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대행 주식회사(Corporate Warriors: The Rise of the Privatized Military)
- 피터 W. 싱어 | 유강은 옮김 | 지식의풍경(2005)


용병(傭兵, mercenary)이란 말은 남성들에게, 의무병 제도 아래 누구나 어떤 형태로든 군대 경험을 하기 마련인 대한민국에서는 특히나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단어임에 틀림없다. 어느새 10년 정도의 세월이 흘렀지만 IMF경제 위기가 대한민국을 덮쳤을 때, 꽤 여러 매체에서 다룬 기사 중 하나는 프랑스 외인부대에서 근무하는 어떤 한국인에 대한 이야기였다. 경제위기로 실직한 많은 한국 남성들에게 유행했던 말 가운데 하나는 군에 말뚝 박는 것이 차라리 낫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직업군인이 되란 것이었고, 이미 군 경험을 완료한 이들에게 그 대안 중 하나쯤으로 제시된 것이 프랑스의 외인부대였다. 한국인이 외인부대에 복무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0여 명이었고, 1995년까지 5명 정도가 근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프랑스 외인부대는 그 역사가 루이 11세까지 거슬러 오를 만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고, 무엇보다 국적이나, 인종, 전과를 가리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무엇보다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것 중 하나는 복무 후 주어지는 프랑스 국적과 더불어 여러 매체들을 통해 외인부대가 낭만적으로 묘사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때 초절정 미남 배우의 대명사였던 알랑 드롱도 17세 때 외인부대에 입대했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이와 같은 경험이 훗날 영화 <라스페기(Lost Command, 1966)>에서 잘 묘사되기도 한다. 이외에도 외인부대를 비롯한 용병들을 다룬 영화들, 문학 작품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다양한 편이다. 어쨌거나 그리스 시대 이래 서구의 전쟁사에서 용병은 거의 대부분의 시대를 주역으로 활동해 왔다.

 

▶ 더 와일드기스(The Wild Geese, 1978) - 국내에선 <지옥의 특전대>란 이름으로 개봉되었는데 1960년대 중후반 용병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영화였다(실제로도 당시 런던엔 용병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어떤 인연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중학생 무렵 극장에서 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리처드 버튼, 리처드 해리스, 로저 무어 등 나름 쟁쟁한 영국계 배우들이 출연한 영화로 포스터 이미지에 묘사되어 있는 붉은 베레모의 모표를 보아도 알 수 있듯 퇴역군인들로 이루어진 이들 용병들은 아프리카에 이해관계가 달린 한 기업가에 고용되어 반군 치하에 있는 아프리카의 정치 지도자 한 명을 탈출시키는 작전에 동원된다. 그러나 작전 중 반군 지도자와 정치적 협상을 성공시킨 기업가들이 이들 용병(Wild Geese)과 정치인의 귀환을 방해하여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극중에서 자신들이 구출한 흑인지도자를 매우 혐오하는 남아공출신의 백인 용병에게 흑인지도자(넬슨 만델라를 연상시키는)의 말이 인상적이다. "이제는 흑인도 백인도 없소. 우리는 모두 자유라는 이름아래 새로운 노예생활을 시작했을 뿐이오. 처음에는 아프리카의 백인이 그다음은 흑인과 흑인이, 그리고 지금은 서구가 아프리카를 훔치고 있소." 나중에 흑인지도자를 혐오했던 남아공용병은 그를 지키려다 숨진다.


민간군사기업에 의한 현대 전쟁의 민영화 경향에 대한 충격적인 증언들을 담고 있는 『전쟁 대행 주식회사』가 쓰게 된 계기는 이 책의 저자 피터 W. 싱어가 보스니아의 전후 상황을 연구하는 UN의 프로젝트에 참가하면서부터였다. 그는 이 프로젝트에 참가하기 전까지 용병, 민간군사기업의 실체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다고 말한다. 싱어는 『전쟁 대행 주식회사』에서 최근 냉전 해체 이후 벌어진 수많은 분쟁, 전쟁의 사례 곳곳에서 민간군사기업의 실례를 보여준다.


◀ 인구 500만명인 서부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 시에라리온은 10년에 걸친 내전으로 만신창이가 됐다. 내전은 1991년 포데이 산코를 지도자로 한 혁명연합전선(RUF)이 조지프 사이두 모모(J.S. Momoh) 정권에 반기를 들면서 비롯되었다. 모모 대통령과 측근들이 부패해 있었고 4만명에 이르는 레바논 정착민과 소수의 세네갈인들이 다이아몬드 광산 채굴권과 무역, 상업 등 시에라리온 경제의 70∼80%를 쥐고 있다는 점 등이 산코가 일으킨 반란의 명분이었지만, 내전은 시간이 지날수록 다이아몬드 광산을 차지하려는 싸움으로 변질되었다.


지하자원이 곧 전쟁자금의 주요 공급원이었기 때문이었다. RUF의 포데이 산코는 시에라리온 동부의
다이아몬드 광산들을 장악, 이를 자금원으로 무기를 사들여 세력을 넓혀갔다. RUF 반란군은 어린 아기의 두 팔마저 도끼로 내리찍어 잘라냈다. 내전 초기부터 RUF 반군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마을을 불지르고 비전투원인 양민들을 공격해 죽이거나 도끼로 손목, 발목을 자르는 잔혹 행위를 저질렀다.


