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붉은 별(상.하)』 - 에드가 스노우 | 홍수원 옮김 | 두레(1995)


"에드가 스노우 vs 존 리드, 아그네스 스메들리 vs 님 웨일즈" 이렇게 구도를 만들어 놓고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에드가 스노는 『중국의 붉은 별』, 존 리드는 『세계를 뒤흔든 10일』, 아그네스 스메들리는 『위대한 길 : 한알의 불씨가 광야를 불사르다』, 님 웨일즈는 『아리랑』을 쓴 작가들이자 저널리스트들이다. 만약 그렇게 살 수만 있었다면 이들을 위한 길 앞잡이 노릇을 하다 만주 벌판 어딘가에서 비적(匪賊)의 납탄을 맞고 죽었어도 나로서는 별로 억울하지 않을 것 같다. 위와 같은 대비 말고 또 다른 대비를 시도해보자. '어니스트 헤밍웨이 vs 서머셋 몸, 앙드레 말로 vs 마르크 블로크, 잭 런던 vs 조지 오웰'의 대비를 살펴보면 이 또한 역시 상당히 재미있는 대비임을 알 수 있다. 우선 헤밍웨이와 몸은 아마추어 스파이 활동 경험이 있는 작가란 공통점이 있고, 앙드레 말로와 역사학자 블로크는 레지스탕스 활동의 공통점을, 잭 런던과 조지 오웰은 각각 르뽀 작가로 활동했었다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잭 런던은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조선에 온 적도 있었고(비록 조선에 대해서는 비관적이었지만), 조지 오웰과 앙드레 말로, 헤밍웨이는 각각 스페인 시민전쟁에 의용군으로 참전한 경력도 있다. 서머셋 몸은 스파이 시절을 회고하며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다고 주장하지만 혁명기에 러시아에 머물던 그의 스파이 활동은 스파이라기보다는 산보객에 가까웠다고 한다. 어쨌든 이들 모두를 한데 아우르는 가장 중요한 공통점은 그들이 역사의 현장에 있었다는 점이다.

 

우리는 지식인이 갖춰야 할 미덕으로 문사철(文史哲)을 강조하면서도 실제로는 이 셋을 따로 구분하여 각각의 영역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역사학자는 역사만을, 철학자는 철학만으로, 문학하는 이는 문학만을 자기 영역으로 생각하고, 간혹 이를 초월해버리는 사람을 능멸하는 경향까지 있다. 우리 사회의 이런 지식 풍토 속에서 서구식 작가(writer, author)의 개념은 작가(novelist)로 한정되고 만다.

 

게다가 우리는 작가들의 지위나 권위에 대해 픽션이 지닌 권위의 절반만큼도 인정해주지 않는다. 예를 들어 순수하게 작품 활동만 하는 화가보다는 모 대학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화가인 사람, 순수하게 음악활동만 하는 성악가보다는 모 대학의 교수로 재직하는 성악가 같은 이들이 사회적으로 더 존경받는 경향과 마찬가지다. 가르치는 일과 직접 창조하는 일이 동일한 성질의 일이라면 애써 세분할 필요는 없을 거다. 하지만 이런 경향은 우리나라와 동양의 몇몇 나라에 한정된 경향일 뿐이다.


▶ 옌안에서 마오와 함께 한 에드
가 스노우
 

텍스트의 권위가 텍스트 자체에서 발생하기 보다는 텍스트 생산자의 사회적 권위에 의존하는 사회의 텍스트들은 처량맞다. 픽션과 넌픽션을 구분하는 행위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런 명확한 금긋기 행위가 사실은 비문학적 행위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문학평론가들은 문학만 말하고, 영화평론가는 영화만 말하는 건, 좋게 생각하면 전문성을 좀더 강화시키는 행위로 보이지만, 이는 암암리에 지식인 사회의 밥그릇 챙기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참고로 보들레르는 미술비평을, 아도르노는 음악비평을 했으며, 발터 벤야민이 계속 살아남았다면 영화비평을 했을 거다.)

 

나는 에드가 스노의 『중국의 붉은 별』을 거의 십여 번 이상 읽었다. 중국혁명사를 공부하기 위해? 마오주의자라서?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천만에 말씀이다. 무엇보다 이 책은 마오쩌뚱이 즐겨 읽었다는 수호지만큼이나 호방한 재미가 있고, 미문(美文)의 틀에 갇힌 모호함 대신 살아 날뛰는 현장의 소리가 들려오며, <아라비아의 로렌스>보다 감동적이다. 이런 감동이 주는 힘은 무엇보다 허구가 아닌 진실의 힘이다. 우리는 한 인간의 눈으로 대신 역사의 현장에서 진실을 전달받고 있다. 비록 그것이 과거의 어느날이었을지라도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함께 지구상에 살았으며 그네들이 이상과 희망에 따라 상처받았고, 굶주렸고, 슬퍼했으며 때로 절망으로 의지를 잃었음을 알고 있다. 그들이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음을 안다. 그것이 진실이 주는 힘이다. 우리와 함께 살았다는 사실 말이다.

 

가끔 역사 드라마를 보면 역사를 소재로 한다는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실감하게 될 때가 있다.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다는 사실을 아는 이라면 그가 설령 일본 자객에게 치명적인 위협을 받더라도 죽지 않을 거란 사실을 안다. 물론 이 책에 등장하는 중국 혁명 지도부의 삶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대장정이란 최악의 위기 상황을 겪지만 막대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기사회생의 전기를 마련한다. 그런 사실은 이제 역사가 되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데도 너무나 감동적이다.

