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분에 읽는 마르크스 - 질 핸즈 | 이근영 옮김 | 중앙M&B(2003)


이런 류의 책들을 접할 때마다 늘 하는 말이지만 너무 큰 기대는 금물이다. 그러나 이 책의 경우엔 기대해도 괜찮다. 사실 이 시리즈의 제목은 맞지 않는다. "30분에 읽는 마르크스"라니 그게 가능하다면 누가 골머리를 앓겠나. 비록 이 시리즈가 150쪽 내외의 짤막한 반토막짜리 책일지라도 30분에 읽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이 부분은 필경 과장광고에 속하리라. 그보다는 이 책의 영어 원제명인 "Marx : A Beginner's Guide(마르크스: 초보자를 위한 입문서)"가 적합하다. 30분만에 읽는 건 불가능하지만 2-3시간 투자하면 간략하면서도 의미심장한  마르크스에 대한 기초 지식을 쌓을 수 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므로 자꾸 말하면 입 아픈 이야기이긴 한데, 이런 책의 성패는 짧은 분량에 얼마나 많은 지식을 우겨넣었는가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런 책 한 권으로 모든 것을 끝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아무리 책 읽기를 좋아하는 이라 해도 세상의 모든 사상가들을 죄다 깊이있게 읽을 수는 없지 않은가. "공부에는 왕도가 없다"는 충고대로 그런 공부를 할 사람은 이런 책을 읽은 뒤 다음 단계로 넘어가면 된다. 게다가 이 책은 다음에 뭘 읽으면 좋을지도 충실히 알려준다.

 

자, 다시 핵심으로 돌아와서 문제는 이 책의 저자가 칼 마르크스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그가 주장한 정치경제학의 이론들 가운데 핵심 개념들을 얼마나 잘 요약했는가, 그리고 충실하게 정리했는가가 관건이다. 그 부분에 한해서 나는 별 다섯을 주고 싶다. 게다가 이 책을 번역한 이근영의 "옮긴이의 글"도 아주 매력적이며, 이 책이 지닌 미덕에 그럴 듯하게 핵심을 잘 지적하고 있다.

 

20세기 역사는 마르크스의 유산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마르크스가 죽은지 1백년도 안 되어 세계인구의 반은 마르크스주의를 내세우는 국가들의 깃발 아래 살았었다. 최근의 우리 민족사도 마르크스주의와의 관련성 밖에서는 설명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마르크스를 예수 그리스도 이후 세계사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으로 꼽는데 별 주저함이 없을 정도로 그의 영향은 깊고 그 폭도 넓다. 그리고 그 영향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본문 6쪽> 중에서

 

윗 부분이 요약본을 통해서라도 우리가 칼 마르크스를 읽어야 할 이유일 것이다. 그럼에도 칼 마르크스의 사상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그가 골치아픈 철학자이자 숫자라면 머리에 쥐가 날 경제학자를 겸하고 있다는 사실, 게다가 독일 낭만주의의 교양에, 헤겔 철학의 계승자란 점을 고려한다면 더더욱 읽어내기 난망한 사상가다. 그럼에도 이 짧은 책은 그에 대해 완전한 이해까지는 아니어도 그에 대한 이해의 첫 단계를 그럴듯하게 해치운다. 옮긴이는 "옮긴이의 말" 끝부분에 자신이 생각하는 마르크스 사상의 핵심을 살짝 드러낸다. 
 

유명한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중 한 사람인 칼리니코스는 "마르크스 사상의 진리를 인정하는 사람들은 단순한 지적 개입으로만 만족해서는 안된다. 단지 세계를 관찰할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가 그러했듯이 자신을 노동자계급의 삶과 투쟁 속에서 혁명 정당 건설이라는 실천적 과제 속으로 던져 넣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마르크스를 이해하고 마르크스를 읽고자 하는 노력은 결국 세계를 변화시키려는 노력이다. 마르크스의 말처럼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본문 9쪽>

 

