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와 모리츠(Max and Moritz)』 - 빌헬름 부쉬 지음, 곰발바닥 옮김 / 한길사(2001)

독서 시간은 10분이지만 생각할 거리는 ...

빌헬름 부쉬(Wilhelm Busch)의 초기작이자 가장 대표작이기도 한 막스와 모리츠 를 읽는데 걸린 시간은 채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야말로 전광석화처럼 읽었는데,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진한 여운이 남았다. '허, 거참 신기한 일이다.' 읽는데 10분도 걸리지 않았는데, 다 읽고 이틀 동안 다른 사무 때문에 몹시 바쁘게 보냈는데도 계속 생각이 나다니 드문 경험이었다. 이 책을 읽는 10분 동안 들었던 주된 생각은 "거 참 장난이 심한 녀석들이네." "헉, 그렇다고 주인공들을 그렇게 죽일 것까지야."란 생각이었다. 문학적으로 볼 때 작가가 주인공을 죽임으로써 뭔가 그럴 듯한 걸 보여주고, 보여줄 수 있던 시대는 호메로스 이래, 셰익스피어를 거쳐 괴테 시대에 이르러 사실상 막을 내렸다(내가 생각하기에 근/현대는 죽음을 소외시킨 시대이다). 그 이후 시대의 작가들 가운데 죽음을 이보다 더 의미있게 보여준 작가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들은 죽음보다는 어떻게 살았는지, 살아가는지를 보여주는데 치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문학과 예술에서 죽음은 그렇게 서서히 비중 없는 지위로 격하되었고, 문학 기술상으로도 죽음을 다루는 솜씨는 점차 퇴보하게 되었다. 생각해보라. 지금 햄릿이나 오델로, 리어왕처럼 멋있게 혹은 의미있는 죽음을 맞이하는 주인공이 몇이나 되는가를...

하지만 빌헬름 부쉬가 그리고 있는 막스와 모리츠의 죽음은 해도해도 좀 심했다
(혹시 이걸 스포일러라고 비난받지는 않겠지). 책을 읽는 10분간 그리고 마지막 책장을 덮은 뒤 나는 작품 속 악동들이 볼테 아주머니의 닭들이 나무에 매달려 헐떡이는 광경을 지켜보며 토해냈을 법한 미소를 지었다. 혹자는 이를 "그로테스크(grotesque)"라고 말하는데, 그로테스크란 말은 우리가 무신경하게 종종 사용하는 '매너리즘','댄디즘'과 같이 역사적 연원이 있는 말이다. 그로테스크한 묘사, 그로테스크한 표현, 혹은 미술의 표현 양식이든, 그것이 무엇이든 그로테스크가 등장하는 시대의 공통점은 사회적인 불안과 불만이 고조되는 시대라고 보면 된다. 그로테스크한 표현이 출현하는 시대는 고대의 토템이나 페티쉬와 같은 괴이한 조형물로부터 중세의 교회질서가 붕괴되기 시작한 15-16세기, 절대왕정에서 근대자본주의 사회로의 변혁기,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시기에 집중된다. 빌헬름 부쉬에게서 그로테스크를 읽었다면 그건 아주 잘 읽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막스와 모리츠는 장난꾸러기를 넘어선 그야말로 악동이었다. '팜므 파탈'이 치명적인 요부를 의미한다면 이들은
'앙팡 테리블' 을 넘어선 '앙팡 파탈' 이라고 봐야 할까? 과부댁인 볼테 아주머니의 닭들을 교수형시킨 것도 모자라 재봉사 뵈크를 물에 빠뜨리고, 렘펠 선생의 담배 파이프에 화약 가루를 쟁여넣고, 프리츠 삼촌의 침대에는 온갖 벌레들을 잡아 넣어둔다. 결국 농부 메케의 곡식 자루에 구멍을 내는 장난 끝에 방앗간에 탈곡기에 들어가 낟알이 되어 거위들 먹이가 되고 마는데, 누구 하나 이들의 죽음을 슬퍼하거나 애태우지 않는다. 그로테스크라 하면 커다란 도끼로 이마를 쪼개거나 전기톱으로 신체를 절단하는 식의 하드 고어 스타일을 연상할 수도 있겠지만, 철 모르는 아이 둘을 방앗간 탈곡기에 집어넣고 낟알을 만든 뒤에 이를 새 먹이로 먹게 한다는 스토리도 충분히 하드 고어 스토리다.  동화책 하면 안데르센의 눈물겨운 성냥팔이 소녀를 자동적으로 연상하는 이들이라면 이 동화책을 아이들에게 읽히고 싶지 않을 것이다.