 


▶ ‘장정’이란 1934년 10월 중국공산당의 ‘공농홍군’(工農紅軍, 노동자 농민의 붉은 군대)이 국민당 정부의 포위 토벌공격을 피해 장시(江西)성 루이진(瑞金) 근거지를 버리고 10여개 성을 지나 1936년 10월 중국 서북 산베이(陝北) 옌안(延安)에 근거지를 마련하기까지 2만5000㎞를 행군한 일을 말한다. 이 기나긴 고난의 행군 동안 홍군은 가는 곳마다 농민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았으며, 홍군에 자원입대하려는 농민들이 장사진을 이뤘다고 중국공산당은 설명한다. 홍군은 비록 패주했지만 가는 곳마다 공산주의 이념을 선전하고 농민으로부터 군사력을 보충 받아 결국 국민당과 내전에서 승리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 지금까지 중국공산당이 주장하는 역사이다. 그러나 장정은 오늘날 새롭게 대장정을 바라보고자 하는 연구자들로부터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나는 러시아 혁명을 다룬 책들, 예를 들어 존 리드의
『세계를 뒤흔든 10일』보다 개인적으론 중국의 혁명과정을 다룬 책들이 훨씬 재미있고 감동적이다. 그런 점에선 아그네스 스메들리가 홍군 총사령관 주덕(朱德)의 일대기를 구술 정리한 『위대한 길』도 마찬가지 재미를 준다. 왜 그럴까? 글쎄, 그 차이는 러시아와 중국의 차이, 같은 동양인으로서 느끼는 차이, 혹은 중국 혁명 과정에 식민지 조선인으로 동참했던 우리 선각자들의 발자취가 느껴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유 없이 혹은 다소간의 이유가 있더라도 1980년대의 운동권 분위기가 공연히 싫은 이들에겐 그 시기의 너무나 유명한 고전이란 점에서 이 책이 지루하고 재미없을 거란 선입견이 있을 수도 있겠다. 게다가 이 책은 중국공산혁명의 실체를 서방세계에 최초로 전한 책이란 점에서 미리 색안경을 끼고 볼 일종의 선전물처럼 비춰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책을 읽은 뒤에 걱정할 일은 그것이라기 보단 다른 종류의 것이 될 거다.

 

에드거 스노우(Edgar Parks Snow)는 1905년 미국의 미주리주(Missouri)의 캔사스시(Kansas City)에서 태어나 1926년 미주리 대학을 졸업하고 컬럼비아 대학 신문학과에서 공부를 마쳤다. 1927년(우리처럼 군대를 안 가니 23살 한창 펄펄 날 때)에 언론계에 투신하여 1928년에 중국 상해(上海)로 건너간다. 그는 중국의 최대 격변기에 현장에 머물면서 북경 연경대학 교수로도 활동했는데, 1936년 6월 손문의 부인 송경령의 소개장 하나를 들고 중국의 머나먼 서북 지역 홍구로 떠난다. 이 때 그의 나이 불과 30세였다. 그 자신이 청년이었으므로 노회한 저널리스트이기보다는 저널리스트의 사명감으로 불타는 피끓는 청년의 심정으로 그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에드가 스노우는 저널리스트이기 이전에 평범한 청년이었고, 모험가였다. 그의 직업은 물론 기자였으나 처음부터 기자가 되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22세의 청년 스노우는 증권투자로 벌어들인 돈을 챙겨 한 1년 정도 전세계를 돌며 재미난 생활을 즐길 마음이었다. 애초에 그가 중국으로 건너간 것도 그런 이유였다. 그는 지금 우리들처럼 서른 살이 되기 전에 크게 한 몫 벌어서 한가롭게 여생을 보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맞닥뜨린 시대, 중국 그리고 인도차이나, 버마, 인도 그리고 훗날 방문하게 되는 스탈린 치하의 소련에서 그의 피는 한가롭게 여생을 즐기며 유유자적하기엔 너무 뜨겁다는 걸 알게 되었다. 스노우는 4개월간 서방세계 누구에게도 알려져 있지 않았던 이들과 함께 사선을 넘나들며 아직 성공하지 못한 혁명가 마오쩌뚱과 그의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기록할 수 있었다. 당시 홍비(紅匪) 두목 마오의 목에는 현상금이 걸려 있었다.

 

그는 중국 혁명 지도부 인물들 - 주은래, 주덕, 팽덕회 등만 만난 것이 아니라 홍군 병사들과도 함께 어울리며 그네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에 남겼다. 농민들은 홍군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있었고, 그런 지지를 밑바탕으로 자신들이 하는 일에 확고한 믿음을 가졌던, 중국 혁명의 성공과 정당성을 확신했던 자원자들의 사기는 높았고, 군기는 엄정했다. 그들은 봉건 잔재를 털어버리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겠다는 이상으로 불탔고, 그들 안에서 이런 연대 의식은 새로운 공동체를 탄생시켰다. 어느 인간도 살아가면서 경험할 수 없는 확신의 순간들을 그들은 살아갔다.

 

그들의 이런 넘치는 자신감은 국민당군이 투항을 권고하기 위해 뿌린 선전삐라의 뒷면을 사상 학습을 위한 노트로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남경정부의 국민당군이 연일 진격해들어오는 일본군과 맞서 싸우기 보다는 마오와 홍군을 궤멸시키기 위해 치밀한 계획과 병참을 동원해 홍군을 압박해오는 시기 국민당군의 포위망을 뚫고 장장 1년여에 걸쳐 6천여 마일을 관통해 서북지역으로 이동해가는 대장정은 패배의 행군이었을지 모르나 그들의 생존은 그 자체로 승리의 행군이었다. 대장정을 통해 살아남은 홍군은 최후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굶주림과 소수 민족의 습격을 받아 가며 홍군은 도리어 그들의 이념을 전파하는 계기로 삼았다. 수백만의 굶주린 빈민들이 홍군의 태도를 몸소 경험했고, 그들의 도움을 받았으며 결국 마음으로 이들을 지지했고, 적극적으로 일원이 되고자 했다. 반대로 국민당군은 포위망이 뚫렸고, 그 과정에 만주, 상해, 열하, 하북 등을 차례로 일본군에 빼앗겼다.