이 책은 가이드북이 갖춰야 할 기본적인 덕목에 매우 충실하게 짜여져 있는데, 이는 이 책의 저자 "질 핸즈"가 현재 성인교육전문가로 활동한 경험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싶다. 우리에게 성인교육이라 하면 먼저 성인방송, 성인전용콘텐츠를 떠올릴지 모르겠으나 영국의 학문적 전통 아래에서 성인교육이라 함은 문화주의 문화연구 그룹의 주요 구성원들이 성인교육전문가로 먼저 활동했었음을 상기해야 한다. 이 책은 모두 7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칼 마르크스를 이해하기 위한 첫번째 코드로 그가 살았던 시대와 그의 삶을 살핀다. 마르크스가 공산주의에 대해 처음 생각해낸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공산주의에 대한 실제적이고 과학적인 사상을 개발했고, 이에 대해 책을 쓰고, 널리 알기 위해 애쓴 실천가였다. 마르크스는 1818년 5월 5일 당시 프로이센에 속했던 라인주에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무렵 유럽에서는 반유대주의 정서가 매우 강했다.(오스트리아에서는 심지어 유대인은 장남만 정식으로 혼인할 수 있는 악명높은 반유대인 법을 제정하기도 했다. 그런 까닭에 당시 태어난 많은 유대인들이 본의아니게 정식 혼인 관계에서 태어나지 못한 사생아가 되고 말았다.)

 

산업화와 근대화가 추진되면서 거대한 도시가 건설되기 시작했고, 많은 이들이 전통적인 농업과 수공업에서 도시 산업 노동자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농촌 지역 역시 실업률이 점차 높아졌고, 공동경작지를 빼앗고, 오랫동안 가난한 농부들에게 속해 있던 방목권 역시 박탈당했다. 결국 농촌 지역의 빈곤은 이들이 도시 지역의 값싼 노동력으로 흡수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들은 어떤 조건을 감수하고서라도 일자리를 얻어야만 했으므로 보건 시설이 전혀 없는 빈민가에서 살아야 했고, 안전장치도 없는 기계를 다뤄야 했다. 미성년자는 물론 아동들까지 노동에 나서야 했던 탓에 당시 노동자들의 평균 수명은 19세에 불과했다. 마르크스는 그런 시기에 대학에서 헤겔 법철학을 전공했고, 급진적인 사상을 제시한다. 그런 탓에 대학 교수가 되지 못하고, 프랑스, 벨기에, 프로이센에서 추방당하고 만다. 결국 마르크스는 1849년 런던으로 이주한다. 그는 예니와의 사이에 7명의 아이를 두었지만 이들 가운데 3명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30분에 읽는 마르크스"는 이렇듯 마르크스의 생애와 그의 사상, 이론의 주요 쟁점 및 마르크스가 지닌 의미의 현재성을 한 권의 책에 아우른다는 벅찬 주제에 감히 도전한다. 그리고 아쉬움이 없을리 없지만, 성공적으로 해내고 있다.

 

예를 들어 3장에서는 마르크스에게 영향을 끼친 사상가들을 살펴보고 있다. 마르크스 이전의 유물론 철학자들은 오랫동안 신이 존재하는가? 신의 존재를 과학적 방법으로 입증할 수 있는가에 대해 열띤 논쟁을 벌였다. 당시의 주된 과학적 발전이 주로 수학과 역학 분야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들은 사회를 불변의 과학적 법칙을 따르는 고정된 것으로 파악했다. 이런 철학의 영향을 받아 당시 사람들에게 사회 속의 위치 역시 불변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이들로부터도 많은 영향을 받았고, 이들의 개념 가운데 상당수를 받아들여 더욱 발전시켰다. 그 가운데 특히 마르크스에게 깊은 영향을 준 사람은 헤겔이었다.

 

헤겔은 인류문명이 지적, 윤리적 진보를 통해 이루어졌다고 믿었다. 그가 주장한 진보는 신성한 어떤 존재의 개입이 아닌 인간성에 내재된 합리적 정신(헤겔의 용어를 빌자면 "세계정신")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세상의 모든 진보(발전과 변화)는 변증법적인 긴장에 의한다고 보았는데, 서로 다른 두 개의 운동(관념)이 벌이는 갈등의 결과란 것이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변증법적 개념을 차용해 관념이 물질적인 경제활동으로부터 발전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인간이 살고 일하는 환경이 인간의 생각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물론 오늘날의 우리가 생각하기엔 헤겔의 주장이나, 마르크스의 주장은 어찌보면 매우 상식적인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당시로선 매우 놀랄 만한 급진적 사유였다. 세상(사회)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니... 귀족과 부르주아들이 얼마나 놀랐겠는가?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체제 아래 인간을 소외시키는 것은 "신"이나 "정신"이 아니라 "돈"이라고 주장한다. '돈은 인간 노동과 삶을 소외시키는 정수이며, 인간이 돈을 숭배하면 할수록 돈이 인간을 지배하게 된다"고 말한다. 마르크스가 이런 생각을 기초로 어떻게 물질 세계가 정신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가를 연구한 것이 바로 '변증법적 유물론' 이다.