아프리카에서 사람의 손목을 도끼로 내리치는 끔찍한 행위는 미국의 서부영화들이 묘사하는 인디언들의 머리가죽 벗기기가 사실은 백인들에 의해 먼저 시작되었던 것처럼 손목절단 역시 식민지배국이었던 벨기에가 원조다. 그들은 식민지 콩고의 풍부한 자원을 수탈하면서 현지인들의 저항을 억누르려고 손목을 자르는 만행을 저질러왔는데, 포데이 산코의 손목절단은 “손이 없다면 투표도 못할 것이다(No hands, no more votes)”란 논리로 자행되었다. 1997년 시에라리온 대통령선거에서 티잔 카바의 시에라리온 인민당(SLPP)에게 지지표를 던진 손들을 자른다는 괴상한 논리였지만 실제로는 많은 피해자들이 투표와 무관한 어린이들이었다.


국제적인 다이아몬드 광산의 산지로 유명한 시에라리온은 오랫동안 무정부상태로 방치되어 왔다. 반군들은 대로변에 매복하거나 야간에 촌락을 습격하여 삼림 벌채용 칼로 마을 주민들의 수족을 절단하는 등 무자비한 살상을 일삼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사회는 이 사태를 방관했다. 1995년 반군은 시에라리온의 수도 프리타운 인근 20km 지점까지 육박해왔고, 정부의 주요 수입원이었던 다이아몬드 광산마저 반군의 수중으로 떨어졌다. 그때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알 수 없는 현대적인 기동타격부대가 출동해 수도 인근까지 진출한 반군 세력을 축출하고, 다이아몬드 광산 지역을 되찾았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얼마 뒤엔 밀림 깊숙이 숨겨진 반군 본부를 습격해 완전히 파괴해 버렸다. 한때 수도를 점령하려 들만큼 강력한 위세를 떨쳤던 시에라리온의 반군은 궤멸되었고, 시에라리온은 23년 만에 처음으로 자유선거를 치를 수 있었다.

 

그들은 누구였을까? 그들은 UN군도, 미국이 자랑하는 델타포스나, 그린베레가 아니었으며 "No Action Talking Only"라는 비아냥의 대상이었던 NATO군도 아니었다. 그들은 남아공에 본부를 둔 이그제큐티브 아웃컴즈(EO, Executive Outcomes)라는 민간군사기업의 직원들이었다. 악명 높은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이 폐기된 뒤 남아공은 더 이상 다수의 흑인을 억누르기 위한 군대의 효용가치가 떨어졌다. 정부는 군대를 축소하기 시작했고, 그동안 무수한 실전 경험으로 단련된 남아공 정부의 특수부대 병사들은 실업자가 되었다. 앞서 우리의 경제위기 이후 외인부대 열풍이 불었던 것처럼 소련 연방의 해체 이후 경제위기로 인해 해체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등지의 군인들 역시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야 했다. EO를 비롯한 이들, 수많은 민간군사기업들은 국가가 큰 비용을 들여 만든 전문가 집단을 값싸게 고용할 수 있었고, 그들은 주로 아프리카와 아시아 등 냉전 해체 이후 불안정해진 지역을 중심으로 그들의 실무경험(전투경험과 능력)을 팔았다.



 ▶ 시에라리온 내전에 참가한 EO(Executive Outcomes) 대원들의 모습니다. 악명높은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이 폐지되면서 실직한 남아공의 직업군인들은 물론 냉전 해체 이후 새로운 전장을 찾아나선 구 동구권 병사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이들의 군사력은 아프리카 지역의 웬만한 정규군들을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민간군사기업(PMC)의 대명사가 반드시 우리가 흔히 연상할 수 있는 전투 용병 집단일 것이라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직접 전투에 임하는 전투 용역은 이들 민간군사기업이 행하는 여러 용역 사업들 중 극히 일부일 뿐이다. 실제 군대의 구성이 그러하듯 오히려 직접 전투에 임하지 않지만 과거라면 군대가 직접 했을 분야의 민영화된 부분이 이들의 주된 사업 영역이기 때문이다. 가깝게는 과거 미국의 군사고문단이 행했을 군대의 훈련 및 조직이나 병참, 전략 개발 등의 영역이 현대화된 민간군사기업의 주된 사업 영역이다.

