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범죄자도 감옥에 보낼 수 있는 증빙자료, 회계장부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이 1987년에 감독한 영화 <언터쳐블(The Untouchables)>는 미국 역사상 가장 부패했던 시대였던 금주법 시대를 배경으로 경찰도, 검찰도 감히 손대지 못하던 갱단 두목 알 카포네(Al Capone)가 엘리오트 네스(Eliot Ness)라는 한 풋내기 열혈수사관에 의해 세금 포탈 혐의로 수감시키기까지의 과정을 다룬다. 알 카포네는 1920년대 당시 시카고의 라이벌 갱단 두목이었던 조지 벅스 모렌을 암살하기 위해 경찰관 복장을 한 부하들을 시켜 상대편 조직원 7명을 기관단총으로 살해할 만큼 잔인무도하기로 악명 높은 인물이었다. 경찰과 언론은 물론 시카고의 삼척동자도 이 범죄가 알 카포네의 짓이란 것을 알고 있었지만 무능한 경찰은 범죄의 증거를 찾아내지 못해 도리어 알 카포네의 명성만 높여주게 된다.


시카고 시민들은 알 카포네의 갱단의 횡포는 물론 암흑가 조직과 결탁해 있는 시카고 경찰과 시 당국에 대해 실망하고 있었지만 감히 분노를 드러내지 못한다. 이럴 때 나타난 인물이 시카고 대학을 졸업하고 불과 26세의 나이에 미국 법무성(U.S. Department of Justice)의 금주국(Prohibition bureau) 특별수사관으로 임용된 엘리오트 네스였다. 그는 범죄 집단과 깊이 결탁된 경찰을 배제하기 위해 20대의 열혈 청년들로 수사진을 편성했는데 언론은 이들을 ‘언터처블(Untouchables)’이라 불렀다. 그의 업적은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에 의해 영화로 재조명되었는데 무자비한 갱단의 두목이었던 알 카포네를 감옥에 보낸 죄명은 다름 아닌 탈세였다. 영화에서 네스와 사법기관이 알 카포네를 감옥에 집어넣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비밀장부를 정리한 회계사와 장부를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는 10월 26일에 있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한 나경원 한나라당 후보와 박원순 범야권단일후보는 지난 10일 밤 SBS방송의 ‘나경원 VS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토론’에 출연해 서울시 부채 규모를 놓고 때 아닌 ‘부기논쟁’을 벌였는데 나 후보와 박 후보가 서울시 부채 규모를 놓고 각각 단식부기와 복식부기에 의한 회계처리기준을 제시하며 상이한 수치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박원순 후보가 “서울시 부채가 25조 5000억 원에 이른다”며 “오세훈 前 시장의 전시성·낭비성 예산”에 대해 비판하자 나경원 후보는 “25조는 복식부기에 의한 것이고 단식부기에 따르면 19조 가량 된다”고 이에 맞섰다. 서울시의 부채 문제는 워낙 중요한 사안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간의 설전은 토론 종반까지 이어졌는데 박원순 후보는 “나 후보가 부채계산 방식을 단식부기로 하는데 복식부기로 할 경우와 6조 차이”라며 “정부와 공기업·공공기관에는 다 복식부기로 쓰고 있는데 (서울시만)단식부기를 쓰는 이유를 알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자 나 후보는 “정부회계 기준은 단식부기”라며 “잘 모르시나 본데 서울시는 단식부기로 쓰는 것이 원칙”이라고 맞서며 말끝마다 국민의 혈세 운운하는 중앙정부나 지방정부가 과연 아직까지도 일반 가정에서나 쓰는 가계부 같은 단식부기를 쓰고 있다는 것인지, 복식부기를 쓴다면 는 어떤 이점이 있으며 이것이 부채를 줄이는데 과연 도움이 될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인류의 경제활동과 함께 시작된 부기의 역사
부기(簿記)란 장부기입(帳簿記入)의 약자로 정부·가계·기업과 같은 경제주체에서 경영활동을 통해 발생되는 재산의 증감과 자본의 증감(손익의 발생)을 계정이라는 계산형식을 이용해 화폐가치에 의해 계속적으로 기록, 계산, 정리하여 그 원인과 결과를 명백히 하는 방법을 말한다. 나일강 삼각주를 통해 수학과 천문학이 발달했던 이집트, 수메르 문명은 물론 아시리아, 중국, 그리스, 로마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부기의 역사는 인류가 고대국가를 형성한 이래 세입을 통해 국가재정을 충당했던 모든 문명권에서 조세징수나 간단한 거래에 관한 기록들이 발굴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인류 경제활동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 역사가 오래된 것이다.


특히 부기는 경제활동 가운데에서 상업의 발달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데 해양민족으로 지중해 상권을 장악했던 고대 페니키아인들과 그리스인들도 상업 활동과 거래에 대한 보고를 위해 기록을 남겼고, 노예가 재산을 관리·운영하던 로마에서는 노예들이 주인에게 보고하기 위해 부기가 발달했다. 아직 자본주의가 발달하기 이전이었던 고대와 중세시대의 부기는 단순히 거래 당사자 간의 분쟁의 소지가 있는 채권·채무 관계의 기록, 재산을 관리하고 보전하기 위한 단순한 형태의 단식부기가 일반적이었고, 손익을 계산해 이를 분배하는 데까지는 발달하지 못했었다.


