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를 웃긴 꽃 ㅣ 문학동네 시집 90
윤희상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6월




지난 언젠가 화요일에 나는 선배 박형준 시인과 함께 국밥을 먹었다. 지금 한국의 시인들이 처해있는 다소 비극적인 상황에 대해 선배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나는 꾸역꾸역 국밥을 밀어 넣었다. 밥알을 씹으며 한 편으론 한국의 시인들이 현대미술이 처한 난관과 흡사한 난관에 처했다는 생각을 했다. '형, 문학이 문학 그 자체의 힘을 잃고, 자꾸만 철학이 되고, 정치가 되어 가고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아직 시 문학은 살아있다. 비록 커다란 변화의 조짐들이 불길한 징조가 되어 연이어 출현하고 있지만. 오늘 아침 출근을 하니 또 한 명의 선배 시인이 새로 시집을 냈다고 시집을 보내주었다. 간만에 읽는 신간 시집이다.


첫 시집 『고인돌과 함께 놀았다』에서 그의 정돈된 시세계가 깔끔하게 읽히긴 했지만 나에겐 어딘지 사람을 끌어들이는 흡인력이랄까, 매력이란 측면에서 다소 약하단 생각을 했다. 다시 말해 마치 미인의 얼굴은 보통 사람의 얼굴에 비해 좌우대칭의 균형을 이루지만 이것을 CG(컴퓨터 그래픽)를 통해 완벽한 좌우대칭으로 만들어내었을 때, 미인의 자연적인 얼굴이 CG로 만들어낸 얼굴보다 더 아름답게 여겨지는 것과 같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윤희상 첫 시집이 완벽하다는 말은 아니다. 크게 흠잡을 데 없이 무난하지만 그 무난함이 덜 매력적이었단 뜻이다.) 

시인 서정주는 <국화 옆에서>를 통해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라고 노래했는데, 이때 거울 앞에 섰다는 것은 자신과 대면하는 것을 말한다. 시인이 바라본 것은 누님이자 동시에 자신과 대면하는 누이의 자아이자 곧 자신(독자)이기도 하다. 윤희상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소를 웃긴 꽃』은 근래 보기 드물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줄 아는 시집이었다. 문학이 철학과 다른 것은 로고스가 아닌 파토스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일반 독자들 역시 시를 잘 읽어내기 위해 적절한 훈련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철학자가 될 필요까지는 없다. 나는 윤희상의 두 번째 시집이 시와 독자, 시인과 독자, 시인과 사회 사이에서 적당한 지점 - 어쩌면 그것이 ‘대면의 소실점’일지도 모르겠지만 - 에 서 있다고 느꼈다.

나와 너의 사이는
멀고도 가깝다
그럴 때, 나는 멀미하고
너는 풍경이고,
여자이고,
나무이고, 사랑이다

내가 너의 밖으로 몰래 걸어나와서
너를 바라보고 있을 즈음,

나는 꿈꾼다

나와 너의 사이가
농담할 수 있는 거리가 되는 것을
(<농담할 수 있는 거리> 중에서)


‘나와 너’는 세상의 전부다. 한겨울의 고슴도치처럼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서로의 체온을 나눠야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론 가시에 찔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세상의 중력에 끌려들지 않기 위해서 거리를 두면 세상은 곧 풍경이 되어 멀어진다. 불교 『유마경』의 가르침은 “나는 곧 너다”인데, 이 말은 진정한 보리심의 발현은 나와 너를 나누고 구분하지 않는 것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대자대비(大慈大悲)는 사랑하되 동정하거나 구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인은 “너의 밖으로 몰래 걸어나와서”는 너를 바라본다. “나와 너의 사이가 / 농담할 수 있는 거리가 되는 것을” 꿈꾸고 희망한다. 윤희상은 김수영의 “바로 보마”를 그 나름의 방식으로 변주한다. 윤희상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바로보마,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윤희상의 『소를 웃긴 꽃』을 관류하는 이미지는 이 같은 대면의 이미지이다. 시인은 거리를 두고 바로 보고자 한다. 다만 그 거리(距離)는 냉소도, 뜨거운 참여도 아닌 성찰(省察)의 거리이다.

거울이 여자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하지만 거울이 여자를 숨기고 있다 여자가
오면, 거울이 열린 문으로 여자에게만 숨기고
있는 여자를 보여준다 거울은 온몸으로
문이다 여자는 그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여자를 본다 들뜬다 그럴 때마다, 거울은
여자의 뒤로 숨는다 여자가 그랬던 것처럼
침묵한다
(<거울과 여자> 전문)

나에게는 금붕어가
어항 속에 있고,
금붕어에게는 내가
어항 속에 있다
그래서,
금붕어와
나는 밤이 새도록 싸웠다
(<금붕어와 싸웠다> 전문)


윤희상의 시세계에서 대면의 이미지는 여러 형태(거울, 어항 등)로 변주되지만, 대면 자체가 성찰로 고스란히 연결되지는 않는다. 차라리 그것이 정직하다. “거울이 여자를 숨기고 있다” 백설공주를 살해하는데 성공했다고 여긴 계모가 거울 앞에 서서 “거울아, 거울아”를 불러본다. 이때 거울은 계모의 모습을 비추는 것일까? 아니면 계모의 욕망을 비추는 것일까? 그도 아니면 거울 자체의 얼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 “거울은 온몸으로 문”이지만 여자는 눈치 채지 못한다. 세상은 보고자 하는 이에게만 그것을 허락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계모도 충분히 아름답지만 계모는 끊임없이 욕망하고, 욕망을 추구하여 결국 거울 속에서 아무 것도, 자신조차 발견하지 못한다. 금붕어와 나는 마주 하고 있지만 ‘어항’이란 자의식, 세계에 갇혀 서로를 진실로 마주 대하지 못한다. 시인은 대면의 이미지를 사용하면서도 그저 대면한다는 것이 실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지 잘 알고 있다.

먼 곳의 길 끝에서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자세히 보니, 내 친구 9였다

9
(<먼 곳의 길 끝에서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자세히 보니, 내 친구 9였다> 전문)



나주 장날,
할머니 한 분이
마늘을 높게 쌓아놓은 채 다듬고 있다
그 옆을 지나가는 낯선 할아버지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을 남기고 간다

“그것을 언제 다 할까”

그러자, 할머니가 혼잣말을 한다

“눈처럼 게으른 것은 없다”
(<눈처럼 게으른 것은 없다> 전문)


<먼 곳의 길 끝에서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자세히 보니, 내 친구 9였다>는 시의 제목과 내용이 반전되어 있다. 대개는 시의 제목이 시의 몸을 드러내고 상징하는데 비해 이 시에서는 시의 제목이 시의 내용보다 길어 시의 몸을 제목이 수식해주고 있다. ‘내 친구 9’는 ‘행인1,2,3’가 마찬가지로 익명(匿名)의 존재다. 그러나 익명이란 스쳐가는 존재인 ‘행인’에게는 어울리지만 친구에겐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대면의 소실점 저 멀리에 서 있는 친구, 끝끝내 익명으로 남아버린 친구, 그나마 자세히 보아야 내 친구인 줄 알지만, 자세히 본 것만으로 친구의 익명성이 제거되지 않는다. 설령, 시인이 친구의 실명을 거론했다 한들 우리에게 그 이름이 익명 이상의 의미로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본다는 것, 그저 대면한다는 것은 이처럼 허망한 것이기도 하다. <눈처럼 게으른 것은 없다>가 주는 깨달음은 마치 선사(禪師)들의 선문답 한 토막 같은 짧은 대화가 만들어내는 긴장이 절묘한 시이다. 이 깨달음을 속담으로 옮겨보자면 아마 그런 것일 게다. “부뚜막의 소금도 넣어야 짜다”는 바라보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삶, 그런 의미에서 보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다 아는 듯 말하는 것은 얼마나 무책임하고 게으른 것인가를 시인은 말하고 있다.

시집의 전반부가 이처럼 극히 ‘개인적’인 성찰, 그래서 서정적인 의미에서의 성찰을 담고 있다면 시집의 후반부에 이를수록 대면의 이미지는 사회적인 확장 과정을 거친다. 편의상 전반부와 후반부로 구분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 같은 대면의 이미지들이 사회적으로 확장되어가는 과정은 시집의 전체에서 드러나고 있다. 예를 들어 <누가 깃발을 붙잡고 있다>, <시인에게, 숲 해설가는 말한다>, <田榮鎭>, <光州 五月團> 등의 시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윤희상 시인의 이번 시집 『소를 웃긴 꽃』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우리의 시 문학이 위기로 내닫고 있다는 전망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현실에서 보기 드물게 매우 뛰어난 시집이다. 나 스스로는 ‘입구(口)자 연작시’라고 호명할 만한 세 편의 시(<검색창, 세상에서 가장 큰 입>, <下官을 마친 뒤에 울었다>, <아이들아, 재래식 화장실은 무섭지 않다>)가 보여주는 촌철살인의 비유들이
 이 시집의 매력과 재미를 한껏 높여 준다. 이 가을에 자기만의 견고하고 튼실한 시세계를 구축해가는 시인을 만날 수 있는 것은 큰 즐거움이다.


* 사실 나는 학연이든, 지연이든, 혈연이든 하는 것에 연연하고 싶지 않지만(다시 말해 윤희상 시인과 내가 학연으로 얽혀있다고 해서 그의 시집을 서평하거나 호평을 하는 일은 결코 없지만), 가끔 추억이 겹친다는 점에서 현실의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인연의 줄기를 더듬어 보게 되는 일조차 부인할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이번 시집에서 특히 학연이라는 공통된 인연 때문에 더욱 재미나게 읽을 수 있었던 시가 ‘최인훈 선생님에게’란 부제가 달린 <참나리꽃이 피는 사연>이다.

순발력이라고나 할까, 빠르게 움직이잖아
기막히게 앞으로 내다본단 말이야
약효가 떨어지면, 재빨리 다른 약을 찾아야지
지금은 마오쩌둥이나, 마르크스도 아니고
레닌도 아니란 것이지
주체사상을 붙잡고 있는 북측이
다시 단군을 붙잡았단 말이야
(<참나리꽃이 피는 사연> 중에서)


나의 오래된 스승인 최인훈 선생과 시인이 나누었을 법한 대화의 한 장면이 연상되면서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떠오른다. 낯익고, 정겨운 장면, 그리하여 너무나 그리운 스승의 얼굴이 떠오른다. 아마도 당신은 지금쯤 한창 북미관계의 변화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계실 터인데, 당신 앞에 무릎을 꿇고 당신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얼마나 신기하고 새로운 경험일까. 스승이 있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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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연구의 이론과 방법들 - 존 스토리 | 박만준 옮김 | 경문사(2002)




우리에게 현실문화연구에서 출간된 "문화연구와 문화이론"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는 존 스토리의 책 "문화연구의 이론과 방법들"은 문화연구가 실제로 어느 분야에 적용되고 있는가를 실질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책이다. 문화연구는 여러 분야의 학문들에 기대고 있다. 예를 들어 문화연구에서 논의되는 인물들은 그 자체로 서구의 근현대 사상사를 옮겨온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많은데,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를 비롯해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사상가들, 알튀세르, 그람시, 벤야민 등등이 이야기된다. 그 못지 않게 문화연구가 건드리고 있는 분야도 폭넓은데(도대체 어느 것이 문화연구고, 어느 것이 문화연구가 아닌지조차 헷갈릴 정도로) 존 스토리의 이 책은 그 가운데 어느 것이 그래도 문화연구가 주로 건드리고 있는 분야이고, 그 분야를 어떻게 연구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책이라 할 수 있다.

문화연구에서 말하는 지금껏 우리가 "문화"라면 고정관념처럼 떠올리게 되는 고급예술(high art)을 말하진 않는다(물론 이 분야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는 있겠지만). 그보다는 우리의 일상생활의 텍스트와 문화적 실천행위로서 이해될 수 있는 문화이다. 대개의 문화연구 관련 서적들이 문화에 대한 그들의 이런 입장을 설명하고 정의하는 것으로 출발하는 까닭은 분야를 명확히 구분하고 싶다는 의도와 달리 분야를 명확히 구분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우리에게 문화는 뭔가 우리의 일상과 다른 고급한 것을 향유하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그만큼 뿌리깊게 박혀있음을 늘 의식한다는 것을 반증한다.

존 스토리는 이 책을 통해 문화연구에서 말하고자 하는 문화는 일상적인 것, 문화엘리트들이나 지배계급층이 향유하는 것들이 아닌 일반 대중들이 향유하고 일상 속에서 실천(이때의 실천이란 컨텍스트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행위를 그 대상으로 한다. 이 때 문화연구의 방법은 레이몬드 윌리엄스, 스튜어트 홀, 알튀세르의 입장 중 어느 하나를 택하는 것을 의미한다기 보다 문화가 생산되고 소비되는 사회적/역사적 상황에 입각해서 문화를 분석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즉, 문화연구에서의 문화는 거의 반드시 역사와 결부되는 과정을 거친다. 다른 하나는 문화란 그람시가 말하고 있는 "헤게모니"의 개념처럼 끊임없이 텍스트 생산자와 소비자(수용자) 사이에서, 다른 말로 하자면 지배계급이 퍼뜨리고자 하는 지배이데올로기와 그것을 수용하고 거부하는 피지배계급이 벌이는 치열한 투쟁의 전장이란 것이다.

