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일상, 대중 : 문화에 관한 8개의 탐구 ㅣ 박명진 외 / 한나래 / 1996년 12월




1996년
대한민국 사회에서 새로운 키워드들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더이상 혁명도, 민중도 아닌 문화와 일상, 대중이었다. 현실사회주의라 명명된 국가사회주의 체제의 몰락 이후 대한민국 사회는 단순히 맑스 원전의 번역만 뒤늦은 것이 아니라 세계화라는 새로운 트렌드에도 매우 뒤늦었다는 사실을 어느날 갑자기 충격적으로 깨닫는다. 마치 지구를 정복하러 온 외계 비행체에 지구의 컴퓨터 바이러스를 심어 일거에 무력화시킨다는 발상처럼 일순간에 대한민국 사회는 포스트모던이란 한 마디로 모든 것이 설명되고, 모든 것을 설명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혔다.


글쎄,
이 책은 내가 앞서 말하고 있는 서론 격의 이야기처럼 그리 거창한 이야기에 잘 어울리는 책은 아니다. 그보다는 대학에서 새로운 문화이론을 고민하고, 가르쳐야 하는 8명의 교수, 연구자들이 모여  세미나를 진행했고, 그들이 공부했던 서구의 문화이론가들, 학자들의 텍스트를 우리 말로 번역해 하나의 책으로 묶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처음부터 교과서라는 텍스트의 본래 의미에 가장 잘 부합하는 책이고, 나 역시도 그런 텍스트로 이 책을 접했다. 이 책에 수록된 논문들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피에르 부르디외, 레이먼드 윌리엄스를 비롯해 아는 이들에게는 그들 못지 않게 유명한 니콜라스 간햄, 존 피스크 그리고 미셀 드 세르토 등의 논문 8편이 번역,수록되었다.


미셀
드 세르토의 이름 앞에 '그리고'를 붙인 까닭은 내가 알기로 세르토의 논문 가운데 우리 말로 번역된 유일한 글이 이 책에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최소한 현재까지 내가 알기로는 그렇다.) 이 책은 제목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 크게 보아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서문 격에 해당하는 박명진 선생의 글 "문화 연구 - 새로운 시각의 모색을 위하여"부터 "문화에서 탈문화로 - 스티븐 크루크, 장 파컬스키, 맬컴 워터스""부르디외: 문화 자본과 아비투스"는 문화 편에 해당하는 것이고, 부르디외의 "예술적 취향과 문화 자본", 니콜라스 간햄,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피에르 부르디외와 문화 사회학: 입문", 드 세르토의 "일상 생활의 실천", "도시 속에서 걷기" 등은 일상 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존 피스크의 "팬덤의 문화 경제학", 존 클라크, 스튜어트 홀, 토니 제퍼슨, 브라이언 로버츠의 "하위 문화, 문화, 그리고 계급", 토니 베넷의 "대중성과 대중 문화의 정치학"은 대중 편에 해당한다.


일반적인
정의는 아니고, 내 개인적인 정의 혹은 그래야 한다는 내 믿음일지는 모르겠으나 역사적 맥락으로 보았을 때, 문화연구는 맑스의 정치경제학으로 설명될 수 없는 사회 구조, 혹은 이미 한 차례 실패를 경험한 서유럽 좌파의 고민과 모색의 결과물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스스로 주장하는 바대로 문화인류학적인 방법론과 본인들은 때때로 부정하고 싶어하지만 프랑스 구조주의의 지대한 영향력 아래 놓여있다. 거기에 덧붙여 문화연구의 본산이라 할 수 있는 영국의 독특한 문학문화(Literacy Culture)와 좌파 역사학의 영향이 합쳐져서 그들만의 독특한 연구 방법론 혹은 분위기를 창출해냈다. 사실 문화연구는, 문화라는 모든 것일 수도 있고,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는 그 연구대상의 폭넓음으로 인해 공부하고자 하는 이들에겐 치명적인 악몽이며 기존의 아카데미 시스템 속에서 이미 충분한 기득권을 누리는 학자들에겐 사기꾼 집단처럼 보일 수 있다.


신문방송학,
비판커뮤니케이션학의 한 분파일 수도 있고, 인문학적으로는 문화인류학, 문화사학의, 또 사회학적으로는 문화사회학, 지식사회학의 한 지류처럼 보이기도 한다. (문화연구는 어쩌면 실제로도 흘러가는 유행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한동안 국내 소장지식인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직종 가운데 하나가 다소 뜬금없이 출현한 '문화비평가'란 것이었다. 역사적 뿌리가 없는 비평 행위가 지속되기 어렵다는 점을 반증하기라고 하는 양 1997년 IMF 외환 대란이라는 된서리를 맞고 나서 문화비평가라는 직종은 더이상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이 책은 바로 그 직전에 나와서 현재까지 여러 대학에서 문화연구 혹은 문화이론의 제반 분야들을 공부하는 교재 중 하나로 이용되고 있다. 읽노라면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엄청난 문화환경의 변화라는 것이 다각도로 실감난다. 하나는 이 책의 저자들이 예시로 들고 있는 급변하는 문화환경들이 이미 오래전의 급변들이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책의 저자들이 고민하는 문화연구 자체의 필요성에 대한 요구가 그 어느 때보다 커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책을 읽으면서
재미있었던 점은 피에르 부르디외와 레이먼드 윌리엄스가 사실 동시대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자각하면서부터였다(우습게도 나는 윌리엄스가 부르디외 보다 훨씬 전 세대 사람으로, 느낌상으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한 사람은 영국의 좌파이자 문화주의 문화연구가(문학비평가)로 다른 한 사람은  프랑스의 좌파이자 구조주의 문화연구가로 활동한 사람인데, 레이먼드 윌리엄스는 니콜라스 간햄과 함께 피에르 부르디외의 연구가 어떻게 정치경제학과 문화론적인 연구가 서로를 보완하면서 통합하는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을지를 설명하고 있다. 다들 아는 이야기겠지만 맑스는 고전 경제학과 결별하는 방법으로 경제학에 정치학(혹은 사회학)을 도입한다. 당대 최고의 뛰어난 문화적 교양인이기도 했던 맑스는 그러나 사회의 구조를 밝히는 과정에서 문화에 대한 진술(다들 아시다시피 "토대가 상부구조를 결정짓는다"를 제외하고는)을 거의 공백 상태로 남겨놓는다. 그런 점에서 맑스 이후 맑스를 계승하고자 했던 이들은 이 부분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를 놓고 심각한 고민에 빠져들어야만 했다.


영국 좌파이자
문화주의 문화연구의 중요한 이론가였던 레이먼드 윌리엄스는 여러 차례 맑스와의 결별을 시도했으나 끝끝내 결별하지 못한다. 어째서일까? 그건 지금 우리가 그와 결별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와 흡사하다. 여전히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물적 토대가 존재하고 있으며, 변화된 자본주의 아래에서 새롭게 형성되는 주체성을 밝히는 도구로서도 여전히(낡기는 했으나) 유용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문화연구가 영원히 정치경제학과 결별할 수 없다고 판단하며 문화연구의 본질은 결국 "문화+정치경제학"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맑스가 진술하지 못한 부분들을 찾을 때에야 비로소 문화연구라는 하나의 방법론이 존재하는 의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만이 전지구적 피라미드의 하부구조가 어떻게 상부구조에 의해, 보이지 않는 검은 손에 의해 통제되는지, 문화와 자본주의의 결합은 얼마나 우리의 숨통을 옭죄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작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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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연구의 이론과 방법들 - 존 스토리 | 박만준 옮김 | 경문사(2002)




우리에게 현실문화연구에서 출간된 "문화연구와 문화이론"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는 존 스토리의 책 "문화연구의 이론과 방법들"은 문화연구가 실제로 어느 분야에 적용되고 있는가를 실질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책이다. 문화연구는 여러 분야의 학문들에 기대고 있다. 예를 들어 문화연구에서 논의되는 인물들은 그 자체로 서구의 근현대 사상사를 옮겨온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많은데,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를 비롯해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사상가들, 알튀세르, 그람시, 벤야민 등등이 이야기된다. 그 못지 않게 문화연구가 건드리고 있는 분야도 폭넓은데(도대체 어느 것이 문화연구고, 어느 것이 문화연구가 아닌지조차 헷갈릴 정도로) 존 스토리의 이 책은 그 가운데 어느 것이 그래도 문화연구가 주로 건드리고 있는 분야이고, 그 분야를 어떻게 연구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책이라 할 수 있다.

