으나, 이 영화 역시 "지상최대의 작전"처럼 수많은 유명배우들이 존재감 없이 등장했다 사라지지만 그 가운데 유일하게 존재감이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역시 로렌스 올리비에 경의 연기는 탁월하다는 찬사를 바치지 않을 수 없다.

 

 

영국의 승리 요인들

이 영화는 앞서 이야기한 대로 패배할 수밖에 없을 것이란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영국이 어떻게 독일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었던가를 살피고 있다. 그 요인들은 우선 로렌스 올리비에 경이 연기한 휴 다우딩 장군의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과 전략에 있었다. 다우딩은 프랑스의 패배를 예견하고, 처칠에게 더이상의 영국 공군을 도버 너머로 파병하지 말 것을 권유했다. 이 때 처칠은 프랑스 수상에게 더 많은 영국 공군의 파병을 약속해 논 상태였지만, 다우딩의 권유를 받아들인다. 그 덕분에 영국은 더이상의 공군력 손실없이 다가오는 전쟁을 대비할 수 있었다. 이외에도 다우딩은 영국의 모든 공업력을 항공기, 그 중에서도 전투기 제작에 최우선을 두도록 했고, 독일 공군의 폭격에 도시를 내어주면서까지 자국의 공군력을 철저하게 계획적으로 운영해 최후의 순간까지 저항할 수 있는 힘을 비축하도록 했다. 그리고 이 전투는 영국 상공에서 벌어진다는 우위를 철저히 이용했다.

 

독일 공군의 주력기인 Me-109는 먼거리를 비행해 영국 상공에 이르렀을 때는 최소 10분에서 최대 20분의 시간 동안만 머물 수 있는 짧은 항속거리를 가지고 있었던데 비해 영국 공군은 레이더의 지원을 받아 독일 공군이 프랑스의 기지에서 이륙하는 순간부터 대기하였다가 그네들이 도착한 시점에 비로소 요격에 나설 수 있었기 때문에 독일 공군은 늘 시간과 연료에 쫓기며 전투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영국 공군은 독일이 보유하지 못한 신형 무기인 레이더 기술에서 훨씬 더 앞서 있었으므로, 독일 공군은 영국 공군의 레이더 기술에 걸려 기습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영화는 "지상최대의 작전"과 마찬가지로 세미 다큐멘터리 형식을 갖추고 있다. 실제 전쟁에서 쓰였던 전투기와 폭격기들을 동원해 실제로 공중전을 방불케 하는 고도의 기동전술, 편대 비행, 전투 기술을 보이면서 촬영된 영화이다. 더군다나 그 모든 것이 컴퓨터 그래픽이 아니라 실제 전투기(일부 모델)를 공중에서 폭파시키는 방식으로 촬영된 실사 영화이다. 그렇게 고증에 철저한 이 영화에서 언급하지 않는 유일한 승리의 요인은 당시 영국군은 독일군의 군사암호를 모두 해독하고 있었다는 사실 뿐이다.

 

그러나 이 모든 승리의 요인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영국 공군 파일럿들의 헌신적인 희생과 불굴의 정신에 기인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처칠은 "배틀 오브 브리튼"이 끝났을 때 이렇게 말했다. "역사상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소수의 사람들에게 감사해야 할 때는 없었다"고 말한다. 영국인들에게 "배틀 오브 브리튼데이"는 그들이 세계를 구원한 영광스러운 날로 기억된다. 1941년 5월까지 독일이 영국에 가한 대규모 공습만 127회였고, 이 때 영국 민간인 총 6만명이 사망했으며, 8만 7천명이 부상을 당했다. 그러나 영국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보다 더 많은 공습과 폭탄을 독일에 떨어뜨려렸고, 무차별폭격을 가해 더욱 많은 독일의 도시들을 불태웠고, 더 많은 민간인들을 희생시켰다.