동화란 반드시 교훈(체제순응)적이어야 하는가?
무릇 "동화란 교훈이다."란 고정 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에게 이 동화는 모리스 샌닥(Mourice Sendak) 의 동화들과 함께 끔찍한 악몽일 것이다.  모리스 샌닥의 대표작이기도 한 "괴물들이 사는 나라"는 하마터면 판매금지 처분을 받을 뻔 했다. 이유인즉 소년 맥스가 늑대로 변장하고 놀다가 엄마에게 야단을 맞자 “엄마를 잡아먹어 버릴 거야”라고 말하는 대목이 너무 괴기스럽고, 아이들의 정서를 해칠 수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종종 음식점에서 떼 쓰는 아이를 달래는 엄마들을, 그런 엄마에게 대드는 아이들을 본다. 엄마는 아이들을 달래다 지치면 "너 이따 집에 가서 혼날 줄 알아"라고 으름장을 놓거나 좀더 심한 말을 하기도 한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엄마의 부아 긁는 소리를 한다. 좀 심하게 말하는 아이들 가운데는 "엄마를 죽여버릴 테야." 와 같이 듣기 끔찍한 소리를 내뱉곤 한다. 아이의 입에서 그런 소리가 들려오면 끔찍하다. 이때 자동적으로 연상되는 건 근친살해에 대한 뉴스 같은 것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일본의 걸작 하드 고어 애니메이션 '우르츠기 도지'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제 부모의 시신이 토막쳐진 채 담겨있는)어려서 저 모양이니 크면 어찌될까? 하는 걱정일 수도 있겠다.



과연 빌헬름 부쉬나 모리스 샌닥 같은 작가들의 동화책을 아이들에게 읽혀야 할까? 고민스럽지 않을 수 없다. 나의 결론은 물론 읽도록 내버려두라는 것이고, 좀더 나아가서 잘 읽도록 도와주고, 널리 권장해야 한다는 거다. 아이들이 재미있어 하니 좋지 않은가? 이것이 내가 이 책을 권하는 첫 번째 이유다. 물론 더 중요한 이유는 이제부터 말하고자 하는 두 번째 이유에 있다. 이 책의 저자 빌헬름 부쉬는 아동문학을 전공하거나, 이 분야에 제법 관심을 가지지 못한 이들에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국내에선 그다지 대중적인 인지도가 없는 편이지만 독일에는 그의 기념관이 있고, "막스와 모리츠"는 독일 어린이들이 즐겨 읽는 동화 가운데서도 고전으로 평가받는다.
(선진국에서 널리 읽도록 하고 있으니 우리도 읽도록 하자는 말을 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빌헬름 부쉬는 1832년 4월 15일 독일 하노버의 작은 마을인 비덴살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아들이 기계공학자로 살아가길 바랐기에 부쉬는 부친의 뜻에 따라 괴팅겐에서 기계공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그 자신은 화가의 꿈을 포기하지 못하고, 뮌헨에서 뜻을 같이하는 친구들과 함께 그들만의 예술활동을 한다. 

사회변혁기에 출현하는 그로테스크와 풍자
앞서 그로테스크란 역사적 격변기에 주로 등장하는 기법이라 말한 바 있는데, 역사적 격변의 시기에 등장하는 것이 그로테스크만은 아니다. 이런 시기엔 '신랄한 풍자' 역시 등장한다. 어떤 의미에서 그로테스크는 종종 풍자의 한 방식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1970년대  미국 사회가 급격히 보수화되고, 10대의 성 문란이 가속화되면서 출현한 피가 낭자한 호러영화들은 풍자이면서 동시에 그로테스크이기도 했다. 호러영화의 모든 공식을 풍자하기로 작심한 "스크림"은 1970-80년대의 '청춘'호러영화의 공식 - 섹스를 하면 죽는다. 처녀가 아니면 죽는다 - 를 비틀고, 그 후에 나온 영화는 '처녀면 죽는다'는 공식을 도입하기도 했다. 그로테스크는 이렇게 풍자와 결합한다. 빌헬름 부쉬가 태어나고 살았던 1800년대 초중반의 독일은 어떤 사회였을까? 차이코프스키의 "1812년 서곡"은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에서 프랑스가 패하고, 러시아가 승리한 것을 기념한 곡이었다. 1812년엔 이것말고도 중요한 일들이 또 있었는데, 이 해 영국의 런던에는 세계 최초의 광고 대리점이 창설되었다. 즉, 자본주의가 보다 중요한 지점으로 옮겨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폴레옹의 패배는 전유럽에 '복고(정통, 보수, 반동)주의'의 바람 '메테르니히 체제' 가져왔다. 