 

어떤 이들은 제2차 국공합작을 하지 않았다면 최후의 순간까지 홍군을 밀어부쳤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라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국민당군이 할 수 있지만 참은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외적 일본에 맞서 싸울 힘조차 갖지 못한 상황이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제2차 국공합작은 도리어 국민당 정부를 더 일찌감치 붕괴시킬 수 있는 상황을 저지해준 것이다. 한동안 『중국의 붉은 별』은 금서였다. 1985년 출간하자마자 금서가 되었고, 이 책을 소지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옥살이를 해야 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읽었다. 모든 혁명이 그러하듯, 마오의 붉은 혁명이 남긴 흔적이 『중국의 붉은 별』이 기록한 흥분되고, 순수하며, 열정으로 가득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마오는 혁명에 성공했고, 그 역시 숙청과정을 겪었고, 변덕으로 일을 그르치기도 했고, 잘못된 판단으로 커다란 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발걸음이 중국 역사상 최초의 민중혁명을 성공시켰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거기에 얼마나 많은 인민의 발걸음이 함께 했는지, 그 역사를... 나는 당신이 꼭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 당신의 오늘이 과거 그 순간의 뜨겁고 격렬한 역사의 현장은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오늘도 역사는 당신과 함께 변화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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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전쟁의 탄생 - 누가 국가를 전쟁으로 이끄는가, KODEF 안보 총서 15 - 존 G. 스토신저(John G. Stoessinger) | 임윤갑 (옮긴이) | 플래닛미디어(2009)

전쟁 종전일이 아닌 전쟁 발발일을 기념하는 기묘한 국가,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지만 한동안 전쟁을 먼 나라, 남의 이야기처럼 여겨왔던 오만의 결과일까.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이했던 2010년 한 해 동안 전쟁의 기운이 검은 안개처럼 한반도에 스며드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


누가 왜 국가를 전쟁으로 이끄는가?

국제정치학 분야에서 오랫동안 학자로 연구에 전념해왔고, <포린 어페어(Foreign Affairs)>의 편집자로 국제연합(UN)에서 정치국 국장으로 활동하며 현장 경험도 풍부하게 쌓았던 존 G. 스토신저(John G. Stoessinger)의 『전쟁의 탄생 - 누가 국가를 전쟁으로 이끄는가(Why Nations Go To War)』를 읽었다. 2009년엔 『전쟁의 탄생』 말고도, 갈라파고스 출판사에서 다케나카 치하루가 쓴 『왜 세계는 전쟁을 멈추지 않는가?』도 출간되었는데, 전쟁 발발의 근본원인에 대한 사회학적인 분석이란 점에서 이 두 권의 책은 이전(2007, 아카넷)에 나온 케네스 월츠(Kenneth Waltz)의 『인간 국가 전쟁(Man, the State and War)』과 함께 비교해가며 읽어볼 만하다.


전쟁의 역사가 곧 인류의 역사였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고, 전쟁의 원인을 찾아 제거하거나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인류의 지혜 역시 끊임없이 발전해 왔다. 앞서 언급한 케네스 월츠는 ‘전쟁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인간의 본성, 사회 또는 국가의 특성 그리고 국가체제의 구조적 특성을 연구함으로써 전쟁을 인간적 수준, 국가 ․ 사회적 수준 그리고 국제체제적 수준으로 분석’했다. 존 헤르츠(John Herz)는 국가 내부의 경쟁을 조율하는 정부가 존재하는 것처럼 국가 간의 경쟁을 조율해줄 수 있는 기관이 없기 때문에 서로 경쟁하는 가운데 필요이상의 긴장이 고조되는 악순환이 반복되어 전쟁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보았고, 오르간스키(A. F. K. Organski)는 2위 국가가 1위 국가(헤게몬)로 전환하려는 가운데 전쟁 발발 가능성이 증대된다고 보았지만 전쟁의 원인은 인류 역사상 벌어진 전쟁의 숫자만큼 다양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존 G. 스토신저(John G. Stoessinger)는 전쟁의 원인에 대해 지금까지의 전통적 - 전쟁이 인간 ․ 사회가 통제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어떤 상황이나 인간 본성, 체제, 경제적 요인과 같은 근본적인 요인에 의해 발생 - 인식을 대신하여 그것이 결국 인간의 문제이며 그 중에서도 사회의 지도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지도자(리더)의 역할에 주목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전쟁의 탄생 - 누가 국가를 전쟁으로 이끄는가』란 국내 제목이 『Why Nations Go To War』라는 영어 원제보다 저자가 추구하려는 진실에 좀더 근접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이 책에서 저자가 ‘누가 왜 국가를 전쟁으로 이끄는가?’라고 물을 때 ‘왜?’에 대한 답은 그때그때 경우에 달라지겠지만 ‘누가?’에 대한 답은 언제나 ‘지도자’가 될 것이다.


집단적 범죄와 지도자의 결정

미국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대학 국제외교학과의 존 G 스토신저 교수는 『전쟁의 탄생』에 대해 지금까지 살펴본 몇몇 가지의 것만으로도 우리는 그가 미국 중심의 주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인물로 판단하기 쉽다. “전쟁을 일으키는 데는 외부 요인 못지않게 해당 결정을 내린 지도자도 중요하다”고 말한다는 점에서 그는 엘리트주의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는 인물로 비춰지기도 쉽다. 게다가 ‘스토신저’라는 그의 성(姓)을 보면 헨리 키신저(Henry Alfred Kissinger)처럼 그가 유대계 미국인이라는 것도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서장」에서 자신이 전쟁의 발발 원인으로 지도자를 중시하게 된 계기에 대해 설명하면서 자신의 가족사에 대해 간략하게 이야기한다.