 

 


그 이후 바뀌지 않는 민간인 학살 - 무차별폭격의 역사

미국의 역사학자 하워드 진(Howard Zinn)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기 승무원으로 독일 상공을 비행했다. 그는 훗날 자신이 폭격했던 지역을 여행하며 공중에서 내려다 볼 때는 다만 한 개의 점으로 보였던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는 군인 신분으로 명령을 수행했을 뿐이었지만 그가 떨어뜨린 폭탄이 민간인이 거주하는 도시에 떨어져 일반 시민이 사망했다는 사실에 깊은 충격을 받은 것이다. 하워드 진은 폭격 임무 참여할 당시 폭격기 날개 밑에서 터지는 고사포탄의 검은 색 구름을 제외하면 자신이 누군가를 죽이고 있다는 생각은 물론 적진을 비행하고 있다는 생각조차 하기 어려웠다고 말한다.

 

영국인들에게 "배틀 오브 브리튼"은 자유에 대한 전체주의에 대한 도전에 대한 승리의 의미를 지닐 것이고, 이것은 분명 부인할 수 없을 만큼 가치있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에서 벌어진 이 엄청난 항공전의 승리는 그 뒤에 치뤄질 무지바한 대량공습과 무차별폭격이라는 새로운 종류의 전쟁수행방식의 전초전이기도 했다. 이제 전쟁은 더욱 가혹해졌는가? 물론 대답은 그렇다이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더욱 가혹해졌는가? 그것은 전방의 군인들이 아니라 후방의 민간인들에게 더욱 가혹한 것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부터 전선의 병사보다 후방의 민간인 사상자 수가 압도적으로 증가하게 되고, 이런 전쟁 수행 방식은 이후부터 현재까지 단 한 차례도 바뀌지 않았다. 한국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의 폭격수와 양을 능가했고, 베트남전은 다시 이를 경신한다.

 

 

* 이 DVD는 두 장의 타이틀로 구성되어 있다. 한 장은 본 영화를 다른 하나는 영화에 대한 다큐멘터리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몇 가지 점에서 두 번째 타이틀 역시 매우 재미있다. 하나는 당시 전쟁에 참전했던 파일럿들의 생생한 증언, 영화 제작과정의 에피소드, 그리고 당시 생존해 있던 휴 다우딩 장군과 독일의 에이스이자 나폴레옹 이후 유럽 최연소 장군이었던 아돌프 갈란드의 인터뷰가 삽입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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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의 귀족을 위한 '이런 나라'



얼마 전 이명박 대통령이 “우리도 일본 닌텐도처럼 창의성 있는 제품을 개발할 수 없느냐?”고 말했다는데 일본의 튼튼한 문화적 인프라에 기초한 이러한 제품을 건물 짓듯 단기간 내에 만들어내기는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일본 애니메이션 중 국내 네티즌들 사이에 높은 인기를 누리며, 영화 <매트릭스>의 원형으로도 평가받는 작품이 <공각기동대>다. <공각기동대> 시리즈에 등장하는 ‘웃는 남자(스마일맨)’ 같은 캐릭터 설정만 살펴보더라도 깊이 있는 인문학적 토대 위에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웃는 남자는 얼마 전 구속된 미네르바처럼 사이버세계 속에서 가면을 쓰고 기업의 잘못된 이윤추구와 이를 비호하는 권력에 도전했다가 정보기관에 추적당하는 인물이었다. 지난 촛불시위에서 사람들이 영화 <브이 포 벤데타>의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쓰고 나타난 것처럼 정보기관이 추적하면 할수록 더욱더 많은 사람들이 웃는 남자를 자처하며 나타나기 때문에 검거하기가 더욱더 어려워진다. 이 작품의 웃는 남자란 캐릭터는 빅토르 위고의 소설 『웃는 남자』에서 유래된 것인데, <공각기동대> 외에도 영화 <배트맨>에서 주연보다 인기 있는 악역 캐릭터인 조커의 원형이 되기도 했다.


루이 나폴레옹의 쿠데타에 저항하다 20여 년간 영국에서 망명생활을 했던 빅토르 위고의 체험이 녹아있는 『웃는 남자』의 시대 배경은 청교도 혁명이 실패로 끝난 직후인 17세기의 영국이다. 크롬웰이 죽고 공화정에서 왕정으로 돌아갔지만 제임스 2세는 과거의 교훈을 잊고 독재와 실정을 거듭했고, 빈부격차는 더욱 커졌다. 왕은 공화정의 기억을 아예 말살하기 위해 복종하지 않는 공화파 귀족들을 제거했고, 혈통까지 끊어버릴 속셈으로 어린이 매매단을 이용해 반대파의 자식들을 납치한다.



