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팜므 파탈 : 치명적 여인들의 거부할 수 없는 유혹』  - 이명옥 | 시공아트(시공사) | 2008


인사동 미술갤러리 사비나의 관장 이명옥의 책 "팜므 파탈"은 이중적 재미를 제공한다. 하나는 요녀(妖女)의 이미지로서 팜므 파탈에 대한 지적인 호기심을 채워주고, 다른 하나는 19세기 사진술의 출현 이후 일정 부분 그 위치를 양보할 수밖에 없었던 서구 신사들의 점잖은 포르노물(?)들을 대거 눈요기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는 것이다. 오늘날 조금이라도 깨어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인간의 누드가 예술이 된다는 점에, 여기에 도덕적 금기를 들이미는 것은 창작의 자유를 방해하는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거기에 약간의 의문을 들이대고 싶다. "당신은 언제부터 그렇게 느꼈나?"하고 말이다. 빛바른 양지 쪽으로 인간의 누드를 끌어낸 것은 과연 얼마만의 일이며, 우리들 자신은 벌거벗은 여인의 몸이 예술이란 사실을 언제부터 스스로 인지하고 이해하게 된 것일까 하는 의뭉스러운 의문을 갖는다. 스스로 그런 생각에 도달한 것일까? 아니면 주변에서 하도 시끄럽게 떠들어대니까 그렇게 생각하게 된 걸까?


누드를 예술로 인지한 것이 스스로의 힘이냐? 아니면 깨우침(교육받은)의 힘이냐?를 되묻는 것은 당신에게 정직하냐고 되묻는 것이기도 하다. 누드는 늘 정직의 문제를 묻기 때문이다. 마네의 1863년작인 '올랭피아'에 얽힌 이야기는 미술에 관심있는 이들에게는 제법 많이 알려진 이야기이다. 그의 그림이 문제가 되었던 것은 그림 속 모델의 나부가 아름답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림 속의 모델이 신화 속의 여신이 아니라 현실의 매춘부로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즉, 당대의 문화비평가들에겐 누드 자체의 아름다움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림 속 모델에게 신화 속에 등장하는 성녀 내지는 여신의 이미지를 덧씌워야만 예술로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즉, 아름다움은 발가벗은 여인의 몸 자체가 아니라 환상이었던 것이다. "기시다 슈"의 책 <성은 환상이다>를 보면 "처녀성"은 문명, 문화권에 따라 각기 다른 대접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같은 동양문화권이라 하더라도 일본에서 "처녀성"은 그다지 대접받지 못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불길한 것으로 폄하되기까지 했다고 한다. 여성을 재산으로 분류하는 문화가 강할 수록 여성의 처녀성은 강조되고, 처녀성의 파기는 재산상 손실을 입힌 것으로 간주되었다. 자본주의가 강화되면서 여성의 성에 부과된 환금성(換金性)은 결혼을 통해 보다 비싼 값으로 팔리게 되었고, 자유로운 연애와 섹스는 통제 받아야 하는 것이 되었고, 그에 따라 결혼은 더욱 신성한 것이 되었다.

서양미술에서 '요부 그리기'가 하나의 유행이 된 것은 많은 미술사가들이 인정하고 지적한 것처럼 19세기적 현상이었다. 지은이 이명옥은 이런 "요부 그리기 - 팜므 파탈"을 "잔혹, 신비, 음탕, 매혹"의 네 가지 구분을 통해 분석하고 있다. 저자는 이 네 가지 구분을 통해 19세기 세기말을 살아갔던 예술가들이 느꼈던 팜므 파탈의 치명적인 유혹을 나열하고 있다. 모두 29명의 여성 이미지들을 통해 작가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이 책은 여러가지 면에서 넘치기도 하고, 부족하기도 하다. 내가 이 책에서 넘친다고 느끼는 점은 그간 우리가 말로만 들었거나 혹은 익숙하지 못했던 지난 세기 서양에서의 팜므 파탈들의 이름과 그림, 그들이 느꼈을 법한 감흥들이다. 반면에 이 책에서 부족한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팜므 파탈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나 통사적인 언급을 찾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페미니즘의 등장 이래 재발견되거나 복권된 여성성의 다양한 갈래들 중 마녀와 팜므 파탈에 대한 해석은 시종일관 흡사한 면모들을 가지고 있는데 작가는 이에 대한 새로운 해석보다는 여러 팜므 파탈들을 소개하는데 치중하고 있다. 그렇게 된 원인 중 하나는 서구 회화에서 다루고 있는 팜므 파탈의 이미지들이 아직 우리에겐 익숙치 않기 때문이란 사실을 먼저 인정해주어야 한다.

팜므 파탈을 보는 각도는 여러가지이다. 현실사회사적으로 보았을 때 팜므 파탈의 등장은 프랑스 혁명 이래 사회의 새로운 지배 계급이 된 부르주아지들은 산업혁명과 제국주의로 확보한 자본 축적의 과정을 통해 가장 풍요로운 시기를 맞이했던 결과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고, 햇살이 밝으면 그늘은 보다 짙어지는 법이다. 빅토리아 시대 겉으로는 귀족을 능가하는 예의범절과 세련미를 강조하였으나 그 이면에서는 무수한 불륜이 일어나고, 간통 사건 역시 급증했다. 참호전 양상을 띤 전선에선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젊은이들이 폭발할 것 같은 절망을 잠재울 목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의 거의 모든 전선에는 군위안부 시설이 만들어졌다. 새로운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희망은 일순 절망으로 바뀌었고, 그네들이 확고하게 믿었던 유럽 문명의 진보는 더이상 믿을 수 없게 되었다. 팜므 파탈 그리기는 그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등장한 것이다. 즉, 유럽 자본주의 문명이 화농이 짙게 곪아 피부를 뚫고 올라온 고름자국이었던 것이다. 또 한 가지 관점은 여성들이 더이상 가정에 갇힌 한 떨기 꽃의 구실에서 벗어나 스스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는 상황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거기엔 산업화가 초래한 측면이 있고, 유럽의 한 세대가 전멸하는 전쟁은 이런 여성의 사회진출을 더욱 촉진시켰다.