프랑스 시민혁명의 기운은 이미 전유럽 시민사회에 속속들이 스며들었으나 메테르니히 체제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사회 분위기는 냉각되었다. 1848년 맑스, 엥겔스는
"공산당선언"을 작성하여 출판한다. 1866년엔 프로이센 중심의 독일 통일을 위한 전쟁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이 일어났다. 이런 분위기의 독일에서 자유주의와 시민에 의한 개혁은 발 붙일 자리를 잃었고, 독일 사회는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한 통일을 위한 '병영사회'가 되어갔다. 영국의 웰링턴 장군은 나폴레옹 군대를 격파한 뒤  “워털루의 승리는 이튼 교정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 말을 독일식으로 바꿔보면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의 승리는 신무기인 후장식 소총의 도입이 아니라 프로이센 교사들의 몽둥이 찜질에 의한 훈육 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독일 국민들에게는 1866년부터 일반적이었다. 독일의 민족주의는 모든 면에서 군대식으로 각을 잡은 직각형 인간들을 선호했다. 그들에게 직장에서 빈둥거린다거나 공연히 공적인 장소에서 모나게 행동하는 일탈 행위를 처벌하는 것이 사회적 책무라고 여겼다. 파시즘은 직각을 사랑한다. 빌헬름 부쉬는 이런 사회 분위기와 관료들을 비롯한 통치 체제를 날카롭게 풍자하는 작품들을 잇따라 발표한다. 

막스와 모리츠 - 일탈이 곧 죽음인 사회
그렇게 생각해보니 빌헬름 부쉬의 "막스와 모리츠"도 이해될 수 있었다. 막스와 모리츠의 장난은 다소 심하긴 했다. 그러나 그들의 장난이 마을의 평온을 잠시 흔든 것이긴 하지만 볼테 아주머니는 닭털을 뽑아 맛 좋은 닭 훈제구이를, 양복쟁이 뵈크는 젖은 옷을 말리면 되었다. 모리츠의 삼촌도 벌레들을 인정사정없이 짓밟아 죽인 뒤에 다시 평온한 잠자리에 들지 않았는가? 그러나 이 평온한 마을은 막스와 모리츠를 용납해주지 않았다. 그들은 탈곡기에 들어간 뒤 고루 획일적인 낟알이 되어 나왔다. 빌헬름 부쉬의 이런 풍자가 나를 웃을 수도, 울 수도 없게 만든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된 이 동화책에는 그런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그뿐만 아니라 작가 소개도 빈약하다. 아동문학평론가 김경연 선생의 미디어 리뷰를 보니 번역에도 다소 문제(번역은 이 작품의 풍자적 성격보다는 막스와 모리츠의 ‘장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 김경연, 국민일보)가 있었던 모양이다. <경향신문>에 게재된 이 책의 옮긴이들이 했다는 말 "어린이책 코디네이터 모임 ‘곰발바닥’은 유익하지는 않아도 실컷 웃을 만한 책”이라고 소개했다는 말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건 둘째고, 화가 날 지경이긴 하지만 그건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작품이 지닌 감동이나 생각할 거리의 유익함은 전혀 줄어들지 않는다. 그런 역사적 배경 따위 몰라도 괜찮다.



좋은 작품은 작품 그 자체로 말해주기 때문이다.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를 '기독교 이전의 로마'와 '기독교 이후의 로마'로 구분한다. 기독교의 유일신앙이 기존 로마의 다신교적인 기풍, 즉 자유로움과 융통성을 앗아갔다고 비판한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중국을 보면 성리학 이후의 중국에선 여성의 발을 옭죄는 전족이 유행하기 시작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어느 순간부터 어린이 교육에 있어 창의력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창의력은 자유로운 상상에서 비롯되지만, 내 아이가 태양을 검게 그리면 부모들은 뭔가 우리 아이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걱정하기 시작한다. 태양은 붉은 것이란 교육을 받은 부모가 아이들의 창의력에 간섭하기 시작한다. 아이들을 미래의 어른이란 근시안적인 시선으로 지켜보는 동안 아이들의 창의력은 저절로 고갈되고 말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 동화를 마치
"호랑이와 곶감"에서처럼 울면 '호랑이가 와서 물어간다'는 식으로 아이들을 윽박지르는 반면교사의 교훈을 삼기 위해 만들었고, 그런 의미에서 훌륭한 동화라 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런 설정 자체가 이 동화를 오해하는 지름길이 아닐까?