그윈플레인은 귀족의 아들로 태어나 평생 행복한 삶이 보장되어 있었지만 두 살 때 아버지가 숙청당하고, 매매단에 납치되어 입이 귀까지 찢어지는 형벌을 받는다. 그는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항상 웃는 얼굴을 하게 되었다. 웃는 남자는 익살광대가 되어 곳곳을 떠돌아다니며 굶주리고 고통 받는 빈민층의 삶을 바로 이웃에서 목격했고, 그 자신이 거대한 벙어리들, 민중을 위한 입이 되리라 다짐한다. 우여곡절 끝에 출생의 비밀이 밝혀져 다시 귀족 신분을 얻게 된 웃는 남자는 여왕이 참석한 상원 회의에서 연설할 기회를 얻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굶주린 백성들의 현실과 지배계급의 오만과 탐욕을 질타한다.


“경들께서는 세력 있고 부유하십니다.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경들은 어둠을 이용해 득을 취하십니다. 그러나 조심하십시오. 또 다른 거대한 세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명입니다. 여명은 정복될 수 없습니다. 그것이 곧 도래할 것입니다.” 그러나 상원에 모인 귀족들은 웃는 남자의 일그러지고 흉한 몰골을 비웃으며 아무도 그의 경고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얼마 전 우리는 여당 의원들이 국회 안에서 육탄전을 벌이고, 소화기를 뿌려대며 대통령과 자신들이 입법한 법안들을 통과시키기 위해 애쓰는 광경을 보았다. 그러나 이 법안의 수혜자들은 국민이 아니라 17세기 영국의 귀족들처럼 혈연, 학벌, 부동산을 소유한 대한민국의 1% 귀족들이다. 정부는 이들의 세금을 20조원이나 깎아주었는데 나날이 인상되는 대학생들의 등록금을 반값으로 줄이는 데는 5조원만 있으면 된다. 하지만 정부와 여당은 이런 법안, 이런 정책을 추진하지 않는다.



네티즌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휴대전화, 메일 감청 및 감시를 합법화하는 정보보호법, 통신비밀보호법, 마스크 착용을 금지하는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 개정안은 다원화된 여론 형성과 자유로운 언론, 사회적 약자의 여론 참여를 가로막았다. 대신 대기업과 일부 보수언론의 신문, 방송 겸영과 지상파 종합편성 보도채널 허용을 담고 있는 언론법 개정안, 금산분리라는 중요한 시장경제질서의 원칙을 허물고 산업자본의 은행 지배를 가능하게 만드는 은행법 등 정부와 여당이 추진하는 개정안의 수혜자는 99%의 국민이 아니라 1% 귀족들이다.

얼마 전 이 대통령은 ‘이런 나라는 없다’며 공권력에 도전하는 국민들을 질타했지만 국민들은 도리어 대통령의 말을 듣고 웃었다. 이처럼 자신에 대한 고도의 안티성 발언을 스스럼없이 내뱉는 대통령은 지금껏 없었으므로 국민들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웃음에는 뒤끝이 있다.


출처 : <경향신문>, 2009. 3. 30.


* <경향신문>에 청탁받아 칼럼을 쓰고 있다. 필진 칼럼이라 대략 3주 내지는 4주에 한 번꼴로 돌아오는 것 같은데, 이번 칼럼은 어쩌다보니 원고 보낸 뒤 2주나 묵어 나오게 되었다. 신문사 사정이 그러하다니 어쩔 수 없었다. 기왕에 늦었으니 시의성이 떨어질 듯 하여 다시 써서 보낼까 하다가 그 사이 대통령이나 정부여당이 바뀔 것 같지도 않았고, 글 쓰는 일이 점점 더 힘들어져서 그냥 내보냈다.  원고가 좀 길었던 모양이다. 원래 제목은 "웃는 남자의 '이런 나라'"로 해서 보냈는데 "1%의 귀족을 위한 '이런 나라'"가 되었고, 중간에 200자 원고지 1장 정도 분량이 깎였다. 본래 내가 썼던 원문이나마 이곳에 살려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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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는 춤춘다. 그러나 진전은 없다(Der Kongress tanzt viel, aber er geht nicht weiter)."
- 샤를 조제프 라모랄 리뉴(Charles-Joseph, 7th Prince of Ligne, 1735.5.23. 브뤼셀 - 1814. 12.13. 비인)