 

유럽의 30년 전쟁은 더 이상 '제국'이라는 이름으로는 민족의식이 각성된 집단을 통치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30년 전쟁의 결과물이었던 1648년의 베스트팔렌 평화협정은 ‘주권’이란 개념을 통해 민족국가, 특정 영토와 인구에 대한 배타적인 지배권(사회를 보호하는 무력, 즉 군대의 독점)을 인정하게 된다.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는 시민에 의한 의무병 제도의 군대는 근대국가의 역사보다도 더 뒤에 나타난 현상이다. 근대 이전까지 전쟁은 보통 시민이 참가하는 영역이 아니었다. 단적으로 서구의 고대 전쟁은 특수한 일부 사례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 전통적인 전사계급에 의해 행해졌고, 중세에 이르러서도 봉건 기사에 의한 단기 결전이 대부분이었다. 지배계급은 일반시민에게 무기를 쥐어주는 것을 매우 위험한 일로 생각했다. 이들은 시민에게 전쟁에 참여할 기회를 주는 것이 지배계급에 의해 독점되는 배타적 권리를 요구할 위험을 증진시키는 것으로 생각했다. 전쟁이 일반 시민의 몫이 된 것은 프랑스대혁명의 결과였다.



▶ 로마 바티칸의 교황청을 지키는 스위스 용병들의 모습. 이들의 복장을 디자인한 것은 미켈란젤로라고 하는데 중세시대의 용병들의 복장과 무장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현재는 의전적인 의미가 강하지만 과거 역사에서 이들은 실제로 매우 뛰어나 전투집단이었다. 1527년 5월 6일. 독일 황제의 군대가 로마교황을 공격했을 때 로마 베드로 광장의 진입로를 봉쇄하면서 147명의 교황호위병이 전사하는 가운데 나머지 42명의 호위병이 교황(Clement VII)을 피난시켰던 일로 인해 바티칸은 스위스 용병들의 용맹성과 충성을 인정하고 그 뒤로 스위스 용병(물론 가톨릭 신자)들만으로 바티칸과 교황을 지키도록 하고 있다.
 

프랑스 혁명군은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용병부대를 격파했고, 연이은 참패를 통해 이들 국가들 역시 대중에게 일정한 권리를 양보하는 대신 용병에 의한 군사체제를 포기했다. 프로이센은 군대를 시민군 체제로 개조했고, 아이러니하게도 프랑스 대혁명의 영향을 받은 프로이센의 시민사회는 이제 황제의 신민이 아니라 스스로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존엄을 위해 기꺼이 전장에 나아갔다. 이후 전쟁 혹은 군대는 더 이상 사적인 영역에서 돈벌이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시민으로서의 권리이자 국가의 존엄한 사명이 되었다. 전쟁의 참혹한 근대성은 민주주의와 함께 왔고,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의 총력전 체제를 거치며 전투에 참가한 병사보다 더 많은 민간인 희생자를 만드는 결과를 빚게 되었다. 국가의 이와 같은 근대적 전쟁 수행에 대한 탈-근대적 반성은 베트남전의 반전운동이었을 것이다. 각성한 시민의 저항에 부딪힌 미국은 더 이상 근대적 의미에서의 전쟁을 수행할 수 없었고, 결국 전쟁에서 패한다.

 

비록, 피터 W. 싱어가 이 책 『전쟁 대행 주식회사』에서 명확하게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현대(군대)전이 탈근대화(민영화) 현상을 빚는 까닭을 나는 크게 세 가지 정도로 보고 있다(특히, 미국을 중심으로).
 

현재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은 민간군사기업(PMC)의 주요 활동 무대가 되고 있다. 이라크 현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PMC 요원들, 여성 대원의 모습이 이채롭다.


첫 번째. 근대화된 전쟁(총력전)의 무자비한 살상을 경험한 시민들이 더 이상 애국심과 시민의 권리에 호소하는 전쟁에 참여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국가가 배타적으로 독점한 폭력이 시민의 감시를 벗어나 지배계급의 이해관계에 따라 행사되고, 그 희생이 피지배계급인 시민들에게만 전가되는 것을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어떤 국가도 시민의 반대 여론을 의식하지 않은 채 전쟁(혹은 파병)을 수행할 수 없다.

 

두 번째.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것은 더 이상 대규모 병력이 아니라 군사무기를 둘러싼 첨단기술이다. 이라크전의 양상이 잘 보여주듯 이제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것은 대규모 징집에 의한 병력의 수나 전차, 장갑차 등 재래식 무기에 의한 결전이기 보다는 크루즈 미사일과 같은 첨단병기에 의한 것이다.(물론 군사적 승패가 정치적 승리를 보장하지는 않지만) 첨단기술은 좀 더 소수의 정예화된 군사력만으로도 이전보다 훨씬 높은 살상력을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말해 탈근대화된 전쟁을 수행하는 인적 자원들은 중세시대의 전쟁을 수행했던 기사계급처럼 소수의 전문화된 집단이다. 따라서 국가는 시민의 참여 없이도(실제로 현대전의 양상 대부분은 시민의 참여 없이도 전쟁을 수행할 수 있으며, 징집이 필요할 만큼의 인명손실이 없다는 이유로 배제시킨 채 - 제국주의 시대 영국 본토의 신민들에게 식민지 확장을 위해 벌어졌던 군소 분쟁의 대부분은 전투가 이미 종결된 시점에서 알려지곤 했다. 왜냐하면 워낙 짧은 시간에 벌어졌고, 본국의 승인을 얻기 이전에 이미 전투상황이 종결되곤 했으므로) 얼마든지 전쟁을 수행할 수 있다.

