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벨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 - 랄프 게오르크 로이트 | 김태희 옮김 | 교양인(2006)

 

예전에 나는 내 개인 홈페이지(http://windshoes.new21.org/person-goebbels.htm)에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인물 파울 요제프 괴벨스, 닥터 괴벨스에 대한 제법 긴 글을 쓴 적이 있었다. 물론 이 책 "괴벨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이 다루고 있듯 1,000여 쪽에 육박하는 분량은 아니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제2차 세계대전을 나는 하나의 뿌리를 가진 전쟁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이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이 전쟁이 1648년, 30년간 지속된 전쟁을 종결시킨 베스트팔렌조약(Peace of Westfalen)에 의거하여 생겨난 유럽의 근대민족국가체제의 종말이자 혹은 지속적인 파국의 시원(始源)이 된다는 것, 다른 하나는 대중사회의 도래 이후 대중과 정치, 대중과 권력, 그리고 이데올로기와 헤게모니의 문제를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준 사례가 되었기 때문이다.

 

앞서 괴벨스를 다루게 되고, 그에 대해 글까지 썼던 이유 역시 그와 같다. 로버트 O. 팩스턴의 "파시즘 - 열정과 광기의 정치 혁명"에 대한 서평을 쓰면서 "이제 정치가들은 좌우를 막론한 누구든 대중선거에 대처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한 바 있지만, 기존의 보수주의, 자유주의 정치인들이 대중을 경멸하고 멸시하는 동안,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시대의 대세라고 파악하고 있는 동안, 파시스트들은 대중이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깨우치고, 이들을 동원하는 프로파간다 능력을 이용해, 그들이 선전선동에 있어 모범으로 삼았던 좌파를 능가하는 역량(?)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독일 제3제국을 건설한 나치 세력 가운데 이 방면에 있어 가장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 이가 바로 파울 요제프 괴벨스였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디. 우리가 지난 독재정권 아래에서 했던 여러 정치적 경험들 역시 독일의 민중들이 겪었던 선동의 경험과 유사한 측면들이 있었다.

 

나치 독일과 제5공화국은 여러 면에서 비슷한 경로를 겪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5공화국이 전형적인 파시즘 국가였다는 말은 아니다. 비록 히틀러의 뮌헨 폭동이 실패로 끝났으나 이후 합법적 정권 장악의 초석이 되었고, 12.12 쿠데타는  성공했으나 박정희 식으로 곧바로 집권 태세에 돌입한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합법적인 모양새를 갖추는 절차는 거쳤다. 이후 나치가 독일 제국의회 건물 방화사건을 빌미로 독일 내 사회주의 세력에 대한 탄압을 개시한 것과 마찬가지로 5공 역시 5.17 확대계엄조치를 통해 5.18 광주 민중항쟁을 유도하고, 이 과정을 통해 공세적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후 악명을 떨친 '보도지침, 언론통폐합' 조처 등도 매우 유사한 형태로 진행되었다. 심지어는 라디오 대량 보급과 컬러 TV보급, 프로 축구, 야구, 나치의 분서와 5공의 금서, 국민차 "폴크스바겐""티코", 베를린 올림픽과 서울올림픽, 유대인 탄압과 지역감정 등 여러 방면에서 우리에게 독일 나치 정권의 정책은 낯선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에서 파시즘 혹은 대중 선동의 문제가 중요한 것은 유럽 전역에서 출몰하고 있는 네오 나치즘과 파시즘적 사례들에서도 알 수 있듯, 오랫동안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를 내면화하도록 강요받아온 우리 사회의 근저를 흐르는 기류가 그만큼 심상치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현재 우리 사회가 국가주의화 되어가고 있다거나 어떤 이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파시즘화가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내 개인적인 인식으로는 최근 유행하고 있는 탈국가주의, 탈민족주의 역시 앞서의 염려만큼이나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문제는 우리 사회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서양의 역사적 경험들을 단선적으로 우리에게 대입시켜 해법을 강구해볼 수 없을 만큼, 급속하고 변화무쌍하게 일어나고(어제까지는 산아제한을 관장하던 단체가 오늘은 출산을 독려하는 것처럼) 있으므로 모순 자체를 살피는 시각 자체도 복잡하고, 섬세해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괴벨스와 그의 아내 마그다 그리고 이들 부부의 자녀들인 헬가, 힐데가르르, 헬무트의 모습(1937)이다. 마그다는 괴벨스 못지 않은 히틀러 추종자로 자녀들 이름을 모두 히틀러의 'H'를 따서 지었고, 히틀러와 제3제국의 멸망이 눈앞에 닥치자 히틀러 없는 세상에서 살 필요가 없다며 자녀들 모두에게 청산가리를 먹인 뒤 괴벨스와 함께 자살한다.