 

노동은 부자들을 위해서는 멋진 것을 만들어내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불행만을 만들어낸다. - K. 마르크스 『경제학-철학초고』

 

마르크스가 파악한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은 돈, 자본, 상품에 대한 물신 숭배이다. 1) 돈에 대한 물신 숭배는 노동자들을 속이는 환상으로, 노동자들은 돈이 노동의 목적이라고 생각하여 자신들의 가치를 돈으로 계산하게 된다. 2) 자본에 대한 물신 숭배는 자본을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으로, 그것을 만들어낸 노동에게는 아무것도 빚진 것이 없다는 믿음을 말한다. 3) 상품에 대한 물신 숭배는 어떤 상품이 교환가치와는 관계없이 본질적으로 다른 상품 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믿음을 말한다(베블런의 『유한계급론』을 참조하시라).

 

인간 ‘소외’의 개념은 헤겔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헤겔이 주장하는 소외란 인간이 ‘세계정신’의 일부가 되고자 하기 때문에 생겨난다고 보았다. 헤겔에게 있어 소외란 거의 종교적 개념에 가까운 것이었으나 마르크스는 이를 경제적 개념으로 규정했다. 노동자들은 자신이 만드는 상품으로부터 이득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상품으로부터 소외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산물을 ‘자신들 외부에 있는 낯선 것’으로 본다고 말한다. 노동자들은 공장시스템에 의해서 소외되고 비인간화된다. 공장시스템은 노동자들의 노동으로부터 잉여가치를 착취하는 방법이고, 시스템은 어떻게 일할 것인가에 대해 노동자들의 주체성을 빼앗아간다.

 

소외는 자본가들의 착취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나 노동자들은 자신이 착취당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노동자들은 감추어진 자본주의 시스템 탓에 자신들이 생산한 잉여가치의 권리를 자본가들이 갖고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에 대해 별다른 이견이 없거나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인다(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과 연결됨).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소비자들에게도 자기 스스로를 노예로 만드는 욕망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을 속인다고 보았다. 노동자들이 생산하는 상품은 결국 노동자들도 노예로 만든다. 상품을 살 수 있는 돈을 얻기 위해 노동을 하는 악순환을 계속해야 하기 때문이다. 상품에 대한 물신숭배는 더 많이 사고, 더 많이 소비하도록 만든다. 사유재산제도 하에서 인간은 어떤 물건을 소유하고 사용할 수 있어야만 그 물건이 가치가 있다고 믿게 되기 때문이다. 사유재산, 임금노동, 잉여가치 그리고 시장의 힘 등은 사회의 구성원에 의해 만들어진 구조들이나 그것은 너무나 교묘해서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게 된다. 마르크스는 자본가들조차도 소외되지만 최소한 그들은 “소외 속에서도 행복하다”고 말한다.

 

물론 마르크스가 현재에도 여전히 유용한가?를 묻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태반은 마르크스를 전혀 읽지 않은 이들이다. 왜냐하면 마르크스를 읽는다면 여전히 유용한가 묻기 보다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먼저 하게 될 테니까. "마르크스는 사회의 경제적 토대를 바꿈으로써 사회자체도 바뀔 수 있으며 인간의 본성도 바뀐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20세기의 역사가 보여주듯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것은 생각했던 만큼 쉬운 일은 아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마르크스의 견해는 지나치게 낙관적인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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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멋진 판타지』 - 김서정, 굴렁쇠(2002)