 

마지막 세 번째 요소는 베스트팔렌 조약에 의해 성립된 근대국가 모델의 해체 혹은 ‘국가의 국제화’ 경향이다. 베스트팔렌 조약에 의해 형성된 근대국가의 개념은 국가 보다 더 높은 상위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국가는 자기 이외의 다른 어떤 권위에도 종속되지 않았으나 이제 국가는 자본주의의 세계적 협(분)업 체계의 하위 요소 중 하나로 전락해 가고 있다. 다시 말해 한미간 FTA체결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남한 내에서 배타적 권리로 인정받아 오던 행정 서비스는 미국의 일개 기업에 의해 국제사법기관에 피소당할 수도 있다. 또한 코소보, 이라크 등의 불량국가(rogue state)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인권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국가의 주권은 초국적 제국(현실적으로는 현재의 미국)에 의해 부인당할 수 있다. 좀 더 쉽게 말해서 현대의 국가는 근대 이전의 봉건 영주들이 처했던 운명을 되풀이할 수도 있다. 근대를 형성한 주요한 힘 가운데 하나는 분명히 봉건제라는 낡은 영역의 울타리를 뛰어넘고자 했던 근대화된 자본의 역학 관계(dynamics)에 의한 것이었다.




▶ 아덴만 인근에서 작전 중인 프랑스군에게 나포된 소말리아 해적들. 국가가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을 때, 국가가 독점적으로 수행하도록 되어 있
는 무력은 때때로 생존을 위협받는 민간인들에게 넘어가기도 한다. 이것이 나타나는 현상소말리아 해적이나 용병기업의 출현처럼 각기 다르지만 본질적으론 국가가 제대로 된 역할과 기능을 수행할 수 없을 때 출현한다는 점에선 동일하다. 민간군사기업(PMC)들은 소말리아와 같이 국가기능이 정지된 상황에서 내전을 수행하고, 권력을 지속시키려 하는 군벌들(당연히 해적들)에게 고급군사기술은 물론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물론 소말리아에 시에라리온처럼 다이아몬드 광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콩고처럼 휴대폰에 필수부품이 되는 콜탄 같은 희귀광석의 산지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 대신 소말리아엔 이른바 '위대한 항로'라 불리는 석유문명의 젖줄인 수에즈 운하와 걸프만 항로가 있다. 소말리아 해적(군벌)들은 말라카 해협의 해적들보다 여러 면에서 뒤처져있지만 이 항로를 오가는 유조선, 화물선, 어선과 인질들을 통해 재원을 확보하면서 점차 첨단화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물론 그 배후엔 이들에게 기술을 제공하고 있는 PMC가 있으며 그들이 벌어들이는 돈은 인질협상극의 대가이다. 이들 PMC들은 인질극을 벌이는 해적들과 인질로 사로잡힌 국가, 기업들 사이에 협상을 대행해주기도 한다.  


이와 같은 현상이 우리를 빗겨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을 위해 약간의 설명을 더하자면 오랫동안 아무런 의심 없이 공공영역에 속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시민의 생명과 재산의 안전을 책임지는 ‘치안’이 우리나라에서 어떻게 민영화되고 있는지 생각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대한민국 국립경찰은 ‘국민과 5분 거리’에 있지만, 민간 보안 회사들은 부유한 시민들의 안전을 보호하는 첨단 치안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언제나 함께 있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안전은 더 이상 공공영역의 차원에서 무료로 제공되는 것이 아니다. 소득수준이 낮은 시민들이 위험한 밤거리에 무방비로 방치되는 동안, 부유한 계급은 높다란 담장과 민간 보안 서비스 회사가 제공하는 최첨단 이동 감시 카메라를 통해 자기 집 안마당은 물론 골목의 보행자까지 감시한다. 피터 W. 싱어가 경고하는 것은 공공영역의 사영화가 초래할 무서운 재앙의 서막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국가의 시민병들은 종종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복무하는데 반해서 민간군사기업은 이윤을 위해 전쟁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 민간군사기업(PMC)와 아프리카의 비극에 대해선 앞으로 차차 보강해갈 기회가 있으리라. 현재진행형의 슬픔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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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회의는 춤춘다. 그러나 진전은 없다(Der Kongress tanzt viel, aber er geht nicht weiter)."
- 샤를 조제프 라모랄 리뉴(Charles-Joseph, 7th Prince of Ligne, 1735.5.23. 브뤼셀 - 1814. 12.13. 비인)