만약 이 동화에서 우화적인 풍자의 교훈이 아닌 아이들을 교육하기 위한 훈육의 의미로서의 풍자로 이해한다면, 이 책이 주는 교훈은 실로 비루한 것이 되고 만다. 독일인들이 빌헬름 부쉬의 동화를 오해한 결과
- 프로이센의 병영같은 학교에서 아이들의 일탈을 강하게 통제하고, 몽둥이 찜질을 가하고, 훌륭한 병사, 국가를 위한 동량으로 길러내 - 가장 민주적인 제도를 갖춘 바이마르 공화국이 가장 폭력적인 나치 독일로 탈바꿈하게 된 것은 아닐까? 그 결과 막스와 모리츠 같은 사회적 일탈자들은 그들이 탈곡기에서 낟알이 되어 나온 것처럼 강제수용소란 탈곡기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고, 파시즘이 원하는 직각형 인간으로 바뀐 '과거의 어린이, 미래의 어른'들은 전장의 이슬로 사라진 것이 아닐까? 가장 민주적인 제도를 갖춘 나라일지라도 가장 민주적인 시민을 얻지 못한다면 결국 민주국가 수립은 요원한 일이 아닐까? 빌헬름 부쉬의 이 책을 통해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은 막스와 프리츠와 같은 악동, 사회적 일탈을 꿈꾸는 어린이가 아니라 그들을 탈곡기에 집어 넣고 낟알로 만들고 싶은 우리 어른들의 몫일 것이다. 

만약 당신에게 우리 사회가 허용하는 자유의 폭이 어느 정도인가 알고 싶다면 먼저 당신이 타인에게 허용하는 자유의 폭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면 된다. 당신이 타인에게 허용하는 자유의 폭만큼 당신에게도 그 자유가 허용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양성이 인정되는 사회, 광범위한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에서는 '일탈'의 허용범위가 넓고, 그만큼 폭력적인 범죄의 비율이 낮다. 그러나 획일성이 강요되는 사회, 개인의 자유가 극도로 제한되는 사회는 그 사회가 규정하고 있는 '정상'의 범위가 협소하고, 자신들과 조금만 다르면 폭력적으로 이를 교정하려 한다. 사회적 소수자들을 비정상으로 여기고, 이들을 소외시키는 사회는 결코 건강할 수 없으며 이들을 용납할 수 없다는 의식은 결국 폭력적인 해법을 불러들이게 된다.  일탈에 대해, 마이너리티에 대해 관대한 사회는 전체주의, 편견에 가득찬 협소한 정상(?)의 사회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사회적 에너지를 생산해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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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회의는 춤춘다. 그러나 진전은 없다(Der Kongress tanzt viel, aber er geht nicht weiter)."
- 샤를 조제프 라모랄 리뉴(Charles-Joseph, 7th Prince of Ligne, 1735.5.23. 브뤼셀 - 1814. 12.13. 비인)



유럽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국제회의 - 빈회의

역사상 최초의 근대적 국제회의로 알려진 베스트팔렌조약(Peace of Westfalen, 1648)은 1618년부터 1648년까지 독일을 주요 무대로 신교(프로테스탄트)와 구교(가톨릭) 간에 벌어졌던 ‘30년전쟁(Thirty Years' War)’을 매듭짓기 위해 열린 회의였다. 유럽통합, EU 출범의 기원을 1951년 체결된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를 기점으로 삼는 것이 정설이긴 하지만 역사적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나는 최초의 유럽회의인 베스트팔렌조약까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회의는 최초의 국제회의였던 데다가 가장 치열하고 장기간에 걸쳐 치러진 종교전쟁의 마무리를 위한 회의였던 만큼 회의에 참가했던 각국이 서로 주도권을 잡기 위해 의석은 물론 자리배치와 같은 사소한 의전절차에 이르기까지 모두 처음부터 새로 규정해야만 했기 때문에 정식 의제에 도달하기까지 상당한 진통을 겪어야 했기 때문에 최종적인 합의에 이르는 데까지 2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그러나 회의가 잘 진행되지 않기로는 1814년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 열렸던 빈 회의(Congress of Wien)를 손에 꼽지 않을 수 없다. 베스트팔렌이 30년전쟁의 마무리를 위해 열렸던 것처럼 빈회의는 유럽을 뒤흔든 프랑스대혁명과 나폴레옹전쟁의 결과를 수습하기 위해 열렸다. 이 회의의 주최자는 당시 오스트리아 외상(外相)이었고, 훗날 오스트리아의 재상(1821)이 되었던 메테르니히(Metternich, Klemens Wenzel Nepomuk Lothar von/1773 ~ 1859)였다. 1789년 시작된 프랑스대혁명은 1814년 3월 31일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 프로이센의 빌헬름3세와 오스트리아 사령관 슈바르첸베르크 등이 이끈 군대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 입성하면서 끝났다. 한때 나폴레옹의 외무장관이었던 탈레랑(Charles-Maurice de Talleyrand, 1754-1838) 공작이 주요관문을 열어준 배신 덕분이었다. 황제 자리에서 쫓겨난 나폴레옹은 무장경비병들의 엄중한 감시 속에 엘바섬으로 유배되었다.