그런 까닭에 이 책의 제목 역시 원제인 "괴벨스"를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괴벨스, 대중선동의 심리학"으로 이름 붙였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 책을 읽어내는데는 그다지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분량에 미리부터 진력을 내지만 않는다면 퇴근 후 두어 시간씩 넉넉잡고, 사오일이면 한 차례 정도는 무리없이 읽어낼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을 읽는데 무려 2주 가량이 걸렸다.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일단 가장 큰 문제는 책이 다루고 있는 내용이나 주제에 대한 나의 넘치는 흥미와 지적 욕구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저자인 "랄프 게오르크 로이트"의 글이 매끄러운 문장과 번역에 비해 재미가 없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책이 나오고 한 달쯤 뒤였던가? 우연히 퇴근하는 길에 이 책의 옮긴이인 김태희 선생이 CBS(?)던가 모 라디오 방송에 나와서 이야기하는 걸 들었다. 말씀도 논리정연하게 잘 하고, 번역 솜씨 역시(독일어는 모르지만 우리말은) 빼어난 편이라 생각이 들었다. 대개 책이 재미있으려면 소박하게는 우선 주제가 관심있는 분야여야 하고, 문장이 좋아야 한다. 물론 장정이나 기타 등등이 좋으면 더욱 금상첨화일 것이다.

 

이 책은 그 삼박자를 두루 갖추고 있어 높은 점수를 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나는 이 책에서 크게 두 가지 문제를 발견했다. 다만 미리 밝혀두고 싶은 것은 그것은 오로지 저자의 문제이지 옮긴이나 출판사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이 책을 읽노라면 어렵지 않게 다른 평전 작가들, 예를 들면 슈테판 츠바이크 같은 이를 연상할 수도 있고, 파시즘과 관련해서는 로버트 O. 팩스턴, 빌헬름 라이히 등을 떠올릴 수 있는데, 사실 우리가 쉽게 입에 올리긴 하지만 슈테판 츠바이크, 아이작 도이처, 이사야 벌린, 요아힘 C. 페스트가 저술한 평전들을 한 번이라도 읽어봤다면, 랄프 게오르크 로이트를 이들에게 비유하는 것은 크나큰 결례란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이들과 로이트의 가장 큰 차이는 "통찰"에서 비롯된다. 사실 한 인물이 시대와 역사에 남긴 발자취를 추적해 그에 대한 평전을 쓴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며, 앞서 말한 이들이 이뤄냈던 작업들 역시 비판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들의 평전이 시대를 초월해 여전히 사랑받는 이유는 그들 자신이 한 명의 뛰어난 작가이자 역사가로서의 안목과 통찰을 통해 인물을 심도있게 파고 들어가는 성과를 남겼기 때문이다.

 

한 인간에 대해 자료를 수집하는 일은 매우 지루하고, 험난한 과정이기 때문에 평전 작가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우선 성실성일 것이다. 그 점에서 로이트는 일단 합격점이다. 괴벨스 자신이 다른 이들과 달리 생전에 일기를 남겼고, 이 일기는 나치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인정받고 있다. 이처럼 괴벨스에 대해서는 제법 풍성한 자료들이 있으나, 문제는 로이트가 새롭게 입수한 자료들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나는 그 부분에서 로이트가 지나치게 자료적인 충실함, 작가이기보다는 역사가적인 입장을 관철했다는 아쉬움이 있다. 자료가 모든 것을 말해주진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전체적인 서술에 있어 임팩트한 순간이 모자라고, 그의 새로운 해석을 기대한 독자의 입장에서 괴벨스에 대한, 그가 살아온 행적, 그가 역사 속에 남겼던 여러 궤적들을 입체적으로 그려보는 것이 쉽지 않다. 앞서도 이야기한 바 있지만 괴벨스는 이전의 자유주의, 보수주의 정치인들과 달리 대중을 상대로 정치 선동을 행했던 인물이다. 그런 그의 행적을 고려했을 때 괴벨스 평전에서 대중과 괴벨스의 상관 관계, 실제 대중의 반응 등 의미있고 생생한 일화들도 충분히 삽입되었을 법한데(전체 페이지 분량를 보자면 더욱더) 그런 내용은 거의 다뤄지지 않고 있다.