유럽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국제회의 - 빈회의

역사상 최초의 근대적 국제회의로 알려진 베스트팔렌조약(Peace of Westfalen, 1648)은 1618년부터 1648년까지 독일을 주요 무대로 신교(프로테스탄트)와 구교(가톨릭) 간에 벌어졌던 ‘30년전쟁(Thirty Years' War)’을 매듭짓기 위해 열린 회의였다. 유럽통합, EU 출범의 기원을 1951년 체결된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를 기점으로 삼는 것이 정설이긴 하지만 역사적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나는 최초의 유럽회의인 베스트팔렌조약까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회의는 최초의 국제회의였던 데다가 가장 치열하고 장기간에 걸쳐 치러진 종교전쟁의 마무리를 위한 회의였던 만큼 회의에 참가했던 각국이 서로 주도권을 잡기 위해 의석은 물론 자리배치와 같은 사소한 의전절차에 이르기까지 모두 처음부터 새로 규정해야만 했기 때문에 정식 의제에 도달하기까지 상당한 진통을 겪어야 했기 때문에 최종적인 합의에 이르는 데까지 2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그러나 회의가 잘 진행되지 않기로는 1814년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 열렸던 빈 회의(Congress of Wien)를 손에 꼽지 않을 수 없다. 베스트팔렌이 30년전쟁의 마무리를 위해 열렸던 것처럼 빈회의는 유럽을 뒤흔든 프랑스대혁명과 나폴레옹전쟁의 결과를 수습하기 위해 열렸다. 이 회의의 주최자는 당시 오스트리아 외상(外相)이었고, 훗날 오스트리아의 재상(1821)이 되었던 메테르니히(Metternich, Klemens Wenzel Nepomuk Lothar von/1773 ~ 1859)였다. 1789년 시작된 프랑스대혁명은 1814년 3월 31일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 프로이센의 빌헬름3세와 오스트리아 사령관 슈바르첸베르크 등이 이끈 군대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 입성하면서 끝났다. 한때 나폴레옹의 외무장관이었던 탈레랑(Charles-Maurice de Talleyrand, 1754-1838) 공작이 주요관문을 열어준 배신 덕분이었다. 황제 자리에서 쫓겨난 나폴레옹은 무장경비병들의 엄중한 감시 속에 엘바섬으로 유배되었다.


나폴레옹이 퇴위한 뒤 메테르니히는 파리조약에 따라 프랑스가 포기한 영토 처리 문제 등 산적한 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빈 회의를 개최하게 된다. 빈회의는 나폴레옹이 점령하여 자신의 일족과 공신들에게 나누어주었던 프랑스 이외의 영토들이 파리조약에 의해 무주공산(無主空山)이 되어버린 영토들을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방법으로 재분배해야 한다는 무거운 숙제를 짊어지고 있었다. 또 유럽 각국에서 군주와 지도적 정치가가 모인 대회였기 때문에, 실제상의 강화회의라 해도 무방하다. 유럽의 크고 작은 90개의 왕국과 53개 공국(公國)의 군주, 정치가들이 참가하는 유럽 역사상 최대 규모의 회의였기 때문에 오스트리아 정부는 각국 대표들을 접대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거액을 투자해야만 했다.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비인에 도착한 각국 대표들을 접대하는 실무 책임은 장 자끄 루소, 볼테르 등 계몽철학자들은 물론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2세(Joseph II) 황제의 친구, 예카테리나 여제 등을 모시기도 했던 벨기에 출신의 오스트리아의 장군 샤를 조제프 라모랄 7대 리뉴(Charles-Joseph, 7th Prince of Ligne, 1735. 5. 23. 브뤼셀 - 1814. 12. 13. 비엔나) 공(公)이 맡았다.


샤를 조제프 라모랄 리뉴 공

샤를 조제프 라모랄은 1735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오스트리아의 귀족으로 오랫동안 군에 몸담았던 제6대 리뉴 공인 클로드 라모랄(Claude Lamoral, 6th Prince of Ligne)과 엘리자베트 알렉상드린 드 잠(Elisabeth Alexandrine de Salm)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 역시 부친을 따라 어린 나이에 오스트리아 제국 육군에 입대했는데, 7년전쟁(Seven Years' War)에 참전해 브레슬라우(Breslau), 로이텐(Leuthen) 전투 등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펼친 덕분에 전후 소장으로 진급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막대한 영지를 물려받아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그는 오스트리아의 황제 요제프 2세와 매우 가까운 친구이자 고문이었다. 바바리아계승 전쟁이 벌어지자 참전했다가 전쟁이 끝나자 병영을 떠나 영국, 독일, 이탈리아, 스위스, 프랑스 등지를 여행하며 각국의 철학자, 과학자들과 교분을 쌓으며 유럽의 사교계에서 가장 인기있고, 교양있는 인물로 떠올랐다. 그가 프랑스의 계몽철학자들과 교분을 맺은 것은 이때였다. 스위스 접경지대인 페르네에 은거하고 있던 볼테르를 방문한 자리에서 카사노바(Giovanni Giacomo Casanova, 1725~1798)를 처음 만나게 되었는데, 그의 매력에 흠뻑 빠진 리뉴 공은 "그가 무슨 말을 하던 계시가 되고, 무슨 생각을 하던 책이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1784년 다시 군무에 복귀한 리뉴 공은 포병사령관(Feldzeugmeister)으로 진급했는데, 1787년엔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Ekaterina II, 1729-1796)를 수행하여 크리미아 반도를 여행했고, 1788년 러시아-투르크 2차 전쟁에서 벨그라드(Belgrade) 포위전에 참가한 공로로 러시아 육군 원수에 임명되기도 했다. 벨그라드 포위전 이후 그는 자신의 고향이자 친척들은 물론 아들들까지 참가하고 있던 벨기에혁명운동의 수장으로 초빙되었지만 황제와 오스트리아에 대한 충성심으로 거절하며
"그는 결코 겨울에는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다(He never revolted in the winter)"란 말을 남기고 벨기에를 떠나 오스트리아로 망명(?)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영지인 브라반트를 잃었다. 황제의 신임을 얻을 수 있었던 덕분에 그는 황제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 머물며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기며 자신의 저술들을 정리하고 쓸 수 있는 여유를 누릴 수 있었다. 그의 말년에 개최된 빈회의에서 리뉴 공은 유럽 각처에서 모여든 왕과 귀족들을 접대하는 책임을 맡았다.