문화연구에서 말하는 지금껏 우리가 "문화"라면 고정관념처럼 떠올리게 되는 고급예술(high art)을 말하진 않는다(물론 이 분야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는 있겠지만). 그보다는 우리의 일상생활의 텍스트와 문화적 실천행위로서 이해될 수 있는 문화이다. 대개의 문화연구 관련 서적들이 문화에 대한 그들의 이런 입장을 설명하고 정의하는 것으로 출발하는 까닭은 분야를 명확히 구분하고 싶다는 의도와 달리 분야를 명확히 구분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우리에게 문화는 뭔가 우리의 일상과 다른 고급한 것을 향유하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그만큼 뿌리깊게 박혀있음을 늘 의식한다는 것을 반증한다.

존 스토리는 이 책을 통해 문화연구에서 말하고자 하는 문화는 일상적인 것, 문화엘리트들이나 지배계급층이 향유하는 것들이 아닌 일반 대중들이 향유하고 일상 속에서 실천(이때의 실천이란 컨텍스트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행위를 그 대상으로 한다. 이 때 문화연구의 방법은 레이몬드 윌리엄스, 스튜어트 홀, 알튀세르의 입장 중 어느 하나를 택하는 것을 의미한다기 보다 문화가 생산되고 소비되는 사회적/역사적 상황에 입각해서 문화를 분석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즉, 문화연구에서의 문화는 거의 반드시 역사와 결부되는 과정을 거친다. 다른 하나는 문화란 그람시가 말하고 있는 "헤게모니"의 개념처럼 끊임없이 텍스트 생산자와 소비자(수용자) 사이에서, 다른 말로 하자면 지배계급이 퍼뜨리고자 하는 지배이데올로기와 그것을 수용하고 거부하는 피지배계급이 벌이는 치열한 투쟁의 전장이란 것이다.

그와 같은 관점에서 존 스토리는 문화연구가 (대중)문화의 여러 영역들 - 텔레비전, 소설, 영화, 신문과 잡지, 대중음악, 일상생활의 소비 - 을 어떻게 분석하고 있으며, 지배계급이 제공하는 문화 이데올로기들을 어떻게 해체하고 재구성해낼 것인가. 문화연구자들이 어째서 문화실천행위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가를 설명한다. 문화연구란 정치경제학적인 토대 위에서 새롭게 쓰여지는 문화정치학적 실천행위이다. 문화연구자들은 그 자신의 세계에 대한 의미(저항)를 만들기 위해 전개하는 독자들의 투쟁과 늘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연관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대중문화의 전장에서 독자들과 함께 이 세계에서 자신을 위해 더 나은 터전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싸우는 동지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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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와 문화실천 - 김창남 | 한울 | 1995


셰익스피어가 그랬다던가? 청춘은 뉘 반항할 이 없어도 반항하는 것이라고…. 살아가면서 결정적인 순간이란 것이 과연 있다면 나는 과거의 어느 순간을 그렇게 살았던 것 같다. 그 기억들이 평생의 짐이 될 것이란 사실을 당시엔 알지 못했으나 그로부터 10년이 흐르고, 다시 20년째를 향해 가고 있는 도중에 돌연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공부를 시작했다. 87년에서 90년대 중반에 이르는 시기의 열패감들은 낭패한 마음을 넘어 절망에 이르기도 했었다. 내가 생각했던 진보란 인간의 승리였으나 인간에겐 선도 악도 늘 함께 있었으므로 진보가 늘 선의 승리를 의미하진 않았다.

 

서구에서의 진보는 오랫동안 일직선상에서 사유되었다. 진보는 전진 혹은 후퇴, 정체라는 세 가지 개념 속에서만 논의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진보주의적 낙관론은 인류는 과학적, 기술적 진보를 통해 끊임없이 전진한다는 이상론이었고, 이들의 학문적 틀을 별다른 고민 없이 받아들인 80년대 한국의 진보진영은 이들과 똑같은 함정에 빠져들었다. 자유주의자들(이라 불리는 이들은 그 이름과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다른 얼굴들을 가지고 있는가? 시장경제론자, 보수주의자 등 - 혹은 타협, 야합의)은 동서냉전의 승부에서 자본주의가 전세계적으로 승리했으며 이 결과로 동구에서도 자본주의는 놀라운 효율성을 발휘할 것이라 믿었다. 그것을 진보라 믿었기에 후쿠야마(Francis Fukuyama)는 이를 "역사의 종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동서냉전의 승리를 자축하기도 전에 균열은 동구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서구로부터 시작되었다.

 

자크 아탈리는 "역사의 미로를 걷는 인간"이란 글을 통해 "21세기를 앞둔 시기, 나치즘과 공산주의가 어떤 사람들에겐 인간이 전진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으며, 다른 사람들에겐, 그 두 이념의 패배가 진보의 확고한 전진을 보여주는 표시"였다고 말한다. 후쿠야마에게 이는 시장경제의 확고한 승리를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로 역사의 중지를 의미했다. 진보에 대한 사람들의 관념은 낙관과 비관 사이를 오고가는 시계추처럼 보인다. 낙관과 비관의 틈새는 역사는 우연인가, 필연인가라는 질문을 불러들인다. 과연 역사는 미리 정해진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되어있는 걸까. “행복한 결말”이, “비극적 파탄”이 이미 예정되어 있는 것인가. 이렇듯 진보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역사의 문제를 고민하게 만든다. 김창남의 『대중문화와 문화실천』에 녹아 있는 고민의 흔적들 역시 본질적으로는 나의 이런 고민들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진보의 새로운 기획을 논하는 자리에서 이제 문화는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영역으로(경우에 따라서는 가장 중요한 영역으로) 간주되고 있다. … <중략> … 진보진영의 문화적 관심의 증폭이란 좀더 정확해진 문화에 대한 관심의 중심이 민중문화운동에서 명백히 대중문화로 이전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 <중략> … 이와 같은 일련의 변화 속에서 ‘진보’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정립이 요구되고 있으며, 이를 둘러싼 다기다양한 논쟁이 지금 진보진영의 초미의 관심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논란 속에서 주목되는 것은 착취와 억압에 대한 비타협적 투쟁이 강조되던 시절에는 거의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았던 ‘일상성’과 ‘생활의 정치’에 대한 관심의 증폭이다. <본문 15-16쪽 중에서>

 

문화실천의 장(場) - 일상, 실패와 성공의 공간

앙리 르페브르는 일상을 ‘혁명 시도가 실패하는 원인이며 결과’로 봤다. 일상이란 매일같이 벌어지는 일들로 구성되어 있고, 이는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반복된다. 그렇기에 일상은 우울한 것이다. 그러나 르페브르의 말처럼 모든 혁명은 일상에서 비롯되었고, 결국 실패하는 원인도 일상에서 비롯된다. 일상에서 시작되지 않는 변화는 아무 것도 변화시키지 못하며 일상에 매몰되는 변화 역시 아무 것도 성취해내지 못한다. 일상의 무기력증은 일상을 변화시킨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반복적으로 체득하게 한다. 일상성의 의미 속에 무기력하게 지배당하는 개인과 그와 같은 소비적 일상을 거부하는 개인, 이 개인이 주체적인 자아를 회복하는 것을 르페브르는 "일상성의 혁명"이라 불렀다.

