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전집』 - 백석 | 김재용엮음 | 실천문학사(2003)


백석전집 혹은 "백석"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쯤 해보자고 마음 먹은지는 상당히 오래되었다. 그럼에도 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아직도 어렵다.

 

"밤이 깊어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르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하고 제비손이손이하고이렇게 화디의 사기방등에서 심지를 몇 번이나 돋구고 홍게닭이 몇 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릇못싸움 자리싸움을 하며 히드득거리다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치는 아침 시누이 동세들이 욱적하니 홍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틈으로 장지문틈으로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 '여우난골족(族)' 중에서>

 

백석의 시 "여우난골족" 중 뒷부분만 발췌해봤다. 과연 저 시를 읽으며 중간에 사전 혹은 다른 해설 없이 읽는 것이 쉬운 일일까? '엄매'는 엄마일 테고, '아르간'은 '아랫간'일 테지만, '조아질'이라니 이건 무슨 말일까?

 

백석의 시를 좋아하는 이들이 부쩍 많이 늘었다. 지금 30대 이상인 사람들은 백석이란 이름을 교육 과정을 통해서는 한 번도 접해볼 수 없었다. 그런 시인이 어디 백석뿐이랴. 우리는 김기림(金起林), 박팔양(朴八陽) 등 소위 월북작가로 분류되었던 이들의 시를 접할 기회가 없었다. 백석을 비롯한 이들이 해금되어 본격적으로 다뤄지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반부터의 일이었다. 시인 고은(高銀)은 백석의 시를 “근대 시사(詩史)에서 가장 빛나는 시 중의 하나”라고 평했다. 고은뿐만 아니라 시인 신경림은 "내가 우리 시에서 단 하나만 꼽으라 해도 서슴지 않고 꼽는 시인이 백석이다"라고 단언하기도 했다. 문학평론가 김현은 "백석의 시 '남신의 주류동박시봉방'은 한국시가 낳은 가장 아름다운 시 중의 하나다"라고 말하며 그의 시가 지닌 아름다움에 아낌없는 헌사를 바치기도 했다.


 ▶ 아오야마(靑山) 학원 3년 무렵의 백석

그런 시인이 오랫동안 묶여 있었으니 우리 문학사에 드리워진 냉전과 분단의 그림자는 한반도의 허리만 두동강낸 것이 아니었다. 백석은 1912년 평북 정주에서 출생했다. 그의 본명은 백기행(白夔行). 1929년 오산고보를 졸업한 뒤 그는 도쿄로 건너가 아오야마(靑山) 학원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그가 필명으로 백석(白石)을 사용한 것은 일본 시인 "이시카와 타쿠보쿠(石川啄木)"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일본에서 새로운 문물과 문화를 익혔고, 1935년 조선일보에 '정주성'을 발표하며 문단에 나온 뒤 그의 별명은 '모던보이'였다. 그의 시가 한없는 토속성에 기대어 있는 것과 상관없이 그의 잘생긴 외모와 풍기는 멋으로 인해 지어진 별명이었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중에서>

 

백석의 고향 정주는 눈이 많은 곳이었다. 그가 수원 백씨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의 시에서 백색의 이미지는 고향 정주의 휘날리는 눈발과 함께 백석의 시세계의 주된 심상 중 하나이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 그에게 내리는 눈은 그냥 내리는 눈이 아니라 '가난한 내가' '나타샤'를 사랑하기에 내리는 눈이다. 나타샤, 자야(子夜)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진 김영한은 1916년 서울에서 태어나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했다. 원래 가난한 집안 출신은 아니었으나 어머니가 친척에게 속아 가산을 탕진하고, 거리에 나앉게 되어 조선 권번에 들어가 기생이 된 여인이었다. 자야의 기명은 진향(眞香). 당시 기생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기생과는 다른 의미에서 신여성이었다.