그는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병합할 무렵 그의 가족과 함께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 살고 있었다. 스토신저의 계부는 히틀러 통치하의 오스트리아는 너무 위험하단 이유로 체코 프라하로 떠났지만 그마저도 점령당하자 어떻게 해서든 히틀러와 나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다가 결국 중국대사관을 통해 비자를 받아냈고, 소련을 통과해 일본까지 넘어가는 극적인 여행을 경험하며 살아남을 수 있었는데, 오랫동안 유럽에서 살고 있던 스토신저 일가가 유럽의 집단적 광기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일본판 오스카 쉰들러(Oskar Schindler)나 라울 발렌베리(Raoul Wallenberg)로 평가받는 외교관 스기하라 치우네((杉原千畝)의 도움 덕분이었다.


존 G. 스토신저는 그와 같은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집단적 범죄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어둠의 시대에도 우리의 인간성을 재확인하면서 심지어 가장 완벽한 방식으로 악마와 맞서려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심연 속에서도 도덕적인 용기는 여전히 살아 있으며 항상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고 있다”고 말한다. 아마도 그의 이와 같은 개인적 체험은 집단으로서의 인간이 아닌 개개인의 인간이 지닌 용기와 선택의 문제에 대해 주목하고 신뢰하게 되는, 다시 말해 훌륭한 인간이 지도자가 된다면 전쟁을 피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스토신저는 정치나 경제적인 요인들이 전쟁의 ‘징후’를 몰고 올 수는 있어도 전쟁 수행의 ‘결정’을 직접 내리는 것은 결국 사람이기 때문에 그는 바로 ‘지도자’들이 전쟁을 해야겠다고 마음먹는 ‘그 순간’이 벌어지는 요인에 주목한다. 이 부분이 존 G. 스토신저를 이전의 다른 학자들과 구분되게 만드는 요인이면서 동시에 그의 학문적 엄밀성을 약화시키는 지점이기도 하다.


제1차 세계대전부터 새로운 세기의 새로운 전쟁에 이르기 까지

존 G. 스토신저는 전쟁 발발 요인을 지도자에게 주안점을 두어 분석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책임을 지도자에게만 묻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20세기와 21세기에 걸쳐 일어났던 주요 전쟁의 배경과 개별적 원인을 분석하고 그와 같은 상황들 속에서 지도자들이 전쟁을 결정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살피고 다시 이를 개념화하여 정리하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을 다루고 있는 1장 「철의 주사위」 편에서 그는 장차 세계대전으로 비화될 개전 선언 이전까지도 이 전쟁이 수년간에 걸쳐 장기화되리라고 예측한 사람이 소수에 불과하며 아이러니하게도 그 중 하나가 당시 독일의 참모총장 헬무트 폰 몰트케(Helmuth von Moltke)였음을 지목한다. 독일의 빌헬름 황제는 섣부르게 오스트리아를 지원하기로 결정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사촌이기도 한 러시아 황제가 섣부르게 전쟁에 참여하지는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니콜라이 2세는 그의 이런 기대와 달리 세르비아를 지원하기 위해 전쟁에 참가한다.


한 국가가 다른 국가를 적으로 인식하고 그러한 인식이 충분히 강력하고 길게 이어지면, 그 인식은 결국 사실이 된다.

위기상황에서 힘에 대한 인식은 특히 중요하다. 초기 단계에서 지도자들은 자국의 힘은 과장하고 적국은 실제보다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오스트리아에 대한 빌헬름의 서약은 러시아 군사력에 대한 근본적인 경멸과 러시아 지도부에 대한 그의 영향력을 과도하게 신뢰했다는 방증이다.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도 러시아의 군사력에 대해서 실제보다 허약하고 성가신 존재로 인식하고 멸시했다. <본문 63-64쪽>


이와 같은 인식을 토대로 상대국의 전쟁수행능력이나 의지를 낮게 평가하면서 실제 상황을 객관적으로 판단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황제는 “우리는 지금 물러설 수 없다”라고 호언하는 것이 세르비아의 애국자들에게는 적나라한 침략으로 비출 것이란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고, 러시아 지도부에겐 그와 같은 공언들이 참을 수 없는 모욕으로 받아들여져 전쟁 이외에 다른 대안을 강구할 수 없도록 몰아가게 될 것이란 사실을 인정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한 전쟁 계획을 입안한 군부의 고위 인사들 역시 평화를 유지하기 이전에 자아의 보존을 좀더 중시하는 경향, 다시 말해 군부와 군부의 이해관계에 귀속되어 있는 자신들의 입장과 처지를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경향으로 인해 전쟁이 발발할 경우 피할 수 없게 될 막대한 희생에 대해 침묵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독가스 공격으로 눈을 부상당한 영국군 병사들이 줄지어 이동하는 모습


2장 「바르바로사 - 히틀러의 소련 공격」은 가장 의심이 많고 교활하며 사악한 인간인 스탈린이 가장 비이성적인 히틀러의 이성적 행동에 대해 기대하고 신뢰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묻고 있다. 다시 말해 그 나쁜 악마가 같은 놈은 어쩌다 더 나쁜 악마에게 속았을까? 쯤 되는 물음을 던진다. 게다가 이 악마는 처음부터 슬라브족을 노예로 만들고 소련을 그들의 레벤스라움(Lebensraum)에 포함시키겠노라 공언까지 하고 있었지 않았던가. 잇따라 전해지는 독일의 침공 예보(침공 직전 1년 동안 84번의 경고가 소련에 전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은 ‘붉은 군대’ 장교의 10분의 1을 숙청했고, 그 결과 전쟁이 벌어지기 직전까지 예하부대 지휘관의 5분의 1이 공백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존 G. 스토신저는 이처럼 어려운 시기를 앞두고 소련 전투력의 중추를 꺾어버리는 숙청을 단행한 까닭으로 스탈린 자신이 소련 내부에서 차지해야 하는 권력의 안전을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지켜내야 할 국가의 안전보다 우선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1939년 맺은 독 ․ 소 조약은 소련에게 독소처럼 작용했지만 침공 직후였던 1940년 7월 스탈린은 소련 인민들에게 전쟁을 독려하는 첫 방송에서조차 독 ․ 소 조약은 옳은 선택이었다고 강변했다. 그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저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이 히틀러보다는 더 나은 지도자였다고 주장한다.