그와 같은 관점에서 존 스토리는 문화연구가 (대중)문화의 여러 영역들 - 텔레비전, 소설, 영화, 신문과 잡지, 대중음악, 일상생활의 소비 - 을 어떻게 분석하고 있으며, 지배계급이 제공하는 문화 이데올로기들을 어떻게 해체하고 재구성해낼 것인가. 문화연구자들이 어째서 문화실천행위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가를 설명한다. 문화연구란 정치경제학적인 토대 위에서 새롭게 쓰여지는 문화정치학적 실천행위이다. 문화연구자들은 그 자신의 세계에 대한 의미(저항)를 만들기 위해 전개하는 독자들의 투쟁과 늘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연관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대중문화의 전장에서 독자들과 함께 이 세계에서 자신을 위해 더 나은 터전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싸우는 동지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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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에게 보낸 편지 : 어느 사랑의 역사 - 앙드레 고르 지음, 임희근 옮김 / 학고재 / 2007년 11월




앙드레 고르는 내게 있어 마르크스 이후 발견한 가장 매력적인 사상가 중 하나였다. 이반 일리치를 계승한 정치생태학자로서 그의 사상은 산업문명 전반을 반추해보도록 만드는 힘이 있다. 다만 생태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남성(sex)으로써 태어난 남성(gender)'이 여성주의자(페미니스트)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는 것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힘든 일이다. 왜냐하면 ‘생태주의’를 하나의 실천적 이념(정치)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신을 규정하고 있는 모든 문명체계(혹은 문화)를 극복하고 매일매일 새로운 인간이 되겠다는 결심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앙드레 고르가 평생의 반려였던 도린에게 보낸 사랑의 메시지이자 동시에 변명의 편지였던 『D에게 보낸 편지』(학고재, 2007)를 읽고 나는 도저히 그가 될 수 없는 두 가지 이유를 발견한다.

첫째는 정치생태학적인 그의 생각을 한 개인이 옮긴다는 것의 어려움에 대한 고민이다. 산업물질문명에 기초한 자본주의 체제의 변화 없이, 다시 말해 마르크스적 아젠다의 수행 없이 신좌파의 정치생태주의가 추구하는 이상은 실현될 수 없다는 나의 현실적 판단은 여전하다. 다시 말해 나의 가슴은 프루동과 일리치를 쫓더라도 머리는 여전히 마르크스와 그람시의 제자일 수밖에 없다.

둘째는 앙드레 고르처럼 사랑하며 살기 어렵다는 것이다. 1923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나 독일군의 징집을 피해 달아났던 그는 60년대 이후 신좌파의 주요이론가로서 ‘68혁명’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그는 일자리 나누기와 최저임금제를 통한 문화사회로의 전이가 자본주의 산업문명이 말하는 진보(?)의 잔인한 흐름을 근본적으로 되돌릴 수 있는 단초가 될 것이라 여겼다. 당시 이미 그는 80년대 이후 노동을 중심으로 한 산업시대의 종말을 경고했었다.

앙드레 고르는 1947년 처음 만난 영국 출신의 도린과 사랑에 빠져 49년 결혼했고, 아내가 불치병에 걸리자 모든 공적인 활동을 접고 20여 년간 간호했다. 그리고 2007년 9월 22일, 자택에서 아내와 동반 자살하는 것으로 생을 마감했다. 이것이 내가 도저히 그처럼 살 수 없는 이유 중 하나이다.

아내와의 결혼을 결심하기 전,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것이 과연 잘하는 결정인지 알 수 없었다. 앙드레 고르처럼 ‘결혼을 부르주아 계급의 제도’라는 이념적 반대도 컸지만, 동시에 카프카적인 고민 “당신에 대한 나의 사랑은 스스로를 사랑하지는 않는다.”는 고민이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 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던 겁니다.”라고 고백하는 앙드레 고르의 모습은 또한 나의 모습이기도 했다. 근본적으로 모든 것을 회의하고, 버릇처럼 매일매일 허무에 빠져드는 한 남자, 자신조차 해부대 위에 올려놓고 관찰하길 더 즐기는 사람이 사랑이라니. 나는 나조차도 책임질 수 없는데….

그때 나에게 용기를 준 사람은 세 명의 여인이었다. 한 사람은 어머니를 대신해 오랫동안 날 길러준 작은 어머니였다. ‘결혼이란 너만의 선택이 아니라 상대의 선택이기도 하므로 네가 모든 걸 책임지려 하는 건 오만이다.’ 이 세상에서 나와 가장 흡사한 조건에서 자란 내 누이는 ‘누군가를 사랑하게 만들어 놓고, 자신은 그로부터 빠져나가겠다는 건 비겁한 짓이다. 그럴 생각이었으면 애초에 연애를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비난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날 붙잡은 사람은 아내였다. 하지만 내 마음의 결정은 이미 그 전에 나와 있었다.

“만약 당신이 누군가와 평생토록 맺어진다면, 그건 둘의 일생을 함께 거는 것이며, 그 결합을 갈라놓거나 훼방하는 일을 할 가능성을 배제하는 거예요. 부부가 된다는 건 공동의 기획인 만큼, 두 사람은 그 기획을 끝없이 확인하고, 적용하고, 또 변하는 상황에 맞추어 방향을 재수정해야 할 거예요. 우리가 함께할 것들이 우리를 만들어갈 거라고요.”<본문 24-25쪽>

그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도린의 말이 그를 붙잡은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자신이 도린 없이 살 수 없는 상태였기에 저 말에 붙잡힌 것이란 뜻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누구나 확신과 불안 사이를 오간다.

“떠나면서 당신은 돌아오겠다고 약속했지만 난 온전히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나와 함께 사는 것보다 나 없이 살 때 더 수월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요. 당신은 누구의 도움 없이도 이 세상에서 당신의 자리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에게는 자연스럽게 배어나오는 권위가 있었고, 대인관계와 조직에 대한 감각이 있었습니다. 당신은 어떤 상황에서도 편안했고, 또 남들을 편하게 해주었습니다. 만난 지 얼마 안 되어서 당신은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 속이야기를 들어주고 조언을 해주는 사람이 되었지요. 당신은 남들 문제를 직관적으로 놀라울 만큼 빠르게 파악하고, 남들이 자기 자신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본문 30-31쪽>

결혼 전 잠시 헤어져 있는 동안 연인은, 혹은 연인이었던 사람은 상대방이 나보다 우월한 사람이라고 여기게 되는 모양이다. 나는 견딜 수 없는데, 당신은 이 상황을 잘 견딜 뿐만 아니라 심지어 즐길 수도 있다는 상상을 하게 만든다. 그건 아마도 탯줄을 끊고 나온 아기가 어미를 자신보다 우월한 존재로, 아니 절대적인 존재로 바라보는 상황과 흡사하다. 말 그대로 앙드레 고르는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도린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한다.

당신이 나를 알게 된 이후로, 내가 어떤 것보다도 우선시했던 일에서 실패한 것을 어떻게 당신이 감당할 수 있었는지 궁금했습니다. 거기서 벗어나보려고 나는 얼마동안이 될지 몰라도 당분간 몰두할 수 있을 만한 새로운 일에 눈 질끈 감고 뛰어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흔들리지 않았고 조바심을 내지도 않더군요. 당신은 누누이 내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삶은 글을 쓰는 거예요. 그러니 글을 써요.” 내 소명을 뒷받침해주는 것이 당신의 소명인 것처럼요. <본문48쪽>

문득 이 장면에서 나는 오래전에 보았던 영화 <베티블루 (Betty Blue 37.2 Le Matin)>이 떠올랐다. 소설가를 꿈꾸었으나 계속해서 거절당하던 ‘조르그’에게 ‘베티’는 영감의 원천이자 유일한 희망이었다. ‘도린’과 ‘베티’. 두 사람의 차이가 있다면 한 사람은 영화 속 인물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실존했다는 것이다.

당신은 이제 막 여든두 살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당신은 여전히 탐스럽고 우아하고 아름답습니다. 함께 살아온 지 쉰여덟 해가 되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요즘 들어 나는 당신과 또다시 사랑에 빠졌습니다. 내 가슴 깊은 곳에 다시금 애타는 빈자리가 생겼습니다. 내 몸을 꼭 안아주는 당신 몸의 온기만이 채울 수 있는 자리입니다. 밤이 되면 가끔 텅 빈 길에서, 황량한 풍경 속에서, 관을 따라 걷고 있는 한 남자의 실루엣을 봅니다. 내가 그 남자입니다. 관 속에 누워 떠나는 것은 당신입니다. 당신을 화장하는 곳에 나는 가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의 재가 든 납골함을 받아들지 않을 겁니다. 캐슬린 페리어의 노랫소리가 들려옵니다.

세상은 텅 비었고, 나는 더 살지 않으려네.

그러다 나는 잠에서 깨어납니다. 당신의 숨소리를 살피고, 손으로 당신을 쓰다듬어봅니다. 우리는 둘 다, 한 사람이 죽고 나서 혼자 남아 살아가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이런 말을 했지요. 혹시라도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때도 둘이 함께 하자고. <본문 89-90쪽>

앙드레 고르는 “당신을 사랑하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던” 시절의 오만을 사죄하는 길고 긴 편지를 썼다. 그의 회고 속에서 ‘도린’은 여러 모습으로 생생하게 기억된다. “삶이 없는 한 풍요도 없다(There is no wealth but life.)” 하지만 사랑이 없는 삶은 또한 의미가 없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그 순간만 진정한 삶을 사는 것이다. 문득 그 시절의 나를 결심하게 만든 것은 ‘나를 포함한 온 세상을 저주하는 동안에도 어느 한 사람을 사랑하고 있으며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이율배반의 모순’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세상과 나를 연결해주는 유일한 끈이다.

"내 생각에는 어릴 때 좋은 아버지를 두었던 사람이 나중에 좋은 아버지가 되는 것 같다. 나는 아버지와 관계가 좋지 못했기 때문에 좋은 아버지가 되기 어렵다. (...) 우리에게 아이가 있었다면 나는 틀림없이 도린이 아이에게 쏟는 사랑을 질투했을 것이다. 나는 그녀를 독차지하고 싶었다."

앙드레 고르는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다. 나는 정말 그가 정직한 사내였다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사이에서 생겨나는 아이는 축복이라고 세상 모든 인간이 그리 생각하지만 오랫동안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했던 한 사내는 간신히 한 여인과의 사랑을 통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었기에 그 여인을, 그 사랑을 비록 자신의 아이라 할지라도 나눌 수 없었다.

"도린은 나로 하여금 나 자신과 화해하도록 도왔습니다. 이는 성공적이었는데, 그건 내가 도린을 진심으로 사랑했기에 가능했지요."

죽음은 삶의 종말이 아니라 삶의 완성이다. 앙드레 고르는 생의 마지막 순간, 사랑하는 여인 도린 앞에서 정직해지고자 했다. 나에게도 아이가 생겼다. 결혼한지 10년만에, 이제는 더이상 내가 아버지가 될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생각하고 모든 시도를 포기했을 때 자연스럽게 들어선 아이다.

모든 예술가는 세상을 변화시켜 보겠다는 이상을 품었을 때만 예술가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비록 예술가는 아니지만 글쟁이로서 그런 이상을 품었었다. 귄터 그라스의 소설 "양철북"에 등장하는 주인공 '오스카'처럼 오랫동안 나는 자신이 스스로 결정하여 더이상 늙지 않겠노라 결심했었다. 그러나 스스로 나이 먹기로 결정한 순간 갑자기 밀어두었던 세월이 한꺼번에 몰아닥치는 기분이 들었다. 어제까지 17살 어린아이였던 내가 어느날 갑자기 마흔 살의 중늙은이가 되어버렸다. 급격한 파도처럼 이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일어났다.

지난 4월 산 정상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에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아내가 아무래도 임신한 것 같다고 전화를 한 순간 나는 희열과 동시에 알 수 없는 두려움으로 곤두박질쳤다. 세상에 나 같은 인간이, 나 하나도 책임질 수 없고, 사랑할 수 없는 인간이 진정으로 책임져야만 하는 인간이 생겨난 것이다. 나는 아직도 외로운데, 외롭다고 누군가의 품에 징징대고 파고 들 사람이 필요한데, 내 문제만이 아니라 세상의 문제가 여전히 내 가슴을 돌덩이처럼 짓누르는데, 어느날 갑자기 미련없이 이 세상을 하직해도 후회가 없는데, 지금도 비바람불면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데, 흙강아지 마냥 뛰어놀다 낯선 여자랑 눈맞고 싶은데... 이젠 그럴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만 같았다.

어떤 이는 나에게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잘한 일이라고 말하며 축하를 건넨다. 나 역시 집사람과 함께 병원에서 처음 본 아이의 모습을 보며 감동했고, 눈시울이 붉어졌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제 겨우 10센티미터도 안 되는 아이가 몸을 뒤척일 때마다 나도 모르게 입에선 가느다란 탄성이 터져나왔다. 도저히 이 세상 일이란 생각이 들지 않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한 편으론 이제 나에겐 더이상 나만의 여자가 없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혼자 웃었다. '참, 한심한 사내로구나. 너란 남자는.'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앙드레 고르도 그랬구나 생각하니 조금은 위안이 된다.