오랫동안 서양미술사 속의 여성상 혹은 여성을 모델로 한 예술작품들은 마치 일본 대중문화의 아슬아슬한 금기인 '헤어누드' 금지 조항을 회피하도록 강제되어 왔다. 예술가들은 그런 사회적 금기 속에서 에로티시즘을 극대화하기 위해 신화적 이미지, 성녀 등의 이미지를 차용하는 편법을 써 왔다. 바바라 크루거(Barbara Kruger ,1945~ .미국)의 "당신의 몸은 전쟁터다Your body is a battleground"란 작품에서 말하는 것처럼 여성의 몸은 오랫동안 여성과 남성의, 여성과 사회적 편견의, 예술가들의 창작의 자유와 사회적 금기의, 우리 사회의 진보성과 보수성의 전장이 되어 왔다. 성서에 기록된 유디트는 유대 민족의 영웅이었고, 오랫동안 그렇게 묘사되어 왔다. 우리들에게 논개가 있다면 그네들에겐 유디트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 유디트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손에 이끌려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지긋이 바라보는 여성 이미지로 변화되었던 것이 19세기의 일이었다. 어째서 19세기에 그런 일들이 벌어진 것일까?

이명옥은 목청 높여 팜므 파탈의 이미지에 대해 항의하지 않는다. 대신 오랫동안 남성 예술가들 혹은 그들과 튼튼하게 공조했던 남성중심사회의 관객들에게 담담한 목소리로 이들 팜므 파탈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물론 사회적 맥락에서 왜 이런 작품들이 그려지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다소 부족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여러 팜므 파탈의 목소리들을 귀기울여 듣는 일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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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그림 여행』 - 스테파노 추피 지음 | 서현주 옮김  | 예경


세계적으로 이름난 출판사란 것이 있다. 프랑스의 갈리마르, 일본의 이와나미 같이 종합출판사로 명성을 얻은 출판사가 있는가 하면 예술관련 서적을 전문적으로 출판하여 명성을 얻는 전문출판사도 존재한다. 프랑스의 라루스, 영국의 파이돈, 독일의 타쉔은 이 분야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명성을 얻은 출판사들이다. 이것을 그대로 한국에 대입해보면 우리의 출판 환경이 고스란히 드러난다고 할 수 있는데, 작년 한 해 우리 사회를 대변할 만한 여러 키워드들이 있었지만, 문화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가장 두드러진 것은 누가 뭐래도 "한류(韓流)"를 꼽지 않을 수 없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란 말은 그 출처가 어디인지,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확인하기 어려울 만큼 오랫동안 우리나라를 수식하는 말이었다(도대체 이렇게 시끄러운 나라를...그래서 최근엔 '다이나믹 코리아'를 국가이미지로 추구하는 건가) . 영국하면 신사의 나라, 프랑스하면 예술의 나라, 독일하면 철학의 나라, 오스트리아하면 왈츠와 모차르트가 연상되듯 국가에는 국가이미지란 것이 있다. 해마다 연말이면 노벨문학상의 향배를 가늠하며 한국 작가들의 수상 가능성에 대한 기사가 나오지만, 문화부 기자들이라고 그 속사정을 몰라서 한국 작가들의 수상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건 아닐 게다. 무엇이 문제인고 하면 제 집안에 황금송아지가 있어도 이를 알아주는 이가 아무도 없는 상황이 문제이다. 국내 작가들의 작품이 외국어로 번역된 것들이 태부족인 상황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지난 1970년대부터 정부차원의 국가 이미지 홍보 사업을 벌여왔다. 명칭은 해외공보관, 해외홍보원, 해외문화원 등으로 변경되고, 분화되어 왔지만 그 목적 자체는 같은 것들이다. 대한민국을 세계에 홍보하여 괜찮은 국가의 이미지를 만들어 보자는 것이었다.

 

우리 스스로가 스스로를 폄하할 필요도, 애써 격상시킬 필요도 없이 냉정하게(이 말은 또 얼마나 냉정하지 못한가?) 바라보려는 노력 자체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번번이 민족감정에 휩쓸려 세계 속에서 제대로 된 우리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은 쉽지 않다. 오랫동안 외국에서 우리를 바라보는 시각은 아시아의 작은 경제 강국, 민주화 를 이루기 위해 애쓰는 나라로 압축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독일이 폴란드, 프랑스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나라란 사실을 안다. 칸 영화제가 어느 나라에서 개최되는지도 알고, 영국이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의 연합 왕국이란 사실도 안다. 그런데 우리가 그들에 대해 이렇게 알고 있다는 것을 그들도 알고 있을까? 아마도 그들은 잘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나라도 국가이미지 홍보를 위한 여러가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명사들을 선정해 국가이미지 홍보대사로 삼거나 각종 문화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이미지를 개선하고, 홍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려는 것이다. 그 중 하나가 프랑크푸르트 도서전(Frankfurt Buch Messe)이다.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은 TIBE, 볼로냐, 미국과 함께 세계 4대 도서전시회로 손꼽히는 행사로 오는 10월에 개최되는 이 도서전에서 우리나라가 주빈국으로 선정되었다. 우리의 국가이미지, 출판수준과 문화를 알리는데 더할 나위없는 호재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우리는 이 행사 준비에 여러가지 차질을 빚고 있어 주위의 염려를 사고 있다. 우선 이강숙 조직위원장이 지난 8월 사퇴한 이후 11월까지 수개월여를 공석으로 두었고(다행히 김우창 선생이 조직위원장이 되었다), 그나마 행사 준비를 위해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지 못해(55개 사업을 48개 사업으로 축소, 예산도 265억원에서 237억원으로 축소) 애써 마련된 좋은 기회를 놓칠 위기에 처했다.