르네상스 회계의 거장 루카 파치올리와 대항해시대
인류의 문명은 특정분야만 갑자기 발달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 전반이 고르게 발달하고 그것을 밑바탕으로 해 그 문명의 꽃이라 할 수 있는 거장들이 탄생하는 것인데 우리는 흔히 서구문명의 문예부흥이라고 하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거장으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같은 예술계의 거장들만을 기억하지만 이들과 동시대에 활동했던 인물 가운데 오늘날 전 세계가 사용하는 복식부기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루카 파치올리(Luca Pacioli)가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천재이긴 하지만 인류 역사에 끼친 영향만 놓고 보자면 일반 대중에겐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루카 파치올리가 끼친 영향이 결코 작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프란체스코회 수도사이자 저명한 수학자였던 파치올리는 1494년 『산술집성(Samma de Arithmetica, Geometria, Proporcioni e Preporrcionalita)』이란 저서를 통해 베니스에서 사용하고 있는 회계시스템이 장점이 많기 때문에 소개한다며 당시 베니스를 비롯한 이탈리아의 상인들이 손에서 손으로 이어져오던 복식부기를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파치올리를 통해 정리되고 체계화된 복식부기의 구조는 그로부터 50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거의 변함없이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인류의 역사에서 특히 수학 발전에 크게 기여한 나라 인도에서 탄생한 복식부기는 바그다드의 상인들을 거쳐 이탈리아의 제노바로 들어왔고, 프란체스코회 수도사이자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교분이 있었던 수학자 루카 파치올리에 의해 유럽에 전파되었다.


그는 공놀이에서 승리할 가능성이라는 문제를 놓고 게임이론적 접근을 시도한다. 이러한 접근방식은 나중에 확률과 연결되어 존 내쉬 같은 경제학자에 의해 더욱 발전된다. 루카 파치올리는 그의 저서 『산술집성』에서 당대의 수학적 지식을 집대성했다. 이 책에서 그는 상인들과 학자들이 지켜야 할 복식부기 규정을 정리했다. 초기 르네상스 시대의 ‘복식부기 보편화’는 ‘자본주의 탄생의 순간’으로 꼽힌다. 역사 서술에 있어 ‘만약에’라는 말은 없다지만 파치올리의 복식부기가 없었다면 서구의 신대륙 발견과 그로부터 시작된 신대륙으로부터 막대한 은의 유입과 이를 토대로 한 서양의 발흥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파치올리의 복식부기가 없었더라면 ‘대항해시대’는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은 이렇다.


잘 알려진 대로 대항해시대의 개막은 애초부터 서구가 의도했던 것이 아니라 이슬람세력에 의해 가로막힌 인도와의 향료 무역을 위해 신항로를 개척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당시 탐험을 빙자로 한 사기가 워낙 극성이었기 때문에 돈을 떼일까 염려하던 투자자들에게 콜럼버스는 자신은 탐험에 사용될 비용을 복식부기를 통해 정리할 것이기 때문에 자금의 사용내역을 속일 수 없다고 설득해 경비를 마련했다고 한다.

 


<그림>야코포 데 바르바리의 ‘루카 파치올리의 초상’(1495년), 이탈리아 나폴리 국립 미술관 소장.


세계에서 가장 정교한 부기로 알려진 사개송도치부법(四介松都治簿法)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복식부기를 통한 회계의 투명성이 서구사회와 비서구사회를 나누는 기준이 된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1997년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G7회담에서 당시 미국의 부통령이었던 고어가 “금속활자는 한국이 세계 최초로 발명하고 사용했지만, 인류 문화사에 영향력을 미친 것은 독일의 금속활자”라고 말했던 것처럼 우리 민족은 서양에서 복식부기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생각되는 13~14세기 보다 약 200여년 정도 앞선 고려시대 때부터 우리만의 방식으로 세계에서 가장 정교한 부기법로 알려진 사개송도치부법(四介松都治簿法)을 사용해 왔다.


KBS <역사스페셜>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다뤄지기도 했는데, 사실 그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고증 가능한 기록이 많지 않아 명확히 어느 것이 옳다고 답하긴 어렵다고 한다. 회계학계의 원로학자인 조익순 교수는 사개송도치부법이 외국에선 전래된 것이기 보다는 우리 고유의 복식부기법으로 조선시대에 생성되었을 가능성에 무게를 싣고 있는데, 조 교수의 견해에 따르면 사개송도치부법의 ‘사개’는 우리 고유의 말인 ‘사개를 물리다’에서 온 표현으로, 그 뜻은 ‘박거나 잇는 나무가 서로 꼭 물리도록 하기 위하여 나무의 끝을 들쭉날쭉 어긋나게 파낸 짜임새’를 말한다. 따라서 ‘사개’는 말이나 사리의 앞뒤 관계가 빈틈없이 딱 들어맞는 경우를 뜻하는 것으로 사개송도치부법의 셈법 역시 이처럼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고유의 복식부기법인 사개송도치부법이 어느 시대에 출현했는지 그 기원에 대해서는 이처럼 명확치는 않지만 사개송도치부법은 갑오개혁 이후 우리나라에서 은행이 설립되고 회사가 만들어진 뒤에 꾸준히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1897년에 설립된 조선은행과 한성은행, 1899년에 설립된 대한천일은행 등은 모두가 우리의 전통 부기인 사개송도치부법을 사용했다. 그러나 1903년 한성은행이, 1905년 대한천일은행 등이 서양식 부기를 도입하면서, 우리 전통부기는 점차 실무 현장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어쨌든 개성상인들이 사용했던 ‘사개송도치부법’은 복식주기의 이중성에 자본주의 관계까지 명확하게 나타냄으로써 서양부기보다 훨씬 우수한 측면이 있었다고 한다.


단식부기냐? 복식부기냐?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단식부기와 복식부기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단식부기는 법칙에 얽매이지 않고 기본적인 사항만으로 장부를 기입하는 단순한 장부 기입법으로 계정 없이 재산구성부분의 변동만을 기록하는 방식으로 손익계산의 상세한 내용을 표시하지 못한다. 그래서 소규모 기업이나 손익산출의 필요성이 없는 관공서 등에서 주로 사용해왔는데 2009년 1월 1일부터 정부부문에서는 새롭게 발생주의·복식부기 회계제도를 도입해 사용하도록 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지난 10일에 있었던 토론에서 나경원 한나라당 후보가 “잘 모르시나 본데 서울시는 단식부기로 쓰는 것이 원칙”이라고 말했던 것은 분명히 틀렸고, 사실이 아니다.


