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 옛 친구를 바라본다  
[내 인생의 특별한 영화] 허공에의 질주



어떤 사람이던 감추고 싶은 비밀 한 가지쯤은 다들 가지고 있다. 그것은 아픈 치부이기도 하고, 부끄러운 상처이기도 하다. 내 나름대로 그런 상처 아닌 상처가 하나 있는데, 셰익스피어는 청춘이란 세상 어디에 반항할 곳 하나 없어도 반항하는 것이라고 했다지만 1980년대를 살아왔던 우리 세대에겐 그 시대 자체가 반항의 대상이자 저항의 상대가 아니었을까 싶다. 1987년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서울지역고등학생운동협의회’라는 조직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그해 12월에 치러진 대통령선거에서 ‘공정한 선거와 교육민주화’를 주장하며 한 무리의 고등학생들과 함께 명동성당에서 농성시위를 이끈 적이 있다.

선거 결과는 누구나 아는 것처럼 보통사람들의 시대를 주장했던 노태우 후보의 승리로 끝났고, 허망한 패배를 경험한 우리들은 당시 표현으론 ‘잠수’타는 신세가 되었다. 일주일여를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친구 집을 전전하며 도망자 아닌 도망자 신세로 지냈는데 시위에 참가한 학생들을 징계하지 말라는 교육청 지침이 내려와 다행히 퇴학은커녕 반성문 한 장 쓰지 않고 무사히 넘어갔었다. 영화 <허공에의 질주>가 만들어진 것은 내가 고3이었던 1988년인데, 국내에는 개봉된 적이 없지만 리버 피닉스의 인기 덕분에 비디오로 출시된 것을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 빌려보았던 것 같다.

한창 예민한 사춘기를 보내고 있는 대니(리버 피닉스)의 부모 아서와 애니는 1971년 베트남전에 반대할 목적으로 네이팜탄 무기연구소를 폭파했다. 비록 자신들의 신념에 따른 행동이긴 했지만 폭파과정에서 실수로 경비원을 다치게 한 죄로 십여 년간 FBI의 추적을 피해 도망치며 살아가는 신세가 되었다. 한 곳에 정착해 살아갈 수 없는 도망자 신세였지만 자신들이 품었던 젊은 날의 신념과 이상에 대해 후회하지 않으며 여전히 자신들이 옳은 일을 했다는 믿음을 품고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아들 대니에게 숨겨진 음악적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비록 자신들은 과거의 신념과 젊은 날의 실수로 인해 도망자의 삶을 살아야 했지만 그런 이유로 자식마저도 꿈을 미처 펴볼 수 없게 만들 수는 없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이들 부모와 자식이 헤어지면서 나눈 대화는 오래도록 내 가슴에 남았다. 아버지는 아들 대니에게 “너도 이제 세상을 좀 더 나아지게 만들라”며 아들을 떠나보낸다. 그는 비록 현재는 도망자 신세지만 좀 더 나은 세상을 후손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싸웠던 것이고, 이제 자식이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기에 그 역시 아들이 선택한 세상을 존중해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영화가 특히 감동적인 까닭은 민권운동가로 활동하다가 FBI의 추적을 받으며 14년간 도피생활을 했던 원작자 나오미 포너의 실화이기 때문이다.

나와 동갑내기인 리버 피닉스가 살아있다면 이제 그의 나이도 어느덧 마흔 둘이다. 나 역시 젊은 날의 반항아에서 이제 한 여자의 남편이자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과연 나는 그간 세상을 좀더 나은 것으로 만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또 앞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선 어떻게 살아야 할까. 치열하게 산다는 건 평범한 삶을 사는 사람보다 더 위대하거나 더 훌륭한 인간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남보다 치열하다는 것은 언제나 남보다 더 치졸해질 수 있는 위험을 곁에 두고 살아간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제야 간신히 세상을 좀더 너그러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나이에 영원히 늙지 않는 청춘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내 안의 옛 친구를 바라본다.