유럽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국제회의 - 빈회의

역사상 최초의 근대적 국제회의로 알려진 베스트팔렌조약(Peace of Westfalen, 1648)은 1618년부터 1648년까지 독일을 주요 무대로 신교(프로테스탄트)와 구교(가톨릭) 간에 벌어졌던 ‘30년전쟁(Thirty Years' War)’을 매듭짓기 위해 열린 회의였다. 유럽통합, EU 출범의 기원을 1951년 체결된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를 기점으로 삼는 것이 정설이긴 하지만 역사적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나는 최초의 유럽회의인 베스트팔렌조약까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회의는 최초의 국제회의였던 데다가 가장 치열하고 장기간에 걸쳐 치러진 종교전쟁의 마무리를 위한 회의였던 만큼 회의에 참가했던 각국이 서로 주도권을 잡기 위해 의석은 물론 자리배치와 같은 사소한 의전절차에 이르기까지 모두 처음부터 새로 규정해야만 했기 때문에 정식 의제에 도달하기까지 상당한 진통을 겪어야 했기 때문에 최종적인 합의에 이르는 데까지 2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그러나 회의가 잘 진행되지 않기로는 1814년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 열렸던 빈 회의(Congress of Wien)를 손에 꼽지 않을 수 없다. 베스트팔렌이 30년전쟁의 마무리를 위해 열렸던 것처럼 빈회의는 유럽을 뒤흔든 프랑스대혁명과 나폴레옹전쟁의 결과를 수습하기 위해 열렸다. 이 회의의 주최자는 당시 오스트리아 외상(外相)이었고, 훗날 오스트리아의 재상(1821)이 되었던 메테르니히(Metternich, Klemens Wenzel Nepomuk Lothar von/1773 ~ 1859)였다. 1789년 시작된 프랑스대혁명은 1814년 3월 31일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 프로이센의 빌헬름3세와 오스트리아 사령관 슈바르첸베르크 등이 이끈 군대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 입성하면서 끝났다. 한때 나폴레옹의 외무장관이었던 탈레랑(Charles-Maurice de Talleyrand, 1754-1838) 공작이 주요관문을 열어준 배신 덕분이었다. 황제 자리에서 쫓겨난 나폴레옹은 무장경비병들의 엄중한 감시 속에 엘바섬으로 유배되었다.


나폴레옹이 퇴위한 뒤 메테르니히는 파리조약에 따라 프랑스가 포기한 영토 처리 문제 등 산적한 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빈 회의를 개최하게 된다. 빈회의는 나폴레옹이 점령하여 자신의 일족과 공신들에게 나누어주었던 프랑스 이외의 영토들이 파리조약에 의해 무주공산(無主空山)이 되어버린 영토들을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방법으로 재분배해야 한다는 무거운 숙제를 짊어지고 있었다. 또 유럽 각국에서 군주와 지도적 정치가가 모인 대회였기 때문에, 실제상의 강화회의라 해도 무방하다. 유럽의 크고 작은 90개의 왕국과 53개 공국(公國)의 군주, 정치가들이 참가하는 유럽 역사상 최대 규모의 회의였기 때문에 오스트리아 정부는 각국 대표들을 접대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거액을 투자해야만 했다.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비인에 도착한 각국 대표들을 접대하는 실무 책임은 장 자끄 루소, 볼테르 등 계몽철학자들은 물론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2세(Joseph II) 황제의 친구, 예카테리나 여제 등을 모시기도 했던 벨기에 출신의 오스트리아의 장군 샤를 조제프 라모랄 7대 리뉴(Charles-Joseph, 7th Prince of Ligne, 1735. 5. 23. 브뤼셀 - 1814. 12. 13. 비엔나) 공(公)이 맡았다.