 

김영한은 당시 함흥 영생여고 교사들의 회식 장소에 나갔다가 우연히 백석을 접하게 된다. 백석은 김영한에게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에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내 사랑 백석’에서>라고 말했다 한다. 김영한에게 자야라는 아호를 지어준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子夜吳歌

李白

長安一片月 장안의 한조각 밝은 달 밤에
萬戶擣衣聲 집집마다 다듬이 소리 들려오고
秋風吹不盡 가을바람 소리 그치지 않으니
總是玉關情 이 모두 옥관을 향한 정이리라
何日平胡虜 어느 날에야 오랑캐 평정하고
良人罷遠征 원정 마치고 우리 낭군 돌아올까

 

이 시는 서역 원정을 나선 연인을 기다리는 여인의 정조를 그린 시이다. 김영한에게 자야라는 호를 지어준 탓일까. 백석과 자야는 이렇듯 평생을 서로 연모하며 지내야 할 운명이었다. 자야가 서울로 돌아온 뒤 백석은 학교를 그만두고, 백석을 따라 서울 청진동으로 올라와 두 사람은 혼례도 없이 살림을 차린다. 이상과 금홍이가 이 시절 그러했던 것처럼... 백석은 자야를 통해 많은 시적 영감을 얻는다.

 

바닷가에 왔드니
바다와 같이 당신이 생각만 나느구려
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

 

구붓하고 모래톱을 오르면
당신이 앞선 것만 같구려
당신이 뒤선 것만 같구려

 

그리고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
당신이 이야기를 끊는 것만 같구려
<'바다' 중에서>

 

그러나 두 사람의 사랑이 오래가지는 못했다. 백석의 아버지는 이 사실을 알고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을 떼어내기 위해 강제로 결혼을 시킨다. 부모의 강요에 못이겨 결혼하였으나 자야를 잊지 못한 백석은 다시 자야에게 도망질쳐 온다. 동경 유학생 백석과 자야는 그렇게 뜨거운 사랑을 불태웠으나 결국 사랑을 이루지 못했다. 백석은 자야에게 함께 만주로 도망쳐 살자고 했으나 자야는 이를 거절했다.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중에서>

 

자야, 아니 나타샤는 끝끝내 오지 않았다. 자야는 자신 때문에 한 명의 훌륭한 시인, 아니 자신의 연인이 행보에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었다. 결국 1939년 백석은 '100편의 시를 담고서' 돌아오겠다는 결심을 하고, 홀로 만주 신경으로 떠난다. 두 사람은 이것이 영원한 이별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만주에서 잠시 세관 업무를 하기도 했으나 해방 이후엔 고향 정주로 돌아와  ‘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을 발표한다.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끝에 헤메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남신의주(南新義州) 유동(柳洞) 박시봉방(朴時逢方)' 중에서>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은 그가 분단 이전에 발표한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백석에게 '월북 작가'란 딱지를 붙이는 것은 잘못된 것이었다. '남의 정지용, 북의 백석'이라고 하듯 백석은 한 번도 월북한 적이 없었다. 그의 고향이 평북 정주였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죄가 있다면 '월북'한 것이 아니라 '월남'하지 않은 것이겠지만, 그에게 고향이 담고 있는 의미를 생각한다면 쉽게 결론지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북관(北關)에 혼자 앓아 누어서
어느 아침 의원(醫員)을 뵈이었다
의원은 여래(如來) 같은 상을 하고
관공(關公)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옛적 어느 나라 신선 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더니
문득 물어 고향이 어데냐 한다
평안도 정주라는 곳이라 한즉
그러면 아무개씨 고향이란다
그러면 아무개씰 아느냐 한즉
의원은 빙긋이 웃음을 띠고
막역지간(寞逆之間)이라며 수염을 쓸는다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의원은 또 다시 넌지시 웃고
말없이 팔을 잡아 맥을 보는데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故鄕' 전문>

 

백석의 시에서는 평안북도의 토속 방언들이 생생하게 묻어나고 있다. 해방 이후까지 박인환이 모더니즘의 독소로부터 헤어나오지 못하는 동안, 김수영이 모더니즘을 '근대를 향한 모험'으로 삼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평생을 노력한 것을 생각해보면 그보다 훨씬 이른 시기라 할 수 있는 1930년대 백석은 '근대'라 할 수 있는 '모더니즘'과 '전근대'라 할 수 있는 '민족'을 결합해냈다.