 

물론, 앞서의 문제에 대해 로이트는 괴벨스 평전을 아래의 관점(소위 '野史'라고도 하는)보다는 정사의 차원에서 접근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충분히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시대를 관통하는 통찰이 부족하다는 나의 느낌은 남는다. 분량은 넘치지만 괴벨스의 그런 행적들이 당시 독일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것이 다시 인류에게는 어떤 의미를 갖는지 로이트는 잘 드러내질 못하고 있다. 다소 역부족이란 인상이 든다는 것이고, 그것이 책을 읽는 내내 날 괴롭혔다. 다소 우스운 이야기이긴 하지만 책 속의 사진에 달린 설명(캡션)이 작가의 본 문장보다 도리어 의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끝으로 정리하자면, "괴벨스, 대중선동의 심리학"에서 나는 "괴벨스"는 필요충분으로 읽을 수 있었지만, "대중선동의 심리학" 영역에 대해서는 다소간 아쉬움을 느꼈고, 그 원인을 작가가 자료들을 적절하게 요리해내는 능력, 통찰력 부족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사악하였으므로 그 유능함이 더욱 돋보이는 괴벨스에 대한 책이 우리 말로 이렇듯 훌륭하게 번역되어 나왔다는 사실이 흐뭇하고, 다른 이들에게도 이 책을 권하고 싶다는 마음엔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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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전쟁 대행 주식회사(Corporate Warriors: The Rise of the Privatized Military)
- 피터 W. 싱어 | 유강은 옮김 | 지식의풍경(2005)


용병(傭兵, mercenary)이란 말은 남성들에게, 의무병 제도 아래 누구나 어떤 형태로든 군대 경험을 하기 마련인 대한민국에서는 특히나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단어임에 틀림없다. 어느새 10년 정도의 세월이 흘렀지만 IMF경제 위기가 대한민국을 덮쳤을 때, 꽤 여러 매체에서 다룬 기사 중 하나는 프랑스 외인부대에서 근무하는 어떤 한국인에 대한 이야기였다. 경제위기로 실직한 많은 한국 남성들에게 유행했던 말 가운데 하나는 군에 말뚝 박는 것이 차라리 낫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직업군인이 되란 것이었고, 이미 군 경험을 완료한 이들에게 그 대안 중 하나쯤으로 제시된 것이 프랑스의 외인부대였다. 한국인이 외인부대에 복무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0여 명이었고, 1995년까지 5명 정도가 근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프랑스 외인부대는 그 역사가 루이 11세까지 거슬러 오를 만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고, 무엇보다 국적이나, 인종, 전과를 가리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무엇보다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것 중 하나는 복무 후 주어지는 프랑스 국적과 더불어 여러 매체들을 통해 외인부대가 낭만적으로 묘사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때 초절정 미남 배우의 대명사였던 알랑 드롱도 17세 때 외인부대에 입대했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이와 같은 경험이 훗날 영화 <라스페기(Lost Command, 1966)>에서 잘 묘사되기도 한다. 이외에도 외인부대를 비롯한 용병들을 다룬 영화들, 문학 작품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다양한 편이다. 어쨌거나 그리스 시대 이래 서구의 전쟁사에서 용병은 거의 대부분의 시대를 주역으로 활동해 왔다.