샤를 조제프 라모랄 리뉴 공

샤를 조제프 라모랄은 1735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오스트리아의 귀족으로 오랫동안 군에 몸담았던 제6대 리뉴 공인 클로드 라모랄(Claude Lamoral, 6th Prince of Ligne)과 엘리자베트 알렉상드린 드 잠(Elisabeth Alexandrine de Salm)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 역시 부친을 따라 어린 나이에 오스트리아 제국 육군에 입대했는데, 7년전쟁(Seven Years' War)에 참전해 브레슬라우(Breslau), 로이텐(Leuthen) 전투 등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펼친 덕분에 전후 소장으로 진급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막대한 영지를 물려받아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그는 오스트리아의 황제 요제프 2세와 매우 가까운 친구이자 고문이었다. 바바리아계승 전쟁이 벌어지자 참전했다가 전쟁이 끝나자 병영을 떠나 영국, 독일, 이탈리아, 스위스, 프랑스 등지를 여행하며 각국의 철학자, 과학자들과 교분을 쌓으며 유럽의 사교계에서 가장 인기있고, 교양있는 인물로 떠올랐다. 그가 프랑스의 계몽철학자들과 교분을 맺은 것은 이때였다. 스위스 접경지대인 페르네에 은거하고 있던 볼테르를 방문한 자리에서 카사노바(Giovanni Giacomo Casanova, 1725~1798)를 처음 만나게 되었는데, 그의 매력에 흠뻑 빠진 리뉴 공은 "그가 무슨 말을 하던 계시가 되고, 무슨 생각을 하던 책이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1784년 다시 군무에 복귀한 리뉴 공은 포병사령관(Feldzeugmeister)으로 진급했는데, 1787년엔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Ekaterina II, 1729-1796)를 수행하여 크리미아 반도를 여행했고, 1788년 러시아-투르크 2차 전쟁에서 벨그라드(Belgrade) 포위전에 참가한 공로로 러시아 육군 원수에 임명되기도 했다. 벨그라드 포위전 이후 그는 자신의 고향이자 친척들은 물론 아들들까지 참가하고 있던 벨기에혁명운동의 수장으로 초빙되었지만 황제와 오스트리아에 대한 충성심으로 거절하며
"그는 결코 겨울에는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다(He never revolted in the winter)"란 말을 남기고 벨기에를 떠나 오스트리아로 망명(?)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영지인 브라반트를 잃었다. 황제의 신임을 얻을 수 있었던 덕분에 그는 황제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 머물며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기며 자신의 저술들을 정리하고 쓸 수 있는 여유를 누릴 수 있었다. 그의 말년에 개최된 빈회의에서 리뉴 공은 유럽 각처에서 모여든 왕과 귀족들을 접대하는 책임을 맡았다.


각국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며 지지부진을 면치 못한 빈회의

빈회의는 국제회의란 이름이 붙긴 했지만 대개의 국제회의들이 그러한 것처럼 실제로는 대프랑스 전쟁에서 주축을 이루었던 오스트리아·영국·러시아·프로이센의 4대국과 그 당사자였던 프랑스의 5개국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프랑스는 비록 패전국이긴 했지만 탈레랑의 뛰어난 외교적 책략 덕분에 4대국에 버금가는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이외의 나머지 국가들은 이들 강대국이 내리는 결정이 자국의 이해에 손실로 돌아오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회의의 추이를 살펴보는 정도에 그쳤고, 실제로도 참가국 전체가 한 자리에 모이는 전체회의는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통신이동수단이 발달한 오늘날엔 국제회의가 개최되기 전까지 사전에 실무자들이 계속 안건을 조정하고, 조율하는 정지작업들이 수반되기 때문에 정상회의는 이를 추인하는 정치적 요식행사에 불과하지만 이 당시의 회의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강대국을 제외한 나머지 참가자들은 마땅히 할 일이 없었고, 그냥 돌아가자니 빈 회의가 다루는 주제나 안건이 너무 묵직했기 때문에 나머지 참가자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당시 오스트리아는 전 유럽에서도 가장 번화한 거리와 화려한 예술과 문화가 넘쳐나는 곳이었고, 메테르니히는 이들 유럽의 대표자들에게 오스트리아 제국의 국력을 한껏 자랑하고 싶었기 때문에 회의장 주변에선 연일 파티와 무도회, 성대한 연회와 귀족과 귀부인들의 사교적 만남이 벌어졌다. 프랑스 대표로 참여했던 탈레랑에 따르면 하루 일과 중 4분의 3이 연회와 흥겨운 왈츠로 채워졌다. 회의가 난항에 부딪히면 부딪힐수록 연회와 무도회는 더욱 화려해졌고, 그 화려함의 이면에는 영토를 둘러싼 각국의 이전투구(泥田鬪狗)가 더해졌다.