* 앙드레 고르의 대표작인 "에콜로지카 Ecologica : 정치적 생태주의, 붕괴 직전에 이른 자본주의의 출구를 찾아서 | 생각의나무(2008년)"와 함께 "프롤레타리아여 안녕 : 사회주의를 넘어 | 생각의나무(2011년)"도 최근에 번역되어 출간되었으니 함께 읽어보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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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 : 스타를 통해본 대중문화론 - 에드가 모랭 / 문예출판사(1992년)


 


에드가 모랭의 "스타 - 스타를 통해본 대중문화론"은 대학 다닐 때 리포트 제출 참고용 도서로 구입했었다. 책이 여직 깨끗한 것으로 보아 그 무렵 구입해 한 차례 읽고는 오랫동안 책꽂이에 꽂힌 채 다시 읽게 될 날을 기다려 왔던 모양이다. 얼마전에야 나는 이 책을 덮고 있던 오래된 비닐을 뜯어내고 새로 비닐 포장을 했다. 얼마전 원전 반대 어쩌구하면서 생태 이야기를 한참 떠들어댔는데 책을 비닐로 포장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뭐냐고 화낼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언젠가 나만의 용도로 이 책들을 재활용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서 그러하는 것이므로 널리 양해를 구한다. 에드가 모랭이 이 책을 처음 쓴 것이 1972년의 일이므로 현재의 관점에서 보자면 다소 낡은 스타들이 들먹여지는 감도 적지 않다. 하지만 이 책이 오늘날까지 여전히 유의미한 까닭은 이 책에서 들먹여지는 스타들이 이미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학적인 의미에서, 대중문화적인 차원에서의 스타와 스타시스템은 여전히 온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처음엔 독설가로 널리 알려진 버나드 쇼의 "야만인은 나무와 돌로 된 우상을 숭배하고, 문명인은 살과 피로 된 우상을 숭배한다."는 글이 쓰여 있다. 이 문장은 에드가 모랭이 이 책을 통해 스타를 분석하는 두 가지 키워드를 잘 드러내고 있다. "스타 - 스타를 통해본 대중문화론"은 말 그대로 사회학적인 현상접근법을 이용해 스타의 출현과정과 배경, 스타 시스템이 대중과 대중문화에 끼치는 영향과 수용과정, 그리고 그 의미에 대해 면밀하게 살피고 있다. 물론 이 때의 면밀함이란 영미권 학자들의 그런 면밀함과는 다소 차이를 보인다. 에드가 모랭은 1921년 파리에서 태어난 그의 서술 방식이 가지고 있는 면밀함이란 사료에 입증해 조목조목 따지고 들어가는 실증적인 면밀함이라기 보다는 에세이적인, 다분히 직관적인 방식을 통하고 있다. 예를 들어 그는 "어떤 감독들은 자신의 스타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지만, 오랫동안 할리우드에서는 스타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그들에게 없었다. 스타의 탄생은 영화산업이 체험할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기쁜 사건이었다."란 식으로 스타의 탄생을 표현한다.




그런 점들이 이 책을 읽는 재미이다. 1926년 8월 23일 루돌프 발렌티노가 숨을 거둔 병원 앞에서 두 명의 여자가 자살한다. 그의 죽음은 스타 전성 시대의 절정을 알리는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할리우드가 산업적으로 부추긴 (고전적 의미에서의)스타 시스템은 마릴린 먼로를 마지막으로 종지부를 찍게 된다. 1950년대 중반에 이미 스타들은 - 말론 브랜도, 제임스 딘 등 -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들에 의한 스타 시스템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대공황기에 절정에 달했던 스타 시스템은 TV의 등장과 함께 보다 커다란 스펙타클에 자리를 내어주어야 했다. 사람들은 할리우드가 만들어낸 스타 보다는 좀더 친근한 스타를 원했다. 에드가 모랭은 할리우드와 스타시스템에 대해 정치적인 비판을 가하기 보다는 현상 자체에 주목하여 이를 분석하는 방식을 취한다. 그런 점은 이 책을 읽는 재미를 개인적으로 다소 반감시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 책이 지닌 미덕이기도 하다.


스타는 근본적으로 착하며, 영화 속에서의 이 착함은 사생활에서도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된다. 스타는 자신의 팬들에 대해서 귀찮아해서도, 무관심해서도, 또 부주의해서도 안 된다. 스타는 항상 팬들을 도와야 한다; 스타는 그것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스타는 항상 모든 사람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스타는 권위와 용기 그리고 재치가 있다. 따라서 스타에게서 허물없고 애정어린 또 도덕적인 조언을 구하는 것이다. <본문 71쪽>


스타는 신이고, 관객은 스타를 그러한 존재로 만들어 낸다. 종종 스캔들이 발생한 스타들은 공인으로서 물의를 일으킨데 대해 죄송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어떤 평자들은 누가 그들에게 공인으로서의 지위를 허락했는가 시비를 건다.(거기엔 나 또한 포함되곤 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그들에 반대하든, 찬성하든 그들이 논의의 중심에 놓여지는 순간 이미 그들은 공인으로서의 지위를 획득한다. 만약 그것, 공인의 지위 획득은 오로지 대의민주주의적 표결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대중사회의 속성에 대한 평자들의 몰이해를 반영하는 것일 뿐이다. 1936년의 미 합중국 대통령 선거 때, 프랭크 카프라의 "디즈 씨 시내에 가다"를 본 팬들은 영화 속에서 훌륭한 정치적 태도를 나타낸 디즈 씨(게리 쿠퍼)를 선거에 출마시키려고 시도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오늘날엔 실제로 이런 일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 아놀드 슈왈츠제네거를 보라!


스타는 신(우상)이며, 어느날 인간을 위해 제조되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들이다. 동시에 그들은 상품이다. 스타는 자본으로서의 상품이며, 그들은 희소한 가치로 인정받는 다이아몬드와 같은 존재이므로 자본이라는 개념 자체와 혼동되고, 신용화폐의 가치를 부여받는다. 신이면서 동시에 사물인 스타.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적인 관점은 이 때 매우 유효하다. 스타는 신화(물신, 현신)이지만 단지 몽상이 아니라 힘이 있는 관념이다. 그러나 대중문화란 치열한 투쟁의 현장에서 스타는 종종 압도적인 스펙타클을 앞세워 위세를 드러내고 승리하는 듯 보이나 더이상 과거의 위세를 떨칠 수 없다. 해피엔드의 도그마는 점차 부정당하고 있으며, 영화가 현실의 내러티브를 닮아가는 동안 비극적이게도 스타들은 더이상 신적인 지위를 얻을 수 없다. 그럼에도 스타는 아직 일부의 대중들에겐 여전히 신적인 우상으로 떠받들어진다. 에드가 모랭은 스타의 영향은 청춘기 이전, 남성보다는 여성, 중간 사회 계층에 더 많이 잔존할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에드가 모랭은 스타시스템과 스타를 분석하지만 이에 대해 특정한 정치적 의사를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반영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문장을 통해 이미 많은 문제들을 제기하고 있다.


할리우드의 영화들은 서양을 모델로 한 일종의 국제화의 방향에서, 비부르주아적이고 전(前)공업적인 많은 민족문화에 효소로 작용하는 작품을 세계에 널리 퍼뜨린다. 어떤 혼합이 이루어질까? 다른 요구에 기초한, 즉 사회주의에서 생겨난 다른 문화는 그 영향과 싸울 수 있을까? 어떤 방식으로 싸울까? 우리는 아직 아무런 예측도 할 수 없다. <본분 193쪽>


과연 현재의 우리, 2005년의 우리는 저 예측에 대해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 이 책에는 70여 장에 이르는 스타들의 도판이 담겨 있는데, 개인적으로 이 책의 85면에 있는 알랭 들롱의 사진(크리스티앙 자크의 1963년 작 <검은 튤립>의 스냅 사진)은 너무나 매력적이다.


** 에드가 모랭의 이 책에 기대어

"기호학으로 본 스타시스템의 변화(http://windshoes.khan.kr/612)"란 글을 발표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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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마르크스 그의 생애와 시대 - 이사야 벌린 | 안규남 옮김 | 미다스북스 | 2001


"모든 것을 의심해 보라(De omnibus dubitandum)."


이 말은 칼 마르크스가 가장 좋아했던 좌우명이라고 한다. 모든 것을 의심해보고 이를 다시 재정립했던 사상가 칼 마르크스. 이와 같은 인물에 대해 일대기도 아니고, 평전을 쓴다는 일을 그것도 불과 28세의 나이로 해냈다면, 더군다나 그 책이 60여년이 흐르는 동안 여전히 마르크스에 대한 가장 중요한 평전의 지위를 잃지 않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을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미덕이자 피할 수 없는 난제는 마르크스에 대한 입문자용으로 읽기에는 다소 녹록치 않은 난이도를 지녔다는 점이다.

 

같은 해(2001)에 출간된 프랜시스 원의 『마르크스 평전(푸른숲)』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보다 나은 선택일 수 있다. 물론 누군가 내게 마르크스에 대한 입문서 내지 그의 평전을 추천해달라면 나는 별 고민 없이 우선적으로 이사야 벌린(Isaiah Berlin)의 이 책과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쓴 마르크스의 사상(북막스, 2000)』 - 이 책은 책갈피 출판사에서 나온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상』과 동일한 책이다 - 을 추천하겠다. 물론 캘리니코스의 책은 전체적으로 보자면 마르크스의 생애는 부분적으로 다루는 대신 그의 사상을 개관하는데 치중하는 편이고, 프랜시스 원의 경우엔 마르크스의 생애사에 집중한 편이므로 나름대로 일장일단이 있다고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선 명확한 구분 없이 혼용되는 편이긴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건 평전은 연대기와 전기와 명확하게 구분될 필요가 있다. 평전과 전기, 혹은 연대기를 구분해야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가장 큰 차이점은 평전은 그 용어 자체가 잘 설명해주듯 작가의 비평(批評)적 관점이 삽입된다는 것에 있다. 그렇기에 당대의 뛰어난 평전 작가들은 이미 그들 자신이 뛰어난 비평가이자 역사가이고 저술가였다. 예를 들어 트로츠키와 스탈린의 평전을 저술했던 아이작 도이처, 마리 앙트와네트와 프랑스 대혁명에 대한 뛰어난 글을 남겼던(그 외에도 많지만) 슈테판 츠바이크, 바쿠닌에 대한 평전을 저술했던 E.H. 카 등은 이미 그들 자신이 뛰어난 문장가이자 사상가, 역사가들이었다. 우리는 이들의 평전을 통해 당대의 사회와 시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위인들의 대화를 엿들을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사야 벌린의 마르크스 평전을 읽음으로써 위대한 두 사상가의 대화에 관찰자이자, 적극적인 독해자로서 참가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이 책은 사상사가(思想史家)라는 저자 이사야 벌린의 위치가 잘 드러나고 있다. 그런 까닭에 마르크스의 사상과 이론에 대해 사전 지식이 있는 사람이거나 혹은 이사야 벌린은 마르크스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을까를 견주고, 궁리해가며 읽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그쪽이 훨씬 더 유익하고 재미있는 독서 체험이 될 것이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대중적'이라는 평가가 지탄받을 무엇이 아니듯, 정당한 까닭으로 보다 ’지적인' 수준을 요구하는 독서가 지탄받을 일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마치 칼 마르크스가 노동자를 위한 투쟁을 이야기하면서도 정작 그 자신은 부르주아적 취향을 지녔다고 공격당하는 것과 흡사해 보이는데, 어떤 의미에서건 마르크스는 당대의 교양을 두루 습득한 인물이었던 것에는 틀림없지만, 이것을 당대의 속물적 과시에 연연해하는(이는 또한 마르크스가 평생을 두고 혐오했던 것이기도 하다) 부르주아적 취향과 혼돈할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 교양을 부르주아만의 전유물로 생각하는 경향은 그때나 지금이나 냉소적인(좌파 혹은 노동자는 우아하게 살고 싶어하지 않는다거나 교양을 경시한다는) 착시 현상이다.

 

물론 그럼에도 이 책이 좀 더 대중적인 난이도를 지니지 못한 점, 좀 더 풍성한 내용으로 꾸며지지 못한 점은 다소 아쉬움으로 남는다. 벌린을 위해 약간의 변명을 하자면 이 평전은 그가 28세 때 집필한 것이고, 애초에 그가 집필했던 원고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원고의 분량 보다 많았다.(물론 그렇다고 해서 현재의 평전보다 쉬운 글이 나왔을 것 같지는 않지만) 이 책의 말미에 실린 앨런 라이언은 이사야 벌린의 책이 처음 출간될 당시 “영어권에서는 이런 종류의 주제에 관한 진지한 학문적 연구가 거의 없었다.”고 말한다. 위와 같은 고백을 논외로 하더라도 마르크스에 대한 그간의 연구는 그가 사망했을 무렵, 영어권에서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으며, 그의 사후 러시아혁명을 통해 수립된 이른바 공식적 마르크스주의에서 바라보는 마르크스, 세계대전과 헝가리 사태를 겪으며 재발견되기 시작한 인간적(청년) 마르크스, 다시 루이 알튀세르에 의한 구조적 마르크스에 이르는 여러 연구 방향과 해석에 따라 각기 다른 얼굴의 마르크스가 출현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와 같은 해석과 관점의 차이, 시대의 변천에도 불구하고 이사야 벌린의 마르크스의 평전이 여전히 생명력을 잃지 않는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는 분명 마르크스의 사상 그 자체에서 발견되어야 하겠지만,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은 이사야 벌린의 뛰어난 지적 통찰과 한 인물의 사상과 지적인 흐름을 더 이상 요약하기 어려울 만큼 생생하게 살려내고 있다는 점에 있다. 이사야 벌린은 마르크스를 계몽주의 산물이자 계몽주의에 대한 낭만주의적 반동의 산물로 해석하면서 제1장 서론에서 "모든 것을 의심해 보라(De omnibus dubitandum)."던 마르크스의 모토에 지극히 합당한 인물평을 적고 있다.