 

예경 출판사가 미술 출판이라는 외길을 28년간 걸어왔다는 것은 성과는 나중에 좀더 고민해야 할 일이긴 하지만 축하해야 마땅하다. 게다가 예경은 외국의 출판물을 번역 출간하는데만 애쓰고 있는 그런 출판사가 아니란 점에서 역시 격려받을 만하다. 예전에 서평을 올린 바 있는 박용숙 선생의 "한국 현대미술사 이야기"가 있고, 강우방의 "미의 순례", 김영나의 "20세기 한국 미술", KOREAN ART BOOK 시리즈로 "금동불"부터 "탑파"에 이르는 우리 미술의 다양한 분야를 다루고 있는 책들을 출간하고 있다. 미술 분야의 책을 내는 것은 출판의 다른 분야에서도 매한가지 고충이긴 하지만 특별히 공은 더 많이 들어가고 상대적으로 실속은 적은 편이다. 도판 하나, 사진 한 컷 이용하려 해도 저작권 문제를 일일이 해결해야 하고, 이미지를 많이 다루는 책의 특성상 일반 인쇄용지말고, 고급지를 사용해야 하며, 책의 판형도 고려해야 하고, 컬러인쇄다 보니 인쇄 감리에도 여간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우리 미술 분야에 대한 독자층이 넓은 것도 아니다 보니 책의 가격 산출에도 고심하지 않을 수 없다.

 

"천년의 그림여행"의 정가 36,000원인데, "미술출판 28년의 한 길! 예경을 한결같이 성원해주신 독자님들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특별가로 드립니다"란 명목을 달아 19,800원의 임시특별가로 판매하고 있다. 그 자세한 내막이야 출판사 관계자가 아니니 알 수 없다. 문제는 36,000원이든, 19,800원이든 이 책이 그 값을 하는 책이라면 좋은 평을 들을 만한 것이고, 아무리 값이 싸도라도 제 값을 못하면 좋은 이야기를 듣기 힘들다. 그에 대한 나의 결론은 이 책은 좋을 평을 들을 만하다는 거다. 문제는 이 책의 용도인데, 만약 서양미술사를 제대로 읽고 싶다면 그와 관련한 좋은 책들은 이미 많이 있다. 예를 들어 이 방면의 고전으로 손꼽히는 E.H.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읽거나, "생각의나무"에서 출간한 "라루스 서양미술사" 시리즈를 읽는 것도 좋다.

 

문제는 우리의 독서습관에 달려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2만원에 가까운 책값을 지불했으니 이 책을 통해 본전을 빼야겠다 생각하는 건 당연하다. 게다가 책날개에 적힌 글에 따르면 "천년의 그림여행"에 수록된 그림들을 이해하기 위해 별도의 이론서가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라 장담하고 있으니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어찌보면 더더욱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권의 책으로 서양회화 1,000년의 역사를 이해하겠다는 욕심은 그 자체로 그릇된 것이다. 제 아무리 속도가 최상의 덕목으로 칭송받는 시대라 할지라도, "하룻밤에 읽는, 한 권으로 끝장내는" 류의 선정저인 제목 뒤에 따라오는 건 중국사, 미술사, 과학사 어쩌구하는 묵직하기 이를 데 없는 분야들이기 십상이다. 그런 책을 읽고, 그 분야에 대해 '다 알았소' 할 욕심이라면 광고와 상관없이 그것이 도둑놈 심보다. "천년의 그림여행"은 이런 류의 책들이 가지고 있는 명확한 한계를 이미 노정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런 한계 속에서 이 책이 얼마나 많은 것을 성취하고 있으며, 한계를 보충하고 있는가를 살펴야 한다.

 