- 빈 회의가 열렸던 오스트리아 쇤브룬(Schonbrunn)궁전 내부 '거울의 방'


빈 회의가 이처럼 지리멸렬하게 된 까닭은 나폴레옹이라는 거대한 적(賊)을 상대하기 위해 연합했던 유럽의 강대국들이 이제 나폴레옹이 남긴 거대한 유산을 앞에 두고 조금도 손해를 보지 않으려 들었기 때문이었다. 조금의 진전도 없이 계속해서 늘어지기만 회의 속에 어느덧 체력도 바닥나고, 참을성도 없어진 오스트리아의 늙은 장군 리뉴 공은 자신의 친구들에게
"회의는 춤춘다. 그러나 진전은 없다(Der Kongress tanzt viel, aber er geht nicht weiter)."라고 편지를 쓴다. 결국 그는 빈회의가 끝나는 것을 보지 못하고 1814년 12월 13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세상을 떠난다. 당대 최고의 인기 있는 명사로 그가 남겼던 저술이나 오스트리아의 장군으로서의 업적은 시간이 갈수록 퇴색하고 결국 잊혀져갔지만 그가 빈회의를 바라보면 남긴 한 마디 "회의는 춤춘다. 그러나 진전은 없다"는 말은 역사가 바뀌어도 빈번히 개최되는 실속 없는 국제회의 때마다 여러 사람의 인구에 회자되는 명언으로 기억되고 있다.


돌아온 공동의 적과 메테르니히 체제

빈 회의가 급물살을 타게 된 것은 영원히 사라진 줄 알았던 그들의 적 나폴레옹이 1815년 2월 26일 감시병을 피해 엘바섬을 탈출해 프랑스 프레쥐 해안에 상륙했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의 프랑스 상륙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았는데, 그를 체포하라고 파견한 병사들이 돌아온 나폴레옹의 첫 번째 병사가 되었고, 그가 파리를 향해 다가오면 올수록 대중의 환호성도 더욱 커져만 갔다. 황제군의 뛰어난 장군이었던 미셸 네(Michel Ney, 1769-1815) 원수는 루이 18세에게 "반드시 나폴레옹을 철창에 넣어 파리로 데려오겠다"고 맹세했지만 막상 나폴레옹을 만나자 자신의 병사들이 복위한 부르봉 왕가의 왕보다 폐위된 전임 황제를 더 열렬히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 역시 옛 황제의 충성스러운 장군으로 되돌아가버렸다.

- Vasily Ivanovich (Wilhelm) Sternberg - Napoleon returning from Elba


더 이상 화려한 무도회로 시간을 끌 수 없었던 빈 회의의 참가자들은 프랑스의 탈레랑이 제시한 ‘정통주의(Legitimisme)’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다시 말해 과거 프랑스나 나폴레옹 제국이 점령했던 땅은 아무런 조건 없이 원래의 주인(정통 군주)에게 돌려주고, 옛 주인이 없어져 임자 없는 땅이 된 영토를 차지하려면 그만한 대상을 대신 내 놓아야 한다는 원칙이었다.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기 직전인 1815년 6월 9일, 오스트리아, 영국, 프로이센, 러시아, 프랑스 등 5개국은 비밀리에 최종적으로 합의서를 작성했는데 이것이 바로 ‘빈 의정서’였다. 프랑스대혁명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결과를 아예 처음부터 없었던 사건이었던 것처럼 과거로 되돌리려했기 때문에 빈회의에 의해 만들어진 이 체제를 빈체제 혹은 메테르니히 체제라 부르는 보수반동적인 국제질서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미 프랑스대혁명의 자유주의 세례를 받은 시민들은 과거로 돌아갈 수 없었고, 메테르니히와 유럽 열강들이 만든 체제를 조롱하며 거세게 저항했다.