국가회계법 - 제11조(국가회계기준) ① 국가의 재정활동에서 발생하는 경제적 거래 등을 발생 사실에 따라 복식부기 방식으로 회계처리하는 데에 필요한 기준(이하 "국가회계기준"이라 한다)은 기획재정부령으로 정한다.<개정 2008.12.31>


지방재정법 - 제53조(재무회계의 결산) ① 지방자치단체의 장은 그 지방자치단체의 재정상태 및 운용결과를 명백히 하기 위하여 발생주의와 복식부기 회계원리를 기초로 하여 행정안전부장관이 정하는 회계기준에 따라 거래 사실과 경제적 실질을 반영하여 회계처리하고 재무보고서를 작성하여야 한다.


포탈사이트 네이버 지식IN에는 위 사항에 대해 2011년 2월 25일 방송통신위원회가 다음과 같이 답변한 내용이 있다.


o 도입배경
- 예산집행의 자율성 확대, 재정수요의 급증 등 재정여건의 급속한 변화에 따라 선진 재정운용체계 구축 필요
- 국가재정의 종합적·체계적 관리 및 효율적인 재정성과 관리를 위하여 발생주의· 복식부기 회계제도 도입을 추진


o 발생주의·복식부기 특징
- 발생주의는 경제적·재무적 자원의 변동이 발생하는 시점에서 거래로 인식하고 회계처리
- 복식부기는 경제적 거래나 사건이 발생할 때 자산·부채, 수익˙비용의 변동을 서로 연계시켜 동시에 기록·관리


o 도입효과
- 국가 재정의 상태와 운영성과 및 향후 재정전망 등을 종합적으로 파악하여 재정에 관한 유용한 정보를 생산· 제공할 수 있음
- 사업별 투입원가정보를 산출하여 성과 중심의 재정운영 체계를 통해 불필요한 사업을 통제할 수 있음
- 일정 시점에서 실질적인 채권·채무 산출이 가능하여 재정위험 및 재정 건전성 관리·유지가 실질적으로 가능


정부기관인 방송통신위원회의 답변을 풀어보면 단식부기와 복식부기의 장단점, 그리고 정부가 어째서 복식부기를 도입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는데 지금까지 관공서와 지방정부 등에서 사용해온 단식부기는 일정한 원리, 원칙 없이 현금의 유입과 유출이 있을 때마다 장부에 기록하는 것이고, 복식부기는 재산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거래를 파악함으로써 재산이 변화한 원인과 그에 따른 결과를 동시에 기록한다는 차이가 있다.


단식부기의 대표적 사례인 가계부엔 일반적으로 일자, 적요, 지출이나 수입금액, 계, 잔액 같은 항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은 돈이 나가면 무조건 지출, 돈이 들어오면 수입으로 처리해서 가계부의 잔액과 보유하고 있는 현금을 맞추도록 되어 있는데 이 방식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매우 단순해서 현금의 수입, 지출과 현금잔액 정도뿐이다. 단식부기는 채권, 채무, 재산, 물품관리가 복식부기방법에 의한 것처럼 하나의 표로 연계 집합되지 못하기 때문에 재정 상태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실사방법을 동원할 수밖에 없는 불편한 제도로 한 마디로 이야기해서 지방정부나 관공서가 단식부기 같이 주먹구구 방식으로는 채무상태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에 비해, 복식부기에서는 현금의 지출과 함께 지출원인이 즉, 재산변동의 원인과 결과가 모두 나타나도록 되어 있다. 복식부기는 거래형태를 표현하는 계정과목을 설정하도록 되어 있는데 모든 거래는 자산, 부채, 자본, 수익, 비용이라는 5개의 계정과목을 이용하여 차변과 대변에 기입하고, 이렇게 해서 기록된 계정과목별 차·대변거래를 집계함으로써 대차대조표와 손익계산서가 작성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 말도 어렵다면 한 마디로 말해 복식부기제도는 오랜 세월을 거쳐 인정된 자본주의 경제사회의 회계관리수단으로 지난 15세기에 출현한 이래 동서양을 막론하고 복식부기가 불변토록 사용되어 온 까닭은 복식부기가 지닌 ‘자기검증기능’ 때문이다.


복식이냐, 단식이냐는 핵심이 아닐지도 모른다
국가회계에 복식부기가 도입된 까닭은 IMF 외한위기라는 초유의 경제난을 맞이하며 출범한 국민의 정부가 당시 최대 현안이었던 경제문제의 해결차원에서 민간기업 부문에서는 경영의 투명성과 경쟁력 강화를, 국가재정관리 부문에서는 부정부패와 비능률의 추방을 위해 복식부기 도입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결과다. 사실 정부와 공공기관에 복식부기를 도입하려는 시도는 이전에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식부기가 쉽게 정착되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는 복식부기에 대한 담당 공무원들의 인식 부족 때문이었다. 복식부기 도입을 꺼려한 정부 내 공무원들의 논리는 ‘정부부문은 영리를 추구하는 사기업과 달라서 대차대조표와 손익계산서가 필요 없으며, 정부와 자치단체의 회계실무진에 복식부기 전문가가 없기에 이들을 재교육하고 시스템을 구축하는데 드는 비용이 엄청나서 도입의 실익이 적다’는 이유로 그동안 거부해오던 것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당시 정부의 판단으로 도입된 것이었다.