 

이에 대해 김창남은 지난 80년대 진보진영의 인식은 “대중문화에 대한 과학적 분석에 의해 체계화된 것이라기보다는 문화운동적 실천에 의해 상대적으로 얼개를 갖추어온 것”이라고 분석한다. 80년대 독재와 반독재가 서로 첨예한 대립각을 세우고 있던 시대에 대중문화, 대중음악을 논한다는 것은 그 의도가 아무리 진보적인 것이었다 하더라도 전면에 나서기 어려운 시기였다. 그만큼 민주주의의 회복이 절실했고, 긴박한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김창남의 말대로 “그동안의 진보의 논리가 대립과 적대의 틀에 근거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80년대식 문화비평에서 대중문화의 의미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대중문화론과 크게 다르지 않은 각도에서 진행되었다. 이들에게 대중은 비록 군중(mob)은 아니었으나 여전히 대중(mass)으로 남아 있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대중과 문화를 일정하게 분리하여 ‘문화산업’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문화산업, 즉 대중문화는 지배계급의 상업적 가치를 재생산하도록 자본주의 경제제도와 유기적으로 결합된 교묘한 술책이라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80년대의 문화비평은 문화의 세 가지 측면 가운데 주로 생산체계에 집중되었고, 이후 90년대의 문화비평은 문화의 텍스트를 해독하는데 주력했다.

 

김창남은 『대중문화와 문화실천』에서 “대중은 주어진 문화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선택하고 선별하여 특유의 방식으로 해독하고 변형한다고 주장한다. 즉, 대중의 문화실천은 주어진 문화, 텍스트에 반영된 구조의 논리에 대한 그들 나름의 대응에 의해 이루어진다.

 

『대중문화와 문화실천』은 크게 1부와 2부로 나뉘어 있다. 제1부 「이론적 논의」에서는 위에서 이야기한 문제의식을 중심으로 당시(90년대 초중반) 우리 사회의 소비문화 ․ 문화산업의 현실과 대중문화에 대한 새로운 시각들을 나름대로 정의하고 있다. 물론, 이 책의 몇몇 부분들은 지금의 현실에 비추어 보았을 때 이전의 명징함을 많이 상실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어 문화산업의 현황 부분에서 85년의 외화자율화와 87년의 직배사 허용 문제를 놓고 지적하고 있는 절망적 어조는 한국 영화 1,000만 명 시대에 도달한 현재의 관점으로 보자면 부분적으로 수정될 필요도 있다. 제4장 「문화시장의 개방과 민족문화의 새로운 모색」에서 주장하고 있는 부분은 현재의 관점에서 보자면 예측과 정반대로 진행되는 양상 또한 존재한다.

 

누구나 인정하다시피 미국의 소프트웨어 산업은 규모의 경제를 보장하는 풍부한 자국시장과 잘 발달된 다매체 ․ 다채널을 이용한 창구효과, 가장 넓은 언어권, 풍부한 자본과 기술, 인력 등의 요인을 배경으로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확고히 하고 있다. 유럽 여러 나라들조차도 탈규제와 다매체 다채널 시대를 맞아 미국 프로그램의 시장 확대를 막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문화산업의 기반이 취약한 우리나라가 성급히 다매체 ․ 다채널 시대를 맞게 됨으로써 미국 문화산업에 의한 시장장악은 한층 가속화될 것이 분명하다.

여기에 일본 대중문화의 개방 역시 머지않아 이루어질 전망이다. 만화나 게임 등의 분야에서 사실상의 개방이 이루어진 지 오래이긴 하지만 일본영화나 가요의 수입이 합법화될 경우, 그 파장은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일정 기간 안에 우리시장내 일본문화와 가요의 영역이 확보될 것이며 이는 그만큼 우리 문화산업의 위축을 가져올 것이 때문이다. <본문 38-39쪽> 중에서

 

위의 전망이 예견한 바대로 현재에도 우리 사회에서 미국과 일본의 문화산업이 미치고 있는 영향은 결코 작지 않지만 우리 문화산업의 전반이 미 ․ 일의 문화산업 때문에 현재 위축되고 있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김창남의 『대중문화와 문화실천』이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부분은 위와 같은 현황 분석과 전망에 의한 것이 아니라 “대중문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핵심”을 논하고 있는 부분이다.

 

대중문화와 민중문화의 첨예한 이분법에 근거한 기존 방식의 문화운동은 이제 현실적인 힘을 갖기 어렵다. 중요한 것은 대중문화와 민중문화를 그 출신성분에 따라 선험적으로 가르는 일이 아니라 대중의 일상 속에 존재하는 대중문화의 다양한 실천태 속에서 지배적인 층위와 저항적인 층위를 변별하는 일이다. 여기서 문화운동은 대중의 일상적인 문화실천에 존재하는 지배적인 층위를 약화시키고 대항적 층위를 강화시키는 일로 규정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대중을 단일한 계급적 실체로서가 아니라 다양하게 분화된 하위집단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점이다. 다양하게 분화된 대중집단의 삶의 조건과 현실, 욕구와 감각에 대한 치밀하고 구체적인 연구를 통해 각 집단에 맞는 다양한 접근 방식이 찾아져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 뜻에서 나는 우리의 대중문화 읽기가 단지 텍스트 분석의 차원에서 나아가 ‘대중읽기’의 차원으로 완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본문 75쪽> 중에서

 

“대중과 대중문화”는 그 자체가 “정치적 투쟁의 장”으로 화한다. 이러한 전망은 80년대 문화비평이 지니고 있던 한계 - 대중을 수동적인 존재로 규정하고 있던 -를 극복하고, 문화적 진보의 핵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확인하게 해준다. 결국 문제는 “어떻게 대중을 획득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90년대 한국사회 하위문화의 다층적 구조

『대중문화와 문화실천』의 2부는 그간 외국의 사례만을 인용해왔던 하위문화 방법론을  국내에 적용해 본 사실상 최초의 연구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지난 1991년 동구 현실 사회주의 몰락과 우연찮게 맞물리는 시기에 우리 사회는 신세대문화 담론으로 들끓었지만, 실제 이들에 대한 실질적인 연구는 제대로 이루어진 바가 없었다. 모두가 즉자적(卽自的)이고 감각적인 반응으로 신세대 문화담론을 유행처럼 소모했을 뿐이다. 김창남은 2부에서 우리 사회의 각 하위 집단이 동일한 물질과 역사적 조건 속에 공유하는 문화적 특성들을 대중음악 수용태도를 통해 분석하고 있다.

 

우선 부모계급문화와 일정하게 대립되면서 상호의존적 형태로 나타나는 청소년 집단의 문화적 실천과 특성에 대한 연구에서 우리 청소년 집단이 보이고 있는 문화적 실천의 특징은 모순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 사회의 청소년집단이 부모계급문화와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대중음악을 수용하는 적극성에서 두드러진다. 이들은 학교라는 기성문화의 재교육이 주는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는 통로가 극히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대중음악을 저항적 의미로 수용한다. 여학생들은 남학생들에 비해 더욱 적극적이고 예민한 자세를 보인다. 김창남은 이에 대해 “우리 사회에서 여학생들이 겪는 억압이 남학생들에 비해 더 심하다는 데서 비롯된다.”고 분석하고 있다. 김창남이 청소년 집단의 문화적 실천에 대해 가하고 있는 분석에서 가장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기존의 신세대론이 미처 주목하지 못했던 부분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이다.