“회의는 춤춘다. 그러나 진전은 없다”의 가장 비근한 사례

- 2010 서울 G20 정상회의
베스트팔렌조약에서 빈회의에 이르기까지 국제회의의 대부분은 한 나라의 입장에선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난제를 처리하거나 여러 나라들이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이해관계를 조정하기 위해 열린다. 그룹을 뜻하는 영문 Group의 앞 철자를 따서 ‘G20 정상회의’라고 불리는 이 국제회의는 1974년 오일쇼크로 세계 경제가 휘청거리기 시작하면서 만들어진 선진 7개국 정상회의 ‘G7(미국·프랑스·영국·독일·일본·이탈리아·캐나다)’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G7’ 출범의 주된 요인을 ‘오일쇼크’만으로 기억한다면 겉으로 드러난 현상만 보고 심층적인 원인에 대해서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의 불안정으로 인해 발생하게 된 세계경제대공황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월가의 주가폭락으로 시작되었고, 대공황의 최종해결책은 제2차 세계대전이었다. 전후 미국을 비롯한 세계 주요열강들은 경제위기가 세계적인 갈등과 열전으로 비화되는 것을 국제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모색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세계 최강대국으로 떠오른 미국의 이해관계(달러를 기축통화로 결정)가 일방적으로 관철된 브레턴우즈체제가 출범하게 된다.


미국의 패권적 우위와 서구 선진국들의 경제적 이해가 담합하여 만들어진 브레턴우즈 체제로부터 소외된 국가들(아시아, 중동,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등)은 서구에 종속된 정치경제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로 국제적인 연대체인 비동맹 체제 ‘아시아 아프리카 회의(반둥회의)’를 출범시킨다. 이들이 국제연합(UN)을 배경으로 브레턴우즈체제에 도전하면서 만들어진 것이 국제연합무역개발회의(United Nations Conference on Trade and Development, UNCTAD)였는데, 이 기구는 강대국들이 주도하는 국제질서에 맞서 약소국들의 목소리를 결집할 수 있는 효과적인 장이었다. 미국이 UN에 대해 불만을 품고, UN을 개혁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 것이 이 무렵의 일이다. 개발도상국과 후진국들은 4년마다 열리는 UNCTAD 회의를 통해 자국 경제를 보호하기 위해 다국적 기업을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주요 생산 설비와 천연자원을 국유화해야 한다는 입장을 천명했다. 또한 농산품 및 원자재 수출에 의존하는 국가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국제 무역 체계를 개혁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들이 실제 실력행사에 나선 것이 바로 1960년에 설립된 석유수출국기구(Organization of the Petroleum Exporting Countries, OPEC)이 1973년의 오일파동의 본질이었다.


제3세계 비동맹 국가들의 거센 도전과 맞닥뜨린 브레턴우즈체제, 다시 말해 초국적 금융자본 역시 이들의 저항을 넘어서기 위한 시도로 1986년부터 GATT(General Agreement on Tariffs and Trade,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 체제의 우루과이 라운드를 출범시키는데,  UR의 결과로 GATT는 1995년 WTO(World Trade Organization, 세계무역기구)로 개편되었고, 이 과정에서 개발도상국들은 자국 경제를 보호할 수 있는 경제정책수단들 가운데 상당수를 빼앗기고 말았다. 이 시기부터 초국적 금융자본들은 세계 각국의 통화위기를 기회로 일국주의적인 정부 정책을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하부로 끌어들였다. 이에 저항한 나라들은 거의 대부분 외환위기를 경험하게 되었고, 결국 미국이 주도하는 IMF의 관리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세계 여러 나라들이 한꺼번에 참여하는 일괄타결방식의 WTO협상은 계속해서 난항을 겪었고, 초국적 금융자본이 원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반대하는 국제적인 연대와 저항의 움직임과 맞부딪치며 좌절되기도 했다.


지난 1999년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금융자본주의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미국 시애틀에서 개최된 WTO협상은 전 세계에서 모여든 시민사회세력과 미국의 노동자들이 한데 모여 세계화 반대시위를 벌인 '
시애틀 전투(Battle of Seattle)'로 좌절되었다. 이후 WTO협상은 개최될 때마다 세계 곳곳에서 민중들의 거센 저항에 직면하여 급기야는 걸프만의 작은 섬, 사막과 바다로 격리된 카타르의 도하에서 도망치듯 열려야만 했다. 이처럼 WTO협상이 계속해서 어려움에 처하자 미국은 나라와 나라, 지역 간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함으로써 개별돌파전략을 수립한다. 1994년 1월 신자유주의적 경제 통합의 전범(典範)이라 할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등장하면서 WTO와 우루과이 라운드 역시 탄력을 받기 시작한다.