 

마르크스는 선천적으로 강하고 능동적이며 실제적인 정신의 소유자였다. 그는 불의에 대한 감각이 남달랐으며 쉽게 상처를 받거나 감상에 빠지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는 부르주아지의 우둔함은 물론 지식인들의 자기만족적인 미사여구와 주정주의도 혐오했다. 그는 부르주아지를 위선적인 데다가 자기 기만적이며 부와 사회적 지위를 얻는 데 골몰해서 당대의 특징적인 사회적 현실을 전혀 보지 못하는 사람들로 평가했고, 지식인은 현실과 동떨어진데다가 진위 여부에 관계없이 하나같이 사람들을 자극하는 데 불과한 잡담이나 일삼는 사람들로 판단했다. <본문 20-21쪽>

 

이사야 벌린의 문장을 읽노라면 그 자신이 마르크스 못지않게 불친절한 사람이면서, 그가 마르크스에 대해 묘사하고 있듯 천재적인 발상에 비해 더딘 문장에 대해 조급해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하게 만든다.

 

생존을 위한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내부의 혼란과 궁극적 붕괴를 향해 막다른 골목으로 치닫는 사회는 반동적이다. 물론 어떤 사회 체제라도 붕괴에 직면하면 구성원들에게 비합리적으로 현체제의 궁극적 안정에 대한 믿음을 심어줌으로써 자신의 실상을 보여주는 징후들을 스스로 감추려 들게 마련이다. 그러나 어떤 사회체제라도 일단 역사의 판결을 받으면 필연적으로 사라질 수밖에 없다.
어떤 것이 구원될 수 없는 데도 구원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우주의 합리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인류는 바로 이러한 고통스러운 투쟁을 거쳐, 그리고 이러한 고통스러운 투쟁에 의해 자신의 힘을 완전히 실현하고자 분투하고 있다. <본문 32-33쪽>

 

위의 문장을 읽으며 이사야 벌린이 바라보는 마르크스의 얼굴이 입체적으로 잡히기 시작했다. 그는 마르크스 못지않게 신랄하고, 핵심으로 곧장 진입해가는(물론 두 사람 모두 불친절하다는 공통점을 지녔으나) 문장을 지녔다. 그렇기에 그는 마르크스의 학설에 대해 "(마르크스의)학설은 적이 보유하고 있는 모든 기지의 무기에 대처할 수단을 갖추고 있어서 직접적인 공격으로는 함락할 수 없는 일종의 거대한 구조물"과도 같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이사야 벌린이 쓴 글 가운데 우리에게도 비교적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우화를 바탕으로 세상 사람들을 고슴도치와 여우로 비교한 글이다. 그는 「고슴도치와 여우」란 에세이에서 "여우는 많은 것을 알지만, 고슴도치는 한 가지 큰 것을 안다."고 말한다. 여우는 영리하고, 교활한 짐승이기에 고슴도치를 기습할 많은 전략들을 무수히 짜낸다. 그리고 고슴도치를 습격할 수 있는 적절한 타이밍을 노려 고슴도치를 덮친다. 그에 비해 고슴도치는 단지 송곳처럼 날카로운 가시를 방패삼아 숲 속 한적한 오솔길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닐 뿐이다. 기회를 틈타 여우는 잽싸게 고슴도치를 덮친다. 그러나 위험을 느낀 고슴도치는 제 몸을 잔뜩 웅크리고 송곳 같은 가시를 곤두세운다. 여우는 고슴도치의 날카로운 가시를 어찌하지 못해 결국 다음 기회를 노리며 물러나 어떻게 하면 고슴도치를 공략할 수 있을까 새로운 전략 세우기에 골몰한다. 여우와 고슴도치의 지혜를 따질 때, 우리는 당연히 여우의 지혜가 뛰어날 것으로 생각하지만 번번이 싸움에서 이기는 건 고슴도치다.

 

이사야 벌린은 이 우화를 통해 사람들을 두 가지 그룹, 여우와 고슴도치로 나누었는데, 여우는 여러 가지 목적을 동시에 추구하며 세상의 그 복잡한 면면들을 두루 살피고, 그런 까닭에 자신의 생각을 하나의 종합적인 개념이나 통일된 비전으로 통합해내기 보다는 모순도 한데 아우르는 편이다. 그에 비해 고슴도치는 세상이 아무리 복잡해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구상으로 종합해내고 통합해낸다. 그에 따르면 이 고슴도치들이 바로 프로이트(무의식), 다윈(자연도태), 마크르스(계급투쟁) 등이다. 그렇다고 이사야 벌린이 절대적으로 고슴도치들의 손을 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벌린이 여우에 속하는 인물로 거론하는 이(아리스토텔레스, 몽테뉴, 셰익스피어, 몰리에르, 괴테, 발자크 등)들의 면면이 또한 그렇게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책을 읽을 때, 특히나 어떤 인물에 대한 평전을 읽을 때 다뤄지는 인물 못지않게 그를 다루고 있는 인물(저자)에 대해서도 주목해야 한다. '이사야'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사야 벌린은 유대계로 구소련 영토였던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에서 부유한 목재상의 아들로 태어나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이 리가에 진군하자 부모를 따라 러시아로 이주, 그곳에서 볼셰비키 혁명을 경험하고, 11세 무렵 영국으로 망명한다. 유대인에겐 특히나 격동의 시대였을 20세기 초엽의 유럽, 라트비아라는 슬라브 문화의 영향 아래 놓인 지역 출신의 인물이 냉전 시대 영국에서 주로 활동했다는 것, 물론 당시 독일의 박해를 피해 영국으로 망명한 유대계 지식인들과 미국인으로 망명한 유대계 지식인들 사이에는 일정한 차이가 있지만 당시 유대계 출신 지식인들의 일반적인 성향(탈민족주의적 세계주의)을 그 역시 어느 정도 공유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전쟁 기간 중 영국 정보부에서 근무하며 모스크바에서 수개월간 머물며 당대의 소련 지식인들과 교유했고(그 가운데 안나 아흐마또바와는 연인 관계였다고 한다), 전후에는 사상사 연구에 집중하면서 그는 자유주의자로서의 면모뿐만 아니라 러시아 문화에 대한 애정과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그 자신의 삶의 역정이 한 시대의 다양한 면모를 반영하고 있는 이사야 벌린, 그 자신은 마르크스주의자라거나 정치적 좌파로 구분될 수 없음에도 (만약 그런 분류가 가능하다면 우리는 그를 우리 사회에 산재해있는 속류 우파들과 다른 진정한 의미의 ‘리버테리언’이었다고 생각한다), 칼 마르크스에 대한 균형감각과 사상사적 통찰을 통해 우리에게 마르크스와의 격조 있는 지적 대화에 동참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 이사야 벌린의 이 책은 1982년 신복룡 선생의 번역으로 평민사에서 출간된 적이 있다. 다만 이 책을 선택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두 가지를 고민해봐야 한다. 첫째는 이 책이 마르크스와 그의 사상에 대한 약간의 사전 지식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오탈자가 종종 눈에 띄고, 요사이 유행하는 작은 판형(이 책은 110X190)이다 보니 펼쳐놓고 밑줄 쳐가며 읽는 습관이 있거나, 좀 오랫동안 생각하며 읽기에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다. 일부러 오탈자에 신경 쓰며 읽는 편은 아니지만 이왕 눈에 띈 오탈자가 몇 개 있어 이야기해보면  57쪽 "유대인 출신인 시인하이네"에서 시인과 하이네는 띄어 써야 하고, 276쪽의 "마르스크"는 "마르크스"로, 451쪽의 사진 캡션에 들어간 "리프크네이트"는 "리프크네히트"의 오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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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분에 읽는 프로이트 - 루스 베리 | 이근영 옮김 | 중앙M&B(2003)


남들 앞에서 잘난 척 주워섬기기 위해 굳이 이런 류의 책을 볼 필요는 없다. 나의 경험상 적당히 어려운 말 한 두 마디를 하고 난 뒤, 다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면 분명 대화 상대는 당신이 실제로 알고 있는 것 이상을 알고 있으리라 믿어줄 테니까 말이다.  "30분에 읽는 ~" 시리즈 전편을 읽어볼까 생각 중이다. 돈이 썩어서 그러는 건 아니고, 편하게 정리된 요약본을 읽는 유익함이란 것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러는 편이 낯선 길을 헤매는 것보다 확실히 나은 선택이다. 그러니까 이런 책을 본다는 건 꼬시고 싶은 여자 친구를 태우고 드라이브 나갔다가 모르는 길 앞에서 자신있게 아는 척 하다가 땀 삐질삐질 흘리며 개망신 당하는 것보다 모르는 걸 솔직히 인정하고, 네비게이션을 이용하던지 아니면 주변 사람에게 물어보는 편이 더 낫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게다가 "프로이트"에 대해 알게 된다고 해서 인생에 특별한 보탬을 받을 사람은 또 얼마나 되겠는가. 자신이 어렸을 적에 억압된 성적('쩍'이다 '적'이 아니고) 본능에 의해 고정된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는 주장을 알게 되고, 알고 보니 억압된 성적 본능이 자기 어머니를 애인으로 삼고 싶고, 아버지를 연적으로 심각하게 고려한 결과라는 식의 주장을 알게 된다고 억압된 성적 본능에 대한 치료가 한순간에 이뤄질리도 없다(실제로도 프로이트에겐 이런 류의 비판이 자주 나온다). 앞서 나는 이 시리즈를 계속 볼까 궁리 중이라고 말했는데, 현재까지 이 시리즈 가운데 모두 4권을 읽었고, 3권이 더 대기 중이다. 노암 촘스키,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니체,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읽었고, 시몬느 드 보봐르, 다윈, 칼 구스타프 융이 대기 중인 책들이다.

 

이 가운데 노암 촘스키는 꽝이었고, 카를 마르크스는 최고였고, 지금 말하려는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그저 그랬다. 니체는 마르크스보다는 별로였지만 프로이트보단 좋았다. 물론 내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건 아마도 촘스키를 제외하곤 내가 사전지식을 좀더 갖고 있거나 개인적으로 좀더 친숙하게 여기는 정도에 비례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다시 말해 나는 마르크스랑 가장 친하고, 그 다음에 니체, 그리고 프로이트, 그 친구하고는 사이가 별로 안 좋다는 말이다. 개인적으로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사상가로 나는 예수, 석가모니, 공자, 마호메트 같은 종교적 인물들을 제외하고,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니체, 지그문트 프로이트 그리고 찰스 다윈을 꼽는다. 이들이 왜 중요한가를 논증하는 자리가 아니므로 프로이트에 대해서만 조금 이야기를 해보면, 프로이트가 주장한 정신분석이란 무엇인지를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프로이트에 의해 창시된 정신분석은 마치 북핵 문제에 대한 미국의 일관된 원칙(CVID, 완전하고, 증명가능하며, 되돌이킬 수 없는 핵 해체)처럼 우리의 인간 이해를 되돌이킬 수 없는 방식으로 바꾸어 놓았다. 다만, 거기엔 CVID의 두 가지 원칙이 빠질 수밖에 없다. "완전하고 증명가능하며..." 완전하고 증명가능한 정신분석이 과연 가능하겠는가? 바로 이 부분때문에 프로이트 자신도 고민했고, 그런 고민의 흔적, 프로이트 스스로가 학문적 엄밀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한 나머지 "정신분석" "학(學)"를 배제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프로이트의 덕분으로 무의식 속의 내(과거)가 나를 지배하며, 무의식 속의 정체성은 내 의식에 비친 모습과는 다를 수 있다는 점 등 이제는 너무나 일반화되어 상식처럼 받아들여지는 생각들을 접하게 된다. “무의식, 억압, 리비도” 등의 중심개념이 우리들로 하여금 인간 이해의 전제 조건이 되도록 한 것은 프로이트 이후의 일이다.

