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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4.18 김선우 - 낙화, 첫사랑 (1)
  2. 2010.10.26 김수영 - 말

낙화, 첫사랑

- 김선우



1
그대가 아찔한 절벽 끝에서
바람의 얼굴로 서성인다면 그대를 부르지 않겠습니다
옷깃 부둥키며 수선스럽지 않겠습니다
그대에게 무슨 연유가 있겠거니
내 사랑의 몫으로
그대의 뒷모습을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보겠습니다
손 내밀지 않고 그대를 다 가지겠습니다


2
아주 조금만 먼저 바닥에 닿겠습니다
가장 낮게 엎드린 처마를 끌고
추락하는 그대의 속도를 앞지르겠습니다
내 생을 사랑하지 않고는
다른 생을 사랑할 수 없음을 늦게 알았습니다
그대보다 먼저 바닥에 닿아
강보에 아기를 받듯 온몸으로 나를 받겠습니다


<출처 : 김선우,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문학과지성사, 2007>


*


T.S. 엘리어트는 "시의 정의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라고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에 대한 정의는 끊임없이 이루어져 왔다. 시에 대한 정의가 오류일 수밖에 없는 것은 문학에 있어 '시(詩)'라는 장르만큼 모호함의 명징성에 기대고 있는 장르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모호함의 명징성'이란 형용모순이다. 동양에서 '포엠(Poem)' 즉, 시(詩)는 '말씀언(言)' 더하기 '절사(侍)'인데 이것은 동양에서의 시가 불교의 정신, 불교의 법어(法語)가 표현되는 방식과 닮아있기 때문이다.

부처의 법은 가섭존자에서 아난존자로 이어지고 그것이 28대 달마가 동쪽으로 와 혜가에게 이어졌다. 불교에서는 달마를 1조로, 혜가를 2조, 승찬을 3조, 도신, 홍인, 혜능을 6조라 하여 불조(佛祖)의 법맥으로 삼았다. 이 중에서 3조 승찬 대사가 불자들의 불교에 대한 이해와 교육을 위해 지은 것이 「신심명(信心銘)」이다. 「신심명」이란 '믿을 신(信), 마음 심(心), 새길 명(銘)'이란 뜻 그대로 '믿음을 마음속에 새기는 글'이란 뜻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큰 깨달음은 바로 마음을 믿는데 있다는 말인데, 이를 일깨우고, 마음에 새기도록 하기 위해 불교의 깨달음을 '사언(四言) 이구(二句)' '584자(字)', 73개의 게송으로 구성하고 있다.

그 가운데 마지막 73번째 게송이 바로 "言語道斷 非去來今(언어도단 비거래금)"이다. 본래의 뜻은 사라지고 '말도 안되는 소리'란 의미로 변질되었지만 이 말은 불교에서 깨달음이란 언어(言語)로 표현될 수 없는 "不立文字(불립문자)"의 경지에 있음을 뜻하는 말이다. 진리란 말이나 문자에 의해 전해지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이 말 자체도 다양하게 해석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언어의 한계를 스스로 증명해 보인다. 「신심명」 중 어느 한 구절도 어려운 한자를 사용하고 있지 않지만 그 해석 역시 만 가지 갈래가 있다.

도리(道理)를 밝히려는 불교의 게송이지만 그 해석이 여러 가지일 수밖에 없는 것은 어쩌면 그만큼 진리에 이르는 길이 다양하다는 뜻일 수도 있으리라. 마찬가지로 시(詩)의 본질에 이르는 길 역시 수많은 사람들이 질문하고 답하여 왔지만, 이것이라고 단언할 수 없는 것은 그 모든 정의가 시의 정의이며 이것은 오류의 역사인 동시에 그 나름 진리의 역사로 볼 수도 있다는 뜻이다. 르네 웰렉(Rene Welek)과 오스틴 워렌(Austain Warren)은 '시란 무엇인가'는 해명할 수 없는 문제이므로 이를 대신해 시를 구성하는 중요한 원리로 '운율과 은유'에 주목했다. 그러나 운율과 은유라는 형식에만 주목한다면 시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를 놓치게 될 위험이 있다.