쌍둥이 무역적자에 시달리고 있는 미국은 재정적자 위기를 세계기축통화인 달러의 발행으로 상쇄시킴으로써 그 부담을 무역흑자를 통해 높은 달러보유액을 가지고 있는 나라들에 전가시키는 전략을 여러 차례 구사해왔다. 1970년대 독일, 1980년대 일본, 그리고 지난 1990년대 후반 아시아를 강타한 외환위기의 원인이 거기에 있었다. 지금까지 소외되어 왔으나 이후 경제규모가 확대되면서 자기 목소리를 내게 된 신흥국들과 선진국들 사이에 국제협력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1999년 G7 국가와 브라질·인도·중국·한국 등 주요 신흥국의 재무장관이 모여 회의를 열고 G20 재무장관·중앙은행총재 회의를 열기로 합의한 것이 G20이다. 좋게 말하면 G20은 이제 개발도상국을 벗어나 선진국의 대열로 발돋움하고 있는 나라들까지 포함시켜 세계 경제정책을 논의하는 자리이지만 나쁘게 보면 그동안 미국의 경제위기를 감당해오던 G7국가들의 노력만으로는 더 이상 미국의 경제위기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그 책임분담을 다른 신흥개발국가들까지 전가시키기 위해 문호를 개방한 것이다.


G20이 출범하게 된 원인을 살펴보면 이런 사실이 더욱 극명해지는데 잘 알려져 있다시피 미국의 투자은행인 리먼 브러더스의 파산으로 시작된 금융위기가 전 세계를 강타한 결과물이라고 보아야 정확할 것이다. 미국발 금융위기가 발생하자 미국은 G20 재무장관회의 참가국 정상들을 워싱턴으로 초청해 국제 금융위기 극복 방안을 논의했는데, 이것이 제1차 G20 정상회의이다. 그 다음 회의는 2009년 4월 영국 런던에서 열렸고 9월 미국 피츠버그에서 열린 제3차 회의에서는 각국이 G20 정상회의의 정례화에 합의하였다. 4차 회의가 지난 6월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렸고, 이번 11월 서울에서 개최되는 G20 정상회의는 제5차 회의이다.


전후 세계기축통화로 자리 잡은 달러 화(貨)의 위기는 미국의 적자와 신자유주의 체제의 근본적인 결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미 연방준비은행은 지난 2008년 금융위기 직후부터 이미 1조7천억 달러 달러를 인쇄해 풀었고, 이번 서울 G20정상회의를 앞두고 6천억 달러를 추가로 발행할 계획이라며 환율전쟁에 불을 붙이고 있다. 미국은 독일, 중국, 브라질을 비롯한 G20국가들이 미국의 채무를 달러화 약세를 통해 공동 부담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는데, 이것이 지난 1차 회의 때부터 현재까지 해결되지 않고 있는 미국의 재정위기를 타개할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을 비롯해 과거 미국의 적자를 떠안으며 경제적으로 커다란 위기를 경험했던 독일, 일본 등이 미국의 이런 방침을 쉽사리 수용하지 않는 상황이기 때문에 G20정상회의가 거듭되고 있는 것이다.


세계 경제의 86%를 쥐락펴락하는 부자나라의 정상들이 G20정상회의를 정례화한 이유는 회원국 정상들이 모여 함께 춤이나 추며 친목이나 다지는 MT를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들이 지금 매우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G20 서울 정상회의의 결과가 나왔다. 그러나 회의를 통해 발표된 내용을 살펴보면 결정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세계 최고의 문화행사라도 유치한 양 온갖 미사여구로 치장하고 있지만 그 본질은 결국 미국의 빚잔치에서 조금이라도 덜 손해를 보고 싶은 세계 여러 나라들의 몸부림, 그것이 G20이다.


“회의는 춤춘다. 그러나 진전은 없다”
의 가장 확실한 사례, 그것이 바로 이번 G20 서울 정상회의였다. 우리 이명박 대통령이 G20 정상회의를 훗날 무어라 평할지는 몰라도 역사는 이렇게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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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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