히틀러는 전쟁의 행운이 그를 배반하고 소련으로 가고 있을 때에도 그의 잘못을 깨닫지 못했다. 그는 패배가 확실해졌을 때에도 몇 번이고 군대를 증원했다. 반면 스탈린은 그의 초기 실책을 깨달았고 그리하여 최후의 승리를 얻을 수 있었다. <본문 104쪽>


완전히 새로운 전쟁, 완전한 승리에 대한 유혹 - 한국전쟁

『전쟁의 탄생』은 여러 전쟁을 다루고 있지만 무엇보다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주는 것은 3장 「승리의 유혹 - 한국전쟁」편이다. 2009년에 번역된 『전쟁의 탄생』은 열 번째 판으로 저자인 존 G. 스토신저는 판을 거듭할 때마다 새롭게 추가된 사실들을 책의 내용에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이 책에 수록된 한국전쟁에 대한 내용 역시 전쟁 발발 이후 현재의 핵 위기 상황까지 일부 반영하고 있다. 그는 한국전쟁이란 역사적 사건에 있어 가장 중요한 국면 중 하나로 유엔군의 38선 돌파를 손꼽는다. 유엔군이 38선을 넘어서면서 한국전쟁은 완전히 새로운 전쟁이 되었다.



유엔군이 38선에 접근했을 때 그것을 넘어야 하느냐의 문제는 유엔군을 진퇴양난에 빠지게 했다. 유엔군이 38선을 넘지 않으면 완전한 승리를 거둘 수 없었다. 일각에서는 북한의 무력 침략은 38선을 파괴한 행위로 볼 수 있고 따라서 침략자에 대한 ‘맹추격’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만약 유엔군의 임무가 단순히 ‘무력침략을 격퇴’하는 데 있다면 북한 침략 이전에 대한민국의 영토로 인정되지 않았던 곳으로 유엔군을 진격시켜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성립될 수도 있었다. 더구나 “유엔군이 38선을 넘느냐의 문제를 누가 결정할 것이며 만일 그렇다면 그 목적과 한계는 어디까지인가?”라는 중대한 문제도 제기될 수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 북경 주재 인도 대사 파니카(K.M.Panikkar)는 “만일 유엔군이 38선을 넘는다면 중국이 전쟁에 개입할 것이다”라고 경고를 보냈다. <본문 124쪽>


9월 하순에 개최된 유엔총회에서는 미국의 의지에 따라 38선을 넘어 한반도에 통일되고 독립된 민주정부를 수립하는 데 필요한 조치를 취할 때라고 결의한다. 10월 1일 한국군이 38선을 넘어 북으로 진격했고, 미군도 10월 7일 북진을 시작했다. 10월 2일 파니카 주중 인도대사가, 10월 10일엔 중국의 외무장관 주은래 역시 “중국은 이 침략전쟁을 방관하지 않을 것”이라 경고했지만 미국과 맥아더 장군은 이것을 중국 특유의 허풍으로 받아들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과 웨이크 아일랜드에서 만나 중국의 개입가능성에 대한 보고를 받았는데 맥아더는 중국의 개입가능성을 희박하게 평가하고 있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한 편으론 북진을 승인하면서도 미국은 중국에 대해 적대감을 가지지 않을 것이라 선언하면서 중국 달래기에 나섰다. 맥아더는 중국을 팽창욕구는 가득하지만 실제로 그럴 능력은 없는 국가로 평가했고, 중국 인민해방군에 대해서도 경멸에 가까울 만큼 낮게 평가했다. 그는 1950년대의 중국 인민해방군을 1940년대의 장개석의 국민당 군대 정도로 생각했던 것이다.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의 판단을 신뢰했고, 그의 판단을 신뢰한 결과는 매우 혹독했다.


한국전쟁에서 중국의 개입은 국제문제 인식의 다양함을 실제로 보여준 좋은 예였다. 이러한 인식은 실제상황을 인식하는 데 매우 유효하다. 일단 상황이 명확하게 평가되면 특정 대안은 배제된다. 일반적으로 적대적이라고 생각하는 상대방과는 화해가 어렵기 마련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중국의 공산주의자들은 결국 한국에 개입하는 것 이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생각했다. 상대방의 힘을 무시할 정도라고 생각할 경우 위협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게 된다. 미국은 중국의 경고를 일종의 허풍으로 치부했다. 자신과 정반대의 이데올로기를 지닌 상대방과는 좀처럼 타협하기 어려운 것처럼 미국과 중국은 재앙이 될 분쟁의 문턱에서조차 상대방의 국제적 역할을 정당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것이 한반도를 또 다른 18개월 동안 파괴한 ‘완전히 새로운 전쟁’의 주된 원인이 되었다.<본문 133쪽>


트루먼이나 맥아더가 처음부터 북한 점령에 대해 생각했던 것은 아니지만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이런 상황을 반전시켰고, 침략자를 응징한다는 명분 아래 자신의 의지를 미국의 의지에 종속시킴으로써 유엔은 중재자에서 전쟁의 당사자가 되어 이후 남북한 혹은 양대 진영 사이에서 국제적 중재자의 역할을 포기하는 결과를 빚었다. 그 결과 전쟁은 1950년 10월 1일로부터 2년 반 동안 더욱더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미군 전사자 3만 4천 명, 남북한 130만 명, 중국이 대략 150만 명에서 200만 명 정도가 전쟁터에서 죽거나 부상당한 채 휴전했다.