 

최근 유행하는 이른바 신세대론이 가지는 큰 맹점 중의 하나가 청소년 세대가 부모세대와 비교하여 가지는 차별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나머지 그들의 저항이 결국 ‘상징적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라는 점을 간과하는 데 있다. 청소년들은 아직 부모세대와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 있으며 그들 대부분은 그러한 현실적 조건을 거부하기 보다는 그에 타협하려고 하는 성향을 보인다. 그런 타협의 형태가 상징적인 수준에서의 저항이라는 하위문화적 특성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본문 126-127쪽> 중에서

 

현대 사회에서 가장 기본적인 집단은 역시 사회 계급이다. 그리고 주요한 문화적 흐름은 계급 문화라 할 수 있는데, 김창남은 이를 다시 세분하여 “사무직 노동자 집단, 생산직 노동자 집단, 중산층 주부 집단”으로 구분한다. 사무직 노동자 집단이 대중음악을 수용하는 태도에 있어 청소년 집단과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이들이 대중음악에 대한 동일시를 통해 현실을 돌아보는데서 즐거움을 얻는다는 대목이다. 그에 비해 생산직 노동자 집단이 보이는 태도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노동자들의 대중음악 취향과 실천은 작업장의 환경, 경제적 여유의 부족 등으로 인해 다른 집단과 구별되는 하위문화적 특성 - 혼자 노래부르기, 집단적 공간에서의 소리지르기, 일하며 듣기 등 - 을 드러내고 있다. 중산층 주부 집단은 사무직 ․ 생산직 노동자 집단보다 복잡하고 모순적인 대중음악 수용태도를 보인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주부들은 일상에서의 종속적인 위치로부터 도피하고 싶어 하지만 궁극적인 탈출을 추구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종속적인 위치를 당연시하고 있다, 그들의 도피는 스스로 인식하고 있듯이 일시적이며, 종속적 위치로 돌아가기 위한 목적으로 수행되고 있는 것이다. …<중략>… 주부들은 남성가수의 여성화 경향에 대해서는 긍정적이면서 여성 가수에 대해서는 규범적인 여성성을 주문하고 있으며 여성의 사회활동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태도를 표하면서 사회활동에 적극적인 여성가수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인식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중략>… 기본적으로 기성의 가치관 속에서 성장한 세대이면서 신세대 자녀를 키우는 중년세대로서 경험하는 문화적 갈등이 상대적으로 경제적 안정을 누리는 ‘중산층’의 ‘여성’으로서 가지는 종속적 위치와 접합하여 다소 착종된 정체성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본문 220-221쪽> 중에서

 

문화실천의 공간에서 기획의 주체로 선다는 것

우리는 일상을 늘 진부한 것으로 생각하고, 그로부터의 일탈을 꿈꾼다. 먹고, 마시고, 싸고, 자고, 노는 모든 것이 우리의 일상이다. 다람쥐 쳇바퀴란 표현이 잘 말해주는 것처럼 우리의 일상은 그물보다도 더 촘촘하게 짜인 인간관계와 사회의 그물망에 포섭되어 있다. 아주 작은 부분 하나까지 권력 관계와 이해관계로 얽혀있다. 그런 가운데 우리의 일상은 하루하루 무의미한 경험의 연속으로 비춰지고, 삶은 조각난 파편처럼 아무 의미를 얻지 못한 무엇으로 개인에게 다가온다. 하지만 바흐친으로부터 비롯된 민중 혹은 대중의 일상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이들도 있다.

 

앙리 르페브르, 미셀 드 세르토 등과 같은 문화연구자들은 일상이 단지 파편화된 개인이 권력 관계 속에서 수동적으로 무기력한 삶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작은 틈바구니 속에서도 이에 대항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즉, 우리들 스스로가 주체적인 존재로 실천해간다면, 문화의 일상은 더 이상 무기력한 삶의 반복이 아니다. 일상, 그것은 변혁에 대해 품고 있는 희망처럼, 혹은 삶의 진실한 측면이 그러하듯, 불꽃처럼 일순간 환하게 타올랐다가 꺼져버리지 않는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일이 혁명의 미래라면, 일상은 바로 미래의 어제이기 때문이다.

 

레이몬드 윌리엄스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습득하고 창조하고 소통하는 존재(a learning, creating, communicating being)라면, 인간의 이러한 본성에 걸 맞는 유일한 사회적 체제는 참여민주주의이다. 그 안에서 우리 모두는 하나의 고유한 개체로서 습득하고 소통하고 스스로를 지배한다. 이보다 열등하고 제한적인 체제는 인간에게 주어진 진정한 삶의 원천을 소진시켜 버린다.”고 말한다. 어쩌면 이 말은 김창남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될 수 있다. 그 또한 인간에 대한 낙관, 대중을 해방적 기획의 주체로 설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근대의 혹은 근대에 대한 해방적 기획(정치적 ․ 문화적 실천)은 공동체의 다수를 차지하는 이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자유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해방적 기획의 회복은 대중문화와 고급문화의 구분 짓기가 아닌, 고상하고 위대한 선각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의 경험과 가치, 사상, 행동, 욕망 등이 종합적으로 조립된 문화에 의한 것이다. 그렇기에 대중들의 문화는 그들만의 경험을 통해 기존 체제에 대해 대항하는 힘을 지니고 있으며 대중들의 자발적인 실천은 더욱 강조된다. 그런 의미에서 『대중문화와 문화실천』은 대중의 자발적인 문화실천에 대한 진지한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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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연구(하룻밤의지식여행12) - 지아우딘사르다르 | 이영아 옮김 | 김영사(2002)


나는 이런 식의 도서에 익숙한 편이다. 그러니까 80년대 말엽에서 90년대 초엽 사이 나름대로 인기를 끌었던 리우스의 만화책들을 말하는 것이다. 당시엔 사회과학 서적을 중심으로 출판하던 "오월"에서 "리우스"(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멕시코의 좌파 만화가)가 이런 식의 작업들을 통해 일련의 만화 책들을 시리즈로 간행했다. 사회과학 이론의 빡빡함에 미리부터 질려버린 까닭으로, 혹은 좀더 쉽게 입문하기 위한 방편에서 이 책을 선택했던 이들에겐 상당한 도움을 준 책이다. 리우스는 "쿠바혁명과 카스트로", "레닌", "체 게바라" 등 혁명가들의 생애와 사상, 그들의 이론을 나름대로 잘 요약해주었다.

김영사에서 펴내고 있는
"하룻밤의 지식여행" 시리즈 중 한 권을 읽었다. 지아우딘 사르다르의 "문화연구(cultural studies)"가 그것인데, 얼마전 누군가가 이 책은 아니고 이 책의 한 시리즈 중 노암 촘스키 편에 대해 썼던 리뷰도 있었지만, 이 책 혹은 이 시리즈 중 어느 책이든 선택하는 사람이라면 머리 속에서 "하룻밤"이란 글자를 빨리 삭제해야 한다. 다시 말해 "하룻밤"만에 이 시리즈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을 다 알게 된다거나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란 말이다. 이 시리즈가 다루고 있는 면면을 살펴보면 더 빨리 이해될 수 있다.