복식부기 도입 당시의 효과에 대해서는 앞서의 답변에도 나와 있지만 “국가재정에 관한 업무를 능률적으로 수행하고, 재정의 투명성을 확보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인 헌법이었다던 독일 바이마르헌법이 히틀러의 출현을 제지할 수 없었던 것처럼 복식부기를 도입한다고 해서 저절로 국가재정에 관한 업무들이 능률적으로 수행되고, 재정의 투명성이 확보되는 것 또한 아니란 것이다. 복식부기는 회계정보를 산출하는 하나의 방법, 즉 수단에 불과할 뿐이지 이것이 곧 회계나 회계정보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복식부기를 도입한 까닭은 정부회계에서 사용하는 단식부기로는 제대로 된 회계정보가 나올 수 없고, 회계투명성을 보장받을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을 개선하자는 것이지 단순히 복식부기를 도입하는 것만으로 이런 목적들이 저절로 성취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음의 사례를 보자. 사실 서울시 부채 문제가 논란의 원인이 되었던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지난 2010년 서울시의회 김정태 의원은 시정 질의에 앞서 보도자료를 내고 “작년 말 현재 서울시와 투자기관 부채 규모는 서울시가 발표한 19조5천333억 원이 아닌 25조754억 원”이라며 서울시가 5조5천421억 원을 의도적으로 축소·조작했다는 의혹을 제기한 적이 있는데 그때도 서울시는 해명자료를 배포하면서 “우리는 단식부기 방식으로 산정한 부채 규모를 발표했고, 김 의원이 인용한 것은 복식부기 방식으로 작성한 재무보고서여서 다른 숫자가 나온 것”이라며 반박했다. 서울시는 “단식부기는 채무 불이행이 재정 위험으로 이어지는 외부 차입금만을 부채로 계상하는데 비해 복식부기는 임대보증금과 퇴직급여 충당금 등 재정위험이 없는 비차입금이 포함된 더 넓은 개념”이라고 설명했고 “단식부기에 의한 부채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 재무위험 관리에서 실효성이 크다”며 “지방재정법 시행령 제108조에서도 채무관리 범위를 지방채 등 외부차입금만으로 규정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해 행정안전부 관계자 역시 “지방자치단체의 재정 위험을 따질 때는 직접적 지급과 관련된 개념인 단식부기상 채무를 기준으로 하는 게 적합하다”며 서울시의 편을 들어줬다.


그렇다면 지방재정법 시행령 제108조를 보자.


제108조(채무관리사무의 범위) 법 제87조 제3항의 규정에 의하여 관리하여야 할 지방자치단체의 채무의 범위는 다음 각 호와 같다.
1. 지방채증권
2. 차입금
3. 채무부담행위
4. 보증채무부담행위


시행령 제108조는 지방재정법 제87조에서 정한 방법으로 지방자치단체가 관리해야 할 채무의 범위를 규정하고 있는데, 다시 말해 복식부기로 만들어진 회계상 서울시 부채는 25조원이 맞지만 서울시가 시행령에 따라 관리해야 할 채무는 19조원이 맞는 셈이다(법률 용어에 따르면 서울시 부채는 24조 9,943억 원이고, 서울시의 채무는 19조 5,318억 원). 문제는 서울시가 시행령에 따라 관리하는 채무의 범위가 이것일 뿐이지 이것이 단식부기에 의한 건 아니란 말이다.


서울시는 처음부터 복식부기냐 단식부기냐는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인데, 서울시의 이 같은 답변은 마치 서울시가 단식부기를 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 아닌 오해를 하도록 나경원 후보를 부추긴 셈이 되었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단식부기는 다만 현금의 수입과 지출, 그리고 현재 잔고가 얼마인지 정도의 정보만을 제공해주는 것일 뿐 부채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는 것인데 서울시는 어째서 이런 이상한 변명을 들고 나왔을까? 그리고 이를 받아서 보도한 언론사들은 단순히 행정안전부 관계자의 법률 해석만을 놓고 누가 누구의 손을 들어주었다는 식으로만 보도해 버린 것인지 잘 이해할 수 없다.


처음 저 사단이 일어났을 때 언론사들은 자신들이 심정적으로 지지하는 후보가 누구냐와 상관없이 이런 맥을 정확히 짚어 보도했더라면 나경원·박원순의 복식부기 논쟁 같이 우스꽝스럽고 본질에서 벗어난 논쟁은 애초에 빚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덧붙이자면 나경원 후보는 법률가(판사) 출신이긴 하지만 정치인으로서 서울시장직을 수행하겠다고 나선 후보로서 지금 시민이 원하는 서울 시장은 법률적 해석을 내리는 법률가가 아니라 시장으로서 서울시의 건전한 재정 운영을 통해 시민들의 삶의 질을 높여줄 사람을 찾고 있다는 점을 유념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러나 그 사이 언론이 정신을 차렸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어 보인다. 이 문제의 정확한 맥을 정확히 짚어준 것은 언론이 아니라 도리어 이 문제에 관심이 많은 일반 네티즌들이었다.


진짜 문제는 단식부기냐, 복식부기냐가 아닌 우리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들의 재정상황을 아직도 낙관적으로 인식하는 공무원들과 정부, 집권여당의 태도에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 최규석 | 이미지프레임(길찾기) | 2004



테르미도르와 순정만화

"김혜린!"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를 이야기해야 하는데 왜 저자도 아닌 "김혜린"인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현대적인 만화의 등장을 사람들은 1909년 6월 2일에 창간된 《대한민보》에 실린 이도영의 한칸 만화를 꼽는다. 그로부터 한동안 한국엔 만화가 없었다. 일제강점기 하에서 여유자적(?)하게 만화를 그릴 수 있는 아니, 그것을 출판할 수 있는 여력이 되었을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그런 중에 어째서 만화가 없었겠는가? 하지만 그 기간의 우리 민족의 모든 예술이 굴절되었듯 만화 역시 굴절 혹은 단절의 길을 걸어야 했다.

우리 만화가 다시 일선에 등장하게 된 것은 해방 이후 "라이파이"의 작가 김용환 선생이 한국 최초의 만화 전문 잡지《만화행진》을 1948년에 발행하면서부터였다. 만약 이것을 기점으로 한다면 한국 만화는 56년 만에 현재의 위치까지 성장한 것이다.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부분이 그러하듯 비약 혹은 도약이라고 할 수도 있다. 만화만큼 남녀간의 취향 분화가 확실한 장르도 드물다. 특히나 일본 만화의 짙은 그늘 속에 있는 한국 만화의 대중적 취향을 고려할 때 이런 남녀간의 취향 분화는 사실 전세계적인 것이라기 보다 한국적 혹은 일본적 상황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든 한국 사회에서 만화는 그 시대적 한계나 경제적 어려움을 고려해본다면 놀라울 만한 성장세를 기록하고 있었다.