우선 이 책은 1,000년이란 시간적 제약을 두고 서양 회화를 살펴본다. 서양미술의 역사가 어찌 1,000년밖에 안되겠는가? 거기에 서양미술의 여러 장르 가운데 조각과 건축, 공예 등을 제외한 회화 분야에만 치중하겠다고 말한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내용은 11세기부터 20세기까지의 서양회화의 역사다. 시간적으로 진행된다는 점에서 통사(通史)의 구조를 택하지만, 그 안에 140개의 개별 주제와 화가들을 나눠 담고, 다시 이를 본문페이지 상단에 지역별로 다른 색상을 인쇄해 구분해볼 수 있게 한다. 지역별 구분은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저지대국가(벨기에, 네덜란드 등), 중부유럽과 스칸디나비아, 영미, 국제적인 흐름(사조)'으로 세분화하고 있다. 거기에 본문을 보조해주는 부록으로 "위도와 경도"라 해서 화가들을 지역과 시대로 구분해 입체적 위치를 파악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거기에 더해 중요한 회화에 대해서는 별도의 페이지를 구성해 좀더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각각의 본문들은 대개 펼친 페이지 형태로 구성해서 한 명의 화가를 소개함에 있어 그 작가의 시대적 위치(사회적 영향이나 예술사적 위치)와 평가, 간략한 작품세계를 알리고, 대개 메인 컷 한 두 개와 서브 컷 서너 개를 삽입하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고야와 같이 대가에 속하는 작가들에겐 더 많은 페이지를 할애한다. 예를 들어 본문 51쪽에서 소개하고 있는 "슈테판 로흐너(독일)"에 해당하는 색은 중부유럽과 스칸디나비아를 뜻하는 노란색 마크가 페이지수를 알리는 숫자 상단에 있고, 그의 작품 3컷과 작자 미상의 그림 1컷이 소개된다. 거기에 로흐너 작품의 사인처럼 사용되는 특징인 선명한 파란색이 두드러진 천사의 색채에 숨겨진 비밀을 알려준다(슈테판 로흐너는 선명한 파란색을 내기 위해 당시로선 순금보다 훨씬 비싼 청금석을 염료로 사용한 것이라 한다. 보라색이 고귀한 귀족이 입는 의복 천에 주로 사용된 까닭 역시 보라색 염료의 당시 가격이 엄청나게 비쌌던 것이 한 이유라는 사실을 알면 천사가 순금보다 비싼 물감을 사용하는 건 당연할지도). 물론 이 정도로 이 작가에 대해 모든 걸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이 분야에 대해 전문가가 되길 소망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로흐너에 대해 이 정도 상식과 교양을 갖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나는 이 책을 통해 그간 서양미술사(대개의 미술사 책에는 충분한 도판이 수록되지 않는 편이다)를 통해 이름만 접했거나 처음 이름을 접하게 된 화가들이 대다수이다. 전세계적으로 서양미술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시기는 인상주의 시대로, 이 시기를 전후한 작가와 작품들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정보의 양 자체가 빈약하다. 그런 점을 염두에 둘 때 이 책은 일반인을 위한 서양회화사 입문서 혹은 교양서로서 적당한 난이도와 풍부한 도판을 지닌 책으로 별 다섯을 충분히 줄 만하다. 물론 전체 400쪽에 근접하는 분량의 책이다보니 오탈자가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겠다(참고로 나는 이 책을 읽을 때 오탈자를 찾아보려고 시도하지는 않았으니 있다는 건지 없다는 건지에 대해선 논할 자격이 없음을 밝혀둔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 책의 부록이나 찾아보기 등에 대해서는 불만이 없으나 이 책의 목차가 좀더 성의있게 만들어졌다면 하는 것이다. 이 정도 정성을 들여 만든 책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목차가 달랑 4개의 구분 '여행에 앞서, 천년의 그림여행, 화가연표, 찾아보기'으로는 천년의 여행을 즐겁게 시작하는 초입치곤 너무 빈약하다.

 

끝으로 예경출판사의 28년 걸어온 길을 진심으로 축하하면서 앞으로도 좋은 책들을 많이 출간하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우리 미술의 아름다움을 다른 나라들에도 널리 알릴 수 있는 기획을 많이 하는 훌륭한 출판사로 자리매김하길 바란다. 이 책을 잘 읽는 뾰족한 묘수가 있을리 없겠지만 가격대비 효용성이란 측면만 놓고 보자면 일단 한 권 구입해놓고 침대 머리맡에 놓고 잠들기 전 차근차근 그림 중심으로 보는 것도 좋을 것이고, 괜찮은 서양미술사랑 같이 펼쳐놓고 "천년의 그림여행"이랑 비교해가며 읽는 것도 좋은 여행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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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 없는 거리에 인간의 얼굴을 돌려주는 그래피티 테러리스트 - 뱅크시(Banksy)

뱅크시를 가리키는 말은 제법 많다. 내가 알기로 1974년 생이라고 들었는데,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별로 많지 않아서(은둔형이다) 일명 '얼굴 없는 아티스트'라고도 부른다. 그(녀)가 주로 작업하는 공간은 아웃도어다. 다시 말해 '낙서화가(Graffiti Artist)'란 것이다. 그러나 뱅크시의 의미나 명성을 세계적으로 널리 알린 사건은 이름만으로도 사람을 주눅들게 만드는 근엄한 예술공간인 '대영박물관, 런던 테이트 미술관,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 뉴욕 현대예술박물관' 등에 자신의 작품을 몰래 '도둑전시'했던 해프닝들 덕분이었다. 

대개의 미술관이나 박물관들은 파르테논 신전을 모사한 것처럼 굵직한 기둥이 도열하여 세워진 권위가 물씬 풍기는 건축 양식을 하고 있다. 감상자들은 작품을 감상하기 전부터 건물이 주는 위세에 주눅이 든다. 관람객들은 언론이나 매스미디어를 통해 널리 알려진 유명한 전시, 세계적 걸작이란 권위 앞에서 위축된다. 마치 성소를 순례하는 신도들처럼 줄을 서서 작품의 발바닥에 키스를 보낼 마음의 준비를 하고 앞사람의 뒤꽁무니를 따라간다. 큐레이터나 미술비평가들이 써놓은 작품 해설을 앵무새처럼 되뇌이면서 나도 모르게 작품에 대한 자유로운 감상과 해설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 간다.