1권에서
"노암 촘스키", 그리고 연이어 "양자론, 수학, 진화심리학, 철학, 사회학, 심리학, 플라톤, 포스트페미니즘(헉, 페미니즘도 어려운데 거기에 붙였다 하면 뭐든 세 배는 더 어렵게 만드는 "포스트"까지 붙어 있다. 나는 "포스트"자가 붙은 건 심지어 시리얼 메이커까지도 싫어지더라구.), 이슬람, 문화연구, 기호학, 프로이트, 라캉, 융, 호킹, 정신분석, 데리다" 그리고 앞으로 "푸코" 도 낸다고 한다. 앞서 포스트페미니즘에 대해 엄살 아닌 엄살을 부리긴 했지만, 한 가지 개념도 이해하기 어려운데 그 앞에 접두사가 붙는 학문은 더욱 어렵다. 예를 들어 아동문학이 그냥 문학보다 어려운 까닭은 그 앞에 아동이 붙기 때문이다. 아동을 알아야 하고, 문학을 알아야 하는 것이니 허투루하면 모를까, 진짜 아동문학을 잘 하기란 성인을 대상으로 한 글쓰기보다 배는 어렵다고 보아야 한다. 

하기사 무엇이든 제대로 하기란 참 어려운 법이다. 그런데 그것을
"하룻밤의 지식여행"이란 기획으로 정말 하룻밤만에 끝낼 수 있을까? 이런 걸 뭐라고 해야 하나? 사기라고 해야 할까?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제대로만 해준다면 그래서 그 여러 개념들이 대관절 어떤 맥락에서 다루어지고 있는지만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면, 나름의 성과를 거두는 기획이라 할 수 있다. 즉, 하룻밤이란 말만 지워버리고 시작한다면 나름대로 도움이 된다는 뜻이다. 결론삼아 말하자면 지아우딘 샤르다르의 "문화연구"는 그런 점에서 나름대로 도움이 된 책이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문화""영화"만큼이나 대중적인 화두이다. 문화에 대해 한 두 마디쯤 할 줄 모르는 사람이 없다. 시인이 어느날 갑자기 문화평론가로 등장해서 TV에서 그럴듯한 해설을 읊조리는 광경이 더이상 낯설지 않다. 문화는 방금나온 따끈한 빵처럼 말랑거려서 누구라도 손쉽게 조물딱거리면 만들어 낼 수 있는 학문 분야처럼 보인다. 

거기에 대중문화란 말이 붙으면 더 쉽게 느껴진다.
"대중문화 = 저급문화, 상업문화"란 등식이 존재하다보니 누구나 쉽게 즐기고, 누구나 쉽게 빠져들 수 있으니 그걸 공부하는 일도 쉬우리라 생각하게 된다. 문화연구의 함정이 거기에 있다. 문화는 도처에 있고, 누구나 즐기는 것이기에 어디에도 없고, 누구도 해석하기 어렵다(반대로 누구나 해석할 수 있기도 하다). 누구나 잘 아는 듯 여기지만 막상 말로 그것을 정의하고, 그 안에 숨겨진 여러 함의들을 찾아 해석해내고, 연구하는 범주 안으로 들어가면 미노타우르스의 미로처럼 얽히고 섥?것이 (대중)문화란 것을 금방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문화연구의 이론(가)들을 살펴보자.

맨처음 등장하는 이름은 미국의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 여사, 그리고 문화연구의 창시자로 손 꼽히는 레이먼드 윌리엄스, 사회학자 클리포드 기어츠다. 문화연구는 사회과학, 인문학, 예술의 여러 분야에서 이론과 방법론들을 빌려와서 제 것처럼 사용하고 있다. 즉, 대충 몰라도 넘어갈 수 있는가하면 제대로 걸리면
(혹은 제대로 하려면 이 모든 것들을 손대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는 거다) 금방 밑천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소쉬르, 로만 야곱슨, 롤랑 바르트로 이어지는 기호학, 키플링, 포스터와 같은 문학, E.P.톰슨 같은 역사,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와 같은 20세기 메타 이론에서 다시 이들을 뿌리로 하여 등장하는 알튀세르, 그람시, 리오타르, 부르디외에서 스피박에 이르는 그 이름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CPU과열현상을 빚는 인물들이 즐비하다.

그러니 이 책을 하룻밤만에 읽고 끝낸다는 건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앞서도 말한 것처럼 이 책도 나름대로 유의미한 측면이 있다. 그것은 짤막한 요점 정리를 통해 문화연구의 다종다양한 분야의 개념들과 연구자들, 그들이 문화연구란 거대한 테마 속에서 어떤 역할과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를 파악하는데는 아주 괜찮은 지도책이란 사실이다. 지도에는 온갖 기호들로 거리와 위치, 통과해야할 도로의 번호들이 명시되어 있다. 물론 지도책 없이 헤매면서 찾아가도 목적지에 도달한다는 목적은 이룰 수 있다. 미로를 헤매는 과정에서 더많은 것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테세우스가 미로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아리아드네의 가느다란 실 한 가닥이었듯, 비록 이 책이 건네주는 실오라기는 가늘고, 언제라도 끊어질 수 있는 것이지만 이용하기에 따라서는 문화연구의 미로를 헤매는데 꽤 믿을 만한 나침반 아니, 그 지도 상에 아로 새겨진 기호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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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운동의 새로운 프레임은 가능한가
- 이명박 시대의 문화운동, 어디로 가는가

저는 지역에서 발간되지만 전국적으로 소통되는 계간지 편집장으로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계간지는 월간지나 주간지처럼 특종을 쫓는 것처럼 시대의 이슈를 쫓아가기 보다는 담론의 생산과 매개, 비평에 주력하는 편입니다. 계간지의 책무는 시대를 읽어내고, 그 안에 은폐되어있는 구조를 밝히고 드러내어 지식사회로부터 파급되는 학문적 . 담론적 이슈를 생산하고 매개하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계간지는 지식과 담론의 최전선일 수 있고, 또 다른 의미에서 오늘 저는 이 자리에 참석하신 분들 가운데 비교적 자유로운 입장에 서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까닭은 오늘 제가 말씀드리려는 내용이 다분히 원론적이고, 어떤 의미에서든 이미 많이 나왔던 이야기들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는 변명이기도 합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만약 지배계급이 합의를 상실하여, 즉 더 이상 ‘지도’하지 못하고 오로지 억압만을 행사함으로써 ‘지배’한다면, 이것은 틀림없이 위대한 대중들이 그들의 전통적인 이데올로기로부터 분리되고 과거에 믿었던 것들을 더 이상 믿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위기는 바로 오래된 것은 죽어가고 있으나 새로운 것은 아직 탄생하지 못한 시기이다. 이러한 공백기에 대단히 다양한 병적 증상들이 나타난다. - 그람시, 『옥중수고』 중에서

체제에 대한 고민 없는 문화담론은 정책 판타지

그람시의 말에서 지배계급을 진보 혹은 좌파로 살짝 비꼬아놓으면 현 단계 우리 문화운동 진영이 처한 현실과 흡사합니다. 민주화 이후 문화운동의 현재는 최근 들어 정치적 투쟁에서 패배했을 뿐 아니라 문화투쟁, 즉 ‘정서와 의식’을 얻기 위한 싸움에서도 패배했습니다. 민주화 이후 대부분의 기간 동안 문화운동은 사회를 이끌어가는 아방가르드가 되어본 적도 없고, 과거 1980년대 운동적 관성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도 못했습니다. 그 사이 변화된 현실 속에서 대중의 삶과 일상은 주변적인 것으로만 남았습니다. 경제위기 이후 새로운 문화투쟁이 대중의 경제적인 토대를 사이에 두고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는 것조차 깨우치지 못했습니다.