내가 "길찾기"라는 출판사에 대해 처음 머리 속에 각인할 수 있었던 것은 김혜린의 "테르미도르"가 이곳에 복간되었다는 기사를 통한 것이었다. 그런 뒤에 간간히 들려오는 소식 중 또 한 가지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라크전과 관련해 먼저 인터넷상으로 주목받았던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가 다시 "길찾기"를 통해 발간되었다는 것이다. 김혜린의 "테르미도르"는 프랑스 대혁명을 역사적 배경으로 차용한 작품으로 우리 만화사에 기록되어야 할 작품 목록에 분명히 올라가야 할 작품이다. 작품 자체의 질도 질이거니와 이 작품이 처음 수록된 "르네상스"라는 잡지의 역사적 의미 역시 중요하다. 왜냐하면 1988년 우리나라 최초의 순정만화 전문지로서 처음 등장한 잡지 창간호부터 수록되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김혜린은 당시 김진(바람의 나라) 등과 더불어 그간 순정 만화의 영역을 대하 서사 장르까지 확장시켰다.


한국 만화가 가야하는 머나먼 길

1958년 무렵 미국의 원조 경제에서 갓 벗어나기 시작한 한국사회의 경제 사정은 극도로 악화되었고, 만화는 출판 유통망을 떠나 대본소 체제에 진입하게 된다. 만화는 사 보는 것이 아니라 빌려보는 전형적인 출판물이 된다. 이것은 대본소용 만화, 무협지를 탄생시켜 만화의 예술성을 극도로 억압하게 된다. 만화의 생명은 대본소의 순환 구조와 맞물리게 되어 점점 짧아지게 되고, 만화 작가들은 작가가 아니라 만화공장의 공장장이 된다. 그들은 대본소에 착취당하면서 동시에 그 밑의 문하생이라 불리는 하도급을 둔 착취자가 되었다. 이런 경제적 어려움에 연이어 군사쿠테타로 들어선 1961년 박정희 독재정권은 만화에 대한 사전 검열을 시작한다. 가뜩이나 열악한 한국 만화계를 더욱 짓눌러 온 것은 군사독재정권이 그들 스스로의 정당성 없는 권력에 대한 반대급부로서 사회에 대해 벌이는 치졸한 도덕극이 지닌 과장된 무게였다. 이런 상황에서 만화는 결코 예술이 될 수 없었고, 어린애들이나 보는 유치한 것이었다.


만화가 대본소 시스템에서 다시 서점으로 돌아오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민주화 과정과 맞물려 있다는 것은 주목해보아야 할 상황이다. 대중가요가 사전 검열 철폐를 위해 투쟁한 것처럼 만화 역시 대본소 독점체제를 깨뜨리기 위해 많은 만화가들이 싸웠다. 거기에 가장 강력한 힘을 보태준 이들은 역시 만화를 사랑하는 독자들이었고, 그렇게 만화를 사랑하고 고민한 세대가 바로 "공룡둘리에 대한 오마주"를 그린 "최규석" 세대다. 물론 얼마전 이현세 파동 등으로 드러나듯 아직도 우리 만화가 이런 사회적 금기와 편견을 벗어나 가야할 길은 멀고 험난하다. 동시에 만화에 대한 가장 든든한 지지층이자 동시에 어려서는 대본소 만화 보기에 익숙했고, 어느 정도 자라서는 도서 대여점에서 만화를 빌려보던, 그리고 자라서는 디지털 스캐닝을 통한 인터넷상의 만화 보기에 익숙한 독자들이 얼마나 만화를 직접 소장하고 보려드는가? 혹은 보게 만드는가하는 문제가 놓여있다. 그것은 만화만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 거의 모든 예술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오마주 - 짧지만 위대한 전통에 대한 경배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를 처음 접한 사람은 드물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인터넷상에 돌아다니던 최규석의 이 단편 만화를 보고 놀라운 재능을 지닌 신예작가의 등장에 대해 찬사를 보냈고, 아동물의 전형적인 캐릭터성을 지녔던 둘리란 존재의 확장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 만화를 보고 나도 역시 그런 점에서 대단히 놀랐고, 여러 면에서 기뻤다. 우선 우리 사회에 드디어 오마주를 바칠 만한 전통 혹은 사회 전반에 두루 알려진 문화적 코드가 생겨났다는 점에서 기뻤고, 패러디물인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에 대해 이 캐릭터의 원저작권자인 작가 김수정 선생의 반응이 또한 기뻤다. 김수정 선생이 "둘리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나오는 것은 만화의 다양성을 감안할 때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반가워했다는 기사를 읽고, 나는 다시금 그의 작가성을 인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왜 이런 말을 하는가에 대해 생각해보자. 오마주와 패러디는 사실 기법상으로는 그다지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두 가지 모두 "베낀다"는 행위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은 끊임없이 알프레드 히치콕을 베낀다. 퀜틴 타란티노는 오우삼을 베낀다. 그들은 각기 자신이 존경하는 선배 예술가들에 대해 경의를 표하기 위해 베낀다. 오마주가 경의를 표하기 위한 것이라면 패러디는 풍자를 위해 베낀다. 선배된 입장에서 후배의 오마주란 것은 말만으로도 가슴 설레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패러디든, 오마주든 본래 자신이 만들어냈던 작품의 아우라에 변형을 가하는 행위이며 후배로서는 오마주라 하더라도 선배 입장에선 욕보이는 행위로 보일 수도 있다. 그 비근한 예로 "서태지"를 패러디한 음치 가수의 음반과 비디오물 사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예술가는 언제라도 오마주의 대상이자 동시에 패러디의 대상이 될 수도 있으며 그것이 설령 기분 나쁜 일이라 할지라도 참아줄 줄 알아야 한다. 그 이유는 본인 자신에게도 고스란히 해당되는 바로 예술 창작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이 오마주가 되었든, 패러디가 되었든 표절이 아니라면 그 자체로 그 대상이 된 예술가 혹은 작품이 이미 사회전반적으로 통용되는 하나의 아이콘이 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오마주는 논외로 하더라도, 패러디의 기본은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대상을 상대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 김수정은 일종의 아동물로 구분되는 "둘리"를 통해 대중적인 만화작가로 널리 알려졌으면서 동시에 둘리 캐릭터를 통해 독자(한국)적인 애니메이션 창작과 캐릭터 산업 분야를 개척한 이 분야의 독보적인 작가이자 중요한 장인이다. 그에 대해 후배 작가가 보내는 오마주는 짧지만 위대한 우리 만화계의 전통에 대한 경배이기도 하다. 그것을 넉넉하게 받아들인 김수정 선생의 자세를 보면 역시 경배를 보낼 만하다.