 

프로이트는 오스트리아의 의사 J.브로이어의 연구 - 심한 히스테리에 걸린 한 소녀에게 최면술을 걸어 병을 일으키게 된 시기의 사건에 대해 얘기를 시켰는데, 그것으로 소녀의 병이 완쾌되었다. - 즉, 마음속 깊이 억눌려 환자 자신은 의식하지 못하는 마음의 상처가 병이 되는 원인임을 알아낸다. 그는 마음이 신체적 변화(질병)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고, 히스테리 증상은 의식의 영향을 받지 않고 무의식 속에 억압되어 있던 마음의 갈등이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육체적인 증세로 변형되어 일어나는 정신적 에너지로 생기는 병임을 알아내었다. 따라서 히스테리를 고치려면 무의식 속에 눌려 있던 감정을 정상적 통로를 통해서 의식계(意識界)로 방출(catharsis)하면 된다는 이론을 세우게 된다.

 

프로이트는 히스테리의 원인이 성적(性的)인 억압에 있다고 보았고, 이는 유아기 때부터 있는 것이라고 주장해 많은 논란에 휩싸이고, 지금까지도 비판의 대상이 되는 일종의 결정론적인 단계까지 나아간다. 프로이트에 대해 쏟아지는 비판들은 이외에도 그가 핍박과 천대를 오래 받은 유대인이기 때문에 그의 학설은 유대인에게 특히 강한 것을 침소봉대했다거나, 인간의 정신과 행동에 대해 성을 너무 강조했다는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특히 정신분석학회 초기의 수제자들이자 열렬한 신봉자였던 아들러, 융 등에 대해 그는 가부장적인 권위로 일관했다. 결국 이들은 인간을 움직이는 법은 성 에너지가 아니라 ‘권력을 향한 의지’ 또는 성이 아닌 힘을 상정(想定)하여 자기 나름대로의 정신분석을 수립하며 프로이트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20세기를 떠들썩하게 만든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어쩌면 프로이트 자신만의 콤플렉스가 아니었는가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프로이트 자신은 정신분석을 심리학과 생물학에 뿌리를 둔 과학으로 신봉했으나 정신분석이 과학으로 성립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그의 사후에도 여전히 많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앞으로 인간의 정신세계에 대한 과학적 탐구가 반드시 프로이트에 의존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의문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문학과 예술, 나아가 문화현상, 사회현상에 대한 탐구를 꿈꾸는 이에게 있어 누구도 프로이트의 사상을 피해갈 수는 없다. 물론 프로이트의 이론과 상관없이 이 책 "30분에 읽는 프로이트"가 유용한가? 좋은 책인가? 에 대한 의문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정가는 5,500원이고, 알라딘에서 10% 할인해주니 4,950원 게다가 무료 배송에 다시 8%의 마일리지가 붙어 400원이 쌓인다.

 

만약에 당신이 프로이트에 대해 어떤 책을 읽는 것이 좋을까 상의하기 위해 친구에게 전화를 걸고(그럴 친구가 있다면 말이지. ^^;;;), 함께 만나 서점을 돌아보고 테이크 아웃 커피전문점에 들러 친구에게 커피 한 잔을 사준다고 치자. 어떤 것이 더 적은 가격에 큰 효용을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불문가지다. "30분에 읽는~" 시리즈가 괜찮은 점은 또 있다. 열린 책들에서 프로이트 전집 전 15권 세트가 나오고 있다. 물론, 프로이트를 잘 알고 제대로 공부하고 싶다면, 게다가 돈도 많다면 "30분에 읽는~" 시리즈 같은 건 쳐다볼 필요도 없다(과연 그럴까? 흐흐). 어쨌든 이런 전집을 읽기 전에 워밍업 단계로 읽어도 좋고, 나처럼 프로이트 전집을 읽고 싶지는 않지만 그의 중요 저작 몇 권은 읽어둬야겠다 싶은 사람에게는 저렴한 가격에 괜찮은 선택일 듯 싶다. 참고로 현재 나는 프로이트 전집 가운데 "꿈의 해석, 정신분석강의, 정신분석학 개요" 3권을 구입했다. 앞으로 한 두 권 정도 더 구입해 읽을 생각이지만 프로이트 저작을 직접 읽는 일을 더 할지는 미지수다.

 

결론삼아 한 말씀 드리자면, 당연하게도 이 한 권으로 프로이트를 다 알 수 없다(그건 프로이트가 너무나 대단하고 위대한 사상가라서 그렇다기 보다는 프로이트 자신이 주장하듯 한 인간을 온전히 우리가 알 수 있을까? 무얼하든 어차피 한계는 있다). 하지만, 이 한 권으로 출발하는 건 꽤 괜찮은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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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연구와 문화이론 - 존 스토리 | 박이소 (옮긴이) | 현실문화연구(현문서가) | 1999


존 스토리의 "문화연구와 문화이론"은 문화이론을 개괄하는 입문서이다. 이 방면의 개론서로 이 책을 포함해 김정은의 "대중문화읽기와 비평적 글쓰기", 원용진의 "대중문화의 패러다임", 김창남의 "대중문화의 이해"를 포함해 모두 4종을 읽었고 다른 책들에 대해선 차례차례 서평한 바 있으니 문화이론 입문서 가운데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들은 대체로 읽은 셈이다. 그러니 혹자는 그렇게 묻고 싶을 지도 모르겠다. 어느 걸 읽는 것이 가장 좋으냔 의문을 품을 법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무엇을 읽든 별상관없을 듯 싶다. 대체로 4종의 책이 각각의 장점과 단점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김정은의 "대중문화 읽기와 비평적 글쓰기"는 난이도면에선 가장 쉽지만 쉬운 만큼 간추린 부분이 많기 때문에 다른 책들의 도움을 얻어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물론,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루카치, 벤야민, 하우저 등의 다른 저작들을 읽은 분이라면 도리어 그것이 굉장한 장점일 수 있다). 원용진의 "대중문화의 패러다임"은 앞서 김정은의 책에 비해 심도 있는 접근을 꾀하고, 국내 상황을 함께 다룬다는 점이 장점이다. 그런데 문제는 번역문보다 문장이 난삽하고, 어떤 예시는 적절치 않아 보인다는 단점을 지닌다. 그에 비해 김창남의 "대중문화의 이해"는 문장이나 기타 한국적 상황들을 다룬 점에서는 원용진의 책보다 뛰어나지만, 해외이론 소개 편에서 생략된 부분이 많다는 단점을 가진다. 이에 비해 존 스토리의 "문화연구와 문화이론"은 비록 부분적으로 문장이 어색한 부분은 있지만, 원용진의 것보다 어떤 면에선 정리도 잘 되어 있고, 문장도 상대적으로 덜 난삽하다. 게다가 한국적 상황이나 예시를 고려할 까닭이 없기 때문에 순전히 서구의 문화이론을 이론적으로 접근하려는 목적으로 읽기엔 가장 좋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4종의 책을 모두 읽을 까닭은 없지만, 어느 한 종만 읽기 보다는 2종 정도를 서로 대비해가며 읽는 것이 좋으리란 생각이다.

 

이 책의 원제가  "An Introductory Guide to Cultural Theory and Popular Culture"인데 영어명이 의미하는 바는 '대중(긍정적 내지는 중립적인 의미에서의 대중)문화와 문화연구에 대한 예비(입문)단계의 가이드'이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문화연구와 문화이론에 대한 입문서'란 뜻이다. 그런 까닭에서일까 이 책의 목차는 그대로 문화연구와 문화이론을 공부하는데 가장 적절한 커리큘럼이며, 다른 입문서들도 그 순서나 내용 배치면에서 존 스토리의 "문화연구와 문화이론"의 배치와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한 번 살펴보도록 하자.

 

우선 "1장 대중문화란 무엇인가"에서는 대중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개념들을 정의하고 설명한다. 대중문화는 "대중+문화"가 합쳐진 말이다. 대중문화란 무엇인가 알기 위해선 먼저 문화가 무엇인가 알아야 한다. 저자는 "문화"를 설명하기 위해 문화비평가 레이먼드 윌리엄즈의 정의로부터 출발한다. 윌리엄즌는 문화를 넓은 의미에서 세 가지로 정의하고 있다. "1. 문화는 지적, 정신적, 심미적인 계발의 일반적인 과정, 2. 한 인간이나 시대 또는 집단의 특정 생활 방식, 3. 지적인 작품이나 실천 행위, 특히 예술적인 활동을 일컫는 용어로 사용될 수 있다고 말한다. 존 스토리는 대중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로 이데올로기를 지목하고, 이데올로기의 다양한 정의와 쓰임새를 소개한다. 우리는 대중문화라는 단일한 용어로 표기하지만 영어 표기에서 대중문화는 mass와 popular로 구분된다(이에 대해선 전에 다른 서평에서 소개한 바가 있다).

 

이어 "2장 문화와 문명의 전통"에서는 우리에게도 뿌리깊이 고정되어 있는 문화 관념인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충동을 이야기한다. 19세기 이후 정치적 자유주의, 산업화와 도시화로부터 비롯된 대중의 출현은 그동안 고급문화의 생산자이자 주된 소비자였던 사회의 상층계급을 크게 긴장시킨다. 산업화와 도시화의 결과 출현한 여러 미디어들(당시엔 주로 신문, 잡지였으나 점차 대중교육의 확대, 라디오, TV의 출현 등)로 인해 소위 대중들이 즐기고 향유하는 문화가 생겨났다. 이에 대해 매튜 아놀드 등을 비롯한 당시의 지식인들은 대중문화가 문화 전반에 걸쳐 치명적인 해악을 끼친다고 보았고, 이를 분리하거나 대중들을 계몽하여 고급 문화의 향유자로 변화시킬 것을 주장한다. 이런 논쟁은 매튜 아놀드 이후 리비스주의로 넘어가면서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는 전세계로 널리 전파된다. 이를 통해 문화를 고급문화와 대중(저급)문화로 구분하는 이분법이 생겨난다. 그런데 과연 문화의 고급과 저급을 구분하는데 대중이란 잣대가 적당한 것일까?
  
이 지점에서 존 스토리는 영국 출신의 학자인 까닭일까? 우선적으로 문화연구의 여러 경향들 가운데 우선적으로 영국의 버밍엄대학 현대문화연구센터의 학자들이 일군 "문화주의"를 3장으로 끌어낸다. 마르크스주의를 먼저 끄집어낸 다른 책들과는 약간 다른 점인데, 헤게모니 이론을 마르크스주의에 포함시킨다는 점에서 보자면 그의 이런 구분은 나름대로 적당해 보인다. 문화주의는 영국 피지배계급의 역사적 경험을 정리하면서 전개된다.1950년대 말엽부터 주로 영국의 이론가들(Richard Hoggart, Edward. P. Thompson, Raymond Williams, Stuart Hall)에서 부각되기 시작한(영국의 문화 연구는 전후 영국의 특수한 상황에 뿌리를 두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영국은 자본주의적 산업 생산 양식의 부활, 복지 정책의 수립, 그리고 동구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서구 세력의 결집 등으로 인해 변모하는 영국적 상황의 반영이기도 하다. 전쟁 전의 영국과는 단절된 듯한 변화들, 현대화 및 미국화된 대중문화, 노동계급의 생활 조건이나 이데올로기가 중류계급과 차별성이 없어지면서) 연구 전통이다. 문화주의의 핵심적인 전통은 문화의 수동적 소비보다 능동적 생산, 즉 인간의 실천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구조주의와 대립되는 특징을 가진다.

 

사회변혁의 주체인 노동계급이 즐기는 대중문화가 노동계급 형성 및 유지에 어떤 역할을 하는 가를 논의하려 했다. 문화주의에 속하는 이들은 대중문화의 주체인 대중을 새롭게 해석하여, 대중이 수동적이고 주어진 상황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로 파악하는 것에 반대했다. 문화주의자들이 말하는 피지배계급은 단순히 계급적인 축(항상 노동계급 이상의 의미를 지님)으로만 설명될 수 없는 것이었다. 문화라는 영역은 물질적 토대에서 상대적인 독립성을 누릴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물질적 토대에 개입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문화주의는 구조보다는 인간에, 이데올로기보다는 인간의 경험에, 지배계급의 전략보다는 피지배계급의 전술에 관심을 갖는다. 문화주의는 대중이 문화적 실천을 통해 자신들의 계급적 영역을 구축해가는 능동적인 모습을 찾으려 시도한다.

 

4장에서는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를 함께 다루고 있다. 구조주의는 이론이면서 동시에 방법론이기도 한 학문 분야를 가리키는 말이다. 구조주의는 소쉬르의 언어학적 규칙과 개념을 기초로 다양한 문화분석에 적용되어 많은 성과를 낳았으며, 현재까지도 문화분석 툴로써 여러 비판들이 있으나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방법이다. 구조주의의 이론적 경향을 보여주는 특성은 한 마디로 ‘구조(structure)’라는 말 자체에 들어있다고 할 수 있다. 구조란 겉으로 드러나는 표피적 현상의 밑바닥에 존재하면서 그 표피적 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체계라 할 수 있다. 어떤 것이든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사건이나 행위에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심층적인 원리나 체계가 존재하는데, 그것이 바로 구조이다.