  1980년대 중반 백석이 70대 중반일 무렵 촬영한 가족사진. 백석 옆이 부인 이윤희씨, 뒤는 둘째아들(중축 씨)과 막내딸.

오랫동안 금기였던 시인이었기 때문일까? 1987년의 해금 이후 이동순의 "백석 시전집"을 비롯해 내가 알고 있기로만 "백석 시전집"은 네 차례에 걸쳐 만들어졌다. 평생을 살며 시를 쓰지만 전집은 커녕 한 권의 시집을 묶기도 쉽지 않은데 비해 어쩌면 그는 호사를 누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백석의 시전집은 아직도 미완성일 게다. 이동순의 백석시전집에는 그가 북에 남아 있는 동안 쓴 시들은 누락되어 있고, 북한문학연구가 김재용(원광대 교수)의 이 전집은 백석이 북에 머무는 동안 쓴 동화를 비롯해 여러 작품들을 수록하고 있다. 제1부에서는 8.15이전에 발표된 그의 첫시집 "사슴"에 수록된 작품을 비롯해서 이에 수록되지 않은 작품들과 수필, 소설 등을 담고, 제2부에서는 8.15 이후 즉, 그가 북한에 머무는 동안 발표한 작품들을(여기에는 국내에도 동화로 출판된 바 있는 백석의 동화시 '집게네 네 형제'가 포함되어 있다)을 수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어디 전부일까. 사실 김재용 교수의 "백석 전집"은 가치있는 책이긴 하지만 몇 가지 점에서 아쉬움을 남긴다. 앞서 '여우난골족'에서도 이야기했듯 오늘날 우리에게 백석이 살던 시기의 평북 방언이 생생하게 전달되기 어렵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이해하기 어려운 시어들에 대해서는 편집자주 처리를 해서라도 원뜻을 밝혀주었어야 한다. 다음 개정증보판에서는 이런 점들과 다른 미비점이 좀더 보충될 수 있기를 바란다.

 

한동안 백석은 1961년 '돌아온 사람' 등 3편을 "조선문학" 지에 발표한 뒤 숙청된 것으로 알려져 왔고, 1963년 52세를 일기로 사망했을 것이라는 설도 있었다. 지난 1999년 세상을 등진 자야 김영한은 매년 백석의 생일인 7월 1일 하루 동안은 일체의 음식을 먹지 않았다고 하는데, 실제 백석은 1995년 1월 8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밝혀졌다. 이 해에는 자야 김영한이 "내 사랑 백석"을 '문학동네'에서 발간하기도 했다. 김영한은 1997년 창작과비평사에 2억원을 재원을 출연해 '백석문학상'을 제정토록했다. 시집을 대상으로 선정하는 백석문학상은 1999년부터 수상되기 시작했다. 자야는 이 상이 처음 시행되던 1999년 11월 백석이 있는 세상으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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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판타지』 - 김서정, 굴렁쇠(2002)


문학의 위기를 말한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영상의 시대를 맞이하여 어떤 평자들은 소설은 이제 영상이 흉내낼 수 없는 방식으로 글을 쓰라고 말한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드는 생각은 그래서야 문학은 더욱 위기를 맞이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다. 이런 류의 주장들 - 문학은 영상매체가 따라올 수 없는 표현, 보다 복잡한 심리묘사와 난해한 이야기 구조를 지니는 방식으로 문학성을 고수해야 한다 - 은 어제오늘 나온 것은 아니다. 결국 이런 류의 주장은 모더니즘이 일찌기 주장했던 바이기도 하다. 그런 주장대로라면 앞으로의 문학은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소수의 사람들이 즐기는 고급한 예술로 점차 사멸해가는 장르가 될 수밖에 없다. 마치 서구의 고전음악이라고 불리는 장르가 현재 일정한 한계에 봉착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이것을 문학의 비타협적인 속성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문학이 세상과 불화한다는 것은 단순히 정치적(이때의 정치적이란 말의 의미는 현실정치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주류권력과 불화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뤼시엥 골드만은 소설 사회학을 위하여에서 소설을 "타락한 사회에서 가장 타락한 방식으로 진실을 추구하는 서사"라고 정의한 바 있다. 여기서 핵심은 "타락한 사회에서의 가장 타락한 방식"이 무엇인가?를 묻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진실을 추구하는 서사"가 무엇인가?를 묻는 일이다. 소설 문학은 이미 태생적으로 타락한 사회에 적응하는 방식으로 나타난 장르이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여전히 "진실을 추구하는 서사"로서의 위치를 놓치지 않는다.