최규석 - 슬픈 먹이사슬의 뫼비우스

많은 이들이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를 처음 구입하게 된 동기가 이 단편 만화의 뒷 이야기들을 듣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고길동의 무덤을 베고 누운 둘리가 공룡화된 모습으로 표현된 이 만화의 엔딩은 정말 감동적이었다. 감동적이었던 만큼 후속 이야기를 기다리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집엔 그 뒷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지 않다.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는 작가 최규석의 여러 단편들을 모아놓은 단편집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너무 아쉬워할 것은 없다. 나머지 단편들 역시 놓치면 아쉬울 만큼 뛰어난 수준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문화계 전반에 걸쳐 드러나는 문제 중 하나는 젊은 작가들의 조로현상이다. 지난 1990년대 이후 한국 문화계를 대표한 장르가 된 영화 부문은 복합상영관과 대자본의 결합으로 영화 장르의 급격한 산업화와 장르화 속에서 젊은 작가들의 창의력이 지나치게 상업화되고 있다는 아쉬움을 남기고 있고, 오랫동안 한국 예술계의 정점에 서 있던 문학은 그 활력을 잃고 있다. 젊은 작가들은 손쉽게 타협하거나 아예 대결할 의지 자체를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만화계 역시 마찬가지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 시점에서 최규석의 단편 만화들은 비록 때로는 너무 안이하게 해피엔딩으로 종결짓거나 거친 안목을 정제하지 못한 체 드러내고 있다는 지적을 받을 수는 있겠으나 젊은 작가의 당연한 권리인 "창조"와 "도전", "비판" 정신을 담아내고 있다.


80년대적 향수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에서 익히 드러낸 바 있는 솜씨, 교묘한 비틀기와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 정신은 2002년 동아/엘지 국제만화전의 극화부문 당선작인 <콜라맨>에서 손쉽게 해피엔딩적인 결말로 다가섰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여전히 날카롭게 살아 있고, 그의 데뷔작인 <솔잎>에서는 아직 그만의 그림체가 완성되기 이전의 박흥용과 오세영의 그림체를 살짝 엿볼 수 있다. <솔잎>에는 이미 작가가 앞으로 걸어가고 싶은 작품 세계가 어떤 것인지 명확하진 않지만 맹아들이 숨겨져 있다. 그는 반전을 즐기는 작가이자 동시에 세상에 대해 진지한 말걸기를 시도하고 싶어한다. 이런 류의 작품에는 우리가 만화에 대해 그간 지녀왔던 적지않은 편견들, 가령 순정만화 vs 활극만화의 구도나 예술만화 vs 대중만화의 경계가 사실 아무 것도 아니란 것을 깨우쳐 준다. 결국, 예술은 장르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이다. 그것을 창출해 내는 작가가 얼마나 많은 고민을, 얼마나 철저하게 하였는가? 그의 장인적 기술과 예술가적 재능이 이것을 얼마나 뒷받침해주고 있는가 하는 차이일 뿐이다.


최규석은 현실에 대해 날카로운 풍자정신을 가지고 있다. 이는 근래 어느 장르의 예술가들도 지니지 못한 최규석만의 뛰어난 장점이다. 그는 자본주의라는 슬픈 먹이사슬에서는 그 어떤 존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과거에서 미래로 타임워프한 공룡, 아이들에게는 자유로운 상상의 세계, 원하는 소원이라면 무엇이든 이루어줄 수 있었던 히어로 둘리조차도 나이 40에 이르러 "주민증"도 없는, 외국인 노동자처럼 이 땅에서 소외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그의 그림체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차 원숙해지고 그만의 것으로 발전해 갈 것이다. 거친 러프 스케치 풍의 연필 데생으로 음영을 주는 그의 그림체도 매력적이지만, 역시 그만의 다양한 실험을 할 것이란 사실을 믿는다. 그의 드라마투르기 역시 지금의 간결하고 힘 있는 구조란 장점을 살리면서 점차 복잡해지고 더욱 많은 사연들을 담아낼 것이다. 우리는 지금 앞으로 매우 중요해질 한 작가의 초반부를 함께 하고 있다. 그 사실이 앞으로 더욱 기뻐할 수 있는 일이 되길 바랄 뿐이다.




 * 나의 걱정에 아랑곳없이 아니 사실은 이 리뷰를 쓴 것이 이미 너무 오래 전 일이라 최규석은 나의 염려를 한낱 기우로 만들어버린 채 무럭무럭(?) 훌륭한 작가로 자리잡았다. ^^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신고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살바도르 (Salvador)
감독 : 올리버 스톤
출연 : 제임스 우즈
제작 : 1986 영국, 미국, 122분

올리버 스톤의 실질적 감독 데뷔작 <살바도르>

올리버 스톤의 감독 데뷔작은 1981년의 공포영화 <악마의 손(The Hand)>이었지만, 그를 할리우드의 이단아, 숨겨진 뇌관으로 만든 데뷔작은 <살바도르>였다. 이 영화가 중요한 것은 그가 앞으로 펼쳐나갈 작업들과 그의 생각들을 엿볼 수 있는 문제작이었기 때문이다. 올리버 스톤은 미국 역사에서 가장 드러내고 싶지 않은 부분들을 조망함으로써 가장 미국적인 감독이자, 미국적이지 않은 감독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올리버 스톤은 미국 현대사의 명암을 정공법으로 파고드는 감독으로 정평이 나 있지만, 그가 처음부터 그런 감독은 아니었다. 그의 데뷔작인 <악마의 손>은 컬트적인 구성이 돋보이긴 했으나 소수의 마니아들에게나 인정  받는 작품이었고, 그는 일찍 감독 데뷔를 했으나 이후엔 감독보다는 시나리오 작가로 더 명성을 얻었다. 그는 감독상을 받기 전에 <미드나잇 익스프레스(1978)>로 먼저 각본상을 받았다.