남북한은 현재까지 어떤 심판자나 중재자, 완충 없이 완전무장한 채 60년간 대립하고 있는 중이다. 김일성은 1994년 사망했고, 아들 김정일이 권력을 승계해 1994년 제네바에서 북한이 핵을 동결하고 궁극적으로 2개의 경수로와 핵 발전 원자로 건설의 대가로 핵무기 개발계획을 폐기할 것을 약속하는 북 ․ 미간 ‘기본합의서’에 서명했다. 그러나 클린턴의 뒤를 이어 대통령에 당선된 부시 대통령은 북한을 악의 축에 포함시키면서 선제전쟁 전략에 대한 독트린을 발표한다. 예방전쟁, 선제공격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는 부시 독트린의 발표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침공 상황 등을 지켜보며 북한은 이것을 북한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선전포고)으로 인식했고, 2003년 NPT(핵확산금지)조약을 탈퇴하겠다고 위협했다. 2003년 4월 북한은 NPT조약 체결 32년 만에 처음으로 탈퇴한 국가가 되었다.


2003년 6월 북한과의 전쟁 위험을 감소시키기 위해 미국과 한국은 점진적으로 북한과 한국 사이 비무장지대로부터 멀리 병력을 재배치하는 데 합의했다. 1,700만 명의 인구가 거주하는 한국의 수도 서울은 군사분계선으로부터 포병의 사거리 내에 위치했었다. 미국과 한국의 입장에서 이와 같은 군사력의 재배치는 양측 100만 명 이상의 군사력으로 항상 긴장을 유지해온 전쟁의 위험 상황을 다소 줄일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됐다. 그러나 북한의 입장은 달랐
다. 이들은 거대한 규모의 재래식 군사력을 유지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핵개발을 선택했다. <본문 137쪽>


2006년 10월 9일 북한은 지하 핵실험에 성공했다. 이전까지 부시 대통령은 북한의 김정일을 가리켜 ‘최악의 독재자’라고 지칭하며 그 같은 최악의 독재자가 다시는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스러운 무기를 가지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북한이 핵무기를 갖도록 부추긴 결과만 빚고 말았다. 미국의 샘 넌(Sam Nunn) 전 상원의원은 “우리는 악의 축의 잘못된 끝에서 출발했다”며 부시의 악의 축 정책이 잘못되었음을 시인했다.


상대 지도자(국가)의 의지에 대한 오판과 자국에 대한 오만

20세기에 가장 길었던 전쟁은 베트남전쟁으로 베트남이 독립을 쟁취하기까지 투쟁한 기간은 장장 30년에 이른다. 한 세대가 흐르고 미국의 대통령 5명이 바뀌는 동안 미국은 상대가 지닌 독립에 대한 강한 열망과 의지, 자신들과 겨루고 있는 베트남의 지도자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거의 전혀 알지 못했고, 심지어 경멸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미국의 대통령들은 물론 미국 자신은 아시아 전반에 대해 문외한이었고, 베트남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특히 존슨 대통령은 공산주의가 수없이 많은 이념적 조각들로 나누어져 있으며 이 전쟁이 지닌 기본적 특성이 공산주의 대 반공산주의의 이념적 전쟁이기 보다는 식민주의에 대항한 전쟁, 혁명과 반혁명에 대한 혁명전쟁이란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과 남베트남군은 거의 언제나 대부분의 전투에서 상대방보다 적은 사상자를 냈기 때문에 그들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있다고 간주했다. 그러나 베트남 사람들은 열악한 조건과 상황에서도 기꺼이 전투에 임했고, 죽음을 불사했다.


존슨과 미국은 호치민과 베트남을 마오쩌둥과 중국의 지시를 받는 꼭두각시로 여겼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호치민은 1920년 프랑스 공산당 창설자 중 한 명이자 옛 볼셰비키 당원으로 공산주의의 세계에서 호치민은 마오쩌둥보다 앞선 원로 공산주의자였다. 한국전쟁에 종군기자로 참전하기도 했고, 우리에겐 『콜디스트 윈터(The Coldest Winter)』로 잘 알려진 데이비드 핼버스탬(David Halberstam) 같은 이는 호치민을 가리켜 “한쪽은 간디의 모습을 또 다른 한쪽은 레닌의 모습을 가진 완전한 베트남인”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의 주류언론은 그를 경멸적으로 묘사하여 “모스크바에서 기술을 익힌 염소수염의 선동가”라 불렀다.


오랫동안 독립을 위해 투쟁했고, 승리를 거의 쟁취할 뻔했던 나라의 독립을 방해하며 전쟁에 끼어들었던 미국은 정작 자신들이 누구와 싸우고 있는지에 대해 거의 전혀 알지 못했다. 미국은 베트남의 진구렁에서 오랫동안 싸움을 이어나갔지만 이들이 1973년 파리에서 확인한 것은 이미 1954년 제네바 협정에서 결정되었던 상태로 고스란히 되돌아갔음을 인정하는 일 뿐이었다.


미국은 인도차이나에 700만 톤 이상의 폭탄을 투하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에 투하된 폭탄의 80배나 되며 1945년 일본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300배 이상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이 폭탄들은 폭 25~50피트에 깊이가 5~20피트나 되는 폭탄 구덩이 2,000만 개를 남긴 것과 같았다. 폭격 후 베트남의 대부분은 달의 표면처럼 보였고 이후에도 상당기간 동안 아무 것도 자랄 수 없을 것으로 보였다.