우리는 통칭하여 '시(詩)'라고 말하지만 서구에서 '시(詩)'라는 용어는 '포엠(poem)과 '포에지(poesy)로 구분된다. 불어는 시인이 만들어낸 구체적인 시 작품을 가리키고, 포에지는 포엠이라는 구체적인 작품으로서 완성될 때까지의 '시 정신'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포엠과 포에지'는 시를 구성하는 '외연(형식)과 내면(정신)'으로 어느 한 가지도 놓칠 수 없는 요소이다. 언어로서의 형식과 시인의 정신이 페스츄리처럼 겹겹이 중첩되어 완성되는 시는 언어로 직조된 수수께끼이다. 시에서의 '제목(title)'이 갖는 의미는 언어의 미로로 들어가는 입구이자 미로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는 출구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김선우의 시 "낙화, 첫사랑"은 꽃잎이 지는 광경에 대한 묘사이지만 동시에 '첫사랑'의 심상을 은유하고 있다. 제목을 떼어놓고 보면 그저 흔한 연애시의 한 구절에 불과해 보이던 이 시가 제목 "낙화, 첫사랑"이란 키워드와 함께 놓이면서 의미망이 확장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면 나는 이 시를 잘 읽었다고 생각한다. 동양에서 '게송(偈頌)'과 '시(詩)'는 한 뿌리에서 나온 형제이자 자매이지만 게송이 진리를 드러내고 전달하려는 목적을 가진 반면에 시는 겹겹이 쌓인 언어의 틈새 속으로 숨기고자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어떤 이는 시, 역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예술의 본질 중 하나가 '유희'라는 사실을 잊은 까닭이다. 시인이 언어의 유희를 통해 비밀스럽게 숨겨놓은 것을 찾아내는 것, 그것이 시를 읽는 즐거움이다. 세속의 독자들에게 '깨달음'이란 '즐거움', 그 뒤의 이야기이다. 즐겁게 읽고 난 뒤 당신을 깨워주는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시를 읽는 여분의 무언가를 얻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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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2010.10.26 09:23


- 김수영

나무뿌리가 좀더 깊이 겨울을 향해 가라앉았다
이제 내 몸은 내 몸이 아니다
이 가슴의 동계(動悸)도 기침도 한기도 내것이 아니다
이 집도 아내도 아들도 어머니도 다시 내것이 아니다
오늘도 여전히 일을 하고 걱정하고
돈을 벌고 싸우고 오늘부터의 할일을 하지만
내 생명은 이미 맡기어진 생명
나의 질서는 죽음의 질서
온 세상이 죽음의 가치로 변해버렸다

익살스러울만치 모든 거리가 단축되고
익살스러울만치 모든 질문이 없어지고
모든 사람에게 고해야 할 너무나 많은 말을 갖고 있지만
세상은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이 무언의 말
이때문에 아내를 다루기 어려워지고
자식을 다루기 어려워지고 친구를
다루기 어려워지고
이 너무나 큰 어려움에 나는 입을 봉하고 있는 셈이고
무서운 무성의를 자행하고 있다

이 무언의 말
하늘의 빛이요 물의 빛이요 우연의 빛이요 우연의 말
죽음을 꿰뚫는 가장 무력한 말
죽음을 위한 말 죽음에 섬기는 말
고지식한 것을 제일 싫어하는 말
이 만능의 말
겨울의 말이자 봄의 말
이제 내 말은 내 말이 아니다


*

어떤 시는 해석 이전에 먼저 말을 걸어온다. 마음으로 쓰인 시라 그럴 수도 있고, 비슷한 심리적 정황 속에 스스로 놓여 본 경험이 또한 그런 경험을 가능케 한다. 시인이란 무엇인가? 말로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때로 시인은 지장보살의 현연이다. 이렇게 말하는 까닭은 지장보살의 기능이 시인의 기능과 일정하게 맞아 떨어지는 탓이 크다. 지장보살은 불덕으로 보자면 부처가 되고도 남는 이다. 그렇지만 지장보살은 염라지옥의 가장 하층의 저주받은 중생들이 모두 구원받을 때까지 스스로 부처가 되지 않겠다는 마음의 염을 세운 이가 아닌가. 물론 시인들이 모두 불립문자의 경지에 도달하였으나 스스로 그리하지 않은 존재들인지는 묻지 말자. 비유일 뿐이니까.