이후 브라이언 드 팔마와 <스카페이스>, 마이클 치미노와 <이어 오브 드라곤> 등을 촬영하며 전형적인 장르영화에 충실한 각본을 썼다. 이 무렵 그리고 이후에 다소 약화되기는 하지만 그의 작품들은 인종차별적인 묘사와 지나친 폭력으로 많은 비판을 받아 왔고, <미드나잇 익스프레스>는 한 때 한국에서도 영화를 볼 수 있었던 이들에게 한국적 인권 상황을 생각하게 해 많은 인기를 얻었으나 지금은 인종적 편견을 드러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올리버 스톤 자신도
“난 인종차별주의자였고 국수주의자였으며 총을 숭배했다”며 당시 자신의 문제점을 시인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그의 새로운 감독 데뷔작(?)이 된 <살바도르>는 그런 과도기적 상황에 놓인 자신의 처지를 종군 기자 리처드 보일(제임스 우즈)에 투사해내고 있는 작품인지도 모르겠다. 보일은 한때는 그나마 잘 나가던 카메라 기자였고, 영화 <킬링필드>의 주인공이기도 한 시드니 쉔버그와 함께 캄보디아 취재 기자로 나선 적도 있었다. 그러나 타고난 냉소와 좌충우돌하는 기질 때문에 그를 고용해주는 통신사 하나 없이 시시껄렁한 생활을 해나가고 있다. 아내는 넌덜머리나는 결혼 생활을 끝장내버리고, 그는 밀린 아파트 월세에 쪼들리다 못해 통신사에 전화를 해대며 취재거리를 달라고 애걸복걸한다.


엘살바도르 - 바나나공화국에서 벌어진 대량
학살

결국 리처드 보일은 카메라 한 대를 달랑 들고 내전이 한창인 엘살바도르에 간다. 이 영화는 엘살바도르 내전(1980-81년) 당시의 종군 기자였던 보일의 자서전적 기록을 재구성한 영화다. DVD에는 그의 실제 회고 일부가 담겨 있지만 아쉽게도 자막이 없다. 영화 초반의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주된 배경이 되는 엘살바도르는 어떤 나라인가.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엘살바도르는 1856년 독립하지만, 시몬 볼리바르가 꿈꾸었던 라틴아메리카 연방공화국의 꿈은 미국과 같은 새로운 강대국의 출현을 염려한 영국과 미국, 그리고 나머지 유럽 제국들의 방해, 내부적으로는 이미 기득권을 확보하고 있던 지주계급의 반대로 무산되고 만다. 특히 미국은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미국의 우선권을 주장하며 라틴 아메리카 지역에 대한 경제적, 정치적 종속을 강화해나간다.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약소국들을 일컬어 '
바나나공화국'이란 말로 부르는 것은 유나이티드 프루츠와 같은 미국계 다국적 기업이 한 나라의 경제와 사회를 좌우할 수 있는 상황에 대한 냉소 섞인 풍자이다. 미국과 이해를 같이하는 소수 지주계급은 부를 축적하여 전국토의 56%를 14개 문벌에서 차지할 정도로 엘살바도르의 빈부 차는 극심했다. 결국 1932년 농민을 이끌고 파라분도 마르티는 반란을 일으키지만 결과는 농민군 3만 명의 참살로 끝나고 만다. 오늘날 라틴 아메리카의 게릴라 집단의 명칭은 대개 그 지역 출신으로 과거 반란을 주모했던 혁명가들의 이름에서 유래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들의 저항, 아니 이들의 고통이 얼마나 오랜 역사적 연원을 지니는지 알 수 있다.


-> FMLN(Frente Farabundo Marti de Liberación Nacional)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 해방 전선은 1980년 8월에 4개의 게릴라가 모여 결성한 무장 혁명 조직으로 1980년부터 1992년까지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은 우익 쿠데타세력에 맞섰던 게릴라 저항조직이다. UN의 중재로 평화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엘살바도르 내전은 18만명의 희생자를 냈다. 지난 2009년 FMLN은 항쟁 20년만에 엘살바도르 대선에서 승리하여 평화적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라틴아메리카 민중들 전체에 커다란 자극을 준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난다. 쿠바가 소모사 정권을 전복시키는 혁명에 성공했고, 베트남이 거대한 코끼리인 미국의 밑창에 구멍을 내는 승리를 거두었고, 이란에서는 팔레비 정권이 강력한 비밀경찰과 미국의 지원을 물리치고,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을 성공시킨다. 이런 연이은 혁명의 성공은 라틴아메리카 민중들에게 큰 자극이 되었고, 1970년대부터 엘살바도르 안에서도 군부독재에 대한 좌익 게릴라 조직의 저항이 시작된다. 그리고 1980년 분열되어 있던 게릴라 조직은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FMLN)으로 통합되기에 이르렀다. 같은 해 3월 로메로 대주교 암살사건으로 촉발된 엘살바도르 내전은 더욱 극렬한 상황으로 치닫는다. FMLN은 1983년에 이르러서는 엘살바도르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거대 세력으로 거듭나지만 그 와중에 엘살바도르 군부는 '
죽음의 군단'이란 퇴역군인과 치안경찰 등 우익 민병대를 조직해 무수한 민간인들을 학살한다.