문학의 위기를 말한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영상의 시대를 맞이하여 어떤 평자들은 소설은 이제 영상이 흉내낼 수 없는 방식으로 글을 쓰라고 말한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드는 생각은 그래서야 문학은 더욱 위기를 맞이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다. 이런 류의 주장들 - 문학은 영상매체가 따라올 수 없는 표현, 보다 복잡한 심리묘사와 난해한 이야기 구조를 지니는 방식으로 문학성을 고수해야 한다 - 은 어제오늘 나온 것은 아니다. 결국 이런 류의 주장은 모더니즘이 일찌기 주장했던 바이기도 하다. 그런 주장대로라면 앞으로의 문학은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소수의 사람들이 즐기는 고급한 예술로 점차 사멸해가는 장르가 될 수밖에 없다. 마치 서구의 고전음악이라고 불리는 장르가 현재 일정한 한계에 봉착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이것을 문학의 비타협적인 속성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문학이 세상과 불화한다는 것은 단순히 정치적(이때의 정치적이란 말의 의미는 현실정치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주류권력과 불화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뤼시엥 골드만은 소설 사회학을 위하여에서 소설을 "타락한 사회에서 가장 타락한 방식으로 진실을 추구하는 서사"라고 정의한 바 있다. 여기서 핵심은 "타락한 사회에서의 가장 타락한 방식"이 무엇인가?를 묻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진실을 추구하는 서사"가 무엇인가?를 묻는 일이다. 소설 문학은 이미 태생적으로 타락한 사회에 적응하는 방식으로 나타난 장르이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여전히 "진실을 추구하는 서사"로서의 위치를 놓치지 않는다.

 

문학의 위기란 결국 엄살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소설은 여전히 타락할 건덕지를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세상을 타락한 사회라고 인식한다면 할수록 소설은 그 가운데서도 가장 타락한 방식의 서사이므로 앞으로도 도 많이 추락할 수 있다. 그렇다면 소설은 어떻게 타락할 것인가? 그 방식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이 욕망의 무한 질주를 앞서는 서사를 채택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정반대의 길로 달려가는 것이다. 그 정반대의 길에서 만날 수 있는 장르 중 하나로 나는 판타지를 꼽고 싶다. 판타지하면 최근 성공리에 영화 시리즈를 마감한 톨킨의 판타지 소설 반지의 제왕을 먼저 떠올릴 수 있을 텐데, 이 소설 역시 출간 이후 금세기 이내 영화화되기는 어렵다는 평을 들었던 작품이다. 결국 세기를 넘겨 영화화에 성공했다.

 