 

▶ 더 와일드기스(The Wild Geese, 1978) - 국내에선 <지옥의 특전대>란 이름으로 개봉되었는데 1960년대 중후반 용병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영화였다(실제로도 당시 런던엔 용병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어떤 인연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중학생 무렵 극장에서 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리처드 버튼, 리처드 해리스, 로저 무어 등 나름 쟁쟁한 영국계 배우들이 출연한 영화로 포스터 이미지에 묘사되어 있는 붉은 베레모의 모표를 보아도 알 수 있듯 퇴역군인들로 이루어진 이들 용병들은 아프리카에 이해관계가 달린 한 기업가에 고용되어 반군 치하에 있는 아프리카의 정치 지도자 한 명을 탈출시키는 작전에 동원된다. 그러나 작전 중 반군 지도자와 정치적 협상을 성공시킨 기업가들이 이들 용병(Wild Geese)과 정치인의 귀환을 방해하여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극중에서 자신들이 구출한 흑인지도자를 매우 혐오하는 남아공출신의 백인 용병에게 흑인지도자(넬슨 만델라를 연상시키는)의 말이 인상적이다. "이제는 흑인도 백인도 없소. 우리는 모두 자유라는 이름아래 새로운 노예생활을 시작했을 뿐이오. 처음에는 아프리카의 백인이 그다음은 흑인과 흑인이, 그리고 지금은 서구가 아프리카를 훔치고 있소." 나중에 흑인지도자를 혐오했던 남아공용병은 그를 지키려다 숨진다.


민간군사기업에 의한 현대 전쟁의 민영화 경향에 대한 충격적인 증언들을 담고 있는 『전쟁 대행 주식회사』가 쓰게 된 계기는 이 책의 저자 피터 W. 싱어가 보스니아의 전후 상황을 연구하는 UN의 프로젝트에 참가하면서부터였다. 그는 이 프로젝트에 참가하기 전까지 용병, 민간군사기업의 실체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다고 말한다. 싱어는 『전쟁 대행 주식회사』에서 최근 냉전 해체 이후 벌어진 수많은 분쟁, 전쟁의 사례 곳곳에서 민간군사기업의 실례를 보여준다.


◀ 인구 500만명인 서부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 시에라리온은 10년에 걸친 내전으로 만신창이가 됐다. 내전은 1991년 포데이 산코를 지도자로 한 혁명연합전선(RUF)이 조지프 사이두 모모(J.S. Momoh) 정권에 반기를 들면서 비롯되었다. 모모 대통령과 측근들이 부패해 있었고 4만명에 이르는 레바논 정착민과 소수의 세네갈인들이 다이아몬드 광산 채굴권과 무역, 상업 등 시에라리온 경제의 70∼80%를 쥐고 있다는 점 등이 산코가 일으킨 반란의 명분이었지만, 내전은 시간이 지날수록 다이아몬드 광산을 차지하려는 싸움으로 변질되었다.


지하자원이 곧 전쟁자금의 주요 공급원이었기 때문이었다. RUF의 포데이 산코는 시에라리온 동부의
다이아몬드 광산들을 장악, 이를 자금원으로 무기를 사들여 세력을 넓혀갔다. RUF 반란군은 어린 아기의 두 팔마저 도끼로 내리찍어 잘라냈다. 내전 초기부터 RUF 반군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마을을 불지르고 비전투원인 양민들을 공격해 죽이거나 도끼로 손목, 발목을 자르는 잔혹 행위를 저질렀다.


아프리카에서 사람의 손목을 도끼로 내리치는 끔찍한 행위는 미국의 서부영화들이 묘사하는 인디언들의 머리가죽 벗기기가 사실은 백인들에 의해 먼저 시작되었던 것처럼 손목절단 역시 식민지배국이었던 벨기에가 원조다. 그들은 식민지 콩고의 풍부한 자원을 수탈하면서 현지인들의 저항을 억누르려고 손목을 자르는 만행을 저질러왔는데, 포데이 산코의 손목절단은 “손이 없다면 투표도 못할 것이다(No hands, no more votes)”란 논리로 자행되었다. 1997년 시에라리온 대통령선거에서 티잔 카바의 시에라리온 인민당(SLPP)에게 지지표를 던진 손들을 자른다는 괴상한 논리였지만 실제로는 많은 피해자들이 투표와 무관한 어린이들이었다.