기자 정신과 보여주
고 싶은 것만 보여주는 미국 언론

영화는 그런 시대 배경 속에 있으며, 그중에서도 FMLN의 결성과 로메로 주교의 암살, 새로운 람보 - 레이건의 등장이란 극적인 순간의 엘살바도르를 다룬다. 영화 속에서 제임스 우즈는 그의 연기사상 거의 최고의 연기 솜씨를 보여주는데, 그 자신이 리처드 보일이 아닐까 싶을 만큼 대단했다. 영화는 미국의 라틴아메리카의 소국 엘살바도르를 어떻게 실질적으로 지배하는가를 할리우드 영화치고는 대단하단 생각이 들만큼 잘 지적해내고 있다. 비판의 화살은 단지 정치인들에게만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거기엔 한때 우리 사회에서 대통령을 하야시킬 만큼 대담한 비판정신과 공정성으로 찬탄의 대상이 되었던 미국의 언론이 어떤 방식으로 교묘하게 자본의 검열을 받는가를 살필 수 있다.


미국은 베트남전의 패배를 군사적 패배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베트남전의 패배를 내부의 전쟁에서 패한 것, 언론과의 전쟁에서 패한 것, 고도의 정치전, 심리전에서 패배한 것으로 생각한다. 베트남에서의 패배를 군사적인 패배로 생각지 않는 까닭은 미국이 세계 도처의 전쟁에 참전한 이래 거듭되는 그들만의 산술방식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기실 이런 전통은 인디언 헤드 헌터식 산술법이란 지극히 미국적인 산술법에 의한 것이다. 예를 들어 서부영화에 등장하는 인디언 헤드헌터들의 방식, 인디언 머리 가죽을 벗겨오면 가죽 당 얼마씩 달러를 지불하는 것 말이다. 베트남전에서 베트콩의 귀를 잘라 수집하는 것도 어쩌면 이런 전통에서 유래한 것이다. 미국은 전사자의 시체 수로 전투의 승리를 가늠한다. 미군 전사자보다 많은 베트콩을 죽인 전투라면 그 전투는 승리한 것이고, 이런 식의 전투에서 미국은 단 한 차례도 패배한 적이 없었다.


보일은 엘살바도르의 진실을 파헤치고자 하지만, 베트남전 이후 새로운 보도 정책과 검열 방식을 채택한 미국에서는 취재는 가능할지 모르나 이를 보도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 되었다. 종군기자들의 사망이 부지기수로 늘어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의 일이다. 이제 미군을 수행하는 종군기자들은 전쟁에서 가장 먼저 타깃이 되거나 에어컨디셔너에 의해 기온이 조절되는 안락한 브리핑 룸에서 미군 보도통제관이 전해주는 뉴스만을 앵무새처럼 되뇌는 존재가 되었다. 그 결과 미국의 시청자들은 안방에서 편안하게 매번 최고의 민간인 학살 수치를 갱신하는 미군의 전투 수행 방식을 역사상 가장 깨끗하고, 과학적인 첨단 전쟁으로 인식하게 된다. 미군은 그네들이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줌으로써 남북전쟁 당시 브로디의 사진처럼 전쟁은 일어났지만 단 한 명의 전사자 시신도 발견할 수 없는 화면을 본다. 영화 속에서 보일은 미 대사관에서 벌어지는 파티 석상에서 이런 기자들을 한껏 조롱한다. 그러나 보일 자신도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며 우익 지도자에게 밉보여 자신의 친구인 수녀일행이 강간당하고, 살해당하는 일을 겪는다.


엘살바도르와 광주, 1980년

나는 이 영화를 지난 1988년에 보았다. 87년의 후폭풍을 겪고, 88올림픽을 앞둔 노태우 정권은 민주화된 상징으로 코스타가브라스(Constantin Costa-Gavras)의 영화 <Z>와 올리버 스톤의 <살바도르>를 극장에서 개봉할 수 있게 해주었다. 1980년 5.18 광주로부터 8년 뒤에 다시 보는 1980년 엘살바도르의 상황은 광주라는 고립된 공간에서 최후의, 최후까지 저항했던 사람들을 떠올리게 해주었다. 나는 극장의 어두운 공간에서 엘살바도르가 아니라 광주를 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죽은 수녀들의 시체가 어둠 속에서, 흙 속에서 발굴되어 나오는 장면을 보며, 나는 욕지기를 느꼈고, 광주 인근의 어느 이름 없는 둔덕 속에 묻혀있을 시신들이 떠올랐었다. 레이건의 등장이 전혀 다른 새로운 미국의 출현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트루먼 대통령 이래 지속되어 온 미국의 대외정책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일이었고, 1980년의 봄은 그런 미국의 저강도전쟁이란 정책의 변화 속에서 이루어진 소리 없는(?) 학살들이었다. 레이건의 등장과 함께 전 세계 곳곳에서 수많은 전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런 사실들은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한 전쟁이고, 학살이었으며, 단지 그 나라 독재정권이 한 짓들이었다. 미국은 베트남전 이래 직접 개입하는 방식 대신 그들의 하수인을 부리는 방식을 택했다.


리처드 보일은 엘살바도르에서 한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그녀와 결혼하여 살바도르를 빠져나오게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미국에 도달한 직후 국경감시대에 의해 그 여인은 다시 엘살바도르로 되돌려 보내진다. 그녀를 실고 떠나는 국경감시대 차량을 향해 보일은 외친다.
“너희들은 되돌려 보낸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모른다.”고 말이다. 이 영화 역시 올리버 스톤의 작품들에 대해 쏟아지는 일반적인(인종 편견적이라거나, 미국 비판이지만 그것은 또 다른 이미지의 미국, 인권국가, 자유로운 미국에 대한 이미지를 증대시키는데 이바지한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하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고 있는 우리 영화인들 혹은 감상자들에게 되묻고 싶은 것이 있다. 그래, 우리는 이 영화보다 조금 더 나은 영화를 만들었는가? 만들고 있는가? 하고.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신고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이전버튼 1 이전버튼