 

문학의 위기란 결국 엄살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소설은 여전히 타락할 건덕지를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세상을 타락한 사회라고 인식한다면 할수록 소설은 그 가운데서도 가장 타락한 방식의 서사이므로 앞으로도 도 많이 추락할 수 있다. 그렇다면 소설은 어떻게 타락할 것인가? 그 방식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이 욕망의 무한 질주를 앞서는 서사를 채택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정반대의 길로 달려가는 것이다. 그 정반대의 길에서 만날 수 있는 장르 중 하나로 나는 판타지를 꼽고 싶다. 판타지하면 최근 성공리에 영화 시리즈를 마감한 톨킨의 판타지 소설 반지의 제왕을 먼저 떠올릴 수 있을 텐데, 이 소설 역시 출간 이후 금세기 이내 영화화되기는 어렵다는 평을 들었던 작품이다. 결국 세기를 넘겨 영화화에 성공했다.

 

판타지에 관한 책들을 찾다보니 주로 아동문학과 관련한 분야에서 세 권의 책을 보게 되었는데, 어린이 문학평론가인 김서정이 번역한 마리나 니콜라예바(Maria Nikolajeva)의 용의 아이들과 김서정 자신의 책 멋진 판타지, 이재복의 판타지동화세계가 그것들이다. 앞서 말한 『용의 아이들』은 어린이들이 주독서대상인 판타지동화에 대한 기호학적인 접근을 통해 어린이문학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히고 있다. 무엇보다 국내에 제대로 된 아동문학 개론서가 없는 현실이고 보면 『용의 아이들』이 지니고 있는 가치는 더욱 높아진다. 이 책은 그런 한국적 현실에 꼭 필요한 책이면서도 한국적 현실 자체는 누락되어 있다는 아쉬움을 남긴다. 한국의 어린이문학 현실에 필요한 책이지만, 한국의 어린이문학은 언급되지 않는다. 이에 대해서는 차차 이야기할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김서정의 멋진 판타지는 '어린이문학평론집'이라는 부제를 달고 '굴렁쇠'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은 전체가 3부의 구조로 꾸며져 있는데, 제1부 '판타지는 멋있다'를 통해 판타지란 무엇인가를 규정하고 있다. 판타지란 그리스말에서 나왔는데, '눈에 보이도록 하는 것', '현실로는 나타나지 않는 것을, 상상력의 힘을 빌어 어떤 특정한 모양으로 바꾸어 놓는 활동이나 힘 또는 그 결과'라고 한다. 저자에 따르면 판타지는 '현실 세계의 법칙을 깨뜨리는 이야기'이지만 이런 단순한 정의보다 중요한 것은 그런 요소들이 어떻게 '다른 세계'에 대한 생각을 끌어낼 수 있는가에 촛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이 세계와는 다른 또 하나의 세계, 다른 사람은 생각지도 못했던 나만의 세계를 뛰어난 상상력으로 만들어 내놓아, 읽는 이를 놀라고 감탄하게 하는 이야기" 그것이 바로 판타지라고 말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의문을 던진다. 전래동화도 판타지인가? 저자는 "전래동화는 이 세상이, 사람들의 이성으로 모두 설명할 수 있는 곳은 아니라고 말한다. 또 소박한 윤리, 도덕으로 단순하게 살아갈 수 있는 곳도 아니라고 말한다. 설명할 수 없고 받아들이기 힘든 삶도 모두 나름대로 귀한 것이라는 사실을, 논리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들려주는 것이 전래동화"라고 말한다. 매우 재미있는 해석이고, 공감할 수 있는 정의였다. 이 정의를 통해 우리는 전래동화 역시 판타지이며 훌륭한 전래동화, 판타지는 현실세계와는 다른 세계를 이야기하지만 결코 현실과 괴리된 꿈같기만 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속성을 알 수 있다. 저자는 제1부에서 판타지의 여러 덕목들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제2부 '잊혀지지 않는 이야기'에서 저자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서구의 동화들 - 단순히 동화라고 규정할 수 없는 철학우화들이라 할 수 있는 것들 - 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미하엘 엔데, 필리파 피어스, 루이스 캐럴, 엘윈 브룩스 화이트, 앨런 알렉산더 밀른,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등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으며(위엔 언급된 작가들 이외에도 많으나 편의상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만 언급) 뛰어난 작품들을 발표한 이들이다. 이들 가운데 특히 필리파 피어스의 한밤중 톰의 정원에서는 특이한 판타지이다. 반지의 제왕처럼 선과 악 사이의 처절한 전투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기이한 캐릭터들이 줄이어 나오지도 않는다. 도리어 아주 평범한 일상적인 풍경들 속에서 벌어지는 현실이 어떻게 판타지가 될 수 있을까? 저자는 그것을 "시간"이라고 말한다. 한밤중 톰은 시계를 바라보며 환상,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판타지의 세계로 들어간다. 영원할 것 같은 어린 시절은 일순간의 꿈과 같다. 한 번 흘러간 시간은 영원히 되돌릴 수 없다는 진부하기 짝이없는 교훈을 필리파 피어스는 짐짓 근엄한 표정으로 재미란 설탕가루에 버무려 준다.