 

구조주의자들은 어떤 문화적 텍스트나 행위가 그 자체로 본질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 텍스트나 행위의 내부적 혹은 외부적 요소들이 맺고 있는 관계(즉 구조)에 의해 그 의미가 생성된다고 보았다. 이를 가장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문화현상이 바로 언어다. 서로 다른 언어의 선택, 서로 다른 방식의 언어 배열은 서로 다른 현실을 만들어낸다. 이런 맥락에서 구조주의자들은 ‘언어가 현실을 구성한다’고 주장한다.(구조주의적 입장에서의 문화 분석 1) 문화적 표상이 특정 방식으로 기능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사회의 구조를 설명하고 2) 문화적 표상이 의미를 내는 방식 - 의미 체계 -를 분석하고, 3) 그것의 이데올로기적 영향, 즉 주체 형성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다.) 이 책에서는 소쉬르, 레비 스트로스와 롤랑 바르트를 소개하면서 구조주의 이론이 어떻게 미국 서부극 장르에 숨겨진 신화를 드러내는가 실례(윌 라이트)를 통해 보여준다.

 

5장 "마르크스주의"에서는 고전적 의미에서의 마르크스주의가 문화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가에 대해 설명한다. 사실 마르크스 자신은 문화론이라고 명확하게 내세운 하나의 이론 체계를 만들어내지 않았다. 그러므로정확히 말하면 마르크스주의 문화론이라는 것은 없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반대로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지 않은 문화이론도 없다. 마르크스는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있는 진술을 남기고 있는데, “토대-상부구조의 문제(base and superstructure)”의 문제 - 사회를 이루는 두 요소, 즉 경제적 기초(토대)와 사회적 의식의 모든 형태들인 상부구조의 관계를 어떻게 보는가의 문제로 마르크스주의 문화론에 있어 문화에 대한 해석이 달라진다. 문제의 핵심은 토대가 상부구조를 결정(determination)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에 있다.

 

경제결정론(기계론적 결정론, 속류 마르크스주의) - 상부구조의 영역에 속하는 문화는 아무런 자율성을 지니지 못하며 단지 토대가 되는 경제구조의 단순한 반영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는 반영이론(reflection theory), 모든 문화는 그것을 생산한 사회의 경제구조의 단순한 반영일 뿐이다. 대중문화의 의미는 단지 그것을 생산한 경제구조에 의해 이미 결정되어 있다. 예술성보다 구호성을 강조했던 프롤렛쿨트(proletkult)같은 교조적인 예술론도 이런 기계적 결정론의 맥락에 있다.

 

이데올로기는 일정한 ‘허위의식’을 조장하여 현실을 왜곡하고 은폐하는 기능; 권력을 지닌 계급이 자신의 이익을 정당화하기 위해 현실을 포장하는 이념이다. 지배계급에 의해서 생산되는 대중문화의 내용은 지배계급의 지배를 용이하게 하고 대중들이 계급적 갈등과 불평을 느끼지 못하는 허위의식을 갖게 된다. 사회변동의 주체가 되어야 할 노동계급이 허위의식으로 가득 찬 대중문화를 즐기게 된다. 계급문화론, 이데올로기는 계급의식이 생겨나지 못하게 막는 역할과 지배방식을 은폐하는 역할을 한다. 문화적 텍스트(종교, 법, 도덕, 관습, 책 등)는 이데올로기의 무의식적 반영물이다.

 

여기에 루카치를 비판적으로 계승한 프랑크푸르트 학파, 알튀세르의 주요 개념들, 그리고 문화주의와 구조주의, 마르크스주의를 한 데 아우르고, 아우를 수 있는(개인적인 생각이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을 두루 설명하고 있다. 사실 6장에서 다루는 "페미니즘"은 구조주의 직후 내지는 7장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에 나왔어야 적당할 수 있을 듯 싶다. 페미니즘의 정치학은 몰라도 페미니즘 문화학은 확실히 이들로부터 영향받은 바가 크다. 페미니즘은 대중문화 속에 숨겨진 가부장제 이데올로기 구조를 분석해낸다. 8장은 문화연구의 전체적인 부분을 다룬다. 여러 이론들엔 그 나름의 장단점이 있으며, 모든 이론이 그러하듯 완벽한 분석틀이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떤 의미에서는 대중문화를 옹호하려는 측과 대중문화를 비난하려는 측 사이에 벌어지는 오랜 논쟁의 결과인 듯 싶다. 문화이론를 어떻게 바라보든 문제는 한 가지다. 대중문화는 지배 이데올로기와 피지배 계급 사이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공방전의 장이며, 이 싸움은 계급 혹은 문화적 이질성이 존재하는 한 계속될 거란 사실이다. 누가 이길 것인가? 글쎄, 그건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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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분에 읽는 마르크스 - 질 핸즈 | 이근영 옮김 | 중앙M&B(2003)


이런 류의 책들을 접할 때마다 늘 하는 말이지만 너무 큰 기대는 금물이다. 그러나 이 책의 경우엔 기대해도 괜찮다. 사실 이 시리즈의 제목은 맞지 않는다. "30분에 읽는 마르크스"라니 그게 가능하다면 누가 골머리를 앓겠나. 비록 이 시리즈가 150쪽 내외의 짤막한 반토막짜리 책일지라도 30분에 읽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이 부분은 필경 과장광고에 속하리라. 그보다는 이 책의 영어 원제명인 "Marx : A Beginner's Guide(마르크스: 초보자를 위한 입문서)"가 적합하다. 30분만에 읽는 건 불가능하지만 2-3시간 투자하면 간략하면서도 의미심장한  마르크스에 대한 기초 지식을 쌓을 수 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므로 자꾸 말하면 입 아픈 이야기이긴 한데, 이런 책의 성패는 짧은 분량에 얼마나 많은 지식을 우겨넣었는가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런 책 한 권으로 모든 것을 끝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아무리 책 읽기를 좋아하는 이라 해도 세상의 모든 사상가들을 죄다 깊이있게 읽을 수는 없지 않은가. "공부에는 왕도가 없다"는 충고대로 그런 공부를 할 사람은 이런 책을 읽은 뒤 다음 단계로 넘어가면 된다. 게다가 이 책은 다음에 뭘 읽으면 좋을지도 충실히 알려준다.

 

자, 다시 핵심으로 돌아와서 문제는 이 책의 저자가 칼 마르크스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그가 주장한 정치경제학의 이론들 가운데 핵심 개념들을 얼마나 잘 요약했는가, 그리고 충실하게 정리했는가가 관건이다. 그 부분에 한해서 나는 별 다섯을 주고 싶다. 게다가 이 책을 번역한 이근영의 "옮긴이의 글"도 아주 매력적이며, 이 책이 지닌 미덕에 그럴 듯하게 핵심을 잘 지적하고 있다.

 

20세기 역사는 마르크스의 유산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마르크스가 죽은지 1백년도 안 되어 세계인구의 반은 마르크스주의를 내세우는 국가들의 깃발 아래 살았었다. 최근의 우리 민족사도 마르크스주의와의 관련성 밖에서는 설명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마르크스를 예수 그리스도 이후 세계사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으로 꼽는데 별 주저함이 없을 정도로 그의 영향은 깊고 그 폭도 넓다. 그리고 그 영향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본문 6쪽> 중에서

 

윗 부분이 요약본을 통해서라도 우리가 칼 마르크스를 읽어야 할 이유일 것이다. 그럼에도 칼 마르크스의 사상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그가 골치아픈 철학자이자 숫자라면 머리에 쥐가 날 경제학자를 겸하고 있다는 사실, 게다가 독일 낭만주의의 교양에, 헤겔 철학의 계승자란 점을 고려한다면 더더욱 읽어내기 난망한 사상가다. 그럼에도 이 짧은 책은 그에 대해 완전한 이해까지는 아니어도 그에 대한 이해의 첫 단계를 그럴듯하게 해치운다. 옮긴이는 "옮긴이의 말" 끝부분에 자신이 생각하는 마르크스 사상의 핵심을 살짝 드러낸다. 
 

유명한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중 한 사람인 칼리니코스는 "마르크스 사상의 진리를 인정하는 사람들은 단순한 지적 개입으로만 만족해서는 안된다. 단지 세계를 관찰할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가 그러했듯이 자신을 노동자계급의 삶과 투쟁 속에서 혁명 정당 건설이라는 실천적 과제 속으로 던져 넣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마르크스를 이해하고 마르크스를 읽고자 하는 노력은 결국 세계를 변화시키려는 노력이다. 마르크스의 말처럼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본문 9쪽>

 

이 책은 가이드북이 갖춰야 할 기본적인 덕목에 매우 충실하게 짜여져 있는데, 이는 이 책의 저자 "질 핸즈"가 현재 성인교육전문가로 활동한 경험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싶다. 우리에게 성인교육이라 하면 먼저 성인방송, 성인전용콘텐츠를 떠올릴지 모르겠으나 영국의 학문적 전통 아래에서 성인교육이라 함은 문화주의 문화연구 그룹의 주요 구성원들이 성인교육전문가로 먼저 활동했었음을 상기해야 한다. 이 책은 모두 7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칼 마르크스를 이해하기 위한 첫번째 코드로 그가 살았던 시대와 그의 삶을 살핀다. 마르크스가 공산주의에 대해 처음 생각해낸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공산주의에 대한 실제적이고 과학적인 사상을 개발했고, 이에 대해 책을 쓰고, 널리 알기 위해 애쓴 실천가였다. 마르크스는 1818년 5월 5일 당시 프로이센에 속했던 라인주에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무렵 유럽에서는 반유대주의 정서가 매우 강했다.(오스트리아에서는 심지어 유대인은 장남만 정식으로 혼인할 수 있는 악명높은 반유대인 법을 제정하기도 했다. 그런 까닭에 당시 태어난 많은 유대인들이 본의아니게 정식 혼인 관계에서 태어나지 못한 사생아가 되고 말았다.)

 

산업화와 근대화가 추진되면서 거대한 도시가 건설되기 시작했고, 많은 이들이 전통적인 농업과 수공업에서 도시 산업 노동자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농촌 지역 역시 실업률이 점차 높아졌고, 공동경작지를 빼앗고, 오랫동안 가난한 농부들에게 속해 있던 방목권 역시 박탈당했다. 결국 농촌 지역의 빈곤은 이들이 도시 지역의 값싼 노동력으로 흡수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들은 어떤 조건을 감수하고서라도 일자리를 얻어야만 했으므로 보건 시설이 전혀 없는 빈민가에서 살아야 했고, 안전장치도 없는 기계를 다뤄야 했다. 미성년자는 물론 아동들까지 노동에 나서야 했던 탓에 당시 노동자들의 평균 수명은 19세에 불과했다. 마르크스는 그런 시기에 대학에서 헤겔 법철학을 전공했고, 급진적인 사상을 제시한다. 그런 탓에 대학 교수가 되지 못하고, 프랑스, 벨기에, 프로이센에서 추방당하고 만다. 결국 마르크스는 1849년 런던으로 이주한다. 그는 예니와의 사이에 7명의 아이를 두었지만 이들 가운데 3명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30분에 읽는 마르크스"는 이렇듯 마르크스의 생애와 그의 사상, 이론의 주요 쟁점 및 마르크스가 지닌 의미의 현재성을 한 권의 책에 아우른다는 벅찬 주제에 감히 도전한다. 그리고 아쉬움이 없을리 없지만, 성공적으로 해내고 있다.

 

예를 들어 3장에서는 마르크스에게 영향을 끼친 사상가들을 살펴보고 있다. 마르크스 이전의 유물론 철학자들은 오랫동안 신이 존재하는가? 신의 존재를 과학적 방법으로 입증할 수 있는가에 대해 열띤 논쟁을 벌였다. 당시의 주된 과학적 발전이 주로 수학과 역학 분야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들은 사회를 불변의 과학적 법칙을 따르는 고정된 것으로 파악했다. 이런 철학의 영향을 받아 당시 사람들에게 사회 속의 위치 역시 불변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이들로부터도 많은 영향을 받았고, 이들의 개념 가운데 상당수를 받아들여 더욱 발전시켰다. 그 가운데 특히 마르크스에게 깊은 영향을 준 사람은 헤겔이었다.

 

헤겔은 인류문명이 지적, 윤리적 진보를 통해 이루어졌다고 믿었다. 그가 주장한 진보는 신성한 어떤 존재의 개입이 아닌 인간성에 내재된 합리적 정신(헤겔의 용어를 빌자면 "세계정신")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세상의 모든 진보(발전과 변화)는 변증법적인 긴장에 의한다고 보았는데, 서로 다른 두 개의 운동(관념)이 벌이는 갈등의 결과란 것이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변증법적 개념을 차용해 관념이 물질적인 경제활동으로부터 발전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인간이 살고 일하는 환경이 인간의 생각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물론 오늘날의 우리가 생각하기엔 헤겔의 주장이나, 마르크스의 주장은 어찌보면 매우 상식적인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당시로선 매우 놀랄 만한 급진적 사유였다. 세상(사회)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니... 귀족과 부르주아들이 얼마나 놀랐겠는가?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체제 아래 인간을 소외시키는 것은 "신"이나 "정신"이 아니라 "돈"이라고 주장한다. '돈은 인간 노동과 삶을 소외시키는 정수이며, 인간이 돈을 숭배하면 할수록 돈이 인간을 지배하게 된다"고 말한다. 마르크스가 이런 생각을 기초로 어떻게 물질 세계가 정신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가를 연구한 것이 바로 '변증법적 유물론' 이다.