예술의 권위에 침을 뱉어라!
뱅크시는 이와 같은 지금까지의 미술관람 관행에 돌을 던진다. 그를 가리켜 예술가인 동시에 문화파괴자(Vandals) 혹은 그래피티 테러리스트라고 부르는 이유는 뱅크시가 세계 유명 미술관에 관람객으로 위장해 몰래 숨어들어 자신의 작품을 슬쩍 걸어두는 행위를 했기 때문이다. 그의 이런 행동은 매우 파격적이고, 파괴적으로 보이지만 한 편으로 그 방식 자체는 최근에 유행하고 있는 퍼포먼스나 해프닝(happening)과 개념적으로 보자면 크게 다른 형식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해프닝이란 연극적인 퍼포먼스와 매우 유사하고, 환경미술과 마찬가지로 미술에 있어서 중요한 미덕이라고 생각해 왔던 영속성과 장인 정신과 같은 전통적인 개념에 도전하는 것으로 과거에는 응당 예술작품은 미술관이나 화랑에만 전시되는 것이라 여겨져 왔던 화랑, 미술관처럼 한정된 장소를 벗어나 외부의 공간에서 제한 없이 연극, 음악, 그리고 시각 예술을 결합시킨 미술 형태 중 하나로 퍼포먼스와 별다른 구분없이(해프닝은 관객의 참여를 유도한다는 점에서 퍼포먼스와는 구별된다) 사용되기도 한다. 

뱅크시가 이들과 달랐던 점은 그가 보여준 해프닝이 전통적으로 예술작품이 전시되는 공간, 그것도 인류가 남긴 최고의 예술적 문화유산이 전시되는 공간이라고 믿어져왔던 미술관과 박물관이란 공간의 권위, 평론가들에게 독점되어 오던 예술 작품 평가의 권위를 기본부터 해체하는 도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유명한 예술 작품 곁에 자신의 작품을 몰래 전시해두고 관객이나 미술관 관계자가 알아채기 전까지 도둑 전시를 일삼았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일단 몇몇 작품을 한 번 살펴보도록 하자.

뱅크시의 작품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래피티'와는 약간 다르다. 대개 그래피티를 생각할 때 벽면에 검정색 스프레이를 뿌린 뒤 그 위에 형광 느낌이 나는 색색깔 스프레이로 화려하게 그려진 그림들을 연상하기 쉬운데 뱅크시의 경우엔 스텐실 기법을 즐겨 사용하고, 벽면에 남아있는 여러 흔적들을 기발한 발상으로 자연스럽게 연결한다. 쥐를 발견하고 의자 위로 몸을 피신한 소녀와 소녀를 올려다보고 있는 쥐를 보라. 깨진 벽면 속에 드러난 붉은 벽돌의 모양에서 뱅크시는 '쥐'를 연상(못 써요, MB를 연상하다니)했고(솔직히 나는 일부러 깬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쥐의 수염과 귀, 긴 꼬리만을 덧붙여 한 마리의 쥐가 자연스럽게 표현되고 있다. 마치 본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비극적인 희극의 정신을 표현하다



그는 주로 영국에서 활동하고 영국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영국인이든 아니든 영국적인 문화 풍토가 잘 느껴지는 대목은 뱅크시의 작품 곳곳에 숨겨져 있는 '블랙유머' 감각이다. 블랙유머가 보통의 '유머'와 구분되는 결정적인 근거는 블랙유머가 삶의 부조리나 부정적인 사회 풍자에서 비롯되는 '비극적인 희극'이라는 점이다. 뱅크시의 작품들에서는 버나드 쇼나 처칠의 짧은 문장으로 압축되어 있는 풍자를 읽는 것처럼 재기 넘치는 날카로운 풍자정신이 엿보인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이 근본적으로 약자에 대한 존중과 그들의 비명을 담아내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에서 비극적인 희극이기도 하다. 벽면에 그려진 메이드 복장의 여성은 담벼락을 마치 커튼처럼 들어올린다. "이거봐! 이게 벽이야? 커튼이지!" 현대예술의 거만과 위선을 폭로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뱅크시의 '연인'이란 작품이다. 어쩌면 거리에 이런 그림이 낙서화로 그려지고 전시되는 것 자체를 폭력이라 부르고, 이런 그림이 그려진 담벼락의 건물 소유주는 당장이라도 감시카메라를 설치하고, 누군지 잡히기만 하면 혼쭐을 내리라 잔뜩 벼르고 있을 지도 모르지만 뱅크시의 작품으로 인해 그런 일들이 벌어졌다는 뉴스는 들려오지 않는다. 도리어 그 반대로 그의 작품은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널리 사랑받고 있으며 그의 작품들을 흉내낸 작품들이 세계 도처에서 그려지고 있다.