각국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며 지지부진을 면치 못한 빈회의

빈회의는 국제회의란 이름이 붙긴 했지만 대개의 국제회의들이 그러한 것처럼 실제로는 대프랑스 전쟁에서 주축을 이루었던 오스트리아·영국·러시아·프로이센의 4대국과 그 당사자였던 프랑스의 5개국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프랑스는 비록 패전국이긴 했지만 탈레랑의 뛰어난 외교적 책략 덕분에 4대국에 버금가는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이외의 나머지 국가들은 이들 강대국이 내리는 결정이 자국의 이해에 손실로 돌아오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회의의 추이를 살펴보는 정도에 그쳤고, 실제로도 참가국 전체가 한 자리에 모이는 전체회의는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통신이동수단이 발달한 오늘날엔 국제회의가 개최되기 전까지 사전에 실무자들이 계속 안건을 조정하고, 조율하는 정지작업들이 수반되기 때문에 정상회의는 이를 추인하는 정치적 요식행사에 불과하지만 이 당시의 회의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강대국을 제외한 나머지 참가자들은 마땅히 할 일이 없었고, 그냥 돌아가자니 빈 회의가 다루는 주제나 안건이 너무 묵직했기 때문에 나머지 참가자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당시 오스트리아는 전 유럽에서도 가장 번화한 거리와 화려한 예술과 문화가 넘쳐나는 곳이었고, 메테르니히는 이들 유럽의 대표자들에게 오스트리아 제국의 국력을 한껏 자랑하고 싶었기 때문에 회의장 주변에선 연일 파티와 무도회, 성대한 연회와 귀족과 귀부인들의 사교적 만남이 벌어졌다. 프랑스 대표로 참여했던 탈레랑에 따르면 하루 일과 중 4분의 3이 연회와 흥겨운 왈츠로 채워졌다. 회의가 난항에 부딪히면 부딪힐수록 연회와 무도회는 더욱 화려해졌고, 그 화려함의 이면에는 영토를 둘러싼 각국의 이전투구(泥田鬪狗)가 더해졌다.


- 빈 회의가 열렸던 오스트리아 쇤브룬(Schonbrunn)궁전 내부 '거울의 방'


빈 회의가 이처럼 지리멸렬하게 된 까닭은 나폴레옹이라는 거대한 적(賊)을 상대하기 위해 연합했던 유럽의 강대국들이 이제 나폴레옹이 남긴 거대한 유산을 앞에 두고 조금도 손해를 보지 않으려 들었기 때문이었다. 조금의 진전도 없이 계속해서 늘어지기만 회의 속에 어느덧 체력도 바닥나고, 참을성도 없어진 오스트리아의 늙은 장군 리뉴 공은 자신의 친구들에게
"회의는 춤춘다. 그러나 진전은 없다(Der Kongress tanzt viel, aber er geht nicht weiter)."라고 편지를 쓴다. 결국 그는 빈회의가 끝나는 것을 보지 못하고 1814년 12월 13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세상을 떠난다. 당대 최고의 인기 있는 명사로 그가 남겼던 저술이나 오스트리아의 장군으로서의 업적은 시간이 갈수록 퇴색하고 결국 잊혀져갔지만 그가 빈회의를 바라보면 남긴 한 마디 "회의는 춤춘다. 그러나 진전은 없다"는 말은 역사가 바뀌어도 빈번히 개최되는 실속 없는 국제회의 때마다 여러 사람의 인구에 회자되는 명언으로 기억되고 있다.


돌아온 공동의 적과 메테르니히 체제

빈 회의가 급물살을 타게 된 것은 영원히 사라진 줄 알았던 그들의 적 나폴레옹이 1815년 2월 26일 감시병을 피해 엘바섬을 탈출해 프랑스 프레쥐 해안에 상륙했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의 프랑스 상륙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았는데, 그를 체포하라고 파견한 병사들이 돌아온 나폴레옹의 첫 번째 병사가 되었고, 그가 파리를 향해 다가오면 올수록 대중의 환호성도 더욱 커져만 갔다. 황제군의 뛰어난 장군이었던 미셸 네(Michel Ney, 1769-1815) 원수는 루이 18세에게 "반드시 나폴레옹을 철창에 넣어 파리로 데려오겠다"고 맹세했지만 막상 나폴레옹을 만나자 자신의 병사들이 복위한 부르봉 왕가의 왕보다 폐위된 전임 황제를 더 열렬히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 역시 옛 황제의 충성스러운 장군으로 되돌아가버렸다.