나폴레옹이 퇴위한 뒤 메테르니히는 파리조약에 따라 프랑스가 포기한 영토 처리 문제 등 산적한 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빈 회의를 개최하게 된다. 빈회의는 나폴레옹이 점령하여 자신의 일족과 공신들에게 나누어주었던 프랑스 이외의 영토들이 파리조약에 의해 무주공산(無主空山)이 되어버린 영토들을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방법으로 재분배해야 한다는 무거운 숙제를 짊어지고 있었다. 또 유럽 각국에서 군주와 지도적 정치가가 모인 대회였기 때문에, 실제상의 강화회의라 해도 무방하다. 유럽의 크고 작은 90개의 왕국과 53개 공국(公國)의 군주, 정치가들이 참가하는 유럽 역사상 최대 규모의 회의였기 때문에 오스트리아 정부는 각국 대표들을 접대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거액을 투자해야만 했다.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비인에 도착한 각국 대표들을 접대하는 실무 책임은 장 자끄 루소, 볼테르 등 계몽철학자들은 물론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2세(Joseph II) 황제의 친구, 예카테리나 여제 등을 모시기도 했던 벨기에 출신의 오스트리아의 장군 샤를 조제프 라모랄 7대 리뉴(Charles-Joseph, 7th Prince of Ligne, 1735. 5. 23. 브뤼셀 - 1814. 12. 13. 비엔나) 공(公)이 맡았다.


샤를 조제프 라모랄 리뉴 공

샤를 조제프 라모랄은 1735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오스트리아의 귀족으로 오랫동안 군에 몸담았던 제6대 리뉴 공인 클로드 라모랄(Claude Lamoral, 6th Prince of Ligne)과 엘리자베트 알렉상드린 드 잠(Elisabeth Alexandrine de Salm)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 역시 부친을 따라 어린 나이에 오스트리아 제국 육군에 입대했는데, 7년전쟁(Seven Years' War)에 참전해 브레슬라우(Breslau), 로이텐(Leuthen) 전투 등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펼친 덕분에 전후 소장으로 진급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막대한 영지를 물려받아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그는 오스트리아의 황제 요제프 2세와 매우 가까운 친구이자 고문이었다. 바바리아계승 전쟁이 벌어지자 참전했다가 전쟁이 끝나자 병영을 떠나 영국, 독일, 이탈리아, 스위스, 프랑스 등지를 여행하며 각국의 철학자, 과학자들과 교분을 쌓으며 유럽의 사교계에서 가장 인기있고, 교양있는 인물로 떠올랐다. 그가 프랑스의 계몽철학자들과 교분을 맺은 것은 이때였다. 스위스 접경지대인 페르네에 은거하고 있던 볼테르를 방문한 자리에서 카사노바(Giovanni Giacomo Casanova, 1725~1798)를 처음 만나게 되었는데, 그의 매력에 흠뻑 빠진 리뉴 공은 "그가 무슨 말을 하던 계시가 되고, 무슨 생각을 하던 책이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1784년 다시 군무에 복귀한 리뉴 공은 포병사령관(Feldzeugmeister)으로 진급했는데, 1787년엔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Ekaterina II, 1729-1796)를 수행하여 크리미아 반도를 여행했고, 1788년 러시아-투르크 2차 전쟁에서 벨그라드(Belgrade) 포위전에 참가한 공로로 러시아 육군 원수에 임명되기도 했다. 벨그라드 포위전 이후 그는 자신의 고향이자 친척들은 물론 아들들까지 참가하고 있던 벨기에혁명운동의 수장으로 초빙되었지만 황제와 오스트리아에 대한 충성심으로 거절하며
"그는 결코 겨울에는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다(He never revolted in the winter)"란 말을 남기고 벨기에를 떠나 오스트리아로 망명(?)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영지인 브라반트를 잃었다. 황제의 신임을 얻을 수 있었던 덕분에 그는 황제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 머물며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기며 자신의 저술들을 정리하고 쓸 수 있는 여유를 누릴 수 있었다. 그의 말년에 개최된 빈회의에서 리뉴 공은 유럽 각처에서 모여든 왕과 귀족들을 접대하는 책임을 맡았다.