판타지에 관한 책들을 찾다보니 주로 아동문학과 관련한 분야에서 세 권의 책을 보게 되었는데, 어린이 문학평론가인 김서정이 번역한 마리나 니콜라예바(Maria Nikolajeva)의 용의 아이들과 김서정 자신의 책 멋진 판타지, 이재복의 판타지동화세계가 그것들이다. 앞서 말한 『용의 아이들』은 어린이들이 주독서대상인 판타지동화에 대한 기호학적인 접근을 통해 어린이문학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히고 있다. 무엇보다 국내에 제대로 된 아동문학 개론서가 없는 현실이고 보면 『용의 아이들』이 지니고 있는 가치는 더욱 높아진다. 이 책은 그런 한국적 현실에 꼭 필요한 책이면서도 한국적 현실 자체는 누락되어 있다는 아쉬움을 남긴다. 한국의 어린이문학 현실에 필요한 책이지만, 한국의 어린이문학은 언급되지 않는다. 이에 대해서는 차차 이야기할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김서정의 멋진 판타지는 '어린이문학평론집'이라는 부제를 달고 '굴렁쇠'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은 전체가 3부의 구조로 꾸며져 있는데, 제1부 '판타지는 멋있다'를 통해 판타지란 무엇인가를 규정하고 있다. 판타지란 그리스말에서 나왔는데, '눈에 보이도록 하는 것', '현실로는 나타나지 않는 것을, 상상력의 힘을 빌어 어떤 특정한 모양으로 바꾸어 놓는 활동이나 힘 또는 그 결과'라고 한다. 저자에 따르면 판타지는 '현실 세계의 법칙을 깨뜨리는 이야기'이지만 이런 단순한 정의보다 중요한 것은 그런 요소들이 어떻게 '다른 세계'에 대한 생각을 끌어낼 수 있는가에 촛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이 세계와는 다른 또 하나의 세계, 다른 사람은 생각지도 못했던 나만의 세계를 뛰어난 상상력으로 만들어 내놓아, 읽는 이를 놀라고 감탄하게 하는 이야기" 그것이 바로 판타지라고 말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의문을 던진다. 전래동화도 판타지인가? 저자는 "전래동화는 이 세상이, 사람들의 이성으로 모두 설명할 수 있는 곳은 아니라고 말한다. 또 소박한 윤리, 도덕으로 단순하게 살아갈 수 있는 곳도 아니라고 말한다. 설명할 수 없고 받아들이기 힘든 삶도 모두 나름대로 귀한 것이라는 사실을, 논리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들려주는 것이 전래동화"라고 말한다. 매우 재미있는 해석이고, 공감할 수 있는 정의였다. 이 정의를 통해 우리는 전래동화 역시 판타지이며 훌륭한 전래동화, 판타지는 현실세계와는 다른 세계를 이야기하지만 결코 현실과 괴리된 꿈같기만 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속성을 알 수 있다. 저자는 제1부에서 판타지의 여러 덕목들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제2부 '잊혀지지 않는 이야기'에서 저자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서구의 동화들 - 단순히 동화라고 규정할 수 없는 철학우화들이라 할 수 있는 것들 - 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미하엘 엔데, 필리파 피어스, 루이스 캐럴, 엘윈 브룩스 화이트, 앨런 알렉산더 밀른,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등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으며(위엔 언급된 작가들 이외에도 많으나 편의상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만 언급) 뛰어난 작품들을 발표한 이들이다. 이들 가운데 특히 필리파 피어스의 한밤중 톰의 정원에서는 특이한 판타지이다. 반지의 제왕처럼 선과 악 사이의 처절한 전투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기이한 캐릭터들이 줄이어 나오지도 않는다. 도리어 아주 평범한 일상적인 풍경들 속에서 벌어지는 현실이 어떻게 판타지가 될 수 있을까? 저자는 그것을 "시간"이라고 말한다. 한밤중 톰은 시계를 바라보며 환상,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판타지의 세계로 들어간다. 영원할 것 같은 어린 시절은 일순간의 꿈과 같다. 한 번 흘러간 시간은 영원히 되돌릴 수 없다는 진부하기 짝이없는 교훈을 필리파 피어스는 짐짓 근엄한 표정으로 재미란 설탕가루에 버무려 준다.

 

다른 한 편으로 내가 이 책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은 부분은 린드그렌의 삐삐 롱스타킹에 대한 비평 '내 이름은 꼬마 혁명가'이다. 그것이 한국사회만의 특징인지 아니면 전세계 모든 어른들이 그렇게 사는지 모르겠지만, 어려서는 부모, 가족의 참견, 자라서는 학교, 사회의 참견을 받으며 살아간다. 아이가 어른이 되길 꿈꾸는 것은 더이상 부모의 참견을 받고 싶지 않다는, 어른이 되면 어린이가 할 수 없는 뭔가 그럴 듯한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라는 환상 때문이다. 어른이 되면 하고 싶은 일도 많지만, 할 수 있는 일도 참 많을 것이라는 환상은 어른이 되고자 하는 어린이의 마음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러나 막상 어른이 되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기껏해야 눈치를 안보고 담배를 피울 수 있다거나, 술을 마신다거나 하는 것들에 불과하다. 그나마를 즐기기 위해 어른이 된다는 건 참 비극이다. 그래서 어른들은 다시 어린이가 되고 싶어진다. 작은 호기심에 하루가 가는 줄 몰랐던 시절, 떠 가는 구름을 보며 시시각각으로 흘러가는 구름을 온종일 쳐다보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삐삐'는 어른과 아이의 환상을 한 몸에 버무린 존재다. 삐삐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한다는 점에서 아이들에게는 어른이고, 돈이 곧 자유라는 어른들의 환상 속에서 그는 돈 많은 어린이다. 아이 입장에서도, 어른 입장에서도 삐삐는 부러움을 한 몸에 받을 만한 존재다. 삐삐가 반권위적이란 점만 놓고 보면 그는 완벽한 아나키스트이다. 삐삐의 뒤죽박죽 별장에서는 세상의 권위, 예절, 질서, 체제 따위는 온통 뒤죽박죽이 되어버린다. 그런데 삐삐가 그런 전복적인 자유를 즐길 수 있는 요소들은 무엇인가? 그것은 말을 번쩍 들만큼 엄청난 힘과 해적 선장 아버지가 물려준 금화들, 그리고 무엇보다 천진난만하여 어른들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 말의 힘이다. 그렇다고 삐삐가 무척 논리적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삐삐는 논리적이라기 보다는 어린이기 때문에 보이는대로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다. 어른들은 논리를 가장하지만 그것이 진실은 아니다. 세상은 논리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어른들은 이미 내면화하고 있는 탓에 그들 자신의 논리가 천진난만한(?) 삐삐에게는 통하지 않는 것이다.