- Vasily Ivanovich (Wilhelm) Sternberg - Napoleon returning from Elba


더 이상 화려한 무도회로 시간을 끌 수 없었던 빈 회의의 참가자들은 프랑스의 탈레랑이 제시한 ‘정통주의(Legitimisme)’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다시 말해 과거 프랑스나 나폴레옹 제국이 점령했던 땅은 아무런 조건 없이 원래의 주인(정통 군주)에게 돌려주고, 옛 주인이 없어져 임자 없는 땅이 된 영토를 차지하려면 그만한 대상을 대신 내 놓아야 한다는 원칙이었다.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기 직전인 1815년 6월 9일, 오스트리아, 영국, 프로이센, 러시아, 프랑스 등 5개국은 비밀리에 최종적으로 합의서를 작성했는데 이것이 바로 ‘빈 의정서’였다. 프랑스대혁명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결과를 아예 처음부터 없었던 사건이었던 것처럼 과거로 되돌리려했기 때문에 빈회의에 의해 만들어진 이 체제를 빈체제 혹은 메테르니히 체제라 부르는 보수반동적인 국제질서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미 프랑스대혁명의 자유주의 세례를 받은 시민들은 과거로 돌아갈 수 없었고, 메테르니히와 유럽 열강들이 만든 체제를 조롱하며 거세게 저항했다.


“회의는 춤춘다. 그러나 진전은 없다”의 가장 비근한 사례

- 2010 서울 G20 정상회의
베스트팔렌조약에서 빈회의에 이르기까지 국제회의의 대부분은 한 나라의 입장에선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난제를 처리하거나 여러 나라들이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이해관계를 조정하기 위해 열린다. 그룹을 뜻하는 영문 Group의 앞 철자를 따서 ‘G20 정상회의’라고 불리는 이 국제회의는 1974년 오일쇼크로 세계 경제가 휘청거리기 시작하면서 만들어진 선진 7개국 정상회의 ‘G7(미국·프랑스·영국·독일·일본·이탈리아·캐나다)’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G7’ 출범의 주된 요인을 ‘오일쇼크’만으로 기억한다면 겉으로 드러난 현상만 보고 심층적인 원인에 대해서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의 불안정으로 인해 발생하게 된 세계경제대공황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월가의 주가폭락으로 시작되었고, 대공황의 최종해결책은 제2차 세계대전이었다. 전후 미국을 비롯한 세계 주요열강들은 경제위기가 세계적인 갈등과 열전으로 비화되는 것을 국제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모색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세계 최강대국으로 떠오른 미국의 이해관계(달러를 기축통화로 결정)가 일방적으로 관철된 브레턴우즈체제가 출범하게 된다.


미국의 패권적 우위와 서구 선진국들의 경제적 이해가 담합하여 만들어진 브레턴우즈 체제로부터 소외된 국가들(아시아, 중동,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등)은 서구에 종속된 정치경제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로 국제적인 연대체인 비동맹 체제 ‘아시아 아프리카 회의(반둥회의)’를 출범시킨다. 이들이 국제연합(UN)을 배경으로 브레턴우즈체제에 도전하면서 만들어진 것이 국제연합무역개발회의(United Nations Conference on Trade and Development, UNCTAD)였는데, 이 기구는 강대국들이 주도하는 국제질서에 맞서 약소국들의 목소리를 결집할 수 있는 효과적인 장이었다. 미국이 UN에 대해 불만을 품고, UN을 개혁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 것이 이 무렵의 일이다. 개발도상국과 후진국들은 4년마다 열리는 UNCTAD 회의를 통해 자국 경제를 보호하기 위해 다국적 기업을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주요 생산 설비와 천연자원을 국유화해야 한다는 입장을 천명했다. 또한 농산품 및 원자재 수출에 의존하는 국가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국제 무역 체계를 개혁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들이 실제 실력행사에 나선 것이 바로 1960년에 설립된 석유수출국기구(Organization of the Petroleum Exporting Countries, OPEC)이 1973년의 오일파동의 본질이었다.


제3세계 비동맹 국가들의 거센 도전과 맞닥뜨린 브레턴우즈체제, 다시 말해 초국적 금융자본 역시 이들의 저항을 넘어서기 위한 시도로 1986년부터 GATT(General Agreement on Tariffs and Trade,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 체제의 우루과이 라운드를 출범시키는데,  UR의 결과로 GATT는 1995년 WTO(World Trade Organization, 세계무역기구)로 개편되었고, 이 과정에서 개발도상국들은 자국 경제를 보호할 수 있는 경제정책수단들 가운데 상당수를 빼앗기고 말았다. 이 시기부터 초국적 금융자본들은 세계 각국의 통화위기를 기회로 일국주의적인 정부 정책을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하부로 끌어들였다. 이에 저항한 나라들은 거의 대부분 외환위기를 경험하게 되었고, 결국 미국이 주도하는 IMF의 관리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세계 여러 나라들이 한꺼번에 참여하는 일괄타결방식의 WTO협상은 계속해서 난항을 겪었고, 초국적 금융자본이 원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반대하는 국제적인 연대와 저항의 움직임과 맞부딪치며 좌절되기도 했다.