 

노동은 부자들을 위해서는 멋진 것을 만들어내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불행만을 만들어낸다. - K. 마르크스 『경제학-철학초고』

 

마르크스가 파악한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은 돈, 자본, 상품에 대한 물신 숭배이다. 1) 돈에 대한 물신 숭배는 노동자들을 속이는 환상으로, 노동자들은 돈이 노동의 목적이라고 생각하여 자신들의 가치를 돈으로 계산하게 된다. 2) 자본에 대한 물신 숭배는 자본을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으로, 그것을 만들어낸 노동에게는 아무것도 빚진 것이 없다는 믿음을 말한다. 3) 상품에 대한 물신 숭배는 어떤 상품이 교환가치와는 관계없이 본질적으로 다른 상품 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믿음을 말한다(베블런의 『유한계급론』을 참조하시라).

 

인간 ‘소외’의 개념은 헤겔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헤겔이 주장하는 소외란 인간이 ‘세계정신’의 일부가 되고자 하기 때문에 생겨난다고 보았다. 헤겔에게 있어 소외란 거의 종교적 개념에 가까운 것이었으나 마르크스는 이를 경제적 개념으로 규정했다. 노동자들은 자신이 만드는 상품으로부터 이득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상품으로부터 소외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산물을 ‘자신들 외부에 있는 낯선 것’으로 본다고 말한다. 노동자들은 공장시스템에 의해서 소외되고 비인간화된다. 공장시스템은 노동자들의 노동으로부터 잉여가치를 착취하는 방법이고, 시스템은 어떻게 일할 것인가에 대해 노동자들의 주체성을 빼앗아간다.

 

소외는 자본가들의 착취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나 노동자들은 자신이 착취당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노동자들은 감추어진 자본주의 시스템 탓에 자신들이 생산한 잉여가치의 권리를 자본가들이 갖고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에 대해 별다른 이견이 없거나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인다(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과 연결됨).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소비자들에게도 자기 스스로를 노예로 만드는 욕망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을 속인다고 보았다. 노동자들이 생산하는 상품은 결국 노동자들도 노예로 만든다. 상품을 살 수 있는 돈을 얻기 위해 노동을 하는 악순환을 계속해야 하기 때문이다. 상품에 대한 물신숭배는 더 많이 사고, 더 많이 소비하도록 만든다. 사유재산제도 하에서 인간은 어떤 물건을 소유하고 사용할 수 있어야만 그 물건이 가치가 있다고 믿게 되기 때문이다. 사유재산, 임금노동, 잉여가치 그리고 시장의 힘 등은 사회의 구성원에 의해 만들어진 구조들이나 그것은 너무나 교묘해서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게 된다. 마르크스는 자본가들조차도 소외되지만 최소한 그들은 “소외 속에서도 행복하다”고 말한다.

 

물론 마르크스가 현재에도 여전히 유용한가?를 묻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태반은 마르크스를 전혀 읽지 않은 이들이다. 왜냐하면 마르크스를 읽는다면 여전히 유용한가 묻기 보다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먼저 하게 될 테니까. "마르크스는 사회의 경제적 토대를 바꿈으로써 사회자체도 바뀔 수 있으며 인간의 본성도 바뀐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20세기의 역사가 보여주듯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것은 생각했던 만큼 쉬운 일은 아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마르크스의 견해는 지나치게 낙관적인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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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연구(하룻밤의지식여행12) - 지아우딘사르다르 | 이영아 옮김 | 김영사(2002)


나는 이런 식의 도서에 익숙한 편이다. 그러니까 80년대 말엽에서 90년대 초엽 사이 나름대로 인기를 끌었던 리우스의 만화책들을 말하는 것이다. 당시엔 사회과학 서적을 중심으로 출판하던 "오월"에서 "리우스"(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멕시코의 좌파 만화가)가 이런 식의 작업들을 통해 일련의 만화 책들을 시리즈로 간행했다. 사회과학 이론의 빡빡함에 미리부터 질려버린 까닭으로, 혹은 좀더 쉽게 입문하기 위한 방편에서 이 책을 선택했던 이들에겐 상당한 도움을 준 책이다. 리우스는 "쿠바혁명과 카스트로", "레닌", "체 게바라" 등 혁명가들의 생애와 사상, 그들의 이론을 나름대로 잘 요약해주었다.

김영사에서 펴내고 있는
"하룻밤의 지식여행" 시리즈 중 한 권을 읽었다. 지아우딘 사르다르의 "문화연구(cultural studies)"가 그것인데, 얼마전 누군가가 이 책은 아니고 이 책의 한 시리즈 중 노암 촘스키 편에 대해 썼던 리뷰도 있었지만, 이 책 혹은 이 시리즈 중 어느 책이든 선택하는 사람이라면 머리 속에서 "하룻밤"이란 글자를 빨리 삭제해야 한다. 다시 말해 "하룻밤"만에 이 시리즈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을 다 알게 된다거나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란 말이다. 이 시리즈가 다루고 있는 면면을 살펴보면 더 빨리 이해될 수 있다.

1권에서
"노암 촘스키", 그리고 연이어 "양자론, 수학, 진화심리학, 철학, 사회학, 심리학, 플라톤, 포스트페미니즘(헉, 페미니즘도 어려운데 거기에 붙였다 하면 뭐든 세 배는 더 어렵게 만드는 "포스트"까지 붙어 있다. 나는 "포스트"자가 붙은 건 심지어 시리얼 메이커까지도 싫어지더라구.), 이슬람, 문화연구, 기호학, 프로이트, 라캉, 융, 호킹, 정신분석, 데리다" 그리고 앞으로 "푸코" 도 낸다고 한다. 앞서 포스트페미니즘에 대해 엄살 아닌 엄살을 부리긴 했지만, 한 가지 개념도 이해하기 어려운데 그 앞에 접두사가 붙는 학문은 더욱 어렵다. 예를 들어 아동문학이 그냥 문학보다 어려운 까닭은 그 앞에 아동이 붙기 때문이다. 아동을 알아야 하고, 문학을 알아야 하는 것이니 허투루하면 모를까, 진짜 아동문학을 잘 하기란 성인을 대상으로 한 글쓰기보다 배는 어렵다고 보아야 한다. 

하기사 무엇이든 제대로 하기란 참 어려운 법이다. 그런데 그것을
"하룻밤의 지식여행"이란 기획으로 정말 하룻밤만에 끝낼 수 있을까? 이런 걸 뭐라고 해야 하나? 사기라고 해야 할까?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제대로만 해준다면 그래서 그 여러 개념들이 대관절 어떤 맥락에서 다루어지고 있는지만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면, 나름의 성과를 거두는 기획이라 할 수 있다. 즉, 하룻밤이란 말만 지워버리고 시작한다면 나름대로 도움이 된다는 뜻이다. 결론삼아 말하자면 지아우딘 샤르다르의 "문화연구"는 그런 점에서 나름대로 도움이 된 책이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문화""영화"만큼이나 대중적인 화두이다. 문화에 대해 한 두 마디쯤 할 줄 모르는 사람이 없다. 시인이 어느날 갑자기 문화평론가로 등장해서 TV에서 그럴듯한 해설을 읊조리는 광경이 더이상 낯설지 않다. 문화는 방금나온 따끈한 빵처럼 말랑거려서 누구라도 손쉽게 조물딱거리면 만들어 낼 수 있는 학문 분야처럼 보인다. 

거기에 대중문화란 말이 붙으면 더 쉽게 느껴진다.
"대중문화 = 저급문화, 상업문화"란 등식이 존재하다보니 누구나 쉽게 즐기고, 누구나 쉽게 빠져들 수 있으니 그걸 공부하는 일도 쉬우리라 생각하게 된다. 문화연구의 함정이 거기에 있다. 문화는 도처에 있고, 누구나 즐기는 것이기에 어디에도 없고, 누구도 해석하기 어렵다(반대로 누구나 해석할 수 있기도 하다). 누구나 잘 아는 듯 여기지만 막상 말로 그것을 정의하고, 그 안에 숨겨진 여러 함의들을 찾아 해석해내고, 연구하는 범주 안으로 들어가면 미노타우르스의 미로처럼 얽히고 섥?것이 (대중)문화란 것을 금방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문화연구의 이론(가)들을 살펴보자.

맨처음 등장하는 이름은 미국의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 여사, 그리고 문화연구의 창시자로 손 꼽히는 레이먼드 윌리엄스, 사회학자 클리포드 기어츠다. 문화연구는 사회과학, 인문학, 예술의 여러 분야에서 이론과 방법론들을 빌려와서 제 것처럼 사용하고 있다. 즉, 대충 몰라도 넘어갈 수 있는가하면 제대로 걸리면
(혹은 제대로 하려면 이 모든 것들을 손대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는 거다) 금방 밑천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소쉬르, 로만 야곱슨, 롤랑 바르트로 이어지는 기호학, 키플링, 포스터와 같은 문학, E.P.톰슨 같은 역사,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와 같은 20세기 메타 이론에서 다시 이들을 뿌리로 하여 등장하는 알튀세르, 그람시, 리오타르, 부르디외에서 스피박에 이르는 그 이름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CPU과열현상을 빚는 인물들이 즐비하다.

그러니 이 책을 하룻밤만에 읽고 끝낸다는 건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앞서도 말한 것처럼 이 책도 나름대로 유의미한 측면이 있다. 그것은 짤막한 요점 정리를 통해 문화연구의 다종다양한 분야의 개념들과 연구자들, 그들이 문화연구란 거대한 테마 속에서 어떤 역할과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를 파악하는데는 아주 괜찮은 지도책이란 사실이다. 지도에는 온갖 기호들로 거리와 위치, 통과해야할 도로의 번호들이 명시되어 있다. 물론 지도책 없이 헤매면서 찾아가도 목적지에 도달한다는 목적은 이룰 수 있다. 미로를 헤매는 과정에서 더많은 것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테세우스가 미로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아리아드네의 가느다란 실 한 가닥이었듯, 비록 이 책이 건네주는 실오라기는 가늘고, 언제라도 끊어질 수 있는 것이지만 이용하기에 따라서는 문화연구의 미로를 헤매는데 꽤 믿을 만한 나침반 아니, 그 지도 상에 아로 새겨진 기호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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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계급론 - 토르스타인 베블런 | 김성균 옮김 | 우물이있는집(2005)


베블런의 『유한계급론』 2005년 초판을 손에 쥐고 있는 감흥은 약간 남다르다. 이 책이 국내에 처음 나온 것은 지난 1978년 “정수용”이 옮기고, “광민사”에서 펴낸 것이었다. 출간되고 얼마 뒤 이 책은 금서(禁書)가 되었고, 1987년 해금되기까지 법적으로는 읽는 것이 금지 당했다. 오늘날엔 경제학 전공자들보다는 인문 ․ 사회학 전공자들에게 더 많이 읽히는 고전이 금서가 될 어떤 이유가 있었을까? 책을 읽는 내내 마음 한 구석을 찜찜하게 했던 것은 그런 부분이었다. 내가 너무 둔하여 혹시 이 책에서 금지될 만한 어떤 사유(思惟)들을 읽어내지 못한 것은 아닌가?

 

존 K. 갤브레이스는 『갤브레이스가 들려 주는 경제학의 역사』(2002년)에서 베블런의 생애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하고 있다. 노르웨이 이민 가정의 후손이었던 베블런은 부유했다고는 할 수 없으나 『유한계급론』에서 그가 유한계급(leisure class)에 대해 보이고 있는 냉소적인 독설과 상관없이 나름대로 경제적 여유를 누리는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다만 그의 부친인 토마스 베블런은 매우 검소한 사람으로 자식을 이웃한 칼턴 칼리지에 입학시키는데, 이것은 자식의 하숙비를 절약하기 위한 조처였다고 한다. 베블런이 유한계급의 “과시적 소비”“과시적 여가” 활동에 대해 보이는 냉소적인 태도는 이런 그의 경험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유한계급론』2005년판은 1980년판에 실렸던 존 K. 갤브레이스의 서문이 빠진 대신, 앨런 울프의 “『유한계급론』의 현대적 의미”가 새롭게 수록되어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전세계 노동자들이 단결하여 자본가 계급을 타도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혁명적이기 보다는 훨씬 냉소적이었던 베블런은 부자들의 자화상을 신랄하게 묘파하고자 했다. 적어도 19세기부터 부자들은 자신들을 가치 있는 계급으로 믿기 시작했고 또 그들이 소유하고 있다고 믿은 - 가난한 자들은 소유하지 못했다고 믿은 어떤 - 대단한 가치는 근검절약이었다. <앨런 울프, 본문 8쪽>

 