디자인 서울이라는 웃기는 권위 의식
얼마 전부터 오세훈 서울 시장은 '디자인 서울'을 입버릇처럼 달고 다닌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말하는 '디자인'이란 우리 일상의 풍경을 조금 더 아름답게, 편리하게, 여유롭게 만들어 주는, 시민이 생각하고 꿈꾸는 디자인과 개념의 온도 차이가 크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오세훈 서울 시장이 주장하는 '디자인'이란 서울 도심 한복판에 거대한 콘크리트 어항을 건설하고 그 공로로 대통령 자리까지 오르게 된 전임 시장의 업적을 계승하여 '나도 그 사람처럼 되고 싶다'는 욕망을 좀더 그럴싸하게 포장한 정책의 명칭일 뿐이다. 그가 말하는 디자인서울이란 '좀더 거창하고, 좀더 위대한, 좀더 세련된' 정책을 펼치고 싶다는 그의 공약을, 아니 그의 정치적 욕망을 대리하는 개념일 뿐이다. 우리가 오세훈 서울 시장의 '디자인 서울'이 이처럼 위대하고, 거창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속좁고, 자기 중심적이라고 판단하게 되는 근거는 그가 얼마 전 '해치맨 프로젝트'라는 몇몇 미술전공 학생들이 남긴 '디자인 서울'에 대한 풍자에 대해 보여준 너그럽지 못한 태도 때문이다.




해치맨이 공공디자인, 디자인 서울에 끼친 해악이 있다면 길 가던 시민들에게 서울의 숨겨진 진면목, 서울 시장이나 그의 수하 공무원들이 잊고 있던 공공미술의 진정성을 일깨워 준 것이며, 웃음을 잊고 살아가던 서울 시민들에게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을 선사한 정도일 것이다. 이 정도가 죄라면 서울시는 '디자인'을 입에 담을 자격조차 없다는 걸 자인한 셈이다.


 
유니폼이 가지고 있는 기능은 착용자에게 소속감, 동료 의식 및 단결심을 가지게 하며 대외적으로는 소속되어 있는 단체나 조직의 얼굴 역할을 한다. 유니폼이 착용자에게 이와 같은 기능과 의미를 할 때 유니폼을 입지 않은 일반인들은 우리가 아닌 저들로 소외되며, 억압적인 국가기구를 상징하는 유니폼은 그 자체로 하나의 권위가 된다. 그러나 뱅크시는 유니폼이 주는 권위를 조롱거리로 만들어 버린다. 토네이도에 휘말려 현대로 온 도로시는 거리에서 경찰에게 불심검문을 당하고, 그녀의 런치바구니는 검색의 대상이 된다. 과거 토네이도에 휘말려 오즈의 나라로 날아갔던 도로시를 막아 섰던 것이 마녀들이었다면 현대로 날아온 어린 소녀를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막는 존재들은 억압적인 국가기구인 경찰과 군대인 셈이다. 아마도 지금 이 순간 거리 어디에선가는 G20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유니폼들이 길 가는 사람들을 막아서고 있을 것이다.


"WHAT ARE YOU LOOKING AT?"

"꽃"이란 작품은 도로의 규칙이자 질서를 의미하는 차선(Line)을 응용해 규율과 규범에 대해 도전하고 있는 자신을 형상화하고 있는 어찌보면 자화상이라 할 만한 작품이다. 대영박물관에 몰래 숨어 들어 자신의 작품을 전시하며 규율을 깨뜨리며 도전하고 있는 화가 뱅크시, 그가 이런 해프닝을 벌이고 다닌다고 해서 '국격(國格)'에 손상을 주었다는 죄목으로 수감되었다는 뉴스는 아직까지 어디에서도 들려오지 않는다. 아마도 영국을 비롯해 뱅크시의 습격을 받은 선진국들 중 어디도 그의 이런 작품행위가 자국의 국격에 손상을 준다고 여기지 않았던 모양이다. 넉넉한 인격을 갖춘 어른이 아이들의 재치 넘치는 장난을 눈감아 주듯, 천국과 지옥은 물론 연옥까지 탄생시켜 교회의 엄격한 윤리와 율법으로 중세를 지배했던 가톨릭 교회가 카니발을 통해 민중의 숨통을 틔워주었던 것처럼 통치의 정당성에 자신 있는 권력이라면 예술가들의 도전을 너그럽게 대하는 것이 당연하고 세련된 통치기법일 것이다. 



그렇다고 뱅크시의 풍자정신이나 문제의식이 그렇게 부드럽고, 유순한 것만은 아니다. 그의 불온한 의식은 미키마우스와 맥도날드의 손을 잡고 걷는 어린 베트남 소녀를 그린 "네이팜"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이 세계의 거대한 범죄는 규율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규율을 따르는 것에 있다. 명령에 따라 폭탄을 투하하고 마을주민을 학살하는 사람이 곧 거대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미키마우스와 맥도날드는 미국을 상징하는 양대 아이콘이자 미국식 삶의 표본을 상징한다. 그러나 '제3세계로 미국식 삶이 이식되는 과정(아메리카나이제이션)'을 우리는 '평화'라고 부르지 않는다. 뱅크시는 단순한 낙서화가가 아니라 참여예술가이기도 하다. 그는 팔레스타인 등 억압이 존재하는 세계 여러 곳을 찾아다니며 그만의 방식으로 이에 항의하는 그래피티 작업들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어쩌면 그의 이런 방식은 실정법 상의 체계로 보자면 그 자체로 범죄의 형식을 구성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으나 그가 공공시설물 혹은 민간시설에 낙서를 하는 행위가 범죄라면 세계 곳곳에 네이팜탄과 클러스터 폭탄을 떨어뜨리는 자들이야말로 인류에 대한 범죄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은 힘 없는 자의 넋두리지만 짓밟힐 수록 그 목소리는 점점 더 커진다
얼룩말의 무늬를 빨아주는 '세탁'이란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지고, 선량해지는 기분이 든다. 아마도 그것이 뱅크시가 의도하고, 가고자 하는 방향이 아닐까 싶다.