각국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며 지지부진을 면치 못한 빈회의

빈회의는 국제회의란 이름이 붙긴 했지만 대개의 국제회의들이 그러한 것처럼 실제로는 대프랑스 전쟁에서 주축을 이루었던 오스트리아·영국·러시아·프로이센의 4대국과 그 당사자였던 프랑스의 5개국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프랑스는 비록 패전국이긴 했지만 탈레랑의 뛰어난 외교적 책략 덕분에 4대국에 버금가는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이외의 나머지 국가들은 이들 강대국이 내리는 결정이 자국의 이해에 손실로 돌아오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회의의 추이를 살펴보는 정도에 그쳤고, 실제로도 참가국 전체가 한 자리에 모이는 전체회의는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통신이동수단이 발달한 오늘날엔 국제회의가 개최되기 전까지 사전에 실무자들이 계속 안건을 조정하고, 조율하는 정지작업들이 수반되기 때문에 정상회의는 이를 추인하는 정치적 요식행사에 불과하지만 이 당시의 회의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강대국을 제외한 나머지 참가자들은 마땅히 할 일이 없었고, 그냥 돌아가자니 빈 회의가 다루는 주제나 안건이 너무 묵직했기 때문에 나머지 참가자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당시 오스트리아는 전 유럽에서도 가장 번화한 거리와 화려한 예술과 문화가 넘쳐나는 곳이었고, 메테르니히는 이들 유럽의 대표자들에게 오스트리아 제국의 국력을 한껏 자랑하고 싶었기 때문에 회의장 주변에선 연일 파티와 무도회, 성대한 연회와 귀족과 귀부인들의 사교적 만남이 벌어졌다. 프랑스 대표로 참여했던 탈레랑에 따르면 하루 일과 중 4분의 3이 연회와 흥겨운 왈츠로 채워졌다. 회의가 난항에 부딪히면 부딪힐수록 연회와 무도회는 더욱 화려해졌고, 그 화려함의 이면에는 영토를 둘러싼 각국의 이전투구(泥田鬪狗)가 더해졌다.


- 빈 회의가 열렸던 오스트리아 쇤브룬(Schonbrunn)궁전 내부 '거울의 방'


빈 회의가 이처럼 지리멸렬하게 된 까닭은 나폴레옹이라는 거대한 적(賊)을 상대하기 위해 연합했던 유럽의 강대국들이 이제 나폴레옹이 남긴 거대한 유산을 앞에 두고 조금도 손해를 보지 않으려 들었기 때문이었다. 조금의 진전도 없이 계속해서 늘어지기만 회의 속에 어느덧 체력도 바닥나고, 참을성도 없어진 오스트리아의 늙은 장군 리뉴 공은 자신의 친구들에게
"회의는 춤춘다. 그러나 진전은 없다(Der Kongress tanzt viel, aber er geht nicht weiter)."라고 편지를 쓴다. 결국 그는 빈회의가 끝나는 것을 보지 못하고 1814년 12월 13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세상을 떠난다. 당대 최고의 인기 있는 명사로 그가 남겼던 저술이나 오스트리아의 장군으로서의 업적은 시간이 갈수록 퇴색하고 결국 잊혀져갔지만 그가 빈회의를 바라보면 남긴 한 마디 "회의는 춤춘다. 그러나 진전은 없다"는 말은 역사가 바뀌어도 빈번히 개최되는 실속 없는 국제회의 때마다 여러 사람의 인구에 회자되는 명언으로 기억되고 있다.


돌아온 공동의 적과 메테르니히 체제

빈 회의가 급물살을 타게 된 것은 영원히 사라진 줄 알았던 그들의 적 나폴레옹이 1815년 2월 26일 감시병을 피해 엘바섬을 탈출해 프랑스 프레쥐 해안에 상륙했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의 프랑스 상륙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았는데, 그를 체포하라고 파견한 병사들이 돌아온 나폴레옹의 첫 번째 병사가 되었고, 그가 파리를 향해 다가오면 올수록 대중의 환호성도 더욱 커져만 갔다. 황제군의 뛰어난 장군이었던 미셸 네(Michel Ney, 1769-1815) 원수는 루이 18세에게 "반드시 나폴레옹을 철창에 넣어 파리로 데려오겠다"고 맹세했지만 막상 나폴레옹을 만나자 자신의 병사들이 복위한 부르봉 왕가의 왕보다 폐위된 전임 황제를 더 열렬히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 역시 옛 황제의 충성스러운 장군으로 되돌아가버렸다.

- Vasily Ivanovich (Wilhelm) Sternberg - Napoleon returning from Elba


더 이상 화려한 무도회로 시간을 끌 수 없었던 빈 회의의 참가자들은 프랑스의 탈레랑이 제시한 ‘정통주의(Legitimisme)’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다시 말해 과거 프랑스나 나폴레옹 제국이 점령했던 땅은 아무런 조건 없이 원래의 주인(정통 군주)에게 돌려주고, 옛 주인이 없어져 임자 없는 땅이 된 영토를 차지하려면 그만한 대상을 대신 내 놓아야 한다는 원칙이었다.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기 직전인 1815년 6월 9일, 오스트리아, 영국, 프로이센, 러시아, 프랑스 등 5개국은 비밀리에 최종적으로 합의서를 작성했는데 이것이 바로 ‘빈 의정서’였다. 프랑스대혁명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결과를 아예 처음부터 없었던 사건이었던 것처럼 과거로 되돌리려했기 때문에 빈회의에 의해 만들어진 이 체제를 빈체제 혹은 메테르니히 체제라 부르는 보수반동적인 국제질서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미 프랑스대혁명의 자유주의 세례를 받은 시민들은 과거로 돌아갈 수 없었고, 메테르니히와 유럽 열강들이 만든 체제를 조롱하며 거세게 저항했다.