1970년대 이후 세계경제는 사실상 장기적인 침체 국면에 들어섰고, 제조업 분야의 이윤율 하락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시작된 것 - 경쟁력을 상실한 고비용 저이윤의 제조업의 과잉설비와 과잉생산을 해소 - 이 신자유주의의 시작입니다.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는 세계경제위기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신자유주의가 본격화된 90년대 중후반 한국사회는 미래의 성장 동력은 지식 경제 산업에 달렸다는 명분 아래 IT, BT, CT의 순으로 매달렸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자본과 자본의 투쟁이라는 금융자본주의의 대결 속에서 한 차례 경제위기를 경험한 뒤 사회권력은 재벌권력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자본주의 체제의 대안 운동으로 출현했던 노동계급운동은 조합투쟁으로, 계급 위주의 단선적인 운동 방식을 비판하며 출현한 생태운동, 여성운동, 소수자, 문화운동 등은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운동이면서 동시에 체제의 내성을 강화하는 운동으로 변질되거나 대안담론을 창안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효관 전남대 문화전문대학원 교수, 고명철 문학평론가, 박승옥 시민발전 대표

요즘 우리 사회에 유행하는 담론의 출처는 대부분 소비자본주의의 마케팅 이론(아마도 현존하는 모든 학문 중에서 가장 유능하고, 유효하며 급진적이고, 심지어 너무나 반혁명적이라 혁명적이기까지 한)에서 비롯되고 있으며 문화담론 역시 이윤 중심의 마케팅 이데올로기에 심각하게 오염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80년대 기동전의 시대는 끝났고, 이제 자본과의 대결은 진지전의 시대가 되었다고 주장하며 새로운 문화운동의 담론이 만들어냈던 진지는 더 이상 진지가 아니라 적과 동침하는 곳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문화운동의 새로운 프레임을 구축한다는 것은 지난하고 괴로운 투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그림자와 싸워야 하는 피터팬처럼 우리는 자신의 그림자와 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종종 담론의 위기를 염려하는 것은 당장의 끼니를 잇는 일에 비해 덜 중요한 일로 간주되지만 당장의 끼니를 잇는 일과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하는 일은 동시에 시급한 일이며, 이 둘 가운데 어느 하나도 무시되거나 과소평가될 수 없습니다. 지금의 위기는 새로운 위기가 아니라 아직 새로운 것이 탄생하지 못했기 때문에 닥친 위기이기 때문입니다.

담론의 위기 - 이명박 정부의 출현이 위기인가? 민주화 이후 20년의 위기인가?

롤랑 바르트는 “거짓말보다 신화가 더 많은 것을 속인다”고 이야기했는데, 정권을 재탈환한 측이나 정권을 빼앗겼다는 측이나 ‘잃어버린 10년’이란 표현은 생각 보다 더 많은 것들을 은폐하고 있습니다. 진보대중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잃어버린 10년’은 정권교체가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이었음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1987년 이후 전반기 10년이 영남 지역주의에 기초한 노태우 ․ 김영삼의 연속 정권이었다면 1987년 이후 후반기 10년은 호남과 비영남 지역주의 연합에 따른 김대중 ․ 노무현의 연속 정권이었습니다. 전반기 10년과 후반기 10년을 ‘민주 대 반민주’, ‘진보와 보수’, ‘통일 대 반통일’의 패러다임만으로 규정한다면 현실의 일부 양태만을 확대해석하는 겁니다.

현재 담론의 위기는 1980년대 말 현실사회주의의 붕괴와 정치 / 사회 / 문화의 전 영역에서 일어난 세계자본주의체제의 혁신과 변화의 속도에 성찰과 사유의 속도가 뒤따르지 못하면서 체제의 바깥을 상상해내지 못한 데 원인이 있습니다. 현재의 위기는 표면적으로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에 따른 경제의 위기, 민주주의의 위기로 나타나고 있지만 이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은 궁극적으로 현재와 다른 것을 상상할 수 없는 담론의 위기이기도 합니다. 몇 해 전부터 1987년 체제의 종말, 진보담론의 위기를 말하지만 우리는 스스로의 현실에 착근한 담론을 만들어 내지 못했습니다. 1980년대 사회구성체 논쟁이 있었지만 그 당시 논쟁과 요즘 민주노동당 내부에서 평등파와 자주파 논쟁 사이에 질적인 비약은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80년대 문화운동을 일컬어 문화연구 없는 문화운동의 시대였고, 1990년대 후반은 문화운동 없는 문화연구의 시대라고들 하지만, 1980년대 문화운동의 내부에는 사회주의적 대안 담론과 민족주의적 대안 담론이 나름대로 각축을 벌였고, 이 둘을 봉합해온 것이 민주화 담론이었습니다. 절차적 민주화 이후 새로운 담론은 생산되지 못했거나 과정 중에 있고, 1990년대 이후 문화운동은 국가의 문화정책에 비판적으로 개입하여 국가의 문화권력과 시장자본주의의 문화적 독점에 반대하는 등의 제도적 개입(다시 말해 문화정책의 비판, 기획, 실천)으로 방향을 선회해왔습니다. 1990년대 이후 2000년대 중반에 이르는 현재의 문화운동은 운동 없는(문화정책운동이 아니라) 정책문화운동이 되었고, 장기적 전망 없는 운동이었다고 부를 수 있을 겁니다.

또 한 가지는 현재까지 연결되는 문제인데 1980년대와 1990년대 문화운동에 공통적으로 내포된 문제 중 하나는 대중과 일상에 대한 중요성은 인식하면서도 운동 자체의 측면에선 여전히 대중에 대한 고려가 부족했다는 겁니다. 전자가 운동적 관점에서 예술가들의 예술적 형상화 작업을 통해 대중의 계급적 각성을 이끌어 내려는 문예운동이었다면, 후자는 비판적 현실개입을 통해 정책화하려는 과정에서 문화기획자들의 지식인 운동(시민운동, 청원권 운동)으로 변질되면서 대중을 참여로부터 소외시켜왔습니다. 2000년대 내내 지역과 대중을 이야기했지만 민주주의와 마찬가지로 이것이 대중 속에 깊이 착근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문화운동의 위기는 이명박 정부의 출범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민주화 이후 20년 동안 배태되어 온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문화운동만이라도 다른 세상을 꿈꿔보라!

‘노동사회’로 표상되는 1980년대 문화운동 내부의 반체제적 지향과 변혁적 과제들은 1990년대 이후 문화민주주의, 문화적 권리 확대를 위한 투쟁으로 전화되어 가는데, 이 같은 방향 전환의 지향점은 국가의 문화정책에 참여함으로써 문화적 공공영역을 확대하는, 장기적으로 ‘노동사회’에서 ‘문화사회’로의 이행이었습니다. 문화사회란 자본의 발전된 생산력을 기초로 노동시간을 감축하고 자유 시간을 증대하여 자유시간의 자기조직화를 통한 문화 활동의 증대가 삶의 중심적인 활동이 되는 사회로의 이행을 의미합니다. 문화사회로의 이행을 촉진하기 위해서는 문화적 권리 확대 투쟁이 필요하다는 의미 또한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문화운동은 자체적으로 정치적 변화와 노동운동 및 시민사회운동과의 적극적 연대가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문화사회’론은 과연 우리 현실에 적합한 것인지,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흐름에 저항할 수 있는 담론이었는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화사회’론은 시민혁명 이후 시민사회가 성숙했다는 유럽식 민주주의,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상부를 점유하고 있는 유럽의 경제적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20대 80 사회’로 표상되는 사회양극화에 노출된 한국사회의 현실에 부합되기 어려운 측면이 있고, 자본주의 혹은 체제가 타협에 나설 것이라는 전제가 밑바탕에 깔려있다는 점에서 현실 자본주의에 대한 지나친 낙관에 의존합니다. 과거의 제3세계 담론에 비추어보았을 때, 문화사회론의 밑바탕에는 대한민국 사회를 기본적으로 제1세계 혹은 그 연장선상으로 규정하고, 다른 여타 지역에 대한 배려가 없는 담론이기도 합니다. 유럽식 민주주의, 유럽식 문화에 대한 동경을 밑바탕에 깔고 있다는 점에선 또 다른 문화적 제국주의로 흐를 수 있는 위험이 있습니다.