국제적인 다이아몬드 광산의 산지로 유명한 시에라리온은 오랫동안 무정부상태로 방치되어 왔다. 반군들은 대로변에 매복하거나 야간에 촌락을 습격하여 삼림 벌채용 칼로 마을 주민들의 수족을 절단하는 등 무자비한 살상을 일삼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사회는 이 사태를 방관했다. 1995년 반군은 시에라리온의 수도 프리타운 인근 20km 지점까지 육박해왔고, 정부의 주요 수입원이었던 다이아몬드 광산마저 반군의 수중으로 떨어졌다. 그때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알 수 없는 현대적인 기동타격부대가 출동해 수도 인근까지 진출한 반군 세력을 축출하고, 다이아몬드 광산 지역을 되찾았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얼마 뒤엔 밀림 깊숙이 숨겨진 반군 본부를 습격해 완전히 파괴해 버렸다. 한때 수도를 점령하려 들만큼 강력한 위세를 떨쳤던 시에라리온의 반군은 궤멸되었고, 시에라리온은 23년 만에 처음으로 자유선거를 치를 수 있었다.

 

그들은 누구였을까? 그들은 UN군도, 미국이 자랑하는 델타포스나, 그린베레가 아니었으며 "No Action Talking Only"라는 비아냥의 대상이었던 NATO군도 아니었다. 그들은 남아공에 본부를 둔 이그제큐티브 아웃컴즈(EO, Executive Outcomes)라는 민간군사기업의 직원들이었다. 악명 높은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이 폐기된 뒤 남아공은 더 이상 다수의 흑인을 억누르기 위한 군대의 효용가치가 떨어졌다. 정부는 군대를 축소하기 시작했고, 그동안 무수한 실전 경험으로 단련된 남아공 정부의 특수부대 병사들은 실업자가 되었다. 앞서 우리의 경제위기 이후 외인부대 열풍이 불었던 것처럼 소련 연방의 해체 이후 경제위기로 인해 해체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등지의 군인들 역시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야 했다. EO를 비롯한 이들, 수많은 민간군사기업들은 국가가 큰 비용을 들여 만든 전문가 집단을 값싸게 고용할 수 있었고, 그들은 주로 아프리카와 아시아 등 냉전 해체 이후 불안정해진 지역을 중심으로 그들의 실무경험(전투경험과 능력)을 팔았다.



 ▶ 시에라리온 내전에 참가한 EO(Executive Outcomes) 대원들의 모습니다. 악명높은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이 폐지되면서 실직한 남아공의 직업군인들은 물론 냉전 해체 이후 새로운 전장을 찾아나선 구 동구권 병사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이들의 군사력은 아프리카 지역의 웬만한 정규군들을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민간군사기업(PMC)의 대명사가 반드시 우리가 흔히 연상할 수 있는 전투 용병 집단일 것이라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직접 전투에 임하는 전투 용역은 이들 민간군사기업이 행하는 여러 용역 사업들 중 극히 일부일 뿐이다. 실제 군대의 구성이 그러하듯 오히려 직접 전투에 임하지 않지만 과거라면 군대가 직접 했을 분야의 민영화된 부분이 이들의 주된 사업 영역이기 때문이다. 가깝게는 과거 미국의 군사고문단이 행했을 군대의 훈련 및 조직이나 병참, 전략 개발 등의 영역이 현대화된 민간군사기업의 주된 사업 영역이다.

 

유럽의 30년 전쟁은 더 이상 '제국'이라는 이름으로는 민족의식이 각성된 집단을 통치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30년 전쟁의 결과물이었던 1648년의 베스트팔렌 평화협정은 ‘주권’이란 개념을 통해 민족국가, 특정 영토와 인구에 대한 배타적인 지배권(사회를 보호하는 무력, 즉 군대의 독점)을 인정하게 된다.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는 시민에 의한 의무병 제도의 군대는 근대국가의 역사보다도 더 뒤에 나타난 현상이다. 근대 이전까지 전쟁은 보통 시민이 참가하는 영역이 아니었다. 단적으로 서구의 고대 전쟁은 특수한 일부 사례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 전통적인 전사계급에 의해 행해졌고, 중세에 이르러서도 봉건 기사에 의한 단기 결전이 대부분이었다. 지배계급은 일반시민에게 무기를 쥐어주는 것을 매우 위험한 일로 생각했다. 이들은 시민에게 전쟁에 참여할 기회를 주는 것이 지배계급에 의해 독점되는 배타적 권리를 요구할 위험을 증진시키는 것으로 생각했다. 전쟁이 일반 시민의 몫이 된 것은 프랑스대혁명의 결과였다.