미국도 전쟁이 끝난 후 후유증이 심했다. 미국의 지도부는 국민들로부터 존경심을 잃었으며 대학은 붕괴되었고 경제는 전시 통화팽창으로 부풀어 있었다. 5만 8,000명의 전사한 미군을 베트남에서 싣고 온 금속관이 전쟁의 최종적이고 유일한 의미의 상징이 되었다.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공산당의 초기 승리와 이 전쟁의 고뇌 중 어느 쪽이 희생을 덜 치르게 되었을까 하는 것이 베트남에서 해답을 찾지 못한 가장 큰 문제일 것이다. 우리는 단 한 명의 미군도 인도차이나에 파견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역사는 대안을 제시해주지 않기 때문에 선택되지 않은 길이 어느 쪽으로 인도되었을지 알 수는 없다. 아마도 베트남은 훨씬 일찍 공산화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공산주의의 형태는 모스크바와 베이징과는 다른 아마도 독립정신으로 무장한 강력한 민족주의 성격을 띤 티토주의적 공산주의가 되었을 것이다. 미국도 그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공산화의 연기의 대가로 5만 8,000명 이상의 미국인의 생명과 300만 명의 베트남 사람들의 희생, 그리고 1,500억 달러의 가치와 맞바꿀 수는 없었다. <본문 185-186쪽>


1960년대 미국의 베트남정책 입안자 중 한 명이었던 딘 러스크는 1975년 4월 남베트남의 패망으로 끝난 베트남전쟁에 대해 “개인적으로 나는 두 가지 실수를 했다. 나는 북베트남 사람들의 불굴의 의지를 과소평가했고 미국인의 인내력을 과대평가했다.”라고 말했다.


잘못된 역사와 잘못된 오해에서 비롯된 전쟁 - 유고내전

발칸반도 지역은 오랫동안 유럽의 화약고란 이름으로 불렸는데, 그 이름에 값하듯 20세기의 서막을 알리는 제1차 세계대전의 총성도, 20세기의 끝을 알리는 유고 내전도 모두 이 지역에서 벌어졌다. 키신저는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그리고 이슬람교도의 세 종교적 집단 중 어느 것도 다른 집단의 지배를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 이들은 때때로 터키나 오스트리아 또는 공산세력과 같은 외부세력에는 굴종했으나 이들 상호간에는 단 한 번도 그러한 적이 없었다.”라고 했는데, 실제로 1941년 나치가 유고슬라비아를 점령한 기간 동안 이 3개 민족은 나치에 대한 저항운동 못지않게 서로에 대한 증오 역시 맹렬하게 불태웠다.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자들은 악명 높은 ‘우스타쉬(Ustashes)'를 만들어 비 크로아티아인들을 학살했고,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은 '체트니크(Chetniks)'를 만들어 비 세르비아인들을 학살했다. 이들 모두와 투쟁하며 통일된 유고슬라비아를 세운 것은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의 혼혈이었던 열쇠 수리공 출신의 빨치산 지도자 요시프 브로즈 티토(Josip Broz Tito)였다. 1980년 티토가 사망할 때까지 유고슬라비아는 대외적으로 ’형제의 단결‘이라는 슬로건 속에 통합되어 있는 듯 보였다.


티토 사후 1990년대 초반에 벌어진 구 유고슬라비아에서 벌어진 내전, 처음엔 크로아티아, 그리고 이후 보스니아에 이르기까지, 인종이나 종교에 상관없이 서로 혼인하고 바로 이웃에 살며 평화롭게 살아가던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서로에게 총질을 하며 잔학행위를 일삼았던 전쟁이었다. 물론 최악의 범죄자는 세르비아였지만 그렇다고 이 전쟁에서 세르비아가 유일한 가해자도, 그렇다고 유일한 악도 아니었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전 유고슬라비아 주재 미국대사는 “그들의 가장 비극적인 실수는, 그들 자신의 역사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었다. 그들의 마음은 과거에만 가 있었으며 미래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이 모든 학살의 주범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에 대해 존 G. 스토신저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죽음과 배반의 그늘 속에서 성장했다. 그의 부모는 모두 자살했다. 그는 아내 미라와 함께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위한 피난처를 찾았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밀로셰비치의 아내 미라는 유고슬라비아를 지배했던 티토의 연인이었던 즈덴카의 조카이자 수양딸이었다.


1946년 5월 1일, 티토의 오랜 연인 즈덴카가 폐결핵으로 사망한다. 그는 즈덴카의 죽음에 가슴 아팠고, 베오그라드의 대통령궁에 조그만 기념비를 세우고, 매일 그녀의 기념비에 헌화한다. 즈덴카에게는 사촌 베라 밀레티치가 있었다. 그녀는 파르티잔과 결혼해 딸 한 명을 낳았는데, 곧이어 게슈타포에게 체포당한다. 그녀는 갖은 고문 끝에 동료들의 이름을 토설했고, 그로인해 많은 동료들이 체포되고 죽임을 당한다. 이후 그녀는 다시 파르티잔 동료들에게 체포돼 총살당한다. 티토의 연인이었던 즈덴카의 부모들은 밀레티치의 딸 미라(미랴나)를 입양한다. 그녀는 훗날 세르비아의 대통령이 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와 결혼하는데, 이들에게 세르비아 민족주의와 세르비아의 역사는 그들이 수호해야할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무엇보다 이들이 되찾아야 할 세르비아 역사의 성지는 코소보였다. 1389년 세르비아인들은 오스만 투르크의 진격에 맞서 코소보에서 싸웠지만 패배하고 말았다. 이후 500년간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를 받으면서 세르비아인들에게 코소보는 민족의 성지가 되었고, 이곳에 거주하고 있던 알바니아계 이슬람교도들은 같은 유고 국민이 아니라 과거의 원수들이었다.