 

제3부 '독일동화문학과 판타지'는 208쪽에 불과한 얇고 작은 이 책에서 가장 작은 쪽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가장 이론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이 부분이 이 책의 전체에서 가장 활력이 없어 보인다. 게다가 저자가 언급하고 있는 부분들 - 독일동화문학은 낭만주의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으며, 독일 낭만주의는 독일 정신의 한 유산으로 인식되고 있다. - 에서 나는 한 가지 의문아닌 의문이 생겨났다. 그것은 판타지 문학 전체에 대한 것과도 연결된다. 전래동화란 개념, 전래동화가 본격적으로 채집되기 시작한 것은 고전주의 시대를 거쳐 낭만주의에 이르러서다. 낭만주의란 사조는 결국 민족주의와 깊은 연관을 맺게 된다. 히틀러가 바그너의 "니벨룽겐의 반지"를 연모한 것처럼 말이다. 낭만주의의 자기 파괴적 속성은 반합리주의와 연결되고 이는 다시 파시즘과 연결된다. 그런데 저자는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거의 전혀 연구가 없어 보인다.

 

앞서 판타지 문학이 지닌 덕목들 - 다른 세계에 대한 열린 상상력과 설명할 수 없고 받아들이기 힘든 삶도 모두 나름대로 귀한 것이라는 사실, 교훈성과 전복적인 기운들 - 을 일거에 무화시켜 버릴 수도 있는데,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에서 나는 무척 아쉬움을 느꼈다.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국경이 있다"는 말은 이중의 소외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는 과학, 과학연구에는 그 어떤 제약도 주어질 수 없는 초월적인 것이란 의미에서의 소외이고(이는 다시 말해 과학은 시민사회의 도덕률이나 윤리에서 자유로운 어떤 것이라는 위험한 규정이 된다), 그런 과학자들조차 국가 이데올로기에는 종속된 존재여야 한다는, 즉 국가구조의 하부에 속해야 한다는 규정을 통한 소외를 암시하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를 판타지 문학에 대입시키면 판타지에는 국경이 없으나 판타지 문학에는 국경이 있다는 말이 될지 모르겠다.

 

옛이야기는 동화의 어머니라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판타지 문학은 독일동화문학의 예에서 알 수 있듯 전래동화와 깊은 연관이 있으며 이는 다시 민족과 연결된다. 판타지문학이 '다른 세계'를 다룬다 하더라도 현실과 괴리된 이야기일 수 없는 것처럼 판타지 문학의 태생 또한 민족과 결부되지 않을 수 없다. 서구의 판타지 문학이 한국 혹은 동양의 판타지 문학과는 다를 수밖에 없는 것처럼 말이다.톨킨의 『반지의 제왕』에 대한 여러 해석들 가운데 하나는 그가 경험한 세계대전에 대한 것이다. 『반지의 제왕』에서 가장 두드러진 암시는 모르도르의 화산에서도 알 수 있듯 '불'이다. 세계을 일순간에 잿더미로  만들 수 있는 불에 대한 암시가 대량폭격과 소이탄, 핵에 의한 공포를 말하는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해리 포터 시리즈가 판타지이면서 동시에 다른 세계에서조차 자본주의 방식의 마법 - 가령, 님버스제 최신 모델의 빗자루 - 를 표현하는 것 이 또한 앞으로 판타지 문학이 풀어야 할 숙제일지 모르겠다. 판타지 문학이 과거 낭만주의 속에서 민족적 뿌리를 찾는 시도로서 행해진 전래동화 채집이라는 민족적 뿌리를 거부할 필요도, 거부할 수도 없지만 가장 순수한 듯 보이는 판타지 문학 역시 타락한 현실과의 치열한 대결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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