지난 1999년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금융자본주의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미국 시애틀에서 개최된 WTO협상은 전 세계에서 모여든 시민사회세력과 미국의 노동자들이 한데 모여 세계화 반대시위를 벌인 '
시애틀 전투(Battle of Seattle)'로 좌절되었다. 이후 WTO협상은 개최될 때마다 세계 곳곳에서 민중들의 거센 저항에 직면하여 급기야는 걸프만의 작은 섬, 사막과 바다로 격리된 카타르의 도하에서 도망치듯 열려야만 했다. 이처럼 WTO협상이 계속해서 어려움에 처하자 미국은 나라와 나라, 지역 간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함으로써 개별돌파전략을 수립한다. 1994년 1월 신자유주의적 경제 통합의 전범(典範)이라 할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등장하면서 WTO와 우루과이 라운드 역시 탄력을 받기 시작한다.



쌍둥이 무역적자에 시달리고 있는 미국은 재정적자 위기를 세계기축통화인 달러의 발행으로 상쇄시킴으로써 그 부담을 무역흑자를 통해 높은 달러보유액을 가지고 있는 나라들에 전가시키는 전략을 여러 차례 구사해왔다. 1970년대 독일, 1980년대 일본, 그리고 지난 1990년대 후반 아시아를 강타한 외환위기의 원인이 거기에 있었다. 지금까지 소외되어 왔으나 이후 경제규모가 확대되면서 자기 목소리를 내게 된 신흥국들과 선진국들 사이에 국제협력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1999년 G7 국가와 브라질·인도·중국·한국 등 주요 신흥국의 재무장관이 모여 회의를 열고 G20 재무장관·중앙은행총재 회의를 열기로 합의한 것이 G20이다. 좋게 말하면 G20은 이제 개발도상국을 벗어나 선진국의 대열로 발돋움하고 있는 나라들까지 포함시켜 세계 경제정책을 논의하는 자리이지만 나쁘게 보면 그동안 미국의 경제위기를 감당해오던 G7국가들의 노력만으로는 더 이상 미국의 경제위기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그 책임분담을 다른 신흥개발국가들까지 전가시키기 위해 문호를 개방한 것이다.


G20이 출범하게 된 원인을 살펴보면 이런 사실이 더욱 극명해지는데 잘 알려져 있다시피 미국의 투자은행인 리먼 브러더스의 파산으로 시작된 금융위기가 전 세계를 강타한 결과물이라고 보아야 정확할 것이다. 미국발 금융위기가 발생하자 미국은 G20 재무장관회의 참가국 정상들을 워싱턴으로 초청해 국제 금융위기 극복 방안을 논의했는데, 이것이 제1차 G20 정상회의이다. 그 다음 회의는 2009년 4월 영국 런던에서 열렸고 9월 미국 피츠버그에서 열린 제3차 회의에서는 각국이 G20 정상회의의 정례화에 합의하였다. 4차 회의가 지난 6월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렸고, 이번 11월 서울에서 개최되는 G20 정상회의는 제5차 회의이다.


전후 세계기축통화로 자리 잡은 달러 화(貨)의 위기는 미국의 적자와 신자유주의 체제의 근본적인 결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미 연방준비은행은 지난 2008년 금융위기 직후부터 이미 1조7천억 달러 달러를 인쇄해 풀었고, 이번 서울 G20정상회의를 앞두고 6천억 달러를 추가로 발행할 계획이라며 환율전쟁에 불을 붙이고 있다. 미국은 독일, 중국, 브라질을 비롯한 G20국가들이 미국의 채무를 달러화 약세를 통해 공동 부담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는데, 이것이 지난 1차 회의 때부터 현재까지 해결되지 않고 있는 미국의 재정위기를 타개할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을 비롯해 과거 미국의 적자를 떠안으며 경제적으로 커다란 위기를 경험했던 독일, 일본 등이 미국의 이런 방침을 쉽사리 수용하지 않는 상황이기 때문에 G20정상회의가 거듭되고 있는 것이다.


세계 경제의 86%를 쥐락펴락하는 부자나라의 정상들이 G20정상회의를 정례화한 이유는 회원국 정상들이 모여 함께 춤이나 추며 친목이나 다지는 MT를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들이 지금 매우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G20 서울 정상회의의 결과가 나왔다. 그러나 회의를 통해 발표된 내용을 살펴보면 결정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세계 최고의 문화행사라도 유치한 양 온갖 미사여구로 치장하고 있지만 그 본질은 결국 미국의 빚잔치에서 조금이라도 덜 손해를 보고 싶은 세계 여러 나라들의 몸부림, 그것이 G20이다.


“회의는 춤춘다. 그러나 진전은 없다”
의 가장 확실한 사례, 그것이 바로 이번 G20 서울 정상회의였다. 우리 이명박 대통령이 G20 정상회의를 훗날 무어라 평할지는 몰라도 역사는 이렇게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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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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