▶ 로마 바티칸의 교황청을 지키는 스위스 용병들의 모습. 이들의 복장을 디자인한 것은 미켈란젤로라고 하는데 중세시대의 용병들의 복장과 무장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현재는 의전적인 의미가 강하지만 과거 역사에서 이들은 실제로 매우 뛰어나 전투집단이었다. 1527년 5월 6일. 독일 황제의 군대가 로마교황을 공격했을 때 로마 베드로 광장의 진입로를 봉쇄하면서 147명의 교황호위병이 전사하는 가운데 나머지 42명의 호위병이 교황(Clement VII)을 피난시켰던 일로 인해 바티칸은 스위스 용병들의 용맹성과 충성을 인정하고 그 뒤로 스위스 용병(물론 가톨릭 신자)들만으로 바티칸과 교황을 지키도록 하고 있다.
 

프랑스 혁명군은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용병부대를 격파했고, 연이은 참패를 통해 이들 국가들 역시 대중에게 일정한 권리를 양보하는 대신 용병에 의한 군사체제를 포기했다. 프로이센은 군대를 시민군 체제로 개조했고, 아이러니하게도 프랑스 대혁명의 영향을 받은 프로이센의 시민사회는 이제 황제의 신민이 아니라 스스로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존엄을 위해 기꺼이 전장에 나아갔다. 이후 전쟁 혹은 군대는 더 이상 사적인 영역에서 돈벌이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시민으로서의 권리이자 국가의 존엄한 사명이 되었다. 전쟁의 참혹한 근대성은 민주주의와 함께 왔고,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의 총력전 체제를 거치며 전투에 참가한 병사보다 더 많은 민간인 희생자를 만드는 결과를 빚게 되었다. 국가의 이와 같은 근대적 전쟁 수행에 대한 탈-근대적 반성은 베트남전의 반전운동이었을 것이다. 각성한 시민의 저항에 부딪힌 미국은 더 이상 근대적 의미에서의 전쟁을 수행할 수 없었고, 결국 전쟁에서 패한다.

 

비록, 피터 W. 싱어가 이 책 『전쟁 대행 주식회사』에서 명확하게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현대(군대)전이 탈근대화(민영화) 현상을 빚는 까닭을 나는 크게 세 가지 정도로 보고 있다(특히, 미국을 중심으로).
 

현재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은 민간군사기업(PMC)의 주요 활동 무대가 되고 있다. 이라크 현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PMC 요원들, 여성 대원의 모습이 이채롭다.


첫 번째. 근대화된 전쟁(총력전)의 무자비한 살상을 경험한 시민들이 더 이상 애국심과 시민의 권리에 호소하는 전쟁에 참여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국가가 배타적으로 독점한 폭력이 시민의 감시를 벗어나 지배계급의 이해관계에 따라 행사되고, 그 희생이 피지배계급인 시민들에게만 전가되는 것을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어떤 국가도 시민의 반대 여론을 의식하지 않은 채 전쟁(혹은 파병)을 수행할 수 없다.

 

두 번째.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것은 더 이상 대규모 병력이 아니라 군사무기를 둘러싼 첨단기술이다. 이라크전의 양상이 잘 보여주듯 이제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것은 대규모 징집에 의한 병력의 수나 전차, 장갑차 등 재래식 무기에 의한 결전이기 보다는 크루즈 미사일과 같은 첨단병기에 의한 것이다.(물론 군사적 승패가 정치적 승리를 보장하지는 않지만) 첨단기술은 좀 더 소수의 정예화된 군사력만으로도 이전보다 훨씬 높은 살상력을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말해 탈근대화된 전쟁을 수행하는 인적 자원들은 중세시대의 전쟁을 수행했던 기사계급처럼 소수의 전문화된 집단이다. 따라서 국가는 시민의 참여 없이도(실제로 현대전의 양상 대부분은 시민의 참여 없이도 전쟁을 수행할 수 있으며, 징집이 필요할 만큼의 인명손실이 없다는 이유로 배제시킨 채 - 제국주의 시대 영국 본토의 신민들에게 식민지 확장을 위해 벌어졌던 군소 분쟁의 대부분은 전투가 이미 종결된 시점에서 알려지곤 했다. 왜냐하면 워낙 짧은 시간에 벌어졌고, 본국의 승인을 얻기 이전에 이미 전투상황이 종결되곤 했으므로) 얼마든지 전쟁을 수행할 수 있다.