출처 : 2011년 01월 12일 (수) <인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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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인천을 평화통일도시로

한 달쯤 전인 지난 9월 8일 인천발전연구원 주최로 “죽산의 평화통일론과 ‘평화통일도시 인천’의 지향”이라는 제목의 작은 학술토론회가 열렸다. 오랫동안 죽산 조봉암 선생을 연구해온 이현주 박사, 동국대 이철기 교수, 인천학연구원의 김창수 박사가 발제자로 나섰고, 인천의 주요시민문화단체 인사 7명이 토론자로 함께 했던 행사였다. 여러 이야기들이 나왔지만 그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조만간 인천에서 개최될 도시축전과 아시안게임을 위해 찾아올 세계인들에게 우리 인천이 보여줄 비전이 과연 무엇인가라는 의문이었다. 속된 말로 ‘명품도시 인천’이란 슬로건으로 세계인들 앞에 서기엔 ‘쪽 팔린다’는 말이었다. 인천과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이들을 설득하고, 더 나아가 감동을 주기 위해선 그만한 명분과 보편성을 가진 비전이 제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토론회에서 김창수 박사는 “외국인들에게 인천은 ‘인천상륙작전’의 현장으로 더 많이 알려져 왔으며, 외지인들에게는 1950년 9월 15일 단 하루의 기억을 보존하고 있는 인천상륙작전기념관이 2000년 인천역사유물을 보관하고 있는 인천시립박물관보다 더 크고 웅장하게 다가온다”고 말하기도 했다. 때마침 다음날인 9일엔 58주년을 맞이한 인천상륙작전을 재현하는 행사가 대대적으로 치러졌다. 국가를 위해 희생한 호국영령을 기리는 사업은 국가가 존속하는 한, 존속하기 위해서라도 필수적이다. 그러나 국가와 군대의 존재 이유가 국민을 보호하기 위함이란 사실 또한 변함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륙작전 당시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한 채 희생된 민간인 피해자들에 대해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무관심했다.

외지인들이 즐겨 방문하는 인천의 명소 중 한 곳인 월미공원 입구에는 1,000여 일이 넘게 ‘월미도 미군폭격 진상규명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와 유가족들이 농성 중이다. 얼마 전 <뉴욕타임스>는 “인천상륙작전이 전개되기 5일 전인 1950년 9월 10일 미군 폭격기 43대가 월미도 지역에 93개의 네이팜탄을 투하해 이 일대를 초토화하면서 최소한 228명 이상의 민간인이 희생”당했고, “이들 대부분이 부녀자와 노인이었으며 지금까지 이러한 사실을 거론하는 것이 한미 동맹을 해친다는 이유로 금기시됐다”고 보도한 바 있다.

어떤 이들에겐 인천이 평화통일의 중심도시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다. 평화를 말하는 것은 쉽지만 평화는 언제나 우리에게 너무 먼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늘 전쟁과 함께 했고, 평화보다 전쟁을 먼저 기념하는데 익숙하다. 한국전쟁 당시 가장 대규모 군사작전이 벌어진 곳, 수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당한 곳이지만 인천엔 전황을 역전시킨 작전과 지휘관을 기념하기 위한 동상과 웅장한 전쟁기념관만 있지 어디에도 온 가족이 함께 평화를 보고 느끼고 만질 수 있는 곳은 찾을 수 없다.

열전과 냉전의 틈바구니에서 가장 혹독한 피해를 입은 곳이 인천이었다. 그렇기에 인천  출신의 정치인 죽산 조봉암 선생은 1956년 대통령선거에서 목숨을 걸고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에 맞서 평화통일론을 주장했던 것인지 모른다. 인천이야말로 시대를 앞선 평화통일론의 산실(産室)이었다. 경제발전이란 측면에서도 인천은 그 어느 지역보다 평화가 절실하게 요구되는 곳이다. 냉전의 종식으로 황해가 다시 열리고 대중국 교역의 일번지가 되면서 인천의 물동량이 급속하게 증대되었고, 평화의 공간이 열리면서 인천은 비로소 영종, 강화, 해주, 개성을 잇는 경제적 대사업권인 황해벨트를 꿈꿀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천은 한반도 평화통일도시로, 나아가 아시아의 평화도시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역사적 근거와 현실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 어쩌면 그 작은 출발이 인천에 평화박물관을 건립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인천을 ‘평화통일도시’로 탈바꿈시키자는 주장, 이 땅에서 희생당한 주민들의 목소리에 우리 인천시 정부와 시민사회가 좀더 적극적으로 나서준다면 인천은 전쟁이 아닌 평화로 세계인들에게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인천일보> 2008.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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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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