뱅크시의 작품들 대부분은 결국 저(알타미라 벽화)와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은 그와 같은 운명으로 소실될 운명에 처한 뱅크시의 작품들을 망실되기 전에 사진으로 기록한 일종의 작품집이다.



* 대한민국 국립경찰이 인정한 '이명박 대통령의 상징 = 쥐'
오늘 아침 일간지를 보니 국내에도 뱅크시 못지 않은 뛰어난 예술성과 풍자정신을 가진 예술가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했다. 마치 뱅크시가 한국에 온 것이 아닌가 싶은 만큼 말이다.



사건의 개요는 간단하다. 20개국(G20) 정상회의를 알리고자 정부가 설치한 홍보 포스터에 낙서 그림을 그리던 40대 남성이 지나가던 시민에 의해 신고당하고,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는데, 경찰이 과태료 정도 물리고 훈방하면 될 사안에 대해 "G20을 방해하려는 음모"라는 거창한 명분을 붙여 구속영장을 신청했으나 기각된 사건이다. 경찰이 특히 예민하게 굴었던 이유는 체포된 이들이 경찰조사에서 했다는 말을 통해 반증되고 있다.

체포된 이들은 경찰조사에서 “단지 G20의 ‘G’라서 쥐를 그린 것일 뿐”이라면서 “정부가 G20에 매몰된 상황을 유머스럽게 표현하려 한 것인데, 이 정도 유머도 용납이 안되느냐”고 말했다는데, 체포된 이들이 이렇게 변명하듯 말해야 했다는 것도 우습지만, 사실 이 사건 자체가 코미디인 것은 정부가 G20 홍보를 위해 설치한 코엑스 주변의 각종 옥외 홍보물은 옥외광물법상 불법임에도 불구하고 강남구청이 정부가 설치한 것이라 단속할 수 없다고 하는 뉴스가 나온지 불과 2~3일도 안 되어 터진 사건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신출귀몰하는 뱅크시가 한국에 온다고 해도 그가 쉽게 작업하긴 여러모로 어려울 것 같다. 일단 신고정신이 투철한 시민(이런 건 주인의식이 아니라 관변의식이라고 부른다)이 계시고, 이를 절대로 용납해줄 마음의 여유가 없는 정부가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에서 점점 더 뱅크시적인 반항들, 익명의 가면 뒤에 숨어서 표출하는 저항들이 점점 더 커져가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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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색채를 포함한)로 말하기에 익숙한 예술가나 그것을 읽어들이는 전문적인 훈련을 쌓은 미술비평가들의 고민이 무엇일까? 회화 혹은 조각을 모두 포함한 예술 장르로서의 미술, 거기에 난해함을 더한 현대 미술의 조류를 모두 한눈에 파악하고 있는 감상자들, 일명 고급 문화 향수자들이라 해야할 일부를 제외하고 미술은 그저 막막한 대상에 불과할 것이다. 마치 보리수 밑에서 진리를 터득한 부처이지만 그 진리를 사람들에게 전할 수단이 없다면 과연 오늘날의 불교가 성립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고민이 예술가와 미술비평가의 고민일 것이다. 자신은 어떤 회화를 보고 그 안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했으나 그것을 일반 감상자들 에게 전할 방법이 없다면 그 아름다움을 발견한 비평가도, 그 작품을 만든 작가 자신도 답답하지 않을까?

특히 이 대목에서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이미 이미지를 자신의 언어로 채용한 작가들이 아니라 일종의 번역자라고 할 수도 있는 비평가들의 것이 더욱 크고 고심스러운 대목일 것이다.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체화한 모국어를 매개로 한 예술인 '문학' 조차도 안목있는 감상을 위해서는 감상자의 적절한 교육과 훈련이 필요한데, 미술이란 물론 그 자체가 번역이 필요없는 만국의 공통어라 할지라도 역시 제대로 된 감상을 위한 훈련과 교육은 필요한 것일게다.
게다가 이 책의 제목인 <서양화 자신있게 보기>란 말에도 숨겨져 있듯 '서양화'란 말은 이미 우리 것이 아닌, 즉 우리의 삶과 역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외부의 것이란 점에서 미술비평가의 고민은 이중의 것이 된다. 우리의 문화가 우리 토양(자연환경)에서 우리의 삶(생활환경)과 역사를 통해 내면화된 체험임에도 그것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할 터인데 역사적 배경이나 문화적 배경에 대한 사전지식이 전혀 없는 상황의 감상이란 그만큼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이주헌 역시 고민의 출발점을 삼은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의 1.2권 구분은 그런 점에서 상업적인 고려에 의한 분권이라기 보다 책의 목적 자체에 부합하는 구분이다. 우선 1권은 '미술감상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글을 통해 이 책의 목표를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일종의 소재별, 주제별 장르 구분이랄 수 있는 역사화, 초상화, 풍경화, 정물화와 같은 장르화들 마다 별도의 장을 두어 설명하고, 서양 미술의 중요한 개념들인 원근법, 빛과 색, 상징, 모델을 다룬다.
2권에 이르면 사조로 살펴 본 서양미술사라 할 수 있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고전주의에서 표현주의, 야수파에 이르는 서양 미술의 역사와 사조를 그리고 그 안에서 분화된 다양한 미술 유파의 흐름을 일일이 추적하고 있다. 그외에도 추상화, 판화, 조각, 미술관, 미술시장과 같이 중요하지만 자칫 소홀하기 쉬운 분야와 실질적인 미술감상을 위한 도움글도 빠뜨리지 않고 있다.