이 같은 낙관은 민주화 후반기 10년, 이른바 ‘잃어버린 10년’의 문화운동 전체를 관류하는 흐름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문화운동이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문화정책에 개입하고, 한정된 재원 속에서 분배와 권리보장의 시민권 운동이 되었다는 것은 체제내부로의 포섭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과연 이명박 정부의 출범이란 현재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 대중이 느끼는 체감온도와 문화운동과 문화권력이 느끼는 체감온도는 비슷할까요?


전성원 황해문화 편집장, 우기동 경희대 철학과 교수, 최준영 문화연대 문화개혁센터 팀장

문화운동의 시민운동화 흐름은 대중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 이미 문화적 시민권을 확보한,  이해관계에 따른 주류운동이 되었습니다. 비록 사회의 다른 영역과 비교했을 때 여전히 열악한 조건에 놓인 입장이므로 억울하겠지만 ‘잃어버린 10년’ 동안 문화운동이 좀더 마이너한 입장의 사람들(대중)과 얼마나 연대했었는지 반추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단적인 예로 1988년 UIP영화직배 이후 20년, 1998년 IMF외환위기 이후 한미투자협정을 기점으로 10년 간 지속된 스크린쿼터사수투쟁은 신자유주의 반대운동과 결합되면서 문화운동의 중요한 아젠다로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반대투쟁에 대한 비판 역시 만만치 않았습니다. 비판의 주된 요지는 스크린쿼터사수투쟁이 국산 영화를 “21세기 복합영상산업의 핵심 고리”이고 “미래경제의 핵심성장엔진”이라 규정하는 것 자체가 문화예술을 산업으로 파악하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 편으론 영화산업 내부구조의 민주화, 영화제작에 참여하는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문제는 외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연 스크린쿼터사수투쟁이 농민들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투쟁보다 더 큰 공감대를 얻었는지 의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문화운동의 새로운 프레임은 일상의 정치적 상상력에 달렸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현재의 문화운동은 문화정책적 차원에서 문화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하부구조로 포섭되었고, 자본주의 국가의 우파정치와 조우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문화운동의 공공성은 지배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속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시민사회 내부의 냉소를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냉소는 다시 사회적 ‘재봉건화’의 위험으로 나타났습니다. 문화운동의 미래는 문화운동과 담론이 애초에 출현할 당시에 품었던 비판 의식 - 사회의 제 분야에 널리 분포하여 존재하는 권력의 다양한 형태를 폭로하고, 논쟁적인 비판 - 을 회복하는 데 있으며 문화운동에게 주어진 새로운 임무는 문화민주주의를 보다 급진적이고 다원적인 민주주의로 심화시키고 확장해나가는 데 있습니다. 현 단계 문화운동의 새로운 프레임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운동의 중심, 운동의 주체, 운동의 대상에 대한 새로운 문제제기와 성찰이 필요합니다.

현재의 문화운동 프레임은 단순히 개혁정당의 구조화와 정책의 부재로 인해 실패한 것이 아니라 대중의 실제 생활 근거라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정치적인 영역에서 실패한 결과입니다. 문제는 이 실패의 내용을 좀더 차분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좀더 나은 공동체사회를 만들어가는 방법 중 하나는 올바른 국가정책을 수립하고 실행하는 것에 있긴 하지만, 시민사회가 국가정책에 지나치게 목을 매는 현재의 방식으로는 국가권력에 너무 많은 권력을 위임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고, 이는 국가권력이 약화되는 세계화 시대의 현실에서 궁극적으로 재벌권력에 목을 매는 상황이 됩니다. 책임질 수 없는 구호를 남발하는 것과 실질적인 물적 토대(실천력)를 구축하는 일 사이에서 이제 문화운동은 일상의 생활공간에서 모든 정치적인 것들의 귀환을 위하여 싸워야 할 때이고, 문화운동의 새로운 프레임을 구축하는 일은 장기적 전망, 다시 말해 담론과 철학을 귀환시키는 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 위의 글은 민예총이 지난 1월 24일 주최한 신년토론회 <이명박시대의 문화운동, 문화정책 ⓛ - 오늘의 문화운동, 어디로 가는가>에서 토론자로 발표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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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를 공부하는 이유 - 시대의 책문(策文)에 답하기 위해



제가 어째서 뒤늦다면 뒤늦게 문화라는 공안(公案)을 쥐고 대학원에 입학하게 된 것일까요?


조선 시대 과거 시험의 최종 관문을 일컫는 말이 “책문(策文)”이라고 합니다. 과거 급제의 최종 시험인 책문은 말 그대로 당대의 현안과 고민에 대해 이제 막 세상에 출사표를 던진 젊은 인재들에게 최고통치자가 직접 정책대안을 제시하라고 묻는 시험을 말합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 당대의 고민에 대해 최고통치자가 이제 막 출사표를 던진 젊은 도학자에게 직접 그 정책 대안을 묻고 답하는 것입니다.

이제 과거와 달리 공화국에 살고 있는 우리 시대 지식인들에게 최고 통치자는 시민이라 불리든, 대중이라 불리든 또 어떻게 불리든 다수의 개인이 최고통치자인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과거의 선비들, 지식인들은 왕이라는 한 명의 최고통치자만을 설득하면 되었을지 몰라도 오늘날의 지식인들은 수십만, 수백만의 대중을 상대로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답해야 합니다.

“지금 가장 시급한 나랏일은 무엇인가?”를 묻는 광해군에게 임숙영이란 선비는 “나라의 병은 왕 바로 당신에게 있습니다.”라고 답하여 왕의 진노를 샀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스스로 피지배계급이면서, 대중이고, 시민이면서 동시에 최고통치자들입니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주인일까요? 유가적 관념에 따르면 현실은 천하의 도리를 실현하는 장소이고, 정치는 그와 같은 도리를 현실에서 실현하는 행위라고 보았습니다. 하늘과 땅은 사람을 비롯해 모든 것을 만들었고, 우리는 그것을 천하만물, 즉 자연(自然)이라고 부릅니다. 자연은 한자어 그 자체의 뜻풀이에서도 알 수 있듯 스스로 연유를 묻지 않는 체제입니다. 비록 하늘과 땅이 만물을 낳았으나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인간의 행위이고, 우리는 이를 가리켜 문화라고 부릅니다.

자연이 사람과 만물을 만들고, 우리는 문화를 창조함으로써 비로소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므로 문화를 창조하는 행위가 곧 정치이고, 정치가 바로 도(道, 이데올로기)를 실현하는 행위가 됩니다. 그렇기에 대중문화는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피지배계급의 저항력과 지배계급 사이의 통합력 사이에서 매일같이 벌어지는 투쟁의 장(battle ground)이며, 이 시대 우리가 속해있는 사회(공동체)의 문화란 이와 같은 투쟁과 타협이 서로 타협적 평형(compromise equilibrium)을 이루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선비들은 최고통치자의 책문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이제 우리들은 이 시대의 문화라는 전장 앞에서 스스로에게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으며, 미력하나마 그와 같은 질문에 답해야 합니다.