위와 같은 이야기는 베블런과 동시대를 살았던 막스 베버(Max Weber)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통해 “오직 경건한 신앙심만으로 신의 영광을 추구했던 프로테스탄트들이 자본주의 혁명의 핵심 세력으로 부상”하게 되었음을 묘파한 이래 지속된 이데올로기였다. 베블런과 베버 보다 앞선 세대였던 고전파 경제학자 로버트 맬더스(Robert Malthus)는 그의 대표작인『인구론』에서 “빈민에게는 청결함을 권고하지 말고 그 반대의 습관을 기르도록 장려해야 한다. 도시의 거리는 좀 더 좁게 만들고 집집마다 더 많은 사람이 북적거리게 하고 전염병이 잘 돌도록 유인해야 한다.”고 말했다. 물론 베버의 관점을 맬더스의 그것과 일치시킬 수는 없다. 다만 당시 자본가 계급이 자신들이 누리는 부의 원천을 신의 은총과 동일시하고, 빈민 계급을 선천적인 게으름과 나태함으로 인해 구제받을 수 없는 저주받은 계급으로 취급했던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이에 베블런은 『유한계급론』을 통해 자본가 계급, 그의 용어를 빌자면 풍요로운 소비와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유한계급”의 이런 근거 없는 도덕적 자부심에 대해 일침을 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베블런은 경제학자로 분류되지만 경제학자 계보 가운데 특정 학파에 속한다고 할 수 없는 특이한 인물이다. 『유한계급론』에서도 역시 경제학적 방법론 보다는 사회학적인 연구 태도를 드러내고 있는데, 앞서 말했던 것처럼 오늘날 경제학 전공자들보다 사회학 전공자들이 이 책을 더 많이 찾고 있는 이유도 그것이다. 다른 측면에서 베블런은 종종 마르크스주의자로 오인되곤 했는데, 그 까닭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유한계급제도는 봉건시대 유럽이나 일본처럼 다른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발달했던 야만문화에서 가장 잘 발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사회에서는 계급간의 구별이 매우 엄격하게 지켜졌다. 그러한 계급적 차이를 결정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경제적 요인이었다. <본문 23쪽>

 

문화의 진화과정에서 유한계급제도와 소유권제도의 발생시점은 일치한다. 이 두 제도는 경제력이 동일한 상황에서 생겨나기 때문에 발생시점 역시 필연적으로 일치될 수밖에 없다. <본문 43쪽>

 

『유한계급론』은 제1장 「유한계급의 기원」으로부터 시작해 제14장 「금력과시문화를 표현하는 고등학문」에 이르는 과정을 통해 당대 유한계급의 기원과 현시적 소비태도를 분석하고 있다. 그는 유한계급을 분석하기 위해 주변의 여러 학문들 - 인류학·역사학·심리학 - 로부터 여러 가지 방법론을 불러들이고 있는데, 이는 현재 문화연구(cultural studies)의 방법론과 매우 흡사하다. 어떤 의미에서든 베블런을 문화연구의 선구자로 본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어 보인다. 이 부분에 더해 베블런이 노동계급과 여성을 동일시하고 있다는 것은 이제 막 여성 참정권 운동이 시작될 무렵이었던 당시 상황을 염두에 두었을 때 그가 매우 진보적인 사람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여자에 대한 소유권은 좀더 원시적인 야만문화에서 여성 포로나 노예를 강탈하면서 생겨난 것이 확실하다. 여자를 강탈하여 전유하게 된 최초의 이유는 여자들이 전리품으로 유용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리품인 여자를 적으로부터 강탈하는 관행은 소유와 결혼을 동일시하는 관례를 낳았고, 그로부터 남성이 가부장 역할을 하는 가부장적인 가족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 과정은 여자들을 비롯한 다른 포로들이나 하층민들까지 노예화되는 과정, 그리고 적으로부터 강탈해온 여자들 이외의 다른 여자들에 대해서까지 소유 - 결혼 관례가 확대되는 과정을 동반했다. <본문 44쪽>

 

베블런은 유한계급을 분석하면서 이들의 행동 양식이 본질적으로는 과거 야만 시대의 약탈문화로부터 조금도 변화되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더 이상 공동체의 일상적인 삶이 약탈 활동에 의존하지 않게 된 뒤로도 축적된 금전이 약탈 활동의 명예와 우월함, 성공을 대표하는 인습적인 지표의 지위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공동체에서 존경받을 수 있는 어떤 위치에 서고자 한다면 필수적으로 일정한 부를 축적해야 하며, 명성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부를 획득하고 축적한 것 못지않은 소비가 필요해진다. 베블런은 이를 "금력과시문화(pecuniary culture)"라 불렀다. 그러나 재화를 개인의 단독 소유물로 인정하는 모든 사회에서 한 개인이 정신적 안정감, 만족감을 얻기 위해서는 친숙한 부류보다 더 많은 재화를 소유하는 것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그런 사회에서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이 최고의 기쁨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약탈과 사냥을 통해 자신의 우월함을 과시하는 것이 인습적인 지표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자 약탈이 아닌 생산 활동, 육체노동은 상대적으로 비천하고 가치 없는 것으로 폄하되었고, 여성과 여성의 활동 역시 마찬가지 취급을 받게 된다.

 

인권운동가 서준식은 『서준식의 생각』에서 “일찍부터 땀 흘리며 근육을 단련하는 일”이 “이 세상에서 대접을 받지 못하는 ‘짓’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깨우치게 되었는지 이야기한다.

 

아버지께서 경영하시던 영세한 가내공장 직공들은 거의가 내일에 대한 희망도 인생설계도 없는 떠돌이들이었다. 그들은 월급을 받으면 그것을 며칠 사이에 술과 오입질에 탕진해 버렸고 월초의 일손 부족은 늘 악몽처럼 아버지를 괴롭혔다. 뼈가 다 굵은 아들들을 바라보시는 아버지의 애절한 눈길을 외면하지 못했던 나는 언제나 알아서 작업복으로 갈아입었지만 형이나 아우는 잽싸게 도망치기 일쑤였다.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되어 한나절을 보낸 나에게 아버지께서는 정말 고마워하시고 따뜻한 치하의 말씀도 잊지 않으셨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의 진짜 기대는, 고된 육체노동을 묵묵히 견딘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망쳐 버린 아들들에게 있다는 것을 어슴푸레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근육’이 ‘입’이나 ‘잔머리’에 열등감을 느껴야 하는 사회, ‘근육’을 단련하면 할수록 손해를 보고 주변으로 내몰리는 사회에 대한 회의를 떨쳐내지도 못한 채 나는 고등학교 1학년말부터 근육단련 대신 지성 쌓기를 시도했다. 왠지 올바른 길을 포기하고 나 자신의 믿음을 배신한 것만 같았던 그때의 쓴맛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서준식(2003년), 「운동가의 글쓰기를 생각하며」, 『서준식의 생각』, 야간비행> 중에서

 

베블런은 남자들(유한계급)이 존경을 얻고 유지하려면 단순히 부와 권력을 소유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이를 증거로 제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문명화된 사회에서 여가를 즐기는 것, 낭비에 가까운 풍요로운 소비는 우아하고 고결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베블런이 주장하는 유한계급의 여가는 단순한 게으름이나 아무 일도 하지 않는(無爲)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비생산적인 용도로 소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혹은 물질적 소비를 동반한 과시적인 소비를 통해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의미한다. 훌륭한 예의범절은 인간의 탁월함, 가치 있는 영혼의 소유자임을 드러내는 방편에서 전도되어 허례허식으로 흐를수록 더욱 높은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누리는 유한계급의 상징이 된다.

 

『유한계급론』이 오늘날 우리에게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직 IMF한파가 채 가시기 전이었던 2000년 2월 18일자 <한국일보>는 대우경제연구소의 「소득불평등의 심화에 따른 소비의 왜곡현상」란 보고서를 인용하여 “우리나라의 고소득층은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소비를 하며, 중산층은 이들을 「모방」하고 저소득층은 아예 「자포자기」심정으로 과소비 대열에 끼어든다.”고 보도하고 있다. 베블런은 필요(need)와 욕구(want)를 구분하고 있는데, 이를 명징하게 보여줄 수 있는 사례가 보석이다. 보석이 가치를 지니는 까닭은 그것이 결국 무가치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이아몬드는 영원하다.”는 드비어스(De Beers)의 광고는 단지 투명하고 반짝이는 돌멩이에 불과한 다이아몬드를 그 무엇과도 대체될 수 없는 가장 로맨틱한 사랑의 상징(혼인 예물)으로 만들었다. 다이아몬드는 과시적 낭비라는 명예로운 목적에 이바지함으로써 아름다운 물건(명품)이란 명성을 획득한다.

 

이는 다시 명품(名品) 소위 “럭셔리 신드롬(luxury syndrome)”으로 이어진다. 베블런은 제5장 「생활수준을 결정하는 금력」에서 현대사회의 대다수 사람들이 육체적 안락에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소비를 하는 직접적인 이유는 “과시적 소비에 지출하는 비용을 늘리기 위한 의도적인 노력이 아니라 인습적인 체면치레의 기준에 맞추어 소비하는 재화의 양과 질을 높이려는 욕망에 있다.”고 말한다. 공동체가 인정하는 명예롭고 품위 있는 생활양식의 일반적인 수준이 최상류계급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의 명품 소비 열풍은 이렇듯 자기 자신을 - 실제 혹은 그보다 더 높은 지위의 인간으로 - 드러내보이고자 하는 우리들의 욕망에 의한 것이다. 개념미술가(conceptual art) 제니 홀저는 과시적 소비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공간인 도시의 한 전광판에 “Protect Me From What I Want(내 욕망으로부터 날 좀 지켜줘)”란 문구를 내보내는 실험적 작품을 전시한다. 홀저는 베블런과 마찬가지로 현대인의 삶, 그 핵심에 놓인 가장 중요한 키워드를 ‘필요(need)’가 아닌 ‘욕망(want)’이라고 생각했다. 베블런은 “습관적으로 비싼 물건을 찾게 되고 아름다움과 명성을 습관적으로 동일시할수록 아름답지만 비싸지 않은 물건은 아름답게 평가되지 않기에 이른다.”고 말한다. 압구정동의 모 백화점에서 가격을 올리자 물건이 좀더 잘 팔리더라는 일화가 이해되는 대목이다.

 

경제학자들, 『국부론』의 아담 스미스, 리카도와 같은 고전학파나 시카고학파 같은 신고전학파에 이르기까지 경제학자들은 인간을 합리적인 이기주의자로 간주하고, 이런 원리에 따라 소비가 이루어진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베블런은 고전적 경제학자들의 가정에 반하는 논리를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소비의 원인은 단시 필요만이 아니라 자신의 신분과 재력을 과시하여 현대 대중사회에서 자신의 우월한 지위를 자랑하고 싶은 이들에 의해 과시적으로 일어난다. 그들은 소비,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시간이든 낭비를 일삼는데, 이런 과시적 소비는 유한계급에 속하지 못하는 이들에 의해 다시금 모방된다. 이런 현상을 오늘날 우리는 “베블런 효과(veblen effect)” - “값이 비쌀수록 호사품의 가치는 커진다.”- 라 부른다. 즉, 경제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비합리적인 소비 행태가 나타나는 것이다.

 

역사학자들이 20세기를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는 분명 사회주의 체제의 출현이었다. 어떤 역사학자들은 20세기를 러시아 10월 혁명과 함께 출발해 지난 1991년 무렵 구소 연방의 해체로 종결되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역으로 지난 18세기 무렵 서구 유럽이 제국주의를 통해 축적한 자본을 통해 본격적으로 가동된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을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하고 있다는 뜻이다. 자본주의를 구성하고 있는 두 가지 중요한 축은 ‘물질주의와 상업주의’이며 이것을 가능하도록 한 토대엔 인간의 욕망이 잠재해 있다. 우리들은 자신의 몸에 새겨진 안락함의 기억이 얼마나 질긴지 잘 알고 있으며, 대부분은 그 기억에 맞서 싸울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20세기의 사람들은 기독교나, 이슬람교, 불교, 유교와 같은 종교적 가치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20세기의 인류는 이미 단일 종파, 단일 종교로 통합되었는데, 그 신의 이름은 바로 “물신(物神)”이다.

 

베블런은 인간의 소비 혹은 욕망을 합리적인 것으로 단정한 고전학파나 신고전학파 경제이론에 매우 날카로운 비판을 가했다. 그렇다고 이들의 경제이론을 완전히 부인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베블런의 비판이 날카롭긴 했으나 그가 경제학에 새로운 체계를 세운 것은 아니었고, 마크르스처럼 유한(자본가)계급에 대해 혁명을 주창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오늘날 우리가 베블런의 공적을 폄하하거나 무시할 필요는 없다. 그가 유한계급에 대해 던졌던 냉소는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니까 말이다. 베블런의 지적들은 이후 정치적인 측면에서 C.W.밀즈(『파워엘리트』), 사회학적인 측면에선 피에르 부르디외(『구별짓기 :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그리고 문화적인 측면에선 제임스 트위첼(『욕망, 광고, 소비의 문화사』, 『럭셔리 신드롬』)에 의해 오늘날 좀더 세부적인 측면으로 분화되어 풍요롭게 계승되고 있다.

 

『유한계급론』의 2005년판 역자는 베블런의 비판을 “슬픈 냉소”라 말한다. 나는 지난 한 학기 동안 “문화”를 공부하면서 “문화연구”란 학문이 현실 사회를 변화시킬 대안 혹은 새로운 패러다임(계몽의 기획)을 모색하는 학문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에 빠져들어야 했다. 세상은 너무나 빠르게(물론, 본질적으로는 변화가 없다손 치더라도) 변하는데, 학문하는 자의 발걸음은 이리도 느리기만 한 현실 자체가 사회와 시대가 우리에게 보내는 냉소는 아닐까 라는 고민이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친구여! 바로 보마!”란 다짐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느려터진 한 인간의 세상사는 법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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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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