같은 말을 풀어내는 이들이지만 산문을 주요한 표현 방식으로 사용하는 작가와 시인의 가장 큰 차이는 언어가 표현할 수 있는  한계에 가장 가까이 접근하고 있는 이가 바로 시인이라는 데 있다(유치하게 우월성을 논하는 것이 아니다). 시인은 말하지 않음으로 해서 가장 많은 말을 한다. 시는 말로 표현되고 있는 부분들에 의해 세상의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몇 마디 말로 인해 드러내진 부분 이외에 말이 가리고 있는 부분을 통해 세상의 진실을 드러낸다. 우리가 사물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 혹은 보다 멀리 보기 위해 나도 모르게 눈가에 양손을 모아 시야를 좁혀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인은 언어의 양손을 들어 우리의 눈을 보다 자세히, 깊이 들여다 볼 수 있도록 한다. 깊이, 자세히를 통해 넓이를 확보해내는 것이다.

그런 시인이 말에 대해 말하고 있다.
"나무뿌리가 좀더 깊이 겨울을 향해 가라앉았다"라고 말한다. 그것도 겨울에 말이다. 모든 생명이 죽은 듯 엎드려 있는 얼어붙은 땅을 향해 뿌리가 깊이 가라앉았다. "이 가슴의 동계(動悸)", 동계라는 것은 숨이 차오는 것을 말한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손발이 떨리고,숨이 차오는 현상이다. 그런데 시인은 이 모든 생리적, 본능적 현상들 - 기침, 한기 - 도 내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나에게 속해있는 혹은 뗄 수 없는 관계들조차 내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여전히 살아가지만  이 모든 것이 나의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나의 질서가 죽음의 질서에 종속되어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두번째 연에서 시인의 그런 마음은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된다.

익살스러울만치 모든 거리가 단축되고
익살스러울만치 모든 질문이 없어지고
모든 사람에게 고해야 할 너무나 많은 말을 갖고 있지만
세상은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거리가 단축된다는 것은 심리적인 거리를 말할 수도 있고, 원근감의 상실을 말할 수도 있고, 세상의 사물들이 실제로 존재해야 하는 공간을 이탈한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질문이 없어진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의문이 사라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의문이 사라지는 순간은 해탈하지 않는 한 불가능한 것이다. 게다가 의문과 질문은 다른 것이다. 의문은 품을 수 있겠으나 그것을 입밖에 내어 질문으로 전환시킬 수 없는 순간. 그것은 폭력의 순간이거나 강압의 순간이다. 묻고자 하나 물을 수 없다. 게다가 시인은 고립되어 있다. 세상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말은 곧 깨달음이지만 세상은 나의 깨달음에 귀기울이지 않는다.

셋째 연에 가면 그 결과물이 나온다. 그런 침묵의 결과, 마음 속 동계의 결과들은 그러나 추상적이지 않다. 시인은 세상의 불의나 억압에 대해 진실을 고하고 싶지만,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다. 게다가 그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은 매우 구체적이라 그는 조무래기처럼 느껴진다. 스스로의 삶은 허접하다. 말하지 못하는 말 때문에 "아내를 다루기 어려워지고" 자식도, 친구도 점점 그를 업수이 여긴다. 그럼에도 그는 말하지 못한다. 공연한 타박이 두려울 수도 있을 것이고, 너 혼자 그래봐야 세상이 변하니 하는 그런 일리있는 포기의 답변을 들을까 두렵다. 그래서 그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다.

4연의 역설은 놀랍도록 마음 아프게 다가온다.

하늘의 빛, 물의 빛, 우연의 빛인 말은 고로 우연히 나에게 스며든 말일 수도 있다. 천지 사물 속에 깃든 빛의 말은 감히 나같이 하찮은 존재에게 스밀 수 없는 말이므로 감히 나의 말이라 할 수 없다. 그것은 우연에 가까운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말들은 - 가장 무력한 말, 죽음을 위한 말, 죽음에 섬기는 말 - 이다. 말은 나의 말이되, 나의 말이 아니다. 시인은 고립됐다. 그의 말은 신의 말을 모사하는 방언이 되었고, 방언은 지껄인다 한들 그것을 해석해줄 이 없으니 말이 아니다.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니 무어라 지껄여도 상관없는 만능의 말이다. 그의 말을 겨울의 말로 만들던지, 봄의 말로 만들던지 하는 것은 이제 우리의 몫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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