 

다른 한 편으로 내가 이 책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은 부분은 린드그렌의 삐삐 롱스타킹에 대한 비평 '내 이름은 꼬마 혁명가'이다. 그것이 한국사회만의 특징인지 아니면 전세계 모든 어른들이 그렇게 사는지 모르겠지만, 어려서는 부모, 가족의 참견, 자라서는 학교, 사회의 참견을 받으며 살아간다. 아이가 어른이 되길 꿈꾸는 것은 더이상 부모의 참견을 받고 싶지 않다는, 어른이 되면 어린이가 할 수 없는 뭔가 그럴 듯한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라는 환상 때문이다. 어른이 되면 하고 싶은 일도 많지만, 할 수 있는 일도 참 많을 것이라는 환상은 어른이 되고자 하는 어린이의 마음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러나 막상 어른이 되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기껏해야 눈치를 안보고 담배를 피울 수 있다거나, 술을 마신다거나 하는 것들에 불과하다. 그나마를 즐기기 위해 어른이 된다는 건 참 비극이다. 그래서 어른들은 다시 어린이가 되고 싶어진다. 작은 호기심에 하루가 가는 줄 몰랐던 시절, 떠 가는 구름을 보며 시시각각으로 흘러가는 구름을 온종일 쳐다보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삐삐'는 어른과 아이의 환상을 한 몸에 버무린 존재다. 삐삐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한다는 점에서 아이들에게는 어른이고, 돈이 곧 자유라는 어른들의 환상 속에서 그는 돈 많은 어린이다. 아이 입장에서도, 어른 입장에서도 삐삐는 부러움을 한 몸에 받을 만한 존재다. 삐삐가 반권위적이란 점만 놓고 보면 그는 완벽한 아나키스트이다. 삐삐의 뒤죽박죽 별장에서는 세상의 권위, 예절, 질서, 체제 따위는 온통 뒤죽박죽이 되어버린다. 그런데 삐삐가 그런 전복적인 자유를 즐길 수 있는 요소들은 무엇인가? 그것은 말을 번쩍 들만큼 엄청난 힘과 해적 선장 아버지가 물려준 금화들, 그리고 무엇보다 천진난만하여 어른들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 말의 힘이다. 그렇다고 삐삐가 무척 논리적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삐삐는 논리적이라기 보다는 어린이기 때문에 보이는대로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다. 어른들은 논리를 가장하지만 그것이 진실은 아니다. 세상은 논리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어른들은 이미 내면화하고 있는 탓에 그들 자신의 논리가 천진난만한(?) 삐삐에게는 통하지 않는 것이다.