한 사회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구성원들 사이에 비전의 공유가 필요합니다. 비전이란 미래를 상상하는 힘과 그와 같은 미래를 만들어야하는 타당성, 그리고 실천력이 요구된다고 봅니다. 공동체 구성원간의 비전이 공유되지 못할 때, 정치가들이 비전을 제시하지 못할 때, 공동체는 같은 침상 위에서 다른 꿈을 꾸는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적으로 같은 민족공동체 혹은 국가공동체의 구성원 사이에서도 확연히 구분되는 다른 입장들이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소수의 사람들(지배계급)이 다수의 사람들의 입장에 반하더라도 자신의 입장과 이해를 관철시키는 시스템 속에 살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그와 같은 사회시스템을 전복시키지 못했고, 어떤 때는 그것을 민주주의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미처 알지 못하는 세상의 저 편

저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계, 저 편에서 세상이 다른 방식으로 구획되고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것이 너무나 자연적인 방식으로 보일 뿐더러 그 사회에 속하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와 같은 지배체제에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동의하게 만드는 힘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저는 그것이 바로 문화(지식, 이데올로기, 예술, 교육, 매스미디어 등 우리의 의식을 규정하는)의 힘이자 기능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흔히 동의하고 있는 대중의, 사회의 문화란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피지배계급의 저항력과 지배계급의 통합력 사이에서 펼쳐진 투쟁의 장(battle ground)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배계급의 통합력에 저항하는 민중들의 투쟁이 일상의 문화(혹은 이데올로기 투쟁)란 공간에서 매일같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죠.

우리가 <하얀거탑>이란 드라마를 보면서 비록 장준혁이 좀더 인기가 있더라도 무조건 장준혁 편을 들 수 없는 것, 드라마를 보면서 가족과 나누는 대화에서 장준혁을 일방적으로 편들지 않는 것, 최도영이 어째서 현실성이 없는 캐릭터 설정인지 나누는 대화 속에서도 우리를 훈육하려 드는 지배계급의 문화와 투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현실이라고 알려주려는 드라마를 보면서도 우리는 때로 그 논리에 동의하지만, 때로는 거부하면서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죠. 우리가 매일 같이 노출되는 드라마와 뉴스, 신문, 잡지, 광고 속에서 우리는 매순간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와 싸우거나 복종하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는 그와 같은 과정을 통해 매일 무엇이 옳은지, 또 무엇이 그른지 판단하고 행동합니다. 교육을 통해서도, 매스미디어를 통해서도, 혹은 우리들의 부모 세대가 지닌 가치관을 배우는 가정에서도 우리는 매일 그와 같은 문화를 배우고 익히거나 때로 저항합니다. 최근 보수와 진보가 사이버공간을 통해 벌이고 있는 일련의 힘겨루기나 역사학계에서 우리 근현대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를 놓고 벌이는 기억투쟁이나, 부모문화와 충돌하는 청년문화, 지배문화와 충돌하는 하위문화 역시 대중에 대한 문화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투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과거 현실사회주의 몰락 이전의 계몽주의자들은 대중에게 우리 사회의 이면에 자리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착취구조를 노출시키는 것만으로도 혹은 계급구분을 알려주는 것만으로도 대중이 변하리라 믿었던 적이 있습니다. 물론 저는 여전히 경제적 토대에 따른 계급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 중 하나이지만, 이와 같은 경제결정론, 계급결정론으로는 사람들의 실제 의식을 장악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신화적 세계관, 세상은 약육강식이 지당하다는 과학적 논리를 가장한 사회진화론, 지배계급이 누리는 문화는 우아하고, 고상하며 노동대중이 누리는 문화는 천한 것이라는 너무나 자연스러워 보이는 이분법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겁니다. 남성이 여성을 착취하는 것이 오랫동안 너무나 자연스러웠게 작동했기에 어떤 여성도 이에 대해 감히 반기를 들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죠.

마치 영화 "매트릭스"의 세계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워 보이는 세상이야말로 의심해보아야 하는 세상인 것처럼 우리 주변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행해지고 있는 많은 일들, 이 나라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기업의 ‘출자총액제한제’를 폐지해야 하고, 무한경쟁의 세계화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노동의 유연화가 필연적이며, 우리가 21세기에 그나마 살아남기 위해서는 미국의 세계전략에 발맞춰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레바논에 파병해야 한다는 논리, 그것이 지극히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도록 하는 혹은 세뇌하고 있는 문화라는 거대한 매트릭스의 밖을 상상해내야 합니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전부는 아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우리는 저녁에 잠들 때까지 수많은 정보들을 접하고, 수많은 지식들을 흡수합니다. 그 중에서 일부는 선택하고, 일부는 버림받지만 거의 대부분의 매스미디어는 자본에 의해 장악되어 있습니다. 최근의 시사저널 사태에서도 알 수 있듯 자본에 대한 경미한 비판조차 원천적으로 봉쇄당합니다. 삼성과 인척 관계에 있는 중앙일보의 홍석현 전 사장이 지난 대선에서 대통령 만들기를 시도했지만 이것은 그야말로 유야무야 없어졌습니다. 국회청문회에서는 이건희를 증인으로 부르는 일 자체를 포기했고, 이를 보도한 기자는 재판을 받았습니다. 지난 1987년 이후 수립된 민주주의 체제, 민주화란 말로 우리 사회의 모든 가치가 실현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민주화 이후의 모든 민주주의는 민주화란 말로 일원화되어 간단히 국가에 의해 기념되고, 국가에 의해 포상되고, 국가에 의해 포장되어 박물관이나 기념관으로 보내졌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난 80년대의 운동은 단순히 독재체제에 저항하는 민주화운동만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반체제민주화인사란 말을 매스미디어를 통해 접해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반체제는 단순히 독재체제에 저항하는 것으로 규정되어 버렸고, 이것이 반자본주의였다는 사실은 망각되었습니다. 게다가 모두가 적당히 잊고 싶어 할 무렵, 그나마 체제의 바깥을 상상할 수 있게 해주었던 사회주의의 일제 몰락이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계적으로 단일한 체제, 자본주의라는 유일 체제 속에 포섭되어 버렸습니다. 어떤 이는 그래서 네가 지금 말하려고 하는 건 그때의 공산주의로 돌아가자는 것이냐고 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반인류적이지 않는 한, 저는 다른 체제를 끊임없이 상상할 것이고, 그와 같은 상상을 가로막는 현재의 문화에 대항하여 망명할 겁니다.

그것이 제가 문화를 공부하는 이유입니다. 끝으로 제가 좋아하는 경구가 둘 있습니다. 하나는 "생명이 있는 한 희망은 있다.(Dum vita est, spes est.)"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은 드러난 것과는 다른 내용을 가지고 있다.(Le monde ce n’est pas ce que non voyez.)"입니다. 저는 제가 살아있는 한 드러난 것과 다른 내용을 가진 세상의 이면을 들춰보려는 노력을 할 겁니다. 그리고 설령 제 생명이 다하더라도 이와 같은 체제에 문제가 있다고 느끼는 누군가는 끊임없이 이 체제에 도전하리라 낙관합니다. 지금 당장이 아니어도 좋은 어느 순간에 우리는 인류 스스로가 좀더 나은 삶을 위한 체제를 만들어 내리라 믿습니다. 제가 우리의 삶, 일상의 매순간이 ‘장구한 혁명(The Long. Revolution)’의 일부분이라고 믿는 까닭이 또한 거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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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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