난 개인적으로 이주헌의 글을 참 좋아한다. 그의 글은 예술을 다루는 이의 글이 지녀야 할 미덕들을 적절히 가지고 있다. 우선 그는 아름다운 작품을 보면 적당히 흥분할 줄 안다. 이 말은 그가 대중적인 시각과 수준을 가늠할 줄 안다는 뜻이며 미술 평론을 업으로 삼데 그것을 즐길 줄 안다는 말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또 살짝 거리두기를 할 줄 안다.
이 책은 미술의 매우 다양한 분야를 다루고 있으며 그러므로 빠질 수 있는 다양한 함정들에 노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점이 이 책의 미덕을 훼손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미술(서양화)에 대해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이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애정은 가지고 있지만 스스로가 많이 부족하다고 여기고 있는 이들을 위한 입문서의 역할을 하고자 만들어진 책이다. 서양미술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는 텍스트를 필요로 하는, 이것을 발판 삼아 더욱 많은 것을 알고 싶은 이들에게 이 책은 매우 든든한 친구가 될 것이다. 무엇보다 이 책의 좋은 점은 '자신있게 보기'를 위해서라며 사실은 독자를 윽박질러 온 미술입문서와 다르다는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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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역사가 쓴 자서전 / 이석우 지음/ 시공사/ 2002년


이 책에는 "역사학자 이석우의 명화 속 역사 찾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그에 걸맞게 책의 시작 역시 원시 시대 라스코 동굴 벽화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중세와 르네상스, 프랑스 혁명과 양차 세계대전, 모더니티와 끝 부분에 부록처럼 이석우 자신의 개인사적인 미술편력이 담겨 있다. 이 책은 그간 <국민일보>에 연재되던 '이석우의 역사가 있는 미술'에 수록되었던 글을 보충하고 끝에 자신의 에세이를 첨가하는 것으로 한 권의 책이 완결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먼저 이 책의 장점부터 이야기해보도록 하자. 역사학자 이석우 선생은 그간 우리 인문학계에서는 보기 드물게 자신의 주전공 분야와는 관련없다고도 할 수 있는 미술 분야의 여러 좋은 책들을 상재해두고 있는 분이다. 그는 특히 우리 미술에 대해서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가나아트에서 지난 1990년 "예술혼을 사르다 간 사람들"을 통해 우리 현대 미술에 위대한 족적을 남긴 화가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고, 소나무에서 "역사의 들길에서 내가 만난 화가들(상,하권)"을 통해 변함없는 애정을 과시하고 있다. 그가 "그림, 역사가 쓴 자서전"의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곰브리치, 부르크하르트 등도 역시 역사학자인 동시에 화가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시인 보들레르가 뛰어난 미술평론가였음을 기억해야 하고, 아도르노가 음악 이론가였음을, 발터 벤야민이 영화에 대해, 롤랑 바르트가 사진에 대해, 아놀드 하우저가 20세기의 예술사에 대한 통사를 기록했었음을 더불어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학문간, 학제간의 상호 교류에 대해 지나치게 무관심하고, 심지어는 무식하다. 인문학이란 것이 결국 인간이란 생물에 대한 학문일진데 연계 학문간의 교류 없는 인문학이란 것이 결국 우리 인문학의 위기를 자초한 것은 아닌가? 나는 역사학자 이석우 선생의 이런 시도들이 우리 사회의 인문학자들에게 더할 수 없이 중요한 가르침이고, 더불어 우리 사회의 문화와 예술에 대한 품격높은 축복이 될 것임을 믿는다.

억지스러운 것이 아니길 바라면서 이 책의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지은이 이석우 선생은 "그림은 곧 역사이고, 모든 그림은 어떤 형태로든지 역사를 반영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 책의 처음 출발점이 거기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은 앞서 이미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 한 권으로 역사의 모든 부분을 말하기 위해 기획된 것은 아니라고 전제하더라도 이 책은 역사의 몇몇 국면들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다는 아쉬움을 남긴다. 첫째 이 책이 서양사 중심이라는 것, 둘째는 책 전체에서 분량면으로나, 내용면으로 러시아 혁명과 그 여파에 대한 부분은 사실상 거의 무시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석우 선생의 전공이 서양중세사라는 점을 고려하고, 이 책이 역사서라거나 미술사적인 연구서적이라기 보다는 미술작품을 통해 본 역사 에세이적인 입장이 강하다고 하더라도 형평성의 문제에서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그런 아쉬움들을 뒤로 하고 이 책은 많은 난관을 뚫고 훌륭한 성취를 거두고 있다. 작가의 말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미술은 시간 속에서 형성되므로 거기에는 역사가 묻어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책에서 쓰고 있는 그림들은 어떤 형태로든지 역사를 담고 있으며 역사를 반영하고 있다. 필자는 그들 그림에 얽힌 사연과 그것을 그린 작가의 이야기, 그리고 그 시대 미술의 특징을, 역사와 미술이라는 두 입을 통해 동시에 이야기" 하고자 했던 의도는 서로 상충되는 것은 아니나 성공적으로 이룩하기는 매우 어려운 것이다. 역사와 미술이라는 서로 다른 두 전문 분야를 한데 아울러 어우러지도록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두 분야에 대한 전문지식과 더불어 문학적인 감수성이 요구되는 것인데, 이석우 선생은 이 어려움을 어려움으로 여겨지지 않을 만큼 수월하게 봉합해낸다. 앞으로 이런 시도들이 우리 인문학계에서 잦은 일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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