 

마지막 세 번째 요소는 베스트팔렌 조약에 의해 성립된 근대국가 모델의 해체 혹은 ‘국가의 국제화’ 경향이다. 베스트팔렌 조약에 의해 형성된 근대국가의 개념은 국가 보다 더 높은 상위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국가는 자기 이외의 다른 어떤 권위에도 종속되지 않았으나 이제 국가는 자본주의의 세계적 협(분)업 체계의 하위 요소 중 하나로 전락해 가고 있다. 다시 말해 한미간 FTA체결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남한 내에서 배타적 권리로 인정받아 오던 행정 서비스는 미국의 일개 기업에 의해 국제사법기관에 피소당할 수도 있다. 또한 코소보, 이라크 등의 불량국가(rogue state)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인권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국가의 주권은 초국적 제국(현실적으로는 현재의 미국)에 의해 부인당할 수 있다. 좀 더 쉽게 말해서 현대의 국가는 근대 이전의 봉건 영주들이 처했던 운명을 되풀이할 수도 있다. 근대를 형성한 주요한 힘 가운데 하나는 분명히 봉건제라는 낡은 영역의 울타리를 뛰어넘고자 했던 근대화된 자본의 역학 관계(dynamics)에 의한 것이었다.




▶ 아덴만 인근에서 작전 중인 프랑스군에게 나포된 소말리아 해적들. 국가가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을 때, 국가가 독점적으로 수행하도록 되어 있
는 무력은 때때로 생존을 위협받는 민간인들에게 넘어가기도 한다. 이것이 나타나는 현상소말리아 해적이나 용병기업의 출현처럼 각기 다르지만 본질적으론 국가가 제대로 된 역할과 기능을 수행할 수 없을 때 출현한다는 점에선 동일하다. 민간군사기업(PMC)들은 소말리아와 같이 국가기능이 정지된 상황에서 내전을 수행하고, 권력을 지속시키려 하는 군벌들(당연히 해적들)에게 고급군사기술은 물론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물론 소말리아에 시에라리온처럼 다이아몬드 광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콩고처럼 휴대폰에 필수부품이 되는 콜탄 같은 희귀광석의 산지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 대신 소말리아엔 이른바 '위대한 항로'라 불리는 석유문명의 젖줄인 수에즈 운하와 걸프만 항로가 있다. 소말리아 해적(군벌)들은 말라카 해협의 해적들보다 여러 면에서 뒤처져있지만 이 항로를 오가는 유조선, 화물선, 어선과 인질들을 통해 재원을 확보하면서 점차 첨단화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물론 그 배후엔 이들에게 기술을 제공하고 있는 PMC가 있으며 그들이 벌어들이는 돈은 인질협상극의 대가이다. 이들 PMC들은 인질극을 벌이는 해적들과 인질로 사로잡힌 국가, 기업들 사이에 협상을 대행해주기도 한다.  


이와 같은 현상이 우리를 빗겨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을 위해 약간의 설명을 더하자면 오랫동안 아무런 의심 없이 공공영역에 속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시민의 생명과 재산의 안전을 책임지는 ‘치안’이 우리나라에서 어떻게 민영화되고 있는지 생각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대한민국 국립경찰은 ‘국민과 5분 거리’에 있지만, 민간 보안 회사들은 부유한 시민들의 안전을 보호하는 첨단 치안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언제나 함께 있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안전은 더 이상 공공영역의 차원에서 무료로 제공되는 것이 아니다. 소득수준이 낮은 시민들이 위험한 밤거리에 무방비로 방치되는 동안, 부유한 계급은 높다란 담장과 민간 보안 서비스 회사가 제공하는 최첨단 이동 감시 카메라를 통해 자기 집 안마당은 물론 골목의 보행자까지 감시한다. 피터 W. 싱어가 경고하는 것은 공공영역의 사영화가 초래할 무서운 재앙의 서막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국가의 시민병들은 종종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복무하는데 반해서 민간군사기업은 이윤을 위해 전쟁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 민간군사기업(PMC)와 아프리카의 비극에 대해선 앞으로 차차 보강해갈 기회가 있으리라. 현재진행형의 슬픔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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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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