실제로 그 장소에서 그 같은 전투가 벌어졌었는지도 명확하지 않은 과거의 역사로부터 비롯된 민족과 종교 사이의 증오에 다시 불이 붙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1914년 사라예보에서 터진 총성과 1994년 사라예보의 총성은 전혀 달랐다. 1914년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대공의 암살사건은 유럽을 제1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로 몰아간 방아쇠가 되었지만 1994년엔 세계 열강 중 누구도 이 지역에서 벌어지는 학살과 죽임에 대해 개입하길 꺼려했다. 어느 강대국도 이 지역에 개입해야 할 이해관계가 없었던 것이다. 강대국들이 수수방관하는 동안 인종적, 종교적 증오에 휩싸인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보스니아는 서로에 대한 증오를 맘껏 불태웠다. 결국 1999년 미국과 나토가 개입하면서 잔인한 학살극은 막을 내렸다. 영국의 역사학자 노엘 맬컴은 세르비아 측이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1389년의 코소보전투에 대한 신화는 모두 거짓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어떤 한 민족이 집단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신화는 그 자체의 진위 여부로 믿음을 얻는 것이 아니란 점에서 노엘 맬컴의 주장은 아무런 힘도 갖지 못할 것이다. 기든 가틀립(Gidon Gottlieb)은 “민족주의는 여전히 강력한 힘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오직 인종적 특징이나 문화의 공유뿐 아니라 역사, 잘못 저지른 실수, 희생을 포함해 정치술의 냉혹한 고려사항을 초월하는 방법으로 국민들을 움직인 상징이나 전설적인 요소에도 근거를 둔다”고 말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구 유고슬라비아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의 후손들은 1994년의 대학살을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전쟁 - 서로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잘못된 인식이 벌인 실수

이외에도 존 G. 스토신저는 6장 「신의 전쟁」에서 인도와 파키스탄이 영국으로부터 독립 이후 현재까지 치르고 있는 오랜 분쟁의 역사를 다루고, 7장 「성지에서의 60년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과 아랍의 전쟁 그리고 8장 「후세인의 전쟁 - 이라크의 이란, 쿠웨이트 침공과 걸프전쟁」을 다루고 10장 「새로운 세기의 새로운 전쟁 - 미국과 이슬람 세계」에서 21세기 초엽 9.11테러 이후 부시의 전쟁에 대해 말하고 있다. 각 장에서 다루고 있는 전쟁의 양상과 내용은 모두 다르지만 저자는 이 모든 전쟁의 양태를 두루 살피는 와중에 한 가지 결론을 도출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렇듯 서로 다른 전쟁이 결국 서로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잘못된 인식이 벌인 실수이며 전쟁은 결코 인간의 천성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학습한 결과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전쟁은 회피할 수 있다고 강변한다. 그는 무엇보다 전쟁은 지도자의 성격, 그 중에서도 ‘지도자의 잘못된 지각’이 사실상 ‘전쟁의 시작과 평화 유지’라는 정책의 향배를 결정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전쟁 발발의 원인에 대해 존 G. 스토신저 교수의 의견에 모두 동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전쟁이 벌어지는 원인은 역사상 벌어졌던 전쟁만큼이나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세계의 모든 전쟁이 사실은 하부 구조, 다시 말해 경제적 이해관계에 기반하고 있다는 주장을 과학적 진실로 받아들이는 반면에 서로에 대한 오해와 잘못된 인식에 의해 벌어진다는 주장을 비과학적인 주장으로 판단하는 오류를 범해선 안 될 것이다. 많은 이들이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남북한 간의 군사적 긴장 고조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남북한 경제협력, 특히 금강산 관광이나 개성공단이 안전판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것으로 여기는데, 여기엔 한 가지 간과되기 쉬운 부분이 있다. 물론 경제적 이해관계가 서로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고, 전쟁이 양측의 이해관계를 파괴할 수 있다는 인식은 전쟁 위기를 미연에 방지하는데 좋은 전제조건이 될 수도 있지만 이것은 궁극적으로 양 측의 잘못된 오해와 인식 혹은 증오를 누그러뜨리기 위한 조건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개성공단이 아무리 잘 돌아가고, 경제적으로 밀접한 이해관계를 가진다 하더라도 증오의 물길이 파놓은 심연이 너무 깊다면 전쟁의 위기는 상존한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존 G. 스토신저의 『전쟁의 탄생 - 누가 국가를 전쟁으로 이끄는가(Why Nations Go To War)』을 통해 우리가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길 바란다.


마지막 하나의 경고는 “우리가 들어왔던 어떤 전쟁이 과연 ‘불가피’했던 것인가?”였다. 이 단어는 내가 연구를 통해 제1차 세계대전의 ‘철의 주사위’를 다루는 순간부터 수없이 떠오른 질문이었다. 십자군들은 특히 그러한 주장을 좋아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불가피했다는 주장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다. 역사는 역사를 만들지 않는다. 사람들이 외교정책을 결정한다. 이들은 지혜롭게 혹은 어리석게 정책을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정책을 만든다. 전쟁 이후에 역사가들은 종종 전쟁을 뒤돌아보고 운명이나 불가피성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러한 역사적 결정주의는 단순히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은유에 불과하가다. 결국 우리의 생에는 자유의지와 자기 결정이 있을 뿐이다. <본문 537쪽>


다시 말해 그는 피할 수 없는 전쟁이란 없으며, 평화란 현실을 제대로 인식했을 때 비로소 조성될 수 있다고 말한다. 전쟁이냐, 평화냐는 선택은 잘못된 인식과 현실의 갈림길에서 선택되는 것이며 전쟁을 선택하는 실수를 범한 사람은 전쟁이 수행되는 동안 천천히 그리고 아주 오랜 고통 속에서 전쟁의 맨 얼굴을 직접 대면한 뒤에야 그것을 깨닫게 된다. 그런 점에서 전쟁이 지닌 가장 큰 딜레마는 전쟁을 피할 수 있도록 해주는 가장 큰 스승이 곧 전쟁 그 자체라는데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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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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