“회의는 춤춘다. 그러나 진전은 없다”의 가장 비근한 사례

- 2010 서울 G20 정상회의
베스트팔렌조약에서 빈회의에 이르기까지 국제회의의 대부분은 한 나라의 입장에선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난제를 처리하거나 여러 나라들이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이해관계를 조정하기 위해 열린다. 그룹을 뜻하는 영문 Group의 앞 철자를 따서 ‘G20 정상회의’라고 불리는 이 국제회의는 1974년 오일쇼크로 세계 경제가 휘청거리기 시작하면서 만들어진 선진 7개국 정상회의 ‘G7(미국·프랑스·영국·독일·일본·이탈리아·캐나다)’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G7’ 출범의 주된 요인을 ‘오일쇼크’만으로 기억한다면 겉으로 드러난 현상만 보고 심층적인 원인에 대해서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의 불안정으로 인해 발생하게 된 세계경제대공황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월가의 주가폭락으로 시작되었고, 대공황의 최종해결책은 제2차 세계대전이었다. 전후 미국을 비롯한 세계 주요열강들은 경제위기가 세계적인 갈등과 열전으로 비화되는 것을 국제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모색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세계 최강대국으로 떠오른 미국의 이해관계(달러를 기축통화로 결정)가 일방적으로 관철된 브레턴우즈체제가 출범하게 된다.


미국의 패권적 우위와 서구 선진국들의 경제적 이해가 담합하여 만들어진 브레턴우즈 체제로부터 소외된 국가들(아시아, 중동,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등)은 서구에 종속된 정치경제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로 국제적인 연대체인 비동맹 체제 ‘아시아 아프리카 회의(반둥회의)’를 출범시킨다. 이들이 국제연합(UN)을 배경으로 브레턴우즈체제에 도전하면서 만들어진 것이 국제연합무역개발회의(United Nations Conference on Trade and Development, UNCTAD)였는데, 이 기구는 강대국들이 주도하는 국제질서에 맞서 약소국들의 목소리를 결집할 수 있는 효과적인 장이었다. 미국이 UN에 대해 불만을 품고, UN을 개혁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 것이 이 무렵의 일이다. 개발도상국과 후진국들은 4년마다 열리는 UNCTAD 회의를 통해 자국 경제를 보호하기 위해 다국적 기업을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주요 생산 설비와 천연자원을 국유화해야 한다는 입장을 천명했다. 또한 농산품 및 원자재 수출에 의존하는 국가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국제 무역 체계를 개혁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들이 실제 실력행사에 나선 것이 바로 1960년에 설립된 석유수출국기구(Organization of the Petroleum Exporting Countries, OPEC)이 1973년의 오일파동의 본질이었다.


제3세계 비동맹 국가들의 거센 도전과 맞닥뜨린 브레턴우즈체제, 다시 말해 초국적 금융자본 역시 이들의 저항을 넘어서기 위한 시도로 1986년부터 GATT(General Agreement on Tariffs and Trade,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 체제의 우루과이 라운드를 출범시키는데,  UR의 결과로 GATT는 1995년 WTO(World Trade Organization, 세계무역기구)로 개편되었고, 이 과정에서 개발도상국들은 자국 경제를 보호할 수 있는 경제정책수단들 가운데 상당수를 빼앗기고 말았다. 이 시기부터 초국적 금융자본들은 세계 각국의 통화위기를 기회로 일국주의적인 정부 정책을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하부로 끌어들였다. 이에 저항한 나라들은 거의 대부분 외환위기를 경험하게 되었고, 결국 미국이 주도하는 IMF의 관리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세계 여러 나라들이 한꺼번에 참여하는 일괄타결방식의 WTO협상은 계속해서 난항을 겪었고, 초국적 금융자본이 원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반대하는 국제적인 연대와 저항의 움직임과 맞부딪치며 좌절되기도 했다.