 

제3부 '독일동화문학과 판타지'는 208쪽에 불과한 얇고 작은 이 책에서 가장 작은 쪽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가장 이론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이 부분이 이 책의 전체에서 가장 활력이 없어 보인다. 게다가 저자가 언급하고 있는 부분들 - 독일동화문학은 낭만주의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으며, 독일 낭만주의는 독일 정신의 한 유산으로 인식되고 있다. - 에서 나는 한 가지 의문아닌 의문이 생겨났다. 그것은 판타지 문학 전체에 대한 것과도 연결된다. 전래동화란 개념, 전래동화가 본격적으로 채집되기 시작한 것은 고전주의 시대를 거쳐 낭만주의에 이르러서다. 낭만주의란 사조는 결국 민족주의와 깊은 연관을 맺게 된다. 히틀러가 바그너의 "니벨룽겐의 반지"를 연모한 것처럼 말이다. 낭만주의의 자기 파괴적 속성은 반합리주의와 연결되고 이는 다시 파시즘과 연결된다. 그런데 저자는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거의 전혀 연구가 없어 보인다.

 

앞서 판타지 문학이 지닌 덕목들 - 다른 세계에 대한 열린 상상력과 설명할 수 없고 받아들이기 힘든 삶도 모두 나름대로 귀한 것이라는 사실, 교훈성과 전복적인 기운들 - 을 일거에 무화시켜 버릴 수도 있는데,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에서 나는 무척 아쉬움을 느꼈다.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국경이 있다"는 말은 이중의 소외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는 과학, 과학연구에는 그 어떤 제약도 주어질 수 없는 초월적인 것이란 의미에서의 소외이고(이는 다시 말해 과학은 시민사회의 도덕률이나 윤리에서 자유로운 어떤 것이라는 위험한 규정이 된다), 그런 과학자들조차 국가 이데올로기에는 종속된 존재여야 한다는, 즉 국가구조의 하부에 속해야 한다는 규정을 통한 소외를 암시하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를 판타지 문학에 대입시키면 판타지에는 국경이 없으나 판타지 문학에는 국경이 있다는 말이 될지 모르겠다.

 

옛이야기는 동화의 어머니라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판타지 문학은 독일동화문학의 예에서 알 수 있듯 전래동화와 깊은 연관이 있으며 이는 다시 민족과 연결된다. 판타지문학이 '다른 세계'를 다룬다 하더라도 현실과 괴리된 이야기일 수 없는 것처럼 판타지 문학의 태생 또한 민족과 결부되지 않을 수 없다. 서구의 판타지 문학이 한국 혹은 동양의 판타지 문학과는 다를 수밖에 없는 것처럼 말이다.톨킨의 『반지의 제왕』에 대한 여러 해석들 가운데 하나는 그가 경험한 세계대전에 대한 것이다. 『반지의 제왕』에서 가장 두드러진 암시는 모르도르의 화산에서도 알 수 있듯 '불'이다. 세계을 일순간에 잿더미로  만들 수 있는 불에 대한 암시가 대량폭격과 소이탄, 핵에 의한 공포를 말하는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해리 포터 시리즈가 판타지이면서 동시에 다른 세계에서조차 자본주의 방식의 마법 - 가령, 님버스제 최신 모델의 빗자루 - 를 표현하는 것 이 또한 앞으로 판타지 문학이 풀어야 할 숙제일지 모르겠다. 판타지 문학이 과거 낭만주의 속에서 민족적 뿌리를 찾는 시도로서 행해진 전래동화 채집이라는 민족적 뿌리를 거부할 필요도, 거부할 수도 없지만 가장 순수한 듯 보이는 판타지 문학 역시 타락한 현실과의 치열한 대결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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