지난 1999년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금융자본주의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미국 시애틀에서 개최된 WTO협상은 전 세계에서 모여든 시민사회세력과 미국의 노동자들이 한데 모여 세계화 반대시위를 벌인 '
시애틀 전투(Battle of Seattle)'로 좌절되었다. 이후 WTO협상은 개최될 때마다 세계 곳곳에서 민중들의 거센 저항에 직면하여 급기야는 걸프만의 작은 섬, 사막과 바다로 격리된 카타르의 도하에서 도망치듯 열려야만 했다. 이처럼 WTO협상이 계속해서 어려움에 처하자 미국은 나라와 나라, 지역 간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함으로써 개별돌파전략을 수립한다. 1994년 1월 신자유주의적 경제 통합의 전범(典範)이라 할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등장하면서 WTO와 우루과이 라운드 역시 탄력을 받기 시작한다.



쌍둥이 무역적자에 시달리고 있는 미국은 재정적자 위기를 세계기축통화인 달러의 발행으로 상쇄시킴으로써 그 부담을 무역흑자를 통해 높은 달러보유액을 가지고 있는 나라들에 전가시키는 전략을 여러 차례 구사해왔다. 1970년대 독일, 1980년대 일본, 그리고 지난 1990년대 후반 아시아를 강타한 외환위기의 원인이 거기에 있었다. 지금까지 소외되어 왔으나 이후 경제규모가 확대되면서 자기 목소리를 내게 된 신흥국들과 선진국들 사이에 국제협력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1999년 G7 국가와 브라질·인도·중국·한국 등 주요 신흥국의 재무장관이 모여 회의를 열고 G20 재무장관·중앙은행총재 회의를 열기로 합의한 것이 G20이다. 좋게 말하면 G20은 이제 개발도상국을 벗어나 선진국의 대열로 발돋움하고 있는 나라들까지 포함시켜 세계 경제정책을 논의하는 자리이지만 나쁘게 보면 그동안 미국의 경제위기를 감당해오던 G7국가들의 노력만으로는 더 이상 미국의 경제위기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그 책임분담을 다른 신흥개발국가들까지 전가시키기 위해 문호를 개방한 것이다.


G20이 출범하게 된 원인을 살펴보면 이런 사실이 더욱 극명해지는데 잘 알려져 있다시피 미국의 투자은행인 리먼 브러더스의 파산으로 시작된 금융위기가 전 세계를 강타한 결과물이라고 보아야 정확할 것이다. 미국발 금융위기가 발생하자 미국은 G20 재무장관회의 참가국 정상들을 워싱턴으로 초청해 국제 금융위기 극복 방안을 논의했는데, 이것이 제1차 G20 정상회의이다. 그 다음 회의는 2009년 4월 영국 런던에서 열렸고 9월 미국 피츠버그에서 열린 제3차 회의에서는 각국이 G20 정상회의의 정례화에 합의하였다. 4차 회의가 지난 6월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렸고, 이번 11월 서울에서 개최되는 G20 정상회의는 제5차 회의이다.


전후 세계기축통화로 자리 잡은 달러 화(貨)의 위기는 미국의 적자와 신자유주의 체제의 근본적인 결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미 연방준비은행은 지난 2008년 금융위기 직후부터 이미 1조7천억 달러 달러를 인쇄해 풀었고, 이번 서울 G20정상회의를 앞두고 6천억 달러를 추가로 발행할 계획이라며 환율전쟁에 불을 붙이고 있다. 미국은 독일, 중국, 브라질을 비롯한 G20국가들이 미국의 채무를 달러화 약세를 통해 공동 부담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는데, 이것이 지난 1차 회의 때부터 현재까지 해결되지 않고 있는 미국의 재정위기를 타개할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을 비롯해 과거 미국의 적자를 떠안으며 경제적으로 커다란 위기를 경험했던 독일, 일본 등이 미국의 이런 방침을 쉽사리 수용하지 않는 상황이기 때문에 G20정상회의가 거듭되고 있는 것이다.


세계 경제의 86%를 쥐락펴락하는 부자나라의 정상들이 G20정상회의를 정례화한 이유는 회원국 정상들이 모여 함께 춤이나 추며 친목이나 다지는 MT를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들이 지금 매우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G20 서울 정상회의의 결과가 나왔다. 그러나 회의를 통해 발표된 내용을 살펴보면 결정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세계 최고의 문화행사라도 유치한 양 온갖 미사여구로 치장하고 있지만 그 본질은 결국 미국의 빚잔치에서 조금이라도 덜 손해를 보고 싶은 세계 여러 나라들의 몸부림, 그것이 G20이다.


“회의는 춤춘다. 그러나 진전은 없다”
의 가장 확실한 사례, 그것이 바로 이번 G20 서울 정상회의였다. 우리 이명박 대통령이 G20 정상회의를 훗날 무어라 평할지는 몰라도 역사는 이렇게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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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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